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 없이 현대미술 논하는 건 불가능하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티모시 럽' 관장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전 12월 22일(토)부터 2019년 4월 7일(일)까지 MMCA 서울 1, 2 전시실에서 열린다.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http://omn.kr/1gybp
필라델피아 미술관 '티모시 럽' 관장은 말하다. "뒤샹이 남긴 유산은 세월이 갈수록 현대미술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서론(Prelude)] 역시 최고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수학을 잘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수학은 철학보다 한 수 위인지 모른다. 뒤샹은 어려서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고 한다. 왜 수학이 철학보다 우위인가? 그것은 몇 개의 숫자와 공식으로 풀기 너무나 힘들다는 철학을 간단히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미술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레디메이드) 가져다 놓는 것" -뒤샹의 개념 일종의 지적이고 고차원적인 착시 현상으로 미적인 사기다. 랭보의 표현의 의하면 dérèglement(disturbance)이다 착란인 것이다 이때 오브제가 가장 잘 보인다 제대로 분명하게 명쾌하게 비저너리하게... 이걸 우리는 천리안이라고 한다.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 뒤샹의 대표작
[뒤샹과 백남준의 관계] 뒤샹은 프랑스인이지만 미국에서 영웅이 되었다. 백남준은 한국인 출신이라 미국에서 뒤샹만큼 영웅이 되지 못한 것인가. 만약 뒤샹처럼 백남준이 서양인이었다면 백남준은 미국에서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백남준은 뒤샹보다 훨씬 더 위대한 예술가다.
위성아트 등으로 백남준은 지구 밖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뒤샹은 지구 안에서 놀았다. 백남준은 뒤샹의 한계를 뚫은 것이다. 밖으로 튕겨나간 것이다. 진중권의 아래 생각은 나와 같다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그리고 20세기 전체를 뒤샹의 시대라 부른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백남준의 시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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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은 비디오를 생각하지 않았다' 리비어[백남준연구가]와 백남준과 인터뷰(독일 보흠)> 1974년 12월 16일(44년 전 인터뷰) 리비어 질문: 비디오아트가 크게 발전할 거라고 믿나요? 백남준 대답: 확신해요. 뒤샹은 비디오만 제외하고 모든 걸 다 했죠. 그는 들어오는 문은 크게 만들었는데 나가는 문을 작게 만들었어요. 그 문이 바로 비디오죠 바로 그 문을 통해서 뒤샹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겠죠.(뒤샹에서 나올 수 있을 거예요) <웃음>
이번 전시에 소개된 뒤샹 화보를 재구성해보다 오른쪽에서 1번째 사진: 계단에서 내려오는 뒤샹 1946년
뒤샹 이전의 미술은 너무나 설화적(종교적, 문학적, 신화적)이었다. 뒤샹은 미술이 진정 조형적(공학적, 기하학적, 추상적, 개념적)이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뒤샹 그는 자신마저도 넘어서려고 한 예술가이다. 백남준 말처럼 그는 교란자이고 지적 사기꾼이다. 인류에게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열어준 사람이다. 미술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미 만들어진 것을 가져도 놓는 것이라는 새로운 발상을 창조한 사람이다. 그래서 미술세상을 확 뒤집어 놓았다. 어떻게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놓느냐가 문제로다 그에게 가장 큰 관심은 체스를 어떻게 놓느냐 하는 게 아니었을까.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전 12월 22일(토)부터 2019년 4월 7일(일)까지 MMCA 서울 1, 2 전시실에서 열린다.
기자간담회
국립미술관과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공동 주최로 회화, 드로잉 등 150여점 전시 대표작 '샘',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 No.2' 등 국내 최초 공개한다. 사진가 만 레이,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 등 당대 예술가와 협업 재조명 전시 아시아에서 최대의 뒤샹전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미술관의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특히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950년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가 기증한 현대 미술 컬렉션의 일부로 뒤샹의 전작 중 다수를 소장했다.
