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다다익선이야기> 자료전]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 '다다익선' 램프코어 앞에서, 2018년 9월 4일(화)-2019년 2월 28일(목)까지 [1] 1986년 작품 구상, 1988년 설치 그리고 현재를 담은 <다다익선 이야기> [2] 드로잉, 사진, 영상모음(다다익선 상영장면, 소프트웨어), 다다익선을 수리해온 이력 등 소개된다.
백남준 다다익선 작동하지 않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시물을 보고 있는 어느 관객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은 <다다익선>의 탄생, 설치배경과 관련한 이야기를 담은 자료전인 '다다익선 이야기'를 연다. 다디익선은 2018년 2월부터 작품이 가동되지 않고 있다 지금 국립에서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중이다 좋은 제보나 아이디어가 있는 분은 아래에 두 큐레이터에게 연락을 하면 된다. [1] '류지연' 소장품자료관리과장 02) 2188-6154 [2] '박미화' 학예연구관 02) 2188-6309
두 대의 모니터를 통해 <다다익선> 상영장면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등록되어 있는 8개의 <다다익선> 소프트웨어가 각각 상영된다. 이번 자료전은 작품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관객에게 소개하고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고찰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아울러 국립현대미술관은 2019년 내에 국내․외 관련 전문가들의 면담과 공청회를 통해 의견을 구하고 그에 따라 보존방안을 결정할 예정이다.
1993년 백남준이 기획한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순회적 포스터(1993-whitney-biennial-in-seoul)
백남준은 한국미술이 아직 지역미술(동네미술)이라고 보고 세계미술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한국미술에 대한 지극한 애정 때문이겠죠) 미국의 첨단 비엔날레 전시를 직수입해서 서울에서 순회전을 열었다. 여기서 백남준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자금이 부족하다고 하자 그가 여기서 받은 상금 3억을 기부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에게 이렇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런데 이 전시는 동성애 등을 주제로 하고 있어 사실 당시 한국에서 전시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넘어간 것인가
[당시도록] 앞부분 인사말: 1993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에 부쳐 I 이민섭(문화체육부 장관), 서문 미국현대미술의 다양한 방향을 시사하는 휘트니비엔날레 I 임영방(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미국현대미술에 대한 시각을 객관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I 방상훈(조선일보), 네 자신을 알라.(네가 처한 곳을 알라) I 데이비드 A. 로스(휘트니미술관 관장), 부분의 통합: 1990년대 미술의 적극적 힘 I 엘리자베스 서스맨(휘트니박물관 큐레이터), 백색주의란 무엇인가? I 텔마 골든(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 무인지대: 천년왕국의 시발점에서 I 리자 필립(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 미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의 반목 I 이용우(미술평론가)
[01] 다다익선의 가치는 뭔가? 국립미술관의 다다익선과 루브르미술관의 모나리자는 동급이다
나는 다다익선과 모나리자는 동급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나리자는 고전기 르네상스시대 회화장르의 대표작이라면, 다다익선은 디지털 르네상스시대 전자회화의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다익선 보전은 그래서 모나리자의 보전만큼 공을 들여야 한다. 다다익선은 TV1004대가 들어간 당시로는 전자공학적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첨단과학의 작품이다.
한마디로 최고급 작품이다. 대형작품에도 예민한 작품이라 고장 나기기 쉽다. 항상 돈과 정성과 보살핌이 필요하다. 모든 전자 작품은 10년-15년 안에 반드시 고장이 난다. 그래서 그 보전을 위해서 감가상각비가 의무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백남준 작품만이 아니라 앞으로 모든 뉴미디어 작품도 규칙이 적용되어야 한다.한국의 세계적 작가와 당시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삼성의 합작이다. 백남준이 지금 살아 계셔서 국립미술관 과천관을 방문했을 때 뭐라고 하실까.
