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창신동에 돌아가는 게 나의 소원이야(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나의 소원이야. 창신동에)" - 백남준(2005년 1월 마지막 인터뷰) / 뼈에 사무친 듯한 그의 유언이 들려온다.
백남준 유언은 아니나, "난 한국의 문화자본이 되겠다-날 실컷 써먹어라!-날 천년 동안 우려먹어라"라고
백남준은 5살부터 18살까지 동대문이 보이는 이곳에 살았다. 그의 한국적 상상력은 바로 여기서 겪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술적 창조력을 낳게 한 원류(우물터)가 되는 곳이다. <안 보이면 망각>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사진이나 건물과 같은 그런 흔적이 없으면 다 잊어버리는 속성이 있다.
<서론 I> [백남준 다큐 영화 후기] 단군 후손 백남준 '홍익인간(두루 넓게 주변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 전형적 면모를 보여주다 이 영화를 보면 백남준 그동안 변방이었던 독일 미술을 유럽에서 1등을 만들어 주고, 미국 미술을 세계에서 1등을 만들어주다.
백남준 다큐 영화(TV는 가장 오래된 달) 10년 전 제가 백남준 연재 기사 25편 쓸 때쯤에는 백남준 자료가 많이 제한되었고 지금처럼 유튜브 자료가 없었어요. 지금은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다큐 영화가 나올 것인가 항상 의심했는데(?) 좋다. 백남준 대중화가 많이 확산되었다.
<서론 II> '바바라 런던'(뉴욕 MoMA 미디어아트 전문큐레이터)의 증언> // 그녀는 백남준을 '탁월한 외교관(흥행사)'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녀가 백남준 덕분에 록펠러 재단기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그만큼 외교관처럼 수완이 좋았다는 점이다. - 지난번 과천국립미술관 백남준 국제 심포지엄에서 밝히다.
<서론 III> '삼성 이건희 회장과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비교' : 삼성은 한국 경제에 기여하다. 백남준은 한국 문화에 기여하다. 물론 백남준이 훨씬 더 가치가 높죠. 그는 바로 한류의 원조이다.
오세훈 시장 때 이야기 인사동 문지기 석장승이 사라지고 나의 기사가 압력이 되어 복원되었으나 엉뚱하게 재설치되어 되었다가 또 박원순 시장 시절 인사동 모 정체 불명 관변 단체(?)의 압력으로 없어지고 다시 항의하고 결국은 사라지다
위 기사에도 나오지만 <사실 최근까지만 해도 한옥을 온몸으로 지킨 사람은 다 외국인(아래 피터 바돌로뮤)이다 어떤 외국인은 이 일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병사하다> //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자신의 한옥에서 문밖을 내다보고 있는 피터 바돌로뮤씨 ⓒ 연합뉴스 / <사실 최근까지만 해도 한옥을 온몸으로 지킨 사람은 다 외국인이다. 어떤 외국인은 이 일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병사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라진다>
[칼럼] 한겨레 글에서 김원 선생 '세계적 망신이다' / 제안: "광화문(외국 관광객 최다)에 백남준 동상 세우기"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시인 이상이 살던 서울 통인동 집이 헐릴 처지라는 말을 듣고 이어령 선생이 이 시장을 찾아갔다. 이 시장은 그 이야기를 듣고 선뜻 교부금 3억원을 주어 그 집이 보존되었고 오늘날 이상의 집-박노수 미술관-윤동주 시인의 하숙집터-수성동 계곡에 이르는 서촌의 핫 플레이스가 탄생해 젊은이들의 명소가 되었다. 또한 그 일을 계기로 기금 500억 원 서울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그때 서울문화재단은 이런 일 하라고 만든 것이고, 기금 500억원은 이런 때 쓰라고 모아둔 돈이다. - 기사 중에서
외국인들 백남준이 그렇게 유명한데 서울에 그의 동상이 없다면 창피하다. // 한국을 지킨 사람으로 문화로 한글 창제 세종대왕과 전쟁에서 나라의 위기를 막은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세계를 지킨 사람은 바로 백남준이다. 그는 원활한 소통으로 인류 평화 인터넷 제안했다.
[제2회 백남준 포럼] "백남준 기념관은 왜 지켜져야 하는가?" 왜 기념관 기억하라는 메시지다.