국립미술관 관장 공석으로 대신 '박위진' 직무대리가 인사말
국립미술관 관장 공석으로 대신 '박위진' 직무대리가 인사말을 하다. 개념미술의 혁명가로 현대미술의 진수를 창안한 뒤샹의 전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을 향유하는 좋은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그리고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 큐레이터와 국립미술관 '이지회' 큐레이터와 함께 협업으로 이번 전시를 성사시켰다.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 큐레이터(가운데)와 국립미술관 '이지회' 큐레이터(왼쪽)
여기서 나는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 큐레이터에게 이 점에 대해 질문하면서 뒤샹의 제3의 성을 주제로 한 작품에 대해서 한 두 가지 예를 들어달라고 했는데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뒤샹의 불어에세이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이번 도록에 그걸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수록되어 있다. 아래는 그 내용 중 일부분이다
뒤샹은 좋은 예술 나쁜 예술의 구분보다는 혹은 위대한 미술보다는 주관적인 메커니즘과 날 것 상태(à l'état brut)의 예술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1957년 아트뉴스.
예술에서만 인간은 동물적인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 현재 미국 미술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프랑스도 그렇지만 저항정신의 부재다. 예술가 사이에서 그렇게 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미래파는 기계적인 세계의 인상주의다 -뒤샹 그가 이탈리아 미래파 영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00년 전까지만 해도 회화는 문학적이고 종교적이었다. 다다는 내가 여전히 공감하는 니힐리즘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말해 나를 둘러싼 환경이나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진부함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다다의 텅 빈 힘의 효과는 매우 강력하다. 다다의 정화작용은 매우 유용하다. 화가처럼 멍청하다라는 말에 사는 신물이 났다(=화가는 가장 지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말이겠죠) -마르셀 뒤샹
필라델피아미술관은 150여점을 기증 받아 뒤샹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회화 조각 드로잉 사진 레디메이드 등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맥락으로 현대 미술관에 놓이게 되었다. 이 위대한 선구자는 전 세계 놀라게 하고 고차원의 미술 그래서 영향력이 가장 컸다. 그는 수수께끼가 많은 작가로 현대미술에 충격을 주었고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인물로 남아있다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 미술관 큐레이터
필라델피아미술관
[필라델피아미술관 소개]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950년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Louise and Walter Arensberg) 부부로 부터 뒤샹의 작품 중 다수를 기증받았다. 그래서 이 미술관은 세계에서 뒤샹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게 되었다 / 필라델피아 미술관 파사드 2600 26Th St. & Benjamin Franklin Pkwy, Philadelphia, PA 19130-2302 www.philamuseum.org/
필라델피아미술관 2018 연말 특별전 중 하나
개방시간 화~일요일 : 10:00 ~ 17:00, 수요일 : 10:00~20:45 아래 현재 연말전시 중 하나 월요일, 공휴일 /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모형의 대리석 건물로, 미국 유수의 미술관이다. 현재 미국예술, 의류와 섬유, 중국, 일본, 한국, 페르시안, 터키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와 중동예술, 유럽 장식예술과 조각, 인디언과 히말라야 예술, 현대, 컨템퍼러리 예술, 사진 등을 300,000여 점의 망라하고 있으며 전시회는 물론 교육 프로그램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문화수도는 사실 뉴욕과 워싱턴 시 중간에 있는 필라델피아라고 할 수 있다. 관장은 필라델피아는 현대미술의 성지로 뒤샹의 작품을 전 세계와 함께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과 호주 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뒤샹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현대미술에서 전개시켰다. 그의 영향은 현대미술에 너무나 컸다. 그는 사후에 더욱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47년 영화 감독 한스 리히터가 만든 <Roto-Relief> 이 작품의 음악은 뒤샹의 절친이기도 한 존 케이지가 맡았다
뒤샹 전은 한국에서 처음이다. 나도 처음 본다. 내 생애 최고의 전시다. 다른 전시에 비교가 안 된다. 이제 더 이상 볼 전시가 없게 되었다. 한국에 이제야 뒤샹을 보겠다는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뒤샹전은 연대별로 전시구성을 하고 있다.
뒤샹은 수학에 수재였다
뒤샹은 1887년생 새로운 예술을 정의한 선구자로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역시 특이한 점은 그가 수학에 천재였다는 점이다 1902년,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 수상했다.