[02] 다다익선은 왜 보전해야 하나? 백남준의 대표작 중 하나로 한국인의 원류가 담겼다
다다익선은 서울올림픽 개막식(1988년 9월17일) 이틀 전에 완성되었다. 다다익선은 대한민국의 하늘이 열린 날을 기념한 작품으로 우리의 5천 년 역사를 상징적으로 응축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현대적 의미로는 오랫동안 군사독재국가로 갇혀 살던 우리가 1988년 세계올림픽을 계기로 전 세계에 처음 데뷔한 해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찌보면 단군이다 곧 우리를 뜻한다. 다다익선은 TV모니터 1003대다 개천절 10월 03일을 맞춘 것이다 태초에 하늘이 열렸다는 상징이 담긴 우리역사의 기원을 새기는 작품이다.
[03] 다다익선의 설치했을 때 목적? - 백남준 왈, "이번에 큰 놈을 만들어 조국에 선사하겠다" 그러면서 "이 램프코어 공간은 나를 위한 공간 같다"며 대만족했다.
1988년 백남준
1988년 2월 국립현대미술관 배포한 홍보 자료에는 "다다익선의 설치목적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를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백남준 비디오아트 작품을 상설시설하고 전자영상매체를 통한 전위예술을 국내외에 소개함으로써 미술발전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한국의 노력에 대해 백남준의 반응은 이랬다. "이번에 큰 놈을 만들어 조국에 선사하겠다" 그리고 백남준의 최종목적은 "세계를 보자기로 싸듯 연결시킨다(Lapping around the world)"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최고 난제 2가지다. 첫째, 1003대의 모니터 하중을 지탱하는 것 두 번째, 과부화 방지 및 열 방열 문제였는데 당시 다 잘 해결되었다.
과천국립미술관이 1985년 11월 15일 상량식 아니 개막식
다다익선의 탄생하기까지 그 뒷이야기가 많다. 과천국립미술관이 1985년 11월 15일 상량식이 있었는데 이 건물이 구겐하임 미술관을 흉내를 낸 것 같다고는 비판이 일자 1986년 초 건축추진위원회에서 램프코어를 구겐하임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서 백남준 비디오설치작품을 전시하자는 아이디어가 냈고, 백남준 비디오 아트작품이 워낙 번쩍거리는 작품이라 램프코어에 대한 관심을 끌 수 없기에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 가운데 1986년 8월 25일 드디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완공이 된다. 백남준은 "이 공간(램프코어)은 나를 위한 공간인 것 같다"고 만족했다고 한다.
<사진>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장(이경성)과 삼성전자 대표(안시환)가 모니터 기증 약정서에 서명하다
<사진> 백남준 1988년 9월 15일 다다익선 제막식 장면 II 전원을 올리는 장면 같죠
[04] 왜 다다익선(The more the better)인가 : 1003개 모니터마다 1000개의 콘텐츠
다다익선이 만들어졌을 때 1988년 가을 <현대미술>지에서 당시 기획자였던 유준상(전 서울시립미술관장)씨는 다다익선의 개념을 이렇게 함축적으로 설명했다. "방송이라는 것은 물고기의 알과 같은 것이다 물고기의 알은 수백 만개씩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그 가운데 대부분이 낭비되고 수정되는 것은 별로 안 된다. 그러나 나머지 수정에 성공한 것도 또한 대단한 양에 이른다"
[05] 이정성 테큐니션은 어떻게 다다익선 설치가 가능했나?: 백남준아트센터와 인터뷰
<사진> 백남준 다다익선 전원을 처음 올리다
당시 TV 1004대를 전원을 올리는 것인데 한국기술로 누전이나 불이 나지 않았다면 대단한 성공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다. 가구당 1대의 TV를 1004가구에 동시에 전원을 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세계미술사에 빅뱅과 같은 대사건인 셈이다. 세계미술사를 뒤집어놓은 기록적인 해프닝 아트의 극치였다. 정말 그 규모와 배짱이 대단했다 부잣집 아들이나 그랬나 보다 이런 것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한 사람이 바로 이정성 테크니션이다.
백남준이 이정성 선생을 백남준이 주목한 것은 1986년 코엑스 국제전자박람회에서 그해 삼성전자가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는데 수소문중 이런 정보를 듣고 이 설치를 이정성 테크니션에게 의뢰했고 무려 530대 모니터 동시설치를 성공적으로 마쳤기에. 그 이후 모든 작품설치는 이정성의 몫이었다.
