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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드넓은 땅의 흙빛 그 숭고한 세계를 그리다

[윤형근 회고전(1928-2007) Yun Hyong-keun Retrospective] 국립현대미술관 MMCA 서울 3-4-8 전시실에서 2018. 8. 4~12. 16까지 작품 40여점, 드로잉 40여점, 아카이브 100여점 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가 드높은 하늘의 별빛 그 찬란한 세계를 그렸다면 윤형근은 드넓은 땅의 흙빛 그 숭고한 세계를 그렸다 김환기와 윤형근이 있어 한국화는 하늘과 땅이 제대로 만나게 된 것이다 김환기가 그의 장인이고 윤형근이 김환기의 사위라니 흥미롭다 Whanki Kim painted the brilliant world of starlight in the sky, while Yun Hyung Keun painted the noble world of earthy soil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전시 베니스 간다! MMCA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윤형근>전의 이탈리아 베니스 순회가 확정되었다. 🎉🎉🎉 내년 2019년 5-11월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중에 베니스의 유력 시립미술관인 포르투니 미술관과 협약을 체결 *<윤형근> 포르투니 미술관 전시일정 2019.5.11.-11.24.(2019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과 동일하나 개막일은 현지 상황에 따라 하루 이틀 변동될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천지문 (天地門) 시리즈(하늘색과 땅의 색을 뒤섞다)' -“진실로 서러움은 진실로 아름다움 하고 통한다.”- 윤형근, 1988년 8월 17일 일기 중에서

제 2부에서는 1973년 반공법 위반 협의로 서대문형무소를 갔다 온 이후 뚜렷한 직업 없이 요시찰인물로 등록된 채 오로지 작업에만 매진하던 10여년의 시기 제작된 작품을 보여준다. 이 시기 작품에 대해서 작가는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하늘의 색인 블루(Blue)와 땅의 색인 엄버(Umber)를 섞어 검정에 가까운 색채가 탄생하는데, 거기에 오일을 타서 면포나 마포에 내려 그으면‘문(門)’과 같은 형태의 작품이 나오게 된다.

이 시리즈는 검정색의 우뚝 선 구조들 사이로 무언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형태도 작업과정도 매우 단순한 이 작품들은 서툰 듯하면서도 수수하고 듬직한 멋을 지닌다. 1980년 광주항쟁의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쓰러지는 인간 군상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러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다

[박이소: 기록과 기억] MMCA 과천 1전시실에서 2018.7.26~12.16까지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영상, 설치 등 약 50여 점의 작품 및 도큐먼트, 드로잉, 비디오 등 아카이브 200여 점 전시담당자 임대근 학예연구관 [MMCA 전시토크: 큐레이터와의 만남] 전시기간 중 1회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http://omn.kr/s671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전시 홍대대사 배우 지진희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 전시 한국 단색화의 거목(巨木)《윤형근》전시 오디오 가이드를 8월 6일(월)부터 제공한다.평소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배우 지진희는 이번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윤형근(1928~2007) 작가의 극적인 삶과 작품의 궤적을 부드러우면서 울림이 깊은 목소리로 관람객에게 전달하게 된다.

《윤형근》전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참혹했던 역사적 시기에 청년기를 보내며 총 3번의 복역과 1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작가의 극적인 삶과 예술세계를 조망한다. 관람객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전할 지진희의 오디오 가이드는 국립현대미술관 모바일 앱(App)을 통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윤형근 전에 앞서 인사말 하는 마리 관장 기자들에게 많이 더우시지요 한국어로 인사말을 하자 한국기자들이 박수를 보내다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정말 좋은 전시가 많았다 이번 달만 해도 지난 번 박이소 이번에 윤형근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2명이 소개되었고 다음 주에는 르코르뷔지에 제자인 건축가 김중업 등 전시가 이어진다


윤형근의 아들 윤성렬 그는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면 아버지에 대해서 뭐든지 물어보라고 기자들에게 인사말을 한다. 그는 아버지기가 반공법 등으로 여러 번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어린 시절에 봐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나는 언제부터인가 흙빛깔이 좋아졌는지 잘 기억은 안 난다 포도나무빛깔도 그렇다 또 돌의 빛깔도 그렇다 자연경치의 빛깔도 겨울의 자연빛깔이 좋다 이 모두가 인조가 아닌 자연의 빛깔이 그중에서도 좋은 자연의 빛깔이 좋다 퇴색한 것 같은 탈색한 것은 같은 그런 빛깔 말이다" -윤형근 1977 [평] 그는 부드러운 향긋한 흙의 자연스러운 빛깔을 좋아한 것 같다

한국관객dl 윤형근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윤형근의 천재성은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을 미국의 유명한 미니멀리즘 작가 도널드 저드였다. 두 사람은 절친이었다 윤형근은 박서보 등보다 4-5년 위 세대로 단색화 개념도 없는 시대에 단색화를 연사람이다 The level of Korean spectator's view is still not enough deep to understand Yun Hyung Keun The first person to know Yun Hyung Keun's genius was Donald Judd, a famous American minimalist artist The two were close friends.

이번 윤형근 전 기획자 김인혜 학예연구사

윤형근은 419세대다 그는 천재시인 '신동문'과 동기였다 그의 3인방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20년에 만에 다시 1980년 광주학살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팠겠죠 그 분노를 주체할 길이 없어 이런 격한 추상화를 그리게 되는데 그림에 직사각형 모양의 막대기는 사람이고 그 물감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광주시민이 군대의 총을 맞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Yun Hyong-keun at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KOREA #MMCAKorea #YunHyongkeun http://ow.ly/2jC930lcI9T

Born in 1928 in Cheongju, Yun Hyong-keun lived through one of the most traumatic periods of Korean history, suffering great misfortune related to Japanese colonial rule, the Korean War, and the postwar dictatorship. Yun was incarcerated four times, and once faced with near-certain death. Only after surviving harrowing incidents did Yun fully commit himself to making art, in 1973 when he was 45 years old.

From the moment he dedicated himself to painting, Yun clearly established his own distinct artistic world, which he called the “gate of heaven and earth.” In the quintessential series of works, Yun used a wide brush to apply thick blocks of black paint to canvasses of plain cotton or linen. To be precise, the paint was not actually black, but slightly variant mixtures of the same two colors: blue (representing “heaven”) and umber (representing “earth”). From their production method to their final appearance, these paintings are simple, genuine, and organic. With these seemingly offhand works, Yun succeeded in translating the humble, comfortable, and solid values of Korean traditional aesthetics into the lexicon of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11 years after his death, this exhibition explores Yun’s life and art with unprecedented range and depth, introducing many details and perspectives that have not yet received adequate attention. Most notably, the displays feature a wealth of personal materials including early drawings, a large archive of photos, and strikingly honest excerpts from Yun’s private journals. Through diverse materials and works, this exhibition comprehensively explores the life and art of Yun Hyong-keun, who has thus far been known primarily within the context of the Dansaekhwa movement in Korea. For more information, visit the website of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윤형근 말년의 인생에 대한 태도에서 담담하지만 여운을 주는 모습이네요 모든 시공간을 넘어서다

[작가소개]1928 년 청주에서 태어난 윤형근은 일본 식민지 통치, 한국 전쟁 및 전후 독재와 관련하여 커다란 불행을 겪은 한국 역사의 가장 충격적인 시기 중 하나를 경험했다. 윤은 4 번 감옥에 갇혔고 한때 거의 죽음에 직면했다. 1973 년 45 세의 나이에 생존 한 엄청난 사건을 겪은 후에야 윤은 자신을 예술 창작에 전념했다.

그는 자신을 그림에 헌정 한 순간부터 윤곽의 문양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고유 한 예술 세계를 분명히 확립했다. 윤의 일련의 작품에서 윤은 검은 색 페인트의 두꺼운 블록을 적용하기 위해 넓은 브러시를 사용했다. 일반 목화 또는 린넨 캔버스. 정확히 말하면 페인트는 실제로 검은 색이 아니고 파란색 ( "천국")과 umber ( "지구"를 나타내는) 같은 두 가지 색상의 약간 변형 된 혼합물이었습니다. 그들의 생산 방법에서 최종 모습에 이르기까지,이 그림들은 단순하고, 진짜이며, 유기적입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작품들을 통해 윤은 한국 전통 미학의 겸손하고 편안하며 견고한 가치를 국제 현대 미술의 어휘로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죽음 이후 11 년이 지난 이번 전시는 유례 없는 범위와 깊이로 윤의 삶과 예술을 탐구하고 적절한 관심을 받지 못한 많은 세부 사항과 시각을 소개한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초기 드로잉, 사진 보관소, 윤의 개인 저널에서 발췌 한 정직한 발췌 등 다양한 개인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다양한 소재와 작품을 통해 이 전시는 주로 한국의 단색화 운동의 맥락에서 널리 알려진 윤형근의 삶과 예술을 포괄적으로 탐구한다.

3부. 심간 (深簡) : 깊고 간결한 아름다움

제 3부에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제작된 윤형근의 후기 작품으로 구성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 한층 더 간결해진다. 색채는 검은색의 미묘한 변주가 사라진 채 ‘순수한 검정’에 더욱 가깝고, 물감과 함께 섞었던 오일의 비율도 줄어들면서 화면은 한층 건조해진다. 형태와 색채, 과정과 결과가 더욱 엄격해지고 간결해지지만, 그 거대하고 순수한 검정색 앞에 서면 관객은 왠지 모를 ‘심연(深淵)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의 후기 작업은 어떤 ‘확신에 찬 통찰’을 보여주며,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 그리고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 윤형근, 1990년 우에다 갤러리 개인전 작가노트 중에서


윤형근이 요셉 보이스를 좋아한 이유: "요셉 보이스의 작품에는 죽음이 선뜻 지나간다 그래서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평] 윤형근은 거의 죽음의 근처까지 가는 섬찟함을 경험한 후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시각 언어를 깨닫게 된 것인지 모른다


윤형근은 초기 수많은 드로잉 작업을 통해, 그가 이후 줄곧 관심을 가졌던 다양한 조형적 실험들을 이미 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한지’의 특수한 재질감과 번짐의 효과가 실험되고 있다. 마치 한국 전통의 ‘먹’으로 글씨를 쓸 때와 같이, 물감의 농담에 따라 그것이 종이에 흡수되는 강도와 번짐의 정도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후에 그가 마포 위에다 오일로 농담을 조절해가며 검은 물감을 내리긋는 작업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이때는 아직 원색을 포함한 다양한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1973년 ‘반공법 위반’의 누명을 쓰고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온 후 색채를 잃게 된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의 빨간색 티와 윤형근 화백의 초기 빨간색 색채 드로잉 작품 이 시기는 작가가 인생역경을 거치면서 색채와 형태, 작업과정과 결과가 모두 단순해지고 순수해지는 과정을 보인다.


[윤형근의 미의식은 고가구의 미니멀리즘과 추사 김정희에서 나온 것이다] “골동은 돈이 아니다. 조상의 얼이요 세월을 담은 기물이다. 골동을 보고 있노라면 옛 어른을 보는 것 같다. 점잖고 넉넉한 그 옛 어른을 보는 것 같다. 어리숙하고 인정어린 옛 어른을 보는 것 같다.”- 윤형근, 1990년 7월 5일 일기 중에서

[저드의 미니멀리즘은 한국고가구에서 1000년전부터 시작] 윤형근의 거실 공간을 옮겨온 것이다. 전통 목가구, 도자기, 토기, 고서 등이 작가 자신의 작품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했던 과제는 한국 전통 공예품의 ‘멋’을 현대적 언어로 변환하는 일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의 공예품은 흙과 나무 같은 자연 재료에서 출발하여, 그 소박한 성질을 해치지 않은 채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함으로써, ‘쓸모’의 본질을 살려낸 것들이다. ‘자연을 따라’, ‘자연과 함께’, 무심(無心)한 듯 생겨난 작품들이 오래 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미감을 가진 것이다


윤형근은 앞으로 10년 안에 김환기 급 작가가 될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윤형근 작가의 부인은 김영숙 여사 김환기의 딸이다. 그런데 김영숙 여사에게 아버지 김환기와 남편 윤형근 작품 중 어느 작품이 더 좋으냐고 물으면 100% 남편인 윤형근이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작가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단다

[1978년 9월 동경화랑 개인전에서 조셉 러브와 함께] 윤형근 은 한국보다는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전문가나 컬렉터로부터 더 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의 미니멀리즘의 대가인 도널드 저드의 그에 대한 높은 평가에서 엿볼 수 있다.

