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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문화기행

[왕과 사는 남자] '97년 청령포 문화유산기행' 발굴(1997~2026)

왕과 사는 남자 / 특징 1. 영화를 보는 중 눈물 펑평 2. 영화가 끝나도 관객들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3. 자리에 일어나도 극장 주변을 뱅뱅 돌아다닌다. 왜 단종과 강원도 영월 청령포와 장릉(莊陵) <아래 사진> 등을 검색하느라고 / 미국 등 서구에서 한국역사 1% 안 배운다. / 4. 미국 호주 관객 등 영월을 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이것은 일종의 문화 사건이다

이 영화를 보고 강원도 유배지이자 촬영지인 <청룡포> 지금 해외 관객들 들끓다. 미국인-캐나다 사람들 12시간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까지 온다. 그게 쉬운 일인가. 매우 이례적 사건이다

"남자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내 생애 처음 경험한 감정이다.

<한국은 지금까지 견고한 서구 중심을 법칙을 다 깨버리다> <미국관객들 이 영화를 보고 완전히 무너지다> <미국관객들 마케팅이 못한 일을 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너 이 영화를 봐야 한다"> <미국에서 기생충 이후 최고 흥행을 보이다>

그 중 하나가 한국의 사극 <왕과 사는 남자들> 영화다. 미국 사람이 한국의 사극을 영화로 본다 정말 매력이 없는 소재다. 그러나 미국 시사회에서 그곳 관객들 눈물 펑펑 울고 있었다 영화가 끝났는데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평가점수 96점 받다 <16살 소년이 청령포라는 천연의 감옥에 갇히다> 조선 제6대 왕 단종(본명 이홍위, 1441~1457)은 어머니가 이틀만에 사망하고 아버지 왕도 2년에 돌아가시고 그는 12살에 조선의 왕이 되다 그러나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결국 숙부 수양대군(세조)'계유정난'으로 왕위를 빼앗기고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청령포로 쫓겨나고

https://youtu.be/lp0JY-D8lV8?si=RLXQuEYAq2OJGMYc

570년 잠들었던 강원도 영월 장릉 <청령포> 깨어나다. 세종대왕 창제한 <한글> 최근에 550년 만에 어마어마하게 깨어나다.

아이돌 출신 편견 연기는 별로겠지, 그러나 박지훈은 달랐다. 그의 연기한 단종이라는 캐릭터는 복잡선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왕으로서의 권위와 어린 소년으로서의 공포를 동시에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그의 이런 복잡한 감정을 눈빛 하나로, 손동작 하나로 잘 그려냈다. 대사 한마디 없이 눈빛만으로 배신감, 공포, 분노, 절망을 표현했다. 미국 영화평론가는 "그는 눈빛 하나로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라고 평했다.

[성삼문(호 매죽헌(梅竹軒)]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 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Sammun Seong (Korean: 성삼문; Hanja: 成三問; 1418 June 8, 1456) was a scholar-official of the early Joseon period who rose to prominence in the court of King Sejong the Great (r. 14181450). He was executed after being implicated in a plot to dethrone King Sejo (r. 14551468) and restore his predecessor King Danjong (r. 14521455), and is known as one of the sayuksin (사육신, the six martyred ministers) with reference to this plot.

박지훈 단종 연기를 위해 15킬로(?) 빼다. 정말 프로(?), 한국영화가 세계 최고인 이유

21세기 문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큐레이터와 영화감독이다

500년 만에 전 국민이 단종의 장례를 치른 것 같다 - 댓글 / 전 세계가 멈추다. 한국 영화 끝났는데 미국 관객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다. 후기 평가점수 96점을 받다. 그가 먹었다는 산채 비빔밥이 뉴욕 레스토랑 메뉴에 추가되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뜬금없이 한국 관광 명소로 부각되다.

