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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강의록 '미술강좌' 2019.7.3 우양미술관

성인교양강좌<201973일 우양미술관 지하1층 강의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관련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yMUJB5aFvdo#action=share

백남준스타일 <랜덤 엑세스> 뒤죽박죽 비예측 2원론적 2차원을 해체시키는 융합적 5차원 방식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그리고 20세기 전체를 뒤샹의 시대라 부른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백남준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진중권 https://seulsong.tistory.com/44

<서론> [김형순(?) 오마이뉴스 프리랜서 미술부 기자(2004-2019] seulsong@nate.com

<백남준 사진앨범> 230장 정도 [백남준] 예술의 본질, 해프닝이 일어나는 것 <해프닝 아티스트>

오늘날의 미술이 현대미술 혹은 동시대 미술로 존재하려면 이번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보듯 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일종의 해프닝아트인데 백남준은 70년대 예술가의 삶을 살펴보면 90%(무목적적인) 해프닝이었다. 물론 1974년 그 중간에 너무나 유명한 TV부처를 발명하기는 했다. 1976년에는 그의 예술적 파트너가 진짜로 뉴욕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것은 그가 70년대 치열하게 해프닝아트에 전념했다는 반증이다. 역으로 백남준을 더 유명한 세계적 작가. https://seulsong.tistory.com/449 https://seulsong.tistory.com/447<사진1> 백남준 19살 때 사진19517월 일본 동경 근처 가라쿠마. 그는 당시가 625가 터진 후라 일본에 있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곳은 유서 깊은 사찰과 사당, 일본 전통 건축물과 문화유산 많다고. 백남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예민한 시기인 만 17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백남준] 해프닝, 사건 터지지 않으면 비예술

진정한 예술은 왜 테러리즘처럼 보이는가.예술의 테러리즘은 당연히 평화적인 것이죠.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예술의 본질은 뭔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프닝이다. 해프닝이 없는 예술, 사건이 터지..

seulsong.tistory.com

<사진2> 아래 백남준 우양미술관 백남준의 '기마민족' 1995년 작 (한국이 정보시대 최고 선두주자로 전망) 나는 한국인이 기마민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건 지하철 할머니 할아버지들 지하철 놓치지 않으려고 달려가는 모습은 확실하게 몽골계 기마민족의 단면이다. <BTS>

https://www.telegraph.co.uk/culture/art/art-features/9609387/Nam-June-Paik-The-man-who-inspired-Gangnam-Style.html?fbclid=IwAR2jENCR5MaV3wuq4oj6PdYpfmJupFUNIJudi03IRRPltlECB1PRvuRFdlM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 사람들하고 우리들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3천 년 전 우리 것을 몽고 사람들이 보존하고 있어요. 난 공자, 노자, 이런 사람들 이전을 좋아해요. 신석기시대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역사가 엉터리입니다. 대부분 읽고 생각해볼 가치가 없는 쓰레기뿐입니다" 백남준 (김용옥, <석도화론> 중에서), 2001

- 지난해 201210, 영국 '텔레그래프' 지가 '강남스타일 영감의 원천은 백남준'이라고 썼던데요.

"(김홍희 백남준문화재단대표) 싸이가 생긴 것도 꼭 몽골 사람을 닮았지만, 그 말춤이 기마민족의 어떤 상징성 가지고 있어요. 사실 '백남준문화재단'에서 지난 129일 추모행 사를 열 때 싸이 공연 연결하려고 했어요. 백남준의 기마사상, 몽골문화코드를 싸이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사진3> [2000년 백남준 생존에 뉴욕 구겐하임에서 큰 축제를 2019년 거의 20년 만에 또 한 번 큰 축제의 바람을 일으키려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백남준 전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주기에 '사진전'외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현대미술관이라는 자격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이수경 박사기획

백남준전, '테이트 모던'에서 20191017일 개막 [NAM JUNE PAIK: THE FUTURE IS NOW] https://seulsong.tistory.com/396 https://nam-june-paik13.tistory.com/4

<사진3> 과거의 미술사를 모르고 어떻게 미래의 미술을 창조할 수 있는가? 일제 강점기 식민지 시대에 독립운동사를 우리가 잘 모르듯이 백남준에 대해서 미술인들마저 잘 모르는 것 같다. 게다가 그는 유래가 없는 비디오아트의 창시자가 아닌가. 한국 미술대학에서 백남준 강의를 해야 하는 이유다.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1970년부터 백남준 강의(비디오아트)를 해오고 있다. 장 폴 파르지(Jean-Paul Fargier)에 교수가 담당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은퇴해서 다른 교수가 하겠죠

<사진4>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전문 출판사 타셴(독일)에서 백남준 책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현존 작가도 아니고 작고한 작가인데 말이다. 백남준 책이 나오면 지금까지 타셴에서 만든 이집트 고대미술부터 뒤샹까지 모든 서양미술사가 다 뭉개지기 때문인가. 이래저래 백남준 1963년 첫 전시에서 서양의 미술판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후 서구미술인들 그를 다르기 힘들게 된 모양이다. 그야말로 세계미술계의 '앙팡 테리블'이 되다.

<사진5> 우리 모두는 백남준 은하계에 살고 있다(?) - 이영철 초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페북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결론 백남준은 인터넷의 예술적 아이디어를 제공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M2CNFCQm86w

<사진6> 서울 삼성동 봉은사 원명 주지스님 <여러분 손과 주머니에 백남준이 계십니다> 봉은사 원명 스님 봉은사의 자랑은 추사와 백남준을 모시고 있다는 것 지금은 모든 것이 미디어아트 시대 여러분 속에 뭔가 하나씩 가지고 계신 것 그 속에 백남준이 들어가 있다는 덕담을 남겼다. 20191.29 백남준 13회 추모제 https://seulsong.tistory.com/263

<사진7> <아래 1980년 백남준 뉴욕 모마에서 강연 "종이는 죽었다" 인터넷 온다 예언>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다 -백남준>

1965년 백남준의 1차 인터넷 : 달은 가장 오래된 TV(월인천강지곡에서 나옴)

1970년 백남준의 2차 인터넷 : 비디오 코뮌, 1969년 비디오 편집기 나옴)

1973년 백남준의 3차 인터넷 : 글로벌 그루브 전 세계적인 축제와 향연

1980년 백남준의 4차 인터넷 : “종이는 죽었다뉴욕 모마강연 '인터넷' 예언,

1984년 백남준의 5차 인터넷 : 위성인터넷, 뉴욕 파리 서울 TV 방송 채녈 연결

1993년 백남준의 6차 인터넷 : 전자초고속도로(예술적 인터넷),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1994년 백남준의 7차 인터넷 : W3 작품 발표, 이미 몇 년 전부터 기획

1994년 팀 버너스리에 의해 월드 와이드 웹(WWW)이 실제로 처음 가동되었다. 초급 단계의 인터넷이 시작된 것이다. 백남준은 이것을 주제로 한 작품을 1994년에 만들었다 이 작품이 바로 W3. 몇 년 전에 구상된 작품이겠죠. <21세기는 198411일부터 시작(그의 작품 굿모닝) -인터넷 예고> 1980년 레이저아트 예언/전자초고속도로-> 정보초고속도로(대선)

<사진8> 1995경주와 백남준 기마민족 1998년 백팔번뇌 <낙관적 세계관> 경주세계문화 엑스포에서 2002년 백남준과 인연 휴먼 네트워킹

- 지난해 201210, 영국 '텔레그래프' 지가 '강남스타일 영감의 원천은 백남준'이라고 썼던데요.

"(김홍희) 싸이가 생긴 것도 꼭 몽골 사람을 닮았지만 그 말춤이 기마민족의 어떤 상징성 가지고 있어요. 사실 '백남준문화재단'에서 지난 129일 추모행사를 열 때 싸이 공연 연결하려고 했어요. 백남준의 기마사상, 몽골문화코드를 싸이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사진9> 김홍희: 백남준은 유명한데 왜 모르나? 음악전공자가 미술가?

- 백남준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죠?

"백남준은 전설처럼 신화화 된 상태로 그 기행만 알려져 있지 그 밑에 깔려있는 의미가 어렵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모를 수도 있어요. 백남준을 센세이셔니즘으로만 보기에 그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한국에선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죠."

<사진10> 이영철: 백남준이 난해한 이유?-선사시대 상상력 없이는 미래 볼 수 없다

<백남준이 몸을 던진 건 깨달음과 각성을 위한 행위, 몸으로 춤추는 철학자>

-백남준이 증오한 '부르주아 교양취미'가 뭔지 한마디 해주시죠? 그래서 몸이 중요한가요

"'(이영철) 부르주아 교양취미'가 뭐냐면 항상 좋은 자리에 참석하여 좋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고, 좋은 음식만 먹고, 좋은 소리만 듣고, 좋은 말만 하고 고상한 척, 유식한 척하고 행세를 하는 것이에요. 결국은 가진 사람, 있는 사람에게 기대고 기존의 질서만 유지하려고만 하는 거죠. 백남준이 이런 '부르주아 교양취미'를 부수는 데 사용한 무기가 바로 ''이죠. 그래서 예술에 몸을 도입해 행위음악, 해프닝아트가 생긴 거고요. 그런데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 건 그가 말하는 몸 예술은 발레나 고전무용과는 전혀 달라요. 그건 이미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방식으로 철학이 없는 그저 우아한 몸짓일 뿐이거든요. 백남준은 몸을 던진 것은 바로 깨달음과 각성을 얻기 위한 행위라고 봐요.

<사진11> 라파엘레 셜리 백남준 조수 7년 작가

- 당신은 어떻게 백남준의 조수가 되었나?

"나는 백남준과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나는 멀티미디어 작가인 '프랜시스 휘트니'와도 같이 작업을 했다. 그녀는 또 레이저 아티스트인 '노먼 밸러드(Norman Ballard)'와도 협업했는데 그녀를 통해 나는 노먼을 알게 되었고 노먼이 나를 백남준 선생에게 소개해줬다. 나는 이곳 작가들이 다 내 마음에 들었고 나도 그들을 좋아해 잘 어울렸다. 그래서 내가 정착할 곳은 '바로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

- 백남준은 어떤 인물인가? 에피소드라도 하나 소개한다면?

<12> "백남준은 매우 지적(highly intelligent)이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동양과 서양, 과학과 종교와 예술을 큰 틀 안에서 연관시키는 사유를 했다. 그는 내가 만난 본 사람 중 마음의 스케일이 가장 컸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명상의 형태로 즐겼고, 레이저 빛 아래 커피를 마시면서 레이저조각을 몇 시간 동안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른 조수도 그랬겠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특별했다. 그는 거의 완벽한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레이저작품을 응시했다. 그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은 바로 레이저아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이거나 철학적 논제를 꺼낼 때였다.

<사진13> 머서(Mercer)스트리트 옆 프린스(Prince)가에는 '제리'라는 그의 단골집이 있었는데 우리도 매일 거기서 그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는 동물이나 여성에 대해 매우 유쾌한 유머와 조크를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해줬다. 내가 그와 작업하는 동안 내내 그는 정말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친절했고 그의 장난기(playful mind)는 또한 뺄 수 없는 그의 단골메뉴였다."

<사진14> 파르지에(파리대교수) 백남준 30년 연구

- 백남준은 언제 처음 만났나?" "197812월 파리 미국문화센터에서 처음 만나고 19794월에 백남준 사진을 표지로 시네마수첩(Cahiers du Cinéma 1951년 창간된 권위 있는 영화·영상잡지) 백남준 글을 기고했다. 그걸 기초로 1989년 아르 프레스(ART PRESS) 출판사에서 <백남준> 이라는 책이 나왔다. 7월에 그 증보완결판이 나올 예정이다."

- 당신에게 백남준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천재였고 모성이 강한 나의 어머니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 대한 책을 쓸 때 지혜의 여신처럼 자상하게 돌봐주고 이끌어줬다. 백남준은 언제나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하는 방식을 취했다."

- 백남준은 왜 서구에게 유명한가? "그는 풍부한 상상력과 서구인을 압도하는 지성과 기상천외한 유머로 서구인을 웃겼기 때문이다." - 당신은 파리8대학에서 '백남준 비디오론'을 강의해 왔다. 지금도 계속하는가? "이젠 은퇴해 다른 젊은 교수가 나를 대신하고 백남준 비디오론을 강의하고 있다.“

- 백남준 굿이 기존의 굿과 다른 점은 뭔가? "백남준은 전통적 비주얼 개념을 넘는 상징적 오브제를 통해 현대미술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피아노와 수십 대 TV모니터도 활용했다. 그리고 그는 굿에서 모든 종류의 음악 즉 쇼팽, 모차르트, 쇤베르크, 한국 전통음악 도입했다. 모든 음악을 이미지로 바꾸는 귀재였다. 그런 걸 촉발시키고 재결함해 하나로 융합했다."

<사진15> 시게코 - 백남준은 어떤 예술가였다고 생각하는지? "나와 백남준은 우선 플럭서스(fluxus) 멤버이자 같은 예술적 동반자였죠. 나와 백남준은 이미 행위미술에 공감하여 어려운 시절을 같이 동고동락했어요. 플럭서스 운동이 결국은 비디오아트로 발전한 거예요.

