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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중요전시행사

난 당시 화가가 아니라 미친 사람이었다

SeMA Green 김구림 초대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 2013.7.16(화)-10.13(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회화, 설치, 영상 등 - 해체, 파괴, 전복으로 60-70년대 실험미술 개척,  매체미술 의 영역 확대  
[오마이뉴스관련기사] http://omn.kr/38nm 

기자간담회의 작가생활 50년을 회고하는 김구림 화백 "나는 당시 화가가 아니라 미친 사람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관련 유튜브] http://www.youtube.com/watch?v=xsNk3--a1bs 

한국미술사에서 김구림이 없다면 사람에 비유하면 한쪽 팔이 없는 것과 같다. 그가 시도한 개념-대지-환경-과정-제안-메일-엘렉트로닉 아트 다원예술 시조 Total Artist 면모 그리고 한국내 자생적 플럭서스 운동가 등등 정말 그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한국미술에 다행이고 축복이고 자랑인가 

그의 화가생활 50년 미친 작가로 불릴 정도로 손가락질 당하는 작품만을 해왔던 그의 작품은 이제 젊은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보일 정도로 전위예술의 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인맥과 학맥에서 자유롭기 위해 독자적 길을 걸어간 그는 한국에서는 데뷔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설치미술로 데뷔를 작가활동을 시작하고 귀국했으나 역시 한국에서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뉴욕으로 들어가 나우만과 함께 활동하고 미국미술관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 문화진흥원에서 회고전에 초대되어 2000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그러나 여전히 그는 환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위미술의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김홍희 관장의 공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구림 I  '음과 양' 2013. 

김구림 작가는 우주만물의 원리를 음양으로 본다. 한국인이기에 동양적 사유체계다 이번 전시는 60-70년대 김구림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유일하게 2013년 작이다 

개막 퍼포먼스 '매개항 2(Meditation Clause)' 1971(전면작품) fabric rope and soil variable size 

김구림 I '삽 Shovel' 설치 89*26cm 1974 

"김구림은 60-70년대 미술영역과 그 매체의 무한확장 속 미친 작가로 통하다" 

김구림 화백은1936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정규미술교육을 받지 않고스스로 독자적인 창작의 길을 개척하여, 회화68, A.G.그룹, 제4집단 등 한국전위예술의 흐름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그룹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또한 회화와 조각에만 집중되어있던 한국의 60-70년대 미술계에 해프닝, 설치미술, 메일아트, 바디페인팅, 대지미술, 실험영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창작활동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김구림은 일본에 미술이론을 배우러 갔었는데 위 작품은 일본 미술수첩에 소개되었다. 김구림은 이렇게 시간의 무제를 우리나라 작가 중 처음으로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걸 어떻게 공간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가 고민거리였다. 

김구림 I '상황 Circumstances' 300*200*160cm 1971 

이번 SeMA Green 김구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시는 김구림 화백의 작품세계 중 1960-70년대 실험 작품들을 위주로 선보일 예정이며, 발표 후 유실된 작품들과, 에스키스로만 존재하고 기술적인 혹은 현실 제약적인 문제로
실현되지 못한 작품들이 비로소 제작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특히 69년에 제작되어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된 후 원본이 유실된 한국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를 16mm필름으로 복원하여 선보인다. 

김구림 '공간구조69 (Space construction 69)' 442*146*85cm 1969.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다 

이 밖에도 1968년에 발표되었으나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열린 한국작가11인전을 마지막으로 분실된 한국최초의 일렉트릭아트인 <공간구조>와1970년 경복궁현대미술관 초대되었으나 주최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철거당 
한 거대 얼음설치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D> 등이 전시된다. 


전시제목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동명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에서 차용하였으며, 지난 반세기 동안 미술사에서 심도 있게 조망 받지 못한 한국의 실험미술과 김구림 화백이 건네는 해학과 풍자의 메시지이다. 김구림은 잔디를 태우거나 얼음이 녹는 작품 우주의 만물이 음양이지만 물과 불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전시장과 대지미술에 적용하여 당시로는 획기적인 전위미술을 시도했다. 

