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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역사의 고비 넘긴 3명의 할머니전사 傳記

[MMCA 현대차 시리즈 2017 임흥순_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믿음, 신념, 사랑, 배신, 증오, 공포, 유령] 서울관 5, 7 전시실, 미디어랩 및 서울박스에서 11월 30일부터 2018년 4월 8일까지 열린다. *구글에서 유목민 치면 첫 페이지에 나왔는데 이젠 안 나온다. 누가 이런 바보짓을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http://omn.kr/p8hd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2015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작가 ‘임흥순’의 대규모 개인전

[1]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 희생되고 소외된 여성들의 삶을 ‘믿음, 공포, 신념, 배신, 사랑, 증오, 유령’이라는 상징언어를 중심으로 서사적 이미지로 복원한 신작 10여점 전시 [2]11월 30일(목)부터 2018년 4월 8일(일)까지 서울관 [3] 12월 한 달간 수도권 약 120여 개 영화관에서 홍보영상 상영에 대한 간단한 설명

한국근현대사는 한마디로 역사의 질곡에서 수없이 아리랑고개를 넘어선 생활전사 (꼬부랑)할머니들 덕이다. 그들에겐 역사에 대한 낙담이나 절망이 들어갈 틈이 없다 어설픈 고통은 비관주의를 낳지만 엄청난 수난은 낙관주의를 낳는다 –임흥순 전시후기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계곡

임흥순의 영화는 매우 시적이고 상징적이다 그의 영화는 그 누구도 만들수 없기에 예술이다. 기술과 예술의 차이는 뭔가 기술을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누군가 따라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술은 대단한 성과를 낸 좋은 작품이지만 누군가 따라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일반영화와 예술영화의 차이점은 2 channel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서로 다른 내용을 동시에 상영할 수도 있고 그 형식이나 내용에 전혀 자유롭다 틀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때로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보다 능동적인 모습을 그 과정을 통해서 보여줄 수도 있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그러니까 예술영화를 영화라는 붓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반영화와 다르다 그리고 자연을 접근하는 방식도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가깝다. 동양의 물아일체적 관점을 보인다. 자연과 인간과 우주를 위계가 없고 완전하게 평등한 위치에 두고 일체의 풍경을 명상적인 분위기에서 관조한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계곡

영화라는 매체가 어두울 수록 잘 보이는 그런 묘한 매력이 있다면서 역사의 어둠이 그의 작품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반어법으로 설명하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계곡

세계적인 작가의 면모와 실력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 넓은 공간의 미디어랩에는 아무작품도 설치하지 않고 벽을 붉은 색으로 칠하다 붉은 색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불식시키는 장치로 관객이 스스로 묻고 답하면서 생각해 보게 하는 공간으로 남겨 두다

예컨대 민담에서 나오는 꼬부랑 할머니를 연상시킨다. 우리가 어설픈 고통을 당하면 비관적이 될 수 있지만 정말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낙관적이 되듯 꼬부랑 할머니는 수많은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서 역사의 맹렬한 전사가 된다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계곡

1970년 전태일이 노동자 선언을 한 이후 거의 50년 만에 한국에서 근현대사를 포함한 노동문화를 주제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시각매체인 미술(영화)로 그 찬란한 꽃을 피우다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태일은 당시 참혹한 환경에서 참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지만 임흥순은 그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서울박스-할머니가 구한 나라

작가는 붉은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김동희 할머니가 너무나 좋아하는 색이 붉은 색이라 사용했다고 한다. 붉은 색의 복권을 선언하다. 이 색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관객이 색에 대해서 편견을 최소화했으면 한다고 말하다  

사천왕상문

사천왕상은 전시의 중개자 혹은 미디어다. 임흥순작가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유령'이다 이것은 백남준에 비유하면 전자셔면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시대의 악령을 쫗아내는 저력을 보이는 예술가(전령사)를 상징하는 것 같다. 예술가는 단지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그 역사의 트라우마를 끌어안고 감싸고 어루만지면서도 치유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귀신과는 차원이 다른 신명의 에너지를 가진 유령이 아닐까 싶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계곡 김동일 할머니 뜨개질 등 자수작품 등이 보인다

이번 임흥순의 작품의 주인공은 4명의 할머니다.

이번 전시 4명의 할머니 정정화(1900-1991), 김동일(1932-2017), 고계연(1932~), 이정숙(1944~) 역사 속에 소외된 이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은 사실 근현대사의 주인공이다 그들이 전 방위에서 그 모진 역사를 이겨낸 전사들이다

그러나 너무나 겸손해서 이런 이야기를 숨기고 별로 중시하지도 않았다 작가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소중한 역사경험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현대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결과보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관객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적금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죠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과거라는 시를 써보자

이번 전시는 4명의 할머니(정정화·1900-1991, 김동일·1932-2017, 고계연·1932~, 이정숙·1944~)의 삶을 할머니와 지인과의 인터뷰, 유품, 아카이브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이를 통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흩뿌려진 그녀들의 부서진 시간을 ‘믿음, 공포, 신념, 배신, 사랑, 증오, 유령’이라는 상징 언어를 중심으로 서사적 이미지로 복원하고자 한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과거라는 시를 써보자

이번에 임흥순을 이번 전시에 그런 무명의 그러나 그 내용은 전설적이고 영웅적인 4명의 할머니 설화나 서사를 통해서 그의 예술이 추구하는 미적 성취와 철학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구현하고 있다 물론 그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은 역시 영화다 아래 사진은 바로 그런 할머니 전승은 이어가는 젊은 세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임흥순은 4명의 할머니를 추적해 만났고 인터뷰했고 그들의 놀라운 생애를 찾아냈다 그리고 시간언어로 일부 복원해 낸 것이다 그 중 김동일 할머니(1932-2017 제주출신 항일운동의 자녀 제주 43항쟁 당시 토벌대 피해 한라산에 올랐고 이후 지리산 일본 오사카로 밀항하여 평생을 일본에서 살았다

전시준비과정 중 돌아갔고 유족은 유품 4000 점을 이번 전시에 기증하다)의 컬렉션한 거대한 보물을 깨냈다 그것을 이번에 전시하게 된 것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난 규모이고 그 자수 작품 수준도 높다 역사에 겪은 수많은 아리랑 고개를 넘기 위해서 이렇게 자신을 정화하면 다스리다 보니 이런 작품과 컬렉션이 되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임흥순이 만난 김동일 할머니의 컬렉션은 그 엄청난 분량에서 일단 놀라게 된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난 물량이다 부르주아의 예술 오브제아트와 비교한다는 것이 좀 무리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수준도 높다. 시대를 앞서가는 포스트모던한 패션감각과 다다익선이라고 그 경이롭다. 다양성과 예술적으로 작가에게 주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보고가 되고 있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임흥순 작가에게는 이런 '유령'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을 한국근현대사를 올곧게 온몸으로 당당하게 겪어낸 생활전사들을 황금광맥처럼 찾아내다 작가란 결국 역사가는 아니지만 역사의 뒷면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사연을 발굴하는 비저너리아닌가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94명의 할머니 중 김동일 할머니의 컬렉션은 자신의 삶의 고통과 역사의 아픔을 감내하고 승화시키는 기재로써 이런 수공예 작품을 만든 것 같다. 솜씨도 대단하시고 분량적이나 질적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일종의 무명 예술가인 셈이다 한 시대를 맨 앞에 서서 살아간 전위적 생활전사였던 것이다

할머니들이 남긴 유품과 이에 대해서 설명하는 임흥순 작가 [하단] 가옥 독립운동가 '이동령'이 중국에서 살았던 집 모습을 그대로 형상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김동일 할머니의 구두 컬렉션 등등 액세서리도 보이다.

이 이미지들은 그 시대와 삶의 증거이자 지금 우리의 모습과 시선을 담는다. 전시 부제목의 ‘유령’은 중의적인 의미로, 이데올로기이자 이들을 찾아다니며 바라보는 작가를 은유한다. 또한 죽었으나 죽음을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 서술의 진실과 거짓의 간극을 부유하는 수많은 민초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민중은“도대체 우리를 갈라놓은 것들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할머니들 모진 세월 속 수많은 죽음의 고비 속에서 살아남아 남긴 일종의 유언에 가까운 발언들이 전시장 곳곳에 영문번역과 함께 적혀 있다 일종의 텍스트아트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이동사진관 리어카

또 다른 고계연 할머니(1932- 경남 삼천포출신 1950년 토벌대 피해 지리산으로 올라간 아버지 오빠 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3년 간 빨치산으로 지냈다 이후 광주에 정착 하다 당시 일본으로 피신한 후 행방을 알 수 없는 둘째 오빠를 제외하고 모든 가족을 산에서 잃었다 실제 낚시를 좋아하다 이번 전시에서 상징 이미지로 배를 설치하였으나 다른 인물과 공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그 의미를 확장하다)는 낚시가 취미다

그와 관련된 여러 낚시 도구와 관련된 장비와 회화 등이 같이 전시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가 처절한 역사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것을 다스려가는 묘안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따라서 이번 전시 공간은 완성된 작품을 진열하는 곳이 아니라, 정식 개막(11월 30일) 전까지 사전공개와 워크숍을 통해 작가가 구성한 이야기의 서술에 따라 제단(祭壇), 영화 세트장, 소품실의 형태로 변주되고, 변화되는 공간, 설치 과정 공개 등의 다양한 모습을 선보이는 공간이 된다. 작가는 이 공간에서 사전 워크숍을 통해 관람객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한다.

임흥순의 예술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그것을 신목을 닮았다고 할까 그는 유령의 미학을 창조하고 있다 유령은 악령을 다스리기도 하지만 일체의 귀신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는 포용과 넓게 안을 수 있는 여유와 여백도 같이 보이는 것 같다 무기와 신기와 광기를 동시에 한 몸에 담은 존재가 유령이 아닌가 싶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미술관을 완전히 새로운 공간, 산 자도 죽은 자도 공존하는 이계(異界)로 설정한다. 주 전시공간인 5전시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세계로 건너가기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경계이자 중간 지대이며, 수많은 죽음과 희생의 역사를 감내한 평범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곳이 된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고목

나무는 하늘과 땅,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구조물로 전시를 통해 작가가 긍정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매개체 [계단] 일제강점기 한국에 등장한 일본식 서양건축물 이미지를 계단으로 형상화하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구조물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시나리오 그래프

임흥순 작가 한국근현대사(1900-1910년부터 1969년까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네요 4분의 할머니의 삶을 통해서 한국근현대사를 재조명하고 다시 써보는 작품이다 요즘 미술계에서 근현대사와 관련된 주제의 작품이 쏟아져나오고 있죠. 작가가 선정한 가장 중요한 사건 100가지 이상을 엿볼 수 있군요 그는 자신의 작품은 Never-end Project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할 작업이 너무 많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작가저서

전시를 통해 작가는 갈라진 우리 사회의 여러 시대를 넘나들며 개인과 역사를 재구성하며 이름 없는 이들에게 다시 생명을 되찾아 주는 작업에 나선 셈이다.

작가의 작업노트

그는 예술을 통해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예술로서의 역사쓰기를 제안한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_시나리오 그래프

이번에 아카이브 코너에서는 현대미술과 영화를 넘나드는 임흥순 작가(48세)의 저서와 창작 메모 작업노트(자세히 볼 시간이 부족하다) 드로잉 그가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공사노동자였고 작가의 어머니는 40년간 봉제노동자였고 작가의 여동생은 판매노동자였다

굴곡된 현대사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과 가족을 보면서 이렇게 가족을 힘들게 하는 어디서부터 유래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작품명인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모든 자료를 집적하는 예술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꿈을 꾸고 그 고통을 치유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임흥순 작가

"나는 장의사다. 우리 역사에서 언제나 소외된 피해자였던 분들의 삶을 정리해 드리는 것, 그게 내가 하는 예술이다" -한국일보 인터뷰 내용 일부 >

남성의 역사는 남성 스스로 이미 많이 기록했다. 여성에겐 기회가 없었다.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에 매력을 느낀다. 세상의 중심에서 멀리 물러나 있었기에 더 넓고 지혜롭게 본다. 내 어머니도 그렇다. 평생 봉제공장 시다(보조공)로 살았지만 더없이 밝은 분이다. 사회를 치유할 희망을 여성들로부터 찾았다. 나이 든 여성의 주름살이 좋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수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 설화, 무속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다. 앞으로도 남성 이야기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비주류의 역사를 다루는 영화 감독이 현대차라는 대기업 후원을 받아 전시하는 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나(현대차는 국현이 매년 선정하는 중진 작가 개인전에 10년 간 120억원을 지원한다). 이제 명실상부한 주류가 된 건가.

“그 돈은 기업에서 나왔지만 노동자의 돈이기도 하다. 지원금을 전시에 잘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류가 아니라고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큰 상을 받고 괜찮은 제안들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서울대ㆍ홍익대 미대 출신이 아닌데도 잘 됐다는 선례가 된다면 좋은 일이다. 다만 기득권을 활용해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식의 욕심은 없다.” [출처] http://hankookilbo.com/v/113060f39c4a410f838d18cc73209c9c

임흥순 작가

[개인전] 2017 MMCA 현대차 시리즈 2017: 임흥순_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믿음, 신념, 사랑, 배신, 증오, 공포, 유령,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5 연출된 기억의 특이성, 엔젤스 바로셀로나, 바로셀로나, 스페인 2015 동아시아 비디오 프레임: 서울, 포리아트뮤지움, 포리, 핀란드 2015 환생, MoMA PS1, 뉴욕, 미국

[작품 소장] 퐁피두센터(파리) 프랑스/로스엔젤레스 카운티미술관(LA) 미국/샤르자 미술재단(샤르자), 아랍에미리트/서울시립미술관(서울), 한국/국립현대미술관(한국)/평화박물관(서울), 한국

2013 <비념>

2013 <비념>으로 가는 세개의 통로 가족, 이웃 그리고 역사(특별전), 문지문화원 사이, 서울 2011 비는 마음, 스페이스 99, 서울 2009 행복으로의 초대, 스페이스 크로프트, 서울 2009 월남에서 온 편지, 스톤 앤 워터, 안양 2006 매기의 추억, 대안공간 풀, 서울 2003 추억록, 일주아트하우스, 서울 2001 스쿠터를 타고 가다, 갤러리 O2, 서울 2001 답십리 우성연립 지하101호, 대안공간 풀, 서울

위로공단

위 장면에 대해 작가는 "봉제공장에서 폐에 쌓이는 검은 먼지와 소음을 흰 색 천으로 가려주면서 우리가 묻어두고 터부시하고 버려두고 관심을 가지지 않던 잃어버린 사회 이야기를 은유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임흥순 감독은 위로공단을 찍기 위해서 총 3년의 제작기간 걸렸다. 한국, 캄보디아, 베트남 2만2000㎞를 이동하며 동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임 감독은 ‘여공(비하하는 말 공순이)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까지 총 66명의 노동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그중 22명을 영화에 담았다

[수상] 2015 제 5회 노동문상, 노동예술부문, 고려대 & 매일경제신문, 서울/2015 제 35회 영평상, 독립예술지원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서울/2015 제 4회 부일영화제, 유현목예술영화상, 부산/2015 제 3회 무주산골영화제, 무주관객상, 무주산골영화제 조직위원회, 무주/2015 제 56회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위로공단), 베니스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이탈리아/2014 제 40회 서울독립영화제, 한국경쟁 특별언급(위로공단), 한국독립영화협의회, 서울/2014 제 2회 인천다큐멘터리포트, 베스트 러프컷 프로젝트 수상(위로공단), 인천영상위원회, 인천

[예르미타시박물관展_겨울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 2017.12.19~2018.04.15까지 국립중앙박물관기획전시실에서 전시품: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니콜라이 구리예프 백작의 초상> 등 프랑스회화, 조각, 소묘 89건 서울 눈 오는 날 예르미타시박물관 겨울궁전에서 프랑스거장 미술품이 오다

예르미타시박물관 [아래 관련뉴스 러시아 상류층의 프랑스앓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182100005&code=960202

"예카테리나 2세가 수집한 프랑스 거장들의 향연(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가 유럽을 보는 창이다

*2018년 무술년 개의 해 조신시대 동물화 중 개 그림

이암의 <모견도>는 조선시대 동물화 중 가장 품위있는 그림이다.수묵위주에 필법으로 그려진 자애로운 어미 개와 새끼 강아지의 천진스러움이 섬세하고 풍부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목걸이 장식도 잘 되어 있어 당시의 장식미도 엿보인다. 반면 뒷 배경의 나무는 거칠게 그려져 부드러움과 거친필치로 그 인상을 대담하게 묘사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관장과 예르미타시 박물관 관계자 [질문1] 톨스토이 소설을 읽다보면 프랑스어 원어가 그대로 나온다. 당시 러시아귀족들이 교양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은 이렇게 가깝게 지냈나?