단종은 6살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10살 때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돌아가시고, 2개월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병약한 문종도 재임 2년 반 만에 돌아가시다. 그때가 단종 12살이었다. 단종이 그렇게 믿었던 김종서(함길도 도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다)도 결국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왕으로 취임한 지 1년 후인 1453(계유년),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다

16살 왕이 억울하게 죽다 / 세조(단종의 작은 아버지)의 두 아들도 어려서 죽고 자신은 피부병으로 평생 고생하다 1500만 넘어 / 매출액 1441억 장항준은 누구인가?

서양에는 <천일의 앤>이라는 사극이 있다. 한국에는 <왕과 사는 남자>이라는 사극이 이번에 발표되었다 두 영화를 비교 분석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1969년 개봉된 사극이다. 16세기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왕비 앤 볼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여왕의 목이 날아가다.. 천일의 앤(앤 볼린)은 헨리 8세의 아들을 낳지 못하고 관계가 악화되자, 간통과 반역, 근친상간 등 조작된 혐의를 쓰고 1536519일 런던탑에서 검에 의해 참수형으로 사망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리뷰 - 15세기 폐위된 왕이 은신처로 향하는 이야기를 그린 생동감 넘치는 한국 역사극 / <유해진>의 자신감 넘치는 연기는 풍자, 감정, 사회 비판을 어색하게 뒤섞어 놓은, 추방당한 왕에 대한 이 풀기 어려운 우화를 살려냈다.

196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마산에 살 때 영화를 많아 봤다 입장료 10원 정도였던 것 같다. 이번에 왕과 사는 남자는 그때의 황홀을 그대로 복원시켜 준다.. 한국인이 영화에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어렸지만 어슴푸레 알게 되었다. 제국주의를 하지 않은 나라의 정서는 당당하다. 감정표현에서 거침이 없다. 호연지기가 살아 있다. 그래서 서구적 영화처럼 생떼와 억지와 탐욕과 폭력과 오만불손함과 무례함이 없다. 한국영화에는 인간적 품위와 깊은 정 불굴의 정신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깊은 휴머니티가 녹아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해학과 풍자와 위트를 잃지 않는 마음의 여백이 있다 / 영화를 보다 보면 반은 웃음이고 반은 울음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 한옥과 한복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정신을 잃게 된다.


29년 전 <문화유산답사기(1993-2001) 1989년 여름 유럽여행 7개국(25일간) 후 실망이 커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국문화에 눈을 돌리다. 그래서 문화유산답사기 10년 정도(봄과 여름) 이어지다. 하긴 당시 유홍준의 문화답사기 대유행기였다>
- 초고(1997년) 발굴 - 영월 청령포 편

**10년간 우리 문화유산답사기 -1997년 강원도 영월 청령포 여행기 **단종의 흔적을 찾아서 - 30년 전 기록 (1997722) 오지를 찾아서

영월은 조선 시대에는 가장 오지 중의 오지라 할 수 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이 그리 편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리라. 이곳까지 오는 데 나그네의 심정을 더욱 아프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말할 수 없는 이 근처에 김삿갓 묘가 있다는 것은 왠지 이 지역의 분위기와 김삿갓의 생애가 잘 궁합이 맞는 것 같다. 아직도 계곡 물이 얼어 있는 이곳은 분명히 깊은 산중의 도시임에 틀림없다. 한옥집 양식의 영월역이 멋지고 눈에 돋보인다.

12시가 넘어서 영월에 도착하여, 내 생전에 처음 와 보는 영월은 조용하고 아담한 분위기에 어떤 슬픈 사연이 담긴 신비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삼척~영월 2,800(주)삼척버스 정류장.

일단 청령포 가는 길을 알아두어야겠다. 사람들은 내가 코앞에 두고 청령포의 위치를 자꾸 물어보니 귀찮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 속에는 거기 뭐 볼 것이 있나 하는 듯한 소리 없는 짜증도 그 어감 속에 담겨 있는 것 같아 내 마음이 안타까웠다. 여기에서도 대입 열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집단 무의식은 여전하다.