<사진15-1> 일본에 있을 때부터 백남준을 알았지만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뉴욕에서고 거기서 슈아 아베도 만나 '456로봇'도 만들었어요. 비디오아트는 초반에는 그 TV자체가 이동하기 어렵고 무겁고 잘 망가져 정크아트(junk art)로 취급당했기도 했죠.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에 그것을 옮기느라 백남준이 고생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인정을 받지만, 당시에는 백남준의 존재 자체를 거의 몰랐어요. 비디오아트가 저급예술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고급예술이에요. 그는 남이 가지 않은 예술을 개척한 선구자로 21세기의 문을 열었죠"

<사진15-2> - TV와 로봇에게 생명을 넣은 방식의 예술을 서구에서 어떻게 봤는지? "백남준은 기술의 인간화를 지향했고 예술의 휴머니즘을 중시했어요. 기술은 단지 도구로 볼 뿐이에요. 그는 낡은 것은 파괴하는 창조자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어요. TV정원이나 TV부처도 다 그런 정신을 발휘한 거죠. <15-3> 하이테크를 그냥 도구로 이용했어요. 그리고 백남준은 샤머니즘 요소가 강했고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것에도 심취했죠. TV를 부수는 행위가 그에게는 어떻게 보면 수행이나 명상이었을 거예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급진적 사고로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샀죠."

<본론> 그의 삶과 예술에 관하여

<사진16> 백남준 이야기 1932년 생 720일 생 <> 3300-캐딜락-백낙승 태창방직 방직기가 1300여대 니혼대 상과 메이지대 법과 식민시대 태어난 마지막 전생 세대, 고은 시인과 같은 세대

https://seulsong.tistory.com/406

<사진17> 백남준과 인연 만나 적은 없고 아버지와 인연-나의 전공 보들레르가 백남준의 스승

<백남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마지막 전쟁세대> 백남준 1932720일 생 그 날 인류가 최초로 달에 도착한 날 그래서 백남준 자신은 달과 인연이 깊다(아래)는 자주 말하다. 720일은 케네디 대통령 부인 재클린 여사의 생일이기도 하다. 고은 시인이보다 한 살 위 백남준, 고은 시인은 "자신은 폐허의 시대를 살았고 우리세대는 절반이 죽었다"고 했는데 백남준도 사실 전쟁세대다. 그가 나치즘을 그렇게 증오한 이유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사진17-1> 1945년 경기 중 1949년 홍콩유학 백남준 1945년 경기중 입학 피아노 신재덕 작곡 이건우(쇤베르크 알다) 프랑스어 공부(유럽 귀족) 예술 쇤베르크(12음법) 철학 맑스 당시 유행 두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극단주의자, 경기고 마저 좌우익 문제가 컸고 홍콩유학 시킴 <17-2> 영국계 로이덴 Royden 17살 비행기 타고 여권번호 7, 19505월 귀국 조카 백일 이상주의자인 그는 피난을 나중에 갔다가 일본 넘어가다. 한국에서 17년 살다.

<사진18> 일본 건너간 동경대학 유학 부친과 갈등 속 일본·독일 유학: 부자지간의 갈등 첨예화, 이건 백남준이 홍콩에 갈 때부터 시작됐지만, 동경대학에 진학할 때 폭발했다. 성적은 부친이 원하던 대로 동경대 상과를 들어갈 충분한 수준이었으나 부친을 속이고 미학과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부자지간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백남준 만 19살 때 사진19517월 일본 동경 근처(남쪽) 가라쿠마. 그는 당시가 625가 터진 후라 일본에 있는 것에 대해 크게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 곳은 유서 깊은 사찰과 사당, 일본 전통 건축물과 문화유산 많다고. 백남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예민한 시기인 만 17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사진은 가라쿠마 역. 2천년에 처음 일본을 가본 적은 있지만 백남준 살았던 곳에 한번 가볼 기회가...

<사진19> 백남준은 1952년 동경(도쿄)대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학 및 예술사를 전공을 정하고, 주로 작곡과 음악사를 공부했다. 1953년 백남준은 일본에서 같은 동경대 불문과 학생 시브사와 미치코(步澤道子)와 첫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똑똑하고 인형처럼 예쁜 여학생이었다. 수줍음을 잘 타는 백남준은 그녀 앞에 서면 얼굴을 붉어졌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 끙끙 앓았다. 어느 날 그녀에게 대학생으로는 살 수 없는 엄청나게 비싼 부다페스트 현악 4중주가 연주하는 바르토크 첼로연주회 티켓을 건넨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너무 비싼 표라 마음에 걸려 돌려주려고 했다. 그녀가 백남준의 주소를 알아내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백남준이 사는 곳은 동경에서도 최고급 주택가가 모여있는 부촌이라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백남준이 나왔고 부잣집 도련님답지 않게 옷차림은 허름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형들과 여기서 살았던 것이다.

그녀가 연주회에 못 간다고 하니까 백남준이 함께 가면 안 되겠냐고 애원하다시피 해 겨우 같이 가게 된다. 차도 같이 마시며 데이트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 애인에게 돌아갔고 백남준의 애틋한 첫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 초대 백남준 아트센터 이영철 관장이 3년 전 일본 출장을 갔다가 그녀를 만났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 스마트한 미인이라고 기자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백남준] 그에게는 일본인 지인들도 많았다 https://seulsong.tistory.com/353 이세이 미야케

유치원 동창인 이경희 여사와 백남준 선생의 인터뷰를 보면 백남준은 이 여사에게 독일에서 첫 전시 후 1964년 동경에서 첫 번째 퍼포먼스를 했는데 미치코에게 초청장을 보내는 걸 깜박 잊어버려 끝난 다음에야 그 생각이 났다고 말했단다. 또한 뉴욕시절 백남준이 콜롬비아대 다니던 미치코의 여자 친구를 만났는데 미치코가 자기 얘기를 했다는 걸 들었다며 마치 영화 이야기처럼 말했단다.

<사진20> 졸업 논문도 '쇤베르크 연구'였다. 동경대를 졸업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 백남준은 파리로 유학가려 했으나 부친이 파리는 퇴폐적 도시라고 말리자 결국 방향을 틀어 독일 유학을 결심했다. <지난(2018.11.06) 국회도서관에서 독일에서 주로 활동하는 이순주 백남준 연구자가 독일에 잇는 백남준 학사논문을 대여한 걸 계기로 세미나가 열리다>

<사진21> 질문자로 참여 "TV는 물리적 음악이다(PHYSICAL전자MUSIC)" -백남준

-서양인에게 음은 음이고 양은 양이지만 백남준에게 우리나라 태극무늬에서 보듯 음이 양이고 양이 음이다. 그 구분이나 경계가 없다. 이를 확장하면 그에게는 시간예술 공간예술 이런 구분도 없다.

백남준의 동경대 학사논문 <쇤베르크론(Study of Schönberg)> 을 읽어보면 수직적 음악보다 수평적 음악을 중시한 것 같다. 음악의 민주화 선불교에서는 "귀로 보고 눈으로 들으라"고 한다. 음악이 미술이 되고 미술이 음악이 된다. 여기서 서양인들 당황하는 것이다. 서양인에게 음은 음이고 양은 양이지만 백남준에게 우리나라 태극무늬에서 보듯 음이 양이고 양이 음이다. 그 구분이나 경계가 없다. 이를 확장하면 그에게는 시간예술 공간예술 이런 구분도 없다.

최우정(서울대학교 음악대학)는 백남준은 학창시절 피아노 교사였던 신재덕, 작곡가 김순남·이건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건우가 소개한 '현대음악 선구자' 아널드 쇤베르크 음악에 심취했다. 김순주 베를린 B/S 쿤스트라움 디렉터가 지난해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관 좀 아카이브에서 존재를 확인해 필사한 '스터디 오브 쇤베르크'1956년 독일로 건너가기 직전 일본어로 작성한 것이다. 400자 원고지 200장 분량의 이론집 2권과 악보 1권 등 3권으로 구성됐다.

최 교수는 "음 간에 주종관계가 있는데 쇤베르크는 이를 모두 해체해서 모든 음을 평등하게 사용했다"라면서 "음악가로 먼저 출발한 백남준은 이러한 점을 주목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토론회 뒤 기자를 만나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백남준이 어떻게 독창적 예술 세계를 구축했는지 음악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디렉터는 이를 통해 지난해 9월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관에서 실물을 확인, 일본인 큐레이터와 함께 논문 2/3가량을 필사했다. 이번에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김순주 기획자가 그의 학사논문 발굴은 그의 블랙박스를 찾아낸 것이다. 백남준 연구에 새 출발점이 될 것 같다.

개회식: 사회 조관용(미술과 담론 대표), 세미나: 사회 김노암(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예술감독) 진행자: 김찬동(수원시립미술관장) 발제자: 김순주(B/S Kunstraum 디렉터), 발제자: 최우정(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발제자: 이지호(이응노 미술관장) 토론자: 서진석(백남준아트센터관장) 토론자: 김형순

<사진22> 1956년 뮌헨대학교 입학 9<사진23>

<사진24> <백남준과 부친> 독일에 같은 시기에 있었다

백남준 캘커타와 카이로를 경유해 뮌헨에 도착 1956년 뮌헨대 9월 학기에 입학 허가를 받고 첫해 음악사 등을 공부했으나 학교 분위기가 너무 보수적이라 다음 해 더 자유로운 프라이부르크 음대로 옮겼다. 그리고 1957년부터는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매년 여름학기에 열리는 '젊은 작곡가를 위한 음악제'에도 참석했다. 그 후 백남준은 쾰른대 철학과에 입학해 니체와 헤겔 등을 공부했다.

지난번 5월에 베니스 갔다가 백남준 다닌 대학을 들러보다 https://seulsong.tistory.com/378

[백남준] 독일 유학하면서 독일 대학들 휘두르다: 독일의 대표적 도시 뮌헨 그런데 이 대학은 캠퍼스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드디어 찾았다. 예술사학과 공부하다.

백남준 공부했던 뮌헨 대학 예술사학과 방문 2019515일 백남준 뮌헨대학교(예술사학과(Fakultät für Geschichts-und Kunstwissenschaften)1년간(19569월부터) 다니면서 뭘 공부했는지 알아보자. 이에 대해서는 이영철 교수가 정리나 아주 훌륭한 자료가 있다. 그 공부 내용이 정말 인문학적이다.

위에서 보듯이 백남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공부했다 [1] 유럽의 기독교 역사 [2] 유럽 철학 역사 [3] 독일의 교회음악 [4]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입문 과정 [5] 정신사로서의 예술사 [6] 독일 시인론: 횔덜린-노발리스-클라이스트 [7] 이탈리아 예술 건축 [8] 오스트리아 빈 고전음악 등이다.

그리고 [9] 가장 중요한 건 아마도 백남준이 좋아했을 과목은 <다성학 작곡> <빈 고전음악과 작곡 연습> 이다. 대학교 1학년 과정치고는 너무 수준이 높네요. 이 대학을 한번 방문해 보고 싶다. 백남준의 지도교수인 '게오르기아데스(Thrasybulus Georgiades)'는 바로 작곡(빈 고전음악 작곡 연습)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독일에 유학 가서 처음 공부한 곳이 뮌헨대학교이다 독일에서 2번째로 오래된 도시고 대학 순위 1위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자 42명을 배출한 독일 최고 대학인이다 그런데 왜 백남준은 왜 학교를 그만 둔 것이다. 이 대학이 너무나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백남준 역시 백남준이다. 그런데 이 대학을 발로 차 버렸다. 언제 어디서나 파문을 일으키는 백남준, 바로 백남준스러운 퍼포먼스였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 그래서 백남준은 이번에는 독일에서 가장 자유분방하다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독일어 프라이부르크(Freiburg)는 자유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때도 그의 지도교수 '포르트너' 그는 독일에서 꽤 유명한 작곡가였다.

백남준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고 그는 참으로 "보기 드문 비상한(extradordinary) 현상"이라고 말을 하면서 백남준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대신 그를 쾰른 방송국에 음악 관련 분야에서 일하도록 추천했다.

왜냐하면 어느 날 포르트너 교수가 백남준에게 작곡한 작품을 보여 달라고 하자, 백남준이 도끼를 가지고 가서 피아노를 부셔버리려고 하자 그만 당황한 것이다. 백남준에게는 그 피아노를 파괴하는 소리가 (우연적) 작곡이라고 생각했다. 백남준이 생각하는 작곡과 음악의 범위는 기존의 것보다 훨씬 더 확장된 개념이었다. 백남준은 학위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서 독일 대학을 유목민처럼 떠돌며 공부하다.

쾰른은 당시 가장 전위고 실험적 음악을 시도하는 도시였기에 백남준은 그곳의 방송에서 일하도록 추천 그래서 거기 전자아트의 창시자 슈톡하우젠을 만나서 서로 잘 통하는 친구가 되기도 했죠. 그리고 그의 부인인 마리 알게 되어 독일에서 생활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졸업을 안 한 것 같은데 우선 <i> 뮌헨대학교 1년 공부 그러고 <ii>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2년 공부 그러고 나서 <iii> 쾰른대학교 철학과(1960/1961)에서 또 공부했다. 미학과 음악 작곡과 철학을 두루 섭렵했다.