[대답] '예르미타시 박물관 수석큐레이터'

아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말하는 것 같은데요. 프랑스와 러시아는 여러 번 전쟁을 하기도 했었죠. 톨스토이의 이 소설은 바로 이런 양국의 전쟁을 주제로 한 건데요 1815년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와 프랑스는 우호협정을 맺고 양국은 100년이나 지속적으로 평화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보니 양국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교류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 보이는 전시장 입구

[질문2] 러시아인의 프랑스미술 취향의 특징은 뭔가?

[대답]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르네상스가 꽃피운 이탈리아 로마가 오랫동안 유럽문화의 중심지였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도 있지만 당시 유럽의 지식인은 이탈리아의 여행하는 것이 대 유행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 파리가 유럽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러시아인에게 파리는 모든 새로운 유행과 문화의 조류가 시작하는 곳이다. 그래서 러시아인은 프랑스문화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르미타시박물관

참고 1777년 표트르대제가 파리를 방문해 베르사유궁에서 회의를 가졌다 올해가 표트르디제가 파리를 방문한지 300년주년이다 그래서 최근 양국정상은 여러 의견차로 만나지 못하다가 최근 만남이 성사되었다

박물관 측은“이번 전시는 지난 26년 동안 이어져 온 예르미타시박물관 과의 오랜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품의 정수인 프랑스 미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프랑스 문화에 대한 러시아인의 관심을 살필 수 있는 특별한 자리가 될 것”이라 밝혔다.가지고 그를 통해 프랑스작품 개인 소장자 작품 중 다량을 구입하다.

작품설명하는 전시과 이양수 연구원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소장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계몽 군주를 자처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비롯한 동시대 저명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유럽 각지의 저명한 컬렉션을 구입했다.

이번 전시와 관련된 자료를 판매하는 아트숍

그녀의 미술품 수집 열정은 동시대 귀족에게도 이어져, 18세기 말 이후 많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들이 러시아의 공공건물과 상류층 저택을 장식했다. 이러한 개인 소장품들이 20세기 초에 국유화되면서, 오늘날 예르미타시박물관은 다채로운 프랑스 미술 소장품을 보유하게 되었다.

디드로의 말 1767년 살롱비평

이번 전시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를 비롯하여 프랑스 미술을 사랑했던 여러 수집가들이 소개되어, 작품 수집의 역사와 함께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화적 맥락에 대해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제1부] 전시의 첫 머리의 제목은 “고전주의, 위대한 세기의 미술(Classicism: Art of the Great Century)”다

니콜라 푸생(1594-1665) I '십자가에서 내림' 1628-1629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등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의 작품을 통해 프랑스 미술이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고 유럽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한 17세기의 프랑스 미술을 소개한다.

17세기의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통치 아래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위대한 세기’로 불리는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젊은 프랑스 화가들이 돌아와 왕실 주도의 화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프랑수아 페리에(1590-1650) I '전쟁의 알레고리' 1638-1645

보편적인 원리와 질서, 안정과 통일성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양식이 17세기 프랑스 화단을 주도했다.

피에르 미냐르(1612-1695) I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134.5*102cm 1634-1640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클로드 로랭(1602-1682) I '이탈리아 풍경' 75*100cm 1648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평민의 일상적인 모습을 이상화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렸던 르 냉 형제의 작품(5번째작품)도 큰 인기를 얻었다

알렉시 시몽 벨(1674-1734) I '시녀의 초상' 115*90cm 17세기말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르냉 형제들 I '술집의 농부들' 78*94.5cm 1640년대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제2부] “로코코와 계몽의 시대(Rococo and the Age of Enlightenment)”

니콜라 랑크레(1690-1743) I '코르네유의 비극 중 한 장면' 78*94.5cm 1734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여기에서는 18세기로 접어들어 귀족들 남녀 간의 사랑과 유희 장면을 즐겨 그렸던 로코코 화가의 작품과 그 정 반대편에 서 있는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에 따라 새로운 감각으로 제작된 풍속화, 풍경화를 만날 수 있다. 프랑스 미술은 19세기로 접어들어 큰 변화를 맞이한다.

위베르 로베르(1733-1808) I '콜레세움' 98*135cm 1761-63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클로드-조세프 베르네(1714-1789) I '티폴리의 폭포' 98*135cm 1761-63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18세기 초,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침체 속에서 야외에서의 화려하고 우아한 연회 장면을 담은 그림이 인기를 얻었다. 아카데미의 화가도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면서 신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등 점차 새로운 경향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한편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의 가치를 담은 풍속화나 정물화, 초상화가 유행했고, 새롭게 풍경화에 관심도 높아졌다.

알렉시 그리무(Alexis Grimou 1678-1733) I 무대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 74*59cm 1730년대

[제3부]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Art in the Age of the Revolution and Romanticism)”

장 앵그리(1780-1867) I '니콜라이 구리예프 백작의 초상' 107*86cm 1821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에밀 오귀스트 카롤뤼스뒤랑(1837-1917) I '안나 오블렌스카야의 초상' 120*77.5cm 1887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프랑스 미술계에 일어났던 여러 변화를 소개한다.

장 게슈티(1796-1844) I '사냥하는 프랑수아1세' 57*54*29cm 1842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영웅적 초상화를 비롯하여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문물에서 영감을 얻었던 낭만주의 화가의 작품이 선보이며,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와 카미유 코로,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 사생으로 인상주의를 예고했던 화가도 눈길을 끈다.

그라네(1775-1948) I '로마 바르베리니 광장의 카푸친 교회 내부' 174.5*126.5cm 1775-1948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19세기로 접어들어 프랑스 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변화의 세기를 맞이한다. 전주의’를 계승한 화가들은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발전시켜나갔고, ‘낭만주의’ 화가는 현실에서 벗어나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신비로운 이야기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했다.

3부 전시실 전시장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나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로 나간 화가는 변화하는 빛과 대기에 관심을 두면서 이후 인상주의의 출현을 예고했다

카미유 코로(1796-1875) I '숲에서 소에게 여물을 먹이는 소녀' 47.5*35cm1865-1870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19세기 프랑스 조각작품 헤르메스

19세기 다양한 조각 작품

[제4부] '인상주의와 그 이후(Impressionism and Beyond)'는 고전적인 예술 양식과 결별한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조명한다.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모리스 드니, 앙리 마티스, 앙리 루소 등 인상주의 이후 근대 거장의 작품은 20세기 미술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준다. / 기타 조각작품 컬렉터 사진 등등

클로드 모네(1840-1926) I '지베르니의 건초더미' 60.5*81.5cm1886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외젠 카리에르(1849-1906) I '어머니와 아이' 1849-1906cm 880년대 말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앙리 루소(1844-1910) I '방브 수문 좌측의 벙어시설 경관' 31*41cm 1909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19세기 말 이후 고전적 예술 양식과 완전히 결별한 혁신적인 화가가 등장했다. 1880년 이후 모네는 대상의 형태보다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하는 색채의 표현에 더욱 집중했다.

베르나르 뷔페(1928-1999) I '겨울궁전' 170*30cm 1992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잔은 자연을 본질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원시주의 화가 앙리 루소, 야수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는 인상주의 이후의 혁신을 이어나갔고, 이들은 20세기 미술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

러시아의 컬렉터 세루게이 수킨(1854-1936)과 이반 모로조프(1871-1921)

[신여성 도착하다_한국 근현대사 여성적 서사(herstory) 다시 그리다_<사람성원리>]전

-근대기는 미술뿐 아니라 영화, 광고,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 여성의 신체가 이미지로 소비된 시대

[관련뉴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262126015&code=960202

덕수궁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2017년 12월 21일(목)부터 2018년 4월 1일(일)까지 대중매체 자료 500여점 공개, 특히 정찬영의 <공작>(1937),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60년’展 이후 45년만의 공개하다. 68점 소개하다.

<부인> 표지화 노수현 개벽사 1922.7 I <부인> 표지화: 노수현 개벽사 1922.8

[요약] 근대기의 시각문화를 통해 신여성(新女性)을 조명한 국내 첫 전시_역사, 문화, 미술의 근대성을 남성이 아닌 여성을 통해 가시화와 근대기 신여성의 등장, 존재, 의미를 보여주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소개하다.

*신여성이란? 근대적 지식과 문물, 이념을 체현한 여성을 일컫는다. 1910년대 여자 일본유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 초 중등교육을 받은 여학생들과 여성 민권과 자유연애를 주창하는 ‘신여자’를 뜻하는 경향이 컸으나, 점차 양장을 입고 단발을 한 채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서구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모던걸’, 나아가 시부모와 떨어져 단가살림을 하면서 애정적 부부관계를 운영하는 ‘양처’의 의미를 포괄하는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세계사 차원에서 보면 신여성은 1890년대 영국의 ‘New Woman’ 열풍에서 시작하여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간 새로운 여성성의 아이콘이다. 공통적으로 근대적 지식을 소유하고 경제적 독립성을 누리고 남성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를 벗어나 소비와 유행의 주역으로서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추구한 여성들을 일컬었고, 각 사회마다 이 여성들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있었다.

신여성의 의미와 논란은 비서구식민지사회에서 그 내용과 초점이 다르다. 영국에서는 치마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신여성을 기존의 남성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데 비해, 식민지 조선에서는 구조선 사회를 벗어나 근대적 이념과 문물을 추구하는 존재로 형상화했다. [미술관자료]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인사말

19세기 유럽이나 미국에서 불평등 사회 자유와 해방을 위한 여성운동 신여성이 있었다. 한국은 1910년 이후 신여성 일제강점기 사회적 주체 신여성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회적 주체로서의 신여성을 주제로 순수미술로 조망한 것은 처음이다. 신여성 현실과 이상을 추구하는 가운데 간극이 있다. 일본 동경미술대학과 미국 플로리다 대학 소장품도 일부 왔다. 근대를 현대로 그리을 통해서 가져오기 신여성은 신인류다

<신여성> 표지화 안석주 개벽사 1924.6 I <신여성> 표지화: 김규택 개벽사 1926.4

조선시대까지는 열녀전이나 풍속화, 미인도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여성 재현 전통이 부재했다. 여성이미지가 공적인 영역에서 시각적 볼거리로 재현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딱지본 소설의 표지화나 '대한매일신보'나 '매일신보'의 상품 광고 등에서 부터였다.

1920-30년대는 신문과 잡지의 출판이 활발해지고 영화 공연과 박람회 등 시각적 대중문화가 형성되면서 여성이미지는 매혹의 서구 문물과 상품, 소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기호로서의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 조선미술전람회나 각종 사진공모전 등을 통해 여성은 이상적 ‘미인’, ‘향토적 정서’ ‘조선 전통’ ‘근대적 취미’ ‘현모양처’ 등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수없이 만들어졌다. '신여성', '별건곤' 같은 대중잡지들의 표지화, 만화, 컷 등을 통해 재현된 여성이미지들은 실제로서의 여성이기보다는 굴절된 식민공간 속에서 따라가야 할 서구문명에 대한 선망과 좌절, 욕망을 투영하는 담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김주경 I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97.5*130cm1929

나라마다 신여성(교육과 자립)에 대한 성격이 다르다. 독일의 신여성은 화이트 컬러지만 고등교육은 받지 않았다. 한국은 1890년대부터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고 현모양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딪치는 것들이 많아 신여성을 정의하기 어렵다.

대중소비사회가 되면서 모던 걸 등장하게 된다. 이율배반 남성 서사를 벗어나 여성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은 시각예술로 거의 처음 있는 전시다. 사운드+유행가+이미지+내러티브가 복합적 요소가 가미된 전시회다. 젋은 작가 신여성을 재해석한 현대작품도 선보인다.

젊은 세대나 기성세대나 신여성을 비하하다

1930년대 바이올린을 든 신여성을 보고 나이든 어른은 저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결혼을 하겠나라고 비아냥거리고 . 젊은 남자는 참 예쁘고 통통하죠.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라도 한번 해볼 텐데 라고 성희롱을 하다 –나혜석의 삽화

[1부] 여성잡지가 나오기 시작하다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여성 잡지들

당시 여성은 거의 문맹이었다. 사회활동 전문적 사무직 여성(일본여성) 실험성(여성) 아르 누보 영향을 받은 지금 봐도 조금 야한 분위기의 잡지도 선보이고 있다

<사람성 원리>를 강조하다. 여성의 취향과 교양이 문제가 된다. 여성의 자립이 중요해지다.

교양강박 1931년경에도 키스 걸이라는요즘의 키스방 같은 것도 있었다. 찻집 아가씨 같은 대중가요도 등장하다. 여우 목도리 유행하다. 해수욕장 풍경도 나오다. 노동과 여가를 즐기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음악감상도 중요하게 되다 패선과 화장 서구화가 근대화였다 대가족이 아니고 핵가족이 신가정이다.

구성에 대한 신여성의 도발성을 엿불 수 있는 여성지 표지다 여기에서 보듯이 전체결론 매매혼 강제결혼  등을 타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주로 남성 예술가이나 대중 매체, 영화 등이 재현한 ‘신여성’ 이미지를 통해 신여성에 대한 개념을 고찰한다.

중경(1928-1999) I '애인 모자 쓴 여인' 170*30cm 1937

태소 주경(泰素 朱慶, 1905-1979)은 한국 초기 추상화를 처음 시도한 작가들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고희동, 이종우로부터 지도를 받고, 이후 일본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와 조각, 판화를 배웠다.