백남준 작품에 뉴미디어를 미술관이 소장할 때 필요한 경고가 있다. 그것을 전자제품을 언제고 다시 고쳐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런 면에서도 백남준이 선구적이다. 그가 우리에게 어떤 문제의 해답을 주는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다다익선의 보존 수리 문제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 과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증거이다.
<질문> 1988년 다다익선을 어떻게 설치를 하셨죠?
<대답> 그게 참 사연이 깊어요. 우선 작품명은 다다익선으로 정했고요. 모니터 1003대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분배기가 필요해요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알지만 당시는 비디오분배기가 뭔지 몰랐어요. […] 그 부품을 가지고 회로도를 그려 1대 20 아웃풋 짤 리를 80개를 만들었어요. 다다익선에는 그런 비디오 분배기가 80대가 들어가요 처음 만든 것이라 힘들어죠. 당시 생방송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매일 거기서 매달려야 했어요. 미술관 공사 측 분배가가 뭔지 모를 정도로 당시는 무지했지요. 미국에 분주한 일정으로 못 오시다 백남준 드디어 오픈 생방송 때 오셨어요. 직접 전원을 작동시켰는데 깜짝 놀랐어요. 맨 처음 하시는 말씀이 "한반이라도 작동돼도 잘 했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너무 좋아했다고 했어요. […]
그렇게 만들어진 다다익선을 무려 25년간(2003년)까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분 선의 문제가 생겨 2003년 3월 17일-5월2일까지 다다익선 리모델링을 실시해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재공개하였다(전원방식이 110V에서 220V 변경) 이때 백남준이 미국에서 이정성 선생에게 전권으로 할 수 있는 리모델링 AS 할 수 있는 위임장을 보냈다.
[06] 한국에서 백남준 예술은 민중미술보다 더 대우를 못 받는다
만약 워싱턴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에 백남준이 기부한 '전자초고속도로(미국전역)'작품이 고장이 났다면 우리처럼 이렇게 내버려둘까. 게다가 국립현대미술관 영혼과 심장과 같은 작품이 아닌가. 이런 작품이 죽으면 국립현대미술관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리는 다다익선을 너무 오랫동안 거의 공짜로 본 셈이다. 다다익선이 고장 난 후에 관객들 그 소중함을 절감한다. 앞으로 입장권을 받고 그 돈으로 작품보전유지비로 보태야 한다. 아니면 국세에 교육세가 들어가듯 국립입장권에 백남준 세금을 받아야 한다. 500원이든 1000원이라도 받아야 한다. 그 기금으로 백남준 작품 작동에 이상이 없도록 해야 한다
[07]게다가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은 3억 현 10억 정도 빚지고 있다
1993년 국립미술관 전시(휘트니미술관 순회전)에 국립미술관 돈이 없다고 하자 휘트니 비엔날레서 상금을 받은 3억을 기부한 적이 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10억이 될 것이다. 국립미술관은 백남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갚아야 한다. 공짜가 어디 있나. 국립미술관은 이런 백남준을 위해서 사진전 한번 열고 10여년 넘게 회고전 한번 그 흔한 도록 한번 만든 적이 없다. 도록도 한권 나오지 않았다.