언제: 2023년 12월 9일(토) 오후 3시 어디서: 인사동 코트 본관 2층
<사람 눈에 안 보이면 사라진다>
[집 문턱을 수시로 마르고 닳도록 밟고 다니면 그게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된다. 시간이 좀 걸린다]
김구림 말대로 그런 '현상'이 '흔적'으로 남으면 유적지가 된다. 규모가 문제가 아니다. 그곳에 사람의 마음을 두고 오는 게 중요하다. 서울에서 백남준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소통과 경청의 귀재인 백남준은 시민들이 여기에 오면 반가워할 것이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또 우리의 말을 잘 들어줄 것이다. 그는 홍익인간으로 죽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득과 도움을 주려고 한다.
서울시는 2015년 <창신·숭인 도시재생>사업(28평 1000억이 투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백남준이 성장기를 보낸 창신동 197번지 일대 집터에 위치한 한옥을 매입, 기념관으로 조성하였다. 생가터는 3천 평이었다는데, 지금은 작은 집터만이 그의 삶과 작품을 기억하는 공간이 되었다. - 서울시
https://www.youtube.com/watch?v=wKSSxWaPuu4
[제2회 백남준 포럼 2번째 강좌 : 강사 김보람 서경대 교수(도시를 살리는 문화 예술: 일본 사례 중심으로) 종로 2가 인사동 코트 본관, 2023년 12월 09일(토) 오후 3~6시까지
'제2회 백남준 포럼 2번째 강좌 강사 김보람 서경대 교수(도시를 살리는 문화 예술: 일본 사례 중심으로), 동경대학(The University of Tokyo)과 외국인 최초로 일본의 정치사관학교 '마쓰시타정경숙' 대학도 졸업하다. 우리에게 파나소닉 창업자로 알려진 '마츠시타 코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가 1979년에 세운 정치경영사관학교다. 한국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것과 달리 일본인들은 그를 철학가이자 혁명가로 여긴다. 그가 쓴 책 <길을 열다>는 일본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 // 백남준에 대해서도 박식하다. 일본에서는 별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도 지역에서 그를 추앙하는 문화행사가 왕성하게 일어난다고 백남준 같은 세계 최고의 작가에 대한 추모행사가 한국에서는 별로 없는 것 같아 정말 이해가 안 된다고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 일본 같았으면 서린동(백남준 태어난 곳)과 창신동(백남준 자란 곳) 지역 사람들이 서로 백남준 태어난 곳이라고 맹렬하게 싸움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현상을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아톰기념관>이 당연히 있지만 <아톰>이라는 만화는 몰론 이 작가와 관련해서 그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활동을 했는지 관심이 매우 높다고. 관련된 동네마다 자기 출신 작가라고 전쟁이 난다고 - 김보람 교수
[백남준 기념관] 백남준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서울 시민들을 위한 사랑방이고 공부방이고 수다방이고 놀이방이다. 그런 열린 공간이 되기에 안성맞춤이다. 동대문이라 서울의 문화 중심 거리 종로에서 그렇게 멀지 않다.
그리고 근처 21세기형 현대판 문화재인 DDP 건물도 있다. 유럽 명소에 가보면 규모도 작지만, 우리가 보기에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도 그걸 세계적 브랜드화하는 유럽사람들 상술에 우리는 놀란다. 그렇게는 아니더라도 그런 벤치마킹은 필요하다. 백남준은 전 세계 예술인과 지성인이 아는 사람 아닌가.
[1] "백남준 기념관은 왜 지켜야 하는가?" <여러분의 도움 요청>
동대문구를 종로구 수준의 문화지대로 바꿀 절호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가까이 DDP와 한국이 같이 있어 유리하다. 이제 이곳을 문화지대를 거점화하는데 문화 향유의 질을 높이는 기여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백남준 기념관을 기점으로 동대문 구역에 이런저런 문화 공간을 확장하는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곳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문화 복지를 더 보편화해야 한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동대문구에 활력을 넣어야 한다.
[2] 백남준 기념관 '어떻게' 활용하면 될까?
- 서울 한복판 유일한 그래서 소중한 백남준 공간이다. 백남준 포럼 한 달에 한번 프로그램 맡기
"제발 날 써먹어라" - 백남준 날 골려 먹고 가지고 놀라고 한다. 날 비빔밥 만들어 맛보라고 한다.
