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묵: 또 하나의 시詩질서를 위하여_한묵의 첫 유고전] 2018.12.11.(화)-2019.03.24.(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1층에서
"한묵의 추상주의는 과학기술적 생명주의다" -신정훈교수. 그런 면에서 백남준과 닮은 점이 있다. 다만 1914년 생인 한묵은 그 형식이 추상 유화페인팅이고 1932년 생인 백남준은 그 형식이 추상 전자페인팅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한묵과 백남준의 공통점은 역시 Sonorité(음악적 울림과 공명성)의 경향이다. 즉 회화에서 음악적 리듬감, 파동, 음파, 공명성, 울림 등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나는 현실 속에서 무수한 리듬의 파장을 본다" -한묵(1976)
우리는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전자 파장의 리듬을 본다. 전자파가 그리는 그림은 그 얼마나 많은가. 정말 예술가들이 할 일이 많다. 1960년대 전자 붓으로 모니터에 그림을 그리는 움직이는 그림, 소리가 나는 그림, '전자 회화'가 나온 이유일 것이다. 비디오아트나 뉴미디어아트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한묵 대표작 <상봉> 용이 웅비하는 기운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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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묵: 또 하나의 시詩질서를 위하여_한묵의 첫 유고전] 2018.12.11.(화)-2019.03.24.(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1층에서
한묵의 유작에서 엄선한 130여 작품 전시로 한묵 단독 최대 규모 전시 / 국내 최초 공개 작품 60여 점 포함 전시 /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7점의 드로잉 / 전시연계 학술심포지엄(2019년 3월 9일)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공동주최:한국미술사에서 한묵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노력한 전시다. 신성남 큐레이터가 진행과 기획을 맡았다.
한묵,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작가, 그는 우리의 현재적 삶을 우주로 확장하여, 삶의 본질을 탐구한 예술가이자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이고 기하추상의 거장이다. 한묵의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전시기, 전장르의 작품을 조명하면서 한묵의 작업세계 이해의 폭을 높이는 전시다.
"그는 파리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 향수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산을 쓰지 않다"
Quand il regardait tomber la pluie à Paris et il a dit que c'était des parfums pour lui. Donc il ne porte pas de parapluie.
이충석 여사님도 참가. 한묵 화백의 파리에서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한묵 연대기(연표) 젊어서 사진(1954년 임응식 사진작가 작품)
1914-2016년까지 104년의 삶을 도표화하다. 1914년 서울에서 출생.
1935-1940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学校]를 졸업하였다. * 금강산 생활 7년 아래 참고
1954~1959 모던 아트협회 창립회원 *
1955~1961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72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1992 제24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4 제2회 KBS 해외동포상
2008 자랑스런 한불문화상, 2011 제56회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부문
2013 제12회 한불문화상, 2015년 프랑스 문화부장관 훈장 수훈
초대-4대 한인회장 역임, 파리한글학교 초대 이사장
*[조상인 기자 글에서]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중국 등지를 누비며 자란 한묵은 만주에서 만난 일본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임인 ‘오과회’에서 본격적으로 예술을 접했고 일본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해방 후에는 형이 있는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로 들어갔다. 겸재 정선부터 단원 김홍도까지 한 가닥 하는 화가라면 일부러 찾아가던 그곳, 금강산을 누비며 원 없이 그림만 그렸다. 함경남도 원산에 살던 이중섭이 그때 교류하던 끈끈한 벗이다. 그러나 38선이 반도를 가르는 바람에 그대로 ‘이북 생활’이 됐다. 잠시 고등학교 교사로도 재직했던 7년간의 금강산 생활은 1·4후퇴를 계기로 끝났다.