윤형근과 미국의 미니멀리즘의 창시자인 도널드 저드 같이 찍은 사진(1993.11.14)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 큰 교감이 일어난것인가 예술가로 통했겠죠 불행하게도 저드가 다음해 죽은 바람에 저드가 미국에 윤형근 작가의 홍보대사를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 윤형근의 천재성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국의 도널드 저드였다

윤형근 그의 거으 초기 작품을 김환기의 영향이 보인다 이런 작품 디카에 담기에 너무나 벅차고 힘들다 '제목 미상', 1966년경, 캔버스에 유채, 62x51.5cm

윤형근은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1966년, 첫 개인전을 서울 신문회관 화랑에서 열었다. 당시 출품작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사진 자료를 통해 볼 때 이와 매우 유사한 작품들이 전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대부분 <섬 풍경>, <호수>, <매화와 달>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적인 제목이 붙여졌으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제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반적으로 푸른색이 지배적인 화면에 다양한 색채의 점들이 보석처럼 빛나며 그들의 존재를 알린다. 매우 서정적이고 풍부한 감성을 지닌 이 작품은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수화 김환기(1913-1974)의 영향을 깊이 반영하고 있다

윤형근 6남 2년 중 차남으로 아버지는 윤용한씨는 파평윤씨 대종손으로 경기고보(지금의 경기고등학교)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일제강점기 낙향하여 해강 김규진으로 사사한 적이 있고 특히 서예와 사군자에 능했다고 한다

[신동문과 윤형근] 419세대 한 사람은 시인 한 사람은 화가, 두 사람은 고향(충북 청주)도 같고 나이도 같다. 둘은 절친이다. 신동문의 419 시 <아! 신화같이 다비데 군(群)들_419 한낮에(1960)> 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두 사람의 연결시키니 묘하게 뭔가 통하는 것 같다 아래는 신동문의 시다

서울도 / 해 솟는 곳 / 동쪽에서부터 / 이어서서 남북 / 거리마다 길마다 / 손아귀에 / 돌 벽돌알 부릅쥔 채 / 떼지어 나온 젊은 대열 / 아! 신화같이 / 나타난 다비데 군들 // 혼자서만 / 야망 태우는 / 목동이 아니었다. / 열씩 / 백씩 / 천씩 만씩 / 어깨 맞잡고 / 팔짱 맞끼고 / 공동의 희망을 /태양처럼 불태우는 / 아! 새로운 신화 같은 / 젊은 다비데 군들 // 고리아테 아닌 / 거인 / 살인전제(殺人專制) 바리케이트 / 그 간악한 조직의 교두보 / 무차별 총구 앞에 / 빈 몸에 맨주먹 / 돌알로써 대결하는 / 아! 신화 같이 / 기이한 다비데 군들 // 빗살 치는 / 총알 총알 / 총알 총알 총알 앞에 / 돌 돌 / 돌 돌 돌 / 주먹 맨주먹 주먹으로 / 피비린 정오의 / 포도(鋪道)에 포복하며 / 아! 신화같이 / 육박하는 다비데 군들 //

신동문 시인

저마다의 / 가슴 / 젊은 염통을 / 전체의 방패 삼아 / 관혁(貫革)으로 내밀며 / 쓰러지고 / 쌓이면서 / 한 발씩 다가가는 / 아! 신화같이 / 용맹한 다비데 군들 // b충천하는 / 아우성 / 혀를 깨문 / 안간힘의 / 요동치는 근육 / 뒤틀리는 사지 / 요동하는 육체 / 조형의 극치를 이루며 / 아! 신화같이 / 사우는 다비데 군들// b마지막 발악하는 / 총구의 몸부림 / 광무(狂舞)하는 칼날에도 / 일사불란 / 해일처럼 해일처럼 / 밀고 가는 스크럼 / 승리의 기를 꽂을 / 악의 심장 급소를 향하여 / 아! 신화같이 / 전진하는 다비데 군들 // 내흔드는 / 깃발은 / 쓰러진 전우의 / 피묻은 옷자락 / 허영도 멋도 아닌 / 목숨의 대가를 / 절규로 / 내흔들며 / 아! 신화같이 / 승리할 다비데 군들 // 멍든 가슴을 풀라 / 피맺힌 마음을 풀라 / 막혔던 숨통을 풀라 / 짓눌린 몸뚱일 풀라 / 포박된 정신을 풀라고 / 싸우라 / 싸우라 / 싸우라고 / 이기라 / 이기라 / 이기라고 // 아! 다비데여 다비데들이여 / 승리하는 다비데여 / 싸우는 다비데여 / 쓰러진 다비데여 / 느가 우는가 / 너희들을 너희들을 / 누가 우는가 / 눈물 아닌 핏방울로 / 누가 우는가 / 역사가 우는가 / 세계가 우는가 / 신이 우는가 / 우리도 / 아! 신화같이 / 우리도 / 운다. <아! 신화같이 다비데 군(群)들 ㅡ 4.19의 한낮에>(사상 1960. 6) 전문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8'전 개최 2018년 8월 11일(토)부터 11월 25일(일)까지 MMCA 서울관에서 열린다 <작성중>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8》전 기자간담회

9월 5일(수) ‘2018 올해의 작가’ 최종 1인 선정 및 시상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은 SBS문화재단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 2018》을 8월 11일(토)부터 11월 25일(일)까지 MMCA 서울 1, 2전시실에서 개최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올해의 작가상'은 한국현대미술의 역동성과 비전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작가들을 지원, 육성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지난 2012년에 시작하여 올해 7회를 맞이하며 명실상부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 및 담론을 이끌어내는 대한민국 대표 미술 시상제도로 자리매김했다.

'올해의 작가상 2018'에서는 구민자(1977), 옥인 콜렉티브[김화용(1978), 이정민(1971), 진시우(1975)], 정은영(1974), 정재호(1971) 4명(팀)이 참여하여 사회 문제를 미학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탐구하고, 타인과의 공감․연대를 향해 확장해나가는 각기 다른 접근 방법이 소개된다.

<정은영 작가편>

작품을 설명하는 장은영

여성국극은 그 꽃도 피우지 못하고 처절하게 짓밟힌 민족지 예술장르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보물과 같은 것이다 일종의 비빔밥 같은 판소리의 근대화 내지 현대화라고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연극과 춤과 무대예술과 시각예술 퍼포먼스 뮤지컬 오페라의 요소등 현대화할 상상력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그냥 사장되어버린 것이다. 군사독재가 없었다면 그런대로 살아있었을 텐데 일종의 죽임을 당한 예술이다. 그것이 여성이었기 때문이고 그들 중 기생출신 등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의 죽을 뻔 했던 것이 기사회생할 가능성이 보인 것만으로도 그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작가소개鄭恩瑛 1974년-)은 대한민국의 페미니즘 미술 작가이다. 영어이름 siren eun young jung 을 사용한다. 조덕현 제자 '여성국극' 전공, 학위를 받다 197 이화여대 서양화과 졸업/2000 이화여대 일반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석사 논문 <통로로서의 세계의 가장자리>, 지도교수 조덕현/2004 영국 리즈대학교 대학원 시각예술에서의 여성주의 이론과 실천 졸업, 석사 논문 <전지구화 시대 조국과 이산 사이의 여성들>, 지도교수 그리젤다 폴록/2015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부 졸업, 박사 논문 <성별의 정치학과 불화의 미학: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지도교수 김현주, 조덕현

수집한 자료는 주로 여성국극 배우들이 간직했던 오래된 사진들, 공연실황 영상, 방송녹화영상, 대본, 신문기사, 관련 책과 논문 등이다. 그리고 거기에 정은영이 수행적 젠더라는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읽은 여러 책과 논문, 배우를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 녹음 파일 및 영상이 더해진다. 그리고 창작물로는 작가가 제작한 비디오, 여성국극을 모티브로 한 공연의 기록영상, 수집한 자료를 몽타주한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 작가의 '창작'이 개입하는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작가가 수집한 자료는 여성국극에 관한 객관적 자료로 있지만 작가 개인의 특수한 관심에 따라 선별된 것이고 인터뷰 과정의 작가의 노련한 질문과 개입은 편집의 기술 만큼이나 창작의 성격을 드러낸다. 따라서 정은영의 아카이브에서 창작과 비창작을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안소현

"모든 읽기는 작품을 작품 자체로, 그 익명의 현전으로, 있는 그대로의 격렬한 비인칭의 긍정으로 돌려주기 위해 작가를 무효화시키는 놀이(performance)이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여성국극은 1950년 전쟁의 상처가 너무나 큰 시대에 여성의 힘으로 그 연극의 힘으로 한국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다가 박정희가 등장하면서 사라진 독특한 예술장르이다. 즉 판소리를 기본으로하면서도 서양의 연극이론을 받아들여 나름 새로운 민족지 연극을 창출한 것인데 전혀 경제적 기반도 없고 문화적으로 후원받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제 풀에 겪여 사라진 대중예술매체이다. 그러나 이런 연극의 예술성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이건 전통과 전위가 합쳐진 퍼포먼스아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고 그렇게 해야 하는데 이에 도전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정은영 작가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살려낸 것이다.

[보충자료] 60년대 여성국극을 본 경험이 있어 이 작가를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다. 정은영은 2008년부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여성 국극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여성국극은 1950-60년대 크게 유행했으나 쇠퇴한 일종의 창무극으로, 모든 등장인물을 여성이 연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작가가 '자신의 창작을 위해' 수집한 자료와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창작물'로 이루어져 있다.

정은영은 1950년대 대중적 인기를 누렸으나 현재는 소멸 위기에 놓인 여성 배우만으로 구성된 ‘여성국극’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명동예술극장과 국립현대미술관 멀티 프로젝트홀에서 촬영한 신작 <유예극장>과 <죄송합니다. 공연이 지연될 예정입니다.>, <가곡실격>, <나는 왕이야> 등의 작품이 소개된다. 또한 여성국극이 기억되거나 설명되어온 기존의 역사쓰기의 방식을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유예시키고, 그것을 둘러싼 담론과 기억의 뒷면에 머물고자 하는 작가의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아카이브인 <보류된 아카이브>를 발표한다.

이와 함께 한국, 일본, 대만에서 상연한 <변칙 판타지>를 통해 소멸되어가는 여성국극과 동시대 예술이 만나는 무대로 관객을 초대한다.

작가는 여성국극의 본질적 정당성을 찾아 회복시키기보다는 이러한 감각적 변이를 통해 보다 변칙적이고 퀴어한 예술실천의 정치적 힘을 역설하고 있다.

정은영(1974~ )은 1950년대 대중적 인기를 누렸지만 전통극으로도, 현대극으로도 자리 잡지 못한 채 잊힌 공연예술장르인 여성국극을 둘러싼 연구와 조사, 분석에 기반을 둔 예술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여성배우들로만 공연되는 여성국극은 작가에겐 성별의 규범과 문화의 동시대성이 어떻게 인식되고 구성되는지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민족지이다.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지역의 근대기에 발견되는 이 ‘여성극장’은 근대국가의 욕망 안에서 발명되고 호명된 젠더수행의 견고한 이분법과 전통의 형성과 배제의 역학에 드리운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직시하게 한다.

작가는 여성국극이 기억되거나 설명되어온 기존의 역사쓰기의 방식을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유예시키고, 그것을 둘러싼 담론과 기억의 뒷면에 머물고자 한다. 나아가 이 유예된 시간을 공간이라는 부피의 감각으로, 수행이라는 신체의 움직임으로 채워내고자 하는 작가는 여성국극의 본질적 정당성을 찾아 회복시키기보다는 이러한 감각적 변이를 통해 보다 변칙적이고 퀴어한 예술실천의 정치적 힘을 역설하고 있다.

<구민자 작가편>

구민자

[문화권에 따라 시간에 대한 개념이 다른 이유에 대한 탐구 한국인의 시간관 중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하루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 등등]

구민자

구민자(1977-)는 퍼포먼스와 영상을 통해 노동, 시간, 사랑 등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고 근원적인 경험과 이에 대한 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처럼 젊은이들이 밤새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한국인의 시간 사용에 대한 통계를 바탕으로 '평균적 삶'을 퍼포먼스로 수행하고, 포장지에 소개된 조리예에 제시된 대로 요리를 정성껏 완성하면서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관념을 불편하고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구민자

여러 도시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섬머타임제를 실시하는 도시를 경험한 작가는 시간이라는 자연스럽고 천부적인 요소에 개입된 문명의 작위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구민자는 피지 타베우니 섬의 날짜 변경선을 오가는 퍼포먼스를 통해 "하루를 두 번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과 삶의 의미를 묻는다

구민자

작가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믿는 많은 것들이 사실 인간에 의해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탐구한다.

<정대호 작가편>

정재호

[독재 개발기의 만들어진 건물 풍경에 대한 풍자와 당시 공상만화에 대한 노스탤지어 재현]

정재호(1971-)는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서 번영과 발전, 즉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도시 풍경 이면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재호

붉은 십자가로 뒤덮인 서울의 야경, 쇠락한 인천 차이나타운의 풍경, 한때는 서양식 삶의 표본으로 인식되다가 철거 위기에 처한 1960~70년대 시범 아파트 단지 등을 통해 근대 도시와 건축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왔다.

작가는 국가가 개발도상국의 국민 모두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룰 밝은 미래를 꿈꾸도록 ‘권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을지로, 종로 등 도심에 위치한 당시 건축물의 표면을 기록하고 같은 시기 발간된 정부간행물이나 공상과학만화, 신문기사 등에 등장하는 이미지 자료를 찾아 그림으로써 새로운 아카이브를 구성한다.