백남준 1960년도 가을 겨울 학기 쾰른대학교에서 뭘 공부했는지 알아보자. [1] 헤겔 [2] 니체와 서양 형이상학의 종언(폴크만 슐루크 교수) [3] 현대 20세기 철학 [4] 자연철학의 기초개념 [5] 철학적 인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61년 봄과 여름학기엔 [1] 13세기 철학적 논쟁 [2] 니체의 계보학인 서양 형이상학의 종언(고급과정)을 공부했다. <결론> 이 세상에 독일대학을 발로 차는 예술가는 백남준밖에 없는 것 같다. 그의 그런 배짱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하여간 백남준은 배포가 크고 배짱 두둑한 사람이다. 몽골의 칭기즈칸의 기질을 가진 예술가다.

<사진25> 1957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리는 하기현대음악 강좌에 참석, 그해 푸라이부르크대학교으로 옮김 포르트너 교수교수의 추천으로 쾰른방송국에 일하다. 당시 이 도시는 첨단의 전위음악이 리드하고 있었다 그리고 슈톡하우젠 만남 일본 잡기 <현대음악> 해외통신원 1958년 다름슈타트 열리는 하기현대음악 강좌 또 다시 참석 당시 강사였던 존 케이지를 만나다. 그의 생애 결정적 영향을 주다 1959<존 케이지를 위한 찬사> 존 케이지를 참석하지 않고 보이스는 멀리서 이걸 지켜봤다고 한다. 1960년 바우어마이스터 아틀리에에서 존 케이지에 보내는 찬사 2(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 공연 그때 존 케이지 참석 백남준 그의 넥타이를 자르다(악명 높은 해트닝) 여기서 유명한 대지미술관 크리스토를 만나다 1961년 독일의 문화대통령 요제프 보이스와 처음으로 대면하다. 조지 메키어너스 만남 데콜라주 볼프 포스텔 등과 처음 만나다. 19611026일 백남준 관객참여형 음악적 연극인 오르기날레(Originale) 참여해 머리를 위한 선을 선보여 이들 사이에서 크게 부각되다. 그는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모든 가시적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그걸 응시해야하리(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같은 경구를 낭송하다 1962년 최초로 플럭서스 공연(플럭서스 국제 페스티벌 신음악)에 참여 여성회원으로는 일리슨 놀스가 있었다. 당시 신음악(neue musik)에 관심 1962년 백남준 친구 예를이게 보낸 편지에서 내 작품은 그림도 조각도 아닌 단지 시간예술임을 명심하라 플럭서스(Fluxus)’ 반예술 반 부르주아 문화 고체사회를 액체사회 만들어 흐르게 한다 문화 민주주의 모두가 예술가다. 사회적 행위로서의 조각 회화 등 개념이 나오다. 공유지 이상향 무정부주의자와에 가깝다. 바우하우스와 플러서스는 통한다. 미술의 민주화에 기여하다 그리고 예술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 fun, fun, fun

<사진25-1> 구음악과 신음악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2장의 사진에서 바로 알 수가 있다

<사진26>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감이다

<사진26-1> 1962년 백남준이 만 30살이 되는 해 그는 세계미술판을 엎어버리겠다고 폭탄선언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 백남준은 1962년 만 서른에 문화제왕으로서 포부를 밝히며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프랑스 절대왕정시절 루이 14세가 한 '짐이 곧 국가다'를 패러디한 것이다. 자신의 출현을 13세기 몽골제국이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에 비유하며 유럽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황색재앙이 뭔가> // "우린 역사를 너무 잘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게 없는 거야.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에 가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같았어. 그래서 다시 음악의 본고장 독일에 가서 보니깐 거기서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TV의 정신은 무엇인가?비전과 시간을 문제에 대해서 고민

(tele-vision, visionary, voyant): 아무도 가보지 않는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면서 TV아트를 시작하다. 멀리 보다 백남준. 깊이 사유하다-푸코 전자아트를 하기 위해서 비밀스럽게 공부방을 만들어 3년간 전자공학을 공부하다. 그리고 후에 유학비가 안 와 백남준의 독일생활은 빈궁해졌다. 동경에서 가족과 함께 1년을 보냈기도 했다. 그런데 운 좋게 그때 미국인보다 트랜지스터 원리를 2년 앞서 발견한 전자공학자 '우치다 히데오'와 백남준과 함꼐 비디오합성기를 발명한 '슈야 아베'를 만나 전자아트에 도움을 받는다.

<사진27> 1963년은 서양미술판에 원자폭탄이 투여되다 첫 번째 전시다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 백남준은 그가 31살이 되는 19637년간 준비한 첫 개인전을 엥겔스의 고향인 소도시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311일부터 20일까지 열었다. 이 갤러리는 원래 독일 아방가르드예술을 대표하는 건축가 예를링의 비상업적 사무실이었다.

그의 첫 전시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 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그의 전시개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데서 왔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리(sound)가 시각(sight)이 되는 '사운드아트'. 기존의 시각중심을 넘어 오감이 총동원된 즐거운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실험예술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이런 개념은 다원예술과도 통한다.

백남준의 첫 전시서문은 그가 존경하는 피에르 빌헬름이 썼다. 첫 구절은 "이번 전시가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는 시적 언어로 시작한다. 이는 서로 불협화음과 충동을 일으킬 것 같은 미술과 음악과 TV 등을 융합해 시공간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매체예술이 탄생된 것으로 본 것 같다.

문화 테레리스트-전복자-우상파괴자(영원한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의 모습 보이다. 굿의 형식을 취하다. https://seulsong.tistory.com/438

그의 첫 전시에는 각기 다른 4대의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뿔, 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피아노도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본 모양이다.

백남준의 친구인 요셉 보이스는 전시 개막 1시간 뒤 나타나 그 피아노 중 한 대를 마치 어떤 표적물을 정확하게 강타하듯 그렇게 박살을 냈다. 보이스는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지만 피아노를 부수면 행위예술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리라.

이 괴상한 전시를 서구백인중심의 헤게모니를 흔드는 '빅뱅'이나 세계미술계에 소리 소문 없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적이다. 백남준의 이런저런 의도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범죄' 같다. 백남준도 "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아트는 5차원 사기다"라는 하지 않았던가.

<피아노 4대와 TV 13> TV 뉴 피아노 혹은 새로운 악기로 도입하다: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비디오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적 사고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로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첨단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더 중요해진다.

<정말 심미적인 사람은 쇤베르크나 백남준이나 존 케이지처럼 잡음도 불협화음도 너무나 아름답게 들릴 수밖에 없다. 샬럿 무어먼도 마찬가지다. 전위예술가들>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백남준.

<사진28> 굿에 대한 설명 전반부 후반부 나중에

<굿이란 모순된 사회 속 대안창출 공동체> 아래는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피아노 위에 굿판을 벌린 것이다. 서양미술판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그걸 다시 초토화시킨 것이다. 이런 판을 갈아엎어 버리겠다는 백남준의 강력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래서 첫 전시의 부제가 (서양미술 터줏대감) 추방(Expel)이다.

굿판은 서양의 전위예술보다 더 전위적이다. 왜냐하면, 전복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초토화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백남준의 랜덤 액세스다. 게다가 소통의 범위가 서양보다 훨씬 차원이 높다. 산 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와서 같이 소통을 하면서 전시를 보라고 초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미처 서양사람들이 못한다. 이 세상에 모든 귀신아! 다 여기에 와서 내가 펼쳐놓은 전시굿판을 보라고 말하고 있다.

"굿은 나에게 모든 예술의 원초적 근원이다" 백남준이 그의 부인에게 한 말이다. "To Nam June Paik the shamanistic ritual of Good is the primitive source of art"

굿이란 모순된 사회구조 속에서 똑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건강한 생각과 구체적 방안으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결심하고 각오를 다지는 자리다. 여기서는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이 절대 평등의 위치에서 같이 노는 것이고 굿을 끝내고 나서 음식은 다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 그런 분위기 속에 신명을 체험하고 다시 삶의 기운과 에너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사진29> <1964> 뉴욕시대로 넘어가다 <1969년 인류에 달에 보내다> 미국의 최고전성기」 「팝아트 전성기백남준이 어떻게 미국 뉴욕에 정착하게 됐는지 알아보자.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한 1964년 미국은 인종 분리를 끝내는 '시민권법'이 제정되어 민주주의가 더 고조되는 시기였다. 1년 전 문화예술계에선 전위예술의 총집합한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에 의해 출범됐다.

샬럿 무어먼은 1964'2회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을 맞아 그 위상을 높이려 두루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존 케이지''슈톡하우젠(독일 전자음악작곡가)'이 백남준을 중요인물로 천거하자 그를 초대키로 한 것이다. 백남준은 1961년 독일에서 공연한 '괴짜들' '머리를 위한 선' 등으로 이미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무어먼은 백남준을 초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맞이하기 위해 직접 케네디공항으로 나갔다. 그때가 백남준이 32, 샬럿은 31살이었다. 그녀는 그를 크게 환영하며 극진하게 대우했다. 하긴 이런 미인의 간청을 어떤 남자가 거절하겠는가.

백남준은 생동감 넘치는 뉴욕에 매료되어 1달간만 머물려다 정착한다. 하긴 시대를 꿰뚫고 있었던 그가 뉴욕이 세계문화의 중심지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게다가 1963년엔 케이지로부터 미국 초청을 받았고, 독일에서 만난 플럭서스 동지인 마치우나스, 카프로, G. 브레히트, B. 패터슨, 라몽트 영, 엘리슨 놀즈 등도 지원했다.

로봇 'K-456'과 함께 1964년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이 찍은 사진.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피터무어(Peter Moore) 백남준과 주변의 사람들 독일의 예술파트너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타는 백남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artisan)이었고 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그녀는 백남준아트센터에 초대를 받아 몇 번 한국에 왔었다. 그녀는 백남준이 독일생활에 익숙하지 못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

<사진29> 1964년 백남준 그의 예술파트너 샬러 무어먼를 처음 만나다 19655월 파리 미국 문화원에서 <표현의 자유페스티벌> 드레스를 안 가져와 공연장에서 비닐 옷을 입고 연주하다. 그래서 topless 1967년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에 이어 뉴욕 영화제작가 극장에서 29III 단계 옷을 벗는 퍼포먼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하다가 뉴욕경찰에 체포되다.

<사진30> 왜 이런 ''을 주제로 한 연주로 1965'첼로소나타 1'에서는 '성인용'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유명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발표하게 된다. 이 작품은 1966년 독일 아헨에서 초연된 바 있었다. 그때도 샬럿은 물론 누드였다. 그러나 1967년 뉴욕에서 반응은 전혀 달랐다.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백남준은 이 전시포스터에 "진지함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음악에서 성을 제거한 건 도리어 음악의 진지함을 해치는 것이다. 음악도 문학도 미술과 동등한 위치의 고전예술이다. 따라서 음악도 음악계의 '로렌스', '프로이트'가 필요해"라고 적었다.

미리 신고한 이 공연, 주최 측도 경찰이 음란한 공연으로 볼 수도 있기에 200명 사람만을 엄선해 초대장을 보냈고 일반인은 입장을 금했다. 그 순서는 1'전자 비키니 입기', 2'상의 벗기', 3'하의 벗기', 4'완전누드'로 연주하기였다.

그런데 2막이 시작되고 샬럿이 가슴을 드러내자 사복경찰 3명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 그녀의 상반신을 코트로 덮고 즉각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공연의 작곡가이자 제작자인 백남준도 연행됐으나 공연장에 양복 차림으로 점잖게 앉아 있어 훈방 조치됐고, 샬럿도 나중 풀려났지만 외설혐의로 재판에 붙여졌다.

이 사건은 외설과 예술의 자유논쟁으로 확대되어 미국예술계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다. 샬럿이 법정에 서자, 애가 탄 백남준은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미국 예술가뿐 아니라 프랑스 시인인 '장 자크 르벨(J. J. Level)'에까지 편지를 보내 뉴욕주지사에게 그녀의 사면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내달라고 사정했다. 마침 '르벨'로부터 긍정적 반응이 오자 백남준은 전 세계 유명전위작가와 예술비평가들도 백남준에게 지지를 보냈다.

빈털터리인 백남준은 더 적극적으로 변호사 비용을 얻기 위해 1968년 뉴욕타운 홀에서 '재판기금모금연주회'를 열었고, 백남준은 누이를 통해 알게 된 가야금연주자 황병기씨를 뉴욕까지 불러내 연주하게 했다. 황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한복을 입고 연주했는데 샬럿은 비키니를 입고 자루를 들락날락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단다.

미국법원은 이 해프닝이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백남준의 말을 받아들여 샬럿에게 유예판결이 내리자, 뉴욕예술계는 환호하며 이 법적 투쟁의 두 승자를 축하해줬다. 그 이후 그녀는 '토플리스 첼리스트'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 분야의 아이콘으로 행위예술의 '잔 다르크' 아니 '자유의 여신'이 되었다.