서울시립미술관 봉주르 백남준!! 시립은 백남준이 있어 날마다 축제다^^
1955년 홍익대 미대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61년(그의 나이 41세) 프랑스로 건너가 추상화가로 활동했다. 그는 '파리, 파리'하면서 파리를 매우 사랑한 작가다. 사모님 말씀이다. 박고석, 이중섭과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 바쁜 작가생활 속에서도 1982~1984년에는 한불작가회 회장, 1992~1993년에는 한글학교 초대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창작만 주로 하고 전시는 거의 관심이 없없다. 부인의 말에 의하면 평생 고학생처럼 살았다는 증언이다.
<1950년대> 제1부. 서울시대 : 구상에서 추상으로 -1957년 《모던아트협회》에 가입해서 현대미술운동의 선두
한묵 I '가족' 1957년 작 홍익대미술관 소장
한묵 I 공장지대(factory district) 나무패널에 유채 1953년 작
1953년 이전의 작품은 한국전쟁 등으로 사라지다. 이 중에는 한국전쟁 중 배가 너무 고파서 머리 핑핑 돌아 정신을 잃기 직전에 상태를 시각화한 작품도 있다
한묵은 어려서는 부친께 동양화를 전수받았으나, 10대 후반부터는 서양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만주, 일본 유학시절, 금강산 시절에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작업이 모두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한묵의 작업세계는 작품이 남아있는 1950년대부터 살펴볼 수 있다. 1950년대는 작가의 작업세계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는 시기로 서울시대라 구분하고자 한다.
1950년대 전반기는 구상과 추상이 함께 나타나며, 한국전쟁 이후시기로 전쟁의 참상, 가족이산, 가난에 대한 경험들이 작품에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대상을 제거하며, 추상의 시기로 변모해 간다. 홍익대학교 미대교수가 된 이후 사실주의 화풍이 지배하는 국전에 반대하여, 1957년에 《모던아트협회》를 유영국, 박고석, 이규상, 황염수와 결성하여 현대미술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에는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 종합하는 입체파 경향이 작품에 나타났다. 점차 순수조형에 전념하면서 추상적 형태가 화면을 채워가게 된다. 주제적으로는 사회적 부조리와 사회상에 대한 개인의 감성들이 주요한 소재가 되며, 가족, 십자가 등이 주로 그려진다.
<1960년대> 제2부. 파리시대 I : 색채보다는 콜라주 형식과 기하학(색과 선과 형태를 중시) 정신으로 재료의 질감을 살리다 수학적인 회화를 추구하다. 화면공간을 분석해서 역동적 힘을 살리다 마티에르가 강하다:
도불한 1961년부터 1969년까지 한묵은 미의 본질을 모색하기 위해, 대상의 형태를 버린 순수추상으로 화풍을 바꾸어 평면구성에 주력한다. 대상이 완전히 사라진 평면을 색, 선, 형태로만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1960년대 초기에는 색채구성과 형태의 분할에 몰두했으며, 마대의 거친 촉감이 드러나는 콜라주가 결합된 유화작업들을 함께 진행하면서 색채효과와 재료의 질감이 결합되는 작품들이 나타난다.
1960년대 후반에는 화면공간을 분석하는 논리성을 결합시켜, 수직, 대각 등의 엄격히 절제된 기하구성 작업으로 변모한다. 후반기 작업들은 80년대 후반에 완성된 역동적인 공간의 기하추상 작업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1970년대> 제3부 파리시대 II : 시간을 담은 동적 공간 :
한묵의 예술세계 변화에 결정적인 사건은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이다. 작가는 달까지 도달한 인간의 힘을 미지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용기와 치밀한 과학으로 파악하며, 인류에게 새로운 질서가 더해졌다고 언급했다. 이후 1970년대 동안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결합한 4차원 공간을 실험하면서, 공간에 속도를 담아내는 새로운 공간개념을 모색한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자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3년간 작업을 못하다 이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한 것이다 이런 면은 백남준과 유사하다 백남준의 모든 예술은 바로 달에서 시작한다.