이참에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를 국립현대미술관로 전환해야 한다. 겨우 한 전시에 1주년 때 사진전을 했을 뿐이다. 나도 참석했지만 그때 시게코 여사도 초대를 받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 김찬동 현 수원미술관 관장이 한국미술관계자가 뉴욕 소호 백남준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과연 국립현대미술관이 백남준을 위해서 뭘 했냐고 버럭 화를 냈다고 하는데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참에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를 국립현대미술관로 전환해야 한다. 겨우 한 전시에 1주년 때 사진전을 했을 뿐이다. 나도 참석했지만 그때 시게코 여사도 초대를 받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 김찬동 현 수원미술관 관장이 한국미술관계자가 뉴욕 소호 백남준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과연 국립현대미술관이 백남준을 위해서 뭘 했냐고 버럭 화를 냈다고 하는데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베를린 국립미술관 근처 미술전문서점
내가 2017년 작년 베를린에 갔을 때 미테 지역에 있는 독일 국립미술관(신관과 구관) 옆에 미술전문서점이 있다. 그 주인이 내가 백남준 책을 찾으니까 하는 말이 백남준은 한국보다 외국에서 훨씬 더 유명하죠. 라는 뼈아픈 말을 나에게 건넨다. 창피해서 죽을 뻔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백남준 전문가 아이리스 문 독립큐레이터는 '국민모금운동'을 벌리자고도 한다. 이제는 문화재급 예술작품 보호모금이 필요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전시)에 관한한 전과자다. 백남준이 사후 국립현대미술관은 1주년 기념 2007년 사진전이 유일하다 당시 시게코 여사도 왔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 어두웠다. 나도 이 전시에 참석했었다. 이런 한국미술계에서의 백남준에 대한 외면(무관심)과 배제는 백남준 작품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백남준 장 조카 켄 백(Ken Hakuda)은 아예 한국미술계와 인연을 끊었다. 한국에서 열리는 백남준 전시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전시)에 관해서는 전과가 있다]
[08] '다다익선'이 워싱턴국립미술관에 있었다면 저렇게 내버려둘까
백남준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 소호거리 머서 스트리트 110번지에 있는 백남준의 작품용으로 모아둔 모든 오브제 물건 낡은 TV 등 7트럭을 백남준 상속자 켄의 허락을 받아 미국 워싱턴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아카이브로 옮겨갔다. 이 골동품 같은 물건과 여러 TV로 과연 무슨 작업을 하려고 한 것인가. 이 물건들은 이 미술관 연구진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분류되고 연구되고 있다
[09] 다다익선 해체 이것은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이 뭘 모르고 하는 발언이다.
다다익선은 국립에 선물도 대단하지만 그 이후 베니스 한국관 건립과 휘트니 순회전과 1995년 광주비엔나레 등 그가 한국미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끝이 없다. 다다익선 해체를 주장하는 사람은 주장은 정보부족으로 뭘 모르고 하는 경솔하고도 배은망덕한 발언이다. 큐레이팅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사고 미달이다. 큐레이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고 존중하는 것이다. 작가가 없는데 무슨 큐레이팅 있나. 특히 다다익선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주장이나 견해이다.
백남준 분명히 자신의 작품이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고쳐지기를 바랬다. 볼록 모니터로 꼭 해야 한다는 주장은 백남준을 모독하는 말이다 백남준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하드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의 오리지널한 창작의 요소인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큐레이터는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먼저 내세운다. 이것은 큐레이터들이 할 역할이 아니다.
[10] 작가의 예술혼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달려 있다.
백남준 작품 다다익선에서 하드웨어인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껍데기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혼이 담긴 알맹이인 소프트웨어(컨텐츠)다. 우리가 야만국가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 5000년 역사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예술 상징물을 소중하게 잘 지켜야 한다. 국립은 국민에게 문화서비스를 제대로 해야 한다.
