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90년대 백남준의 대략 흔적]
백남준 전문가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관장이 1984년 코펜하겐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을 때 사진
[1950년대 백남준의 대략 흔적]
<1949년> 경기중학교 다니던 백남준 홍콩 로이든 영어학교에 전학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중고 시절 영어권 학교 유학의 원조다. 백남준 여권번호 7번이다 <1950년> 백남준 조카 백일잔치를 위해 귀국하다. 그해 625가 나다.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 백남준만 피난을 가지 않다. <1951년> 백남준 가족 일본으로 이주하다. 백남준은 홀로 일본으로 가다 <1956년> 쇤베르크 논문으로 백남준 도쿄대 졸업 독일로 유학을 가다 캘커다와 카이로 경유에 뮌헨에 도착 그는 독일친구들에게 '나는 동양어 3개국어, 서양어 3개국어 하는 한국에 온 예술가"라고 소개했단다. 동경대 다닐 때 헤겔의 예술철학에 심취하다. 독일어도 열심히 공부하다. 백남준은 헤겔의 제1장의 내용을 복사해 적은 노트가 지금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관 아카이브실에 남아있다.
주역 번역판
1957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리는 현대음악 여름 강좌에 참석 슈톡하우젠을 만나고 1958년에는 존 케이지를 처음 만나다. 그가 주역코드를 보고 작곡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다 뮌헨, 프라이부르크 그리고 1958년 쾰른대학에 입학하다. 슈톡하우젠(전자음악의 창시자) 더 가까이 지내다 <1959년> 존 케이지 오마주 1편 독일예술계의 맨토인 '장-피에르 빌헤름'(2차대전 레지스탕스에 참가) 가 운영하는 갤러리 22에서 전시를 열다
[1960년대 백남준의 대략 흔적]
1964년 로봇 오페라 공연 때 사진 뉴욕 백남준 32살, 샬럿은 31살
액션음악의 시대, 백남준 30대 혈기왕성한 시기, 샬롯과 뉴욕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북구 등등 줄기차게 돌아다니다. 1964년 이전에는 독일 그 이후에는 미국 뉴욕에서 활동] <1960년> 존 케이지 2차 오마주전(쾰른에서) 그리고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 공연 중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다. 같은 해 크리스토를 만나다 <1961년> 액션뮤직 시작 '오리지날레' 공연 <1962년> 플럭서스 시작, 머리 위한 선, 네오 다다 공연 <1963년> 백남준 첫 전시 '음악의 전시' 그래서 피아노가 등장한다 부제 '전자 텔레비전' 그래서 TV가 등장한다 그해 요셉 보이스와 함께 일본에서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 공연 그리고 아베를 만난 로봇 K456제작하다.
-미국 뉴욕시대 시작
<1964년> 샬롯 무어만 만나 뉴욕생활 시작하다.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참가 '로봇 오페라' 공연 <1965년> 파리'자유표현의 축제' 참가 <1966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콘돌라 해프닝' 이때 백남준 무어먼에게 물에 빠지라고 지시해 물에 빠지고 결국 그녀의 몸에 피부형이 생겨 고생하다 <1967년> '오페라 섹스토로니카'로 무어먼 체포되다 뉴욕에서 대스캔들 우여곡절 끝에 승소한다 그래서 뉴욕에 백남준과 무어먼 최고의 스타가 된다 '인간첼로' 공연 <1968년>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개인전 전자아트 <1969년>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공연하다.
[1970년대 백남준의 대략 흔적_1970년대 기획한 '인터넷 드림']
<1970년> 백남준의 인터넷 드림 첫 작품은 바로 만든 'TV코뮌'이다. 왜 '코뮌'이 들어갔는가? 그것은 바로 가난한 사람이라도 정보와 지식의 혜택을 받는데 소외자가 없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1973년>에 인터넷 드림 2탄 중 하나인 '글로벌 그루브(전 세계 동시축제)'
<1973년> 인터넷 드림 2탄으로 백남준의 대표작 중 하나인 '글로벌 그루브(전 세계 동시축제)'를 발표하다 <1974년> 세계미술계의 지축을 흔든 'TV부처'가 발표된다. 동양의 사상과 서양의 기술의 융합을 상징하는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1974년> 자연과 문명이 반반씩 뒤섞여있어야 인류가 진정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주제가 담긴 'TV정원 '발표<1975년>에 TV 물고기를 발표 <1976년> 물고기 하늘을 날다 <1978년> 퐁피두에 선보인 'TV정원'이 다른 버전보다 가장 잘 설치되었다는 평가를 받다.
1975년 9월 27일 제1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땅에 끌리는 바이올린'
[1980년대 백남준의 대략 흔적]
1970년대 기획한 '인터넷 드림'을 위성아트로 반은 성공시키다. 그러나 백남준은 이 '정보고속도로'가 아직은 경비가 많이 드는 도박으로 생각하다. <1982년> 백남준 휘트니 비엔날레 참가 백남준 회고전을 열다. <1983년> 파리 퐁피두에서 삼색기 전을 열다 <1983년> 백남준 인터뷰 내용이 파리미술계에 소개 되어 충격을 주다 <1984년(위성아트 1번)> 파리에서 '굿모닝미스터오웰' 위성아트로 백남준은 전세계 알려지다 <1986년
(위성아트 2번)> 바이바이 키플링을 발표 <1988년> 국현에 다다익선 선보이다 <손에 손잡고(위성아트 3번)>발표하다.<1989년> 미테랑 대통령의 의뢰로 프랑스 혁명 200주년 대형 로봇 시리즈 발표
백남준 I '자화상(Self Portrait)' 혼합재료 비디오조각 61×69×40cm 1989 이 작품 안에 '혁명'이라는 말이 보이는데 이것은 바로 '정보혁명'을 뜻하는 것 같다.
1989월 7월의 백남준. 배경은 201개의 모니터로 이뤄진 4채널 비디오 설치물 <세기 말II(Fin de Siecle) II>(1989. 1220x327x152cm)
[1990년대 백남준의 대략 흔적]
'늑대의 걸음'으로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보이스 추모굿(전자굿: 피아노와 TV가 있다는 게 전통굿과 다르다)'
<1990년> '늑대의 걸음'으로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보이스 추모굿(전자굿)'을 선보이다. 백남준 전문가 장 폴 파르지에 이것을 현장 촬영하여 프랑스 전국 방송에 중계하다 <1992년> 백남준 국현에서 회갑 회고전(관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다)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전시에서 상금 3억을 받다. 이 전시를 서울에서 순회전하다(국현이 돈이 없어 백남준
한국에 3억[지금시세로 10억]을기부하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인포아트(전자아트전)
2000년 백남준 구겐하임 회고전 그리고 서울에서 순회전
“백남준은 시각적(문자언어가 아니라 시각언어로) 철학을 실현한 예술가였다. 글보다 은유(metaphor)로, 말이 아니라 이미지와 설치로 우상충돌(Iconoclash)을 표현했죠. 서구 근대화의 영향력이 해체되는 시점에서 그는 기존 담론과 다른 담론을 제시하며 근대화(내가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파시즘적인 사고)에 대항했어요. 동양 대 서양이 아니었어요. 예술과 철학과 사회를 연결한 더 큰 시각이었죠.” 백남준국제상 수상자 '라투르(Bruno Latour)'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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