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고려(0918-2018) 그 찬란한 도전' :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018년 12월 04일~2019년 03월 03일까지 <작성중>
기자간담회
왕건상의 얼굴이나 몸은 ‘사람 반 불상 반’의 모습 1992년 북한의 개성 현릉(왕건릉) 옆에서 발굴된 왕건상. 나체상이지만 옷과 관, 허리띠를 입히도록 제작되었다. |노명호의 <고려태조 왕건의 동상>, 지식산업사, 2012에서 왕건상의 얼굴이나 몸은 ‘사람 반 불상 반’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018년 12월 04일~2019년 03월 03일까지/ 전시품: 이탈리아 동양예술박물관 <아미타여래도> 등 450여 점(국보 19건, 보물 33건 등) 출품 기관 [국외] 영국 영국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오사카 동양 도자미술관 등 4개국 11개 기관 [국내] 법보종찰 해인사, 삼성미술관 리움, 호림박물관, 간송미술문화재단 등 34개 기관
희랑대사
<고려 태조 왕건(고향 개경이고 지방호족출신)의 통일과정에서 정책>
1. 민족통합정책: 지역차별을 없애고 포용정책 2.민생안정정책: 세금감면, 빈민구제(흑창) 3. 문화기조정책: 불교가 중심이나 유교, 도교, 풍수지리 등을 다 수용하는 정책 / 중국의 영향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주체적 문화수용정책을 쓰다. 4.구신라(신라 마지막 경순왕 귀순) 친화정책, 후백제와는 견제정책을 쓰다
국립중앙박물관 배기동관장 인사말, 고려는 개방적 국가로 융합의 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다.
제1전시실
1100년 전인 918년에 세워진 나라다 고려사를 이 정도 수준으로 전시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예연구사들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일부 학예사들은 과로와 업무 긴장으로 병원신세를 져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 신라의 통일은 착시 통일이라고 한 프랑스 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말만 통일이지 실제로는 한반도 반토막 정도였다 밖에 안된다. 그리고 북방에는 발해국이 있었다.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는 그러나 발해국(926년)이 거란족에 의해서 망하게 된다. 고려건국(918년) 고려통일(935년) 고려가 통일하기 전 10년 전에 망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은 북방정책을 쓰게 되고 그는 3분2는 개경에서 그리고 3분의 1은 서경(평양)에 거주하면 상당히 많은 영토를 회복한 것이다 그의 재임시 어디까지 청전강과 영흥만(함경남도)까지 북진을 한 것이다
<서론> <고려는 아라비아까지 무역을 하는 물류의 나라 통일국가이니까 모든 면에서 유리했죠. 그러나 한국은 분단국가 그러니까 물류의 먹고 살아야 하는데 매우 불리하죠 이제 남북의 길이 열리면 정말 세계 제1의 물류국가가 되겠죠>개경은 동아시아에서 외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였다. 요(거란), 여진 외교관계 따른 국제무역의 장으로 다양한 물산이 유통되었고, 동서여진과 탐라에서도 사절단을 보내왔다. 이들은 고려의 국가행사인 '팔관회'에도 참여하여 고려황제의 장수를 빌며 예물을 바쳤다.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예선강변의 벽관도에는 *조운선과 장삿배들 끊임없이 배들이 드나들었다
조운선
기록상으로만 현종(1010-1031)부터 260년 간 120여회 약 5천 명의 송나라 상인들이 다녀갔다 그들이 가져온 상품은 비단-자기-약재-악기-서회-차 등 고급생활용품과 서적, 예술품 등으로 다양하다. 송나라 상인이 교역하던 동남아시아 인도 서 아시아 물건도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는 역사 중 가장 창의적인 시기 상감청자,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동북아시아 중국왕조 3번 경험과 거란족 여진족 원나라 등의 침입이 쉼 없이 있었던 격변기였지만 그 위기를 슬기롭게 잘 이겨냈다. 창의와 독립 통합 뛰어난 예술품을 유통되는 시대였다. 고려 건축 1000년이 일제 강점기였기에 그런 행사를 열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1100주년은 더욱 의의 가 깊다.