위 작품은 안정감 있는 구도로 앉아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비교적 사실주의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갈색조의 전체적으로 어둡고 절제된 색조는 작품에 차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멋스러운 모자를 쓰고 서구식 복장을 한 여성의 시선은 정면을 보는 대신 화면 왼편을 향하고 있으며, 세련되게 화장한 듯한 그의 얼굴은 담담한 표정을 띠고 있다. ‘애인’이라는 작품 제목은 자유연애가 점차 보편화되어가던 당시의 변화해가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별건곤'(표지화: 안석주), 개벽사, 1933.9., 오영식 소장 자유 연애룰 부추기는 여성월간지

‘별건곤’은 별세계, 별천지라는 뜻으로, 개벽사에서 발행한 대중적 시사종합잡지이다. 처음에는 교양잡지로 시작했다가 1930년대로 넘어가면서 남성독자를 대상으로 오락성이 대폭 강화되었다.

표지의 여성은 짧은 단발머리에 육감적인 몸매, 서양식 치마에 빨간 하이힐을 신고 양산을 든 모던걸이다. 이 여성은 밝고 활기찬 표정으로 앞서가고 남성은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포장된 물건을 들고 땀을 흘리며 뒤따라 간다. 여기에는 부유한 모던걸과 그에 종속된 듯한 남성이 대조를 이루면서, 여성상위시대의 예고편이다

그러나 이 풍자는 비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화적인 발랄함과 결합하여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잡지의 주요 내용을 차지하는 ‘에로와 그로’ 풍의 소문과 기담, 도시적 가십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별건곤'이 발행되던 1930년대에는 다양한 모던걸의 이미지가 가벼운 취미오락의 기호로서 대중적 잡지의 표지에 등장하여 남성독자에게 소비되기 시작했다.[미술관자료]

김인승 I '봄의 가락' 캔버스에 유채 167*207cm 1942

교육과 계몽, 현모양처와 기생, 연애와 결혼, 성과 사랑, 도시화와 서구화, 소비문화와 대중문화 등의 키워드로 점철된 신여성 이미지는 식민 체제하 근대성과 전근대성이 이념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각축을 벌이는 틈새에서 당시 신여성을 향한 긴장과 갈등 양상이 어떠했는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나혜석 자화상

정월 나혜석(晶月 羅惠錫, 1896-1948)은 근대기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이며, 다양한 활동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주장한 근대 여성운동가이다. 1913년 동경의 여자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유학하고, 귀국 후 1921년 여성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28년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혜석의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다소 어두운 색조와 분위기로 표현함으로써 근대로의 변혁기를 살아가는 1920년대 한 명의 지식인이자 예술인으로서의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우울을 보여준다. 한국 근대 여성화가의 첫 자화상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이 작품 속에서 나혜석은 스스로를 직업 화가로 그리기보다는 보라색 양장을 하고 짧은 머리를 한 근대적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

나혜석(1896-1948 미술)

[보충자료]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동경의 여자미술학교(현 女子美術大學) 서양화부에 입학했다. 1914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1918년에는 동경 여자유학생 친목회 잡지 <여자계>에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다가 체포되어 5개월 가량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1921년에는 만삭의 몸으로 서울에서 국내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개최했다. 같은 해 만주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제 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한 이래 해마다 입선하여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23년 모성 신화를 부정하는 글,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했다. 1927년 남편과 함께 구미로 여행을 떠나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1929년 미국을 거쳐 귀국 후, 수원에서 구미사생화 전람회를 열다.

1930년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남편과 이혼, 1933년 종로에 여자미술학사를 열었다. 대중잡지 <삼천리>에 조선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이혼 고백장'(1934), 정조 관념을 해체할 것을 주장하는 '신생활에 들면서'(1935)를 발표하면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박래현 <예술해부괘도(1) 전신골격>(1940) 등 국내 미공개작 최초 공개,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 1920-1976)은 평남 남포에서 태어나 전북 군산에서 성장했고, 서울의 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2년간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1940년 동경의 여자미술학교(당시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여자미술학교의 한국인 여성 유학생 대다수가 자수과를 선택했던 반면, 박래현의 경우 사범과 일본화부로 진로를 정했는데 이는 한국인 유학생으로서는 남녀 통틀어 최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46년에는 수묵채색화가 김기창과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1940년대 말부터는 남편과 함께 면 분할에 의한 입체주의적 화면구성의 실험적 수묵채색화를 모색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먹과 동양화 물감만을 고집하는데 그치지 않고, 천, 실, 털실, 엽전 같은 물질을 작품에 도입하여 태피스트리를 제작하거나, 동양화가로서는 드물게 동판화, 석판화, 실크스크린, 메조틴트 등 다양한 판화를 제작하기도 하는 등 장르와 매체를 넘어서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남편과 함께 12차례나 부부전夫婦展을 열었던 점은 과거와 달라진 여성 예술가의 위상을 시사해준다.

<예술가의 연애와 결혼>

이쾌대 I '여인의 초상' 캔버스의 유채 45.5*38cm 194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창조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능력과 잠재력을 보여주는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기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은 상당히 희귀한 편이다,

1930년대 여가수들 왼쪽으로부터 홍청자, 왕숙랑, 박향림, 이난영, 이준희, 김능자, 장세정, 이화자 출처: 이난영 전집 유정천리 2016

국내에서 남성 작가들에게 사사한 정찬영, 이현옥 등과 기생 작가 김능해, 원금홍, 동경여자미술학교(현 女子美術大學) 출신인 나혜석, 이갑향, 나상윤, 박래현, 천경자 등과 전명자, 박을복 등 자수과 유학생들의 자수 작품들을 선보인다.

180명-200명 이를 통해 근대기 여성 미술교육과 직업의 영역에서 ‘창작자’로서의 자각과 정체성을 추구한 초창기 여성 작가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결혼 정조와 문답 독본이 등장하다 딱지본 포켓용 신여성의 비참한 자살사건이 등장하기도 한다.

김은호 I '미인승무도'(1922)' 비단의 채색 272*115cm 1922 플로리다 대학 사무엘 하른 미술관 소장. 이 작품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다.

서화미술회에서 안중식(安中植, 1861-191), 조석진(趙錫晉, 1853-1920)의 가르침을 받아 그림에 입문한 이당 김은호(以堂 金股鎬, 1892-1979)는 곧 어진화사로 발탁되는 영광을 얻었고 이후 빠른 시일안에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했다. 1924년부터 고려미술원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25년부터 3년간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으로 일본화를 공부하고, 1927년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 작가 및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 교수 등을 역임했다.

화면의 중간 즈음에서 비스듬히 내려 뻗친 오동나무 아래에 두 명의 여인이 승무를 추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미인승무도>는 1922년 제1회 조선미전에서 4등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수하미인도(樹下美人圖) 형식의 전통적인 구도를 일부 차용하고, 오동나무에 괴석, 소철, 대나무가 있는 정원과 난간으로 둘러진 공간으로 화면을 효과적으로 구획하여 장식성을 보여주었다. 최고급 비단에 장황기술도 최상급이어서 김은호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조선미전 도록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는데 2004년에 처음 그 소재지가 확인되었고, 이번 전시에서 국내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다.

[2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근대의 여성 미술가들” 일본유학파가 생기다.

가정도감 1924-1942

딱지본 소설과 출판형태가 유사한 일종의 가정백과사전이다. 주로 한글과 셈법, 각종편지 관혼상제 등의 의례절차를 비롯하여 각종 행정서식과  점치는 법, 응급처치, 지리 정보 등 실용적 목적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정찬영 I '공작'(1937),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60년’展 이후 45년만의 공개

정찬영(鄭燦英, 1906-1988)은 1906년 평양 태생으로 1925년 경성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그림에 입문하였다. 1926년 당시 채색화가로 저명했던 이영일로부터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이후 작품세계의 가닥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승의 화풍을 기반으로 한 세밀한 채색화조화를 통해 제8회(1929), 제9회(1930) 조선미전에 입선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며, 제10회 서화협전(1930), 제10회 조선미전(1931)에서 각각 특선, 제14회 조선미전에서 창덕궁상을 수상하며 기성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30년 도봉섭과의 결혼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지속하며 조선미전에 출품하였던 점은 전근대의 여성과는 차별되는 신여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딸을 낳고 나서 얻게 된 외아들의 돌잔치를 하고 난 후 기쁜 마음을 화사하게 깃을 편 공작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제16회 조선미전의 입선작이다. 창경원에서 활짝 날개를 편 공작을 한 달 이상 사생하여 이 병풍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노년기까지 거실에 늘 이 작품을 두었을 정도로 평생 사랑했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이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지만, 남편을 내조하면서 네 자녀를 잘 길러 정찬영은 ‘신가정’의 모범적인 주부이자 여성화가로 근대 문화예술계의 인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남편이 북으로 납치되어 네 자녀를 키워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작품 활동을 재개하지 못했다.

<여자미술학교(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의 자수화>

박을복 I '표정' 천에 자수 92*110cm 1964 공예작품

동경의 여자미술학교(현 女子美術大學) 출신인 나혜석, 이갑향, 나상윤, 박래현, 천경자 등과 전명자, 박을복 등 자수과 유학생들의 자수 작품도 선보인다.

일본 여성미술대학에서 공부한 작가들 소개

천경자 I '언젠가 그날' 종이에 채색 195*135cm 1969

여성신교육 확대

[신여성과 기생] 당시 일반 여성들 거리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기생 중 일부가 예술가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중 그림을 그리는 여성도 있었다. 관기제도 이후에 기생은 근대의 유흥문화 속 성적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 영화 대중가요 춤 그림 등에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기도 했다. 당시에 거리에 나갈 수 없는 여성을 대신해서 기생들(total artist)이 그림을 그리다

기생 김영월 연도미상

관기제도의 소멸 이후 근대기를 살아갔던 기생은 근대의 유흥문화 속에서 시각적 볼거리의 대상이자 성상품으로 전락하기도 했고, 패션, 영화, 대중가요, 춤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면서 대중문화를 주도하기도 하는 등 복합적 양상을 띠었다.

1920년대 여학생 집단이 새로운 여성군으로 등장한 이후, 뾰족구두에 통치마 차림을 한 기생이 여학생과 구별되지 않는 것 자체가 사회적 논란이 되는가 하면 철폐되어야 할 구습으로 배타시 되었다. 교육받지 못한 여성, 그리고 기생으로 대표되는 구여성과 교육받은 신여성 간의 이분법적 대립은 원시와 문명, 전통과 근대 간의 대립, 갈등을 담고 있었다. 미술전람회 속에 기생이 재현될 때는 기생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조선 춤, 또는 지켜야 할 조선 전통과 동일시되는 한에서였다.

정찬영 I 한국산 유독식물을 위한 밑그림 1933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작품 설명하다

[전시를 말하다(MMCA토크)] <1월 날짜 미정> 제목: 근대 경험의 만화경, 신여성-식민지 조선 신여성의 삶과 이미지 강연자: 김수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 <2월 날짜 미정> 제목: <언니는 풍각쟁이야: 재즈로 듣는 신여성> 강연자: 장유정(단국대학교 교수) - 재즈 공연 형식으로 진행(연주자: 주화준 트리오) <3월 날짜 미정[1]> 제목: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근대기 여성 미술가들> 강연자: 권행가(덕성여자대학교 강사) <3월 날짜 미정[2]> 제목: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 : 신여성장, 여배우와 모던걸> 강연자: 김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날짜 미정> 제목: 학예연구실장이 들려주는 전시이야기 강연자: 강승완(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오지호 I '처의 상' 72*52.7cm 1936

[3부]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 : 5인의 대표적 신여성(다섯 명의 신여성 나혜석(1896-1948, 미술), 김명순(1896-1951, 문학), 주세죽(1901-1953, 여성운동가),

남성 중심의 미술, 문학, 사회주의 운동, 대중문화 등 분야에서 선각자 역할을 한 다섯 명의 신여성

최승희 사진 '야외무용'과 '보살춤' 1942 광주시립미술관

최승희(1911-1969, 무용), 이난영(1916-1965, 대중음악) 집중 조명하다.

당시 찬사보다는 지탄의 대상이었던 이들 신여성들은 사회 통념을 전복하는 파격과 도전으로 근대성을 젠더의 관점에서 다시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에 현대 여성 작가(김소영, 김세진, 권혜원, 김도희/조영주)들은 5인의 신여성을 오마주한 신작을 통해 당시 신여성들이 추구했던 이념과 실천의 의미를 현재의 관점에서 뒤돌아본다.

최승희(1911-1969, 무용)

1926년 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경성공회당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 1892-1962)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동경으로 건너갔다. 곧 주연급 무용수로 발탁되고 후진을 지도할 만큼 급성장했다. 1929년 귀국하여 경성에 자신의 이름을 딴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전국을 순회하면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쳤다.

1931년 문학가 안막(안필승, 1910-?)과 결혼하고 딸을 출산했다. 1933년 이시이 문하로 재입문한 후 이듬해 동경에서 신작무용발표회를 열었다. 전통춤을 현대화하는 데 성공하고, 1936년부터 유럽과 미국, 중남미에까지 진출하여 ‘동양의 무희’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중일전쟁 중 일제의 강요로 중국에서 일본군 위문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1946년 남편과 함께 월북하고, 평양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공훈배우(1952), 인민배우(1955)란 칭호를 받았다.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최승희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김명순(1896-1951, 문학)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11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근대학문을 접했다. 1917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청춘'의 현상문예에 단편 '의심(疑心)의 소녀'가 3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1918년에 떠나 음악을 전공한 두 번째 일본 유학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문필활동을 시작했고, '창조'와 '폐허이후'에 동인으로 참여한 바 있다. 1920년대 중반 나혜석, 김원주(1896-1971) 등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해 1세대 여성 문인으로 함께 거론돼 왔다. 그러나 논설과 평론 등을 통해 여성 문제에 직접적인 목소리를 냈던 두 여성과 달리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등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데 매진했다.

1922년 '개벽'에 게재한 번역시 '대아(大鴉)', '헤렌에게', 번역소설 '상봉(相逢)'을 통해 애드거 앨런 포우의 작품을 조선에 처음 소개하였고, 1923년 발표한 희곡 '어붓자식'은 여성이 발표한 최초의 희곡 작품이다. 1925년 발간한 '생명의 과실(果實)' 또한 여성 최초의 창작집이며, 시, 소설, 수필(감상)을 모두 싣고 있다.