아래에서 보듯 거기에서 위성아트가 나오고 인터넷과 아이폰이 나오게 되는데 한묵도 마찬가지로 3년 간의 고민(이 기간 동안 작업은 못하고 판화수업을 받게 된다) 끝에 4차원 회화라고 할 수 있는 위성회화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래에서 보는 기하학적 추상을 발명한 것이다 동심원과 방사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캔버스에 컴퍼스와 자를 사용하게 된다
그는 평면에 움직이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1972년부터 스탠리 윌리엄 헤이터(1901-1988)가 운영하는 ‘아틀리에17’이라는 판화공방에서 동판화 작업에 매진한다. 이때부터 수평, 수직 개념을 벗어나 화면에 구심과 원심력을 도입하기 위해, 컴퍼스와 자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엄격하게 계산된 동적 공간구성을 시도한다. 그의 실험은 동심원으로 시작하여, 시간의 연속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나선으로 나아가며, 여기에 방사선이 결합되고 교차된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미래와 우주질서를 생각했던 한묵은 인류가 달에 착륙하자 충격으로 3년간 작업을 못했고 고통이 너무 커 진통제를 맞았단다. 그 기간 오히려 학생이 되어 아틀리에 17에서 동판화를 헤어터교수에게 배우다
[파리 아틀리에 17 소개] 영국의 화가 헤이터Stanley William Hayter가 1927년 파리 캉파뉴-프르미에르 가(街) 17번지에 설립한 판화공방으로, 동판화의 독특한 기법을 개발하여 당시 이 공방에 드나들던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40년에는 뉴욕으로 이전하였으며, 특히 1940년대 후반에는 유럽에서 도미한 샤갈Marc Chagall(1887~1985),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마송André Masson(1896~1987), 마타Roberto Matta, 미로Joan Miró(1893~1983), 탕기Yves Tanguy(1900~1955) 등이 여기서 판화를 제작
이들의 출현은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마더웰Robert Motherwell, 네벨슨Louise Nevelson, 라산스키Mauricio Lasansky, 피터디Gabor Peterdi 등의 미국 작가들에게 자극을 주어 미국 현대미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공방은 헤이터가 파리로 떠나자 1950년대 말 폐쇄되었다.
판화작업으로 독창적인 방식을 체득한 작가는 이를 캔버스에 도입하면서, 강렬한 색채와 기하학 선들이 이루어내는 또 다른 회화세계를 개척해 갔다.
그의 기하학적 추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공간의 울림(sonorité) 다시 말해서 색채와 구성의 운율를 중시함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드럼 소리 등 다양한 음악이 연주되는 것 같은 착음이 일어난다><오른쪽 1번째 작품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작품> <왼쪽 1번째 작품은 성서의 창세기(신화)를 기하학적 추상으로 조형화하다 오른쪽 2번째는 하늘을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는 착각이 든다.
<1980년대 이후> 제4부 파리시대 III : ‘미래적 공간’의 완성을 향해 :
한반도 남북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고 그린 작품 '상봉'
한묵은 현실의 삶을 우주의 열려있는, 유기적인 공간 개념으로 확장하고, 이를 ‘미래적 공간’이라 명명했다. 그는 이와 같은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색과 선이라는 조형요소만으로 완전해지는 시각예술의 독자성을 모색했다. ‘미래적 공간’에 대한 탐구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작가는 서정적인 감성이 느껴지는 색채와 기하학 도형이 교차하며 확장하는 리듬을 조형언어로 조화시켜, 평면 화면이 캔버스 바깥으로 확산되는 효과에 이르게 된다. 1980년대 후반에는 원심과 구심의 작용과 반작용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공간의 울림’이 있는 역동적인 화면을 구현한다. 이 시기에 작가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기하추상의 대작들이 완성된다.
