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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고려사에는 인터넷과 아카이브의 유전인자가

"고려사에는 인터넷과 아카이브의 유전인자가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도 같은 봤으면 하는 대 고려전 [오마이뉴스본기사] http://omn.kr/1g8ay

[고려 건국 1100주년 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190303일까지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전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 하는 국립중앙박물관 '배기동' 관장 

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Goryeo: The Glory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이 201933일까지 열린다.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고려미술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게 좋은 기회를 맞았다. '고려수도 개경', '고려 사찰로 가는 길', '()가 있는 공간', '고려의 찬란한 기술과 디자인' 4부로 구성됐다. 

이번 출품작에는 국보 19, 보물 33건 등 외에도 이탈리아 동양예술박물관에서 온 '아미타여래도'과 영국 잉글랜드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오사카 동양 도자미술관 등 4개국 11개 기관에서 대여해온 450여 점이 포함됐다. 그리고 해인사, 삼성미술관 리움, 호림박물관, 간송미술문화재단 등 34기관도 참여했다. 

고려수도였던 '(개경)' 북한에 있고 관련자료 등 제한이 있어 고려사 연구에 난관과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이 정도의 양과 규모와 수준의 전시가 마련되었다는 건 대단하다. 북한과 공동기획이었으면 더 좋았으리라. 기동 관장은 이번 전시과정에서 박물관 학예연구사 과로로 병원신세를 지는 일도 있었다고 지나가는 말로 얘기되다. 

태조 왕건과 개경과 그리고 북방정책

'고려태조상' 개성리 해선리 현릉, 높이 138.3cm, 조선역사중앙박물관, 북한국보 

고려는 '고구려(高句麗)'에서 왔다. 자연이 수려()한 나라, 금수강산이라는 뜻이다. 

우선 고려 태조 왕건은 과연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진다. 위 사진은 1992년 북한 개성 현릉(왕건릉)에서 발굴된 왕건상이다. 이 사진으로 보니 사람 반, 불상 반모습이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위엄이 대단하다. 또한 강한 카리스마도 느껴진다. 배 관장은 지금과 같은 남북 분위기 속에서 왕건상이 이번에 전시되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왕건은 호족출신으로 개경출신이다. 모든 계층을 끌어안은 통합적 지도자였다.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왕족과 호족 간 혼인정책을 썼다. 빈민대책인 '흑장(黑倉: 빈민구제 위해 봄에 곡식 나눠주고 추수 후 갚게 했던 기구)'이 있었고, 불교가 주류지만 유교, 도교, 풍수지리 등도 인정해 다원사회로 이끌었다. 중국문화도 나름 선별해서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고려가 통일과정에서 발해국이 마침 926년에 거란에 의해 망하자 합류시켰고 신라경순왕은 아예 귀순했다. 후백제도 접수했다. 신라가 통일국가였다지만 사실은 한반도 이남일 뿐, 그래서 왕건은 적극적 북방정책을 썼다. 그는 일 년 중 3분의 2는 개경에서, 3분의 1은 서경(평양)에 거하면서 지금의 평안도 청천강과 함경도 영흥만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태조 왕건은 즉위 이듬해인 919년 송악산 남쪽 개경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개경(Open Metro City)'인가. 쉽게 말하면 무역국으로 바깥세상을 향해 문을 활짝 열겠다는 뜻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13세기 개경에는 10만 가구가 살고 있었단다. 가구당 4명으로 계산하면 인구가 40만 명 정도다. 같은 시기 피렌체 인구가 10만이었음을 감안할 때 번성한 도시였다 

배기동 관장과 기자와 대화에서 수도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고려는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모든 면에서 개방정책을 썼기에 찬란한 융합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단다. 영어 '코리(Korea)' 고려에서 왔다는 걸 보면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은 '한류'가 있었던 것이다. 

물류와 무역의 나라

국립중앙박물관 제1기획실 벽에 게시된 '벽란도' 설명문 

위에서 보듯 고려시대 예성강 하류에 위치한 '벽란도' 다양한 물산과 사람이 드나드는 고려의 관문이었다. 또한 국제무역항이었다. 여기 개경과 가깝고 수심이 깊어 국제항구로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인천이 서울의 외항이듯 당시 '벽란도'는 개경의 외항이었던 것이다. 

려는 무엇보다 물류의 나라로 조운선이 끊임없이 오갔다. 송나라에는 금은, 나전칠기 인상 등 수술했고 비단, 악재, 서적, 자기 등은 수입했다. 거진·여진에는 농기구, 곡식, 포목 등을 수출했다. 일본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까지 금은, 비단, 토산물 등을 수출했다. 

