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남준랩소디

[백남준] 시게코 백남준 14년 따라다니다 결혼 왜 백남준도 젊어서는 꽃미남이었다 시게코 여사는 천재 시인 랭보를 떠올렸고 그를 일본에서 처음 만나 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를 내 남자로 만들겠다 결심하다 그녀는 백남준이 40년 전 욘사마 열풍 1호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할 정도, 일본 여성 유명 남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26살에 처음 봤고 14년을 따라다녔고(?) 40살에 결혼했다. 그런데 그 결혼 이유가 좀 슬프다. 사실 백남준과 시게코는 예술 동지로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 코뮌 생활을 하는 입장 그러다가 시게코가 어느 날 백남준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다 백남준은 아이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시게코가 병원에 상담을 하는 중 암이 있다는 것과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런데 미국에는 의료 보험이 없이 치료비가 억대로 든.. 더보기
[백남준] 그는 부친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다 “남편은 스스로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택했습니다. 평생 돈을 싫어했죠. 예술은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고 늘 말했어요." -구보타 시게코 여사 백남준 평생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부인이 그가 사망했을 때만은 뉴욕에서 그래도 고급에 속하는 장례식장을 정했다고 한다. 죽은 순간만이라도 좀 편하게 보내고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백낙승)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 1920년대부터 1300여대의 방직기를 갖춘 태창방직을 운영했다. 부친은 일본 니혼대 상과과 메이지대 법과를 나온 엘리트였다 동대문집이 3300평이고 당시 드문 캐딜락이 있었고 차 수리공이 1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식민시대 사업가이기에 일본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었고 백남준은 그런 점이 못마땅.. 더보기
[백남준] 2015년 NY에서 그의 조수를 만나다 라파엘레 셜리와 인터뷰 omn.kr/f9qg 뇌졸중에도 낙관, 장난기 충만했던 백남준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할 때다 21] 백남준 조수였던 라파엘레 셜리 인터뷰 www.ohmynews.com 2015년 6월 백남준 조수를 7년 간 한 라파엘레 셜리(Raphaele Shirley) 작가와 뉴욕 인터뷰 중에서 그녀는 백남준을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남준은 매우 지적이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동양과 서양, 과학과 종교와 예술을 큰 틀 안에서 연결시키는 사유를 했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마음의 스케일이 가장 컸다.[...] 그는 정말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친절했고, 그의 장난기(playful mind)는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단골메뉴였다" 1998년 혹은 1999년 백남준과 같이 구겐.. 더보기
[백남준] '랜덤 엑세스', 백남준의 비밀병기(?)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선보인 첫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라는 개념은 사실 그 해석이 다양한다. 김홍희 선생은 서양의 이분법을 깨는 백남준의 비밀병기라고 했고 박만우 선생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유비쿼터스로 보고 이영철 선생은 무작위 접속을 뜻하며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우연적 인연과 같은그런 모든 요소를 뜻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난지 예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설명하기 힘들 것으로 백남준 말대로 5차원 사기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서양인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방식인데 이것은 사실 오작동하는 디지털적인 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치명적인 오류에서 언제나 새로운 창조가 나온다. 더보기
[백남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두세 가지 백남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구멍을 내고 다녔다. 그는 무미건조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대 혼란이 왔다. 획일적인 것이나 일사불란함 같은 것을 때려부셔 버렸다. 백남준은 예술가 역할 중 하나로 교란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미 서구에서 종교화된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그리고 소통이 안 되는 숨이 막히는 공간에 구멍을 냈다. 또 하나는 그리고 전쟁과 미움과 갈등으로 끊어진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일을 했다. 백남준은 선시 중 하나인 무봉탑(이음새가 없는 탑)이라는 시를 좋아했다. 이 시는 부처님이 말하는 우주만물에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인드라망 사상을 담은 것인데 백남준 이에 크게 공.. 더보기
[백남준] 신문중독자, 그래서 시사 정보 예술가 백남준은 신문중독자, 그래서 그는 시사 예술가 정보 예술가가 되었다. 지구촌 세상이 돌아가는 일을 빠삭하게 안다. 시사를 모르면 역사도 모르고 서사도 이해할 수 없다. 백남준이 세기적 예술가가 된 이유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백남준은 인터넷이 없는 시대에 자기가 만든 인터넷을 활용하다. 백남준은 시사 예술가이다 시대정신가 뭔지 항상 탐구하다. 그래서 그는 정보아티스트이고 미디어아티스트이다 아래 보니 완전 야행성... -백남준은 인터넷 없는 시대에 세계신문을 통해서 인터넷을 봤다 물론 한국신문과 독일신문 슈피겔지도 같이 읽었죠 백남준은 뉴욕주식시세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번은 백남준 월가 금융계 회장의 초대로 만난 적이 있는데 월가의 인사발령까지 다 알고 있어 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백남준이 가장 .. 더보기
[백남준] 그의 인간 됨을 알려주는 에피소드 백남준의 인간됨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를 난 이정성선생(백남준 기술자)에게서 들었다. 독일 등 유럽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어느 식당에 가든지 가장 비싼 메뉴를 골라라. 그러면 그들이 최대로 대우를 해주고 그런 음식이 가장 맛있다. 그러면서 식사비를 충분히 줬다는 것이다. 이 속에 조금 슬픔 이야기가 있다. 유럽에서 다 그렇지는 않지만 동양인의 식사를 할 때 무시당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가장 비싼 것을 주문하면 서양인들이 죽을 못 쓰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외국에 나가면 고생이다. 체력을 보강을 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 그런 인간적 배려 참으로 놀랐다 더보기
[백남준] 위성아트계보 1977-1984-1986-1988 백남준, 제 6회 독일 카셀 도큐멘타 , 1977, 비디오, 컬러, 사운드, 29분 11초 1984년 위성 아트인 의 모태가 되는 작품 더보기
[백남준] 독일 유학하면서 독일 대학들 뒤흔들다 백남준 그 언제 어디에서든 정말 못 말리는 '문화 칭기즈칸'이었다. 그 앞에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백남준이 뮌헨에 유학했을 때 공부한 대학이 정확하게 몰랐겠다. 바로 여기구나 Gallery of Nam Paik Geschwister-Scholl-Platz 1, 80539 München. Germany Nam June Paik studied at the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under the guidance of the composer Thrasybulos Georgiades for a year. 그런데 이 대학은 캠퍼스가 아니고 여러 곳에 대학이 흩어져 있다는데 음악대학은 없는데 어디서 공부한 것인가 원래 작곡을 공부하려고 독일에 간 것이 아닌가.. 더보기
[백남준] 그의 가족 1954년 대형제니스 TV 구입 그의 가족은 당시에도 첨단 기술을 갖췄다. 이것은 신기술에 평생 동안 관심을 갖고 씨앗이 되었다. 백남준 가족은 1954년 대형 제니스 TV를 구입했다. 이웃에 있는 최초의TV이었고, 모든 이웃 사람들 종종 그것을 보러 왔다. 게다가, 그들의 집에는 베토벤을 포함한 많은 고전 작곡가의 기록과 재즈와 스윙이 가득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20 세기 후반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계속해서 신세대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다. 예컨대 Christian Marclay(작곡가 비디오아티스트), Ryan Trecartin(미국작가 영화제작자), Michael Bielický(뒤셀도르프대학 백남준 제자 백남준 그를 최우수학생으로 선정), Jon Kessl..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