백남준은 이렇게 청교도 전통으로 성에 강박관념이 심한 미국사회의 촌스러움을 걷어낸다.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난 검은 옷을 차려입고 음악을 연주하는 성이 제거된 남녀의 고인돌 같은 분위기를 휘저어놓고 싶었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백남준이 이런 해프닝을 도발한 건 성적 억압을 일삼는 기존사회의 통념을 깨는 예술적 교란이라 할 수 있다

백남준에 없어서는 안 되는 환상적인 예술파트너 샬럿 무어먼 젊어서 사진이다. 이때는 아직 전위음악을 하기 전이다. 뉴욕 명문 음악학교 줄리아드에서 공부를 했다. 천재 예술가답게 57세에 요절하다. 학창 시절 미스 진에 뽑힐 정도로 외모도 빼어났다. 오른쪽 사진은 비닐만 두르고 거의 다 벗었다. 68혁명이 있었는데 당시는 모든 것이 상당히 도발적-저항적이었다.

<사진31>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하는 해는 1965년에 104일 저녁 뉴욕고고카페에서 비디오테이프(뉴욕을 방문한 교황)를 보여준다. 당신들이 TV를 만드시오. 이것을 1112일 보니노 화랑에서 개인전 <전자예술> 을 열다. 참여TV에서 관객은 자석으로 화면에 자신의 이미지를 그리게 한다. 비디오 탄생한다.

1970년대 90% 해프닝 아트

<사진32> TV 시리즈 역시 TV 부처(1974)TV 정원이 그 대표작이 된다 기념비적인 'TV부처', 뉴욕미술계 강타 백남준은 1974년 기념비적인 'TV부처'를 발표해 뉴욕미술계의 지축을 흔든다. 이 작품은 보니노갤러리 4번째 전시에서 천장에 '하늘을 나는 물고기'를 달아보려고 시도했으나 TV를 여러 대 구입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제반 여건이 맞지 않자 결국 포기한다. 그 대신 TV 한 대만으로도 전시가 가능한 'TV부처'로 바꿨다.

'TV부처', 동양정신과 서양기술의 결정적인 만남 성사: 'TV부처'는 유럽, 미국, 아시아 국립미술관 등에서 가장 많고 소장된 백남준의 대표작으로 그 버전도 다양하다. 그 형식은 단순해 보이나 그 사상은 심오하다.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하이테크가 만나야 동서가 창조적으로 융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동서 문명의 선후, 비교우위 등은 들어설 여지는 전혀 없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동양의 생명문화와 서양의 기계문명이 사이좋게 공존한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도 부처의 마음으로 돌아가 삶의 번뇌를 내려놓고 거울에 자신을 들여다보며 주변의 것과도 상응하게 된다. TV와 부처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고요가 또한 관객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감흥을 일으킨다.

또한 이 작품은 자연을 상징하는 ''과 문명을 상징하는 ''을 매개로 여백미와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우주만물의 원리를 재해석한 이우환의 작품세계도 연상케 한다. 이런 동양의 통합적 사고는 분석적인 서양인에겐 나오기 힘든 것이다. 이 작품은 비디오가 피사체를 촬영해 녹화하고 모니터로 생중계되는 폐쇄회로방식이라 실시간 피드백이 된다. 그래서 관객은 작품과 쌍방 소통하는 방식을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어 자신도 모르게 작품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부인 시게코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하지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시를 하는 남준은 형들처럼 부친의 재산을 관리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유학비와 생활비를 형에서 송금받아 썼어요. 그런데 형들이 사업이 순조롭지 않아 집안이 기울고 그 재산도 몇 년 못가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져 그가 뉴욕 초기 생활이 가난했던 이유에요.

아파트관리비 다달이 갚는 것도 버거워진 남준은 1972720일 그의 생일날, 일본에 사는 형에게서 부친이 남긴 유산을 받으러 갔어요. 형들은 남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며 당시로는 상당한 거금인 1만 달러를 안고 뉴욕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그 돈으로 맨해튼 골동가게에서 표정이 일그러진 불상 하나를 사왔어요. 쪼들려 살던 난 정말 화가 났죠. 그런데 2년 후 이 불상은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열린 4번째 개인전에서 소개되고 놀랍게도 그의 대표작이 됐어요. ', 이 사람은 정말 천재구나, 이 사람이 돈 쓰는 것에 대해 불평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미국 생활 10년 돈이 바닥이 나다.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부인 시게코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하지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시를 하는 남준은 형들처럼 부친의 재산을 관리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유학비와 생활비를 형에서 송금받아 썼어요. 그런데 형들이 사업이 순조롭지 않아 집안이 기울고 그 재산도 몇 년 못가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져 그가 뉴욕 초기 생활이 가난했던 이유에요.

아파트관리비 다달이 갚는 것도 버거워진 남준은 1972720일 그의 생일날, 일본에 사는 형에게서 부친이 남긴 유산을 받으러 갔어요. 형들은 남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며 당시로는 상당한 거금인 1만 달러를 안고 뉴욕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그 돈으로 맨해튼 골동가게에서 표정이 일그러진 불상 하나를 사왔어요. 쪼들려 살던 난 정말 화가 났죠. 그런데 2년 후 이 불상은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열린 4번째 개인전에서 소개되고 놀랍게도 그의 대표작이 됐어요. ', 이 사람은 정말 천재구나, 이 사람이 돈 쓰는 것에 대해 불평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정말 돈 필요할 때 돈이 생긴다>

<사진33> 'TV정원', 자연친화적 문명비전 제시 <반은 자연 반은 문명이 가장 좋다>

백남준 I 'TV정원' 수십여 대 TV모니터와 식물들 가변설치 1974-2002. 여기 비디오 콘텐츠는 동서양 갈등을 해소하자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요즘 회자되는 환경미술에 대한 선각적 혜안도 보인다

'TV연작'에 대해 정리해 볼 기회가 있겠지만 우선 서구관객들을 놀라게 한 'TV정원'을 하나 더 소개한다. 자연친화적인 이 작품은 60여대 모니터로 구성되었고 그 기저에 문명의 이기가 자연의 품에 안긴다는 유쾌한 가설이 깔려있다. 또한 이 작품은 천지인을 하나로 보는 동양의 '물아일체'의 원리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백남준은 "모든 기술이 인간화되지 못하면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예술도 인간화되지 못하면 예술을 위한 예술로 전락할 뿐"이라고 했고 또한 "만약 서구인 당신들이 기술만 매달린다면 전쟁이 날 것이다. 자연을 따르는 겸허한 삶을 위해서라도 자연 반, 기술 반이 좋다"고 말했는데 'TV정원'에는 그런 철학이 담겨 있다.

'TV정원'은 또한 자연을 전시장에 옮겨놓은 방식인데 이것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뒤샹'이 말한 "미술은 그리는 게 아니라 전시장에 사물을 갖다 놓는다"라는 한 개념과도 통한다. 하여간 이 작품은 당시 뉴욕에서 "자연과 기계를 융합하고 옥외와 옥내를 결합시킨 지상에서 가장 멋진 정원을 선물했다"라고 큰 호응을 얻는다.

<사진34> 백남준 결혼사건 : 백남준의 휴머니즘을 보는 사건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결혼사건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건이다. 26살 백남준에게 반해 14년 같이 코뮌생활을 했지만 백남준은 시게코에게 한반도 결혼하자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작품이 자식이기에 자식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게코 40이 되니 백남준 자식 하나 낳으면 어떨까 생각하다 병원 갔는데 자궁암 진단 결국 포기하고 의료보험이 없자 곤란해지고 이걸 알게 된 백남준 그에게는 지원단체에서 만들어진 보험이 있었기에 그러면 결혼하자고 청하게 된 것이다. 이런 면모에서 백남준의 휴머니즘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시게코 하바드대학나온 독일 최고부자와 이 사건 전에 결혼한 적이 있었는데, 시게코는 시댁과 안 맞아 결국 튕겨 나왔고 다시 백남준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백남준은 한번도 이에 대해 뭐라 말하지 않았다고

https://www.sedaily.com/NewsVIew/1VKI5YN5CW?fbclid=IwAR1Dg4z_mfFMaoxYspqRHiysejQf03PsdIqO__W0gqm1NszYVXC8893cIH8

<사진35> <10년간 감격시대> 1977321일 결혼 후 신혼이 채 가시기 전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그해 여름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뒤셀도르프 미대 크리케(Kricke) 학장이 자기 대학에 비디오과가 신설되는데 백남준이 적격이니 교수로 초빙하고 싶다는 뜻밖의 제안을 전화로 물어왔는데 마침 백남준이 자리에 없어 시게코가 전화를 받고 얼른 수락했단다.

뒤셀도르프 미대는 독일미술의 거장 '리히터' 등 유명작가를 배출한 독일 최고명문으로 '파울 클레' 등도 이 학교의 교수였다. 백남준와 시게코는 뉴욕에 근거를 두고 작업하고 있었지만 1977년부터 1987년까지 10년 간 독일에서 '감격시대'. 시게코의 14년만에 결혼, 백남준 독일에서 첫 전시 후 14년만에 교수

시게코는 백남준을 만난 지 14년 만에 결혼했고, 백남준은 독일에서 첫 전시를 연지 14년 만에 독일에서 교수가 된다. 대학에서도 백남준 같은 세계적 작가를 초빙한 걸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백남준은 첫 전시부터 충격적 사건을 일으켜 이름이 났다.

그때 백남준은 당뇨가 발병해 교수채용기준에 수치를 맞추려고 고생한다. 그런 와중에도 당뇨는 몸속 당분이 뇌세포를 자극해 작품이 더 좋다고 익살을 떨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신혼을 보내며 오래간만에 뉴욕에서처럼 썩은 과일을 먹지 않아도 되는 호사를 누렸고, 라인 강이 내다보이는 고급아파트에서 살았다. 독일에서 교수의 권위와 재량권은 워낙 커 한 달에 한 번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정도다.

백남준의 교수생활과 인간미

<사진35-1> 첫수업과 뉴욕을 오가며 수업을 했고 백남준은 수입이 많다고 생각해 학생을 레스토랑에 데려고 가 실컷 먹이고 심지어 도박할 돈까지 줬다. 이에 학부모의 항의보단 경제를 가르친다고 좋아했단다. 때론 그들에게 비행기 표를 사줘 미국 뉴욕에 현장학습을 시켰다.

독일인은 백남준에 대해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6개 국어를 하는 그는 동서 문명에 박식할 뿐만 아니라 양 문화를 경계 없이 두루 융합하는 경계 없는 지구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치즘을 경험한 독일인에게 서구의 우상인 합리주의, 이성주의, 과학주의의 허상을 깨면서 전후 그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에 해방감과 청량감을 줬기에 독일인들은 그를 좋아했고 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백남준을 독일대표로 보내기도 했다.

<사진36> TV 몽골코드 그리고 인류학적 예술추구

"굿은 나에게 모든 예술의 원초적 근원이다 -백남준이 그의 부인에게 한 말(To Nam June Paik the shamanistic ritual of Good is the primitive source of art)"

백남준은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안-몽골리안' 요소를 좋아한다"거나 1992년 김용옥과의 인터뷰에서는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사람하고 우리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때 우리 걸 몽골사람은 지금도 보존하고 있어 [...]"라든가 자신의 혈통에 북방유목민 몽골의 문화심층구조가 깊이 잠재하고 있음을 털어놓는다.

<굿이란 모순된 사회 속 대안창출 공동체> 아래는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피아노 위에 굿판을 벌린 것이다. 서양미술판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그걸 다시 초토화시킨 것이다. 이런 판을 갈아엎어 버리겠다는 백남준의 강력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래서 첫 전시의 부제가 (서양미술 터줏대감) 추방(Expel)이다. 굿판은 서양의 전위예술보다 더 전위적이다. 왜냐하면, 전복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초토화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백남준의 랜덤 액세스(서양의 2분법의 위계를 깨는 5차원 사기). 게다가 소통의 범위가 서양보다 훨씬 차원이 높다. 산 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와서 같이 소통을 하면서 전시를 보라고 초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미처 서양사람들이 못한다. 이 세상에 모든 귀신들아! 다 여기에 와서 내가 펼쳐놓은 전시굿판을 보라고 말하고 있다.