<<첫 번째 이야기>>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출발
-<포용과 통합의 왕조, 다양성과 개방성문화, 해동천자의 나라, 양성평등사회>
<황비창천 Bronze Mirror>
고려의 특징을 거친 물결로 표현하다. <황비창천 Bronze Mirror> 코리아라는 영어는 당연히 고려에서 나왔죠 고려는 고구려에 나왔고요. 고려와 고구려는 무슨 뜻인가 언덕이 너무나 수려한 나라 다시 말해서 산천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라 금수강산이라는 뜻이 되겠죠 영어로 하면 Beautiful Country가 된다.
[미술관 자료] 고려의 수도 개경 고려 해상 출신의 세운 나라답게 바깥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다. 태조 왕건은 즉위 이듬해인 919 년 송악산 남쪽 개경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고려사에 따르면 13세기 전반에 개경에는 10만 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1가구당 구성원이 5명이라고 쳐도 50만 명이어서,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피렌체 인구가 10만 이었음을 감안하면 도시의 규모와 번성을 짐작할 수 있다.
개경은 동아시아에서 외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였다. 송 거란 여진 외교관계 따른 국제무역의 장으로 다양한 물산이 유통되었고, 동서여진과 탐라에서도 사절단을 보내왔다. 이들은 고려의 국가행사인 팔관희에도 참여하여 고려황제의 장수를 빌며 예물으 바쳤다.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예선강변의 벽관도에는 조운선과 장삿배들 끊임없이 배들이 드나들었다.
기록상으로만 현종(1010-1031)부터 260년 간 120여회 약 5천면의 송나라 상인들이 다녀갔다 그들이 가져온 상품은 비단-자기-약재-악기-서회-차 등 고급생활용품과 서적, 예술품 등으로 다양하다. 송나라 상인이 고역하던 동남아시아 인도 서 아시아 물건도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는 역사 중 가장 창의적인 시기 상감청자,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동북아시아 중국왕조 3번 경험과 거란족 여진족 원나라 등의 침입이 쉼 없이 있었던 격변기였지만 그 위기를 슬기롭게 잘 이겨냈다. 창의와 독립 통합 뛰어난 예술품을 유통되는 시대였다. 고려 건축 1000년이 일제 강점기였기에 그런 행사를 열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1100주년은 더욱 의의 가 깊다
[평] 고려수도는 왜 개경인가 개경이란 Open Universal City라는 뜻이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불교는 원래 세계적이고 개방적이다 배기동 관장과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하다 고려는 모든 것은 다 받아들이려는 개방성이 있었기에 그런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나라가 더욱 역동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지론이다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것 같다 개경을 지금은 개성이라고 하죠. 아래는 개경의 지도이고 또 하나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의 모습 북한의 자료라고 한다 여기서는 사진만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배기동관장
-고려의 찬란한 기술과 디자인, 엷은 초록의 은은한 비색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 무늬 정병 고려 12세기 높이 37.5cm 국보 92호
밖으로 열려 있던 사회, 고려의 바다와 육로를 통해 드나든 다양한 물산과 교류 양상을 살펴본다. 국제도시였던 개경에는 많은 외국인이 찾아왔다. 1123년 6월 송 휘종徽宗이 보낸 200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온 서긍(徐兢 1091~1153)도 그중 하나였다. 사신 서긍은 고려에서 보낸 한 달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는 책에 담았다. 이국인의 눈으로 본 고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일여래좌상
[미술관 자료] 고려가 이룬 창의성과 독자성 그리고 통합의 성과와 뛰어난 예술성은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또 하나의 유전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우리의 중세 왕조 안에 갖춰져 있기에 “대고려”전은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의미 깊은 전시이다. 고려의 미술을 통해 고려가 이루었던 문화적 성취를 만나고 오늘날의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정체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수월관음-금동십일면천수관음상> 세계정상급 예술품
금동관음보살좌상
[고려의 여성은 집안을 대표하는 호주가 될 수 있었다 여자들 재가가 자유로운 만큼 이혼율도 상당히 높았다. 불교의 평등주의의 영향일 것이다] 당연히 여자도 집안을 대표하는 호주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권리가 보장된 만큼 부모에 대한 의무도 남자와 균등하게 졌다.” (책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여성의 권리는 남성과 거의 대등하게 보장받았다. 여성의 권리보장에 있어서 큰 변화가 온 시기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만큼, 반만년의 우리 역사를 종합해서 보았을때 오늘날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불평등한 사회는 상대적으로 근래에 도래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재상 박유는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첩을 두자는 건의를 올렸다가, 부녀자들로부터 ‘첩을 두자고 건의한 거렁뱅이 같은 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온갖 비난을 뒤집어 썼다. 결국 박유는 자신의 건의를 포기할 정도로 고려 여성들의 힘이 강력했다.