두 번째 창작집 <애인의 선물>(1929-30)을 출간하는 등 20여 년 동안 소설, 시, 수필, 희곡, 평론 등 170여 편을 창작했다. 서녀(庶女)라는 이력과 연애 등 개인사에 대한 세간의 소문과 그로 인한 편견이 김명순의 문학에 대한 진지한 평가를 가로막아왔으나 선구적인 근대 여성작가이자 번역가로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1930년대 말 일본으로 떠나 1950년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세죽(1901-1953, 여성운동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의 영생여학교에 다니다가 경성의 중등학교로 진학했다. 이 시절 3·1 운동에 참가하여 구금되면서 학업을 중단하였고, 1921년 상해로 유학을 떠나 피아노를 전공했다. 이후 상해를 무대로 항일과 조선공산당 조직 활동을 하던 중 박헌영(1900-1955)을 만나 결혼했고, 1925년 허정숙(1902-1991) 등과 함께 조선여성해방동맹을 설립한 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김활란 등과 함께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를 결성하였다. 1928년 일제 경찰을 피해 만삭의 몸으로 박헌영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하고, 모스크바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2년 당 재건을 위해 옮겨간 상해에서 박헌영은 다시 체포되었고, 1934년 박헌영의 사상적 동지였던 김단야(1899-1938)와 재혼했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다. 단발과 자유연애를 옹호했고 무산자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Socialist Feminist/SF) 주세죽이 기획하던 새로운 사회, 그리고 과학소설(Science Fiction/SF)의 미래 사회. 이 중첩(superposition)의 세계가 SFdrome이다. 카자흐스탄에는 코즈모드롬(Cosmodrome)이라는 우주 발사기지가 있다.1937년 김단야가 일본 간첩 혐의로 소련 경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주세죽 역시 체포됐다. 스탈린 정권에 의해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1938년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됐다

이난영(1916-1965, 대중음악)을 조명한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16세 무렵 태양극단에 입단하고, 태평레코드사에서 취입한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하였다. 오케레코드사에서 <향수>(1933), <고적>과 <불사조>(1934)를 연달아 내면서부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1935년 조선일보가 실시한 향토노래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문일석의 노랫말에 작곡가 손목인(1913-1999)이 곡을 붙여 만든 <목포의 눈물>을 취입해 가요계의 샛별로 등극했다.

1936년 오케레코드사의 가수이자 작곡가인 김해송(1911-?)과 결혼하여 신민요와 재즈 등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데 힘썼다. 1939년 무렵 박향림, 장세정 등과 함께 ‘저고리 시스터즈’ 일원으로서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레뷰쇼를 선보였다. 해방 후 남편과 함께 KPK악극단을 이끌며 새로운 유행을 이끌었으나, 한국전쟁 때 김해송이 납북되어 홀로 악극단을 운영했다. 1953년 두 딸(김숙자, 김애자)과 조카(이민자)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를 기획, 결성하여 미국으로 진출시키기도 했다.

[보충자료] 가수 이난영이 1939년 녹음한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 꿈>에는 다양한 경로들이 존재한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강제 이주 후 몇 세대를 거쳐 만들어진 미국 흑인들의 낯선 음악, 사교댄스의 라이브 무대 음악으로 받아들여진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블루스, 근대 도시에서 생겨난 상실의 기억들을 담고 있다.

오디오-비디오 설치 작업 <모르는 노래>는 이처럼 상이한 경로들을 포함한 이난영의 목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회전하는 무대 위에서 계속하여 다른 얼굴을 끌어들이며 갱신된다. 실제 이난영의 무대 의상과 함께 재현되는 이미지는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며 새로운 존재가 되고자 했던 이난영의 ‘꿈’ 을 불러낸다.

[4부] 독립여성 신여성 여성학교

독립여성 신교육을 받는 신여성

전시 개막식 당일인 2017. 12. 20.(수) 오후 4시에는 공연 〈신여성 노래하다〉(장유정 기획)가 있을 예정이다.

변월룡 I '최승희 초상' 캔버스에 유채 118*84cm 1954 개인소장

또 전시 기간 중 〈MMCA 토크〉를 통해 사회학, 미술사, 영화사, 대중가요사의 관점에서 신여성을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신여성의 취미>

나팔형 축음기 1910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소장

이와 함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감독, 1934)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변사 상영(김태용 감독 기획)을 2018. 1. 6.(토) 오후 7시에 서울관 멀티프로젝트홀에서 진행한다.

김기창 I '정청' 314*159cm 193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알베르토 자코메티(A. Giacometti, 1901-1966)]전, 예술의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2017년 12월 21일부터 2018년 4월 15일까지
전시포스터

"내가 보여주 려는 건 바로 그것, 그 가벼움이다" -자코메티. 그가 만든 조각품을 보면 하도 가벼워 하늘을 날 것 같다. 그렇게 가볍다. 존재의 가벼움을 조각하다.

<삐쩍 마른 인체 조각으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구현> “조각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킨 작가” -문소영(중앙선데이)기자 http://news.joins.com/article/22230043

전시장 입구

그는 자신의 삶에서 쓸데없고 부질없는 걸 매일매일 깎아내는 인간이다 그에게 '그린다'라는 건 '지우기'에 해당한다 즉 '빼기'다. 최고로 앙상한 몸만 남았다.

자코메티 작업실

[자코메티의 독창성은 빼기의 조각] “내가 작업하는 이유는 이처럼 고통스럽고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자코메티


[덜어내고 비워낸 형태에서 본질을 만나다] 일반적인 조각의 특징은 붙여나가면서 형태를 만들어 이미지를 달성하는데 반해 자코메티는 완성된 형태에서 시작하여 하나하나 떼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작품을 완성시키는 남다른 작가만의 방식은 세상과 사물에 대한 작가만의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자코메티적 완성은 그 끝이 어딘지 모른 채 많은 작품들이 허망하게 작가의 손에서 깨뜨려졌다. 그가 추구한 예술세계는 그만큼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도구로서 존재했다고 여겨진다.인간존재의 허약함과 덧없음, 소외에 기인한 내면의 고독에 초점을 맞춰 형상을 응축시킴으로써 부스러질 것 같은 현대인의 불안과 고뇌를 직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다] 사물과 자연을 예술가의 감정으로 해석해 표현한 인상주의, 그리고 그 다음세대인 자코메티는 보이지 않는 가치, 즉 본질을 움직이는 실체로서 근원적인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탐색자로서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펼쳐냈다.


자코메티 그는 피카소도 능가하는 예술가 중의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다. 그의 조각을 실제로 보면 너무 가늘고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아슬아슬해 금방 부러질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 역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그의 작업실을 정말 초라하고 그의 삶을 보면 아주 평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인간 존재의 위기 혹은 실존의 위태함과 인간의 고독한 실존 그처럼 제대로 읽어내고 탐구하고 그것을 예술로 표현한 작가는 드물다 그의 차별성과 위대함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이번에 '걸어가는 사람'이 서울에 왔는데 이 작품을 보면 그의 작품세계가 한 눈에 알게 된다 아니 깨닫게 된다. 일종의 득음처럼 '득미'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런데 사진으로 찍어서 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래 브레송이 찍은 자코메티 모습이 얼마나 볼품이 없는가. 그러나 그의 예술을 또한 얼마나 탁월한가.

무엇보다 이 전시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작가가 죽기 바로 직전 작업한 가장 마지막 작품인 로타르 흉상과 작가의 상징적인 작품 “걸어가는 사람”의 유일무이한 원본 석고상이 아시아 최초로 공개된다는 점이다.

“걸어가는 사람”은 사람 실물 크기의 작품으로 자코메티 청동 작품 중에서 가장 매력 있고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경매 중 가장 비싼 금액을 기록하였다.

자코메티와 그의 아내 아네트 1951

자코메티와 그의 아내 아네트 그의 모델이기도 했다. Photo: Ernest Scheidegger

작업실에  앉아있는 아네트 캔버스에 유화 92*73cm 1960년경


그의 모델 중에는 일본인도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무대를 자코메티가 맡다 2명의 천재가 만들어낸 이런 멋진 협업이 있었다니 경이롭다.


두 작가는 덧없음의 부조리라는 미학이라는 점에서 완벽하게 통한다.  고도를 기다리면서

1951년 자코메티 절친인 피카소와 의절 그럴 만하다. 자코메티가 피카소보다 더 위대한 천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자코메티'의 예술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런 상처만을 찾아내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춰준다.

그는 이토록 절박하게 무엇을 이겨내려 했는가? - 장 주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이자 조각가로서 모더니즘 정신의 정수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또한 그가 남긴 작품들은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 불후의 명작으로 매우 유명하다.


자코메티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주인공 중 한 사람으로서 전후 현대미술과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예술가 중의 예술가”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초기 시절부터, 말기의 작품 120여 점 이상을 조명하는데, 그의 고향 스위스 스탐파에 있는 그의 아버지 작업실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보낸 마지막 기간(1960-1965) 동안의 그의 예술적 성취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자코메티, 쓰러질 것 같은 인간의 허약함이 주는 낯선(뜻밖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다(인간의 허약함 내 조각과 유사하다 -자코메티) 그것은 또한 작가의 치열한 존재에 대한 물음과 삶의 부조리에 대한 고민 등을 담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로타르 좌상은 작가가 평생을 통해 깨달은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이 녹여져 있으며 마치 작가 자신을 빚어 놓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마치 죽기 전 해탈한 구도자의 면모가 보여지는 듯하다.


인간존재의 의미와 (연민), 그리고 비장한 존엄성까지 한눈에 보여주는 “로타르 좌상”과 “걸어가는 사람” 이 두 작품 모두 작가의 위대한 통찰이 느껴지는 20세기 최고의 걸작이다.


이번 전시는 조각 작품 외에 자코메티 재단의 훌륭한 컬렉션의 일부로서 인물 드로잉, 페인팅, 사진, 원고 및 기타 보관 자료와 함께 보이며 널리 알려진 자코메티 작품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돕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다양하게 전시되는 이번 주요 작품들은 작가의 결정적인 시기에 모색한 여러 가지 탐색을 보여준다. 또한 자코메티가 1926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무르며 작업했던 약 7평 정도의 작업실 공간을 재구성하여 자코메티의 작업세계와 그의 삶의 철학 또한 엿볼 수 있다.


이 전시 특징 중 또 하나는 작가의 전성기, 즉 작가의 후기 활동이 더욱 강조된다. 자코메티의 명성은 1920년 이후로 형성되었고, 1960년대에 스스로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확립하는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시기를 보냈다.​
이 시기의 주요 모델인 아내 아네트와 동생 디에고와 함께, 새로운 인물들은 그를 위하여 모델이 되어주었고, 그 모델들의 얼굴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에 대한 물음과 답을 이야기한다.

또한 예술로서 세상과 사회의 정신을 깨울 수 있다는 작가의 치열한 고뇌를 공감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로댕 이후 가장 위대한 조각가다. 덧없는 삶의 부조리함과 그 본질을 묻는 조각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찍을 때 작가의 혼이 카메라 안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다 쓰러질 것 같은 인간의 허약함의 가진 뜻밖의 아름다움이 표현하다.


서양예술의 원천은 분열증에서 온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이분법 때문이다 자코메티와 같은 조각가는 이런 모순과 갈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미술 감상의 최고 비법은 작품을 내 살과 섞는 것이다 그의 조각이 내 온몸으로 들어온다 자코메티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간존재의 절박성으로 살을 파내듯 피를 흘리듯 그렇게 조각작업을 하고 있다. 자코메티는 당시의 최고의 예술가 피카소를 내치다 그만큼 자신의 예수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20세기 부조리의 철학의 시대 등장한 자코메티는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와 도둑일기로 유명한 장 주네 그리고 부조리 연극의 거장인 아일랜의 사무엘 베케트가 한 몸이다.


*자코메티, 실존의 고독을 웅시하는 깊은 통찰력(Insight), 20세기를 작품으로 이렇게 잘 요약해서 만든 작품도 드물다 현대인의 부조리하고 노골적인 고독한 실존을 그대로 드러내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적 불안을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응시하다.

1950년대 자코메티 작업실

국립현대미술관 마리 관장의 기고문 중 일부


[1] 실존주의는 행동 행위 예술철학 담론 등 삶의 방식을 통해 실현되고, 1950년대 대서양 양안의 문화·반문화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비트세대는 불온적 태도와 언어를 구사하며 당시 서구사회를 지배했던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에 반발하는 움직임의 첫 시작을 알렸다.

전시장 홍보판

[2] 뒤이어 1960년대의 히피 운동은 이전 세대의 비관주의에 반발하며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비트와 히피 두 세대 모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사용했다.

[3] 프랑스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자코메티는 실존주의가 정의하고, 인도하고, 표현하고자 시도했던 인간의 상태를 실존주의 그 자체보다 잘 표현한 예술가였다.

[4] 그의 조각품은 인류의 기념할 만하거나 영웅적인 면모에 주목하거나, 인생의 행복이나 기쁨 풍요로움을 표현하지 않는다. 실상은 그 정반대이다. 그의 작품은 때로는 인간의 신체와 얼굴과 영혼의 퇴화가 새로운 형태의 그로테스크와 동일시될 수 있는 부조리(absurdity)한 분위기 속에서 비관주의로 점철된 인간상을 보여준다.

[5] 자코메티를 둘러싼 1950년대에는 재즈의 대중화나 프랑스 문학 및 영화 분야의 누벨바그운동, 사뮈엘 베케트와 잭 케루악의 명문, 그리고 ‘부조리’를 문화적 수준까지 끌어올린 예술가들의 등장에 비견할 새로운 형태의 미술이 출현했다.



[6] 활동 초기 자코메티는 초현실주의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인주의의 길에 접어든다. 그는 기존의 정통 신조와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당대 세대를 사로잡았던 비관주의 부조리 비극성 공허함 무의미함 그로테스크함과 같은 감성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

[7] 1950년대에는 자코메티나 사르트르, 카뮈와 대조적으로 인간의 노력 및 의지에 따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인간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이들도 등장한다. 기 드보르를 필두로 한 문자주의인터내셔널, 코브라 그룹, 콩스탕 뉘베니, 국제상황주의, 독립그룹의 구성원들이 이에 해당한다.

[8] 195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는 창조성과 반항성, 인류에 대한 믿음, 진보와 성장에 대한 자신감, 미(美)와 열정의 추구를 강조하는 메시지가 전파되기 시작했고, 이런 문화와 사르트르, 자코메티, 실존주의자들 간의 대조적 면모는 1960년대에 들어 보다 극명히 부각된다. 그러나 자코메티의 작품은 흐름의 변화와 무관하게 여전히 현대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황용엽_인간을 그리다(To Paint Man)]전, 교보아트스페이스에서 2017.12.01-2018.01.31

황용엽 작품

황용엽 작가는 1931년 평양에서 태어나 식민시대 한국전쟁 실향민으로 분단시대를 살다 그래서 상실감 고통 희망의 부재 속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수행과 같은 그림을 통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진실한 인간적 삶을 열망하며 존재의 보다 근원적인 긍정으로 나아가다.

수준 높은 선묘와 공허와 절망을 극복해내는 고차원적인 색채로 시대의 운명을 정화시켜나가면서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일궈나가다. 때로 절규하는 듯의 그의 몸짓은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지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함께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애조 띤 색조로 잘 변형시키고 있다. 그의 회화는 인간내면의 심리적 생태계를 내밀하게 표출시키면서 한국화단의 한 축을 이뤄나가고 있다.

[마리 로랑생_색채의 황홀] 예술의 전당(한가람미술관)에서 2017년 12월 9일-2018년 3월11일까지

[바람을 그리다 : 신윤복∙정선] 2017년 11월 24일-2018년 05월 24일 DDP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

조선의 풍경과 풍속을 담은 작품들과 이를 모티브로 한 미디어아트 작품들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바람을 그리다 : 신윤복∙정선]展이 11월 24일부터 6개월 동안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연다.