굿이란 모순된 사회구조 속에서 똑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건강한 생각과 구체적 방안으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결심하고 각오를 다지는 자리다. 여기서는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이 절대 평등의 위치에서 같이 노는 것이고 굿을 끝내고 나서 음식은 다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 그런 분위기 속에 신명을 체험하고 다시 삶의 기운과 에너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몽골코드 황색재앙이라는 말도 했지만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정체성 1977년 나의 환희를 거칠 것이 없어라 자신감을 드러내다. <3333> 달은 가장 오래된 TV 앞에서 시리즈에 대해 언급했다. TV의자, TV물고기, TV촛불, TV브라, TV첼로, TV침대, TV페니스, TV계란, TV샹들리에, <3334> TV깔대기(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철 서울 본사 꼭 방문), TV시계 등등 1965년부터 1999년까지 30년간 이 시리즈가 이어진다. 달빛과 TV 명암이 뒤섞인 달빛이 주는 깨닮음 https://seulsong.tistory.com/388

<사진37> 문명의 축, ''에서 ''으로 전환<중국작가 왕싱웨이> 왕싱웨이(Wang Xingwei) I '늙고 불쌍한 해밀턴(Poor Old Hamilton)' 220×280cm 1996 <사진12345> 백남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구멍을 내고 다녔다. 그는 무미건조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대 혼란이 왔다. 획일적인 것이나 일사불란함 같은 것을 때려부셔 버렸다. 백남준은 예술가 역할 중 하나로 교란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미 서구에서 종교화된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또 하나는 그리고 전쟁과 미움과 갈등으로 끊어진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일을 했다. 백남준은 선시 중 하나인 무봉탑(이음새가 없는 탑)이라는 시를 좋아했다. 이 시는 부처님이 말하는 우주만물에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인드라망 사상을 담은 것인데 백남준 이에 크게 공감한 것이다. 백남준은 너무나 넓고 크고 깊고 광활한 세상과 그 모든 인간과 우주를 다 담고는 남을 수 있는 무봉탑 같은 세상(해원상생)을 열망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발명하고 상상한 것이다

위는 중국신세대작가 왕싱웨이의 독창적 작품으로 문명의 축이 서에서 동으로 바뀌고 있음을 암시한다. '늙고 불쌍한 해밀턴''유럽', 뒤샹의 대표작을 깨고 울고 있는 아이는 '아시아'를 상징한다. 유럽의 해밀턴은 사고뭉치인 아시아 아이를 야단치지만 그 아이는 딴청을 부린다. 백남준-뒤샹 대결 구조방식이 흥미롭다.

첫 전시에서 소대가리 달을 상징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다. 보이스는 늑대에서 찾았다. 2차 대전 때 몽골계 타타르인 샤머니즘 민간요법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다.

80'인터넷' 예언, 82'휘트니' 회고전 성공 82년 퐁피두 성공 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사진38> 백남준은 1980325'랜덤액서스정보'라는 뉴욕현대미술관 특강에서 "21세기 회화는 극히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벽지가 될 것이다, 비디오나 TV는 브리태니커사전처럼 항목이나 페이지로 찾을 수 없지만 앞으로 임의로 찾는 방식이 개발되면 책도 사라진다"라며 종이 없는 인터넷시대'를 예언했다.

그해 가을, 백남준은 또 베를린 국제무선전신엑스포에 레이저기술자 '호르스트 바우만'과 함께 비디오작품인 '레이저 비디오 공간1'을 출품해 '레이저아트'를 처음 시도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그 후 오랫동안 자금과 여건이 안 돼 미뤄오다가 2000년 뉴욕 구겐하임 전에서 완성도 높은 레이저아트 '야곱의 사다리' 등을 선보였다.

1982'휘트니미국미술관'에서는 '백남준 대규모 회고전'이 성황리에 열렸다. 이 전시에서 32대 컬러TV8대 흑백TV로 만든 비디오조각 '비라미드(비디오+피라미드 합성어)'가 발표되는데 호응이 좋았고 이를 계기로 이 미국미술관 소장품이 돼 백남준의 새 미국시대를 열었다. 이 작품은 후에 '다다익선'으로 재탄생한다.

백남준은 이 전시를 더 홍보하기 위해 인기가 없어진 '로봇 K-456'을 이 미술관근처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죽게 하는 해프닝은 벌려 당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또한 그해 5월 이 미술관에서 당대 유수한 미술관관장들이 모여 백남준의 미술사적으로 재평가하는 '토론회'도 열려 '비디오아트'란 새 장르의 위상이 더 확고해졌다.

<사진39> "21세기는 198411일부터 시작된다

1982~1983'퐁피두' 회고전 성황: 백남준 I '삼색 비디오(Tricolor Video)' 1982.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선보인 대형작품. 201421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백남준문화재단 주최)에서 '라티고'교수가 설명할 때 쓴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백남준은 또 미국뿐 아니라 70년대 말 독일 뒤셀도르프 조형대 교수가 되면서 이웃 나라 프랑스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미국에서 백남준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를 알린 '핸하르트'가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소르본대 영상학 교수인 '장 폴 파르지에(J. P. Fargier)'가 있었다. 그는 백남준을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라며 극찬했다.

<사진40> '파르지에'1982년 백남준 퐁피두센터 개인전을 앞두고 1981년 백남준의 사상적 기원(L'Arche de Nam June 22)'이라는 인터뷰영상을 제작한다. "'(color)'이란 시간을 뜻하고, 섹스를 뜻한다"라는 백남준의 말로 시작하는 이 대담에서 한 발언은 당시 프랑스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서 백남준은 '자아형성·사랑과 금전·시간과 공간'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원이 된 맑스는 물론 그의 예술적 이론과 실천에 큰 영향을 준 맥루한, 케이지, 보이스, 마치우나스 그리고 스탕달과 시인 발레리 등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놓아 프랑스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퐁피두센터에서 19821215일부터 1983411일까지 백남준의 회고전이 열렸다. '파랑·하양·빨강' 프랑스국기를 '전자국기로 변형한 '삼색 비디오(Tricolor Vidéo)'를 선보였다. 256대의 컬러TV128대 흑백TV(384)8개 비디오테이프가 오색찬란한 영상을 연출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 전시에서 "나는 TV 안에 인간의 뇌를 심고 싶다<인공지능> "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작품설명을 하면서 예술과 일상을 반반씩 뒤섞었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예술에서 대중의 참여와 취향이 매우 소중함을 피력한하다. 영국의 '일상으로 내려가는 예술(down to earth)'과 일맥상통한다.

김광우 미술평론가의 설명에 따르면 헝가리출신의 프랑스조각가 니콜라스 셰퍼(N. Schaffe 1912~1992)는 레이저로 쏘아 300m가 넘는 인공두뇌조명탑을 세워 프랑스국기를 만들겠다고 장담했으나 물리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걸 비디오아트로 구현해 프랑스인에게 흡족함을 줬단다.

<백남준 고민은 언제나 일관되었다. 동서를 어떻게 연결할까? 소통이 가장 큰 고민거리>

<사진40> 50살이 된 1982년 백남준은 이렇게 뉴욕과 파리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전 지구적으로 충격을 줄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1983년 말은 '폭풍전야'와 같은 해였다.

백남준은 이미 'TV'를 예술화했지만 이번에는 '인공위성'을 활용한 예술을 상상했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라 좋아했다. 그래서 그해 8월 백남준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는 케이지를 찾아가 그들 설득한다. 이 부분과 관련된 내막을 그걸 여기 소개한다.

"당신과 보이스가 인공위성 중계를 통해 미국과 유럽 사이를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이는 마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프랑스 철학자)와 노먼 메일러(1923~2007 미국 소설가)와 실존문제를 놓고 위성대담을 벌리는 걸 상상하는 것과 같잖아요. 양 대륙 간 하늘이 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고작 몇 백 명을 놓고 하루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공연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 야심작을 성사시키려 인사들을 두루 만났고 그 중 미국방송(WNET) 프로듀서인 '캐럴 브란덴버그'도 있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사진41> "1983년 여름 어느 날 백남준이 찾아와 다짜고짜 하는 말이 내년 11일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는 오웰에게 한수 가르칠 수 있는 결정적인 날인데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TV쇼를 하겠다고. 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기간이 너무 촉박하고 또 그 짧은 시간 내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없던 이야기로 하자고 말렸죠. 그런데 그는 이미 프랑스채널(FR) 3TV와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고 퐁피두센터와도 프로그램 대한 결정을 해놓고 있었어요. 나는 영락없이 백남준에게 걸려든 셈이 됐어요."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 백남준은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이란 경계를 흐리게 했다. 그래서 대중예술가와 고급예술가를 번갈아 등장시켜 '대중 쇼' 방식을 취했다. 이 난제는 누구도 풀기 쉽지 않은데 백남준은 이를 능수능란하게 해결했다. 그리고 춤, 노래, 코미디, 퍼포먼스 등을 융합하며 탈장르를 시도했다.

백남준은 당시 스타급 연예인과 예술가 100여 명을 그것도 11일 한곳에 모으는 초능력을 보였다. 뉴욕에선 '앤더슨, 긴즈버그, 무어먼, 케이지, 커닝햄' 등이, 파리에선 '사포, 보이스, 삭스, 팅겔리, 생팔' 등이 출현했다. 전위무용가 '커닝햄'14년만에 방송에 출현시켰고, '보이스'6년 만에 무대에 올렸다.

'25백만을 위한 예술(Art for 25 mill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19841128일부터 129일까지 베를린 '다아트갤러리(DAADgalerie)'에서 열린 백남준 특별전 초대용 포스터

우여곡절 끝에 198411일 뉴욕(정오), 샌프란시스코(오후 3), 파리(오후 6)를 동시에 연결해 한국, 일본,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 11개국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로 송출했다. 이는 세계미술사에서 유래가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 최초의 위성오페라 쇼로 백남준은 명실 공히 세계적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미술사에 유래 없다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시청률이 초반 7%까지 올라갔다.

이 위성 쇼는 뉴욕의 사회자인 플림튼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당신을 만날 시간이네요. [...] '빅 브라더(Big Brother)'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TV는 우리의 뇌를 먹지요, 하지만 조지, 당신은 오버했던 것 같아요, 어떤 것은 아직도 남아있어요, 봐요, 당신은 좀 틀렸군요"라는 멘트로 시작한다.

이 작품명은 영국의 민주사회주의자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1946년부터 2년간 쓴 소설제목에서 차용한 것인데, 이 내용은 1984년에 되면 '빅 브라더(Big Brother 가상의 독재자)'가 나타나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상이 온다는 내용을 담겨있다.

그러나 백남준은 오웰의 생각이 반만 맞았다며 그의 '빅 브라더'론을 조롱했다. 하긴 오웰의 예측이 다 틀린 건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형편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첨단미디어기술'이 개발되면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쌍방소통이 가능할 거로 낙관했다. 그러나 오웰은 '인터넷-SNS시대'가 오리라고 전혀 예상못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왜 생방송인가?: 그런데 왜 백남준은 화면이 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이 ''를 생방송으로 진행했을까? 1987년 그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에베레스트나 알프스빙벽에 도전하는 이유가 위험한 것 자체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열정 때문이 아닌가. 백남준은 작가적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도 하지 않은 걸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그는 60년대 초부터 '미래의 빛(A Satellite)'이라는 뜻이 담긴 '위성예술을 하는 데 관심을 두었고 미래를 사유하는 자로서 경계 없는 지구촌을 그려왔다.

2번째 이유 <가짜뉴스 예방> '굿모닝 미스터 오웰''생방송'인 를 추론해 보면 그건 바로 방송이 오웰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권력자에 의해 정보가 임의로 조작되고 왜곡·굴절되는 것을 최소화하자는 상징적 조치였고, 쌍방형 미디어로 소수인 '빅 브라더'가 대다수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로 악용하려는 걸 막자는 주도면밀한 의도가 깔려있었다.

'소통과 참여'는 백남준 예술의 키워드: 남준 아트센터에서 201411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에 소개된 그의 사진과 그의 어록(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을 합성

<> <1> 백남준은 신문중독자, 그래서 그는 시사 예술가 정보 예술가가 되었다. 지구촌 세상이 돌아가는 일을 빠삭하게 안다. 시사를 모르면 역사도 모르고 서사도 이해할 수 없다. 백남준이 세기적 예술가가 된 이유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정성선생 지난번 만났을 때 하시는 말씀 뉴욕에서 작업할 때 아침마다 백남준 선생을 위해서 신문 사는 게 첫번째 일이었다고 하도 가니 신문가판대에 직원이 이 선생이 가면 벌써 미리 챙겨놓았다고 한다> 백남준은 인터넷이 없는 시대에 자기가 만든 인터넷을 활용하다. 백남준은 시사 예술가이다 시대정신가 뭔지 항상 탐구하다. 그래서 그는 정보아티스트이고 미디어아티스트이다 아래 보니 완전 야행성...