정재호

그 시절 소년소녀들은 왜 과학기술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는가

정재호

마지막으로 공상과학만화 <요철 발명왕> 속의 주인공이 결국은 실패했지만 달나라 여행을 위해 만들었던 로켓을 제작한다. 도심 속 건축물, 기록사진의 회화적 재현, 실패한 로켓의 복원 등 세 갈래의 작업은 근대화를 위한 국가적, 사회적 기제가 도시의 풍경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온 우리의 의식에 깊게 각인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옥인 콜렉티브 작가편>

옥인 콜렉티브

옥인 콜렉티브(김화용, 이정민, 진시우 / 2009년 결성)는 종로구 옥인 아파트의 철거를 계기로 형성된 작가 그룹 옥인 콜렉티브[김화용(1978), 이정민(1971), 진시우(1975) / 2009년 결성)

옥인 콜렉티브

이 아트 그룹은 도시 개발의 과정에서 대면하는 사회적 문제를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관찰하며, 영상과 퍼포먼스,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공동체 안과 밖의 관객과 조우한다.

옥인 콜렉티브

옥인 콜렉티브는 철거중인 아파트에 남겨진 주민들과 함께 상영회, 전시, 콘서트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기타회사 콜트콜텍에서 부당해고당한 노동자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공연하고,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재난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위험사회를 풍자하는 체조를 만드는 등 기존의 틀을 벗어난다양한 방식으로 사회 문제에 개입한다. 미디어 속에서 단순화된 관계와 상황에 내포된 양가적이고 중층적인 사람들의 감정, 태도, 상황을 노출시켜 근대 도시에서 공동체와 개인, 공동체와 공동체, 개인과 개인 간에 존재하는 갈등과 화해, 연대의 의미와 한계를 모두 다룬다.

옥인 콜렉티브

다양한 방식으로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든 실천을 해온 옥인 콜렉티브는 이번 전시에서 콜렉티브가 탄생하게 된 작업과 과정의 기록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바깥에서>를 선보인다. 이와 함께 서울, 제주, 인천 세 도시에서 각각 하나의 공동체를 찾아 도시 속에서 우리가 왜 공동체를 형성하는지 구성원과 공동체는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공동체가 유지되어 가는지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작한 신작을 발표한다.

<회전을 찾아서, 또는 그 반대>의 경우, 인천에 위치한 예술가 공동체인 ‘회전 예술’의 이야기를 <황금의 집>에서는 제주에 위치한 음악다방 까사돌을 찾는 시니어들의 이야기를 추적한다. 옥인 콜렉티브는 흑백, 호불호, 찬반 등으로 나뉠 수 없는 복잡한 상황과 관계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의 동요를 세심하게 짚어낸다.


[나는 코코 카피판, 오늘을 살아가는 너에게] 전 대림미술관에서 2018.08.02-2019.01.27까지

대림미술관 입구

삶은 짧다. 그럼에도 사람들 의미 없는 것만 걱정하고 산다 나는 죽기 전에 살고 싶다. 사람들은 죽음의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닥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회피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있기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뭔가를 표현하면서 살고 싶다 주변에 즐겁게 사는 법을 상기시키고 싶다 식상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삶이란 훌륭한 현상이라는 것을 나는 요즘 깨닫는다" -기자간담회 작가의 말

1층 로비 전시실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고 고민이 많았던 10대 한권의 책이 나를 구한다

특히 환상과 실제를 오가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유쾌하고 친근한 방식의 패러디를 통한 자기 탐구 작업, 그리고 염세적 태도를 지닌 풍자적 작품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아티스트로서의 사회적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치열하게 스스로를 탐구한 시간들을 대변한다.

여기서 작가는 수없이 충돌하는 이중적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진짜 나를 찾아가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인 4층에서 코코 카피탄은 스페인의 올림픽 싱크로나이즈 선수들을 촬영한 사진 작품들과 수영장 설치 작품을 통해,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지만 꿈꾸는 것을 이루려는 모든 이들의 노력에 응원을 보낸다.

특히 8미터의 대형 핸드라이팅 작품은 긴장과 두려 움, 불안의 감정 속에서 물방울보다도 작을 수는 있지만 이로써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는 모두의 노력과 그로 인한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긍정의 가치를 발견케한다

보그(Vogue), 데이즈드(Dazed), 도큐먼트 저널(Document Journal) 등 유명 패션 매거진에 실린 에디토리얼 작업들로, 고전적인 패션 화보와 동시대 대중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사진 속 등장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초상 사진의 장르적 특성을 접목시켜, 모델의 포즈, 성격, 그리고 감정까지 전달하며 기존 패션 사진과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유머를 가미한 이미지들을 통해 사진 매체의 전형적인 틀에 도전하는 작가는, 장르 간의 경계를 넘어 점차 예술의 한형태로 진화하고 확장되어 가는 패션 사진의 현재를 제시한다.

[보여지는 방식에 대한 생각들 / 3층]

언제나 보여지는 것에 익숙한 패션 모델들이 타인의 시선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지 보여주는 작업이다. 6 명의 모델은 길거리의 사람들, 지하철 안의 승객, 자신을 촬영하는 포토그래퍼 등 여러 장소에서 마주친 자신을 향한 시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한다. 셀프 서비스(Self Service) 매거진 화보를 위해 버버리(Burberry) 의상을 입은 모델들을 촬영하는 동안, 작가는 패션적 요소가 아닌 인물의 성향과 태도에 주목함으로써 보다 새로운 관점으로 패션에 접근한다.

[결국은 사라질 것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안 / 3층] 2017년 여름 미국 서부를 여행하며 마주한 빈 건물들과 버려진 도로, 교회와 묘지, 쓸모를 잃고 방치된 길가의 사물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촬영된 이 사진들은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 다. 사진 작품과 함께 전시된 작가의 글은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고민과 다양한 감정들을 드러내는데, 단순히 죽음에 대한 어두운 일면만을 강조하지 않고 그것을 삶의 한 부분으로 이해함으로써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미리 걱정 과잉 걱정하지 않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뭔지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표현하고 살고 싶다] 사진 페인팅 핸드라이팅 영상 설치 작품 등으로 밀레니엄 세대를 대변하는 솔직하고 대담한 자기표현을 주제로 하는 작가


"삶은 짧다. 그럼에도 사람들 의미 없는 것만 걱정하고 산다 나는 죽기 전에 살고 싶다. 사람들은 죽음의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닥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회피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있기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뭔가를 표현하면서 살고 싶다 주변에 즐겁게 사는 법을 상기시키고 싶다 식상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삶이란 훌륭한 현상이라는 것을 나는 요즘 깨닫는다" -기자간담회 작가의 말

[작가소개] 코코 카피탄(Coco Capitán, 1992년 스페인 출생)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포토그래퍼이자 아티스트로, 런던 패션대학(London College of Fashion)에서 패션 사진을 전공하고, 영국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에서 사진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작가는 특유의 꾸밈없는 솔직함과 자유로움으로 사진, 페인팅, 벽화, 핸드라이 팅, 영상, 설치 등을 선보이며 <보그(Vogue)>, <데이즈드(Dazed)>, ‘멀버리(Mulberry)’,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 라(Maison Martin Margiela)’, ‘컨버스(Converse)’ 등 세계 유명 패션 브랜드 및 매거진과의 화보 촬영을 진행하 였고, 지난해 구찌(Gucci)의 ‘Young Art Star’로 지목되어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연이어 뉴욕과 밀라노, 피렌체, 마이애미의 구찌 건물과 외벽을 장식하였으며, 아트 바젤 마이애미(Art Basel Miami 2017)에 초대되어 단편 영화 ‘Learning to Transcend the Physical Barriers that Owning a Body Implies’를 개봉한 바 있다. 또한 2015년 영국 런던 포토그래퍼스 갤러리에서 FF+WE Prize를 수상하였으 며, 2016년 프랑스 예르 패션 & 포토그래피 페스티벌(Hyères Fashion & Photography Festival)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아티스트로서 연일 새로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수영장을 아예 시각적으로 3층 전시실로 옮겨놓다 주 6일 하루 10시간의 노력 스페인 올림픽 싱크로나이즈 선수단

[박이소: 기록과 기억] MMCA 과천 1전시실에서 2018.7.26~12.16까지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영상, 설치 등 약 50여 점의 작품 및 도큐먼트, 드로잉, 비디오 등 아카이브 200여 점 전시담당자 임대근 학예연구관 [MMCA 전시토크: 큐레이터와의 만남] 전시기간 중 1회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http://omn.kr/s671

박이소 작가

박이소는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참으로 맑은 사람이었다 김수영(1921-1968) 시인처럼 참 정직한 사람이었다 계산을 하지 않고 온 몸으로 밀고나가는 사람이었다. 김수영은 47살에 그의 시를 온몸으로 밀고나가다 차에 치여 죽었듯이 박이소(1957-2004)는 47살에 온몸으로 정직하게 한국미술계를 밀고 나가다가 속에서 불이 나 타 죽은 것이다. 박이소의 주검을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죽은 지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에게서 순교자적 면모가 보이는 것은 그의 죽음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삶과 죽음마저도 경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미술작업이나 미술기획에서만이 아니라 후배를 양성하는 미술교육에서도 전력투구하는 사람이었다


1984년 뉴욕에서 박이소

박이소가 뉴욕에서 1984년 가장 배고프고 고단하고 힘들 시절의 그의 모습을 이 사진에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은 그와 친했던 강익중이 우연히 찍은 사진이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작품제목은 <단식 퍼포먼스> 1984 밥솥을 힘 없는 어깨에 걸고 걷는 모습이 순교자처럼 보이네요

"윤리의 장에서 박 모는 부모가 만들어준 이름을 스스로 버리고(박철호,박모),이어서 11월 말의 추수감사절때,사흘간의 단식행위를 통한 공복 속에서 작품(밥솥)을 밧줄에 이어 목에 매단 채, 단식 마지막 날 빈속으로 정오에 집을 나서 강을 잇는 부르클린교를 건너갑니다.

20대말의 나이에 이것을 결행했다는 것은 결코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닙니다.그는 미술에서의 퍼포먼스가 1차적인 목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거기에는 아무런 관객도 없었고 단지 친구가 있었지요, 당시 가까이 지내던 강익중이 사진을 남겼습니다" -이영철

박이소전 기자간담회

마리관장은 인사말에서 박이소는 1980-199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1980년대 이후 국제 미술계의 지형도에서 그의 위치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2014년> 유족들이 작가노트, 드로잉, 비디오, 아카이브 등 많은 작품을 기증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 박이소가 목마른데 그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것이 해소가 될지 궁금하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좀처럼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어렵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미술품 옆에 붙어 있는 설명을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2004년 세상을 떠난 작가이자 큐레이터, 평론가인 박이소(사진)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문가들은 “한국 동시대 미술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라고 평가하지만, 평범한 관람객들은 “전문가가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관람객들만 어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된 박이소의 작품 ‘베니스비엔날레’는 공사 중인 시설로 오인되기도 했고, 작품을 운송하는 전문업체의 직원들도 어떤 것이 작품이고, 어떤 것이 일반 설비인지 항상 확인해야 했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 제도화된 시각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작가]

박이소는 경계가 없는 작가다 민중미술이나 모더니즘 이런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그것이 그림이 되는 가가 중요하다. 그는 뒤샹의 후예는 아니지만 기존의 그림형식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번 전시를 맡은 임대근 학예연구관의 도움말이기도 하다 그림에서 더 높고 더 고상하고 더 훌륭하고 더 숭고하는 뭔 그런 개념이 없는 작가다. 김수영 시인의 유작인 풀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사군자 그림도 관객의 시건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식의 현대화된 사군자를 그리다. 하나의 용기다.

[이번 박이소전시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 봐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다 ]

그는 이미 역사가 된 인물이다 역사가 되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미래의 작가가 된다는 뜻도 된다. 그에게는 경계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민중미술 모더니즘 뭐 그런 것이 없다. 그냥 그것이 그림이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를 누구는 천재적 개념미술가라고도 하지만 많은 사람은 개념미술가가 아니라고도 한다. 그만큼 그를 규정하기는 상당히 힘들다 그는 분명 순교자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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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 기록과 기억] MMCA 과천 1전시실에서 2018.7.26.~12.16까지 전시담당자 임대근 학예연구관

박이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을 그리는" 작가다 아마도 그는 정직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정직하다는 것은 진보적인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미덕이다. 이런 면에서 1960년대 순교자처럼 죽은 김수영 시인을 닮았다. 김수영이 가장 중요시 여긴 미덕이 바로 정직성(Honesty)였다. 정직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기록을 가장 중시하는 삶을 은유할 수도 있다.


작가의 역할은 이미 굳어진 이미지 제도화된 규범에 대해 정직하게 일침을 가하는 것은 모든 미술사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일 것이다 박이소는 이런 정신에 충실하다.

잡초도 자란다

"허접한 물질과 속화된 언어를 외양으로 했지만, 그의 미술은 철저하게 몸이 겪은 문화적 경험과 느린 호흡의 지적 사유를 바탕으로 했기에 우리는 박이소의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성/세속, 철학적 사변/통속적 유머, 고귀한 정신/파편적 물질을 이분법으로 갈라 보기만 했지 그 양자가 주름과 치마처럼 한곳에 결속해 있으리라 상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이소의 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의 어느 자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당분간 만나기도 어려운 '극단의 변증법적 미술'이다" [...] -이영철

사군자도를 현대화하다

김수영의 풀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박이소 인간적 비인간적

박이소의 이작 품은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라는 책제목을 연상시킨다. 여기 가운데 보이지 않게 글이 적혀 있는데 그것을 바로 김근태가 80년대 험하게 고문을 당하면서 기록한 고문일기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그는 80년대 치열한 민중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는 공감하고 동조한 것 같다. 다만 그는 미국에서 정말 가난한 작가가 처절하게 문화운동(대안공간)을 하였던 것이다.