또한 고려의 여성들은 재산도 아들딸 구별 없이 상속받을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딸이 재산을 다 물려받고, 어린 아들은 옷 한 벌, 종이 한 장밖에 상속받지 못해 이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여자가 집안을 대표하는 호주가 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도 남자와 똑같이 졌다. 가령, 부모에 대한 봉양도 아들만큼 했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윤행’이라 하여 아들과 딸이 번갈아 제사를 맡아 지냈다. 이혼도 남자의 일방적인 요구가 아닌, 양방의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의 재가가 자유로운 만큼 이혼율도 상당히 높았다. 당시 송나라의 사신이 ‘고려인들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목조관음보살좌상 영국박물관
금동십일면천수관음상 고려 14세기/천수관음상
금동십일면천수관음상 고려 14세기 관음보살 중생들의 아픔과 고통을 쓰다듬어주려고 하는데 천 개의 손도 모자라는 것이다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이걸 보면 고려예술의 절정을 보는 것 같다. 두 작품은 아주 유사하지만 같은 것은 아니네요 왼쪽은 호암박물관의 소장품이고 오른쪽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중품이군요. 고려시대는 역시 여성과 모성의 중심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 <신라의 원효(일심-화쟁-무애)와 고려의 지눌(돈오점수'頓悟漸修':단계를 밟아서 차례대로 닦아[漸修] 일시에 깨닫는 것[頓悟] 다시 말해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 평등사상 또 마음이 있으면 불안하지만 마음이 없으면 즐겁다)의 다른 점(?)>*****신라의 원효 [1] 일심 사상 : 이 부분의 본문은 일심 사상 및 원효입니다.일심 사상(一心思想)은 신라의 승려인 원효(617-686)가 제창한 사상으로, 그는 일심(一心)이야말로 만물의 중요한 축이며 일심의 세계가 불국토이며 극락이라고 보았고, 또한 대승(大乘) · 불성(佛性) · 열반(涅槃) · 제9식(第九識) 등은 일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였다. 원효의 일심 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과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철저히 천명되어 있다
원효 [2] 화쟁 사상(통불교 총체불교 종합 정리) : 이 부분의 본문은 화쟁 사상 및 원효입니다. 신라의 승려인 원효(617-686)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열반경》·《반야경》·《심밀경》·《미타경》·《능가경》 등 대승 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여 그 뜻을 깨우쳤다. 이러한 깨우침을 바탕으로 원효는 불교의 가르침 전체를 한 가지 이치에 귀납하고 종합 · 정리하여 내적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 사상 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적인 불교 사상을 화쟁 사상(和諍思想)이라고 한다. 원효의 저서인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은 이러한 화쟁 사상을 잘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원효 [3] 무애 사상 : 이 부분의 본문은 무애 사상 및 원효입니다. 무애 사상(無碍思想)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에 대한 사상으로 원효(617-686)의 주장과 생활에서 잘 나타난다. 원효는 "아무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사람은 나고 죽음에서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고 말함으로써 무애 사상을 표현하였다.원효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무릇 중생의 마음은 융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철저한 자유인으로서,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一乘)과 일심(一心)을 주장했다
*****고려의 지눌 [1] 돈오점수'頓悟漸修':단계를 밟아서 차례대로 닦아[漸修] 일시에 깨닫는 것[頓悟] 다시 말해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 평등사상)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다.