<백남준 기념관 과거 행사 이모저모>
(1) '놀이방: 백남준 사랑하는 사람들의 <우정> 키우는 곳
(2) '공부방', 백남준 인물, 예술, 사상에 공부 이를 창조적 해석하는 배우는 곳 <학교명?>
(3) '사랑방', 금기 없이 백남준 이야기판 열기 <유머, 잡담, 수다 야자타임 가능한 곳> 근처 이웃에 두루 넓게 도움을 주는 곳
(4) '자료방' : 백남준 자료 수입하고 정리하고 기록하고 관련 책과 자료집 출판하는 곳
(5) '영상방': 자료방을 업적으로 영상물로 만들어 대중과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호흡하는 곳
(6) '전시방': 그의 사진 등을 모자이크 해서 가볍게 유연하고 유쾌하고 작품 선보이는 곳
(7) '전자방': 음악으로 하는 물리학 실험하는 실험 미술 전자 미술 역할을 하는 곳
(8) '치유방' 인생 고민을 상담, 백남준의 생각으로 해결 샤머니즘에 대한 인류학적으로 접근하는 곳
** 인터넷 [지우넷 혹은 지우회] '지성과 우정'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플랫폼
[3] 동대문 장소 탐구? 어떤 곳?
이곳은 예로부터 그리고 서울의 동부에서 가장 활발한 상거래(비단 모직 등 모든 옷감(원단): 섬유-방직 집결지)가 이루어졌던 상인구역이자 한말 1899년 개통된 전차가 있었을 때는 여기가 출발점일 정도로 교통 요충지였다. 지금은 패션 지대, 패션 사업의 중심디다.
[4] 백남준은 왜 동대문에서 태어났나? '백윤수-백낙승-백남준'
백남준 조부(할아버지) 백윤수는 한국 최초 사업가 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말 왕가의 장례용 옷감을 독점적으로 공급했다. 그렇게 해서 그 집안은 엄청난 부를 누렸다.
그러니 백남준이 동대문을 그거로 장사하는 거상의 아들이기 여기서 태어난 것은 당연하다. 백남준 부친 백낙승은 부친 사업을 이어받아 태창방직을 설립했다. 이 가문은 이런 옷감 원단 비단 사업을 했고 섬유업 모직업으로 확장시켰다.
큰 대문집 3천 평이고 캐딜락 자동차(고종 1대, 백남준 집안 1대)가 있었다. 여권 번호 7번(발행 순서) 그리고 여기에 거상들 남대문과 동대문에 많았다. 특히 동대문은 한말부터 포목이나 비단 같은 옷감 원단 시장이 활성화된 곳이다. 이곳은 지금 패션지구(국내 패션시장 규모 40% 차지/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다.
백남준 부친 백낙승 씨는 그런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니혼대 상경대와 메이지 대 법대를 나온 엘리트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지금 삼성가보다 더 큰 재벌이었다. 1930년대 방적기만 무려 1300대(아래 사진) 있었으니 그 사업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백남준은 황금수저 집안에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모든 게 풍족했다.
하나, 1909년 설립된 '고단샤(講談社) 일본 그림책은 물론 세계문학전집(일본어) 다양한 일본어 잡지와 화보 등 접하고 있었다 2) 피아노가 있었다. 큰 누이 배희득에게 어깨너머 피아노 배우고 후에 신재덕 선생(이화여대 음대 학장)에게 경기 중학교 입학하면서 정식으로 피아노도 배웠다. 3) 그는 그때 작곡가 이건우 선생으로부터 작곡을 사사하면서 그를 통해 쇤베르크 알게 되었고 그의 음반이나 악보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뒤쥐기도 했다. 4) 시절 백남준은 5편 작곡을 남겼다. 그중에는 조벽암 시에 곡을 붙인 것도 있다.
5) 축음기, 냉장고 등 일본 상류층 사용하는 가정 고급품이 많았다. 냉장고에는 당시에는 비싸고 드문 파인애플 통조림도 있었다. 그렇게 문화적,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둘, 그때 그가 가장 열심히 한 공부가 프랑스어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가 뒤늦게 부산에서 가족과 합류해 일본으로 갈 때 제일 먼저 챙긴 게 바로 '불어사전'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 입학을 했는데 상경대나 법대를 갈 점수임에도 예술대 입학해 부친의 큰 분노를 샀고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나쁜 부자간 회복 불가능하게 되었다.
[5] 백남준 어떤 사람? 새 1000년을 연 사람?
<한국이 세계사에서 1000년 2번 열었다. 한 번은 고려시대(직지), 한 번은 20세기 백남준(인터넷)>
한국은 1000년을 2번 열다 1) 세계문명사의 1000년을 새로 열다- 직지(1377년 금속활자로 인쇄) 그리고 고려 때 팔만대장경이 나오고, 드디어 조선에 들어와 세종대학이 이를 바탕으로 한글을 창제하다.