역사의 문

21세기 인간은 토끼를 통해서 역사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인가 박이소 역사의 문에서 왜 토끼가 나오는가. 이것의 답은 없다. 다만 내 생각에 요셉 보이스의 영향으로 보인다. 20세기 전쟁 학살시대에 인류를 야단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지 토끼만이 할 수 있다. 토끼만이 인간에게 성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풍긴다. 아래 자본은 창의력은 역시 보이스에 대한 오마주인가. 여기서 자본은 문화자본을 말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든 스승 박이소(한예종 교수)에 대한 기억: 제자들 인터뷰도 들을 수 있다 그는 수업하는 방식은 수업이 끝나면 기진맥진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박이소 쓰리 스타 쇼

커피 콜라 간장을 가시적으로 구별할 수 있나 흐릿하게 보이는 흔적의 그림이다. 여기에서 커피 콜라 간장을 사용하고 있다. 문화의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다문화주의적 시각을 보인다.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

박이소는 80년대 대학생들이 정치투쟁을 하는 동안 뉴욕 브루클린에서 미국미술사에도 작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비제도권 시각의 미술운동을 펼쳤다. 바로 그런 실험적 대안공간이 바로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다. 그 대상은 라틴계 아시아계 이민자 작가 중심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런 전시를 기획하면서 한반도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 적은 없단다. 그런 면에서 그는 프로의식이 놓다. 문화활동가 전시기획자로써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서로문화연구회, 집필활동, 스터디모임을 주도하다.

가까이서 본 박이소의 작가노트 모두 21권이다, 7권씩 세 코너에서 소개한다, 관객을 염두에 두다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없는지를 살피라고 적고 있다.

박이소 아카이브


여기서부터는 작가노토가 선보인다 작가의 작가노트는 작업비밀과 같은 것인데 이것을 공개하기는 좀 꺼릴 수도 있지만 그의 유족이 2014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다 사실 박이소는 작가노트 즉 작가의 아이디어가 왕성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왜 그리는가의 대한 고민과 예술은 누가 결정하는 가에 대한 물음이 이런 노트에 담겨있을 것 같다.

작가노트 무제(뒤돌아보지 말라) "삶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깨우치기 위해"


다만 그는 이런 아이디를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그 아이디어만으로 미술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준다고 봐도 좋으리라 다만 그는 완성품보다는 그런 아이디어를 조금 보여주는 작품을 많이 한 것 같다 작가노트를 제대로 보려면 1주일은 걸릴 것 같다.고시생처럼 도시락 싸가지고 여기 와서 일주일 공부하면 박이소를 좀 알게 될 것 같다

작가노트 1(1984~1985) pp. 66-67.

1984년에 미국에 유학을 간 박모는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지며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작품에 ‘쌀’, ‘드럼통’, ‘밥솥’ 등의 소재를 사용해 가난한 나라에서 유학생으로서 부채의식과 책임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박이소 작품목록


마리 관장도 작가의 노트를 열심히 읽고 있죠. 한글로 된 것을 읽지는 못해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이트 맵을 통해서 더 자세히 볼 수도 있다


번역자의 도움도 종종 필요한 것이다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가 뉴욕에서 서울로 올 때 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는데 아래 서랍장을 소중히 챙겼다고 한다. 그는 생존에 200여개의 재즈 테이프를 직접 편집하고 만들기도 했다. 노래 솜씨도 좋았던 모양이다. Honesty를 번역해 직접 부른 노래도 있다.


박이소는 재즈 광팬이었다 그 중에서 Honesty(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말, 더러운 세상에서 정직성이란 너무나 듣기 힘든 말)라는 노래를 너무 좋아해 번역을 해 부르기도 했다 박이소가 전설이 된 것을 바로 그의 정직성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작품의 결과보다 태도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순교자적으로 산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그의 융통성 없는 정직한 삶의 태도는 그의 죽음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죽었을 때 한 달이 지난 뒤에서 주검이 겨우 발견되어 간신히 땅에 묻힐 수 있었단다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 개인전 소개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그의 탈정치, 탈이념의 경지, 또는 탈의식화의 태도를 과거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비판적 성향의 이면으로 본다면, 그 안에는 아직도 변혁의 의지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변방과 타자에 대한 이국주의적 관심과 자기를 주변화 시키는 내면적 오리엔탈리즘의 위험, 국제화를 위한 지역주의와 전통주의의 함정을 우려하며, 대서사보다는 소서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틈새에 주목한다. 정체성을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정체성을 내용화 하고 한국적인 모티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성을 주제화하는 그의 작업은 바로 동양적 개념의 여백, 파격, 비결정성과 상통하는 틈새의 미학에 연유하는 것이다.

박이소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2003 작고 1년 전

각목의 한 부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26개국 국가관과 국제관 건물모형이 새겨져 있다

"박이소의 작품은 허접한 물건과 속화된 언어를 외양으로 했지만 그런 것들의 힘을 빌려 합리성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의 인식에 즐거운 바람을 불어넣는다(강수미 해설)" 박이소 작품의 절정은 이렇게 "덜 만든 것 썰렁한 것이 좋다"와 같은 블랙유머에 있다


그는 홍익대 뉴욕 프랫 인스티큐드 정형적인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제도교육적 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그는 제도화된 규범을 파괴하는 성향을 보인다. 액자 없는 미술작품과 벽이 없는 미술관을 지향한 것 같다.

<시대착오적인데 가장 앞서는 작가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외전시 그가 뉴욕에서 귀국할 때 이 무거운 작품을 가지고 왔다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네요 이 작품은 없어졌기에 다시 이번에 재현하다.

[참고]박이소는 중고시절 교련받기 싫어 중퇴를 하고 검정고시 시험을 보고 홍대에 진학했다 그의 체질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박이소는 나보다 4년 아래이지만 어쨌든 나와 같은 세대다 나는 당시에 그런 생각을 전혀 못했다 나같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학생은 그렇게 못하다

그의 작품 중에는 남북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작품도 있다. 그것이 바로 남북이 하나 되는 부적을 그린 그림이다.

작품 전시하는 도움을 주는 전문업체 직원들 어느 것이 작품이고 어느 것이 작품이 아닌지 구별하기 힘들다고 투덜거린다고 그럴만 하다.

박이소의 북두칠성(상단)

<오늘날 누가 미술을 결정하는가를 항상 묻는다 그는 무엇과 어떻게 보다 왜를 묻는 작가인지 모른다> 멀리 북두칠성이 보인다 그 앞에 있는 것이 뭔지 설명을 듣지를 못하다 나는 정말 산만의 극치라 문제가 많다

"[...] 마지막으로 나는, 박이소의 미술이 자본의 스펙터클과 경제적 합리성이 매순간 첨단을 갱신해가는 20세기에서 21세기 한국 문화예술의 하늘에 난데없이 나타났던 별이라고, 우리가 헤아리지 못한 가운데 여전히 담담하게 떠 있는 북두칠성의 여덟 번째 별, '북두팔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영철

박이소 작품 중에서 가장 Brooklyn적인 작품은 바로 이거다. 동성애가 나오지 않았지만 뉴욕 근처의 하급문화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마이너리티이고 오리엔탈이고 이그조틱이다. 그가 기획전은 역시 <이민전> 같은 사회적 소수자 가 주인공이 되는 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박이소는 숫자가 들어가는 작품 제목이 많은데 이것은 팔방미인도다. 그리고 한 평이라는 작품도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1평은 사람이 혼자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만약에 20평이라고 하면 20명이 누울 수 있다는 의미로 한국인의 상상력에서 그 크기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수치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그는 한국작가로서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문화인류학적인 접근방식이다.

이번 전시를 기회로 박이소 작품 전집 목록도 출간예정이다.

내가 박이소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번역한 책을 읽고 그와 더 가까워졌다]

박이소는 <문화번역가>라는 별명도 붙어있다. 그는 번역가로도 큰 역할을 했는데 내가 읽어본 미술책 중 최고는 바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이다. 박이소 번역으로 나왔다. 그런데 사실 그는 현대작품 중에 근대성(작가 전지적 관점의 세계관)에 근거한 작품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박이소는 그런 작품을 보고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했을 것 같다.

MIN JOONG ART A new cultural movement from Korea 1988 Artists Space 55 Walker Street New York NY 10013 September 29 – November 5, 1988

뉴욕에서 한국 민중미술전 열렸을 때 전시장 내부 모습. 그는 민중적이라기보다는 민중친화적이다

박이소는 80년대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민중미술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한국의 민중미술을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MIN JOONG ART A new cultural movement from Korea 1988 당시 민중은 한국문화의 주체성 내지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기호 같은 코드였다.

박이소 기획한 전시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1993)> Across the Pacific: Contemporary Korean Art and Korean American Art] Queens Museum launches Major Exhibit of Koreans Artists work

이런 미술행사를 통해 현대미술사의 이사(moving)시키다 미국미술과 한국미술의 상호교환하다. 그런 면에서 문화번역가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전시는 미국에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기획전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1993)] 1993년 뉴욕 퀸즈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작가 12명(손장섭 김봉준 박불똥 이종구 김홍주 이수경 최정화 윤석남 김호식 김봉준, 최진욱 안규철 등등)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 24명(박이소 마이클 주 이건 김영 김형수 김진수 민영순 등등) 총 36명의 작품이 소개되는 전시다. 그러니까 한국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 조인트 전시인 셈인데 그런 발상 자체가 당시로는 독특했다 뉴욕전시 이영철 과 박이소 기획 당시 <1993년 10월 18일 세계일보 기사>

박이소가 쓴 '태평양을 건너서(2001.10.15-2004.1.9)' 2004년 4월 미술세계

박이소는 당시 지식인 중에서 드물게 인류학적인 관점을 보이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문화정체성논의(Identity Polics)는 물론이고 문화접변이라는 인류학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다 상당히 많은 독서량을 가진 작가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진가는 사실 그림보다 일반인들이 볼 때 그의 글쓰기에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다

90년대 박이소의 글을 읽을 때마다 60년대의 김수영시인의 글이 생각난다. 30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질적으로 비슷하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식만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박이소는 이영철 평론가가 기획한 태평양을 건너서라는 리뷰를 썼다 이 글에서 당시 이 전시에 대해서 뉴욕타임스가 인용한 기사를 소개하기도 한다 "이런 제한된 주제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의 대답이 놀랍도록 다양했으며 정치적으로 불리곤 하는 카테고리가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가를 제시했다(NY)" 박이소는 이 글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어쨌든 이 태평양을 건너서전은 그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의 방법에 있어서도 한국미술이 해외에 소개하는데 있어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전시였다 이번 전시는 94.8.23-9.23까지 서울에서 다시 열리게 된다"


이민전 등

상당히 많은 자료들이 이번 전시를 계기로 시각적 연대기는 물론 자료화되는 계기를 마련하다. 앞으로 도록이 나오고 <현실문화연구>에서 3권의 전집도 또한 나온다고 한다.

박이소가 뉴욕에서 서울로 올 때 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는데 아래 서랍장을 소중히 챙겼다고 한다. 그는 생존에 200여개의 재즈 테이프를 직접 편집하고 만들기도 했다. 노래 솜씨도 좋았던 모양이다. Honesty를 번역해 직접 부른 노래도 있다.

<오늘날 누가 미술을 결정하는가를 항상 묻는다. 그는 무엇과 어떻게 보다 왜를 묻는 작가인지 모른다> 멀리 북두칠성이 보인다. 그 앞에 있는 것이 뭔지 설명을 듣지를 못하다 나는 정말 산만의 극치라 문제가 많다.

<그의 작품은 가끔 무의식적인 암호 해득을 요구한다>

박이소 오브제작품

[박이소추모글] 미술가 '박모'의 쓸쓸한 죽음 [2004.06.17] - 한겨레 노형석 기자

박이소(본명 박철호) 1990년대 '박모'란 필명으로 국내 미술판에 구미 포스트모던 예술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했으며, 요사이 청년 작가들에게 개념미술 열풍을 몰고 온 비주류 스타작가의 이름이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출품하며 입지를 다진 듯했던 그가 지난 4월26일 새벽 심장마비로 외롭게 숨졌다는 사실이 한달여 지난 주말에야 전해진 것이다. 46살에 맞은 작가의 죽음은 다분히 극적이다. 유족들의 말을 들어보면 고인은 서울 청담동 누나 집 2층 작업실에서 평소 좋아하던 재즈 음반과 포도주 병이 놓인 탁자 옆 소파에 잠자듯 앉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주검은 화장했으나, 유골은 장지를 구하지 못해 지난 6월2일에야 경기도 파주시 기독교 묘지 안 가족묘에 안장됐다. 고인이 평소 유족들에게 미술계쪽 얘기를 하지 않아 컴퓨터 메일을 정리하다 뒤늦게 미술인들의 주소를 보고 연락했다는 저간의 사정이 미술판을 우울하게 했다. 비보를 접한 동료 작가와 기획자들은 6일 낮 파주 기독교 공원묘지에 있는 고인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우는 추모식으로 예의를 차렸다. 추모식에는 작가 안규철·김범씨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구호처럼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순적인 반응을 통해 사회의 지평을 넓히는 그의 미술세계는 이후 세대에게 영향을 주면서 한국현대미술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물을 들인다.