뒤샹의 전시는 1부: 화가의 삶 2부: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3부: 에로즈 셀라비(Eros, c'est la vie) 4부: 우리 욕망의 여인 등 연대별로 전시구성을 하고 있다.
[1부] 화가의 삶
'체스 게임' 1910년
제1부에서는 1902년 여름 청소년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초기 뒤샹 작품이 소개된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뒤샹은 고향 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루앙과 파리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화가로 데뷔했다.
'찢어진 누더기가 된 이본과 마그들렌' 1911년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신적인 미술 양식 사이를 오가며 8년 동안 작품활동을 했고, 파리의 입체파 그룹과 독창적인 교류를 했다.
임의적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색상, 특히 쫙 펼친 손을 둘러싼 형형한 분홍색 후광은 자연계에 대한 일상적 시각 경험을 넘어선 현상을 암시한다. 뒤샹은 비자연주의적 표현주의를 현대 회화의 주요한 목표로 보았다. 뒤샹은 1895년 발명된 엑스레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의학기구로 각광을 받았던 것에 착안해 이를 초현실적인 수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체스 선수의 초상' 1911년
뒤샹은 그는 피카소의 회화 세계를 능가하기 위해서 기계적 메커니즘은 도입하게 된다. 뒤샹도 초기에는 화가였다 첫 그림은 인상파 풍이고 나중에 입체파 그러나 기계주의적 회화를 그리다. 후기로 갈수록 생각이 작품을 만드는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점점 더 개념미술가로 변신했다.
'초상(뒬시네아)' 1911년
뒤샹은 그는 피카소의 회화 세계를 능가하기 위해서 기계적 메커니즘은 도입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 현대문명의 다양한 기계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특징이다. 뒤샹도 초기에는 화가였다 첫 그림은 인상파 풍이고 나중에 입체파 그러나 기계주의적 회화를 그리다. 후기로 갈수록 생각이 작품을 만드는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점점 더 개념미술가로 변신했다.
100년 지나면 내 작품이 이해될 걸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2번' 1912년 작품. 캔버스 유채, 147×89.2cm, 1950년에 소장.
이탈리아의 미래파를 연상시킨다. 수학적 입체파, 야수파, 상징파, 그리고 기하학적인 추상파 등등 많이 조류가 결합된 작품이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1번'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1번' 처음 보다 그는 천재다. 그의 이 작품에는 유럽의 2000년 모든 미술사조가 다 들어가 있다. 이 작품 하나만 보면 모든 유럽의 작품이 다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은 차이가 있다. 여기에도 수학적 메커니즘이 보인다. 마치 기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런 역동성이 강력하게 전달이 된다. 다만 오리지널을 봐야 한다.
[미술관 자료] 누드 형상을 움직이는 기계로 묘사한 이 작품을 위해 뒤샹은 입체파의 추상과 기하학적 공간에 관한 현대 수학 개념 그리고 과학 사진에서 빌려온 운동을 재현하는 발상을 결합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1912년 봄 파리에서 열린 중요한 연례 현대미술 전시회인 '독립 살롱'에 출품했다. 입체파 동료 몇몇이 이끈 심사위원회는 뒤샹에게 작품에 몇 부분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1번'
어쩌면 위원회가 보기에 역동적인 움직임을 재현하는 방식이 탐탁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라는 소재나, 뒤샹이 캔버스 하단에 굵은 글씨로 써놓은 제목이 터무니없이 보였을 수도 있다.
1913년 아모리 쇼 포스터
뒤샹은 수정하는 대신 그림을 거둬들인다. 결국 이 작품은 이듬해 뉴욕 아모리 쇼에서 논란을 일으키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 혹은 큰 유리 1912년부터 8년 간 작업해 완성하다,
'신부', 1912, 캔버스에 유채, 89.5x55.6cm, The Louise and Walter Arensberg Collection, 1950
1912년 여름, 뒤샹은 파리의 입체파 그룹을 떠나 3개월 간 뮌헨에서 시간을 갖는다. 이 작품은 그곳에서 완성한 중요한 두 점의 유화 중 하나다. '신부'라는 제목과는 대조되게 인간 장기의 미묘한 살색 색조로 비현실적이고 부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시점은 분명하고 통제되어 있으며, 빛과 그림자는 일관된 3차원의 외양을 부여한다. 뒤샹은 입체파 양식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 누드라는 소재를 활용하는 것을 더욱 심화해갔다.