그곳을 가는 방법은 버스(하루 606:20, 08:30, 10:30, 13:20, 15:20, 18:00)도 있고, 택시를 타고 가라는 충고도 이에 못지않다.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잠시 요기를 하려고 붕어빵도 팔고 어묵 국물도 파는 포장마차에 다가가 붕어빵을 몇 개 샀다. 붕어빵은 영원할 것인가? 그때 내가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침엔 햄버거, 점심은 붕어빵·오뎅 3·우유, 오뎅 두 개로 점심을 때우고 청령포로 가야 한다는 일념뿐이다. 먼 거리도 아니고 해서 택시를 잡기로 하고 합승을 했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있다. 영월역에서 청령포로 가려면 38번 국도를 타고 장릉 쪽으로 1km 가다 보면 좌회전해 2.5km 가면 청령포가 나온다.

밤새 구름도 울음보를 터뜨린다는 소나기재가 있다. 12세에 왕이 되었으나 작은아버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심산유곡 영월 땅으로 유배되어 17세에 죽임을 당한, 이름도 애련하게 느껴지는 단종 이홍위의 유배지. 청령포는 동··북 삼면이 남한강의 지류인 강줄기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육육봉의 험한 산줄기 절벽으로 막혀 있어 유배지로는 더할 나위 없는 자연 조건을 갖추었으며,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나올 방법이 없다. 이곳에는 단종이 죽고 나서도 한참 뒤인 영조 때에 세운 금표비와 단묘유지비가 남아 단종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청령포를 휘감는 강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원을 그리며 굽이쳐 흐르고, 앞자락에 거느린 넓은 백사장은 치마를 단정히 두른 듯하다. 서쪽의 깊은 물가에 우뚝 솟은 절벽 또한 빼어나다.

청령포를 멀리 내다보며 그 한 서린 강물 줄기를 뒤로하고 몇 컷의 사진을 찍어 본다. 왜 그렇게 숙연해지는지 내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청령포 도선료 포함 600원이다. 50원이 오른 가격이다. 나 말고도 두 사람이 더 탔다. 배는 줄을 잡고 가는 나룻배인데 그냥 보기에는 강폭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나룻배를 타 보니 그 폭이 상당한 거리이다. 여기를 어린 단종이 빠져나와 한양으로 간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배에서 내려 모래사장을 지나서면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바로 초입에 단종이 머물었던 옛집터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 39(1763) 어명으로 원주 감영에서 세운 비가 있다. 비 앞면에 '단묘재본부시유표(端廟在本府時遺標)'라고 쓰여 있다. 영조 2(1726), 단종이 죽은 지 270년이 지난 뒤에 세워진 이 금표비는 '동서로 300,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셨던 곳이므로 뭇사람들은 들어오지 말라'는 출입 금지 푯말인 셈이다. 단종이 이곳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도 이처럼 행동에 제약을 받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 한복판에 키가 유난히 큰 소나무가 보인다. 이 소나무가 바로 관음송이다.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나이가 600살이라는 이 관음송은 생멸하는 물체로서는 유일하게 단종의 유배를 지켜본 존재다. , 당시 처절하였던 단종의 생활을 보았으니 관()이요, 하염없던 단종의 오열을 들었으니 음()이라는 뜻이다.

난 그만 놓치고 만 노산대. 청령포 서쪽 육육봉 높이 80m 되는 낭떠러지가 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고 아슬아슬한 전망대에서 보는 강줄기와 층암 절벽은 그 경치가 단아하고 아주 그만이다.

**참고 망향탑:** 단종이 한양을 그리며 쌓았다는 돌무더기가 노산대 바로 옆 절벽에 남아 있다. 그 모습이 초라한 만큼 가슴 아프다. 어린 단종이 그 돌을 쌓아야 했던 모습은 상상하기에도 괴롭다.

먼저 와 있던 일행과(5) 나룻배를 타고 나오면서 감회가 새롭다. 우리 역사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고 확인해 봄으로써 우리나라 역사를 체화하고 체험하는 속에 다른 많은 상념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청령포 안내판을 나와서야 보니, 이곳에는 딱따구리··멧비둘기·어치·뻐꾸기·박새·딱새·꾀꼬리·진박새 등이 이곳에만 서식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자연 서식지는 너무나 잘 어울려 보는 이의 마음을 아스라이 뼈저리게 한다.