김구림 I '현상에서 흔적으로 From Phenomenon to Traces'  ice and red cloth 1970(Refabricated 2013) 

김구림 I '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결국 이 작품은 매순간 얼음이 녹아내려 이렇게 되고 만다. 설치작품이 순간마다 다르게 보인다는 소리다 이작품은 공간 속 시간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질문] 어떻게 독학을 하게 되었나요 
[대답] 나는 뭐든지 혼자 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지금도 조수가 없어요. 미술대학에 들어가 첫해 학교에서 가장 유망주로 뽑혀 학교에서 상도 많이 받았지만 나는 내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는 교수가 없는 것을 보고 혼자 공부하기로 했어요. 내가 외아들인데 학교를 그만 두고 나니 막막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헌책방 미군부대에서 나온 <라이프>지나 <타임>지를 보고 거기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요즘 미술의 조류와 흐름을 읽어냈어요. 감탄을 했지요 국내 식으로 가서는 안 되겠구나 싶었죠. 독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시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는 그런 잡지를 통해 현대음악 현대무용 존 케이지, 슈톡하우젠, 커닝 햄도 알게 되었어요. 과연 예술가란 금전에 의해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의문이 들었어요. 

김구림 I '공간구조 A' 드로잉 32*32cm 1968 

[질문] 제4집단 AG 68 등에서 활동하셨는데 그 그룹의 차이는 뭔가요 
[대답_일부만 답변] 제4집단은 일렉트로닉 아트 전문가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도 필요하다. 회장을 맡았지만 당황스럽기도 하고 협업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각 분야의 엘리트도 찾아다니고요. 문학 미술 무용 등 모두가 다 잘 나서 하나로 묶어내기가 힘들었어요. 철야도 밥 먹듯이 그런데 불행하게 정부기관의 재제가 심해서 형사가 따라다니고 해서 1년이 못가서 해체되었어요. 

김구림 I 불가해의 예술(1970) © 서울시립미술관 

그는 대학1학년 학교에서 배울 것이 없다 스스로 탈출 그의 스승은 주로 타임지나 라이프지였다. 위 작품을 보면 쓰레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환경미술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아래 라이프지를 보고 영감을 받은 것이다 

아래사진은 라이프지 '쓰레기가 넘쳐난다(1969)' © 서울시립미술관   

그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당시 바로 타임지와 라이프잡지였다. 한국에서 서양모던문화에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 그는 거기에 모더니즘이 뭔지를 발견하고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미술경향을 100%거부하고 자기나름의 미술개념을 확장해 나갔다. 이 세상에 완벽한 창조는 없다. 다만 백남준도 그랬지만 그의 가장 큰 공로는 바로 미술과 미술개념과 미술매채의 무한대의 확장이다 한국에 이런 미술을 도입하여 우리나라미술의 지도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인터뷰> [질문] 24분의 1초의 의미와 당시 제작 과정에 대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초당 24프레임으로 된 영화구조를 빌려 통제 불가능한 속도에서 오는 현대인의 소외감 표현 

[대답] 그때 처음에는 <24분의 1초의 의미> 만든 것은 아니고요 처음에는 8mm로 시작했어요. 누드영화를 만들어보자 고 착안을 한 거죠. 그 당시 여자가 옷을 벗는 것은 굉장한 획기적 인상을 주었어요. 그래서 오늘날 대단한 사건도 아닌데 일반인은 생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당시 사람들 그것이 실업과 너무 할 일없는 시대 가난 못 먹고 궁핍한 시대 하루일상 보내는 것이 지루했다. 19살 처녀를 등장시킴 주인공으로 한 사람이 끝까지 일인영화다.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할 일없이 잠 책 본다거나 하루일과 무미건조한 보내는 이러한 일상을 어떤 단면을 담았는데 촬영 도중에 이 모델이 나중에 달아남 미완성되었어요. 

필름이 없어지고 어느 날 정리하다보니 편집 조가리가 남아 그것이 증거가 되어서 이걸 정리하면서 작품을 되겠다. 구상하게 되었죠. 작품다운 작품 16mm 이 작품을 <24분> 만들었죠. 그것도 하다가 촬영기술자도 중간에 이게 영화 같지 않은 것 만든다고 투덜거리면서 그만 두더라고요 그래서 나머지는 내가 다 스스로 촬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편집을 하려고 보니까 충무로 편집실 안 해줘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지금 영화계에서는 난리 났다. 당신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벼르고 있다 자기가 편집을 해 줬다는 소문나면 다 망한다. 귀띔해 주면서 편집기 빌려주겠다. 