고려의 지눌 [2] 무심합도 지눌(1158-1210) "무심이란 심체(心體)가 없어서 무심이 아니라, 단지 심중에 물(物)이 없음을 무심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빈 병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병 속에 물이 없음을 빈 병이라 하는 것이지 병체가 없음을 공병(空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허(虛)하되 영(靈)하며 적(寂)하지만 묘(妙)하다. 이것이 심지(心旨)이다 "마음이 있으면 불안하지만 마음이 없으면 즐겁다(苦有心 卽不安 無心卽自樂)"라고 하였다 무심(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다) 사상 원효의 무애(얽매임이 없다) 사상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금동십일면천수관음상 고려 14세기
'목조관음보살좌상' 소장 영국박물관 고려시대 여성의 파워를 엿볼 수 있다 관음이란 뭔가보고 듣는 것이다 처절한 중생들의 삶의 번뇌와 고통에 직시하고 그들의 하소연과 기막힌 사연을 들어주는 여성적 심성을 가진 부처를 말한다. 가톨릭의 마리아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생활불교> 불교가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 불교는 예술, 건축, 음식, 경제 등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전국 곳곳에 절이 세워졌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 때문에 백성들은 주로 채소를 먹고 차를 마시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의 불교가 서라벌 중심이었다면 고려의 불교는 지방자치제와 가깝다 전국에 동시다발로 성행했다. 다원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요즘의 스마트폰처럼 포터블 슬라인(Portable Shrine 불감)을 가지도 다니는 것이 유행한 것인가
고려시대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부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현하다 관음보살의 전통인지는 모르지만 매우 관능적이고 여성적 우아함으로 넘친다. 라마불교의 영향이 보인다. 아미타불 신앙이 모든 계층을 아우르며 대중적으로 성행했다. 오늘날 정토(淨土)라고 하면 아미타불의 이 서방 극락정토를 가리킬 만큼 일반인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모두가 부처라는 불교는 세계적이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남녀가 평등하게 본 것이다 연애에서도 남성보다 여성이 더 적극적일 수 있는 던 사회적 배경의 원인이 된다. 그런 면에서 에로틱한 표현이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부처상에도 영향을 미치다.
[전시구성] 고려가 주변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이룬 찬란한 미술과 그 문화적 성취를 살펴보는 이번 특별전에는 네 가지 이야기를 준비했다.
<물류의 나라 고려>, 모든 물류가 모이는 개경의 번성함을 지나면 기획 2실로 이어진다./-물류가 국력이다 고려시대는 통일국가였기에 물류가 활발했죠 원래 한국은 물류의 나라인데 분단이 되어서 허리가 잘리고 절름발이 되고 섬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외국에 나갈때 반드시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야 한다. 이제는 북한으로 길을 뚫어야 한다. 그래야 섬나라 신세를 면한다. 이제 우리는 물류국가의 그 역동성을 회복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물류와 소통은 항상 같이 가는 것이다
물류의 나라 고려
<<두 번째 이야기>> 고려 사찰로 가는 길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이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이 가운데 국교라는 큰 지지기반에서 이룩한 불교문화는 정점을 이루며 이후 1100년 동안 다방면에서 찬란한 여정을 보여줬다.
<금속활자와 인터넷과 백남준>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 비록 세계화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대단한 일이다. 서양에서는 2가지의 최대발명품이 있죠. 하나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나온 인터넷이다. 우리가 이렇게 인쇄술에서 앞섰다는 것은 정보와 지식을 중시하고 공유하려는 정신이 강했다고 본다면 우리에게는 인터넷 DNA가 강한 것 같다.
백남준이라는 작가가 인터넷과 관련성이 높은 것은 그런 기질인지 모른다. 인쇄술과 인터넷은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은 같은 것이다. 결국 인쇄술 때문에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18세기 백과사전파가 나와서 프랑스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도 인터넷 정보혁명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자료1]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낼 만큼 오랜 출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 유럽 기독교 수도원의 수도사의 일과가 성경을 베껴 쓰는 일과 기도로 이루어졌듯이, 고려의 승려도 경전을 직접 베껴 쓰며 사경을 제작했다. 필사의 전통에서 인쇄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쇄 문화는 수도원과 사찰, 성경과 경전이라는 신앙 공간, 종교의 성전聖典을 매개로 꽃피었다.
[미술관자료2]고려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금속을 녹여 활자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놀라운 창안이자 새로운 도전이었다. 세상을 바꾼 창안은 무수한 실험과 기술적 시도를 거쳐 이루어졌다. 고려의 찬란한 기술인 금속활자 인쇄술은 조선시대로 이어진다. 조선 왕실에서 만든 한글 활자가 제일 처음 찍은 책은‘바른 법法’에 대해 말하는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이듯이 고려의 첨단 기술은 세상을 연결하는 힘이었다.