-백남준은 인터넷 없는 시대에 세계신문을 통해서 인터넷을 봤다 물론 한국신문과 독일신문 슈피겔지도 같이 읽었죠 백남준은 뉴욕주식시세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번은 백남준 월가 금융계 회장의 초대로 만난 적이 있는데 월가의 인사발령까지 다 알고 있어 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백남준이 가장 좋아한 한국의 역사문서는 삼국유사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한국인의 판타지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대신 왕조사관인 삼국사기는 전혀 좋아할 수 없었죠 김훈과 도올과 인터뷰에서 그런 점을 밝히다

<2> 박만우 2대 백남준아트센터관장의 증언, 백남준은 전 세계의 석학과 과학자와 예술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네트워킹하는 아티스트> 백남준은 미국 나사의 우주 물리학자나 하버드대 미생물학교수 같은 과학자 뿐만 아니라 세계적 예술가 등 2500(이 숫자는 박만우 관장의 말)의 전문가와 끊임없이 줄기차게 (전화 등으로) 소통을 했기에 세계적인 작가 세기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3> 한나라의 경제 순위는 언제나 쉽게 바뀔 수 있지만 문화 순위는 바뀌기 쉽지 않다. 우리 어휘에서 15천 단어는 중국에서 수입해 쓰고 있다(백남준).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상품 수입과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중국이 문화국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일본 문자가 다 중국한자에서 온 것이다 <위 사진백남준 1주기에 독일 뒤셀도르프시에서 백남준에 대한 추모와 존경의 표시로 시내버스(tram)에 큰 사진을 붙이고 다니다>

<민주주라라 뭔가? 말대꾸다> 이를 통해 백남준은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지구촌'이라는 맥루언의 개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식시켰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건 바로 백남준 예술의 핵심인 '참여와 소통'이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누구나 즐기는 '댓글' 같은 게 백남준이 상상한 '참여와 소통''에스페란토(국제어)'였다

이런 정신은 백남준이 60년대 가담한 '플럭서스' 운동과도 상통한다. 플럭서스 즉 영어로 'FLOW(흐른다)' 소통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세상을 염원하는 것인데, 백남준은 이런 발상으로 '인터넷' 없는 시대에 기술과 예술을 융합해 국경·인종·언어는 뛰어 넘는 '인터페이스' 세상을 만들려했다. 동과 서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소통 대화하다

'굿모닝 미스터오웰'의 내용에서 동구권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굿 장면'이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할애되는데 이는 백남준이 동서 간 정보결핍으로 발생하는 오해를 제거하고 서양이 동양을 사회문화적으로 깔보는 일을 없애려는 사전조치였다.

이런 '참여와 소통' 방식은 '오웰'이나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 사회 그리고 그 이전에 맑스가 말한 '소외와 착취' 사회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이런 네트워킹 방식은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한 식구라는 묘한 연대감을 주며 평등하게 참여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세기를 열 수 있다는 비전을 품게 해주었다.

그때 백남준은 "21세기는 198411일부터 시작된다"라는 놀라운 말을 던진다. 그는 20세기에 이미 21세기를 연 셈이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를 꿈꾼 지 20여 만에 세계를 호령하며 지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문화칭기즈칸'이 됐다.

중계여부가 결정되자 백남준에게 이번엔 제작비 40만 달러가 문제였다. 록펠러재단에서 17만 달러를 지원받았으나 그거로는 턱없이 부족하자 아이디어를 내 케이지, 보이스, 커닝행, 긴즈버그가 만든 판화를 만들어 팔아 7만 달러를 충당했다. 이밖에도 서울 원화랑 정기용 사장이 4만 달러를, 프랑스방송과 KBS 등에서도 협찬했다.

<사진42> https://seulsong.tistory.com/435

백남준은 프로젝트 방영 후에도 빚 갚느라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했다. 돈을 빌리기 위해 개인파산을 전제로 부채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다. 19846월 귀국했을 때 만난 유치원친구 이경희 여사도 이 소식을 듣고 그 빚을 갚는 데 조금 도움이 되고자 기부하려 했으나 그런 한국 돈은 쓸 수 없다며 간곡히 거절한다.

이 사건 이후 34년 만(1984622일 저녁 8)에 금의환향한 백남준

<사진43> 1984년 새해맞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 프로젝트로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백남준은 1984622일 저녁 8시 김포공항에 귀국해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기자회견하는 모습. 여기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왼쪽은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

백남준은 세계적 아트스타로 부각되면서 한국에서도 덩달아 유명해져 34년 만에 금의환향한다. 그래서 "80년대 역수입된 한국산작가"라고 불렸다. 그런데 1984626일 모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폭탄선언'으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다. 그 인터뷰내용 중 일부를 여기에 인용한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이에 대해 이용우 미술평론가는 "그가 말하는 '예술사기론'은 사실상 그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기상천외한 언어를 통한 시선 끌기와 도발적 제스처 등을 보여 온 '플럭서스' 철학에 가깝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기론'과 관련해서 백남준의 귀국시기가 묘하다. 국내적으로는 신군부독재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고 언론통제가 심해 학생·민주화운동이 더 격하게 일어났고, 국외적으로는 1984LA올림픽에 구소련이 불참하는 등 신냉전체제가 고조되었다. 당시 상황은 백남준이 작품에서 그린 평화와 공존의 세계와도 정반대였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 선보인 이 작품은 신군부독재와 신냉전 시대를 질타하는 메시지가 강하게 풍긴다. 하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고 오히려 미학적이라 당국도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 백남준은 마치 교란자가 된 듯 독재와 냉전의 주제를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계산된 고등사기를 친 셈이다.

하여간 이 작품은 당시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다. 외국 언론은 '1984년 하이테크 아트가 폭발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고, 국내언론도 백남준이 6월 귀국했을 때 폭압적 전두환 시대였음에도 '첨단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나 '식을 줄 모르는 백남준의 열기'와 같은 제목을 붙이며 대서특필했다.

백남준이 퐁피두센터 앞에서 이 작품을 총 지휘할 때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과 그의 남편 '천호선'씨가 어떻게 보게 됐는지 그 뒷이야기는 생략하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2년 후 '86아시안게임'을 맞아 '바이바이 키플링(1986)'로 이어졌고, 4년 후 '88서울올림픽' 때에 맞춰 '지구를 손으로 감싸고(1988)'가 나오면서 위성오페라 3부작이 완결된다. 백남준은 이를 통해 국제적으로 브랜드가치가 전무한 한국의 위상을 높이면서 한국을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44> "동은 동, 서는 서가 아니라 지구는 하나다" "동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에 반발 '바이 바이 키플링'은 영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시인 키플링이 "동은 동, 서는 서이니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라고 한 노래에 반발하며 만든 작품이다. 다양성을 찬미한 백남준의 '다다익선'또한 19881026일 제24회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높이 18.5m, 지름 7.5m의 거대한 철골에 1003(103일 개천절) TV 모니터를 설치한 총 7단 규모의 철골 구조로 만든 기념비적인 백남준 작품 중 하나인 '다다익선'을 선보였다.

<사진45><사진46> 1989 프랑스 혁명 200주년에 그의 로봇 시리즈 중 최고작품이 나오다. 제작비가 많았겠죠. <백남준의 명성이 날로 커지자 1989년 프랑스 정부는 혁명 200주년을 맞아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바로 '전자요정(La Fée Électronique)'이다. 이 연작은 '석판화(진화·혁명·결의)''TV로봇'으로 나뉜다. 여기에 나오는 8명의 주인공은 '마라', '루소', '구주', '당통', '디드로', '다비드', '로베스피에르', '볼테르'.

그는 8명의 계몽가에게 부제를 붙여 혁명 정신을 재조명했다. '-폴 마라'<암살> , '루소'<노자 자연> , '구주'<프랑스여성> , '당통'<웅변> , '디드로'<여씨춘추(백과사전)일자천금> , '다비드'<문화혁명은 예술혁명을 전제로 한다> , '로베스피에르'<혁명은 폭력을 정당화하느냐> , '볼테르'<이성과 자유> 가 부제로 붙었다.

<1990년대>

<사진47> <백남준은 어떻게 전자무당이 되었나 그의 차별성은 굿판의 TV와 피아노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백남준은 굿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선()도 좋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에 비하면 무척 따분하지"> 굿의 현대화 예술화 시도를 시도하다 지금 같으면 인터넷(SNS)이 들어갈 것이다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거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백남준

백남준의 '굿'에 대한 높은 자부심: 백남준은 전자샤먼이기에 그의 추모굿에 TV가 빠질 수 없다. 사진에 삼성TV가 보인다. 백남준은 이토록 한국의 무속문화를 아끼고 사랑했다. 시게코의 저서 <내 사랑 백남준> 을 보면 백남준은 한국의 굿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 시게코와 의견충돌로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남준 말하길 "일본의 선()도 좋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에 비하면 무척 따분하지"라고 하자, 시게코가 "무슨 소리예요, 둘 다 각자의 이론과 배경을 가진 철학인데 위아래가 어디 있어요"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백남준이 다시 "절대 아냐! 한국샤먼이 훨씬 창의적이지"라고 맞섰다.

백남준이 샤머니즘에 매력을 느끼는 건 역시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게 다리를 놓기 때문이다. 쌍방적이고 수평적인 민주적인 소통방식을 보인다. 샤먼과 관중이 일심동체가 되어 몸과 마음이 교류하는 '네트워크' 때문이다. 백남준은 거기서 원시적 생명력과 예술적 착상·영감 쾌감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의 의식 속에 유교나 불교보다는 샤머니즘적 뿌리가 더 깊다. 한의 정서가 깊은 우리에게 체질상 더 맞는 관점일지 모른다. 죽은 자와 만나 생전에 불통으로 쌓인 오해를 풀고, 서로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상생한다는 게 말이다. 게다가 샤머니즘에는 '경천애인(몽골어로는 '탱그리')' 같은 따뜻한 인류애도 담겨 있지 않은가.

<사진48> 1991<나의 파우스트 스위스 취리히에서 전시> 유명미술상 다 싹쓸이하는 시기: <아래 작품(예술)외에 교육·농업(식량통신·정보·종교·건강·경제·환경·인구과잉·운송(소통자서전·국수주의 등의 제목이 붙어 있고 13개의 연작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1991년 스위스 바젤과 취리히에서 이미 전시되었다>

과천 회고전 대표작, '나의 파우스트(연작)' 백남준 I '예술' <나의 파우스트> 13개 연작 중 한 작품. 8채널(FAUST CHANNEL 8_ARTS) 127×81×226cm 1991-1992 작품은 가까이서 보면 백남준은 왜 천재인가를 알 수 있다 주제에 대한 풍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1992년 백남준 회고전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때 그의 대표작은 유럽에서도 큰 호응을 받은 '나의 파우스트(My Faust)' 연작이었다. 유럽의 기품 넘치는 고딕성당 같은 모양을 한 이 작품은 교육·농업·통신·정보·종교·건강·경제·환경·예술·인구·운송·자서전·국수주의 등의 제목이 붙어 있고 13개의 연작으로 되어 있다.

'예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위 작품은 유럽 순회전 때 선보인 작품 중 하나이다. 25개 모니터가 배치되어 있고 3개의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를 사용해 주제와 연관된 이미지를 콜라주 했다. 그리고 음악과 문학과 조각 등과 관련된 오브제를 부착했다.

또한, 이 작품명에 어울리게 밑에는 '피아노'가 위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책도 보인다. 백남준은 공간예술에 시간과 역사라는 맥락을 도입하여 TV조각으로 바꾼 것이다. 작품 뒤 복잡한 전기선이 연결됐는데 그것만 봐도 첨단예술품이다.

<사진49> 1991"넥타이는 멜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고 피아노는 연주할 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술 수도 있다"-백남준. 그를 만났던 독일의 유명미술사가들이 회고하는 백남준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그의 말은 모두 의문투성이인데 모든 걸 되돌아 생각하게 한다. 모든 행동이 나에게 호기심을 일깨웠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창의적으로) 생각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사고의 단초가 되었다

<사진50> 1992년 도올과 만남 <#> 철학자 김용옥, 백남준을 찾아가다

1992년 백남준 회고전이 있다는 걸 알았던 도올 김용옥은 1992년 백남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 그와의 인터뷰를 시도했고 그 내용이 그의 저서 <석도화론> 에 남아있다. 그 중 유명한 백남준의 말은 "예술은 텃세다, 보편성이 아니다"이다. 이는 한국이 앞으로 풀어야 할 서구주의의 극복을 강하게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1992년 백남준 회갑전에 <작가와 대화> 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대강당에서 있었다. 백남준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관객이 많았단다. 이 장면을 보고 도올 선생은 질문 방식이 정연한 것이 무작위한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 보니 그런 선입견이 다 깨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날 관객의 기지 넘치고 수준 높고 질문에 탄복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적고 있다.

그중 몇 가지 소개하려 한다. 누가 "우리 미술학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백남준은 "한국 민족은 <삼국유사> 에서 보듯 판타지가 대단한 민족이나 미국에서 '한국 미술 5천년전'이라고 해서 가보니 한국의 판타지는 다 죽여 버리고 맨 중국적인 것만 진열해 놓아 매우 서운했다""한국 민화의 컬렉션이나 해석에서 아직도 일본이 한국을 앞지르고 있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더 흥미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누가 "당신에게 예술은 뭔가?"라고 물으니 백남준은 "지금 내게 예술은 돈을 벌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자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또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앞 질문들 너무 어렵고요, 전 미술시간에 생각 없이 그림을 그리는데 선생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느냐"고 질문했다. 백남준은 "그래 아무생각 없이 그리는 게 최고의 그림이야, 아무쪼록 생각 없이 그려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절대 선생님 말씀을 듣지 마라"고 대답해 또 다시 관중의 마음을 잡았다.

도올 선생도 질문했다. "당신은 나처럼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공부벌레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박식한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백남준은 "난 당신처럼 그렇게 심각한 공부나 독서를 하지 않는다""내 지식원은 대강 '신문'이다"고 답한 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데 신문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반영한다. <뉴욕타임스> 만 잘 읽어도 한국 학자들 서재에 쌓인 책 정보보다 더 명료한 세계사적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3대 정보탱크는 '슈피겔(독일신문)-미정보국(CIA)-미쓰비시'이다."