김구림, 한국 다원예술의 시조이고 토털 아티스트이다. 그가 안무한 <이상의 날개(1981)>과 무대의상 

편집 그 자리에서 다 배움 빌려와서 내가 밤새워 내가 일일이 편집해서 그 당시 명동 섬유회사 본사 무역부 근무(무영주식회사 기획실장)하고 있었고 그때 내가 남산에 조그마한 호텔에 하숙 저녁에 충무로 산책 나왔다가 청년 들 몇 사람이 달려들더니 구두발로 나를 차고 몰매을 맞게 되었는데 나중 알게 보아보니 영화계 사람들 네가 한국영화를 저지를 한다고 욕을 하면서 그랫어요 그 후유증으로 일주일간 앓아누운 적이 있다. 

그런 중에도 발표해야하는데 그러다 회사도 그만두고 작업을 못하겠구나. 나중에 돈 다 떨어지고 그래서 편집한 것을 돌려 보니 중간에 하필이면 필름 끊어짐 그래서 발표를 해야지 결심하고 그날 하필이면 지금 <조선코리아나호텔> 그 자리에 <아카데미 음악실> 거기를 빌려 발표하려고 했는데 만약에 경우에 대비해서 준비를 단단해 했어요. 이 필름 다 끊기만 이런 망신이 없다. 슬라이드 300장 준비하고 인쇄물 뒤에 광고 돈 떨어져가지고 20개 그 분야에 어두워서 <24분의 1초의 의미> 아니다 다를까 필름 끊어져서 슬라이드 프로젝트 비추게 하고 그때 여자가 정광자에게 맡기고 너 말이야 남자들 없어서 내가 둘이 직접 퍼포먼스 했어요. 그게 바로  <무제>입니다. 같은 날 했기 때문에 <무제>와 <24분의 1초> 혼돈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김구림 <24분의 1초의 의미(1969)> 유튜브] www.youtube.com/watch?v=ooptOMWcDIM 


김구림 I 무제 1969.7.21. 24분의 1초의 의미 영화로 상영될 때 혹시는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 작가들은 퍼포먼스준비했다. 그런 했던 해프닝아트 모든 흰색 타이즈 입고 커다란 눈동자가 투사되는 영사기 앞에서 움직이는 인간스크린이 된다 

[추신] <24분의 1초의 의미>를 최근 16mm필름으로 4개의 에디션으로 복원했는데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 이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하면서 지금 현재 그곳에서 큐레이터들이 관심을 보이고 논의중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1960년 당신 미국작품보다 더 앞선 것으로 판명이 나 그렇게 되었다는 평가다. 


그 바탕에는 한국의 가족 간의 따스한 정의 문화와 예의 문화가 있다. 자유라는 시간 앞에 서성이는 현대인의 ‘性’… 동양적 가치로 거침없이 내뿜다
 - 장준석(미술평론가) 

[질문]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작업은 무엇인지요 
[대답] 내가 내 작업을 후배들을 위해서 내가 죽기 전에 한판 펼쳐보이고 싶어요. 미 발표물이 너무 많아요. 전관을 다 채울 수 있다. 전관(서울관이나 과천미술관이나)에서 해 보고 싶은 게 내 소원이다.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 제대로 보여주고만 그것도 좋네요. 선생님 작품에 시간성문제 많이 생각했어요. 설치 쪽으로 영향 주게 되었고 회화 쪽에서 현상에 대한 문제 잔디 태우기 물과 얼음의 도입을 바로 시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무식한 뭐라고 하느냐 연결성 정체성이 없다. 맥락이 없다. 내처럼 일관성이 없어요. 그 사람들 매너리즘 빠진 작업을 하는 것이지. 똑같은 노장되어 가지고 똑같은 계속하는 공장에서 생산하듯 빼내는 것 그것에 대단한 작가다. 주요화랑에서 비싸다 또 사놓은 면 올라간다. 그게 매너리즘에 빠진 작가지 뭡니다. 생계 미국생활 너무 창피해서 이야기하지 안 해요. 강사 여기저기 뛰고 신문사 <문화센터> 강사로 뛰고 했죠. 생계에 여유 있으면 좋지만 지금도 아쉬운 것이 작품 구상 사장되고 있어 돈이 많이 들어 전부 못해요 그래도 젊은 시절에는 까짓것 빚내서 빌려서 지금은 힘들죠. 