기하추상작업과 더불어, 1980년 후반에는 구상과 추상의 구분에서 벗어난 작업들이 제작된다. 작가의 관심이 우주에서 인간, 그리고 탄생의 비밀로 심화되면서, 동양적 색채와 동양사상에 근간을 둔 작업도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한묵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와 예술에 대한 생각>
한묵의 미래적 공간에 대한 그래픽 개념도 그의 시간과 공간의 관계,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명쾌하게 정리해 놓고 있다
그가 말하는 미래적 공간이란 뭔가? "미래적 공간이란 공간예술상의 시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무한공간(우주)은 상상력 세계[정신적]이고 유한공간(생존)은 실체적(구체적) 세계[물질적]이다. 유한은 무한과 연결되어 있고 현재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미래적 공간이란 조형적으로 움직이는(뉴미디어) 공간을 말한다. 과학과 예술을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과학은 현실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고 예술은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1980년대 이후–먹과 종이> 제5부 파리시대 IV:생명의 근원을 추구하는 구도자:
기하추상작업과는 다른 범주로 1980년대부터 말년까지 지속되는 작품세계는 먹과 종이 콜라주로 특징된다. 이는 구상이 등장하는 아크릴 작업과도 연장선에 있다. 후기 작업들은 1970년대 후반에 다시 먹을 갈아 글씨를 쓰고, 노자 등의 동양사상을 사유하며, 우주 공간 외에 인간의 문제로 관심사가 확장된 것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88올림픽 즈음에 만든 작품
동양화의 재료인 먹과 한지를 사용한 작품들이 1980년에 나타나며, 1980년대 중반에는 냅킨과 휴지와 같은 재료를 사용한 콜라주 작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먹과 한지, 종이 콜라주는 1990년대 후반기까지 지속되어, 작가 후기 작업에 주요한 매개가 된다.
<그의 작품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싶다> -한묵 선생 부인의 말
이번 전시를 맡은 신성남 큐레이터 거운데 한묵 선생 부인 이충석 여사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 백기영 학예부장
그는 늘 미래를 보는 작가셨다 -이충석 여사
이번 전시 한묵 선생님 전시하는 작품을 보시는 소감을 물으니 사모님 이충석 여사(1978년에 결혼 당시 한묵 64세)의 답변은 이렇다. "그의 작품 앞에 옷을 여미고 싶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인이고 철학자이고 화가였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고 한다 "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는 (고)학생처럼 평생 살았다 오직 작품에만 몰두했어요.
그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건축가 김수근선생과 이우환선생님이셨죠. 화실이 없어 큰 작품을 하고 싶었지만 회화를 못하고 판화로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한불130주년 기념 에 디종에서 전시가 있었는데 그날 우리부부는 하루만 머물고 파리로 돌아왔지만 다음날 퐁피두미술관 관계자와 뉴욕 모마 미술관 관계자가 방문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판화작품에서 에디션이 없다고 한다.
한묵선생 인류가 달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크게 충격 3년 간 작업을 못했어요 진통제를 맞았어요. 한묵작가는 앞으로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본 거죠 증기기관차 전기 등 발병으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듯 앞으로는 정보 사회를 올 것을 예견했어요. 국경 없는 글로벌 세상 인터넷 세상 아이폰 새로운 세상을 예감하다 4차원 판화가 그렇게 나온 것이죠. 일종의 위성회화죠 -한묵 사모님 말씀 [평] 이런 면에서 백남준의 위성아트개념과 유사한 점이 있다. 두 분에게는 달이 주는 상상력이 창작의 원류가 되다.
위 작품은 광주항쟁 을 주제로 한 기하추상. 광주시민은 둥근 별(round star)로 상징화하다
한반도 남북 평화와 통일을 기원한 작품 대표작 상봉(1991년작 77세 때 작품) 궁극적으로 우주의 음양 조화를 상징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묵은 70년대 동판화기법으로 방사선과 동심원 등을 회화에 도입 수평수직의 개념을 벗어나 시공간을 초월하면서 4차원 회화(위성회화)의 가능성과 잠재성을 열어젖히다.