작가의 예술혼은 소프트웨어에 달려 있다. 이정성 테크니션의 말에 의하면 지금 중요한 것은 지금 구조물, 모니터, 전자회로, 플레이어 같은 하드웨어(껍데기) 즉 작품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그것은 영상이 잘 나오느냐 아니냐 하드웨어는 부차적 문제다. 백남준이 죽음을 재촉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소프트웨어(알맹이) 중요하지 이 문제에 시비를 거는 건 어불성설 작가정신과 예술가의 혼은 바로 소프트웨어가 담겨 있다 작가의 혼과 창조정신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문제다. 하드웨어 때문에 소프트웨어를 버린다는 것은 세계적 작가에 힘들게 생명을 줄이면서까지 노력하면서 발명한 '창조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사실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개발인데 백남준은 사실 이런 것을 발명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그런 창조적 활동이 중요한데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하드웨어 껍데기 모습과 그 화면이 볼록하냐 평평하냐 이런 걸 가지고 따지는 일은 사실 너무나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11] <전자아트의 특징 100%고장> "인생을 길고 예술을 짧다" –백남준
그런데 여기서 백남준의 기상천외한 말이 나온다. "인생을 길고 예술을 짧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보면 내 작품이 혹시나 고정이 나서 재설치를 못 된다고 해도 인류가 살아있는 한 나의 작품 나의 아이디어는 영원하다는 말을 뒤집어 말한 것이다 모든 뉴미디어아트도 마찬가지다 고장이 나면 버린다. 언어도단이다
이정성 테크니션의 말에 의하면 다다익선의 고장이 났다고 하는데 이 문제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고 해결의지가 문제이다. 어떻게 하든지 길은 있다. 비용과 시간을 들어서 문제다. 돈과 시간과 의지의 문제이다. 못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안 고치는 것이다. 2003년에 전기회로 수리한 적이 있다(?). 별 문제가 없었다. 펑 소리가 나면 담당자는 놀라겠지만 사실 이런 경우는 고치기 가장 쉽단다.
[12] 다다익선 100% 수리 가능성은 100%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2012년 11월 23일 13:30-17:30 국립현대미술관 소강당에서 열린 다다익선 학술대회]>
국립미술관은 이런 현대미술의 특징이 모르거나 아니면 백남준 작품에 대한 반감인가 이명박 시절인 2012년 11월 23일 13:30-17:30 국립현대미술관 소강당에서 다다익선 보존 어떻게 할 것인가(How to Conserve The More, the Better)라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발표자로 국현 '장업' 학예연구2팀장, 테이트 '핍 로렌슨' 소중품 연구팀장, 퐁피두 '크리스틴 반 아쉬' 뉴미디어 학예실장, '이정성' 다다익션 테크니션이 참가했다.
이정성 기술자의 말의 의하면 이것은 다디익선을 개선하자는 게 아니자 오히려 그 보전 가치를 희석화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자 반박해 불참하려고 했지만 주최 측 간절한 설득에 못 이겨 참가했단다.
[13] 과부화의 위험이 높은 1003개 TV로 구성된 다다익선은 수시로 고치는 것이 정답이다.
특히 전자제품은 습기와 먼지에 약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전자 작품의 특징을 16세기에 탄생한 페인팅기준으로 들이대면 안 된다.그러면 정말 미술에 무지한 사람이 된다. 21세기에는 그런 고정관념을 수정되어야 한다. 백남준 작품은 앞으로 발전하는 뉴모델의 모니터로 끊임없이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14] 외국이 전자아트 수리 사례 2가지다 그래나 궁극적으로 수리하는 것이다
그 대안은 무궁무진하다. 이정성의 말에 의하면 한전의 기계적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성급한 결론이다. 당시 불가피해서 동양전자 10인치 600개(?)썼지만 LCD(평명 모니터) 교체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겉모양에서 반원형가 아니라 평형 되는 정도란다. 물론 국립미술관 이 작품 담당자는 10년 간 애환이 많다. 게다가 TV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도 애로사항이다. [참고] 미술관은 1988년 이 작품이 설치된 이후 2010년 244대, 2012년 79대, 2013년 100대, 2014년 98대, 2015년 317대를 교체했다. 그리고 그것을 수리할 기술자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깔려 있다.
[15] [국립현대미술관의 입장] 지난 기자간담회에서 질문
<참고> 이런 2015년 [다다익선 국정감사내용] 정 의원(진보당)은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백남준 작품 42점 중 17점이 최근 5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 적 없이 수장고에만 있어 시민들이 작품을 볼 기회가 적었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모니터 생산중단은 예견된 것이었는데도 그동안 예비모니터 확보를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백남준 작품 42점 중 17점이 최근 5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수장고에만 있어 시민들이 작품을 볼 기회가 적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보면 국립미술관은 백남준 작품의 보전이나 전시에는 매우 소극적이다
[16] 지난 2월부터 다다익선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각계 의견
*[초대 백남준아트센터관장 이영철] -천재예술가는 국가도 못하는 일을 혼자서 한다.