2013년 김기림화백과 임근준미술평론가의 대담 2013년 김기림화백과 임근준(이정우)미술평론가의 대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의 삶과 예술을 읽을 수 있는 드문 자료가 될 것이다 

[그의 어록] 옳은 작가는 기술 없는 목수가 연장 나무라듯 그래서는 안 된다. 재료가 하나도 없어도 흙덩어리 하나 던져나도 무엇이든지 작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종잇조각 하나라도 있으면 찢고 오리고 뚫고 해서 작품을 만들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다. 

김구림 I '태양의 죽음 1' oil on wood panel, 107*91cm 1964. 

공장부속품을 이용해 만든 오브제작품으로 이 당시가 너무 참담해서 거의 블랙만을 쓰고 있다. 

[질문]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열정적인 작가생활을 했을까 
[대답] 나는 어려서 아주 유복한 집안의 외동아들이고 작가기질이라 그런지 군대생활이 힘들었다. 군대 군악대에 차출되어 평생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걸 하려니 그리고 어려운 시절이니 연습하면 얼마나 배고픈지 잠도 못자고 입술이 날마다 터져 연습 비행장 의장대 행사에 참여 나는 졸병이라고 가장 배우기 어려운 악기만 시키고 때로는 카르멘 연주까지 난이도 높아서 못하면 엉덩이에 피가 맺히도록 빳다(bat)를 맞아야 하고 어느 날 선임하사 나보다 연주를 하라고 해서 연주 했는데 잘못하면 발길질을 받을 걸로 기대했는데 <이렇게 연주를 해야 한다> 한숨 돌리가고 했다. 

군대에 아무리해도 적응 못해 꾀를 내 군대병원으로 이송하고 어렵사리 휴가를 내 귀대 명령 어겨 우여곡절 끝에 육군병원에 입원했는데 약도 없고 치료도 재대로 하지 않아 옆 동료가 죽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면회를 와 얼마다 황당했던지 집에 휴가 갔다고 거짓말을 돌려보낸 이야기면 귀대를 안 하고 반 탈영상태 휴가증 없이 목숨을 걸고 귀대하는 일 다반사 한번은 장교복을 빌려 입고 귀대하기도 어렵사리 의가사제대를 했어요. [나의 생각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사회에 나가면 누구보다 더 열심히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겠다는 동기부여가 된 것 같다. 팔순이 다 되도록 이렇게 전위예술을 열정적으로 하는 작가는 한국에서는 유일한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의 시기를 넘겼기에 더 열정적으로 목숨을 내놓고 작업을 해온 버팀목이 된 것 같다] 그때 나온 작품이 <태양의 죽음>과 <묘비명>이라고 한다. 

김구림 I '태양의 죽음 2' oil on wood panel, 91*75.3cm 1964. 

위 작품은 1967년 부산시 남쪽 항구의 부산정보센터에서 열린 단체전 예술문화초청전에서 처음 선 보인 작품으로 김구림은 당시 섬유공장 관리적을 맡았고 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실 꿰는 도구와 바늘 등 공장바닥에서 주운 부속물이 삽입된 작품을 몇 점 제작했다. 이 시기는 흔히 한국면사방적업의 황금기라고 한다. 방적 직조 섬유관련 산업이 한 경제개발 꿈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기중 중 한 기둥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한국전쟁의 상처와 종전 직후 한국추상미술에 가득했던 파괴의 관념과 전후 사회적 불안감을 반영하는 이미지들의 상징한다. 당시 관객도 "격하게 움츠려들었으며 대체 어느 누가 이것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지 화가 날 정도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1960년 초 남한에서 값싸게 구할 수 있었던 검은 비닐과 그 당시 값비싼 유성물감이 평치된 점이다. 순수한 것과 불량한 것의 자연스런 결합이다. 