고려는 동아시아에서 중심에 위치해 교역에 유리했다. 그러나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 갇혀 살고 있다. 남한은 본의 아니게 외국에 나갈 때 배나 비행기를 타야 하는 섬나라가 된 셈이다. 앞으로 북으로 가는 길이 열리면 더 역동적 교역국이 될 것이다. 

창의와 혁신의 나라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 중간코너에 게시된 해인사 팔만대장경 사진 

고려하면 우리는 역시 '고려청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된 '팔만대장경'을 떠올린다. 당시 중국은 ··명 등 왕조가 3번 바꿨고 고려는 거란·여진 등 외침과 시련과 역경이 많았던 시기다. 그럼에도 이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서양은 우리보다 뒤늦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유럽문명의 기반을 이루었다. 우리가 비록 인쇄술을 세계화는 못했지만 그런 창의성은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다고려사에는 인터넷과 아카이브의 유전인자가 보인다 그런 정신을 계승해 우리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망을 갖추고 있다. '인터넷''아이폰' 같은 아이디어를 낸 작가 백남준, 그의 피 속에 이미 고려인의 유전자 있었던 것인가!! 

만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불심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간행사업이었다. 이것은 또한 필경문화에서 인쇄문화로 패러다임을 바꾼 문화적 대사건이었다. 이런 정신은 조선시대에는 왕조실록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대장경은 단지 불교의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뛰어넘어 요즘말로 체계적인 지식과 자료를 중시하는 정보사회 기반이 되는 아카이브문화를 마련한 셈이다. 

남녀평등 속 자애로운 모성을 한 '관음' 유행

'금동십일면 천수관음보살좌상(金銅十一面觀音菩薩坐像)' 고려 14세기, 높이 81.8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고려는 군주를 스스로 '(동방)천자'라고 불렀다. 황제국이라는 소리다. 그렇게 자신감이 넘쳤다 이는 자신들이 불교국으로 포용과 통합을 중시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는 원래 세계주의다. 그래서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 누구나 부처라는 평등한 보편성에 근간을 둔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는 안타깝게도 이런 불교가 부패한 권력과 손잡으면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여간 고려는 불교의 영향인지 지금 우리가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남녀가 평등했다고 한다. 딸 아들 구별 없이 균등상속을 했고 여성등이 호주가 되었다. 재가도 자유로웠다. 당시 송의 사신이 "고려인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진다"는 기록할 정도로 이혼율도 높았다. 당대 청춘남녀들은 팔관회나 연등회 등에서 만나 자유롭게 연애도 나누었다. 

당시 사회적 문맥에서 볼 때 남성적 페르소나가 높은 '지장보살'보다 여성적 페르소나가 높은 '관음보살'많이 유행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관음이란 중생의 번뇌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하소연하는 소리와 원성을 잘 들어주는() 그런 보살이다. 가톨릭에서 '성모마리아'와 같은 역할이다. 

일본의 민예연구가 '무네요시'가 쓴 <조선과 예술>을 보면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한 관음은 고려인의 영혼의 위안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위 천 개 손을 가진 '천수관음보살' 바로 그렇다. 중생의 아픔과 고통을 너무 커서 보살의 천 개 손도 모자란다는 뜻이다. 

'수월관음보살도' 비단에 색, 103.5×53cm, 호암미술관(오른쪽) '수월관음보살도' 고려 14세기 비단에 색 114.5×55.6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고려시대 여성파워를 엿볼 수 있다 

한편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은 관음보살은 우아한 여성적 자태를 보인다, 아니 그것을 넘어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연장선에서 '수월관음도' 볼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을 넘어서는 제3의 성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종교를 넘어 고려미술의 절정을 이룬 최고 예술품이다. 그래서 국가 보물급이다.

위 두개의 수월관음보살도를 보면 거의 유사하나 약간의 차이도 있다. 왼쪽은 호암박물관의 소장품이고, 오른쪽은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이다. 관음보살은 바위에 왼쪽으로 비스듬히 걸터 앉아 선재동자를 인자하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신령한 그림에는 불교의례에 담긴 수수께끼 같은 깊은 비밀이 풀어줄 수 있는 단서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특히 '수월관음도'중생들 앞에 나타나 고난의 일상에서 안락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자비를 베풀어 주려 모습이 역력하다. 온갖 보배와 꽃과 과일이 풍부하고 바다를 접하고 있는 보타락가산도 보인다. 중생의 백팔번뇌를 위로하고 고생 끝이 낙이 온다는 그런 신심을 심어주면서 그들이 염원한 청정한 정토세상을 형상화한 도설(圖說)이라고 할 수 있다. 