[2부]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는 기존 예술의 법칙을 파괴하는 반예술가
'병걸이' 1961년 오리지널 1914년 제작 아현 도금 철
뒤샹은 25살까지 회화를 그리고 회화와 결별하기로 결심하다. 그리고 나면 일명 '큰 유리'라는 작품을 1912년부터 8년에 걸쳐 제작하다. 하여간 계단 이 작품을 보는 순간 경악을 느끼다.1912년 봄 파리에서 열리는 연례 현대미술 전시회 앵테팡당 살롱전 출품작이기도 하다. 이듬해 뉴욕 아모리 쇼에서 논란을 일으키며 성공을 거두다.
1967년 피에르 카반과의 대화에서. 예술은 망막적인 것(사실주의 화풍을 말함 예컨대 쿠르베 같은 작가 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미술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
[미술관자료] 제2부에서는 뒤샹이 회화 기법과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술가로서 작업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했던 1912년 가을 이후의 시기를 조명한다. 작가는 기념비적인 구조물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의 개념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3년에는 '자전거 바퀴' 만들다. 이는 평범한 기성품으로 만든 예술품, 즉 레디메이드 초기작품이다.
아래 자전거 바퀴 1964년 작품 오리지널 1913년 제작 기분전환을 위한 장난감 같을 오브제가 나는 좋다. 뒤샹은 기계적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빠른 회전력이 주는 에너지와 속도감과 순환의 짜릿함을 즐긴 것 같다.
<참고> 인류의 발명품 중 가장 중요한 4가지들 들라고 하면 첫째 아래에서 보는 '바퀴'다 뒤샹의 유명 작품이다. 여기서 마차, 증기기관차, 자동차, 군사용 전자 등이 나온다 이동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 서양에서는 모터가 발명되면서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두번째는 '베틀'이다 모든 기계공학의 모태가 된다. 모든 의류와 패션이 여기서 나왔다. 세번째는 '인쇄술' 백과사전파 계몽(이성)주의를 걸쳐 혁명이 가능했고 서구의 민주화의 기틀이 되었다. 그리고 네번째는 '인쇄술을 업그레이드 된 '인터넷과 아이폰'이다. 물론 여기에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과 나침판도 여기서 뺄 수는 없다.
레디메이드는 그 무렵 뒤샹이 자신의 노트에 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5년 여름, 뒤샹은 전쟁에 휩싸인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고, 수집가 루이스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 주변에 모인 재능 있는 예술가, 작가, 지식인 무리에 합류했다. 이 부부는 이후 뒤샹의 주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1917년, 뒤샹이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논쟁적인 오브제가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레디메이드라는 개념과 그것의 의미에 대한 대중적 논의가 촉발했다.
이때 이 작품을 포함한 많은 핵심 작품들이 생산된다. 이 그림은 아모리 쇼에 전시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13년 미국 관객에게 현대미술을 각인시킨 이 기념비적인 전시로, 뒤샹은 이미 뉴욕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초콜릿 분쇄기(No.1)', 1913, 캔버스에 유채, 61.9×64.5cm, The Louise and Walter Arensberg Collection, 1950
이 시기에 발표한 '초콜릿 분쇄기'라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루앙의 사탕 상점 창문에 놓여 있던 커다란 산업용 초콜릿 제조 기계를 주제로 시리즈 작품이다. 빛과 그림자의 뚜렷한 대비 덕분에 기계의 구조적 형태가 드러나고, 뒤샹이 큐비즘 양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속편인 '초콜릿 분쇄기(No.2)'는 기계의 차가움에서 영감을 받은 기하학적이고 딱딱한 스타일을 나타내며, 이를 위해서 색다른 기술적 시도를 한다. 분쇄기 롤러를 표현하기 위해 캔버스를 재봉실로 바로 꿰맨 것이다.