우리시대 혜원의 미인도의 수준에 도달한 미인도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이런 미인도가 출현했다는 것은 당시사회가 그래도 개방적이고 삶의 여백과 미적 향연의 대한 감각이 살아있었다는 증명해 보인다 특히 남녀의 자유분방하고 재기발랄한 연애풍속화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생의 목적은 죽을 때까지 연애하는 것이다 한자 <戀>자를 풀어보면 "마음에 간직한 애틋한 그리움(의 언어)를 실과 실로 엮는 것"이라는 뜻인가 연애는 인간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과도 하는 것이다 꽃과 새와 학문과 예술과 그밖에 모든 것과 하는 것이다 물건과도 연애를 할 수 있다 그것을 물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신윤복과 정선은 각각 한양과 금강산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즐겨 그렸다. 그래서 한양의 내밀한 속내를 담아낸 화가는 신윤복을 뛰어넘는 사람이 없고, 금강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화폭에 구현한 화가는 정선이 독보적이다. 한양과 금강산은 조선을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한양 사람들의 가슴속에 부는 바람을 그린 신윤복과 우리 강산에 부는 바람을 그린 정선은 그 대상은 달랐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그리고자 했던 것은 바로 조선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혜원의 웰빙은 5가지로 이루어진다 酒-舞-愛-技-遊]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는 이번 전시를 위해 조선 진경의 두 거장인 신윤복과 정선의 주요 작품들을 공개한다. 특히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 원작 전체를 공개하여 <단오풍정>, <월하정인>, <쌍검대무> 등 신윤복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한 번에 만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해악전신첩>>은 정선이 금강산의 명승지들을 원숙한 솜씨로 사생한 최절정기의 작품으로 학술적,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지정이 예고되어 있다.

헤원의 화첩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보물이다
특히 이번 전시의 주목할 부분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원하는 2017년도 차세대 콘텐츠 개발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다양한 미디어아트가 함께 전시된다. 이는 신윤복과 정선의 주요 작품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신윤복의 경우, <<혜원전신첩>>의 원작들 속에 화려한 색채와 감각적인 연출,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드라마적 상상력과 각색을 더한 애니메이션 영상을 선보인다. 특히 선비와 기생의 사랑을 주제로 한 로맨틱 스토리는 오늘날 커플들의 데이트와 다를 바 없이 멋과 낭만, 그리고 감성이 녹아있는 장면들로 연출하였다. 시간과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불러일으켜, 신윤복의 풍속화를 한층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것이 없다면 조선시대 미술사는 거반 반은 잘라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정선의 발자취를 따라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의 명승지를 소재로 그린 대표작 3점을 선정하여 표현 기법은 물론, 그 안에 담긴 화가의 관점과 창작 원리까지 보여주고자 하였다. 장대한 금강산의 스케일을 기하학적으로 묘사해낸3D 모션 그래픽에서부터 불정대의 까마득한 폭포수를 아름답게 승화시킨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까지, 압도적인 스케일(가로21m, 높이 5m)의 디지털 콘텐츠에 실감나는 사운드 효과를 더해 금강산의 장엄한 풍광을 입체적으로 체험하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혜원의 화첩의 그림들의 확장으로 미디어아트를 통해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래서 관객에게 생생한 현장감과 실재감을 선물한다 관객은 자기나름의 갖가지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볼 수 있다

또한 신윤복과 정선이 그려낸 한양과 금강산을 하나의 여정으로 묶어 마치 원테이크 뮤직비디오를 찍듯 그림 사이를 넘나드는 디지털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등, 다양한 미디어와 설치 작품들이 원작과 어우러져 전시의 가치와 흥미를 배가시킨다.

과거의 그림을 현재화할 수도 있고 미래화할 수도 있다

미디어아트와 설치 미술의 결합으로 시각적 메시지를 즐기고 공유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혜원전신첩>> 속 인물들의 다양하고 화려한 의상을 한국을 대표하는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작가가 재현했고, 이이남 작가는 정선의 <금강내산>과 <단발령망금강>을 모티프로 제작한 개성 있고 시사적인 미디어아트 작품을 출품했다.

또한 정선의 <총석정>을 설치작품을 통해 재해석하고, 프로젝션 맵핑을 활용하여 화가의 예술세계가 성숙해가는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혜원전신첩>>의 다양한 풍속 장면들을 SNS 포스팅의 형태로 재치 있고 흥미롭게 해석하여 그래픽월 형태로 재구성한 섹션도 새로운 볼거리와 즐거움을 제공한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소중한 고전회화가 있기 때문에 지지고 볶고 뭐든지 응용할 수 있다.

우리가 첨단의 디지털 문명을 살고 있다지만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만큼 문명의 수준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혜원은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사방팔방으로 막힌 세상에서 숨을 터주는 촉진자의 역할이 아닌가

300여 년 전 가장 한국적인 예술을 만들었던 두 거장, 신윤복과 정선. 이번 전시는 그들이 남긴 우리의 모습과 멋과 혼을 오늘날의 기술로 되살아 나게 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고전이라는 시대적 이질감을 없애고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한 콘텐츠의 형태로다가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체험의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

무한대로 새롭게 응용하고 즐기고 상상하고 가지고 즐길 수 있다

간송의 이 작품을 일본상인에게서 사올 때 엄청난 대가를 치루기는 했지만 만약에 이것을 놓쳤다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그 아슬아슬함은 지금 생각해도 머리칼이 치솟는다 어찌되었든 이 혜원의 화첩은 우리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본 전시 기획은 이른바 ‘한국적 정체성’와 ‘보편적 탁월성’ 사이의 접점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문화예술의 흐름을 살펴보면, 더 이상 고유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첨단 기술과 미디어 플랫폼을 기반으로 전 세계의 모든 담론과 형식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융합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한류와 K-POP으로 대변되는 한국 특유의 문화코드를 담은 콘텐츠가 글로벌 스케일로 존재감과 인기를 넓혀가는 현상 또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한국적 문화 DNA가 보편적 탁월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신윤복과 정선의 그림이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까지 명성을 떨쳤듯, 디지털 매체로 재창조된 이번 전시의 작품들도 오늘날 우리 문화의 지향과 목표를 모색하고, 설정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획의도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의 작품, 전투신명 넘치는 천년의 옷 쌍검대무] 한국의 옷은 바람의 옷이고 겹침의 옷이고 신기의 옷이다 인체의 숨겨진 모든 에너지를 최대로 끌어올려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하는 옷이다

조선 문화 황금기에 활동했던 신윤복과 정선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두 거장은 조선의 ‘진경’, 즉 참된 모습을 서로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 해석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통해 보여주었다. 신윤복은 한양이라는 도시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사랑과 욕망을, 정선은 금강산을 통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표하였다

굽은 선은 물결로 살아나고 곧은 선은 산맥으로 일어난다

이는 이번 전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의도와도 맥이 닿아 있다. 신윤복과 정선이 그들의 사상과 화풍을 감각적인 색채와 섬세한 구도, 그리고 창조적인 기법으로 화폭에 구현해냈다면, 오늘날에는 갖가지 정교한 디지털 기술이 도구와 통로가 되어 그 역할을 수행한다. 더욱이 한국은 IT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바람을 그리다 : 신윤복∙정선>전, 조선 진경의 두 거장 신윤복과 정선, 미디어아트와 함께 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11월 24일부터 2018년 5월 24일까지( 6개월) 겸재의 불정대(외금강)

자연 중 최고의 미인도는 금강산이겠죠 겸재는 금강산의 속속들이 숨겨진 아름다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네요 한국의 역시 산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수강산임을 증명해 보이다

8세기 조선시대의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러브 스토리를 서사 형식으로 그려낸 르네상스 시기가 아닌가 싶다. 주역에 근거한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우주만물의 원시적 생명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기운생동으로서의 에로티시즘(에로스 혹은 에너지)을 수준 높은 예술과 해학으로 풀어낸 시대가 아닌가 싶다

금강도 정선의 회화와 사진으로 찍은 풍경과 차이를 보면 왜 회화가 존재해야 하는지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이이남 작품 소개]

<한글을 디지털 시대에 전혀 무리가 없이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과학적인 문자이듯 정선의 그림은 비디어 아트 적이 요소가 풍부한 작품으로 이를 디지털로 번역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최고급 뉴미디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이이남 작가, 그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 고전회화야 말로 첨단의 전위적 속성을 담지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 같다

이이남 작가 한국고전화를 디지털과 뉴미디어로 번역해서 옛 화폭에 생생한 호흡을 불어넣는 실험에서 선구자다

선의 진경산수 속에 담긴 화가의 시각과 감흥 그리고 이것을 표현한 기법까지 장대한 스케일의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러한 기술을 진경풍속과 진경산수의 두 거장이 남겨 놓은 걸작들에 접목시켜 창조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진 진경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에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신윤복의 그림에 담긴 감각적인 필치와 색채, 치밀한 화면구성을 낭만적이고 영화적인 스토리를 지닌 대화면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하고, 정선의 독창적인 시각과 혁신적인 필법을 실험적이고 모던한 미디어아트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궁극적인 이유이다.

[너를 위한 선물(Paper, PRESENT)展_종이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만나는 선물 같은 시간] 대림미술관에서 2017.12.07-2018.05.27 까지

대림미술관 파사드

대림미술관은 2017년 12월 7일부터 2018년 5월 27일까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섬세한 감각과 아날로그적 소재인 종이가 감성적인 매체로 확장되는 과정을 소개하는 전시 <Paper, Present: 너를 위한 선물>을 연다.

대림미술관 매장

이번 전시에서는 순수 예술뿐 아니라 가구, 조명, 제품, 공간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10팀의 국내외 아티스트와 각자의 영역에서 종이 본래의 속성에 집중하여 재료 자체의 아름다움이 담긴 작품을 선보인다.

대림미술관 1층 매장

전시는 자연의 경이로운 장면이나, 평범한 일상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순간,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법한 설렘과 추억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일곱 개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각 섹션의 시작점에는 ‘오밤 이정현’의 서정적인 글귀를 녹여 내린 시(너의 하늘로 내려간 깜깜한 너의 밤에 옅은 빛이라도 보태어 주고 싶어서)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짐 앤 주(Zim&Zou)’의 <거리에서 만난 동화>

[참여작가] [1] 예술과 상업 디자인의 경계를 허물어 온 듀오 디자이너 ‘스튜디오 욥(Studio Job)’, [2]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실험적이고 재치 있는 작업을 선보이는 ‘토라푸 아키텍츠(TORAFU ARCHITECTS)’, [3] 제품 디자인의 거장 ‘토드 분체(Tord Boontje)’, [4] 종이 접기 방식으로 감각적이고 실용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줄 와이벨(Jule Waibel)’ 등의 작업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상생효과를 낸다.

대림미술관 매장

<멈춰진 시간을 깨우는 바람>

하얀 종이는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종이는 단순한 기록을 위한 매체에서부터 아티스트들의 아이디어 노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의 시작점이 되어 왔다.

이번 전시는 아티스트의 손끝에서 완성한 작품들에 감성을 입혀 예술로 만나는 특별한 시간을 선물한다. 물과 빛과 바람 등과 같은 자연 요소와 기억, 설렘과 같은 감정의 요소를 종이에 결합하다. 자연적 현상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아날로그적 정서를 자극하는 종이라는 매체의 색다른 매력을 경험할 수 있다.

리처드 스위니((Richard Sweeney 영국작가)의 <고요한 새벽의 별빛>

순백색의 종이만을 사용해서 리드미컬한 역동성에서 피카소 못지 않네요 종이로 그린 춤추는 조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네요 파도처럼 바람처럼 일렁이는 모습이 멋지다

리처드 스위니 영국작가의 <고요한 새벽의 별빛>

작가소개 리차드 스위니(Richard Sweeney, 1984년 영국 출생) 바틀리 미술학교(Batley School of Art)를 졸업하고,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Manchester Metropolitan University)에서 3D 디자인을 전공하였다. 종이와 조각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발전시켜 온 그는 순백색의 종이만을 사용하여,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 낸 정교한 주름과 섬세한 곡선을 지닌 오브제와 공간을 넘나드는 대형 설치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2016년 미국 밀워키 미술관(Milwaukee Art Museum)의 ‘페이퍼 플레이(Paper Play)’ 전시를 비롯해 다수의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으며, 영국 왕립 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와 미시건 주립 대학교(Michigan State University) 등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종이 조형 강의와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리처드 스위니 영국작가의 <고요한 새벽의 별빛>

불과 함께 인류 문명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종이가 이렇게 우아하고 환상적인 현대미술의 매체가 되다. 공간에서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그 자체의 물성만을 활용하여 오브제부터 건축적 구조까지 자유자재로 형태를 만들어내는 종이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제목은 '고요한 새벽의 불빛'이다.

타이티 퍼슨 작가의 <섬세한 손길이 만든 햇살>

타히티 퍼슨(Tahiti Pehrson, 1972년 미국 캘리포니아 출생)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San Francisco Art Institute)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회화의 평면적 표현에 흥미를 잃고 학교를 떠난 이후 종이를 활용한 중대형 설치작업들을 펼쳐오고 있다.

그는 세밀한 디자인을 그린 뒤 오려내는 페이퍼 커팅(paper-cutting)을 통해 종이에 반복적이고 기하학적인 패턴을 만들어낸다. 스텐실 기법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의 작업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부피와 구조, 빛과 그림자가 변화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다. 작가는 SNS(페이스북) 등에서 의뢰를 받아 종이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익숙한 풍경에 숨은 놀라움>

캐비닛, 샹들리에, 책상에서부터 꽃병, 벽걸이 장식품과 같은 작은 오브제까지 종이로 만들었다고는 믿기 힘든 작품들을 함께 소개하는 공간이다. 이 작가들은 iF 디자인 어워드(iF Design Award)와 굿 디자인 어워드(Good Design Award) 등에서 수상하였으며, 에르메스(Hermès), 나이키(Nike), 이솝(Aesop), 헤르만 밀러(Herman Miller) 등 다수의 브랜드들과 지속적인 협업을 이어오고 있다

토라푸 아키텍츠 작가들의 <익숙한 풍경에 숨은 놀라움>

[작가소개]토라푸 아키텍츠(TORAFU ARCHITECTS, 2004년 설립)는 스즈노 코이치(Koichi Suzuno)와 카무로 신야(Shinya Kamuro)가 설립한 건축설계 사무소로, 제품디자인,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물의 가치는 호기심과 즐거움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신념 하에 사물에 대한 통상적인 사고방식을 뒤집는 재치 있는 디자인을 선보여 왔다..