청령포를 나와 노산대로 가는 길, 강 건너 나루 왼쪽에 서 있는 또 큰 소나무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가지고 행차하였던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시조는 왕방연이 단종의 죽음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지은 시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오히려 아담하게 느껴지고 그 앞자락의 넓은 모래밭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리게 한다. 주위를 휘휘 돌아가는 물은 그지없어, 역사의 비극과 자연의 평화로움과 한가로움은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바라보는 청령포는 가히 절경이다.

왕방연의 시조는 어명을 받고 사약을 가지고 왔던 그날 밤, 자신의 비통한 심경을 읊었다. 비록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형을 집행한 것이지만 개인적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구전되어 오던 내용이 1617년 김지남에 의해 한시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고고함과 애잔함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을 조금 더 지나, 나는 노산대를 더욱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이곳에 오면 나는 그냥 마음이 메이고 아프기만 하다. 아주 가는 바람에도 그 숨결을 고르는 청령포 강줄기는 마냥 평화롭고 정겹기만 하다. 눈부시게 하얀 모래사장과 드문드문 억새풀, 그리고 움푹 파인 노산대를 바라보니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다. 강물은 고요하고 유유하여 그렇게 여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한가한 곳에서 한 어린 임금이 그런 고통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이 실감이 가지 않는다. 나는 내 마음의 호흡을 가다듬고 이런 시를 읊어 본다. *(단종 12~16)*

단종 유배지 노산대를 보며 - 청령포에서

남한강 상류 바람이
반짝이는 별빛이 아른거리네
유유히 흐르네
역사의 흐름을
순리를 거부한
역사는 아직도
그 사람들 못 나르네
발을 잠시 멈추게 하네
옷자락을 잡고
어린 왕의 하소연을 들어야 하네
봄 산아 잠시 후면
적막강산 금수강산 멀리 않으리오만
여기선 금수강산이
안 올 것 같은 것은 왜일까
저렇게 강은 소리 없이 그 은빛을 빛내며
흘러가건만
역사의 강물은
거꾸로 올라가고만 있었으니
지금도 역사의 강은 저렇게 흐르고 있는가
관음송처럼
보고 듣고 잊어서는 안 될 일
21세기 살아갈
우리들에게도 아직 유효한
역사의 혼이 살아 있는 곳
이렇게 고요히 흐르는 강가에 서면
사람들
고요한 마음에
파도에 욕심의 바다 요동하는
인생들이 가엾게까지 하네
산들의 능선이 너무나 의젓하고 늠름해
나의 머리를 절로 숙이게 하네 1997. 3. 7

나의 다음 코스는 관풍헌과 자규루다. 장릉은 이미 포기한 상태다. 먹다 남은 붕어빵을 입안으로 쑤셔 넣으면서 다음 일정을 향한 스케줄을 짜 본다. 여기서 관풍헌 가는 버스가 있는지, 교통편을 어찌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요즘처럼 자가용이 많은 시절에 이렇게 원시적으로 걸어서 여행을 한다니 내가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도 든다.

음료수 자판기에서 하나 빼먹고,,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지나가는 봉고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하루 일과가 너무 빠듯하다. 다행히 차를 세워 준 사람은 아주 남의 입장에 호감을 보일 줄 아는 사람으로, 이미 할아버지·할머니를 태워 읍내로 향하는 중이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정말 여행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일종의 히치하이킹이다.

나는 우선 버스 터미널까지 가기로 했는데, 내가 관풍헌까지 간다고 하니 자기가 지금 그 방향으로 가니 그곳에 내려 준다 한다. 정말 오래간만에 반가운 소식이다.