우리는 행복해요 정말 행복한 사람은 이런 표어를 절대 쓰지 않는다

박이소의 대표작 우리는 행복해요 이 작품은 그의 유작이기도 하다. 사후 2004년 부산 비엔날레 미국 LACMA 미국 휴스턴 미술관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작가가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그는 작가라고 할 수 없겠지요. 이 작품은 북한에서 쓰는 선전가(Propagander)를 역으로 활용해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를 묻고 있는지 모른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입구

작가 박이소 Bahc Yiso(1957-2004) 소개 -미술관자료

박이소(1957~2004)의 활동은 미국 유학길에 오른 1982년과 1995년 귀국 시점을 기준으로 뉴욕 시기와 서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한 후 작가는 ‘박모’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과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펼쳐나갔다. 특히 브루클린 지역에서 실험적 대안공간인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설립한 후 뉴욕 미술계에서 소외된 이민자,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젊은 리더로서 주목 받았다. 또한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미국 미술계의 최신동향과 이론적 흐름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민중미술》(1988), 《태평양을 건너서》(1993-1994) 등 한국미술을 뉴욕에 소개하는 주요 전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박이소 작품

1995년 신설된 SADI(삼성디자인교육원)의 교수직을 맡아 귀국한 후에는 ‘박이소’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후 새로운 방식의 미술교육을 정립하고자 애쓰는 한편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광주비엔날레》(1997), 《타이베이 비엔날레》(1998), 《도시와 영상-의식주》(1998),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01) 등 국내외 주요 미술전시에 참여하였고 2002년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초대받는 등 국내외 미술계에서 활약하던 중 2004년 돌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큰 슬픔과 아쉬움을 남겼다. 그의 사후 2006년 로댕 갤러리의 회고전 이래 2011년과 2014년도에 아트선재에서 전시가 열렸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이다.

박이소 작품 무제(뒤돌아보지 말라) "삶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깨우치기 위해"

특히 1980년대 이후 순수미술과 참여미술 진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국내 미술계의 상황에서 박이소가 선보인 경계의 미술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무심한 듯 거리를 두면서도 미묘한 지점에서 강렬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동시대 미술현장에서 두드러져 보일 정도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 본질적인 차이는 질문의 차이일 수도 있다. 즉 지금까지 “어떻게 무엇을” 그릴 것인가의 질문으로부터 애초에 “왜” 그리는가의 질문으로 초점을 옮겨간 것이다. 작품 활동과 함께 작가 박이소가 보여준 다양한 활동들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고자 노력한 궤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박이소가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의 미술세계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 궤적이 조금이라도 더 뚜렷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본명 박철호(Park Chul-ho), 미국에서 박모(Bahc Mo)로 활동, 이후 한국에서 박이소(Bahc Yiso)로 개명. 1957 6월 23일 부산출생 2004 4월 26일 청담동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박이소 는 민중미술에서 흔히 나오는 밥 사상을 이런 밥통으로 그리다

[학력] 1985 프랫 인스티튜트 회화과 졸업(Pratt Institute New York - M.F.A. in Painting) 1981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졸업(Hong-ik University, Korea - B.F.A. in Painting)

[개인전(Solo Exhibitions)] 2014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2011 《박이소-개념의 여정》,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2006 《탈속의 코메디》, 로댕 갤러리, 서울, 한국
2005 《팔라야바다 박이소 추모전》, UC 어바인 대학 아트 갤러리, 캘리포니아 2002 《박이소 개인전》, 갤러리현대, 서울, 한국 2001 《박이소 개인전》, 대안공간 풀, 서울, 한국 2000 《New Works: 00.3》, 아트페이스(ArtPace), 샌 안토니오, 텍사스, 미국 1995 《박모(Mo Bahc) 개인전》, 금호미술관 & 샘터화랑, 서울, 한국 1990 《미국말하기(Speak American)》, 브롱스 미술관(Bronx Museum of Art), 뉴욕, 미국

[2011년 설문4] 2000년 이후 작고한 미술인 중 한국미술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은? * 여기서 미술가, 화상, 이론가, 컬렉터, 행정가 등 모두 포함 -김달진 연구소

2011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박이소 드로잉전 작품과 그의 사진. 그는 당신 문화번역가로 당대 후배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으나 말년에 단식 포퍼먼스 등 기행으로 46세에 운명했다 ⓒ 아트선재센터

이 설문에는 1위 백남준(미술가:45명), 2위 이경성(평론가:36명), 3위 박이소(미술가:23명), 4위 김창실(화상:20명), 5위 이원일(큐레이터:8명) 등이다. 백남준(1932-2006)과 박이소(1957-2004)는 미술가로는 최고작가로소개되었다.

폭염 속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은 그 초록빛이 장엄(splendid)하다

[박이소가 남긴 말] -미술을 고상하고 심각한 메시지 전달로만 보려 하지 말고 재미있게 살자고 하는 짓으로 또는 시각적인 농담을도 볼 수 있음을 감안해 주면 좋겠다 -박이소는 작품을 보다 보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풍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인간이 가장 고귀해지는 순간이 고차원의 유머를 구사하고 이해하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유머가 우스갯소리나 단어의 조합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듯 합니다 가만히 있는 물건이나 미술작품도 시각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관객이 내 작품을 명료하게 이해해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뒤죽박죽인 느낌과 애증의 양면성, 주저함이나 일관성 없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국 후 박이소는 한국사회의 날림성과 기저가 없는 문화적 배경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기도 했다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중단하지 않았다

-정직성은 터무니없이 중요한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래 정직성 어니스트 좋아한다. 정직성 정말 외로운 말 더러운 세상에서 너무 듣기 힘든 말이다 -백수건달이면서 숨쉬기 놀이 집보기 놀리 배추벌레 놀이하면서 미술을 취미활동으로 하고 살면 좋겠다

[니키 드 생팔展_마즈다 컬렉션: 세계인의 영혼에 예술적 총격을 가한 현대미술의 거장] -한가람미술관 제1전시실, 제2전시실에서 2018년 06월 30일(토)-2018년 09월 25일(화)까지

전엔 '구글'에서 한번에 여길 들어왔는데 지금은 안 된다. 그 이유가 뭔지 이젠 더 세게 차단(?)

파리퐁피두센터 앞에 설치된 생팡의 설치미술

1961년에 발표한 <사격회화 shooting painting>로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자유로운 기쁨의 에너지와 현실을 향한 날카로운 통찰을 동시에 담은 그녀의 작품은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파리에서 한국관광객들에게 사진 촬영장소로 가장 사랑받는 장소 중 하나인 퐁피두센터의 조각분수공원(스트라빈스키 분수)를 만든 작가이다.

파리 퐁피두센터 앞에 설치된 생팡의 설치미술

프랑스에서 태어난 '니키 드 생팔'은 유년시절을 거의 미국에서 보냈고, 자연스럽게 미국과 프랑스 추상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1961년 <사격회화 shooting painting>를 통해 현대미술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사격회화>는, 물감이 담긴 깡통이나 봉지를 석고화면에 부착해 만든, 아상블라주 작품에 실제로 총을 쏘는 작업이다. 권력에 대한 저항과 여성으로서의 개인적 상처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회화, 조각 그리고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선구적이고 도발적인 예로서 미술사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파리 퐁피두센터 앞에 설치된 생팡의 설치미술

그 후 니키 드 생팔은 풍만한 체형의 여인을 온갖 포즈로 다양하게 표현한 <나나(Nana)> 연작 작업에 주력했다. 화려한 색채와 활력 넘치는 이미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나나> 작품들은 전 세계 곳곳에 설치되어 모성과 여성성의 상징으로 사랑받고 있다.

파리 퐁피두센터 앞에 설치된 생팡의 설치미술

이외에도 예술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했던 니키는 197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사망할 때까지 오랜 세월동안 작업해서, 일생의 꿈이었던 <타로공원(The Tarot Garden)>이라는 기념비적인 조각공원을 남겼다. 신화와 전설들이 혼합된 상상력으로 지어진 타로 공원은 환상적인 문화공간으로 대중들에게 치유와 기쁨을 제공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요코 마즈다 시즈에(Yoko Masuda Shizue)의 소장품이 소개된다. 요코 마즈다 시즈에 는 1980년대부터 니키와 교류했고 일본 도치기 현에서 니키미술관을 창립해서 운영했었던 소장가이다. 2015년 도쿄 국립신미술관에서 일본 사상 최대 규모의 <니키 드 생팔 회고전>이 개최되었는데, 전시된 작품들 중 약 90%가 요코 마즈다 시즈에의 소장품이었다.

마즈다컬렉션의 대표작품 127점이 전시되는 이번 전시회는 니키 드 생팔의 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니키 드 생팔 회고전_누가 괴물인가? 당신인가, 나인가?]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http://bit.ly/i1dYJ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마이뉴스 2006년 11월 21일 김형순 기사 "1961년 나는 아버지, 모든 남자, 작은 남자, 큰 남자, 상류층 남자, 뚱뚱한 남자, 오빠, 사회, 교회, 학교, 가족, 어머니까지 그리고 다시 아버지와 모든 남자에게 사격을 가했다" -니키 드 생팔 "In 1961 I shot my father, every man, a little man, a big man, an upscale man, a fat man, my brother, my society, my church, my school, my family, -사격회화 shooting painting

과천에 생팔 작품

2019년 런던에 안 갈 수 없게 되었네요 이수경 큐레이터 기획
[NAM JUNE PAIK: THE FUTURE IS NOW] 17 OCTOBER 2019–9 FEBRUARY 2020 at TATE MODERN EXHIBITION * https://www.tate.org.uk/whats-on/tate-modern/exhibition/nam-june-paik-future-now

백남준 TV 정원

이 비디오 개척자의 주요 회고전: Tate Modern과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가 주관 / 백남준은 시각 예술에 대한 대중 매체와 신기술의 중요성을 예견 한 몽상가였다. 그의 실험적이고 혁신적이며 장난스럽게 재미있는 작품은 현재까지 미술과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주요 회고전은 다양한 분야의 미래에 대한 백남준의 비전을 반영하여 소리와 광경의 매혹적인 풍경이 될 것이다. 이 제품은 오래된 TV 화면으로 제작 된 로봇부터 혁신적인 비디오 작품, 눈부신 Sistine Chapel 1993과 같은 모든 크기의 설치물에 이르기까지 50 년의 경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전시회는 또한 Moorman, John Cage, Merce Cunningham, Joseph Beuys 및 Fluxus를 포함한 전위 예술가, 음악가 및 안무가와의 공동 작업 및 교류를 살펴볼 것입니다. 백남준의 글로벌 궤적이 어떻게 급진적이고 최첨단의 예술 관행을 개척하고 확장시킨 초 국가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Nam June Paik_A major retrospective of this pioneer of video TV Garden 1974-7 (2002)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Germany) © Estate of Nam June Paik Photo: Tate (Roger Sinek)

Nam June Paik was a visionary artist who foresaw the importance of mass media and new technology on the visual arts. His experimental, innovative, yet playfully entertaining work continues to be a major influence on art and culture to this day.

This major retrospective will be a mesmerising riot of sounds and sights, reflecting Paik’s vision of a multidisciplinary future. It will feature work from throughout his five-decade career – from robots made from old TV screens, to his innovative video works and all-encompassing room-sized installations such as the dazzling Sistine Chapel 1993.


The exhibition will also look at his collaborations and exchanges with avant-garde artists, musicians and choreographers, including Charlotte Moorman, John Cage, Merce Cunningham, Joseph Beuys and Fluxus. It will demonstrate how Paik's global trajectory shaped a transnational network of artists that pioneered and expanded radical and cutting-edge art practice. Organised by Tate Modern and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Nam June Paik: The Future is Now is presented in The Eyal Ofer Galleries.

[관련뉴스] 이 큐레이터는 2019년 10월 17일 개막하는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 미래가 지금이다(Nam June Paik: The Future is Now)’전을 맡고 있다. 2012년부터 연구를 시작한 전시는 ‘이모지’를 연상케 하는 픽토그램 등 인터넷 시대를 예견한 백남준(1932~2006)의 선구자적 성격을 조명한다. “백남준은 일본 독일 미국 그리고 한국 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전위성을 폭발시킨 작가입니다. 그의 세계적 궤적을 보여주기 위해 테이트모던을 포함해 유럽, 미주, 아시아 투어로 5개 미술관에서 선보일 예정” http://news.donga.com/3/all/20180802/91343594/1

['다다익선'이 워싱턴국립미술관에 있다면 저렇게 내버려둘까]


미국 워싱턴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큐레이터와 미술보전 전문가와 연구진은 10년이 넘게 백남준의 남긴 먼지나 다름 없는 쓰레기 같은 소품 하나라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백남준 아카이브실에 잘 보관하고 그걸 시대 별로 분류하고 연구하고 정리하면서 아카이브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아직도 10%정도 밖에는 정리를 못했다고 하면서 지금도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백남준이라는 작가에 대한 태도와 높은 존경심은 우리하고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


미국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백남준 작품 백남준은 이 작품을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작품명 전자초고속도로[미국전역](Electronic Super Highway) 1995년 작품.
Nam June Paik,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 Alaska, Hawaii (detail), 1995, fifty-one-channel video installation (including one closed-circuit television feed), custom electronics, neon lighting, steel and wood; color, sound,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artist.