수준 높은 디자인과 기술의 나라

'청자연꽃넝클무늬주자(靑磁堆花蓮唐草文注子)' 고려 12세기, 높이 33.8cm, 국립중앙박물관[왼쪽]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 무늬 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고려 12세기, 높이 37.5cm, 국립중앙박물관(국보 92) 

고려는 당시로는 최고의 하이테크인 청자를 만든 나라다 그만큼 기술과 디자인의 수준이 높았다 고려청자가 하루아침에 그렇게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11세기에는 '순청자', 12세기 초반에는 하늘빛의 절정을 이룬 '비색 청자'가 등장한다. 푸른 초록을 띤 은은하고 우아한 색채다. 12세기 중반에는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우는 기법의 상감청자까지 개발된다. 그 신비한 색감과 독창적인 기법은 중국도 능가해 천하제일 청자의 위상을 높인 기록적인 사건이었다. 

왼쪽 주자의 유연한 곡선미는 감탄이 금할 수 없다. 뚜껑장식만 봐도 2단 연꽃 위에 봉황이 앉아 있는 모습 기가 막히다. 또 오른쪽 깨끗하고 맑은 물을 담는 정병이 보인다. 여기에는 섬 주변 물가에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노저는 어부와 새들이 여기저기 한가히 날아다니는 모습이 새겨져있다. 느 화가도 이렇게 정겨운 풍경을 한 폭 그림에 다 담지 못할 것이다. 

'청자어룡모양 주자(靑磁魚龍形注子)' 고려 12세기, 높이 24.4cm, 개성 2, 국보 제61.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왕실미술의 본령을 보여주는 위 주자는 용머리와 물고기 결합하여 만든 조형물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제3의 동물을 상상하게 한다. 해태처럼 화재예방의 상징적 의미도 있다. 장식미의 여러 요소가 결합되었다. 우리는 파격적이면서도 균형감은 잃지 않는 이런 장인의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품격 높은 청자의 비색이 참으로 우아하고 위엄이 있다 

그밖에도 왕실이 미술후원자로 나선 결과 고려 공예미술의 절정인 나전칠기도 출현된다. 섬세하고 예리한 손길로 빚어낸 이 고급상품은 당시 최고의 중국수출품이었다. 이 시기에 '천산대렵도' 같은 회화작품도 나왔고, 서예에서 '구양순체''송설체'가 유행했다. 

그리고 당시 고려인은 오늘날 거리의 카페처럼 길목 좋은 곳에 '다점(茶店)'이 세워져 있어 차도를 즐겼다. 이런 관습은 국가의 왕실, 사찰의 각종의례에서 먼저 시행되었다. 그들의 삶에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거기서 담소를 나누고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자리였나보다. 하여간 고려는 이렇게 격을 갖춘 멋과 풍류를 즐기는 나라였던 것이다. 

'김정은위원장도 서울에 와 봤으면 하는 전시

'금동불감과 관음보살상' 금동은예 금도금 시기: 고려말 국립중앙박물관 

나는 전시장을 나오면서 고려사를 알아야 우리의 현대사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에서 유행한 '불감(휴대용 불상 Portable Shrine)'지금의 스마트폰을, 고려의 인쇄술은 지금의 인터넷을, 팔만대장경은 지금의 아카이브 라이브러리를 연상시킨다. 

하여간 역사는 오늘를 진단하고 내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그런 면에서 고려사와 현대사를 비교해보는 일은 흥미롭다. 우리는 그런 비교를 통해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고려국이 보여준 '창의성, 포용성, 융합성, 개방성, 다원성' 등을 현대화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시급하게 요청된다는 시대의 정신인 것 같다.

끝으로 한마디 추가하면 지금 같은 남북 분위기 속에서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내년 3월 전 서울을 방문해 이번 전시를 관람하면 좋겠다. 그리고 배 관장이 앞에서 업급한 대로 북한이 소장한 왕건상(북한보물)을 김정은 서울 방문에 맞춰 서울로 보내오면 이번 특별전을 더욱 빛날 것이다.

[전문가초청학술강연회] 일시: 220191010() 320191024() 420190214() 장소: 대강당, 사전예약 필요 없음. 자세한 정보는 누리집 이밖에도 연계 교육 프로그램은 이어갈 예정이다. 박물관역사문화교실부터 가족프로그램까지 7개의 프로그램이 올해부터 내년까지 전시 기간 중 이어진다(www.museum.go.kr)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