2) 백남준 1974년 인터넷(전자 초고속도로)을 제안해 또다시 1000년을 바꾸다.
백남준이라는 그 이름만으로 원자폭탄 정도의 대단한 파워, 창조적 샘이 되는 매트릭스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와 독일의 베토벤과 동급의 인물이다. 그의 이름만으로 세계적 문화유산이 아닌가
[6] 백남준 세계적으로 어떤 대우? 미국, 독일, 일본 등
1) 미국에서 : 미국이 백남준은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다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백남준 돌아가신 후 남긴 쓰레기(먼지까지도)를 7 트럭에 실어 워싱턴국립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에서 가져갔다. 물론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았다. 미술관에서 보존-분류하고 연구하면서 가끔씩 이 아카이브에 대한 전시도 한다. 한국 같았으면 다 쓰레기통이 들어갔을 것이다. <'TV 부처'를 생각해 보면 골동품 부처가 세계적 작품의 재료가 되었다 나머지 골동품이나 오브제가 뭘 하려 한 것인가? >
Staff members catalog objects at the NamJune Paik Archive at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백남준 뉴욕미술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사람이다. 60년대 미국의 촌스런 예술 표현의 자유(1967년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확장했고 / 70년대는 TV 부처와 유튜브 인터넷 예언해 동과 서를 네트워킹하는 지구적 예술을 구상했다. /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 1982년 휘트니미국 미술관에서 열린 미국 미술전에 백남준 작품이 이 넓은 공간을 거의 독차지했다. 이건 백남준이 미국 미술을 점령했다는 의미(?).
3백 년 역사가 안 되는 미국 작가 중 그렇게 세계적 작가가 많지 않았다(?) / 그리고 마침내 1984년 뉴욕과 파리를 연결하는 우주 오페라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그의 비디오 아트가 지구촌의 초고속으로 소통이 될 수 있는 미디어임을 보여줬고, 이를 위성 아트로 연결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2) 독일에서 : 독일의 모든 미술상을 백남준에 다 주다. 2007년 1주기에 백남준 얼굴을 대중교통(TRAM) 붙이고 다니다 독일은 백남준 때문에 유럽에서 미술 1등 국가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좋아할까요.
백남준, 남 잘 인정하지 않는 독일에서 베토벤보다 더 존경받다. <아래사진:백남준독일에서 받은 상을 설명 백남준전시기획자 김순주> 백남준은 1989년 2회 '쿠르트 슈비터스(K. Schwitters)'상, 1991년 '고슬리 황제반지(Goslar Kaiser Ring)'상,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독일대표) '황금사자상', 1997년 '괴테 상', 1998년 독일 구겐하임개관(1997년) 후 '토머스 크렌스(T. Krens)'상, 2001년 8회 '빌헬름 렘브루크(W. Lehmbruck)'상 등 독일 최고예술상은 다 휩쓸었다.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건, 알다시피 2차 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세계미술을,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했다. 독일은 변방이었는데 70년대 '요셉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혜성처럼 나타나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아트'를 창안해 독일미술을 세계적 위상으로 끌어올려 '아트스타'가 되었다.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을 뒤바꾼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다빈치' 같은 예술가였다"
내가 생각할 때 백남준이 독일에게 환영을 받은 건 바로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쟁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해소시키다. 그들은 굉장한 심적 압박과 정신적 충격을 받아 주체할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천 개 손도 모자란다는 '천수관음보살'처럼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해방감과 통렬한 웃음을 선물하며 새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그가 독일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징표다. 백남준은 명실공히 독일 '명예이주예술가'였다. 그래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그가 독일대표미술가로 나갔다. 그런데 그는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을 받았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많지만 최근 취재한 독일작가 '알프레드 하르트' 씨의 대담이 정확하다.