김구림 '매개항 1(Meditation Clause)' cotton cloth water and stone 500*700*30cm 1971. 전시장에 자연을 그래도 옮겨놓은 작품 당시로는 혁신적인 발상이다. 

[질문] 1970년 6월 20일 제4집단이라는 문화운동을 만들고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도 있었지요 
[대답] 미술 영화 문학 연극 무용 모든 장르를 통합하는 예술운동인 제4집단이 1969년에 생기고 그 운동이 읍면 단위 확장 큰일 나겠구나 당신 집회를 감시당하는 그새 정부가 경계를 하고 있었어요. 전국대회 사직공원 815 창립궐기대회 열고 대표 연설 그날 기성문화 벗어나기 위해 상징적으로 관을 매고 한곡에 띄우려고 했죠. 새로운 문화 새로운 예술 상징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백기 들고 시청 앞까지 가니까 덕수궁 파출소 대기 교통방해죄로 끌려가 남대문 경찰서장이 취조와 심문을 하는데 북에서 돈을 받았느냐 등을 묻고 중정시대니까 무서웠죠. 언론사 국장들이 경찰서장 전화 빨래 내놓아라. 언론사 주간지 안 팔리니까 심문 경찰서장 목가지 벗어났죠. 재판정에 넘기고 재판부에서도 골치 아프니까 바르게 결론을 내야겠구나. 감옥 넘으면 큰일 날 것 같다. 언론기관 때문에 쉽게 풀려났다. 제4집단이 활동을 제대로 했다면 한국의 미술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질문] 1984년 왜 미국에 갔는가 
[대답] 내 작품도 한때 팔린 적이 있었는데 나는 끝났구나. 매너리즘 빠지고 있구나 했어요. 돈은 벌수 있어도 매너리즘이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미국을 도망갔어요 

김구림 I 삽 설치미술 1974. 1918년 뒤샹의 '부러진 팔 앞에' 영향으로 보인다 

나는 고집이 세고 누구에게 지시받는 것을 싫어해 독학체질 그리고 뭐든지 잘 배우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단체 얽매임을 싫어하고 단소 같은 것도 쉽게 배우고 우리집안 한의사 아버지는 망해가는 한의사 자손이었고 초등학교 외과의사 중학교 때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집에 있는 시계 중 남아나는 것이 없었어요 시계를 다 뜯어내고 소설 나중에 영화감독 실험영화감독 혼자 하는 것 바로 화가구나 그리고 미술은 통역과 번역이 필요 없으니 더욱 좋았다고 <타임지 라이프지>에게 가장 큰 영감을 받고 <화성인 바이러스> 같은 요즘 젊은이들 좋아하는 그런 것이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 

일본도 파리도 독일에도 1년 미만이지만 있어봤지만 이민국가인 미국이 나에게 맞는 것 같았다. 환경이 사람을 변화게 한다. 미국은 확실히 스케일이 커셔 다르다. 서울에서 하면 그런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난 50년간 시대의 변모만큼 변해왔어요. 매체도 중요하지만 시대성이 중요하다. 젊은사람들이 가는 곳을 자주 가봐야 한다. 


[참고] 사회 현상에 대한 관심과 표현의 다양성은 1969년 예술창작집단인 ‘제4집단’을 만들었을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70년대 전위미술의 포문을 연 것은 같은 해 결성된 <한국 아방가르드협회(A.G)>였다.[1]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A.G그룹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전위예술 그룹의 선구로 평가된다. 

김구림은 1973년과 74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에서의 개인전을 통하여 사물에 내재된 시간성과 상태의 문제에 대해 탐구했다. 1973년의 설치작업 <Painted Object>에서 화랑 바닥을 훔친 걸레와 끝이 잘라진 빗자루가 연출하는 시간성은 바로 그 사물이 내포하고 있는 존재의 흔적인 것이다. 이 개념 역시 비디오작품으로도 표현 되었는데 1974년의 비디오 작품은 걸레로 책상을 닦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걸레가 낡아 없어지는 50년의 시간을 5분으로 압축한 것이다. 새 것이었던 걸레가 5분 후에는 완전히 낡아 못쓰게 되는 폐물로 전락한다는 변화를 영상으로 담고 있다. [출처] 김구림 <Korean Artists of 20th Century> 

