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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작업비 부족으로 늘 빚에 시달리다 2000년 이용우 선생이 백남준에게 묻다 “살면서 제일 실패한 일이 무엇이냐. "나는 명성도 얻었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지. 그런데 나와 유사한 환경의 명성을 지닌 예술가에 비해 유독 돈을 버는 데 실패한 것 같아.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년까지도 나는 꽤 경제적 고통을 당했지. 1984년 을 만들 때 40만 달러가 들었는데, 그때 진 빚으로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했지. 구겐하임 전시회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료비를 조달하기 위해 정든 작업실까지 팔려고 내놓았을 정도였고. 사실 비디오아트라는 게 실업實業, 즉 비즈니스는 아니나 적어도 허업虛業이라서. 허업이란 아이디어와 자금과의 마이너스 곱절이라는 말이지. 비디오아트로는 어떠한 아이디어가 있어도 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 마을의 이름 없는 발명.. 더보기
[백남준] 내 가슴에 비 내리듯 내 컴퓨터에 비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컬렉션한 백남준 소장품 좋은 작품을 소장했지만 소장품이 너무 적다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현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적인 신체와 감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도로 기계화된 사회에서 팔, 다리는 퇴화하고 머리만 발달된 기계처럼 진화할 것 이라던 인류는 오히려 사람을 닮은 기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햅틱스(Haptics) 기능은 키보드와 마우스, 조이스틱, 터치 스크린 등의 방법을 통해 촉각과 힘, 운동감을 사이버 세상으로 옮겨오고 있다. 점점 더 많은 기계들이 인간처럼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맛보게 될 것이다. 스콧 조플린의 모습을 한 백남준의 TV 모니터처럼 미래에는 ‘사랑하는 누군가’의 모습과 감성, 기억을 가진 로봇이 등장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를 닮은 그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기.. 더보기
[백남준] 상호소통, 실험, 정주유목민, 무목적 “비디오 소통 혁명의 최종 목적은 거침없는, 혼선 없는 상호 소통(TWO-WAY COMMUNICATION)” -백남준의 중에서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 아닌가. 속이고 속이는 거지.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지.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지.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지. 내가 30년 가까이 갖가지 해프닝을 벌이고, 예술 같지도 않은 도구로 예술을 선보였을 때 대중들은 미친 짓이라고 웃거나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들은 그것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지"(1984년 6 월 26일 조선일보 인터뷰 중). "내가 하는 예술은 실험을 위한 실험 예술이야. 예술 형태 이전의 것을 실험하고 있는 거지" -백남준. 1984년 선사시대의 예술을 실험한다는 소리인가? "새.. 더보기
[백남준] <서울에서 부다페스트까지> * 백남준은 자신의 성장 과정과 정신적 배경을 담은 비디오 프로그램 를 제작했다. 이 영상 속에 ‘큰 대문 집’을 방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 “남준은 한국의 무속 문화를 사랑하고 자부심까지 가졌다. 그는 한국의 샤머니즘을 그의 어머니처럼 종교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예술적인 영감을 얻는 소재로 여겼다. 남준 안에는 무당의 신기 같은 게 있었던 듯하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고, 미친 듯 무대 위를 뛰어다니던 퍼포먼스 장면, 샬럿 무어맨과 함께 전위적 공연을 했던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영락없이 신들린 무당의 모습 그대로였다. 남준은 1984년 귀국 당시 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예술은 매스게임이 아니에요. 페스티벌이죠. 쉽게 말하면 잔치입니다. 왜 우리의 굿 있잖아요. 나는 굿장이에요... 더보기