그런데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은 소품도 아닌 대규모의 다다익선이라는 세계미술사 유일무이한 작품에 대해 이렇게 홀대할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그것을 예술품이 아니고 설치물로 분류하다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만약 워싱턴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에 백남준이 기부한 '전자초고속도로(미국전역)'작품이 고장이 났다면 우리처럼 이렇게 내버려둘까. 게다가 국립현대미술관 영혼과 심장과 같은 작품이 아닌가 이런 작품이 죽으면 국립현대미술관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나리자가 없는 루브르미술관 같은 것이다[맨아래 내용 참고]

백남준의 먼지 묻은 유품 하나도 잘 보관하는 미국에 비해 우리는 백남준 작품을 너무나 소홀히 한다

미국 워싱턴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연구진은 백남준이 남긴 작품을 만들기 위한 유품을 보물처럼 취급하다

[사진설명] Staffs members catalog object at Nam June Paik Archive at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Washington DC

백남준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 소호거리 머서 스트리트 110번지에 있는 백남준의 작품을 하기 위해서 모아둔 모든 오브제 물건 낡은 TV 등 7트럭을 백남준 상속자 켄의 허락을 받아 미국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아카이브로 옮겨갔다 우리나라라면 아마도 버렸을 것 같은데

이 골동품 같은 물건과 여러 TV로 과연 무슨 작업을 하려고 한 것인가 이 물건들은 지금 미국 워싱턴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연구진에 의해서 분류되고 연구되고 있다 현재도 이 프로젝트는 계속되고 있는데 지난 10주년 때 백남준 회고전을 하면서 그 정리된 아카이브가 10분의 1정도(?) 공개된 것으로 안다. Photo Source:Nam June Pailk Global Visionary 144

[사진설명] Object storage at the Nam June Paik Archive at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Washington DC

미국 워싱턴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연구진에 의해서 재료가 연도확인 소재와 주제 등 분류되고 연구된 백남준 아카이브 카타로그(Items on Paper)가 완성되면 바로 여기 워싱턴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백남준 아카이브 캐비넷에 보관된다 이 작업을 앞으로 10년이 지나야 끝날지 아직 잘 모른다 이런 아카이브 관리하는데 돈이 엄청 많이 들 것 같다. Photo Source:Nam June Paik Global Visionary 178

[2012년 11월 23일 13:30-17:30 국립현대미술관 소강당에서 열린 다다익선 학술대회]

백남준 이상향:세계를 보자기로 싸듯이 연결시키다Lapping around the world

이명박 시절인 2012년 11월 23일 13:30-17:30 국립현대미술관 소강당에서 다다익선 보존 어떻게 할 것인가(How to Conserve The More, the Better)라는 학술대화가 열렸다. 발표자로 [1] 국현 '장업' 학예연구2팀장 [2] 테이트 '핍 로렌슨' 소중품 연구팀장 [3] 퐁피두 '크리스틴 반 아쉬' 뉴미디어 학예실장 [4] '이정성' 다다익션 테크니션이 참가했다

-그런데 이 학술대회의 분위기를 보면 사실 다다익선 보전 가치를 희석화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자 이정성 선생도 반박했지만 주최 측에서 간절한 설득에 못 이겨 다시 참가하게 되었다.

-성능이 아주 좋다는 LG 냉장고도 20년 쓰면 고장난다 다다익선도 전자아트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장이 난다 그러니 언제라도 고쳐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다다익선 2003년 3월 17일부터 5월 2일 사이에 리모델링이 되었고 그해 5월 5일 어린이날 공개되었다 2018-2003년 15년이 지났으니 이제 업그레이드 할 때가 됐다

-다다익선은 5천 년 대한민국 역사를 응축해 보이는 상징물이자 시금석 같은 중요한 작품이다 개천절이 주제이고 그 주인공은 스키타이 단군이다

-이 작품은 선사시대로까지 올라간다 영국의 스톤헨지와 불국사의 석가탑과도 관련이 있고 1982년 휘트니 미술관의 비라미디와 1984년 도쿄 메트릭스 등과 관계가 있고 이것은 1995년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있는 전자초고속도로(미국전역)와도 연결되는 작품이다. 하긴 한국사회를 국제사회에 정식으로 데뷔시킨 88올림픽이지만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다. 그래서 다다익선은 서울올림픽 개막식(1988.9.17) 이틀 전에 완성되었다

지난 2월부터 일부 고장으로 작동이 중지된 다다익선

다다익선과 같은 작품을 우리가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벅찬 일이다. 최고의 작품이기에 그 관리비도 가장 많이 들고 매우 까다롭고 매우 예민하고 첨단의 기술이 요구된다. 그 규모 또한 얼마나 대단한가. 백남준은 항상 이렇게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예술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다다익선이 불이 나가니 정말 위대한 작품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문제는 이 작품을 대신할 작품이 지구상에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제대로 작동시키면 국립현대미술관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백남준은 기계도 사람으로 봤다. 전자아트는 기계지만 그렇기에 이런 작품은 사람처럼 재정비할 수 있는 안식년을 주면 어떨까 싶다.


백남준의 프랑스문화대사 역할을 하는 기상천외한 퍼포먼스 백남준은 프랑스사람보다 프랑스문화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었다 1989년 그의 프랑스 혁명 200주년 프랑스로부터 의뢰 받은 작품에서 프랑스인도 모르는 프랑스 혁명의 주역 중 여성 혁명가 <올랭프 드 구즈 Olympe de Gouges>를 발굴하여 프랑스인들을 놀라게 한다

프랑스는 20세기 에펠탑으로 먹고살고 21세기는 에펠탑을 근대화 현대화한 퐁피두로 먹고 산다. 퐁피두는 우파대통령이 제안이라니 놀랍다. 백남준은 퐁피두를 광고하는 셔먼 굿을 벌리면서 대중을 읽을 줄 알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안목을 보인다. 피아노 넥타이며 TV인경 지구본 장식 그리고 머리에 퐁피두 미니아처가 융복합 시대의 글로벌 아트를 상징한다 백남준은 1984년 1월 1일 퐁피두에서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총지휘했지요 김홍희관장이 그것 다 옆에서 보고 놀란단다. 그의 몸짓은 음악전공자답게 매우 리듬감과 율동감이 넘친다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 개인전_'Spaces of Enlightenment'] 국제갤러리 2관(K2)]에서 2018년 7월 26일(목)-8월 26일(일)까지 사진제공 Courtesy the artist and Kukje


국제갤러리는 현대 사진의 지평을 넓혀온 세계적인 작가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는 독일 뒤셀도르프 미대출신으로 그의 개인전을 7 월 26 일부터 8 월 26 일까지 연다 국내에서 네 번째로 열리는 이번 개인전이다

지난 50 여 년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공간과 인간을 사유해 온 칸디다 회퍼의 작품들 중에서도 1990 년대 말부터 근래까지 촬영된 ‘공연장(Theatre, Opera House)’, ‘도서관(Library)’, ‘미술관(Museum, Collection)’ 등 특정 기관의 공간에 주목한다.

칸디다 회퍼 작품

이번 전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의 내부 공간은 다양한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동시에 모두 인간의 ‘깨달음을 가능하게 한 장소다. 소위 18세기 서구 계몽주의 사상으로 알려진 'Enlightenment'는 인간을 포함해 자연, 사회, 정치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보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근대철학, 정치, 문학, 건축, 예술 등 사회 전반에 폭 넓은 영향을 미친 계몽사상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힘, 즉 이성의 빛에서 출발한다. ‘Enlightened(깨우친, 계몽된, 개화된)’라는 단어의 의미와 더불어 불교의 돈오(頓悟)로 해석되거나 빛으로 시각언어로 ‘깨달음’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연역적사고와 경험을 통한 인식의 변화, 일종의 ‘깨어나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속 공간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인식의 변화를 일깨운 사회적 장소로 읽힌다.

[얀 올레 쉬만(Jan-Ole Schiemann) 독일작가 개인전_합성지평선(Synthetic Horizons)]

초이앤라거 갤러리 서울(종로구 팔판길 42)에서 2018년 7월 18일부터 8월 26일까지 전화 +82 10 26227 7826 seoul@choiandlager.com

쉬만 작품

이번 전시는 서울전시를 위해서 신작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가 생각하는 동양적인 요소를 가미하려고 노력했다고 그래서 일본판화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청색 바탕의 색조가 작품마다 간간히 보인다. 산수화의 먹 사용에서 흔히 보는 명암의 대조 동양화의 묘미인 농담효과를 잉크라는 재료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단다.

왼쪽 최선희 대표 오른쪽 쉬만 작가

그리고 그에게는 동시에 청색이란 디지털색깔로 보기에 동양과 고전과 서양의 디지털 요소를 동시에 담으려고 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어수선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디테일한 설계도처럼 상당히 치밀한 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단다.

쉬만(뒤셀도르프미대 졸업 후 5년 간 더 공부하다)의 키워드 만화적 요소를 자기만의 현대회화로 재해석하다 잉크처리에서 농담효과를 주어 입체적 명암의 효과를 주다 그리고 마치 그림을 보면 작곡가가 만든 악보를 보는 것처럼 매우 리듬미컬하면서 율동감이 나고 경쾌하다

전시장면

화면에 레이어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깊이와 심연까지 느끼게 한다 형상의 애매함은 관객에게 다양한 재해석을 유도하여 작업 속으로 빨려들게 하다 대조미를 통한 조형성의 효과를 높이다 추상과 구상 농담의 대조 안정감과 불안함, 유쾌함과 긴장감이 서로 오버랩되기도 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마치 전자음악을 듣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비밀은 바로 첨단의 하이테크가 다 동원되지만 결국에는 회화라는 그릇에 담아낸다 색채와 다양함과 함과 결국 빛이 입체적으로 스미는 성스러운 분위기 조차도 느껴진다 아마도 그가 쾰른 출신이라 그런 것인가 쾰른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다 하여간 그는 회화원 2차원 3차원 4차원까지 도전하는 자세를 보인다 여기서 Synthetic하다는 것은 역시 여러가지 요소를 융합하는 현대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는 삼청동 서울갤러리 숙소

초이앤라거 갤러리 공동대표(최진희+라거+최선희) 그리고 이번에 서울전에 초대받은 얀올레 작가의 부인인 칼멘(역시 화가)과 그리고 작가 얀올레 쉬만

가운데 라거 대표

초이앤라거갤러리는 2012년 야리 라거, 최선희, 최진희가 공동대표로 독일 쾰른에 연 화랑이다. 이들은 여러 나라의 국제아트페어 참여해 사업을 확장시켜 나간다.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홍콩 등 외국 갤러리와 공동기획도 한다. 독일 '쾰른'에 이어 2016년 서울 청담동에 분점을 내었고 2017년에 삼청동으로 이전

전시장을 둘러보고 잠시 이 갤러리 숙소에서 간단한 음식과 함께 아주 유쾌한 대화 시간도 나누다. 짧은 시간이지만 상당히 즐겨웠다 작가에 대한 내면의 생각까지도 엿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작가는 한국을 처음 방문 어제는 난타를 감상했다고 오늘이나 내일을 갤러리 현대에서 민화전 감상 예정이라고 한국식 식탁에 앉았지만 익숙하지 못해 발이 저려 결국 의자에 잠시 다리의 긴장을 풀다

<런던미술수업>의 저자이기도 한 최선희 대표는 2002년 영국 크리스티 인스티튜트에서 '디플로마'를 받은 후에 유럽에서 독립 기획자와 아트 컨설턴트로 활동해왔고 야리 라거는 영국 시티 대학에서 미술 경영학 석사를 받은 후 리슨 갤러리 메니저를 거쳐 초이앤라거 갤러리를 런던에서 운영해왔다.

최진희 대표

최진희 대표는 20년 간 독일에서 활동하다. 독일 뒤셀도르프 디자인대학 석사학위를 딴 이후 미술과 디자인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이들의 거점은 런던, 파리, 쾰른이다. 유럽과 한국 오가며 해외 작가를 한국에 소개하고 또한 한국작가를 유럽에 소개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현대미술프로젝트 ’apmap 2018 제주’ 개막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p) 2018 jeju_volcanic island:에이피맵 2018 제주_케닉 아일랜드] 2018.08.11.(토) ~10. 14.(일) , 오전 9시 ~ 오후 6시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일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신화역사로 15)에서 참여작가 : 김가든, 김명범, 김상진, 문연욱, 박길종, 윤하민, 이성미, 이예승, 이용주, 임승천, 정지현, 최성임, 홍범, ADHD, Bo-daa (15팀) 조각, 설치, 건축, 미디어아트 등 공항↔오설록 (151번 버스, 50분 요) 주최:아모레퍼시픽미술관, 오설록 티 문의 : 아모레퍼시픽미술관 02-6040-2345 museum@amorepacific.com(무료)

야외 공공미술 기획전《apmap 2018 jeju_volcanic island》, 10월 14일까지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에서 열린다. 현대미술가와 건축가 15팀 참여한다. ‘제주 자연’의 풍경을 재해석한 신작 15점 전시

아모레퍼시픽이 야외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apmap 2018 제주’를 10월 14일까지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일대에서 진행한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관장 전승창)이 주최한 기획전 《apmap 2018 jeju – volcanic island》는 화산섬 제주의 신비로운 용암 지형과 그 위에 뿌리내린 자연의 생명력을 현대미술 작품으로 재해석하였다.

