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랩소디 썸네일형 리스트형 [백남준] 그의 인간 됨을 알려주는 에피소드 백남준의 인간됨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를 난 이정성선생(백남준 기술자)에게서 들었다. 독일 등 유럽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어느 식당에 가든지 가장 비싼 메뉴를 골라라. 그러면 그들이 최대로 대우를 해주고 그런 음식이 가장 맛있다. 그러면서 식사비를 충분히 줬다는 것이다. 이 속에 조금 슬픔 이야기가 있다. 유럽에서 다 그렇지는 않지만 동양인의 식사를 할 때 무시당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가장 비싼 것을 주문하면 서양인들이 죽을 못 쓰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외국에 나가면 고생이다. 체력을 보강을 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 그런 인간적 배려 참으로 놀랐다 더보기 [백남준] 위성아트계보 1977-1984-1986-1988 백남준, 제 6회 독일 카셀 도큐멘타 , 1977, 비디오, 컬러, 사운드, 29분 11초 1984년 위성 아트인 의 모태가 되는 작품 더보기 [백남준] 독일 유학하면서 독일 대학들 뒤흔들다 백남준 그 언제 어디에서든 정말 못 말리는 '문화 칭기즈칸'이었다. 그 앞에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백남준이 뮌헨에 유학했을 때 공부한 대학이 정확하게 몰랐겠다. 바로 여기구나 Gallery of Nam Paik Geschwister-Scholl-Platz 1, 80539 München. Germany Nam June Paik studied at the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under the guidance of the composer Thrasybulos Georgiades for a year. 그런데 이 대학은 캠퍼스가 아니고 여러 곳에 대학이 흩어져 있다는데 음악대학은 없는데 어디서 공부한 것인가 원래 작곡을 공부하려고 독일에 간 것이 아닌가.. 더보기 [백남준] 그의 가족 1954년 대형제니스 TV 구입 그의 가족은 당시에도 첨단 기술을 갖췄다. 이것은 신기술에 평생 동안 관심을 갖고 씨앗이 되었다. 백남준 가족은 1954년 대형 제니스 TV를 구입했다. 이웃에 있는 최초의TV이었고, 모든 이웃 사람들 종종 그것을 보러 왔다. 게다가, 그들의 집에는 베토벤을 포함한 많은 고전 작곡가의 기록과 재즈와 스윙이 가득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20 세기 후반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계속해서 신세대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다. 예컨대 Christian Marclay(작곡가 비디오아티스트), Ryan Trecartin(미국작가 영화제작자), Michael Bielický(뒤셀도르프대학 백남준 제자 백남준 그를 최우수학생으로 선정), Jon Kessl.. 더보기 [백남준] 지구에는 '백남준이라는 별자리'가 있다 백남준이 세계적 예술가보다는 세기적 예술가 되고 싶었던 것은 그가 '예술'과 함께 '시사'에 밝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대정신(Zeitguist)'이 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한 예술가라는 말이다. 그가 왜 '뉴욕 타임스', '슈피겔' 지 등등 전 세계 유수의 신문을 읽었겠는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전 세계를 농락하는 가짜 뉴스에 끊임없이 분노한 사람이다. 그것이 인류가 소통하는 공동체를 이룩하는데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쌍방형 미디어인 인터넷을 열망(발명)한 것이다. 인터넷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나마 가짜뉴스를 막아내는데 큰 공로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백남준의 은하계(갤러시)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더보기 [백남준] 전 세계 누빈 그의 삶 연대기 정리 어려워 독일에 유학한 백남준 처음에는 뮌헨 대학(백남준 지도교수명이 나오네요) 다니다가 너무 보수적이라고 생각해 프라이부르크 at the International Music College in Freiburg로 대학을 옮겼다> He was born 1932 Seoul. He received a BA in aesthetics from the University of Tokyo in 1956 where he also studied music and art history. After graduating, he studied for a year with composer Thrasybulus Georgiades Georgiades at the University of Munich and for two years with.. 더보기 [백남준] 한국인 그렇게 찬양했지만 이것 만은[...] 민화의 가장 큰 기교는 서툰 것처럼 그린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포스트모던하다. 현대회화는 못(엽기적으로) 그려야 살고 틀리게 그려야 생존할 수 있다 백남준은 한국인을 늘 훌륭하다고 칭찬을 했지만 드물게 꾸짖은 적도 있다. 우리나라가 민화 연구에서 일본의 한국 민화 연구보다 훨씬 못하다고 호통을 친 것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민화란 이다. 다시 말해 우리 체질과 취향에 맞는 그림이다. 물론 수묵화나 문인화, 궁중미술의 영향이 없지 않다. 중국적인 요소도 있겠죠 그러나 결국 민화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다. 한국미술의 원자본(source)인 셈이다 민화가 위대한 것은 미추의 차원을 넘어 승화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 부른다. 왜 결국 웃음을 터트리게 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 더보기 [백남준] 모든 전쟁의 시작은 '가짜뉴스'에서 모든 전쟁은 결국 가까뉴스에서 온다. 히틀러의 가짜 뉴스에 독일국민이 속은 것이다 백남준의 천재성은 1960년대 초 당시로는 반민주주의 상징이기도 한 그래서 별명이 바보상자다. 즉 일방향으로(one-way) 쏟아붓는 정보전달방식인 TV를 쌍방이 주고받는 방식(two-way)인 Video 형식으로 바꿔 당시로는 말도 안 되는 미친 혹은 엽기적인 전자 정보예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깔려있는 백남준의 철학은 바로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고 독재(파시즘)를 반대하는 것이다. 원활한 소통과 정확한 팩트에 근거한 정보야말로 전쟁과 독재를 막는 지름길이라고 본 것이다 가짜(허위)뉴스의 폐해를 백남준은 이미 60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모든 악 중의 악의 진원은 바로 가짜뉴스에서 온다는 것이다. 모든 전쟁이 결국은.. 더보기 [백남준] 그가 평생해 온 예술주제 '전쟁방지' "백남준이 평생해온 예술의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전쟁방지다" -소통이 결핍되면 전쟁이 일어난다 백남준 식민지 시절 경기중고시절 실전을 방불케 하는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은 세대다. 그의 전쟁에 대한 거부반응을 처절했다 그는 독일에 가서 그런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여유없이 노출시킨다 그래서 동양에서 온 테러리시트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의 모든 Performance는 결국 전쟁악귀를 추방시키는 해방굿이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였던 과달카날 군도를 배경으로 '과달카날 레퀴엠(Guadalcanal Requiem) 1977작'을 제작하고 프랑스·인도·베트남 등의 여러 도시를 탐구하는 '비자(Visa) 1978'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쟁과 같은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매체로서 TV가.. 더보기 [백남준] 그에게는 일본인 지인들도 많았다 일본의 세계적 작곡가 뮤지션 [1] 류이치 사카모토, [2] 명성이 높은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3]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 전위예술가 [4] 오노요코 그리고 실험물리학과 전자공학을 전공한 기술자 [5]아베, 동경대 다닐 때 음악학 교수 [6]노무라 요시오(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평화주의자) 등등 이밖에 많다 1963년 백남준은 일본에 잠시 머무르며 전자공학을 다시 공부하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있는데 당대 최고 엔지니어인 [7]'우치다 히데오'이다 그 외도 많다. 또한 백남준 일본인 대학동창 [8] '시부사와 미치코'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평소 고국이 처한 상황·체제와 싸우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쳐 나온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영철 전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 더보기 이전 1 ··· 38 39 40 41 42 43 44 ··· 4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