(레디메이드) 남성용 변기로 그린 여성의 성기, 즉 뒤샹의 뉴 버전의 누드화
-리얼리즘의 대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업그레이드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자기(磁器) 소변기, 30.5x38.1x45.7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125th Anniversary Acquisition. Gift (by exchange) of Mrs. Herbert Cameron Morris, 1998
뒤샹의 이 대표작 앞에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다. 이 남성용 변기는 1950년 나온 것으로 뒤샹이 여기에 사인을 하다. 사진모델 박현주 기자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뒤샹은 오브제의 오리지널 그런 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내키면 어떤 것이든 사인을 해 주었던 것이다. 1917년 당시에 뉴욕(미국 독립예술가협회 주최)에서 이 작품이 작품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아 전시하지 못했단다.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가상의 예술가 R.Mutt의 서명이 뒤샹의 역할을 감추다.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 미술관 큐레이터는 뒤상은 1917년 운 나쁘게 원본이 사라졌지만 그렇게 사리지는 운명에 개의 않았고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높이 두지 않았고 뒤샹은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변기는 벼룩시장에 50년대 사온 것인데 거기에 사인을 한 것이란다. 뒤샹은 이렇게 재제작을 기꺼이 수용했다. 그것이 오히려 내 자신의 개념을 역설적으로 향상 시킬 것이라는 역설적 발언을 하기도 했단다.
나의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 큐레이터에게 던진 나의 첫 번째 질문: 뒤샹은 레디메이드인 남성용 변기를 통해서 여성의 성기를 그리는 혁명적인 개념주의미술가로 알고 있는데 이런 개념이 현대미술에 준 영향과 그런 점이 반영된 작품 한두 가지 예를 들어 달라? 질문을 했다.
통풍 피스톤 1914년 젤라틴 실버 프린트
구체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 작품이 누드화의 새로운 버전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설명했다. 서양의 미술사는 누드변천사를 그린 것이다. 내가 보기에 뒤샹의 대표작 이 샘(fontaine)은 바로 누드화의 뒤샹 버전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여성의 성기는 모든 생명의 기원이기에. 그것을 그리지 않는 화가가 화가도 아니다라고 심하게 말할 수 있다.
리얼리즘의 대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레디메이드 아트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당연히 결론이 없다. 그는 질문을 던지는 자이고 대답은 안 한다. 오히려 관객이 다양한 종류의 대답을 내놓은 작품일수록 훌륭하다고 본다. 나의 해석을 뒤샹이 들으면 그냥 웃을 것이다.
[3부] 에로즈 셀라비: '셀라비(RROSE SÉLAVY)'
"에로즈 셀라비‘ 프랑스어 세라비(C’est la vie, 에로스 그것은 인생)’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 이름(개념어)는 1920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이름처럼 들릴 일까? 성전환을 한 것이다. 내 개인적 취향에는 로즈는 가장 ‘추한(醜漢)’이고 셀라비는 의 단순 말장난이다" - 마르셀 뒤샹, 장 크로티와 쉬잔 뒤샹에게 보낸 1920년 10월 20일자 편지 중에서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혹은 마르셀 뒤샹에 의한, 또는 에로즈 셀라비로부터 혹은 에로즈 셀라비에 의한('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 1936-41, 1964-65(내용물) 1966년 에디션. 빨간색 가죽 여행가방 속 상자에 담긴 콜로타이프, 릴리프 망판화, 스크린프린트, 오프셋 석판화, 표면 코팅된 사진, 종이에 인쇄 채색 및 직접 채색, 마분지, 투명 에세테이트, 비닐, 유리 도자, 최소 120x160x43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Gift of Anne d'Harnoncourt, 1994
여행가방 속 상자(7번에 걸쳐 300여개를 만들다) 뒤샹은 자신이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을 축소화(미니어처)해서 가방에 넣고 다녔다 1941년 여름부터 2차 대전 사이에 자신의 작품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포터블하게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여러 버전이 있다.