《apmap 2018 jeju - volcanic island》는 제주의 자연을 주제로 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현대미술프로젝트다. 주상절리의 수직기둥 패턴에서 추출한 알고리즘을 적용한 이용주 작가의 <접는 집>, 용천 동굴 속 용암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ADHD 작가의 <켜>, 사려니 숲과 곶자왈이 품고 있는 시간의 층위를 표현한 홍범 작가의 <가리워진 결과 겹> 등 제주의 독특한 지형과 자연을 재해석한 현대미술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젊은 작가와 건축가 15팀은 제주 자연의 특성이 돋보이는 장소를 답사하고, 현장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신작을 제작하였다. 작품은 오설록 티뮤지엄 실내 공간에 2점, 야외 정원에 13점이 설치되었으며, 조각, 설치, 건축,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었다.

관람객들은 작가의 독특한 조형 언어로 표현된 제주의 풍경을 감상하며, 예술을 통한 쉼과 사색의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전시가 진행되는 오설록 티뮤지엄은 연간 18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문화공간이다. 오설록 티뮤지엄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제주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알리고, 일상 속에서 예술을 경험하는 특별한 시간을 선사하고자 한다.

apmap(에이피맵, amorepacific museum of art project)은 국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역량 있는 신진 작가를 발굴하고 실험적 예술 창작을 지원하여, 공공미술 활성화와 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2013년 처음 시작했다. 전시는 두 개의 파트(partⅠ,Ⅱ)로 각 4년간 전개하며, 매년 새로운 주제와 작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apmap part Ⅰ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아모레퍼시픽과 연관된 여러 장소에서 전개했다. 2013년 통합생산물류기지인 오산 ‘뷰티캠퍼스’를 시작으로, 2014년에는 제주 ‘서광 차밭’, 2015년에는 용인 기술 연구소 ‘미지움’, 2016년에는 용산 신본사 공사현장과 용산가족공원이 전시의 무대가 되었다. apmap part Ⅱ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간 제주도에서 개최된다. 장소적 특성을 반영한 현대미술작품을 통해, 국내외 많은 사람들에게 제주의 가치를 알리고 소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8월 11일부터 시작되는 이번 apmap part Ⅱ의 두 번째 기획전 《apmap 2018 jeju – volcanic island》는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을 방문하는 누구나 실내 및 야외 공간에서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이벤트와 전시 전반에 대한 정보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홈페이지(apma.amorepacific.com)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미경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아르코미술관 '순간을 영원으로' 2018.7.5-2018.9.9

가장 빨리 사라지는 비누로 가장 오래가는 조각을 새기다(사라지는 조각의 유물화)

이 세상에서 비누라는 가장 가벼운 재료로 가장 무겁고 침통하고 심오한 인류의 고민을 고전적 형식을 통해 현대인에게 절박하게 물음을 던지는 작품을 시각화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다. 이런 작품은 우리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까지 도달한 걸작이다. 비록 이런 작품이 사라진다해도 그의 시각적 각인은 사람들의 마음과 심상 속에 영원히 새겨지는 것이다. 조각이란 결국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사람들의 뇌리와 심성에 새겨지면 되는 것이 아닌가.

간이 부식되고 마모되기 이전에 그것을 영원화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일종의 농담이나 유머로 느껴질 정도 무모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실은 모든 예술가들이 극복해야 하는 가장 심오한 고민거리일 수도 있다. 신미경 작가는 바로 그런 난제를 붙들고 자신과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간을 시간으로 번역하고 변형하는 작업으로 볼 수도 있다.

공간적으로 사라져도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조각개념을 확장하고 그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제친 전시다. 다시 말해 공간 속에 시간성의 가시화와 시각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공간 속에 시간을 재맥락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 멎어버린 조각의 한계성을 넘어 현대조각의 변이성 가변성 유쾌함 유연함을 잘 보여준다. 그런 개념을 통해 우리시대의 정신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암시하고 있다.

고전 형식의 궁전 속에 우리 시대의 신화를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다시 파내다. 박물관 죽은 유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진행되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다시 퍼내다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비누로 만들지 않는 작품 신자유주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군상들 그 리얼함과 처참함 그럼에도 이 세상에 인간만큼 아름다움이 없다는 보다 따뜻한 시선도 동시에 담겨 있다. 우리가 이들에게 작은 용기와 희망이라도 불어넣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걸 비누로 만든 것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시각적 착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정도면 예술이다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다. 정말 현대인과 함께 숨쉬는 유물이 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품위 있고 사치스럽고 고귀한 청화백자가 이렇게 비누로 다시 빚어졌는데 그런 방식의 기발함에 일단 속이 확 뚫린다. 그런 방식은 우리가 초긴장 사회 속에 살면서 뭉친 몸과 무거운 마음을 풀어주는 가장 가벼운 존재의 유쾌함과 같은 방식이라 더욱 좋다. 이런 작품이 나오기까지 작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참으로 고단하겠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너무나 흐뭇하고 풍성하고 고결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관객이 똑 같은 작품을 집에 가져갔다가 6개월 후 다시 전시장으로 가져왔을 때 그 작품은 다 모양이 다르다. 작품을 통해서 개인이 경험한 시간과 공공의 장소에서 새롭게 전시됨으로써 조각이라는 작품이 유물에서 해방된다.

관객을 위한 서비스 작품에 대한 해설에 나선 신미경 작가 그는 조각예술에서 재료의 독창성으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오늘 그녀의 패션은 고전과 현대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조각품 같다.

신미경 작가 직접 작품해설에 나서다

공간예술에 시간성의 고체화를 추구하고 있다. 가장 고전적인 공간에서 가장 현대적인 시간을 이야기하다.

전시기획자와 미술평론가의 잔잔한 대화 이렇게 전시장은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것을 소통하는 최적의 공간이다.

사실 전시란 일상에서 부족한 축제의 확장을 위한 몸부림이다 In fact, exhibitions are a struggle for the expansion of festivals that are lacking in everyday life)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 300 롯데월드타워 7층 뮤지엄]


홍인숙 전시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독창적인 초상 회화 세계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카츠 스타일’ 전시가 롯데 뮤지움에서 열리고 있다

나도 여기 로비는 처음이다 멀리 석촌호수가 보이는 롯데 뮤지엄을 뉴욕의 모마를 연상시킨다

[현대초상회화의 거장 ‘알렉스 카츠(Alex Katz)’ Models & Dancers : 아름다운 그대에게]_아시아 최초 대규모 전시 개최] 롯데뮤지엄: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 300 롯데월드타워 7층에서 2018.04.25(수)-08.26(일)까지
<수정중> [아래 미술관 자료]

전시장입구

전시소개코너

[작가소개]

아래 사진 알렉스 카츠 (Alex Katz) 192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알렉스 카츠는 시와 예술에 많은 열정을 갖고 있는 러시아계 부모님 밑에서 성장했다. 1946년 맨해턴에 위치한 쿠퍼 유니온 미술대학에 진학한 카츠는 본격적으로 회화를 수학 하면서 당시의 미술이론과 기법을 탐구했다. 1948년 여름, 카츠는 메인 주에 위치한 스코히건 대학에서 진행된 야외 풍경화 수업에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깨닫고 그의 삶을 예술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1954년 알렉스 카츠는 뉴욕의 로코 갤러리(Roko Gallery)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카츠는 시인 프랑크 오하라(Frank O’Hara )를 비롯한 유명 화가와 문학가 등 문화계 인사들과 예술적 교감을 쌓으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Leora, 2003, Charcoal on paper, 40.6×58.4cm(16×23 in)

1950년대 후반 카츠는 사실주의적인 회화에 매료되었고 본격적으로 초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카츠는 자신의 부인 아다(Ada)와 가족에서 시작하여 화가, 시인, 무용가, 패션모델 등의 초상 작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뉴욕적이고 우아하며 세련된 인물들을 보여주는 화가로 자리매김 한다.

작가는 1960년대부터 알루미늄 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컷아웃(Cut-Out)이라는 이름으로 회화와 조각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풍경화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들어 만개한 꽃들이 캔버스 전면을 뒤덮는 카츠 만의 독특한 작품들로 재탄생했다.

단색의 대형 화면에 과감하게 자리 잡은 인물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알렉스 카츠 만의 독창적인 브랜드가 되었고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예술세계는 시대를 초월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Ada] 미술관 자료 작가의 아내를 그리다

“나의 아내, 나의 뮤즈, 아다. 그녀는 피카소의 뮤즈이자 연인이었던 도라 마르를 좋아했다. 아다는 유럽적인 아름다움과 미국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진 완벽한 모델이다. 만약 그녀가 지금보다 2인치만 더 컸다면 미스 아메리카가 되었을 것이다! 아다는 어렸을 적부터 많은 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지금껏 봐온 영화들은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녀는 무용수와 같이 풍부한 제스처를 표현해주었다. 나는 진정한 행운아다!” - 알렉스 카츠

알렉스 카츠는 1951년부터 200여 건의 개인전과 500여 건의 단체전을 진행했다. 또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모마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브루클린 미술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사치 컬렉션, 테이트 미술관 등 전 세계 100곳의 국공립 미술관에 알렉스 카츠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카츠는 그의 아내 아다

그가 그녀를 만난 1957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다를 그렸다. 아다는 1928년 뉴욕 브롱스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패션과 스타일에 민감한 사람으로 성장했고 이후 브루클린 대학과 뉴욕주립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다.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을 떠난 후 뉴욕으로 돌아와 일하던 중 알렉스 카츠를 만나게 된다. 1957년 새로운 초상 회화로 세간의 주목을 받던 알렉스 카츠의 전시에서 만난 이들은 그 이듬해 결혼을 했으며 아다는 평생 동안 카츠의 뮤즈가 되었다.

카츠의 화면에서 아다는 우아함과 신비함을 가진 주인공이다. 단색의 대형 화면에 클로즈업된 인물을 배치하는 카츠만의 표현방식은 아다의 고혹적인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했다.


카츠는 60여 년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화무쌍한 아다의 모습을 계속 그림으로써 하나의 개인이 아닌 특별한 도상으로 아다 만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카츠의 초상화가 인기를 끌수록 아다는 아름다움의 표본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카츠의 화면에서 아다는 당당하게 화면을 응시하며 다양한 제스처와 패션을 보여주는 주인공이다.

2012년에 제작된 『아다』에서는 관람객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다와 뒷모습의 아다가 화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여러 공간과 시간 속의 모습을 편집한 듯한 이러한 구성은 관람객의 시선을 화면 속으로 이끌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카츠는 어떠한 특별한 설명 없이 아다의 모습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순간의 인간성을 찾아낸다. 카츠는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으로, 각기 다른 공간과 포즈들로 사실적인 변화들을 반영하여 아다를 표현하고 있으나 우리는 아다의 그림을 통해 공통적으로 우아함과 평화로움을 느낀다.

[Cut-out] '미술관' “컷 아웃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내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알렉스 카츠

평면의 금속판에 그림을 그린 뒤 윤곽을 따라 잘라낸 알렉스 카츠의 특별한 평면적 조각을 컷-아웃이라고 부른다. 공간 자체를 작품으로 유입시키는 그의 컷 아웃은 평면과 공간의 경계에 서 있다. 보통의 조각들은 3차원 공간의 부피감과 형태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카츠의 컷 아웃은 배경과 인물이라는 회화적 구성 요소를 공간으로 확대한 것으로 해석된다.

알렉스 카츠는 1959년에 최초로 컷 아웃을 제작했다. 처음에는 나무판을 모양에 따라 자르고 그 위에 캔버스를 붙여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후에는 나무판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 1960년부터 나무판 대신 더 견고한 알루미늄이나 철 등 금속판에 직접 그림을 그리면서 현재의 컷 아웃 제작 방식이 완성되었다.

작가는 컷 아웃 작업을 할 때 ‘실제 사이즈로 작업한 뒤, 예상치 못한 부분을 잘라낸다’고 말했다. 이는 카츠가 회화에서 사용한 클로즈업과 크롭 기법의 과감한 구도와 연관이 있다. 배경과 인물의 만남으로 만들어지는 그의 작품은 컷 아웃을 통해 공간으로 확대되어 관람자를 작품 속으로 유입시킨다.

“프란츠 클라인과 윌렘 드 쿠닝의 작품들은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능가하는, 더 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었다. 이 작품은 당시 예술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기준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만든 것에 무엇인가를 더 그리고 싶었다. 나의 관심은 구상미술로 향했다. 나는 ‘추상표현주의의 스케일을 가진 구상회화를 만들 것이다.’ 라고 선언했다. 나는 큰 규모의 효과를 알았다.”
–알렉스 카츠

Landscapes & Flowers

알렉스 카츠는 대학을 갓 졸업한 1950년대 초반부터 풍경과 꽃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작은 사이즈의 캔버스에 자세하고 섬세하게 꽃과 풍경을 그렸으며, 1980년대에 들어 지금과 같이 대형 캔버스에 그려내는 풍경화가 완성되었다.