뒤샹이 만든 예술 랜드와 베어드랜드(TV발명자) 만든 하이테크 랜드 그 사이에 백남준은 세계미술사적으로 그 통로를 찾은 사람이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 아니다. 중요한 사건이었다. 백남준 같은 천재 예술가는 한 기관(국가)이 못한 일을 했다 이런 천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다다익선).
백남준은 이미지 생태계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술가란 바로 그 시대의 이미지가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되는지 그는 그런 비밀을 캐는 어마어마한 일한 사람이다 다다익선이 뭔가 천지개벽 개천절이라는 새로운 하늘이 열린 것은 알린 것이다. 정보사회의 새로운 도래를 말이다. 그런 시대정신과 한국의 역사 등 모든 것을 집약한 작품으로 한국에 와서 가장 한국적인 작품을 만든 것이다. 세계의 이미지 생태계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모니터가 어떻게 전기세가 어떻게 너무 좀스러운 관료화된 사고가 아닌가. 모니터가 무슨 예배대상이나 숭대대상도 아닌데 이런 것은 너무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영철 평론가 말처럼 백남준아트센터는 이제 국립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 물론 디렉터는 따로 뽑아야 한다. 국립이라도 독자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국가예산으로 백남준 예술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 하긴 백남준 국가 도움 없이 혼자서 많이 알렸지만 이제는 보다 국가사업으로 알려야 한다.
*[정준모 큐레이터 전 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그는 당시 다다익선에 직접 관여한 실무자였다]
[배경설명] '다다익선'은 2002년 모니터 노후화로 화재가 발생했다. 당이 이 사업에 관련한 이러던 중 2002년 말 전면 TV교체계획을 세워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은 순탄치 않았다. 세미나를 열고, 백남준과 의논하며 작업의 가닥을 잡았는데 소위 타임베이스 미디어아트(Time based Media Art)라는 점 때문에 작업은 조심스럽고 어렵고 더뎠다. 문제는 2003년 당시 1988년에 사용한 검은색 외관의 TV를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TV에 영상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니 모양이나 색에 구애받지 말고 ‘TV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결론은 지금의 TV외형에 브라운관을 빼내고 평면모니터를 안쪽에 고정시키면 볼륨감도 형상도 유지되니 그리하면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와 새삼 또 무엇을 의논하고 검토할 것인가. 그의 작품을 생전의 백남준과 논의된 대로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작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길은 아닐까. 돌다리도 너무 두드리면 깨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7] <누전문제는 어떻게 해결 이정성 기술자의 대답> 백남준은 다다익선을 만들면서 가정용(1인용)으로 만든 TV를 예술용으로 만들다 보니 무려 1003개의 TV를 동시다발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역시 백남준의 스케일을 읽어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지만 누전의 위험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데 이것을 한전 누전 기준인 250K 이하로 만들려면 아주 간단하다. 전원을 멀티캡에 꽂지 말고 중간에 누전방지 트랜스를 하나 더 연결해 꽂으면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TV 1003대를 동시에 사용하다 보니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식구가 1003명이 되는 가정에 비유한다면 그 많은 식구 중 문제아 많은 자식도 꼭 생기게 마련이다 -이정성 테크니션의 의견>
[백남준의 테크니션은 국제적 5명 30년간 백남준과 동고동락했다]
[18] <비디오 아티스트 폴 게린(미국의 백남준 작품 테크니션) 다다익선 수리를 위한 2가지 제안
<이정성대표> 같은 의견이다. 그런데 이 2가지 모니터의 차이가 있다면 브라운 식은 화면이 볼록하고 LCD 평평하다. LCD 화면이 더 화면이 선명하다. 그런데 혹자는 이것 때문에도 브라운 식은 LCD방식으로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백남준은 후기 작품은 LCD방식을 사용했다 그 당시 브라운식을 쓴 것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브라운식을 주장하는 사람의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왼쪽 LCD(10인치), 오른쪽 브라운식(모니터 10인치)
백남준의 다다익선 TV 모니터가 고장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작품을 처음 만들었을 때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기에 백남준 당사자는 당연히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교체하라고 위임장을 써 주었지만 말이죠.