아틀리에 오이 작가의 <멈춰진 시간을 깨우는 바람>

대림미술관에 눈부시게 하연 눈꽃이 피었다 꽃의 물성보다는 꽃을 감성적 매체로 접근하다. 작은 흔들림에도 순백의 종이를 투과해 빛과 그림자이 교차하는 효과를 내며 멈춰진 시간을 일깨우는 바람을 일으키는 것 같다

[작가 소개] 아틀리에 오이(Atelier Oï, 1991년 설립)는 오렐 아에비(Aurel Aebi), 아르망 루이(Armand Louis), 파트릭 레이몽(Patrick Reymond)으로 구성된 디자이너 트리오다, 스위스 라 뇌브빌르(La Neuveville)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 작가는 건축, 디자인, 선박 제조 등 각자의 전공을 살려, 건축, 인테리어, 가구, 제품 등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 걸쳐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혁신적인 작업을 선보여 왔다. 재료의 성질과 공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종이라는 일상적 소재에 색과 소리, 향기, 빛, 움직임 등 다양한 요소들을 더해 공감각적인 디자인을 창조한다

계단에도 전시품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형형색색 종이꽃의 사태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모네의 연꽃 늪과 숲 연상되네요 이런 종이로 피운 꽃밭 속 산책도 멋지겠죠/공간에서는 빛과 색, 움직임 등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여 동서양의 감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디자인 스튜디오 ‘아틀리에 오이(atelier oï)’의 작품이 멈춰있는 시간을 깨우며 잔잔하게 흔들리는 바람을 느끼게 한다.

‘짐앤주(Zim&Zou)’의 <거리에서 만난 동화>

짐앤주(Zim&Zou) 프랑스 낭시에서 활동) 작가의 <거리에서 만난 동화>은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색종이 붙인 파이에 콜레의 성격을 보인다. 색채의 조화, 천진한 어린아이의 정서가 담긴 손길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우아하고 고상하고 품격이 높다. 동화와 같은 장면을 선물한다.

짐앤주(Zim&Zou) 코너

조금씩 다른 모든 오브제가 가지는 모양과 색채 그리고 실루엣은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조합되고 하모니를 이루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조형으로 잉태된다.

[작가소개] 짐앤주(Zim&Zou, 2009년 설립)는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루시 토마스(Lucie Thomas)와 티보 짐머만(Thibault Zimmermann)으로 구성된 아티스트 듀오로, 프랑스 낭시(Nancy)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종이의 섬세한 질감과 다채로운 색상을 결합한 동화적인 종이 작품을 선보이며, 각종 윈도우 디스플레이, 광고 세트, 지면 홍보물 등을 위한 작업을 진행해 왔다.

에르메스(Hermès),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타임(Time),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 등과도 협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최신작으로는 2017년 두바이(Dubai) 에르메스 매장의 쇼윈도에서 선보인 ‘Forest Folks’가 있다.

‘짐앤주(Zim&Zou)’의 <거리에서 만난 동화>

삶의 최고 지성과 감각 그리고 절정을 이루는 결국 색이다 동양에서는 색은 섹스를 말하기도 하는데 다시 말해 진정한 에로스의 경지를 뜻한다. 에로스란 가장 원생적인 생명 에너지 덩어리가 한 곳에 모여있는 상태를 말한다.한 나라의 문명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색이다 색을 다루는 미학이 최고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과 색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번에 빛의 존재감을 인상 깊게 투영하다

완다 바르셀로나 작가의 <꽃잎에 스며든 설렘>

완다 바르셀로나 작가의 <꽃잎에 스며든 설렘>

그들의 부드러운 미소가 주변 풍광과 잘 어울린다 "부에노스 디아스 세뇨르 세뇨리타" 라고 인사를 하니 반갑다는 듯 밝은 웃음을 보내준다./[5번째] 공간과 디올(Dior), 꼼데가르송(COMME des GARÇONS), 꼴레뜨(Colette) 등 유명 브랜드의 쇼윈도 및 쇼룸을 환상의 공간으로 채워온 디자인 스튜디오

작가 그룹 '
완다 바르셀로나(Wanda Barcelona)'사진

이번에 참석한 10개 팀 중 하나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온 팀 아티스트 <완다 바르셀로나>

[작가소개] 완다 바르셀로나(Wanda Barcelona, 2007년 설립)는 건축가 인티 벨레즈 보테로(Inti Velez Botero)와 디자이너 다니엘 만치니(Daniel Mancini)가 설립하고, 3년 뒤 아티스트 이리스 호발(Iris Joval)이 크리에이티브 팀으로 합류한 디자인 스튜디오로,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꼼데가르송(Comme des Garçons), 콜레트(Colette) 등과도 지속적인 협업을 이어오고 있다.

주로 종이로 쇼윈도 디스플레이, 쇼룸 및 각종 이벤트를 위한 설치작품을 디자인 및 제작하며, 일시적이면서도 시공간을 초월한 작업을 선보인다. 최근 파리 장식미술 박물관(Les Arts Décoratifs)에서 개최된 디올 창립70주년 기념 전시 ‘크리스찬 디올, 꿈의 디자이너(Christian Dior, couturier du rêve)’에서 실내 디자인을 맡아 4,500송이의 장미와 1,400송이의 은방울꽃, 700그루의 등나무 등을 전부 종이로 만들어 구성한 종이 정원으로 크게 주목 받았다.

마음 스튜디오(Maum Studio) 작가의 <그곳에 물든 기억>

여기는 4층 전시실 마치 튤립처럼 보이는 종이 갈대인가요 일종의 산책로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남성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터득할 수 없는 어떤 신의 경지가 있는 것 같다. 남자들은 그렇게 보면 확실히 여성보다 저급한 동물이다. 모든 여성의 내면에 이런 신비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남자들은 읽어내기 힘들다 그런 아름다움을 발현할 수 있도록 남자들이 전혀 도와주지 않는 것 같다 순간 순간 놀라는 네버엔드 스토리를 연출하다

마음 스튜디오(Maum Studio) 작가의 <그곳에 물든 기억>

공간은, 종이로 만들어낼 수 있는 궁극의 화려함 속에 동화적 세계를 펼쳐낸다. 마지막으로 젊은 감각으로 주목 받고 있는 국내 디자인 그룹 ‘마음 스튜디오(Maum Studio)’가 만든 핑크 빛 종이 갈대가 가득한 산책길은 관객에게 공감각적인 체험을 제공한다,누군가에겐 새로운 기억을, 누군가에겐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작가소개] 마음 스튜디오(Maum Studio, 2008년 설립)는 이달우 디자이너를 비롯해 총 6명의 팀원으로 구성된 국내의 디자인 스튜디오로, 공간, 그래픽, 제품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용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고 있다

CGV, 모나미(monami), 네이버(NAVER), 제일모직 등 기업들과의 협업 및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Seoul Design Festival)과 런던 디자인 페어(London Design Fair) 등 다수의 프로젝트에도 참여하며 국내외에서 유쾌하고 따뜻한 감성의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리처드 해밀턴 연속적 강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제1전시실)에서 2017.11.03일-2018 01 21까지 런던 테이트 미술관의 제임스 링우드(James Lingwood) 큐레이터와 한국 양옥금 큐레이터 공동기획 *구글에서 유목민 치면 왜 안 나오지 전에는 첫 페이지에 나왔는데 누가 [오마이뉴스관련기사] http://omn.kr/onbk
국립현대미술관(과천) 가을이 무르익다 I

보수적인 영국 미술계의 대변혁을 가져온 장본인이자 영국현대미술의 개척자인 거장 리처드 해밀턴(1922-2011), 우리는 이번 그의 회고전을 통해 그가 개념미술가라는 것과 현대사회의 비판적 관찰자임을 알 수 있다.

기자간담회

"나는 서울에 와서 놀랐다.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런 멋진 전시를 열어줘서 고맙다. 해밀턴 사후 1인 회고전으로 이렇게 획기적인 큰 전시는 처음이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 해밀턴 전을 런던 제임스 링우드 큐레이터와 양옥금 큐레이터와 공동으로 기획된 이 전시를 봤다면 너무나 좋아했을 것 같다" –해밀턴 부인 리타도

50-60년대 런던

그의 유명세에도 우리는 한 번에 그의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이번에 그의 작품을 시대별이 아니라 주제별로 볼 수 있어 큰 행운이다. 50년대부터 2천 년 대까지 무려 50-60년의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물론 전시를 시대별로 한 것은 아니다.

20세기 영국과 미국이 가장 산업화된 사회다. 다시 말해 대량광고 속 진공청소기. 세탁기, 토스터기, 냉장고 등 수많은 종류의 물건을 사용하는 대량소비사회다. 그런 사회를 대변하는 미술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니 팝아트가 영미에서 나왔다는 건 너무 당연하다.

리처즈 해밀턴은 기존의 미술과는 전혀 다른 20세기의 기계문명사회에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미술을 확장하는 시조새였다 그는 무엇보다 급변하는 현대의 모습과 현대인의 일상을 담고자 했다. 그러니 그는 이전에는 없었던 비디오, TV, 멀피풀한 영상이미지, 신문과 광고 등이 또한 하이전자재품  TV 뉴미디어냉장고 세탁기 그리고 광고 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히 들어갔다

리처드 해밀턴 I '토스터기' 2008년 작

어찌되었든 20세기에 팝아트는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이다. 그 이유는 뭔가? 이 미술이 바로 미술의 민주화에 최대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이제 미술이 과거의 귀족적이고 특권층의 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낫기 때문이다. 낙서를 비롯하여 키치 풍의 아트도 당당히 예술의 자리에 올라갔다. 대중의 일상적 삶의 바로 예술의 주제로 등장한 것이다.

리처드 해밀턴 I '토스터기' 2008년 작

영국인에게 우리나라의 전기밥솥 같은 일상용품인 토스터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린 화가는 서양미술사에서 해밀턴이 처음일 것이다

그의 작품 토스터기도 아름답지만 프라이팬 그림은 더 아름답다 일상품이 이렇게 놀라운 예술품이 되다니 마치 기적의 사건을 보는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하찮은 전자제품이나 요리도구가 각별하게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당신의 사람.

국립현대미술관(과천) 가을이 무르익다 II

이번 전시를 기획한 런던 테이트 미술관의 제임스 링우드 큐레이터는 말한다. 해링턴은 현대시의 창시자인 보들레르의 저서 <현대생활의 화가>라는 책을 읽게 거기서 보여준 모더니즘에 큰 영감을 받고 팝아트 미술운동을 시작했단다.

리처드 해밀턴은 얼리 어댑터처럼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실험가였다. 그가 팝아트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20세기 후반기는 너무나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아이콘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리처드 해밀턴 I '작가의 자화상' 시리즈

그의 자화상은 그 이전 시대의 자화상과는 전혀 다르다. 마치 자신을 파괴하는 것 같은 모습 정신분열적인 현대인의 정서를 담겨 있다 그건 역시 과거보다 훨씬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다 솔직하고 진솔한 모습이다 이런 자화상이 보기는 볼상스럽지만 사람들의 심정을 더 실감나게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사람들 마음에 가 낳을 수도 있고 공감과 감동을 줄 수도 있다

리처드 해밀턴 I '작가의 자화상' 시리즈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 그린 또 다른 자화상이 있다

꽃 그림

꽃 그림은 예쁘죠 하지만 해골과 똥(?)이 들어간 꽃 그림이다 키치적인 요소가 보인다 그렇게 사물을 미화시키는 것을 거부한 것 인가보다. 똥은 가장 좋은 거름(?)인가

해밀턴 작품

사들이 다 그의 작품에 호감을 가지고 좋게 본 것이 분명 아니다 처음에서 외면당했으나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해밀턴 전문가인 영국 테이트 제임스 링우드 큐레이터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미지 패턴으로 묵어서 전시하는 방법을 사용했단다. 이렇게 그의 작품 경향은 이질적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시각적 매트릭스의 세계를 즉 시대의 변화가 잡지 TV 인터넷 특정적 상황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수시로 모든 것이 변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면서 제임스 링우드 큐레이터는 "50년대는 페인팅이 미술을 대변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렀다고 페인팅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번에 가장 대표작인 토스터기 작품이 있는데 이것을 한국인에게 전기밥솥같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쓰는 기구다 이것을 미술작품으로 옮길 때 페인팅으로는 힘들다 그래서 새로운 형식의 미술 즉 컬러 사진에 레트라 필름을 복원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해밀턴 I '일곱 개의 방(욕실)' 시대착오적인 세트 seven rooms, a set of anachronisms

이런 작품을 '장소참조적 회화'라고 한다. 여기서는 심연의 연출(mise en abyme)을 노리는 방식이다 공간보다는 다차원을 더 중시한다. 또 여기 공간은 비현실적인 것의 시각화라기보다는 가상현실을 포함하는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작가는 이 점에 대해서 "모든 실내 공간은 시대착오적인 것의 집합이자 일종의 미술관이며 어떤 거주 공간이 모은 장식적 양식의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잔여물을 포함한다. 식상하든 아름답든 정교하든 추하든 각각의 실내 공간은 그 주인에 관한 많은 이야기와 인간에 관한 어떤 것을 전한다"라고 말했다.

해밀턴 부인인 리타 도나(Rita Donagh)와 기자와의 대화모습

리처드 해밀턴의 가장 큰 공로는 바로 미술을 공동재도 만든 것이다. 소비력을 가진 일반 시민들은 문화향유권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고 결국 그는 문화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점은 그가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공로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미지와 기술과의 관계를 탐구하고 각 이미지가 가진 본질에 탐색하는 과정에서 누적되어 쌓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예술은 동등하며 가치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나긴 선의 한쪽 끝에는 엘비스가 반대쪽에는 피카소가 있었다. TV는 예컨대 뉴욕 추상표현주위보다 덜할 것도 더할 것도 없이 합당한 영향물이다" - 리처드 해밀턴. 뉴미디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해밀턴 전시도록

리처드 해밀턴은 친국에서 보낸 편지에서 "팝아트는 대중적이고 일시적이고 소모적이며 비용이 낮고 대량생산되고 젊으며 재치있고 섹시하고 교묘하며 매력적인 대표적 사업이다" 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장 순수한 예술로서 팝아트를 시도하라" "내가 하는 일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림제목 '그녀(She)'

미녀도를 팝아트로 그린 것이다. 너무나 매혹적이고 환상적이고 독창적이다. 미녀를 다리미, 믹서기, 냉장고, 진공청소기 등 일상품에 빗대어 그렸다 그럼에도 이전의 비너스보다 훨씬 아름답고 현대적이다.

활기찬 67년 런던(Swingeing London 67) (f), 1968-69, Acrylic paint, screenprint, paper, aluminium and metalised acetate on canvas, 67 x 85 cm, Tate Purchased 1969

그의 작품은 아주 흔한 꽃 그림에서 마약복용으로 유명가지가 체포되는 사건 그리고 북아이랜드 독립투쟁사 등 극단적 정치적 이슈까지 다양하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다는 소리다. 이번에 8개의 섹션으로 나눠 전시된다. 그의 예술을 한두 가지로 규정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예술세계가 크게 곡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활기찬 67년 런던(Swingeing London 67)

이번 해밀턴 전시 작품 중 가장 대표작이다 천재적인 대중 예술가인 롤링 스톤즈 락 그룹이 마약을 했다고 해서 경찰에 체포되는 모습인데 이런 것이 과연 20세기 현대에서 시대정신에 맞는 것이지 작가는 묻고 있다 이 작품은 한 섹션에 다양한 장르(회화, 드로잉, 판화, 사진, 필름) 등으로 사방팔방 전시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는 마약을 국가에서 간섭하지 않는다.