김구림 바디페인팅(Body Painting) 퍼포먼스 1969 

사람의 몸도 캔버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12년 12월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폴록 호크니 쿠사마 등과 함께 전시되다. 그림을 그리는 캔버스의 확장이 커지다 몸뿐만 아니라 일체의 사물 공간 오브제가 다 캔버스가 된다 
[관련자료] http://blog.ohmynews.com/seulsong/425190 

[질문] 작품에 에로틱하고 상업적인 여성이미지가 많다 
[대답] 요즘 강남 간판 성형외과 거의 길거리 마네킹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개성이 없다. 문명비평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백화점 거의 모두가 여성용 잡지고 그렇고 예쁜 여자 성형부작용 과도한 관심 작가가 조수를 두고 공장에서 빼내듯 작품을 빼낸다 엄청난 가격에 정신이 없고 얼이 나간 것 같은 그냥 매끈한 것 절심함이 없는 것은 내가 싫어한다. 

작가 소개와 작품세계 


김구림(대구, 1936-)은 58년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한국, 일본, 미국을 오가며 미국  캘리포니아현대미술관(MMOA)을 비롯한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45회의 개인전과 약 200회에 가까운 그룹기획전을 통해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지적 호기심으로 왕성한 예술 활동을 펼쳐왔다. 

그는 50년대 말 앙포르멜과 60년대 서정적 추상에 잠시 머물다 6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매체 실험과 오브제 작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위예술에 몰두하기 시작하며, 연극과 영화, 무용 등 공연예술의 무대미술과 연출활동으로 오늘날 일반화된 개념인 ‘장르의 해체’를 추구하였다. 1969년 실험그룹인 <제4그룹>을 결성하고, 한국현대사회의 기성문화를 비판한 해프닝 <콘돔과 카바마인>,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과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경복궁 미술관을 흰 베로 감는 작업과 같은 일련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전위영화 <1/24초의 의미>와 <무제>, 한국 최초의 라이트아트인 <공간구조 69>, 문명사회에서 미디어문제를 다룬 최초의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과 한국 최초의 대지예술인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를 발표한 바 있다. 

1970년 제4집단  거리퍼포먼스 기성문화예술장례식하다가 교통방해죄로 긴급체포 © 서울시립미술관 

제4선언의 강령을 보면 하나, 우리는 인간을 본연으로 해방한다. 하나, 우리는 순수한 한국문화의 독립이 세계문화의 주체임을 확인한다. 하나, 우리는 참여로서 모든 체제를 통합한다. 하나, 우리는 무체로서 일체를 이룬다 

80년대 중반 김구림은 한국 현대예술의 최전선에서 한국전위미술의 선구자로서의 입지를 과감히 떨쳐버린다. 이미 쉰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식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정신과 감수성을 찾아 미국으로 새로운 예술실험의 여정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음양사상을 기초로 70-80년대의 개념예술과 다양한 매체, 장르 해체를 토대로 다양한 조화와 통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김구림은 한국의 현대미술사 뿐만 아니라 시대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인 70년대부터 2000년 귀국하여 고희를 넘긴 지금 이 순간까지, 한순간도 현실세계와 유리된 적이 없는 예술 활동을 보여왔다. 그렇다고 시류에 편승하거나 제도에 함몰되지도 않고 주류와 비주류를 아우르며 한국예술 궤적의 필봉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2006년 제7회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한 김구림 화백의 예술적 행보는 한국 예술계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깨어있는 의식이자 지성으로서 여전히 이례적이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미국시대(1984-2000)  LA 찰스 위처치 갤러리에서 1992년 백남준과 함께 2인전도 열었다 [http://blog.daum.net/dununorg/15847932 

"그리고 집단의 이름을 만들어야 했는데,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뭘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4’라는 숫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미신부터 타파하고 싶은 생각에 ‘4’를 가져오고, ‘협회’라는 명칭 대신 ‘집단’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제4집단’이 탄생하여 내가 대표로 선출되고 ‘회장’이라는 명칭이 아닌 ‘통령’이라는 명칭으로 활동했습니다." 