<100년 간 고독이 있었기에 그의 그림은 더욱 강렬한 빛을 발휘하다>
놀라울 따름..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강열한... 한묵의 '묵'자는 침묵에서 왔다고 하네요. 우주와 대화를 하려면 침묵은 필수적... 본명이 아니라고 하죠. 100년 간의 고독 후에 그의 그림이 더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네요!! 그에게 선생이 있었다. 달착륙 충격으로 3년간 작업을 못했는데 그때 판화를 배우게 된다 그의 선생은 바로 스탠리 윌리엄 헤이터(1901-1988)...
공간의 소노리테(Sonorité) -한묵 <아시아공론> 1977년 12월
공간의 리얼리티 가치관을 나는 유기성에 둔다
그래서 공간을 움직이는 상태에서 본다
즉 공간의 역동성(dynamism)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적인 상태에서는 죽은 공간 혹은 닫힌 공간
우주에로 열려져 있는 공간이야말로
산 공간, 즉 유기적이 공간인 것이다
미세한 파동에도 우주는 숨쉬고 있다
이 속에서 공간의 리듬을 불 수 있다
이 리듬 속에서 우주의 본래적 모습
순환의 모습을 본다. 즉 공간의 유기성인 것이다
캔버스 안에 다하려는 공간이 아닌
캔버스 밖으로 연결되는 공간
무한대로 울려 퍼지는 공간이 것이다
생의 맥박은 짹깍 짹깍 초침을 새긴다
그것은 엄연한 공기의 울림일 것이다
인간은 공간에 산다. 아니 공간을 산다
<한묵과 백남준> 백남준보다 30년 정도 선배인 한묵은 이미 그 나이에 뉴미디어(인터넷)개념 혹은 탈지구적 개념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혜안이다. 물론 그를 그렇게 깨어나게 한 것은 바로 1969년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도착하는 불가사의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 역시 visionary artist로 볼 수 밖에 없다
운율 시리즈
운율 시리즈
운율 시리즈
<한묵과 사운드아트>그리고 백남준과 한묵이 같은 점은 공간예술에 시간을 도입한 것도 그렇지만 공간예술에 음악을 도입한 것도 또한 유사하다 백남준은 noised sound(son bruyant) 한묵은 sonorité cosmique를 도입한 것이다 하긴 칸딘스키부터 모든 추상화가가 다 음악성이 높다. 운율을 중시하기는 한다. 이번 한묵작품의 (시적 혹은 우주적) 운율 시리즈(위)도 있다. 그러나 한묵의 지그재그 전자적 리듬은 백남준 랜덤 액세스를 연상... 시에서는 운율을 이렇게 설명한다. 운'은 같은 소리, 또는 비슷한 소리의 반복을, '율'은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성을 기리키는 개념이다
<한묵, 원효, 백남준>
한묵의 회화세계는 결국 원효가 말하는 원융합일의 세계와 만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제로이고 당신은 무한대라는 사유방식 그런 개방성 유연성 역동성은 결국 그림을 통해 인간과 우주가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낳은 발명품이 바로 인터넷이고 아이폰이다. 그런 점에서 원효과 한묵과 백남준은 또한 상통한다. 1969년 미국의 세계사에 빛나는 업적은 남겼다 그것은 바로 인류를 처음으로 달이 상륙시킨 것이다.
그런 대단한 사건이 당장 돈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보사회 모든 문명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의 꿈을 일부 실현한 셈이다. 백남준 자신의 생일이 달 착륙과 관련이 있다고 늘 자랑하고 다녔다. 백남준은 달의 예술가, 그래서 프랑스 백남준연구가 장 폴 파르지에는 백남준은 마이너스(-)의 예술가라고 부른다. 백남준 나름의 페미니즘이다.