리처드 해밀턴 I '시민 습작' 1983

영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작품일 수도 있는데 강력한 카리스마를 드러내는 수작이다 여기의 죄수는 북아일랜드 반란군(영국의 입장에서 보면)인데 마치 예수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를 통해서 현대인의 일상만 아니라 동시대의 역사도 같이 그렸다 북아일랜드 반란군이 예술처럼 보이는 것은 첫째 감옥에서 주는 죄수복을 거부했고 절대 몸을 씻지 않는 시위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다르기 힘든 주제지만 팝아트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천) 가을이 무르익다 III

미국의 팝아트와 영국의 팝아트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팝아트는 역시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미국으로 건너가 확장되었고 결국 미국에서 활짝 피어난 예술이 되었다 바로 미국 사회의 배경 때문이다 미국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되고 소비 천국이었기 때문이다.

인상파에 마네가 있듯 팝아트에는 해밀턴이 있다 두 사람은 보들레르와 깊이 관련이 있다 전자는 절친, 후자는 책을 보고 영감을 받다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1956)

[이진숙평론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현대의 가정은 전기청소기, 오디오 기구, TV 등 각종 가전제품과 포스터, 회사 로고, 영화 광고 등 현대적 시각매체로 채워져 있다. 창밖에는 최초의 유성영화인 ‘재즈 가수’의 극장 간판이 보인다. 램프에는 포드 자동차의 로고가, 벽에는 명화가 아닌 만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멋진 집이지만 읽을거리라고는 소파 위에 있는 신문이 전부이며, 먹을거리는 테이블 위의 인스턴트 햄뿐이다. 벽에 걸린 엄격한 19세기 비평가 존 러스킨의 초상화는 이런 상황이 못마땅한 듯 보인다. 이런 현대적인 집에 사는 남자는 당연히 근육질의 몸짱이고, 여자 또한 당연히 섹시하다.

울퉁불퉁 근육남이 들고 있는 것은 ‘POP’이라고 쓰인 사탕. 팝아트란 용어는 로런스 알로웨이라는 평론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POP’이라는 단어가 이미 여기 등장해 이 작품을 팝아트 작품의 효시로 여기게 한다. 이 작품에 대해 평론가 할 포스터는 “새롭게 등장할 팝아트 도상학의 목록을 보여 준 작품”이라고 평한다.

[샤를 보들레르와 리처드 해밀턴] 보들레르의 모던 댄디와 모던한 일상을 그린 해밀턴

서구 현대시의 창시자 보들레르

보들레르는 시인이기 이전에 미술평론가였다 그가 극찬한 외젠 들라크루아(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는 프랑스 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보들레르는 미술사에서 사라진 화가 콩스탕탱 귀(Constantin Guys 1802~1892)를 많이 언급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하여간 거기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활양식(lifestyle)을 가진 모던 댄디를 언급한다. 요즘 말로 하면 스타일리스트와 같은 것이다. 즉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스타일을 가지는 개성이 있는 삶이다.

화가 콩스탕탱 귀애 대한 보들레르의 평론 제목이 <현대적 삶의 화가>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핵심이 되는 것은 ‘현대 화가의 삶’이 아니라, ‘현대적 삶의 화가’라는 점이다. 이것은 보들레르가 말하는 현대성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말이다. 이에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모던 댄디와 관련이 있다. 이 사람의 특징은 기존사회를 부정한다. 하지만 매우 창조적이면서도 저항적인 어떤 면에서는 냉소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도시의 빈민굴 창녀촌 등도 어두운 이면을 묘사할 정도로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자아를 가진 인물로 부각시킨다. 그러니까 이 모던 댄디는 몽상가이면서 시대문명의 해석가로 볼 수도 있다. 한데 그는 기존의 선의 미학을 버리고 <악의 미학>으로 도시를 보고 사회를 보는 사람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르게 보고 현대성을 갖춘 시선으로 본다. 영국의 팝아트의 창시자인 리처드 해밀턴은 현대성과 도시인의 새로운 면모를 조망한 이런 보들레르의 미술평론을 읽으면서 크게 자극을 받고 새로운 현대미술의 장(Pop Art)을 여는데 많은 영감을 받았단다

[요나스 메카스 : 찰나, 힐긋, 돌아보자 전] 영화를 전시하다 2017년 11월 8일-2018년 3월 4일까지 2017년 11월 22일(수)부터 서울관 영화관 6전시실에서 상영 / 전시명 “찰나, 힐긋, 돌아보다(Again, Again It All Comes Back To Me in Brief Glimpses)”는 그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영화 형식과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
-2017년 11월 22일(수)부터 서울관 MFV 영화관에서 상영


[1]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거장 ‘요나스 메카스’(b.1922~)의 아시아 최초 전시 -백남준, 앤디 워홀, 오노 요코 등 플럭서스에 영향을 준 독립영화의 대부_14편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인생과 예술 세계를 조망 - 2017년 11월 8일(수)부터 2018년 3월 4일(일)까지 서울관 [2] 작가의 회고전과 연관된 48편의 장·단편 영화 함께 소개

전시에는 베니스영화제 다큐멘터리부문 수상작 <영창>(1963), <앤디 워홀의 삶에 관한 기록>(1990), <조지 마키우나스의 삶에 관한 기록>(1992),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2000), <국가의 탄생>(2007) 그리고 <덤플링 파티>(2012)등 그의 주요작품 14점이 소개된다.

기자간담회

요나스 메카스는 통상 초당 24프레임을 갖는 영화 장면을 3개 또는 4개의 프레임으로 축소 촬영하여 마치 인상파의 그림처럼 이미지들이 시간의 비약을 드러내며 움직이는 듯한 ‘싱글 프레임’ 기법으로 일상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 같은 작가의 ‘필름 다이어리’는 지나간 시간들을 살아있는 이미지로 재창조한다.

이번 전시는 찰나에 사라지는 이미지를 추상적인 영화 형식으로 발전시킨 거장 요나스 메카스의 인생을 돌아보는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들여다본다. 그의 필름 및 비디오설치 작품들은 서펜타인 갤러리, 퐁피두센터, MoMA, 카셀 도큐멘타,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 에르미타주 미술관,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 소개된 바 있다./아래 요나스 메카스 젊은 시절 그리고 그의 동생 그리고 영상자료 속 요나스 메카스 감독

'365일 프로젝트' 1월부터 12월 TV로 요나스 메카스 작품 다시 보기 감독이 2007년부터 그의 홈페이지(www.jonasmekas.com)에 매일 올리는 비디오 다이어리를 재구성한 작품으로 여기서도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지금도 작가 자신의 홈페이지 계속 진행중이다

요나스 메카스의 이미지에 대한 탐구는 16mm 필름 매체의 예술적 실험을 거쳐 디지털 매체의 특성을 활용한 미디어 설치 작업으로까지 확장된다. 이번 전시에서 12개의 모니터를 통해 상영되는 <365일 프로젝트>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퍼포먼스로 작가 자신의 홈페이지(www.jonasmekas.com)에 올린 매일 한편의 비디오 다이어리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보충설명] 2007, 12채널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38시간 요나스 메카스는 16mm 볼렉스 카메라가 포착하는 순간 이미지들의 순수한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을 찾고 발전시켰던 것처럼 영화적 매체의 변화를 읽고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온라인 디지털 매체의 특성을 이용해 그의 작업방식을 확장하고 있다. 유투브가 시작된 2006년에 요나스 메카스는 그의 비디오다이어리를 인터넷을 통해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7년에 매일 한편의 단편 비디오 다이어리를 1년 동안 온라인을 통해 발표하는 프로젝트를 감행한다. 12개의 브라운관 모니터는 2007년에 매일 제작된 비디오 다이어리 단편들을 달별로 묶어 재생하고 있다. 12개월의 비디오다이어리는 노장 요나스 메카스의 일상의 순간들에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동반해 움직이는 디지털 카메라가 포착하는 순간의 기록들이다.

요나스 메카스 저서

요나스 메카스 저서/요나스 메카스의 저서 무비 저널 등 많은 저서를 남기다

'플럭서스 가족'

1960년대 서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전성기였다 그것이 나중에 68혁명으로 터지기는 했지만 비틀즈가 있었고 플럭서스운동이 있었다 미국의 전선기였다 히피와 노벨상수상자 밥딜런 그리고 팝아트 앤디워홀 그리고 그 모두를 능가하는 백남준의 퍼포먼스 서양에서 가장 잘 노는 사람들 중에 백남준은 백미였다

백남준의 얼굴은 요즘 유행어로 '동안'이라기보다 해맑은 얼굴이다. 눈에 확 뜨인다. 그는 구미에서 가장 잘 논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잘 노는 사람이었다 예술가에게 노는 것은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창작을 위해 에너지를 최대로 축적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 영화감독 요나스 메카스는 여기에 끼여서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으로 같이 놀다 백남준보다 10살위지만.

'플럭서스 가족'

아마도 오노요코과 백남준의 유일한 라이벌이다 요나스 감 독이 그들세대보다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그런 아방가르드한 분위기에 그의 독창적 예술영화를 만드는 자양분이 된 것을 분명하다 요나스도마치우나스가 궁여지책으로 부동산업을 잠시 할 때 같이 아파트 분양을 받아 소호에 살았던 것이다 소호는 그냥 거리가 아니고 당시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여산 문화촌이다 지금은 고급 부티크 거리가 되었지만 말이다

또한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인 조지 마키우나스와 당시 아티스트들의 모습이 담긴 40개의 스틸컷으로 구성된 <플럭서스 가족>도 선보인다. 1960~1970년대 아방가르드를 이끌었던 오노 요코, 앤디 워홀은 요나스 메카스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작가와 플럭서스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요나스 감 독이 그들세대보다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그런 아방가르드한 분위기에 그의 독창적 예술영화를 만드는 자양분이 된 것을 분명하다 요나스도마치우나스가 궁여지책으로 부동산업을 잠시 할 때 같이 아파트 분양을 받아 소호에 살았던 것이다 소호는 그냥 거리가 아니고 당시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여산 문화촌이다 지금은 고급 부티크 거리가 되었지만 말이다

이번 전시에 작가 요나스 메카스가 오지 못해 그의 아들(가운데) 대신 참석하다

행복한 삶의 기록에서 삭제부분 2012, 싱글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68분

요나스 메카스의 작품에 한 번도 포함되지 않았던 이미지들로 196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촬영된 짧은 일기형식의 장면들이다. 작품으로 공개된 적이 없는 이 프레임들을 직접 편집하는 요나스 메카스의 편집실 장면이 비디오로 촬영되어 회상장면들 속의 독백처럼 사이사이 교차된다.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한 행복한 순간들, 계절의 변화와 여행의 순간들이 오귀스트 바카리스의 피아노 즉흥곡과 함께 지나간다. 요나스 메카스의 자전적이며 시적인 일기체의 이미지들은 스스로를 행복한 남자로 여기는 작가의 필모그래피 속 번외 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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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에 모든 기억들이 돌아오다' 2015, 디지털 프린트된 투명유리패널 32장, 상단: 각 56*100cm, 하단: 각 56 x 147cm

'한순간에 모든 기억들이 돌아오다In an Instant It All Came Back to Me'란 작품은 60년간 제작된 요나스 메카스의 작품들로부터 추출된 768개의 다양한 스틸컷들을 32개의 유리패널로 제작한 것이다. 이 스틸이미지(still frames)들엔 꽃과 거리의 개들, 요나스 메카스와 가까웠던 아티스트들, 살바도르 달리, 바바라 루빈(Barbara Rubin), 요시마스 고조(Gozo Yashimasu), 재클린 캐네디(Jackie Kennedy)와 같은 지인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영화장면에 나오는 인물을 이미지화(스틸컷)해서 재배열하다 <앤디워홀에 관한 기록> 앤디워홀 사진이 중간중간 보인다 60년대 당시 앤디워홀이 자신의 작업실에 연 파티는 그야말로 퍼포먼스아트 그 자체였다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 분위기가 어떠했겠는가 그 축제의 열기가 극에 달해 하늘도 뚫은 것 같은 파워풀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제도와 권위와 체제에 얽매이지 않는 바로 그런 아방가르드한 분위기의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요나스 메키스가 평생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영화예술을 추지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전시명인 “찰나, 힐긋, 돌아보다(Again, Again It All Comes Back To Me in Brief Glimpses)”

그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영화 형식과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 요나스 메카스는 통상 초당 24프레임을 갖는 영화 장면을 3개 또는 4개의 프레임으로 축소 촬영하여 마치 인상파의 그림처럼 이미지들이 시간의 비약을 드러내며 움직이는 듯한 ‘싱글 프레임’ 기법으로 일상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 같은 작가의 ‘필름 다이어리’는 지나간 시간들을 살아있는 이미지로 재창조한다.

요나스 메카스

이번 전시는 찰나에 사라지는 이미지를 추상적인 영화 형식으로 발전시킨 거장 요나스 메카스의 인생을 돌아보는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들여다본다. 그의 필름 및 비디오설치 작품들은 서펜타인 갤러리, 퐁피두센터, MoMA, 카셀 도큐멘타,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 에르미타주 미술관,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 소개된 바 있다.

<영창>(1963)

이 비디오는 작가가 20대 초반 경험한 제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담다. 이 작품은 뉴욕의 한 극단 ‘리빙 시어터’가 무대에 올렸던 동명의 연극을 기록한 것으로 1964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부문에서 수상했다.

이 작품을 비롯한 그의 초상화 시리즈, 영화 등은 퐁피두 센터(2012), 서펜타인 갤러리(2012), 베니스 비엔날레(2015), 도큐멘타14(2017) 등 많은 갤러리와 비엔날레에서 소개되었다. 그리고 <행복한 삶의 기록에서 삭제된 부분>은 2012년 작가의 90번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완성된 작품으로 1960년에서 2000년 사이에 제작되었던 그의 이전 필름에서 사용되지 않은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삶의 모든 순간, 가장 하찮은 순간 까지도 그 자체로 의미 있으며 축복할 필요가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젊은 시절 요나스 메카스와 그의 동생

이와 더불어 <한순간에 모든 기억들이 돌아오다>에는 꽃, 일몰, 길 잃은 개와 같은 평범한 이미지들과 작가 그리고 친구인 바바라 루빈을 비롯하여, 고조 요시마스, 살바도르 달리 등의 초상 이미지가 함께 담겨있다. 관람객은 32개의 유리 패널 속 768개의 프레임을 통해 영화감독 요나스 메카스의 인생과 60년에 걸친 긴 작품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요나스 메카스의 저서 무비 저널 등 많은 저서를 남기다 1960년대 서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전성기였다 그것이 나중에 68혁명으로 터지기는 했지만 비틀즈가 있었고 플럭서스운동이 있었다 미국의 전선기였다 히피와 노벨상수상자 밥딜런 그리고 팝아트 앤디워홀 그리고 그 모두를 능가하는 백남준의 퍼포먼스 서양에서 가장 잘 노는 사람들 중에 백남준은 백미였다 아마도 오노요코과 백남준의 유일한 라이벌이다

'어떤 나무가 그 향기를 남기는지 나는 모른다'

위 작품은 존 레논, 조지 마키우나스와 앤디 워홀이 참여한 기억과 노스탤지어, 우정에 관한 시각적 시이다. 메카스에 의하면, 이 영화는 2015년 작가에게 커리지 어워드(Courage Awards)를 수여한 오노 요코를 위한 선물이다.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백남준 전시회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앤디워홀에 관한 기록> 일부사진

영화장면에 나오는 인물을 이미지화(스틸컷)해서 재배열하다 앤디워홀 사진이 중간중간 보인다 60년대 당시 앤디워홀이 자신의 작업실에 연 파티는 그야말로 퍼포먼스아트 그 자체였다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 분위기가 어떠했겠는가 그 축제의 열기가 극에 달해 하늘도 뚫은 것 같은 파워풀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제도와 권위와 체제에 얽매이지 않는 바로 그런 아방가르드한 분위기의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요나스 메키스가 평생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영화예술을 추지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요나스 메카스가 1960~1970년대 독립 영화계에 끼쳤던 영향력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 그룹’의 주요 인물 40명의 초상 이미지가 전시되어 있는 〈국가의 탄생>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앤디 워홀에 관한 기록>에서는 앤디 워홀의 팩토리를 비롯해 1964년 뉴욕에서 결성된 록그룹 벨벳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Lou Reed), 니코(Nico)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앤디 워홀에 관한 기록' 2007,잉크젯 프린트 40장, 각 40.64×50.8cm 영화장면에 나오는 인물을 이미지화(스틸컷)해서 재배열하다 설명자는 김은희 학예연구사. 플럭서스의 창시자 마치우나스가 유난히 눈에 띤다.