2006년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이 상자를 하나 컬렉션하는 바람에 관장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 국립예산의 10분의 1을 이 작품 소장하는데 썼다는 이유다. 지금 소장이 되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크게 잘못된 건 하나도 없다 지금 이 작품은 엄청 가격이 올라갔을 것이다.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작품의 미니어처 복제판을 담은 이동식(portable) 미술관을 선보여 예술에 대한 급진적 문제 제기를 이어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불안한 시기에 미국과 프랑스를 여러 차례 오간 뒤샹은 여기저기에 퍼져있는 자신의 작품이 전쟁 때문에 훼손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이미 많은 작품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그 작품이 흩어진 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이 사라진다는 건, 작가에게는 아마 사지가 잘려나가는 아픔하고 비슷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이것은 그가 만든 이동식 미술관
[이어서] 이에 작가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2차원과 3차원의 미니어처 복제품으로 만든 뒤 전시용 상자에 넣어 완성하겠다고 결심한다. 이 컬렉션은 보통 고급판에 포함되는 버클과 어깨끈이 달린 가죽 케이스 때문에 <여행가방 속 상자>라고 불린다. 이 상자는 300여개가 제작되었고 뒤샹은 이 작업의 모든 면면을 자신이 직접 통제했다. 그는 포맷을 디자인하고, 그림이며 색상 교정, 수정에 대한 기술적 결정을 내리고, 자금 확보와 유통을 책임졌다.
뒤샹이 100년 전에 언급한 <제3의 성>이란 뭔가?
뒤샹은 100년 전에 이미 <제3의 성>을 언급했다. 그에게 에로티시즘과 섹슈얼리티은 가장 큰 주제이다. 마지막 작품도 그런 주제였다. 그런데 최근에 독일의 헌법재판소에서 제3의 성이 합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에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 1921, 만 레이, 젤라틴 실버 프린트, 17.8×13.3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Library and Archives: Gift of Jacqueline, Paul and Peter Matisse in memory of their mother Ale×ina Duchamp ⓒ MAN RAY TRUST/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만 레이는 상징적이고 다층적인 뒤샹의 초상 사진 작업에 자주 협업했다. 만 레이는 에로즈 셀라비의 첫 번째 시각적 모습 역시 카메라에 담는다. 뒤샹은 여장을 한 채 메이크업을 하고, 보석을 두르고, 털목도리를 하고, 모자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다.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제3의 성을 추구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 시기부터 뒤샹의 많은 작품에 그의 본명과 함께, 혹은 단독으로 에로즈 셀라비의 이름이 단독으로 새겨지게 된다. 마르셀 뒤샹과 에로즈 셀라비가 같이 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391 12번' 1920년 3월 뉴욕에서 발행 편집 뒤샹의 모나라지를 피카비아가 변형하여 실은 표지 삽화(1950년)
그는 언제나 일상적인 관습에서 분리하는 작품을 하려고 시도했다. 또 그는 복합적인 예술적인 실험을 상상하고 시도하는 작가였다. 그는 해석에서 항상 열려 있어 어떤 해석도 관대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뒤샹은 남자를 여자로 그리고 여자를 남자로 그렸다. 이것도 제3의 성으로 볼 수 있다.