[백남준] 임영균 사진가가 들려준 그의 이야기 임영균 사진가가 백남준과 가까이 지니면서 들은 이야기 “예술가도 과학자만큼 공부해야 한다. 항상 뉴욕타임스의 과학 세션을 공부한다” 어느 날 제가 선생님께 “첨단 과학을 그렇게 잘 아십니까?” 물었더니 선생님은 “예술가도 과학자만큼 공부해야 한다. 항상 뉴욕타임스의 과학 세션을 공부한다” 라고 하셨죠. 늘 시대를 앞서가려던 백 선생님이 지금 살아 계셨더라면 어느 수준까지 작품을 발전시켰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사진가 임영균 나는 20세기 초입을 살았지만 늘 ‘다음 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가 궁금했지. 늘 새로운 것, 뻔하지 않은 것, 넓은 것이 궁금해 헤매고 다닌 거야. 건반과 건반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는 음을 찾다 보니 쇤베르크에 이르렀고(그는 쇤베르크 연구로 도쿄 대학 졸업 논문을 썼다.. 더보기
[백남준] 사진가 임영균 찍은 사진 NYT 게재 1983년 뉴욕 스튜디오에서 임영균이 촬영한 ‘브라운관을 뒤집어쓴 백남준’. 값비싼 TV 여러 대를 한 번에 살 형편도, 스폰서를 구하기도 힘들었던 백남준은 벼룩시장에서 중고 TV를 구해 작업하곤 했다. 70년대 말 제가 뉴욕 유학을 준비하던 중 국내 일간지 문화면에서 백 선생님의 존재를 처음 알았죠. 엄숙한 피아노 연주회에서 도끼로 피아노를 부수어 관객들을 놀라게 한 경범죄로 뉴욕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관객들이 현장에서 주머니를 털어 벌금을 내주어 풀려났다는 기사였습니다. 과격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라는 기억으로 제게 남았죠. 그때부터 뉴욕에 가면 꼭 한번 뵙고 선생님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1980년 9월 유학생으로 뉴욕에 도착했지만, 비싼 학비 때문에 공부보다는 한국인 채소 가게에서 일하는.. 더보기
[백남준] 현대미술을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그리고 백남준은 그의 첫 전시에서 뒤샹의 오브제아트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피아노야말로 최고의 오브제임을 과시하다 그래서 피아노에 여성의 브래지어를 입혀 놓았다. 피아노가 사물이지만 그럼에도 사람처럼 보이게도 했다 이것은 뒤샹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오브제 아트라고 볼 수 있다. 작품명 1958-1963 Klavier Integral(총체 피아노) 이 작품을 우리는 인터넷의 초기 모습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여기에 온갖 만물상이 다 들어가 있다. 시간과 통신과 의사소통의 단절과 인간의 성행위와 끊어진 모든 네트워킹과 삶의 리듬과 강약조절 철조망까지 다 담겨 있다. 이것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백남준이 말하는 행위음악(action music)의 표상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백남준은 음악의 전시에 TV를 마.. 더보기
[백남준] <무엇보다 자신감이 중요하다> 남한은 확실하게 섬이다. 비행기 타야 외국을 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사고와 상상력까지 한반도에 갇히면 안 된다. 4대 강국에 끼여 살아도 그 기상을 살아있어야 한다. 백남준처럼 우리를 몽골, 스키타이, 헝가리, 핀란드 뿐만 아니라 저기 남미 페루까지 우리의 혈통과 문화의 영역으로 볼 필요가 있다. 백남준은 또 "선사시대, 우랄 알타이족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한국·네팔·라플란드(핀란드 등 북유럽)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더 먼 곳을 보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 새 지평선을 봤다"며 (백남준은) 우리 혈통과 원류를 더 멀게 넓게 포괄적으로 봤다. [1992년 백남준과 김용옥 인터뷰 중 일부내용] "내가 가서 보니까 일본은 말할 것도.. 더보기
[백남준] 이우환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백남준은 예술을 하지 않는 것이 예술의 현대성이라고 했다. 근대성은 예술을 하는 것이 예술이다. 이우환은 작가가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을 근대성이라고 했고, 작가가 가능하면 작품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현대성이라고 했다. 그렇게 보면 이우환은 백남준의 현대성에 대한 해석의 추종자 내지 동조자다 더보기
[백남준] 유럽의 늙은 어른과 아시아의 아이 중국 작가 왕싱웨이(늙고 불쌍한 유럽 어른[해밀턴] 1996년 작품)는 백남준은 제대로 읽고 있었다. 여기서 문명의 측이 결국 서양에서 동양으로 왔음을 알린다. 서양의 다 빈치와 프로이트와 뒤샹(작품의 왼쪽 뒤샹의 대표작)은 동양의 백남준을 뒤따라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유럽의 이런 어른들은 사고뭉치인 아시아의 어린이를 야단치지만 그 아이는 단청을 부리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게 바로 백남준이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