<이정성 의견>왼쪽 것이 LCD(10인치)이고 오른쪽이 지금 작품에 쓰인 브라운식(모니터 10인치)다 비교해 보니 LCD는 무게가 과장해서 브라운 식의 100분의 1이다 속이 텅 비어 열 받을 일이 없다. 그리고 브라운식은 10인치프레임 안에 온갖 것들을 쓰셔 집어넣은 듯 내부가 복잡할 뿐만 아니라 여러 장치로 꽉 차 있다. 그러니 당연히 열을 받는다. 그래서 에어컨 가동한다. 게다가 마이컴이 부착되어 있기에 고장 나기가 더 쉽다. 이런 TV모니터가 여러 개 병렬식으로 연결하니 그만큼 문제가 많아질 확률이 추가로 높아지는 것이다 [고장난 브라운 TV를 1개만 따로 떼어 놓으면 다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단다.
백남준은 다다익선을 만들면서 가정용(1인용)으로 만든 TV를 예술용으로 만들다 보니 무려 1003개의 TV를 동시다발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역시 백남준의 스케일을 읽어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지만 누전의 위험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데 이것을 한전 누전 기준인 250K 이하로 만들려면 아주 간단하다.
[19] 마무리: 백남준의 저작권자 하쿠다 겐 백과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협의도 따라야
미술관이 보존 방안을 마련할 때 백남준 작품 저작권자인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과 백남준의 조카 하쿠다 겐 백과 협의해야 하는 문제도 남아 있다. 보존해야 할 이유는 많다.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라는 백남준의 세상에 현존하는 가장 큰 대표작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현대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외국에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몰라도 ‘백남준 타워’가 있는 미술관은 알 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사실 ‘우리’ 백남준이라고 자부하지만 뒤셀도르프는 백남준 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저작권 관리는 스미스소니언이 하고 있어 다다익선마저 없다면 우리는 빈껍데기 백남준만 가진 셈이 된다. 다다익선을 살려야 하는 이유는 이외에도 부지기수다
뒤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서울랩소디는 백남준의 후기작품 메카트론(전자벽) 시리즈 작품 중 하나로 백남준은 여기서 다다익선에서 사용한 볼록한 모니터를 쓰지 않고 평평한 모니터를 사용했다 백남준의 다다익선 모니터를 꼭 볼록한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은 그런 면에서 전혀 설득력이 없다 당시에 그런 모니터밖에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교체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옹졸하다 백남준적이지 않다
<마크 파스팔 미국 신시내티대 교수> “남준의 천재성이 빛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공동작업에 탁월했고, 비전을 현실로 실현해 줄 사람들을 가까이 뒀다는 것. 주변 이들에 대한 이런 신의와 우정이야말로 그가 가진 가장 훌륭한 재능이었죠. 이제 우리는 그의 업적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 다다익선 콘덴서(축전기)가 1가 뻥 터진 것으로 아는데 이정성 테크니션에 의하면 뻥 터진 것은 고치기 가장 쉬운 것이란다. 걱정할 것이 없단다. 사실 고치기 힘든 것은 소리가 없는 경우라고 그리고 요즘에는 콘덴서 헤드에 3개의 금이 가 있어 터지기 전에 공기압력 혹은 열에서 나오는 김을 빼주는 역할을 하기 그런 고장은 거의 없단다. 아래 자료 사진을 보면 큰 것은 금이 없는데 작은 것은 머리 부분에 3개의 금이 그려져 있다 작지만 이것이 터지는 것을 방지해준단다 그 아래 크기가 작은 콘덴서도 마찬가지다
<이정성선생이 보관하고 있는 백남준 아카이브> To whom it may concern 李正成(이정성) 씨에게 多多益善(다다익선) after service에 관한 전권을 일임한다. 백남준 미국 뉴욕에서 팩스(305-538-6445) 2002/6/03 백남준은 이정성을 장난기로 'LEE정成' 이런 방식으로 쓰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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