앤디 워홀에 관한 기록은 요나스 메카스가 앤디 워홀과 교류한 기간 동안에 촬영한 장면들을 모은 영화의 인물 스틸컷이다. 40개의 사진들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공연 장면, 앤디 워홀 주변의 지인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앤디 워홀에 관한 기록>은 곧 휘트니 미술관에서 있었던 앤디 워홀 전시가 있던 날의 플럭서스 그룹 아티스트들의 덤플링 파티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와 더불어 11월 22일(수)부터 2018년 2월 25일(일)까지 서울관 MFV 영화관에서는 <요나스 메카스 회고전>이 상영된다. 44편의 장, 단편 영화가 소개되며 상영작 중 일부 영화는 16mm 필름으로 감상할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http://www.mmc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자간담회 이번 전시를 기획한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Gaudium Associates) 김대성 대표(우)와 이번 전시를 위해 작품을 대여한 마리 로랑생 뮤지엄 요시자와 히로히사 관장
마리 로랑생展_색채의 황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1, 2전시실에서 2017년 12월 9일(토)부터 2018년 3월 11일(일)까지 21세기 여성시대 20세기 여성작가의 재발견 / 그녀는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3대 여성(퀴리 부인과 마리로랑생 그리고 샤넬)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예술의전당은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KBS와 공동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1883-1956)의 국내 최초 특별전인 <마리 로랑생展-색채의 황홀>을 12월 9일(토)부터 내년 3월 11일(일)까지 개최한다.

마리 로랑생 I '자화상 40*30cm 1905 마리는 어려서 못생겼다고 생각했으나 화가가 되면서 자신감을 얻는다

황홀한 색채로 파리의 여성들을 화폭에 담아냈던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1883-1956)의 작품을 국내 최초로 만나보는 이번 전시는 프랑스 천재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으로 한국인들에게 더 잘 알려진 마리 로랑생을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시대별로 나눠 전시한다 [1] 벨에포크 시대로의 초대: 마리 로랑생 관련 사진 21점 [2] 청춘시대: 유화 14점 [3] 열애시대: 유화 13점 [4] 망명시대: 유화 11점 [5] 열정의 시대: 유화 16점, 석판화 1점, 에칭 1점, 도서 1점, 일러스트 15점 [6] 콜라보레이션: 석판화 1점, 일러스트 27점, 수채화 12점, 도서 4점 [7] 성숙의 시대: 유화 14점, 석판화 1점 [8] 밤의 수첩: 도서 1점, 마리 로랑생, 기욤 아폴리네르 시 필사 체험

마리 로랑생 관련 사진들 가운데 사진은 1928년 만 레이가 찍은 것이다

70여 점의 유화와 석판화, 수채화, 사진과 일러스트 등 총 160여 점의 작품이 한자리에서 관람객을 만나게 된다. 마크 샤갈과 더불어 세계 미술사에서 색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낸 작가로 손꼽히는 마리 로랑생은, 입체파와 야수파가 주류이던 당시 유럽 화단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한 여성 화가다.

특별히 연극배우 박정자가 오디오 가이드를 녹음하여 삶의 지혜가 녹아든 깊이 있는 목소리로 작품을 소개해 준다. 전시 기간 박정자 배우의 ‘마리로랑생 낭독콘서트’ 등 다채로운 부대행사도 마련되어 관람객 참여형 전시로 꾸며질 예정이다.

작가의 생애를 정리한 연표로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녀만의 고유한 관점과 유연하고 부드러운 색상과 지극히 여성적인 가려린 감수성 그리고 매우 단순한 구조의 조형성 시적인 신선함과 몽환의 세계로 인도하는 독창적인 화풍을 일구어내다" -장 크리스토프 플러리

"그녀는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의 덫에 걸린 불쌍한 암사슴" - 시인 장 콕토 마리 로랑생 마리는 평범하지 않는 태성 즉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의 모친은 늘 그늘 속에 살았다. 그녀를 어렵게 키운 모친의 불우한 삶과 모성애는 내면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마리 로랑생 I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인 1913년 작품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전위적인 패션 감각을 갖춘 모습이 많다 여기 모자의 장식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갸름한 윤곽에 길레 찢어진 눈가에는 섬세하고 사냥하면서도 뭔가 매우 슬퍼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그림만이 영원히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년간 그녀는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의상과 무대 디자인은 물론 도서와 잡지 표지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넘쳐났다.

마리 로랑생 I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Elegant Ball or Country Dance)' 112*144cm 1913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악화된 건강과 사회적인 고립으로 인해 마리 로랑생의 작품은 정형화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50년대 그녀의 작품은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으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작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고 죽기 며칠 전까지 “내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더 있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할 정도로 예술 혼을 불태웠던 위대한 예술가였다.

1956년 6월 8일 일요일 밤, 심장 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Pe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된다. 한 손에는 흰 색 장미를 다른 한 손에는 운명적 사랑을 나눴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받은 편지 다발을 든 채였다.

마리 로랑생 I '타이나La femme au chapeau a la plumes ou Tilia ou Tania)' 63*52cm 1924

마리 로랑생은 천재적인 시인 아폴리네르에게 영감을 준 뮤즈이기도 했다. 그녀가 없었으면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밑에 센 강만 흐르고>라는 명시는 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겠지요. 세월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는 자신들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지만 그 사랑으로 잉태된 예술은 영원하다는 주제라고 할 수 있지요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오는 것 /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 세월은 가도 나는 남는다... / 미라보 다리 아래 강물이 흘러가듯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 우리의 희망은 너무나 벅찬데 인생은 너무나 무심하다 / 날과 달이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흐르지만 사랑은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만 흐른다.

작품은 마리의 죽기 2-3년 전 말년의 작품이다 당시 그녀는 은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조용히 색채의 혁명을 일으킨다. 무슨 소리인 하니 전에 거의 사용하지 않던 노란색과 빨간색을 처음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작품명

전시장 내부

[벨에포크 시대에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

프랑스 천재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名詩) '미라보 다리'의 실제 주인공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이자 시인이며 북 일러스트 작가이기도 했다. 세계 미술사에서 마크 샤갈과 더불어 색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낸 작가로 손꼽히는 그녀는 무엇보다 색채에 대한 자신만의 매혹적인 감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홀한 핑크와 옅은 블루, 청록색, 우수가 감도는 회색 등은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보면 누구나 한 번에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마리 로랑생 I '두 젊은 여자친구(Les deux jeunes amies)' 65*54cm1942 이때부터 빨간색 노란색은 사용한다

마리 로랑생은 작품에 대해 지적인 관념을 대입하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녀는 오롯이 본능과 직관에 따라 그림을 그는 화가였다. 아름답고 젊은 여성들과 형체가 모호한 동물들이 풀밭에 들어찬 몽환적인 세계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끊임없이 담아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의 환상과 직관을 갖지 못했다면, 마리 로랑생은 입체파나 다다이즘의 추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조지스 블라크, 앙리 루소 등 야수파와 큐비즘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낸 여성 화가라는 점에서 마리 로랑생이 서양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적지 않다. 마리 로랑생은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바라봤던 서양미술사의 흐름에서 탈피해 여자의 눈으로 응시한 그들의 모습과 여성성을 포착해낸 최초의 여성 화가라고도 할 수 있다.

마리 로랑생 I '시인의 가족(The Poet's family)' 63.5*79cm 1909년

위 초기작은 당시 파리의 많은 예술가와 교류하고 있었다 그 중 피카소도 있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그린 작품 중 하나다. 물론 입체파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흔적이 보인다

이번 전시는 마리 로랑생 뮤지엄 소장품인데 그림을 설명하는 오른쪽 분은 이 뮤지엄의 '히로히사 요시자와' 관장. 그의 부친이 1970년대부터 마리 로랑생 작품을 수집해 지금 현재 600여점(회화부터 일러스트 작품 등을 다 포함해)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피카소의 소개로 세탁선에서 운명의 연인 아폴리네르를 만나다]

마리 로랑생 I '가구가 딸린 렌트하우스 1912년 작품

위 작품은 마리가 아폴리네르의 연애할 때 그림인데 서로 열렬한 사랑은 했지만 자주 의견차가 생겨 다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점을 고민하는 모습이 왼쪽에 보인다. 오른쪽 그와 대조적으로 사이가 좋은 커플인데 그녀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마리 로랑생은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물론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마리아 릴케, 코코 샤넬, 헬레나 루빈스타인, 서머셋 몸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마리 로랑생 I '세 명의 젊은 연인들(Trois jeunes femmes)' 97>3*131cm 1953 말년의 최고작이다

그 시작은 피카소가 가난한 무명작가이던 시절, 몽마르트르의 허름한 건물 바토 라부아르(세탁선)에서부터 시작됐다. 화가 브라크의 소개로 젊은 작가들의 아지트이던 이곳을 드나들던 스무 살의 마리 로랑생은 아름답고 쾌활하며 묘한 매력을 발산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가 됐다.

피카소의 소개로 훗날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는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들은 모두 사생아였고 이는 둘 사이의 묘한 동질감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리와 사랑에 빠진 아폴리네르는 “마리 로랑생의 예술은 우리 시대의 명예이다.”라는 헌사를 바치며 마리의 작품 세계를 알리는 데 노력했다.

[핑크색을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게 사용한 화가]

마리 로랑생 I '춤(La danse)' 147*92.4cm 1919

이번 전시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리 로랑생이 20대 무명작가이던 시절부터 대가로서 73세의 나이로 붓을 놓지 않았던 시절까지, 전 시기의 작품을 작가의 삶의 궤적에 따라 추적해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1부 마리 로랑생과 관련된 사진 19점을 소개하는 도입부를 지나 1부 '청춘시대' 섹션에서는 마리 로랑생이 화가 브라크와 함께 파리의 아카데미 앙베르에 다녔던 시절 그렸던 풍경화와 정물화, 자신의 초상화와 피카소의 초상화 등이 소개된다.

2부 '열애시대'에서는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드러나기 시작한 작품들이 공개된다.

마리 로랑생 I '키스(Le baiser)' 81.2*65.1cm 1927 이 시기에 파란색을 가장 우아하게 표현하다

3부 '망명시대'는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급하게 독일인 남작과 결혼하지만, 신혼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스페인으로 망명 생활을 떠나게 된 시기이다. 이 시기 작가가 느낀 고통과 비애, 외로움 등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이 선보인다.

4부 '열정의시대'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 남편과 이혼한 뒤 마음의 고향이었던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알리게 된 시기의 유화 작품들을 소개한다. 특히 4부에서는 1924년 마리 로랑생이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해 큰 성공을 거둔 발레 '암사슴들'의 에칭 시리즈도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이 키스다. 어딘지 동성애적 경향이 보인다

마리 로랑생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러시사 발레 <암사슴들>을 위해 이 발레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담당하고 있던 세르게이 드 디아길레프의 도움을 주면서 프로그램과 별도로 260부 한정 세트로 일러스트를 출간하다

그녀의 일러스트가 들어간 책

제5부 ‘콜라보레이션’ 섹션에서는 북 일러스트 작가로도 활동했던 작가의 성취를 살펴볼 수 있는 38점의 수채화와 일러스트 작품이 전시된다

마리 로랑생 I '일러스트 작품들'

작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대표 실존주의 작가 앙드레 지드가 쓴 '사랑의 시도'를 비롯해 오페라로 더 잘 알려진 알렉산더 뒤마의 '춘희',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등의 북 커버와 책 안의 일러스트를 담당했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 밑에 센 강은 흐르고

마리 로랑생은 천재적인 시인 아폴리네르에게 영감을 준 뮤즈이기도 했다. 그녀가 없었으면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밑에 센 강만 흐르고>라는 명시는 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겠지요. 세월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는 자신들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지만 그 사랑으로 잉태된 예술은 영원하다는 주제라고 할 수 있지요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오는 것 /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 세월은 가도 나는 남는다... / 미라보 다리 아래 강물이 흘러가듯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 우리의 희망은 너무나 벅찬데 인생은 너무나 무심하다 / 날과 달이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흐르지만 사랑은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만 흐른다.

마리 로랑생 I '샤토(성곽) 안에서의 생활(La vie au chateau) 114.4*162.3cm1925

이 밖에서도 이번 전시에는 마리 로랑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을 비롯해 마리 로랑생이 1942년 출간한 시집 겸 수필집 '밤의 수첩' 등이 전시된다. 또 시를 직접 필사해보고 시 낭송을 감상해보는 특별한 코너도 마련되어 직접 체험하는 전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마리 로랑생 I '꽃과 비둘기(Fleurs et Colombes)' 105*125cm 1935년 작품

재능이 많은 마리 로랑생 회화뿐만 아니라 무대미술 일러스트 드레스 디자인 실내 디자인 화실의 교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 세계대공황으로 작업만으로 화가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람을 그리다 : 신윤복∙정선]전, 조선 진경의 두 거장 신윤복과 정선, 미디어아트와 함께 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11월 24일부터 2018년 5월 24일까지( 6개월) 주최 : 간송미술문화재단, 서울디자인재단 주관 :간송 C&D, ㈜브랜드 아키텍츠


조선 진경의 두 거장 신윤복과 정선, 미디어아트와 함께 하다] 조선의 풍류를 그려낸 두 거장, 혜원 신윤복과 겸재 정선의 대표작과,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미디어 아트가 함께하는 전시다

요 작품: 국보 제135호, 신윤복<<혜원전신첩>>과 보물지정예고작품인 정선<<해악전신첩>>등 원작 56점과 더불어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미디어아트 작가 이이남의 작품이 선보일 예정이며, 그리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세대 콘텐츠 개발지원사업으로 선정된 초대형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 영상 다수가 전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