<사진51> 1993년 백남준 최고의 전성기-1994년 뮌스터미술관 몽골텐트 소장-1996년에 쓰러지다

백남준은 1990년대 황금기를 맞아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전자초고속도로'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유치-그런 공로로 19963월 삼성재단 호암상을 수상했지만 작업에 대한 과로로 49일 뉴욕 자택에서 쓰러진다. 그의 생애 최고의 전성기에 최고 위기를 맞는다 -기자 말

황색재앙이 나다 30년에 황제가 되다 (문화)칭기스칸의 귀환 수상작 제목 전자초고속도로 즉 인터넷 1993년 클린턴이 훔쳐가다. 정보초고속도로(인터넷)<사진> 1974년 록펠러재단에 응모한 프로젝트가 인터넷/살불살조 백남준을 보면 백남준을 죽여라 W3(1993년작) 독일대표로나갔다. 독일이 백남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다./<미래를 사유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다 -백남준> 1994년 팀 버너스리에 의해 월드 와이드 웹(WWW)이 실제로 처음 가동되었다. 초급 단계의 인터넷이 시작된 것이다. 백남준은 이것을 주제로 한 작품을 1994년에 만들었다 이 작품이 바로 W3. 몇 년 전에 구상된 작품이겠죠. 학고재 전시 때 사진.

이 상을 타면서 백남준은 "상을 타는 건 좋은 일이나 올림픽처럼 꼭 상을 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백남준은 2년 후 독일 <캐피털> 지가 발표한 미술가 중 세계 5위에 오를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한다.

수상작 제목은 '전자초고속도로'인데, 백남준은 '마샬 맥루한'처럼 지구를 하나의 촌으로 봤다. 동서가 미디어환경의 변화에 따라 교류와 소통을 통해서 서로 만나야 한다는 주제를 표현했다. 최초의 실크로드 개척자인 '마르코 폴로'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등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고비 사막부터 유목민의 이동수단인 말과 코끼리 등을 타고 가는 모습이다.

<사진52> <30년만에 칭기스칸의 귀환>

<사진52-1> <절정기에 자기무화를 선언> 백남준을 보면 백남죽 죽여라/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한 작품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살불살조(殺佛殺祖)'. 이 제목은 부처라는 관념에 집착하지 않을 때 깨달음이 온다는 뜻으로 우상파괴자인 백남준의 면모를 또한 잘 보여준다. 서양미술계 한복판인 베니스에서 동양의 불교사상의 진수를 설치미술로 유감없이 알린 셈이다. https://seulsong.tistory.com/415

<19933가지 공로: 국립현대미술관에 휘트니비엔날레 순회전 유치(3억기부) 국제감각 키우기와 우물 안 개구리 벗어나기 -베니스 한국관(23:1) 유치, 백남준은 "한국미술을 50년 앞당긴 쾌거"라고 좋아했단다. 백남준의 또 하나의 걸작, '프랙탈 거북선'<사진> -1995년에 광주비엔날레 유치> 인포아트 전 세계 뉴미디어 작가 다 불러들이다

<사진53>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순회전

<사진54> 1995년 생애최고의 해 미국의 전자초고속도로 최고인가

1995년에 광주비엔날레 출범

<사진55> 특별전 인포아트 : 그리고 광주국제비엔날레 시작 이상으로 중요한 사건은 바로 백남준이 기획한 특별전 '인포아트(Info ART)'전이다. 이 전시는 100만 달러가 들어간 아시아 초특급 전시로 가상현실의 창시자인 '스콧 피셔'를 비롯해 컴퓨터 천재 7명이 내한해 예술과 컴퓨터 만나는 최초의 전시였다. '비디오아트'에서 더 나간 21세기형 첨단 '미디어아트'를 선보였다.

백남준은 이 특별전에 뉴욕미술계 인맥을 총동원해 뉴욕현대미술관 내로라하는 '바바라 런던' 큐레이터와 유명 작가를 광주로 불러들여 세계미술조류에 어두운 한국미술의 견문을 넓혔다. 또 백남준은 김홍희와 신시아 굿맨(C. Goodman)을 한국과 미국의 큐레이터로 지명했고 현대미술에서 정보와 미디어를 얼마나 중요한지 한눈에 인식시켜줬다.

당시 시사저널 편집부장(대행)인 김훈 소설가가 특별전에 관련 인터뷰를 청하며 "이번 인포아트 전에 메시지가 뭔가"를 묻자 백남준은 "난 메시지가 중요치 않다. 나같이 가난한 예술가는 메시지를 주업으로 하는 영화시장에 대항할 수 없다. 나는 메시지보다 더 본질적인 것, 더 고귀한 것을 추구한다. 나는 지금까지 예술에서 '의미'를 탈각시키는 세계 속에서 살아왔다"며 노자가 말하는 공()의 미학을 강조했다.

백남준 인포아트전에 '고인돌' 출품 <선사시대에 대한 상상력 관심> 고인돌 출품 보이스와 같은 생각 상업화랑 갤러리 현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다 박영덕 백남준 전시라면 빼놓지 않고 참석하다.

<사진56> 백남준 예술론 5개국어로 정리하여 로제타석 형식으로 새기다.

백남준은 같은 해 로제타석() 형식에 영어·프랑스어·독어·일본어·한국어 5개 국어로 자신의 예술의 골자가 담긴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https://seulsong.tistory.com/414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아-몽골리언 요소를 좋아한다(Ich mag das chaotische sibirisch-mongolische[독일어])"거나, "굿의 어원은 '' 즉 정신자체이니 미디어와 굿은 거의 같은 말이다[한국어]"거나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몽골선조들은 이 문화로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Mes ancêtres mongols m'inspirent sans doute ce nomadisme culturel[프랑스어]" 문장이 나온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그의 예술은 몽골전승의 굿과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고, 전자시대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라는 해석이다. 백남준에게 '미디어'란 중세개념으로 신과 교류하는 '매개체(meditator)' 혹은 '영매(靈媒)'를 뜻한다. 다시 말해 굿과 샤머니즘, 미디어와 퍼포먼스는 서로 다른 게 아니라 같다는 설명이다.

또 백남준이 이런 몽골의 샤머니즘에 열광하는 이유가 거기에 모든 예술의 원천이 되는 원시적 생명력이 넘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굿에서도 보면 무당이 산자와 죽은 자마저도 소통시키는데 세상에 이렇게 원활할 '미디어'가 어디 있는가.

이런 면에서 볼 때 백남준은 서양과학이 추방 시킨 야생적 사고의 복원을 요구한다. 서구에서 끔찍한 나치 역사가 그에게 큰 각성을 주었으리라. 그래서 백남준은 야생적 사고와 원시적 상상력 결핍이 현대인의 비극은 낳는다고 봤고 이것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레비스트로스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말하기를, 그의 어머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했다. 물론 백남준 자신은 어머니처럼 샤머니즘을 종교로 믿는 건 아니나 샤머니즘에서 예술적인 영감의 소재로 끌어와 샤머니즘을 예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사진57> 1994두 작가의 인연은 휘트니미술관 '2인전'에서 1994년에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강익중 2인전'이 열렸을 때 두 작가의 모습. 부자(夫子)처럼 많이 닮았다

다다익선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태어났다. 200926일 강익중 작가는 백남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작품의 바깥 벽면에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까지 들리는 음향을 부착하고 3×3인치 패널로 만든 '삼라만상'이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두 작가가 극적으로 만나면서 기운 생동하는 멀티 아트의 대장관을 연출했다. 모 월간지 대담에서 강익중은 '2인전' 오프닝이 끝나고 백남준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백 선생이 "30세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며 그때 "현대 미술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현재에 끌어들였다"라는 점을 이해했고, "그는 낮에도 별을 보는 무당, 서커스에서 외줄 타는 광대'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강익중은 백 선생을 한 손에는 비전과 미래를 쥐고 다른 손에는 과거와 전통을 든 광대라고 지칭하면서, 그가 말하는 미래는 몇 백 년 뒤가 아니라 1000년 뒤였고 그가 말하는 과거는 1000년 전 과거였다며 가만히 앉아서 그는 그렇게 2000년을 한순간에 오갔다고 전한다.

<사진58> <그리고 199649일 쓰러지다>

백남준은 1995년 광주비엔날레 유치한 공로로 1996325일 호암상을 수상하다. 그 당시 영상자료 캡처. 자료 이정성 대표 제공. 백남준 호암상을 탈 때 뉴욕에서 서울로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뉴욕으로 가는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탄 이유인가. 백남준이 뉴욕에 무사히 도착하기는 했지만 예감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백남준 추위를 많이 타고 당뇨 등이 있어 건강체질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올 때 "비행기 안이 너무 추웠다" 는 말에 시게코 여사는 항상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결국, 얼마 되지 않아 199649일 자택에서 쓰러지다. 뇌줄중이 온 것이다. 왼손을 못 쓰게 되다

백남준은 긴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 내가 왜 이렇게 쓰러져야 하지. 세상도 신도 참 불공평하지'라고 중얼거렸다" 백남준의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왼쪽을 못 쓰게 된 이후 응급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병실에 창문이 하나밖에 없어 참으로 답답해했다. 백남준은 이러다가 병이 낫기는커녕 몸이 더 악화되겠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백남준 조수인 이정성씨와 존 매카바시 씨는 이 병원의 다른 병실을 샅샅이 뒤져 4층 삼면이 창문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병실을 옮기자 담당의사도 바꿨다. 백남준은 '그린 반'이라는 이름을 보고 독일계인 걸 안 독일어로 인사를 건넸고, 의사가 그의 신상을 캐묻고 그가 세계적 작가라는 걸 알고 된 후 더 친밀하게 대해주었다. 그 의사가 쓰는 치료방법은 독특하다. <섹슈얼 힐링> 이라는 것인데 리비도를 이용한 남성용 재활치료 중 하나다. 백남준도 만족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빨간 타이즈를 입은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2명의 간호사가 나타났다. 이들은 백남준을 갓난아이처럼 다루었고 풍만한 가슴으로 백남준의 몸을 마사지하는 등 물리치료도 했다.

이런 투병과정을 시게코가 작품화하게 되는 계기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호사가 "어머 백 선생님이 여기 웬일이세요?" 물었다. 대학시절 백남준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었다. 그녀는 부인에게 당신은 비디오작가인데 '왜 이런 중요한 순간을 작품화하지 않으세요'라는 말에 시게코도 아차 싶어 작품화하다.

또 한 가지는 백남준이 병원을 옮긴 이야기를 해 보자. 처음에는 뉴욕대학 유대인병원에 있었는데 시게코는 미국에서 당시 최고재활병원인 '러스크 인스티튜트'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거기 들어가려면 하버드 대입학보다 더 어렵다는 병원이었다. 한번은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 '데이빗 로스'가 백남준 문병을 왔기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우리 휘트니미술관의 이사가 거기서 일하니 알아보겠다고 했고 인연이 닿아 병원도 옮겼다.

이렇게 최고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원이라는 게 백남준에게 맞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의사허가를 받고 통로에 난간을 설치하는 등 집을 일부 개조하고 집에 간호사 2명 고용해 12시간 교대로 치료했다. 그는 이런 고생 끝에 1주일 3번 병원을 오가며 물리치료를 받았고 다행스러운 것은 그해 맨해튼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오자 조수들에게 작업지시를 할 정도로 체력과 언어기능이 많이 회복됐단다.

백남준 집과 작업실 소개 2015년 방문 1996년 쓰러지자 그에게 상이 쏟아지다 '괴테상' '교토상'

<사진59> 1997918일에 65세의 백남준은 자신을 베토벤 이상으로 존경하는 독일에서, 독일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괴테상'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그를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뿐만 아니라 존 케이지처럼 '새로운 음악(Neue Musik)'의 개척자로 평가했다.

<사진59-1> 그래서인가. 그해 백남준은 10년마다 독일 북서부 뮌스터 베스트팔렌 미술관에서 열리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ünster)'에 초대받고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를 출품한다. 여기 32대는 백남준이 탄생한 1932년에서 유래한다. 부제는 '모차르트 미사곡을 조용히 연주하라', 자동차의 종말을 위한 미사곡이었던 걸까.

<사진60> 당시 클린턴 대통령 부부는 물론 초대받은 고위인사들도 경악했다. 이걸 백남준이 몸이 불편해 생긴 실수라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지금도 분분하다.

예컨대 이건 연이은 섹스 스캔들을 일으킨 부도덕한 클린턴을 비꼰 것이라는 설과 백남준의 전자초고속도로 아이디어를 클린턴이 훔쳐가 선거 공약으로 도용한 걸 비판했다는 설이 있다. '플럭서스' 출신인 백남준이 미국 대통령 같은 세계적 권력자 앞에서도 예술가로서의 굽히지 않는 기상을 제대로 보여준 퍼포먼스라는 설도 있다.

예상할 수 없는 이런 사건을 두고 그의 플럭서스 동료들은 "브라보"를 외쳤고, 다음날 전 세계에서 축하전화가 쏟아졌다. 미국 기자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의도냐고 물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시게코 여사는 백남준이 "백악관 국빈만찬이라는 게 평생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기회인데 이왕 갔으면 뭔가 해봐야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단다.