대장경에는 불교의 성전이라는 신앙적 의미로서뿐 아니라 지식을 체계화하고 소통하고자 했던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다. 대장경판이 봉안된 해인사 장경판전은 진리를 향해 나아간 당대의 노력을 보여주는 거대한 도서관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대장경을 전시함으로써 인류의 지혜와 소통의 노력이 현재도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불교의 특징>고려 불상과 불화를 만나는 순례 여행도 준비했다. 신앙의 중심인 불상과 불화에도 고려 문화의 독자성과 다원성이 나타난다. 지역에 따라 다원적으로 전개된 고려의 불상, 불상 내부에 납입된 복장물腹藏物과 섬세한 직물은 동북아시아 불교 의례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중요한 퍼즐이다. 청양 장곡사의 약사여래좌상은 천 명이 넘는 승속僧俗이 함께 발원한 고려를 대표하는 보물이다. 10미터가 넘는 발원문에는 삶에서 병마가 비껴가기를 기원했던 칠백 년 전의 바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3부이야기>> ‘차가 있는 공간’, 고려의 다점茶店
고려인의 색감의 절정은 역시 비색이죠. 엷은 초록빛을 띤 은은하고 우아한 색채를 말하죠 이런 고급스러운 색채를 즐기는 민족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고려 사원에 담긴 지혜와 바람을 찾아가는 이 길의 끝은 어느 사찰 입구에 있었을 법한 다점으로 이어진다. 다점은 현대의 카페처럼 고려인의 일상 깊숙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번 전시에는 차가 고려인의 생활과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에 주안점을 두어, 관람객이 시각과 후각, 청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차를 마시던 공간에서 바라보았을 경치와 귓가를 스쳤을 소리, 실제 차를 덖는 향기를 전시 공간에서 느낄 수 있도록 기획했다.
[참고]고려는 아름다운 색감과 독창적인 기법을 개발하여 예술성을 한층 더 발전시킨 [고려 청자]를 만들었다. 고려 전기에는 [순청자]를 주로 제작 했다. 12세기 전반에는 고려 청자 특유의 [비색 청자]가 만들어졌다. 12세기 중반에는 [상감법]이 개발되었다. [상감청자]는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했다. [나전 칠기 공예]도 크게 발달했다. 그림을 관장하는 [도화서] 소속의 화원이나 문인 중에서 화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가 남아 있다. 고려의 서예는 전기에는 [구양순 체]가, 후기에는 [송설체]가 유행했다. 송에서 들여온 [대성악]은 궁중 음악인 [아악]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전통 음악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송의 악기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당악의 영향을 받은 [향악]이 발달하여 [속요]와 어울리는 많은 곡이 만들어졌다. 귀족들은 [차]를 음미하고 차 문화를 향유하였다.
차는 국가와 왕실, 사찰의 각종 의례와 행사에서 그리고 고려인의 삶 속에 언제나 함께 존재했던 문화로, 다점에서 고려의 수준 높은 지식과 문학, 예술 그리고 다양한 향유 계층을 만날 수 있다. 고려 지식인은 국가 운영의 이념이었던 유교적 교양을 갖췄으며 관료적 질서 속에서 고려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이들은 시와 서예, 그림과 같은 문예 그리고 공예품을 향유하고 감상할 수 있는 감식안도 지녔기에, 이 시기 예술 수준은 더욱 높아질 수 있었다.
<<네 번째 이야기>> 고려의 찬란한 기술과 공예 과 만나다
<고려왕실미술의 본령을 보여주다>
-최상의 아름다움, 왕실미술의 본령 2번째 은제 금도금 주자와 받침 고려 12세기(보스턴 박물관 소장) 모두 12세기 작품이다/ 한편‘최상의 아름다움, 왕실 미술’에서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다채롭고 화려한 미술이 개경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고려 왕실은 최대의 미술 후원자로, 왕실의 주도하에 회화·금속공예품·나전칠기·자기 등 최고급 소재로 새로운 차원의 물질문화가 창조되었다.