김구림 <매스미디어의 유물>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메일아트. 문명사회에서 미디어의 문제를 다룬 최초의 메일아트다. 김구림 작가는 이에 대해 "예술과 대중사이의 거리를 없애려고 이 작품을 시도했다"고 회고한다. 

[관객참여형 사회적 퍼포먼스로서의 <매스미디어의 유물>] 윤진섭미술평론가 

김구림의 작품은 <매스미디어의 유물>은 김구림이 김차섭과 같이 행한 공동작업이었다. 이 작품은 메일아트(Mail Art)로 ‘사회적 퍼포먼스(social performance)’의 성격도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9년 김구림은 김차섭과 함께 10월 10일 오전 10시 경 우편으로 100명의 작가, 미술평론가, 기자 앞으로 3번에 걸쳐 총 300통의 편지를 발송했다. 먼저 보낸 2통의 편지에는 빨강과 검정색 등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두 개의 지문이 찍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지문이 찍힌 부분을 반으로 찢은 이 종이는 김구림과 김차섭 양인이 각각 따로 부친 것이다. 그 다음 날 날아온 2사람 명의의 3번째 편지 안에는 명함 크기의 종이에 "귀하는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1주일 전에 감상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알기 위해서 좀 길지만 김구림의 증언을 인용한다. 

24분의 1초의 의미 중 한 장면 

"국전심사가 열리던 10월, 긴 사각봉투를 200장, 누런 편지봉투를 100장 샀습니다. 또한 흰색 A4용지를 사서 내 엄지 지문을 찍고는 그것을 반이 되도록 쭉 찢었지요. 그렇게 찢은 종이를 사각봉투 안에 각각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100장 단위로 하여 세 번에 걸쳐서 미술 관련 인사들에게 발송했습니다. 정확히 24시간 단위로 보내야 했기에 내가 직접 우체국에 가서 우편물을 몇 시에 배달하는지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물론 수취인만 기재했을 뿐 발신인은 없는 봉투들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심코 사각봉투를 받은 사람들이 시뻘건 지문밖에 없는 종이를 보고 섬뜩한 기분이 들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24분의 1초의 의미 중 한 장면.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망으로 김구림은 실험영화를 시도하다. 빠른 산업화에 함께 일어나는 인간의 소외감과 따분함 지루함을 보여주고 있다 

김구림 작업실 워홀말대도 팩토리 같은 곳이다 © 서울시립미술관 
그런데 정확히 24시간 후 지문이 꼭 들어맞는 두 번째 편지를 받고는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사람들은 편지를 불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물에 넣어보기도 하며 혹시 글씨가 나타날까 하고 별짓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24시간 후 발신인 불명의 편지봉투 안에 "귀하는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1일 전에 감상하셨습니다. 김구림, 김차섭"이라고 인쇄된 명함을 보고 사람들은 이것이 일종의 작품이었음을 느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날보고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많이 혼냈더랬죠" 

재미있는 것은 관객의 반응이다. 마치 요즘 유행하고 있는 ‘보이스 피싱(Voice Phrasing)’사기처럼, 겁에 질린 편지의 수신인이 보인 다양한 반응들, 즉 섬뜩한 느낌이나 공포감 등은 공작정치가 횡행하던 당시의 암울한 사회상을 희화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심리학은 "집단의 심리학이기 때문에 문학적, 문화적, 예술적이기보다는 사회학적인 연구의 대상"이라는 레나토 포지올리의 발언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다. 아방가르드가 어떻게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우편예술과 같은 사회적 시스템을 이용한 행위미술이기 때문이다. 


[결론] 우편을 이용한 김구림과 김차섭 양인의 <매스미디어의 유물>은 비록 메일아트의 형식을 빈 것이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킨 파장을 고려할 때 행위미술적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성격을 띤 이 작품은 정부의 공공시스템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시간성과 공간성, 그리고 퍼포먼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관객참여(audience participation)'가 두드러진 작업이다. 이 작업은 일정한 기간 내에 특정한 장소에 거주하는 제한된 관객들을 대상으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행위미술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리뷰_김구림전] 예술 발명가 같은 전위미술의 개척자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http://bit.ly/1LLmP7 

'음양 4-s 12' 복합매체 29.8×21cm 2004. 대비효과를 극대화하면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 김구림 