모나리자를 남성적 페르소나로 그렸고 자신을 여성적 페르소나로 그렸다 이런 현상은 현대미술에서 이제 흔히 보게 되었다. 만레이 여장을 한 뒤샹을 찍다. 뒤샹은 남녀 이분법을 넘어 양성을 뛰어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제3의 성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로토릴리프(광학원반)', 1935, 오프셋 석판인쇄로 양면 인쇄된 마분지 원반, 지름 20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The Louise and Walter Arensberg Collection
1941년 여름엔 2차 세계대전을 피해 파리를 떠나 다시 뉴욕으로 갔을 때 뒤샹의 망명자 처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로토릴리프(광학 원반), 1935, 오프셋 석판인쇄로 양면 인쇄된 마분지 원반, 지름 20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The Louise and Walter Arensberg Collection
뒤샹은 여섯 개의 마분지 원반 앞뒤 면에 총 12개의 그림을 그려 넣는다. 이 원반들을 축음기 턴테이블 위에서 돌리면 마치 3차원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듯하다. 뒤샹은 이 원반들을 상업 제품처럼 포장한 후 ‘프랑스 발명가 및 제조업체 협회’가 매년 주최하는 페어의 작은 부스에서 대중에게 선보인다. 뒤샹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원반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상업적으로는 대실패였지만, 이런 광학 도구들을 이용해 그는 순수 미술을 산업 문화와 분리하는 선을 의도적으로 넘었다고 할 수 있다. -미술관자료
<참고> <여성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고 (남성중심의) 역사가 낳은 결과물이다 [평] 여성적인 것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08년 오늘 시몬 드 보부아르 태어났군요. 제2의 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확립하다 그러니까 제1의 성과 제2의 성은 완벽하게 평등하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죠. 그러나 반대로 뒤샹은 남자지만 여자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제3의 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체스 광인 마르셀 뒤샹
'제3회 프랑스 체스 선구권 대회 포스터' 니스 1925년 9월 2-11일 1925년 다색 석판화 포스터>
'패서디나 미술관의 복원된 큰 유리 너머에서 이브 바비츠(누드모델)와 체스를 두는 뒤샹' 1963년. 가장 유명한 퍼포먼스 작품 화보 중 하나 그는 체이스에 열광적인 애호가였다.
하지만 동시에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새로운 예술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회전하는 광학기계로 아이디어를 표현하면서, 그 영역이 미술에서 공학 및 기구 쪽으로 한층 더 옮겨가기도 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뒤샹이 파리로 다시 돌아와 작업하던 시기를 살펴본다. 이때 뒤샹은 미술에서 체스로 직업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근 20년간 직업정신을 갖고 체스 활동을 이어나갔다.
'뒤샹'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미국 작가 되다
마르셀 뒤샹 다양한 화보사진
마르세 뒤샹의 화보 그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지적이면서 상당한 카리스마가 있어 보인다. 그도 한때는 거의 묻혀 살기도 했다. 그는 관례를 깨고 기준의 미술 룰을 해체(파괴)하는 작가였다.
제3회 프랑스 체스 선구권대회 포스터 니스 1925년 9월 2-11일 1925년 다색 석판화 포스터> / 뒤샹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가 그냥 프랑스에 있었으면 세계적 작가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새로운 가능성의 나라 미국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서양미술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도 시대의 흐름을 읽은 것이다.
미국으로 가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면에서 그는 매우 시대의 징조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국적에 얽매이기보다 시대의 분위기와 대세를 알아차려야 성공한다.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그의 작품에는 유기적이고 기계적인 움직임이 중요한 요소라 작용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이 위대한 나라가 된 것이다.
[4부] 우리 욕망의 여인
'에탕 도네(주어진 그대로 Étant donnés)'
말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사진가 만 레이,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 그리고 팝아트의 창시작 리처드 해밀턴 등과도 다양하게 교류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에탕 도네는 학생들에게는 19금이다. 이 미스테리한 미완성 작품 '에탕 도네(Étant donnés)'를 완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관객들이다.
1946년-1966년까지 20년 동안 뒤샹이 남몰래 작업했던 '에탕 도네'는 작가 생전 전 세계에 단 4명이었다. 뒤샹의 오랜 지인이자 친구였던 빌 코플리도 이 중 한 사람이었는데, 뒤샹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코플리에게 이 작품을 팔았다.
그 때 뒤샹은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비밀을 꼭 지킬 것, 그리고 죽은 뒤에는 필라델피아미술관에 기부할 것. 뒤샹 사후 그의 미망인은 사진가 '데니스 브라운 헤어'에게 촬영을 의뢰하여, 뉴욕에 있는 뒤샹의 마지막 스튜디오에 있는 대로의 최종 버전 '에탕 도네'를 1969년 필라델피아미술관으로 옮기기 직전 기록으로 남겼다.