고려의 찬란한 기술과 디자인’로, 예술성의 정점을 이룬 공예 미술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청자어룡모양 주자(靑磁魚龍形注子) 고려 12세기, 높이 24.4cm, 국립중앙박물관, 개성 2, 국보 제61호. Celadon Fish Dragon-shaped Ewer 해태처럼 화재 예방의 상징적 의미도 있다. 용 머리와 물고기 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려 왕조미술 청자의 미색이 신비하고 황홀하다 색이 최대로 절제되어 있으면서 고품격이고 우아하다. 장인의 솜씨가 대단하죠 조형미도 또한 신기에 가깝다. 물고기와 용의 모습을 상상해서 다시 빚어낸 제3의 동물을 주제로 한 도자품이기도 하다. 파격적이면서도 그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고려의 미술은 도전의 역사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다양한 재료와 이를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은 10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북아시아가 이룬 공통적인 문화 성취이다. 그러나 기술을 어떻게, 어디에 쓸 것인가의 결정이 위대한 예술을 창조했다.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면 외국인 장인이어도 국가가 주도하는 공장에 소속되어 일할 수 있었던 포용적 기반에서 고려의 찬란한 미술이 꽃필 수 있었다. 고려청자가 당시의 신기술에 대한 고려인의 도전을 보여준다면, 정교하고 섬세한 고려불화의 아름다움과 나전칠기의 치밀함은 끊임없는 도전으로 이루어낸 예술의 정점이다.
고려인들은 기술과 미감, 취향의 교류와 융합을 통해 뛰어난 미술품을 만들었다. 그 결과 한국 문화는 더욱 풍부해지고 개성 넘치는 또 하나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의 극락도와 지옥도, 그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겠네요
- [에필로그] 필사(筆寫)의 방식에서 목판 인쇄로의 발전은 인류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나무판에 새긴 목판이 한 종류의 책만 찍어낼 수 있다면, 낱개 글자로 되어 있는 활자를 다양하게 조합하면 보다 다양한 종류의 책을 찍을 수 있었다. 고려의 불교는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비롯한 사회적으로 많은 순기능을 하였으나 또한 역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많은 경비를 들여 자주 절을 짓고 불교행사를 마련한 것은 고려가 기울어지게 된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고려문화를 현대조형언어(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하다. 여기는 잠시 아픈 다리를 쉬게 하는 휴식공간이다
[참고]
<경기체가와 속요의 비교> [경기체가 Classic song] 귀족층 향유, 한자어의 나열,내용은 관념적, 교술적이었으며, 인간의 내면보다는 외부 세계에 치중하여 사물을 관찰한 바를 시에 담은 시가 형식으로 멋과 풍류, 서경, 건국 칭송을 했고, 경기체가체 악장으로 일부는 계승 / [속요(Pop song)] 평민층 향유,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으로 기록인간의 솔직한 성정을 노래했고, 평민의 소박한 생활 감정, 사랑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했으나 나중에 남녀상열지사도 솔직하게 노래하다
[아래 작품은 고려시대 개경의 생활상을 담은 회화다] <문학> 무신정권 후 일부 문인들은 무신들이 주도하는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억눌린 현실로부터 무언가 변화를 꿈꾸었다. 이러한 가운데 경기체가(景幾體歌)라는 새로운 유형의 문인 시가(詩歌)가 등장하여, 이후 고려 후기와 조선전기에 걸쳐 유행하였다. 최씨 집권기에 지어진 〈한림별곡(翰林別曲)〉은 당시 문인들의 문필 재능과 지식을 과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당시 문인들의 주변에서 높게 평가되거나 애호되는 것들을 호쾌한 기분으로 노래한 것이다.
<유학> 유학의 한 갈래인 주자학이 고려후기에 영향을 미치다 고려가 원나라와 교섭을 갖는 동안에 받아들인 주자학은 고려 말의 학문·사상 면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주자학은 송나라 주자(朱子, 朱熹)가 완성한 것으로, 주자의 학설은 주돈이(周敦頤)·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나종언(羅從彦) 등의 학설을 계승하여 대성된 것이다.