청령포에서 관풍헌까지는 4km나 될까, 차로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10분 거리 정도다. 나는 무사히 강원은행 앞에 있는 관풍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어 있다가 홍수를 피해 한동안 영월 객사였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곳이다. 그러던 중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넷째 삼촌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이로써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으며 145710월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단종의 나이 17세 때다.

이후 숙종 7(1681) 노산군으로 승격되었고, 1698년 단종으로 복원되었으며 능호도 장릉이라 하였다. 죽은 지 200년 만의 일이다.

관풍헌 주변의 문화재 관리가 엉망이다. 현실의 이해타산에 눈이 멀어 과거 역사에 대한 관리와 정리는 안중에 없다. 우리가 오늘도 하루 입에 풀칠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너무 과거에 대한 회고와 되새김이나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살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기란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다.

관풍헌은 자물쇠로 꽁꽁 문을 닫아 버려 들어갈 구멍이 없다. 우선 자규루를 살펴본다. 여기는 낮은 담 하나 사이로 보이기에 사진 찍기는 그 이상 좋을 수가 없다.

동헌 동쪽에 있는 자규루(子規樓)는 어린 단종이 피를 토하며 운다는 자규(소쩍새)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누각이다. 본래 세종 13(1431)에 이 고장의 군수 신권근이란 사람이 창건해서 매죽루(梅竹樓)라고 하였으나, 단종이 이곳에서 거처한 이후 자규루(子規樓)라 불리게 되었다. 단종이 지은 시 2수가 장릉지(莊陵誌)에 전해지고 있다.

>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울 제
> 시름 못 잊어 누대 머리에 기대앉았더라
> 네 울음소리 하도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잊으련만
>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 부디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 자규시

이 시는 근심에 잠겨 혼자 앉아 있으려니 자규가 우는데, 그 소리가 자신의 신세처럼 비참하고 처량하게 들린다고 읊고 있다.

> 한 마디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와
> 외로운 몸과 외로운 한 그림자로 푸른 숲에 깃들였다.
> 밤마다 억지로 잠들려 하지만 잠 이루지 못하고
> 해마다 한스러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원한은 끝나지 않네
> 두견이 울음 끊어라, 뫼부리에 조각달만 밝은데
> 피를 뿌린 것 같은 골짜기에는 붉은 꽃이 지네
> 아직 애끓는 호소를 듣지 못하고 하늘은 귀머거린가?
>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에게 귀만 밝게 하였는가 - 자규시

이 시는 구중궁궐을 떠나 두메산골 영월로 쫓겨나 귀양살이하는 외로운 자신의 심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아담하고 슬픈 사연이 담긴 누각은 너무나 관리가 엉성하고 어수선해 괜히 화가 난다.

나는 관풍헌을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정문을 포기하고 담 넘기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단종이 1457년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고색창연한 건물 3채가 나란히 이어져 있는 이 건물은 해방 전에는 영월 군청으로, 그 뒤에는 영월 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현재는 신라 시대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앞에 뜰이 넓게 있어 시원해 보인다.

지방 도시에 가면 흔히 보는 다방 아가씨들의 차 서비스. 그 복장이나 분위기가 너무나 노골적이고 온 읍내의 남자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여성이 우리 사회에서 취업할 방안이 아직도 저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 가야 할 과제다. 몸매와 외모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이 제대로 대접받는 사회는 오지 않는 것인가.

저녁 준비를 위해 근처 고려당에서 빵 몇 개를 산다. 오늘 저녁은 이것으로 장만한 셈이다.