카츠의 풍경화는 카츠가 작가로 성장하던 시기에 화단을 장악하고 있었던 추상표현주의와 색면추상(color-field painting), 그리고 전면회화(all over painting)와 맞닿아 있다. 카츠는 원근감을 제거하고 최대한 큰 화면의 풍경화를 제작해 관람객들을 카츠가 풍경을 본 그 순간으로 끌어들인다.

카츠는 '10:30 AM'에서 그가 본 아침 숲의 모습을 대형 캔버스에 그려나간다. 카츠는 기본적으로 숲을 경험한 그 순간을 표현하면서 빛의 방향만 남기고 세부적인 형태를 제거한다. 이 그림을 보면서 관람자는 자세히 묘사되어 있진 않지만 나무와 초록색 잎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관람자는 검은색과 초록색의 면과 점이 만들어내는 색면의 조합으로 작품을 이해하게 된다. 카츠는 색면을 통해서 구상성과 추상성이 교묘히 공존하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화면 전체에 상하좌우의 구분 없이 그려나가는 풍경화에는 초상회화와는 다른 자유로운 에너지가 담겨있다.


카츠의 꽃 그림은 전면회화와 카츠의 추상적인 풍경화 사이에 존재한다.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카츠는 어떤 꽃인지는 알 수 있지만 꽃 그 자체를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2011년에 3 개의 흰 장미 시리즈를 그렸고 2012년에 9개의 장미 연작을 그렸다. 흰색 장미를 다각도에서 보여주는 장미 시리즈는 그의 대표작 블랙 드레스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같은 주제를 연속해서 보여주며 대상의 본질을 인식시키는 카츠만의 비법은 꽃의 모습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또한 연푸른색의 배경과 흰 꽃망울, 초록잎의 모습은 색면의 조화로 관람객을 압도한다. 카츠는 200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꽃으로 화면 전체를 덮는 전면회화 스타일을 보여준다.

2001년 제작된 『Impatiens』에서 카츠는 초록색 대형 화면에 상하좌우의 구분 없이 핑크색 꽃을 가득 채웠다. 원근감이 제거된 표면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꽃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디테일을 제거한 채 하늘거리는 순간의 움직임을 다양한 모양으로 포착한 카츠의 꽃 그림은 하나의 추상적인 풍경화로 완성된다.

간단한 선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만화와도 같아서 ‘카툰’이라 불리는 이 작업은 카츠 스타일로 대표되는 간결하고도 완벽한 형태를 보여준다. 카츠는 카툰의 윤곽선을 따라 톱니바퀴 롤러를 이용해서 구멍을 낸 뒤 캔버스에 올린다. 그리고 초크나 목탄으로 카툰에 뚫린 작은 구멍을 따라 문질러 그 자국이 캔버스에 남도록 작업한다. 카툰이 캔버스의 밑그림이 되기 때문에 카툰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신중을 기해 작업한다.

Laura

알렉스 카츠는 카툰에서 나온 밑그림을 바탕으로, 드로잉, 오일 스케치 등의 이미지를 보면서 대형 화면을 채워나간다.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필요한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그가 대상을 면밀히 분석하고 객관화하는 과정으로 작용한다.

짧은 시간의 관찰과 묘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세부 모습과 전체적인 모습을 계속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특정 인물의 모습이 아닌 그 이면의 핵심적인 특성들을 찾아낸다. 개인의 개성이 돋보이는 듯하면서도 절제되고, 인물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신비감을 만들어내는 카츠 스타일의 비밀은 그의 드로잉과 카툰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머리 쪽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싶었고, 모델은 자신만의 아름다운 동작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턱 부분을 보자. 턱을 돌리면서 드러나는 잔 근육이 이렇게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움직임은 다른 방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 알렉스 카츠

이번 전시의 중심에 있는 『모델과 댄서』 시리즈는 알렉스 카츠의 조형언어가 함축되어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카츠는 1960년대부터 안무가 폴 테일러(Paul Taylor)와 20여 년간 12개가 넘는 발레 공연을 기획하며 장식적인 배경을 넘어 춤을 변화시키는 무대를 창조했다. 그는 1969년에 제작된 ‘사적인 영역(Private Domain)’ 에서 커튼으로 무대 중앙을 가리고 가운데에 원형의 구멍을 만들어 무용수들의 모습을 그 틈으로만 볼 수 있도록 하는 파격적인 무대를 고안했다.


또한 1978년 ‘의심(Diggity)’에서는 강아지 컷 아웃 조각 작품 35개를 설치하여 이 사이를 무용수들이 움직이도록 설계했다. 이처럼 카츠는 전통적인 무대구성에서 벗어나 배경이 적극적으로 무용에 개입하고 더욱 무용수들의 모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들을 계속적으로 창조했다.

공간을 제한하는 카츠의 기법은 회화를 통해서 더욱 극대화된다. 카츠는 무대의 검은색 암막을 회화에 도입하여 당시 미술주류였던 색면추상과 전면회화를 카츠만의 스타일로 변경시킨다. 또한 이러한 검은 배경은 그의 영감의 원천이었던 ‘춤’의 움직임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댄서』 시리즈로 재탄생한다.

특별히 뉴욕에서 활동하는 무용수 『로라』를 그린 일련의 작품들은 무용수의 신체와 그 움직임을 포착하는 카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카츠가 해왔던 『댄서』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는 『로라』에서, 작가는 움직임의 표현을 최소화시키고 주인공의 얼굴과 표정, 강한 목선을 클로즈업해서 강조한다.

카츠는 댄서 로라의 살성을 제거하고 얼굴, 어깨, 목선의 움직임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듯 밝게 처리해 대비효과를 극대화한다. 공간감이 소멸된 검은 배경에 ‘클로즈업-크롭’ 된 로라의 신체와 표정은 큰 화면으로 관람자를 압도하며 이내 관람자를 ‘멈춰있으나 흐르는’ 카츠의 시간 속으로 포섭해버린다.

[Black Dress]

알렉스 카츠는 『블랙 드레스』를 비롯하여 『블랙 햇 Black Hat』, 『베이딩 캡 Bathing Cap』, 『레드 밴드Red Band』 등 다수의 작품 제목을 패션 아이템으로 정했다. 간결한 세부묘사와 대비된 강렬한 패션들은 관객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다. 카츠는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모자를 쓰고 있는지를 나타내면서 패션으로 그 인물의 이미지가 결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츠는 그의 회화 작품 블랙 드레스와 같은 주제로 컷 아웃을 제작했다. 회화작품에서 블랙 드레스를 입은 아다의 모습을 연속적으로 그린 것과 달리, 컷 아웃 작품에서는 Yi, Cecily, Oona, Sharon, Ulla, Yvonne, Carmen, Ruth, Christy 등의 실제 모델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동일하게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블랙 드레스이다. 상류사회의 격식 있는 파티를 상징하는 블랙 드레스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시 여성의 우아하고 세련된 패션 아이템이다.

카츠는 장식이 배제된 디자인과 검은색의 간결한 조합만으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특별한 날 블랙 드레스로 잘 차려 입은 여성들의 모습은 카츠의 화면에서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재탄생한다.

또한 화면의 비현실적 크기와 극명한 색면의 대비는 로라 개인이 아닌 인간의 본연의 모습에 집중하게 하는 카츠 특유의 초상작업과 맞물린다. 작가는 움직임의 순간에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모습을 포착해, 움직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 보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리듬, 움직임 이면의 긴장감과 그 속의 고요함을 시각화한다.



알렉스 카츠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작업들이 필요하다. 제일 선행되는 작업은 보드지에 재빠르게 스케치한 후 유화물감을 써서 순간에 포착되는 이미지와 색채를 완성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작품은 대비적인 색면 배치로 모델 개인의 정체성을 제거하고 추상성을 담아내는 카츠의 작업방식과 연결된다. 블랙드레스는 색면과 인물의 조합, 패션의 결합을 통해 ‘카츠 스타일’을 창조한 그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후 카츠는 종이에 연필(목탄) 또는 잉크로 대상의 인상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대상의 특징과 패션, 표정, 눈동자의 방향까지 담은 스케치를 완성한 후, 다음 작업인 카툰을 시작한다. 카툰은 캔버스와 동일한 크기의 갈색 종이에 앞 세 단계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얻은 이미지들을 윤곽선만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카츠가 인물의 형태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드로잉과 카툰 작품들이 함께 전시된다. 드로잉을 통해 인물의 세부를 완성했다면, 카툰 작업을 통해서는 주제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지를 결정한다.

롯데뮤지엄은 2018년 10월 3일부터 2019년 3월 3일까지팝 아트의 살아 있는 전설, 케니 샤프의 대규모 전시를 연다 그의회화, 커스텀 조각, 설치작품 등 100여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비디오 비너스> 백남준 뒤셀도르프 대학교수 취임 첫 수업장면 1978

작년에 이 사진의 주인공인 자니스 거이(현재 독일미대교수)를 독일에 가게 되면 인터뷰을 할 수 있느냐고 요청했는데 내가 베니스에서 정신없이 취재하다 실수로 그녀가 내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이메일을 보낸 것을 내가 보지 못해 나는 거절했다고 착각을 하고 아쉽게 독일에서 인터뷰를 못했다 귀국해 보니 이메일이 온 지 1달이나 지났더라 그녀가 너무나 화가 났을 것이다 1000번미안하다고 했지만 나의 실수가 너무 컸다 다음에 한번 기회가 있으면 인터뷰 아니면 이메일 인터뷰도 괜찮다 그녀는 나와 거의 같은 세대다

[예로 그의 첫 대학수업] 백남준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제자를 존중한 그가 일방적 수업을 할 리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학생과 공동으로 현대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원시적 생명력을 되살리는 해프닝아트에 '성(性)'을 가미한 수업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원조 격인 1967년 샤먼과 함께 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도 이번에 선보이지만 10년 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보다 25살이 어린 같은 대학 제자 '자니스 거이'와 함께 백남준이 피아노를 치면 '누드비너스'가 음에 맞춰 몸을 변주하는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오감을 최대로 확장시키며 뒤틀린 우리 내면을 풀어주는 걸작이다.

이런 작품을 백남준이 교수가 되기 전부터 무척하고 싶었지만 모델료가 너무 비싸 못 하다가 드디어 수업시간을 통해 천지인이 하나이듯 자연과 인간과 음악이 하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 그의 제자 '이보 데코빅'이 이 퍼포먼스를 영상에 담았다.

백남준은 참 미친 사람이다 이렇게 작은 작품 하나 만드는데도 제작비가 얼마나 많이 드는데 이런 크고 작은 작업을 수도 없이 많이 만들었으니 말이다 정말 부잣집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작품들이다 손재주가 대단한 것은 세잔의 그림처럼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데 떨어지지 않으니 가히 놀랍다

백남준의 거대한 거북이

이이남 8폭병풍 II(2010년 작품) 시간 7분 57초

나를 최소화하고 남을 최대화하는 원효의 화쟁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을 이우환은 여백이라고 했다 그림에 여백은 없으면 그 작품은 질식사한다

이 설치작품에서 또한 중요한 점은 작품만으로 보면 안되고 이 작품의 액자라고 할 수 있는 건축적 디자인 역시 중요하다 이렇게 미디어아트와 회화에서 액자에 해당하는 주변 건축 인테리어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처음 봤다


[8폭은 그림의 8등신(8방미인)이다 한국인은 8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숫자] 어제가 아니구나 그제 친구를 만나는 중에 종로 2가에서 이이남 선생 작품을 보고 너무나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복잡하고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시 삶에 여백을 주고 마음에 풍요를 주는 디지털 작품이다 너무 반가웠다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하게 고전회화가 움직임이 주는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온몸에 전율이 온다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의 답이 되는 작품 중 하나다 특히 정신질환이 심한 스트레스 많이 받는 한국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아래는 8폭병풍 II(2010년 작품) 시간 7분 57초 부분화 8분간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지상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다 이런 작품은 사진으로 절대 감상할 수 없다 직접 보는 것이 답이다 장소 종로2가인데 서울 서린동 아트센터 나비(?) 맞나


<쉬어 가는 코너> 프랑스어의 소설(novel)은 새로운 뉴스라는 말에서 나왔다

프랑스에서 소설은 2가지: 로망(귀족용)과 노벨(서민용) 여기서 참 재미있는 것은 노벨은 뉴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서민들에게는 노벨(소설)이 좋은 뉴스였던 것이다 즉 복음이었던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바로 서민(민중)의 복음서가 된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http://omn.kr/s2yr

노벨(novel)이 뭐냐 하면 '새로운 것에 대한 짧은 이야기'란 뜻의 라틴어 노벨라(novella)에서 온 말인데, 그럼 노벨라의 원뜻은 뭐냐? '새로운 뉴스'다. 매체가 발달되지 않은 19세기엔 노벨 곧 소설이 문학성 외에도 새로운 뉴스와 사조를 전하는 금일의 매스컴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거든. 위고는 그 정점이었지. 사회적 영향력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던 거야."

[포르투갈]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포르투갈 리스본 벨렝에 있는 수도원으로, 인근에 위치한 벨렝탑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부근에 엔히크 왕자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발견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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