주자는 만물의 근원을 이(理)·기(氣)로 나누어, 이(理)는 만물에 성(成)을 주며, 기(氣)는 만물에 형(形)을 준다고 하였다. 주자학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최초로 받아들였고, 충렬왕의 유학 장려로 점차 발전하였다.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형이상학(形而上學)적으로 해명하는 주자학은 신진 사대부들에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 안향의 뒤를 이어 백이정이 역시 원나라에 유학하여 이를 배워 왔으며, 그의 제자 이제현이 그 뒤를 이었다. 고려 말기에는 이숭인(李崇仁)·이색·정몽주·길재 등과 정도전·권근 등이 배출되었다. 이 주자학의 전파는 불교 배척의 기운을 조성하였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유교 의식이 점차 실시되었다.
[아래 작품은 고려시대 개경의 생활상을 담은 회화다]
<경기체가와 속요의 비교> [경기체가 High Class song] 귀족층 향유, 한자어의 나열,내용은 관념적, 교술적이었으며, 인간의 내면보다는 외부 세계에 치중하여 사물을 관찰한 바를 시에 담은 시가 형식으로 멋과 풍류, 서경, 건국 칭송을 했고, 경기체가체 악장으로 일부는 계승 / [속요(Pop song)] 평민층 향유,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으로 기록인간의 솔직한 성정을 노래했고, 평민의 소박한 생활 감정, 사랑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했으나 나중에 남녀상열지사도 솔직하게 노래하다
<문학> 무신정권 후 일부 문인들은 무신들이 주도하는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억눌린 현실로부터 무언가 변화를 꿈꾸었다. 이러한 가운데 경기체가(景幾體歌)라는 새로운 유형의 문인 시가(詩歌)가 등장하여, 이후 고려 후기와 조선전기에 걸쳐 유행하였다. 최씨 집권기에 지어진 〈한림별곡(翰林別曲)〉은 당시 문인들의 문필 재능과 지식을 과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당시 문인들의 주변에서 높게 평가되거나 애호되는 것들을 호쾌한 기분으로 노래한 것이다.
<유학> 유학의 한 갈래인 주자학이 고려후기에 영향을 미치다
고려가 원나라와 교섭을 갖는 동안에 받아들인 주자학은 고려 말의 학문·사상 면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주자학은 송나라 주자(朱子, 朱熹)가 완성한 것으로, 주자의 학설은 주돈이(周敦頤)·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
주자는 만물의 근원을 이(理)·기(氣)로 나누어, 이(理)는 만물에 성(成)을 주며, 기(氣)는 만물에 형(形)을 준다고 하였다. 주자학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최초로 받아들였고, 충렬왕의 유학 장려로 점차 발전하였다.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형이상학(形而上學)적으로 해명하는 주자학은 신진 사대부들에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 안향의 뒤를 이어 백이정이 역시 원나라에 유학하여 이를 배워 왔으며, 그의 제자 이제현이 그 뒤를 이었다. 고려 말기에는 이숭인(李崇仁)·이색·정몽주·길재 등과 정도전·권근 등이 배출되었다. 이 주자학의 전파는 불교 배척의 기운을 조성하였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유교 의식이 점차 실시되었다.
[고려에 대해 알고 싶다면?’]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Goryeo: The Glory of Korea) 연계 교육 프로그램 박물관역사문화교실: 2018년 12.5(수) 오후 2~4시에는 연세대학교 <도현철> 교수의 ‘고려 후기 지성인의 현실인식’이, 2018년 12.12(수) 오후 2~4시에에 국민대학교 <박종기> 교수의 ‘고려의 재발견’강의가 계획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은 오는 12월 4일(화)부터 2019년 3월 3일까지 열리는 기획특별전‘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과 연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박물관역사문화교실부터 가족 프로그램까지 7개의 프로그램이 올해부터 내년까지 전시 기간 중 이어진다. 박물관역사문화교실에서는 11.14일부터 대고려전 특별 연계 강좌를 다섯 번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오는 12.5(수) 오후 2~4시에는 연세대학교 도현철 교수의 ‘고려 후기 지성인의 현실인식’이, 12.12(수) 같은 시간에 국민대학교 박종기 교수의 ‘고려의 재발견’강의가 계획되어 있다.
<결론>이번 대고려전 연계 교육 프로그램은 모두에게 열려있었던 융합과 통합의 사회였던 고려에 대해 더욱 가깝게 다가가고, 특히 예술과 과학,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영감과 정보를 얻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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