그의 발자취를 보면 누구 말대로 미술에서 독립운동 하듯 험한 길을 걸어왔다. 그도 물론 회화를 하지만 같은 미술이라도 대중적 관심을 끌기 힘들고 사람들이 낯설어하는 콜라주, 설치미술, 퍼포먼스, 대지미술, 실험미술, 영상매체 등에 심열을 더 기울어왔다. 그는 남보다 늘 한발 앞서면서도 평생 주류에 속하지 않고 전복과 해체 그리고 통합이라는 미술방식을 채택한 것은 그런 식으로 살지 않는다면 자신이 진정 추구하는 것을 할 수 없고 자기주도로 산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추가> 
[김구림전] 사라진 아름다움 설치와 퍼포먼스 연남동 플레이스 막 갤러리에서 2014. 4.19-5.31 

www.placemak.com 


김구림선생은 우리시대 터부깨기에서 역시 최정반에 서 계신다 조형과 착상에서 대가의 면모를 보이시고 성적 랩소디 여전하시고 디테일한 소픔과 오브제 생생하다 


김구림 I '성형외과' 전시설치전경 2014 

<사라진 아름다움>이라는 전시제목이 말해주듯이, 오늘날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렸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름다움의 부재가 아닌, 아름다운 사람의 부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거리를 걷다 보면 아름다운 사람들은 전보다 더 많이 늘어났다. 도톰한 입술, 높은 코를 가진 8등신 서양미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다. 가슴을 부풀리는 일, 눈을 크게 만드는 일들을 현대인은 인위적으로 가볍게 조작한다. 이렇게 허물어진 본연의 육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개개인이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한수지 

김구림 I '성형외과' 전시설치전경 2014 

여성의 아름다움도 자본에 종속되고 사고 팔리는 세대를 풍자하고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압력에서 나오고 그래서 인간은 삶의 자리에서 박탈되고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과학의 발달로 외모의 흉한 부분을 없애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그것이 지나쳐 인간을 죽이는 살인무기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술은 시대정신으 반영하는 동시에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겸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역시 김구림 작가는 사회적 터부를 깨고 이를 그의 오브제아트의 주제로 삼고 있다 


김구림 I '성형외과' 전시설치전경 2014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 코가 한치만 낮았더라고 세상이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여성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성명 말고도 몀화감상 음악감상 독서와 여행 그리고 다양한 인생체험 많을 것 같다. 특히 독서를 여성의 내면을 아름답게 해 주기에 또한 외모에 더욱 빛나게 해 주지 않을까 싶다. 남에게 보여지는 삶보다 자신을 스스로 즐겁게 하는 삶에 대한 나름의 가치와 철학이 필요할 수도 있다 

김구림 I '성형외과' 전시설치전경 2014 

여성의 아름다움도 자본에 종속되고 사고 팔리는 세대를 풍자하고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압력에서 나오고 그래서 인간은 삶의 자리에서 박탈되고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과학의 발달로 외모의 흉한 부분을 없애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그것이 지나쳐 인간을 죽이는 살인무기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술은 시대정신으 반영하는 동시에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겸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역시 김구림 작가는 사회적 터부를 깨고 이를 그의 오브제아트의 주제로 삼고 있다 


김구림 I '성형외과' 전시설치전경 2014 

"당신이 전시장에 발을 디딘 순간, 이곳에서 풍기는 모든 분위기들은 어느새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늘 보았던 일상의 사물들은 음습하고 괴상한 기운들과 함께, 어느새 당신의 주위를 에워쌀 것이다. 당신은 아주 작은 발견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저 먼 곳으로 발길을 돌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이 분위기 속에서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허구가 아닌, 오늘날 우리들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라진 아름다움 )이라는 전시제목이 말해주듯이, 오늘날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렸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름다움의 부재가 아닌, 아름다운 사람의 부재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거리를 걷다 보면 아름다운 사람들은 전보다 더 많이 늘어났다. 도톰한 입술, 높은 코를 가진 8등신 서양미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다. 가슴을 부풀리는 일, 눈을 크게 만드는 일들을 현대인은 인위적으로 가볍게 조작한다. 이렇게 허물어진 본연의 육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개개인이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