버스를 타고 보니 버스 터미널까지는 서너 정거장, 걸어서 가도 10분 내지 15분 거리다. 여기가 이곳에서는 그래도 가장 번화가인 것 같다. 장릉 구경은 포기하고 말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영월의 별미인 장릉 보리밥집(0373-373-3986)이 장릉 바로 앞에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2시경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며 이것저것 오늘 서울로 갈 마음을 정돈해 본다. 나는 이제 영월에서 주천을 지나 평창 장평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오후 247분 차다. (3,400)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 장릉이 보인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왕릉으로서의 품위와 품격은 다 갖추고 있어 보였다. 서울 서오릉과 비슷한 분위기인데 그 규모가 작을 뿐이다. 장릉은 단종이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하자 그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한다. 이때 당시 영월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한밤중에 시신을 거두어 산속으로 도망가, 노루 한 마리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 한다. 떳떳이 시신을 거둘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좋은 터를 고를 겨를이 없었다. 쫓기는 와중에 마침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기에 엉겁결에 땅을 파고 시신을 묻었을 뿐인데, 풍수지리가들의 말에 의하면 단종의 묏자리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1517) 임금의 명으로 찾게 될 때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숙종 때인 1698년 비로소 왕의 대접을 받게 되자 그제야 '장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숙종은 어제시를 많이 남긴 왕으로 유명한데, 단종을 왕으로 복권시키고 그 묘를 능으로 추봉한 뒤 단종에 관한 시도 여러 편 읊었다. 그 중에 「노산군의 이름을 생각하며 감회를 읊은 시를 보자.

> 어리실 제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시고
> 멀리 벽촌에 계실 때에
> 마침 비색한 운을 만나니
> 임금의 덕이 이지러지도다
> 지난 일을 생각하니
> 목이 메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구나
> 시월 달에 뇌성과 바람이 이니
> 하늘의 뜻인들 어찌 끝이 없으랴
> 천추에 한이 없는 원한이여
> 만고의 외로운 혼이로다
> 적적한 거친 산속에
> 푸른 소나무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 노른 저승에 안으시어
> 엄연히 곤룡포를 입으시고
> 육신들의 해를 꿰뚫는 충성을
> 혼백 역시 상종하시리라

그 뒤 단종에 대한 엄홍도의 높은 충절이 인정되어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자리가 내려진 것은 물론, 비록 죽은 뒤이지만 엄홍도에게도 공조참판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한다.

해마다 한식날에 단종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1967년부터는 단종제로 이름을 바꾸어 이 지방의 향토 문화제가 되었다. 단종제 기간은 영월읍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때이다.

이곳을 직접 내 발로 밟지는 않았지만, 잠깐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그 왕릉의 모든 분위기를 내 마음속 깊이 간직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 보면 주 고객이 노인들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70년대 이후 이농 현상은 이제 극에 달해, 시골에는 어린이들과 노인들밖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 봉황으로> 영월에서 주천 평창 장평(3,400) 봉평까지 향한다


30년 전 전국 우리 문화유산답사를10년간 한 적이 있다. 90년대 지학사 시절 그 당시 기록과 저급한 시지만 그래도 남아있네요. 1997년 휴가 때 이곳을 방문했다

단종 유배지 노산대를 보며 - 청령포에서

남한강 상류 바람이
반짝이는 별빛이 아른거리네
유유히 흐르네
역사의 흐름을
순리를 거부한
역사는 아직도
그 사람들 못 나르네
발을 잠시 멈추게 하네
옷자락을 잡고
어린 왕의 하소연을 들어야 하네
봄 산아 잠시 후면
적막강산 금수강산 멀리 않으리오만
여기선 금수강산이
안 올 것 같은 것은 왜일까
저렇게 강은 소리 없이 그 은빛을 빛내며
흘러가건만
역사의 강물은
거꾸로 올라가고만 있었으니
지금도 역사의 강은 저렇게 흐르고 있는가
관음송처럼
보고 듣고 잊어서는 안 될 일
21세기 살아갈
우리들에게도 아직 유효한
역사의 혼이 살아 있는 곳
이렇게 고요히 흐르는 강가에 서면
사람들
고요한 마음에
파도에 욕심의 바다 요동하는
인생들이 가엾게까지 하네
산들의 능선이 너무나 의젓하고 늠름해
나의 머리를 절로 숙이게 하네 1997. 3. 7

한 편의 영화 때문에 청령포 인산인해군요

1997년 29년 전에 갔을 때 2-3명 밖에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