독일에서 백남준 추모행사 1주기 뒤셀도르프 시 어떤 것
2007년 백남준 추모 1주기 맞아 독일 뒤셀도르프 시에서 그의 삶과 예술을 추모하기 위해서 시에서 여러 가지 모색 끝에 뒤셀도르프 시내 모든 버스(tram)에 백남준 초상화 대문짝하게 붙이자고 합의했다. 그래서 뒤셀도르프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그를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게 하는 조례를 결정하다. 아래는 그 시내 버스전차(트램) 중 하나이다. Wenn zu perfekt, lieber Gott böse / “When too perfect, lieber Gott böse” – das Zitat des koreanischen Künstlers Nam June Paik bildet den Titel des Vortrages von Prof. Michael Schumacher, den er am zweiten Messetag, dem 8. Dezember von 16 bis 17 Uhr halten wird
[참고] 위 사진 아래 문장 해설
백남준의 “너무 완벽하면 신도 화를 낸다”는 말은 완벽함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 또는 선불교에서 말하듯이 "예술 작품이 너무 많은 의도를 드러내면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달아난다고 보았다. // 독일 교수 Michael Schumacher 아래 문장에 대한 해석
Wenn zu perfekt, lieber Gott böse / “When too perfect, lieber Gott böse” – das Zitat des koreanischen Künstlers Nam June Paik bildet den Titel des Vortrages von Prof. Michael Schumacher, den er am zweiten Messetag, dem 8. Dezember von 16 bis 17 Uhr halten wird
3) 일본에서 : 도쿄대학을 나오고 전자공학기술의 도움을 받다. 진공관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히데오 우치다와 첨단 기술자 슈아 아베 등에 도움을 받고 부인이 일본인이고 일본 예술가로(?)
4) 한국에서 : 독일서 만난 미술전문 서점주인 "백남준 외국에서 너무 유명한데 한국에서 아니라면서요?"
[7] 백남준 누구? 존경지수?
그는 한반도 화합과 공존의 수호신으로 갓이 잘 어울리는 1) 진짜 한국인이었고, 동시에 <TV 부처>를 통해 동서 문명을 연결한 6개국을 하는 2) '세계 시민'이었고, TV를 매체로 20세기 미술사애 새로운 장을 연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였다 // 백남준은 <보이스 추모굿>을 통해 죽어가는 세상에 기를 살려주는 몽골 노마드 코드 이어받은 3) '전자샤먼'이었고, <스키타이 단군>을 통해 두루 넓게 인류에게 도움이 되라는 4) '홍익인간 실천가'였고, <레이저아트>를 통해 가상공간에 그림을 조각하는 5) 첨단의 '실험미술가'였다 // <TV정원>을 통해 환경 대안을 상상한 6) '환경운동가'였고, 2차 대전 격전지 솔로몬 제도에서 <녹슨 탱크 위 퍼포먼스>로 세계대전 재발을 경고한 7) '반전주의자'였고,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통해 인간의 성 행복을 추구한 8) '정신분석가'였다 // <TV코뮌>를 통해 맑스가 언급한 착취사회를 이겨내려는 9) '인류동포주의자'였고 <전자 초고속도로(유튜브-인터넷)>를 통해 쌍방형 소통으로 지구촌 통합을 추구한 정보와 지식의 10) '공유주의자'였고, <글로벌 그루브> 통해 다른 문화 차를 극복하고 인류가 신나게 함께 놀아보자는 11) '축제주의자'였다 //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감시와 처벌 사회(Big brother) 대안을 내놓고, 독재 사회를 막고 모두가 고루 예술을 누리게 하려는 12) '문화 민주주의자'였고, 예술가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며 인류 방향을 제시한 13) '시대의 선각가'였다 // '내일은 아름다울 것이라'며 지구인 앞날을 낙관한 14) '세기의 예언자'였고, 선사시대를 알아야 30세기를 볼 수 있다면 선사시대와 30세기를 연결해 통시적으로 본 '인류학자'였다.
[약도] 오시는 길 / 백남준기념관 ***지하철 동대문이 아니라, <지하철 동묘 앞> 8번 출구에서 나와 3분 거리 교통 아주 편리하다 가다 보면 BYC 보인다. 그 골목으로 안으로 주소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종로 53길 12-1
최인준 작가는 누구인가? 관련기사
[2014.10.22 기사] 원래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였던 최상현(崔相鉉)씨의 집이었다. 후에 광주 MBC 창립을 주도했던 고 최승효 선생이 구입해 1999년 타계하기 전까지 살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 중이던 최상현 씨의 삼남 최인준(65)씨가 맡았다. 최인준 씨는 1년 정도 공을 들여 수리를 하려 했으나 15년 넘게 혼자 힘으로 집을 가꾸게 됐다. 그러다 2014년 10월, 일반인에게 개방을 했다.
최인준 씨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의 제자다. 지난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이기도 하다. 가옥과 현대미술가의 만남, 그렇게 해서 이 집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새로운 문화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근대 문화의 유적지라 할 수 있는 광주 양림동에 갈 때마다 늘 문이 닫혀 있어 아쉬웠던 곳, 이제는 그 비밀의 정원이 공개된 셈이다.
애프터 타임 인사동 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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