1998년 세계 최고 권력가 앞에서 전대미문의 해프닝을 보여준 그의 배짱, 이것은 그의 문화 칭기즈칸의 한 면모다. 그 의도가 어쨌든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가 그에게 '미술학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단상에 올라가서 한 말이라곤 "땡큐"뿐이었다. 이것 역시 화제가 됐다.

<사진61> 2000년 첫날 호랑이 살아있다 호랑이와 사자와 싸움에서 호랑이가 이기는 실제 영상 보여줌

<사진62> 2000년 첫날 무어먼 추모행사 https://seulsong.tistory.com/416

그리고 200011일 임영균사진: <백남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200011일 살럿 무어먼 추모공연하다> (January 1, 2000 in Memory of Charotte Moorman, Guggenheim Museum, New York)

"백남준은 샬럿이 1980년대 암투병을 할 때 의료보험이 없어서 힘들어하자 1991년 죽기 전까지 암 수술치료비에 보태라고 거금의 수술비용을 여러번 도와주었다" 아래 사진은 200011일부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의 '백남준의 세계' 회고전(2000211일부터 426일까지)을 하기 전에 백남준 선생 사전전시회가 열렸고, 전시회 첫날 선생의 예술적 동지였던 샬럿 무어먼을 위한 추모 공연이 있었다. -사진작가 임영균. 이날 백남준은 그녀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고 가운데 오페라 가수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진혼곡) 아리아를 불렀다.? /아래 사진임영균 저작권 1982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Charlotte Moorman and Nam June Paik 샬럿 무어만은 정말 살아있는 인간 조각이다.

1982년은 백남준이 미국에 간지, 18년이 되는 때로 이때부터 백남준의 미국에서의 위상을 확고 백남준 환상적인 전자 액션 음악 파트너였던 샬럿 무어먼 1991년 암으로 사망하자, 1995년에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며 영화 하나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Topless Cellest Charlotte Moorman(1995)이다. 백남준은 1980년대 말과 1990년 초에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독일미술의 신이었던 요셉 보이스(1986년 사망 65)와 백남준의 분신이었던 샬럿 무어먼(1991년 사망, 57)까지 잃게 된다. 1992년에는 백남준 스승 격인 존 케이지까지 사망한다.

<사진63> 2000211일부터 426일까지 백남준의 세계 자금 조달 40억 생활비 1030억 기부 삼성 전자 전자장비 제작비 지원하다. 21세기 300백만 달러가 들어간 이 전시의 대 성공을 거두다()

<사진64> 백남준 뉴욕 구겐하임 전시 2000211일부터 426일 전시되다. 한글 창제의 원리가 된 '천지인' 사상을 레이저 아트로 구현하다 레이저 빛 즉 불이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위에서는 물이 폭포처럼 내려오고 물과 불이 만나면서 뉴 레이저 미디어아트의 탄생을 보여주다 그리고 아래 TV 정원은 백남준의 유토피아 즉 자연이 반이고 문명이 반인 자연과 문명의 상호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표현하다. 이것은 이우환의 돌과 철 즉 자연과 문명의 관계와 조응(relation and correspondence)을 이루려는 주제와 같다. Father of video art Nam June Paik was born today in 1932. In 2000, the Guggenheim presented "The Worlds of Nam June Paik" featuring the artist's seminal installations including "TV Garden"

구겐하임 전시에서 레이저 아트로 <야곱의 사다리> 를 발표한다. 일취월장하는 전설적 인물인 야곱을 등장시켰지만(백남준 뮌헨대 다닐 때 기독교 문화를 공부) 백남준 2000년 구겐하임 전시 때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 에서 유언 같은 예언을 남겼다 "우리나라가 20세기에는 너무나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에는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20세기에 이스라엘(유대인들)이 그랬듯이 21세기 세계문명사에서는 우리가 많은 이바지를 해야 한다"

2000년 백남준 호랑이 살아있다는 작품은 110시에 전 세계 동시에 방영한다 이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을 기원하는 미래지향적인 내용이 담겼다. 그리고 2000년 백남준 뉴욕 구겐하임 회고전으로 뉴욕미술과 전세계 미술을 호령하는 점령자가 된 것이다. 이정성 대표도 이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 전시 때 백남준 입에서 욕이 나올 정도였다.

전시하는데 구겐하임이 너무나 많은 돈을 요구했기에 그래서 1997년 교토상에서 받은 40억 중 30억을 기부하고 그것도 모자라 여러 곳에서 협찬을 받아야 했다 어찌 되었든 백남준은 그의 생애 최고의 전시를 열게 되었다 한국인의 천지인 우주론을 첨단의 레이저 아트로 선보이는 데 성공하여 한국인의 기상을 마음껏 펼치다. 이 전시를 위해서 미국 나사(항공우주국)의 첨단과학기술의 도움도 받아야 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자 오프닝 행사를 무려 3일간이나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남준 포스트비디오는 레어저아트가 되었다. 백남준 이 전시는 서울 로댕미술관에서도 순회전이 열렸다,

<65> 2004년 로봇 남기다==퍼포먼스==2005년에 엄마로 마무리하다==2006129일 숨지다

<66> 200623일 뉴욕에서 장례식

[백남준] 서양미술의 아버지 뒤샹과 관계는?

<사진67> 백남준이라고 뒤샹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백남준도 뒤샹의 오브제아트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도 만들었다. 그러나 백남준과 뒤샹을 완벽하게 시대가 다르다. 뒤샹이 산업사회에서 살았고 백남준은 정보사회에서 살았다. 비교한다는 게 불가능하다. 뒤샹이 이런 바퀴를 만들었을 때 이 바퀴에는 서양의 2000년 이상의 문명사가 다 농축되어 있다. 바퀴는 결국 마차의 기원이 되고 나중에 탱크가 되고 자동차가 되고 고속기차로까지 발전한다. 백남준은 코믹하게 장난기 어린 손길로 여기에 TV와 비디오를 집어넣어 정보시대의 풍경을 가미한 것이다. 그래야 시대정신이 반영된 동시대 현대미술이 되지 않는가.

<사진68> 백남준의 천재성과 그의 위대한 인간성이 가장 잘 드러난 시기가 세상을 떠나기 전 10년이다. 이 시기야말로 백남준의 전성기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하이! 하이!"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걸고, 나는 행복해(I am happy! I am happy!)를 연발했다. 아마도 조물주는 그가 정말 천재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10년간 고생을 시키고 이 세상을 떠나게 한지 모른다. 만약에 그런 백남준의 면모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를 그렇게 존경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낙천적 인간으로 아프다는 것이 삶의 실존이며 거기에서 인간은 더욱 더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평생 축제주의자로 삶을 높은 차원에서 긍정하는 그런 아름다운 생의 마지막 퍼포먼스를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결론><사진69> 백남준 비전 1자신감 2탈영토제국주의 땅이 작아도 전 세계를 지식과 정보로 지배할 수 있다 3'소통과 참여' 말하는 문화 민주주의자 : 쌍방형 문화창조의 전형 공존과 공동번영 강조 https://seulsong.tistory.com/411 4돈보다 축제 521세기 세계문명사 기여 6동서양 친하게 지내는 징검다리 놓다 백남준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천재 71984년 빅 브라더 사회 대안 내놓다 8태어나기 전 탯속 엄마와 대화하기 -'태내자서전'(샤머니즘발상) 9동서와 음양을 음악을 미술로 코드전환: 시공간 넘나들며 장르파괴 10기계의 인간화, 삶의 예술화: 기계와 소통하며 친하게 지내기

<사진70> <부록> 인터뷰 2부 인터뷰 김홍희, 이영철, 박만우, 이경희, 셜리, 파르지에, 시게코

- 동경대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미술가가 됐나요?

"백남준은 쇤베르크 논문으로 동경대를 마치고 독일 뮌헨대로 유학을 갔죠. 공부하는데 전통음악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어 피아노와 피아노 사이의 존재하는 음이 없을까 하며 피아노를 한 대가 아니라 두 대로 치는 것도 발상하죠. 이렇게 고전음악에 대한 돌파구를 찾다가 케이지를 만나 그 사상에 매료되는데, 그가 말하는 음악철학은 음악이 소리의 조직이지 멜로디나 하모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맥박, 호흡이 다 음악의 소스가 되는 비트음악이죠. 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음악, 그러다보니 신체의 리듬부터 자동소리, 기침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다 음악의 범주에 포함시킨 거죠. 미리 작곡하여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에 도전하다 작곡을 하는 방식, 존 케이지는 주역에 나오는 우연성, 비결정성 요소를 도입해 작곡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됐죠. 말하자면 동양정신에 빠진 서구인 철학자에게 서양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이 반대로 큰 영향을 받은 거예요.“

나는 한국인이 기마민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건 지하철 할머니 할아버지들 지하철 놓치지 않으려고 달려가는 모습은 확실하게 몽골계 기마민족의 단면이다.

- 지난해 201210, 영국 '텔레그래프' 지가 '강남스타일 영감의 원천은 백남준'이라고 썼던데요.

"싸이가 생긴 것도 꼭 몽골 사람을 닮았지만, 그 말춤이 기마민족의 어떤 상징성 가지고 있어요. 사실 '백남준문화재단'에서 지난 129일 추모행사를 열 때 싸이 공연 연결하려고 했어요. 백남준의 기마사상, 몽골문화코드를 싸이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백남준을 관념주의자 '헤겔'로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그에게 '니체'가 중요해요. 독일 유학할 때 교과 과정에서도 있었고 독일친구들과 니체를 탐독했어요. 그리고 백남준이 예술에 몸을 대입하는 방식이 예술이론보다는 우선적으로 몸이 먼저입니다. 예술적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방식이죠. 그러니까 그는 몸으로 춤을 추는 철학자였죠

백남준 무봉탑을 좋아했다(?) 이음새가 없는 것 즉 연결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뜻이죠

백남준 선생이 좋아하는 선시 중에 '무봉탑'이 있어요. 이음새가 없는 탑을 말합니다. 요즘 모바일, 유튜브, SNS 등 바로 그거잖아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의 진리를 담은 단지 조각이 아닌 '스투파(큰 사리탑)'가 되는 거죠. 그것이 너무 크고 넓어 모든 인간을 담고도 남아도는 탑으로서의 예술이죠.

<사진70-1> 박만우 2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디아스포라 예술가로서 백남준 사회적 약자의 힘을 믿다

- 백남준은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 크게 성공할 것이며 다만 유태인처럼 한국인도 이제 인류 문화사에 기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인간 백남준, 한국인 백남준이 바로 근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갈등을 다 겪고 그것을 처절하게 실천한 롤모델이 아닌가요. 그걸 보면서 제가 깨닫는 건 바로 '약한 자의 힘(La force des faibles)'이에요.

백남준도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서구에서 많은 설움을 받으면서 백남준이 봤을 때 한국인을 유태인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하죠. 뿌리 뽑힌 삶이 역으로 21세기에 엄청난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분열될 정도의 슬픔과 고통에도 그걸 신명으로 승화시켰잖아요. 한국인만이 가진 유전인자로 본 거죠.

<사진70-2> 이경희: 백남준의 유치원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백남준은 창작활동에서 유치원 때 기억이 꽤 많이 아이디어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술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경험한 것에서 영감을 창출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어렸을 1930년 후반에는 유치원 다니는 게 흔치 않았습니다. 백남준은 부잣집 아들이었고 나도 무남독녀 외동딸인데다 아버지가 일본 유학생이었고 어머니가 동덕여중을 나온 신여성이라 딸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동대문 밖 창신동에 살면서 을지로 2가 명동성당까지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겠어요. 같은 창신동에 살았던 백남준 집에는 그 당시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었던 시절 백남준 집에는 그 차 한 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차를 타고 같이 유치원엘 다녔습니다. 백남준 집은 대문이 커서 창신동에서 '큰대문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진70-3> '윤이상 선생' 국내 초청 건으로 잘못 말했다 큰 곤혹을 치렀다고요?

"1994'윤이상음악제' 때 정부가 윤이상 선생을 초청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날 보고 말리라는 사람이 많았고 국내여론도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백남준에게 전화가 왔기에 '윤이상 선생과 퍼포먼스를 안 하는 게 어때요'라고 의견을 말했더니 백남준이 너무나 크게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백남준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음악가다, 선생과 나는 예술장르와 생각은 달라도 한국의 예술가라는 점에서 같다,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페스티벌에서 만난 후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졌다'고 하면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와 상상력이다, 이데올로기·제도·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백남준 어록 https://njp.ggcf.kr/njpack/saying 백남준 연보 https://njp.ggcf.kr/njpack/biography

백남준 참고도서 : 이용우,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 열음사 2000 김홍희, 굿모닝 미스터 백, 2007, 디자인하우스, 서울 이영철, 백남준의 귀환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백남준아트센터 시게코, 나의 사랑 백남준2010년 이경희, 백남준 이야기』 『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김용옥 석수화론-굿으로 보는 백남준 비디오아트 읽기 박정진199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