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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전남대 문화대학원 백남준강의 2015.10.16-23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419호 강의실

20151016일과 20151023일 이이남 미디어작가(전남대 초빙교수)의 초대로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에서 3시간 강의를 2차례에 걸려 총 6시간 <백남준 미디어론>을 강의할 수 있었고 학생들의 반응도 좋아서 매우 만족했다[관련사이트http://culture.chonnam.ac.kr/_html/sense_view.php?db=new_notice&uid=580&PID=0601 

[전남대 문화대학원 백남준의 미디어론 2015. 10. 23 미디어아트의 확장과 융합]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페북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결국 <인터넷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백남준이다>라는 결론이다.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419호 강의실

[과제] 마음에 드는 백남준의 어록 
1962 황색재앙!그것이 바로 나다 1964 문화적 애국심은 정치적 애국심보다 더 해롭다. 
1965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1974 흐르는 물 오묘한 거문고 가락을 타건만, 한 가락 두 가락 아는 이 없구나. 
1977 빈 공간의 공포는 모든 예술이 생성되는 근본적인 계기이다. 
1977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1980 유목민의 예술은 뇌에 저장할 수 있는 음악, 시, 춤이다. 
1984 우리에게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1988 나는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 시대가 떠오른다. 
1988 나는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계를 사용한다.
1992 예술은 보편성이 아니다. 텃세다 
이어가기 […]

<6개국어를 하는 노마드작가 백남준
"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아트는 5차원 사기다" -백남준

백남준 뒤셀도르프 대 교수시절 수업하는 모습 1979 

[미디어아트의 <확장과 융합>] "내일은 아름다울 것이다" -백남준의 미디어론 

20151016

하나_백남준과 미디어와 광주 [1교시]

<1> 1995년 광주: 인포 아트와 뉴미디어(신석기 01

<2> 백남준·맥루한: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 04

<3>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 백남준의 시간론 07

내가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에서 찍은 장면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백남준 액션 음악이다. 샬럿과 백남준은 혼연일체가 된다. 샬럿은 백남준을 정말 첼로처럼 멋지게 연주해서 관객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두 천재 예술가의 아름다운 합작품이다.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쾰른대성당과 붙어 있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질문: 당신은 왜 극단적인가? 

대답: 나의 몽골유전자 때문이야. 몽골사람들 선사시대에 우랄알타이 쪽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라드(스칸디나비아 북부 핀란드 포함)까지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들은 농사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 바로 봤다. 그들은 언제 더 먼 곳을 보러 떠나야만 했다. 여기서부터는 간단한 해석 <더 먼 곳을 보다>를 영어로 고치면 <텔레비전(TELE-vision)>이 되죠.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중남미 페루가 나와요. 우리와 페루가 관계가 있다는 소리인데요. 하여간 그렇고 또 북구 라플란드도 나온다.

_백남준은 왜 유명한가? [2교시]

<1> 백남준, 탈영토 제국주의자 08

<2> 93년 베니스비엔날레와 전자초고속도로 10

<3> 몽골코드: 굿, 미디어, 도약하는 원시적 생명력 12 

백남준의 스승격인 존 케이지 

_백남준 첫 전시: 세계미술계 빅뱅 [3교시]

<1> 비디오아트 탄생: 인터미디어혁명 15

<2> 랜덤액세스(서구근대주의 해체) 19

<3> 피드백 쌍방소통과 문화민주주의 21

질문: 민주주의가 뭔가? 백남준: "말대꾸하는 거야"(촌철살인) 

쌍방형 소통방식을 강조 문화민주주의자 백남준의 요즘말로 댓글 다른 말로 피드백의 혁명이다. 소리 없는 혁명이다. '상호작용(interactive)'하는 예술을 추구했고, 이게 결국 60년대엔 <참여TV>로, 70년대엔 신디사이저로 편집한 <비디오아트>로, 80년대엔 생중계한 <위성아트>로 진화된다.


미디어는 맥루한 말대로 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키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페북, 트윗, 유큐브, 블로그> 등등 지금은 분명 <피드백 혁명시대>다. 쉽게 말하면 <말대꾸를 할 수 있는> 시대 댓글은 바로 그 한 가운데 있다 댓글은 아슬아슬한 한국민주주의를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처럼 보인다. 이것을 쉽게 손댈 수가 없다. 거꾸로 댓글을 보수든 진보든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그만큼 파급력이 크다는 소리다.

 

20151023일 넷_[백남준의 대안아트 셋 [4교시]

<1> 사이버네틱스와 TV연작 22

<2> 에로티시즘아트 24

<3> 위성아트(지구촌 TV코뮌) 27

<4> 백남준 오웰예언 뒤집기: 소통과 참여 28

<5> 레이저 아트(뉴미디어)[구겐하임전] 29  [5교시] [6교시] 생략

백남준의 '무음악', 악기 없는 음악 악기 대신 몸으로 연주하는 형식이다. 물론 성악이 그렇지만 그것과도 다른 점은 역시 전자TV가 들어간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그에게 TV가 악기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 백남준에게 음악은 샬럿 무어먼이 거의 옷을 다 벗고 물통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할때 나오는 소리가 음악이다. 존 케이지의 영향이다

전시기획자 김순주가 주도한 백남준 아카이브전 때 백남준 받는 상을 리스트업하다

독일에서 주는 유명한 예술상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받다. 그 중 괴테상이 아무래도 가장 큰 상이다. 독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백남준을 짝사랑한 것인가.

백남준은 1989년 2회 '쿠르트 슈비터스(K. Schwitters)'상, 1991년 '고슬리 황제반지(Goslar Kaiser Ring)'상,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독일대표) '황금사자상', 1997년 '괴테 상', 1998년 독일 구겐하임개관(1997년) 후 '토머스 크렌스(T. Krens)'상, 2001년 8회 '빌헬름 렘브루크(W. Lehmbruck)'상 등 독일 최고예술상은 다 휩쓸었다.


[자세한 강의내용은 아래 오마이뉴스 블로그 참고]

http://blog.ohmynews.com/seulsong/536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