*백남준 생일이 '7월 20일' 이다. 아래는 자신의 생일과 관련된 큰 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 물음표에서 반전된 물음표를 빼면 무한대가 된다는 표시가 재미있다
<한묵 100세 축하 메시지>
이 말하는 한묵이라는 사람, 그는 모든 것을 달관한 도인과 같았어요. 고고한 바위 같았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물질적 것에 초월했어요. 저렇게 살면 100년을 살 것 같다고 느꼈는데 정말 100세를 넘으셨잖아요 남들이 달려갈 때 뒤에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걷는 분이셨다. -방혜자 화백
한묵 작가 100세 때 갤러리 현대(강남)에서 모습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젊어 보이신다. 그런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우주와 날마다 교신하면 우주의 에너지를 받은 것인가 아마도 무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래 작품은 창세기 신화를 기하추상으로 번역한 것인가 뱀이 보이네요 생과 사,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원효의 원융합일사상에 비쳐 시각화한 것 같다
그는 나선형이 깊이와 넓이에서 무한확장하듯 늘 새롭게 변화하시는 분이다. 작품과 인품이 하나인 분으로 내심 파도를 품고 있으면서도 외적으로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몸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는 그의 작품에 보여지는 난성형 역동성이 반영되어 우주적 역동성으로 표출된다. 그의 장수도 덕묵이 되다 그는 노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그렇게 늙지 않았고 늘 새로운 것은 추구하는 영원한 젊은이었다. 겸손하고 꾸밈없고 -지인
한묵의 색채는 오리지널하다. 일본사람들이 보고 자신들이 만들어내기 어려운 색이라고 말했단다. 한묵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금강산에 거주한 적이 있다. 거기서 금강산의 절경을 보면서 그만의 한국적 색채감을 터득한 것이다. 특히 한국은 4계절이 분명하니 그 색감이 더욱 분명하고 강력하고 독특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 이야기지만 내가 만난 호주화가는 한국에 살면서 4계절이 분명해 감동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묵 '상봉' 시리즈 남북의 평화와 공존을 염원한 작품 1993
한묵 어떤 사람인가? 우선 성품은그의 친구인 박고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단호한 생활 속에서도 어른스러운 참을성이 뚜렷했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중화감이 몸에 배어있다 좋은 일 긏 은일 언제나 앞장섰다 누구보다 의식수준이 높았지만 도통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학 연극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한 잔 하면 시 낭독을 조화 있는 억양과 섬세한 연출로 소화해내는 아니 억세게 내뱉는 그야말로 감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시를 쓰기도 했다. 주옥같은 수필을 꽤 많이 발표했다"
인간의 달 착륙에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인 화가. 그가 1914년 태생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좀더 이해가 된다. 온몸에 전율로 3년간 작업을 못했다고 하니 얼마나 충격이 큰 것인가 그는 주지주의 경향을 보이면서도 색채와 구성에서는 감각적이다 그는 한국인이면서 날마다 파리 파리 하는 진짜 파리지앵이고 시인이었고 유목민이었고 vagabond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들레르가 발명한 신인간 flaneur(목적지 없이 도시를 왔다갔다 산책하는 사람)였다
그는 침묵의 인간이고 남 앞에 나서지 않는다. 시와 미래와 우주적 에너지와 뜨거운 휴머니즘의 소유자였다 엄격하면서 완벽함을 추구한 실험예술가였다 1950년대 조선시대 보자기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적인 구성과 색채감도 살려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운동감(mouvement)이다 그는 사물의 내부세계만 아니라 외부세계까지 여행하는 자였다 수학적인 나선형은 우주적 상상력을 연상시킨다. 인간성을 초월해 드넓은 무한한 우주를 꿈꾸는 세계 빛과 움직임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었다.나선형-동심원+번개탄+파동+리듬+비디오
<추신>파리작가 한묵을 달 착륙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3년간 작업을 못했다고 하던가!! 한묵을 3년간 작업을 못하고 파리에 있는 명문 판화학교에서 판화를 공부하다. 그는 아폴로 11호가 준 충격을 이렇게 밝혔다. "인공위성에서 지구 위 우리 생활을 감시할 정도로 과학이 발전했는데, 과거의 공간 개념을 답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과학적인 공간을 탐구해 화폭에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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