'에탕 도네(Étant donnés)'
제4부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로로 널리 알려져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작품을 선보이던 시기를 조명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뒤샹이 기본적으로는 은퇴한 상태이며 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마르셀 뒤샹 그는 기계적 움직임을 중시하다
사실, 이런 유명한 예술가로서 공인의 이미지가 널리 퍼지는 동안 뒤샹은 20년에 걸쳐 아무도 모르게 최후의 예술적 선언에 힘을 쏟았다. 1968년 그가 사망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방 만한 크기의 디오라마 작품 <에탕 도네>가 공개되자, 그가 말년에 남긴 작업의 통일성이 확연해졌다.
[발터 벤야민이 본 뒤샹의 예술세계 흥미롭다]
마르셀 뒤샹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뒤샹은 프랑스 아방가르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현상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창작활동은 아주 미미하지만 그 영향력은 전혀 적지 않다. 뒤샹은 그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초현실주의에 가까이 있었고 피카소와도 교분이 있었지만 늘 기인이었다. 그는 최근 작품 시리즈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 벗거진 결혼한 신부>에서 예시한 예술작품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한 대상이 우리에게 예술작품으로 간주된다면, 그 대상은 그 자체로 더 이상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은 예술작품의 특수한 영향을 인증된 예술작품에서 보다는 오히려 격하된 대상들(폐기물이나 쓰레기통 속에 본 우연한 형상들)에서 훨씬 더 잘 경험할 수 있게 된다 [...] -발터 벤야민
전시와 연계해 다양한 관객 참여형 교육 워크숍도 마련되어 있다. 방학 중 학생들의 위한 소통과 체험의 공간이다
미술관이 마련한 기성품을 활용해 레디메이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레디메이드 워크숍', 작품 카드로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갤러리를 구성하는 '마르셀 뒤샹 작품카드' 등 참여형 워크숍이 운영될 예정이다. 또한 예술적 정체성을 의상과 소품으로 표현하는 문화 프로그램 '마르셀 뒤샹 그리고/혹은 에로즈 셀라비' 상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겨울방학 기간인 1~2월은 큐레이터 토크와 뒤샹 연구자들을 초청해 학술 대담회도 연다.
'레디메이드 워크숍'에 참여하는 관객들과 뒤샹 에로즈 셀라비 여장으로 관객이 변장해 보게 하는 코너도 있다
한편 배우 이서진이 《마르셀 뒤샹》전 특별 홍보대사를 맡았다. 직접 가이드 투어를 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르셀 뒤샹의 삶과 작품 설명을 들려준다. 관람객에게 깊은 감동을 전할 가이드 투어는 국립현대미술관 모바일 앱(App)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http://www.mmca.go.kr) -일반인 전화 02-3701-9500 (대표번호)
<뒤샹은 모던시네마 탄생에도 영감을 주었다>
<추신> '계단을 내려오는 뒤샹' <라이프>지 뉴욕 1952년 4월 28일 엘리어스 엘리소폰 촬영. Reality보다 Beauty를 강조하다. 미래주의적 첫 기계적 그림 빠른 움직임 효과를 강조하는 동영상 효과를 내다. 뒤샹의 회화는 비바체로 움직인다. 뒤샹은 언제 기존의 미술에 대해서 무례한 일을 주도하는 사람이었다(Rude) 1887년 사진작가 '마이브리지(Muybridge)'의 움직이는 시간차를 보여주는 초창기 연속사진을 연상시킨다. 20세기 초에 영화가 등장한다. 그리고 1930년대 베니스 영화제가 생기고 1940년대 칸 영화제가 생기고, 1950년대 베를린 영화제가 생긱고 미국 아카데미영화제가 생겼다. 그리고 60년대로 넘어와 프랑스에서 누벨바그 대유행했고 70년대 미국에서는 스타워즈 같은 블랙버스트 영화 대성황을 이후에는 미국이 세계영화를 주도하다.
<뒤샹전 서울과 도쿄는 서로 어떻게 다른가?>
2018년 일본 동경국립미술관에서도 뒤샹전이 열렸다. 서울전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하여간 뒤샹은 "에로스가 삶이다(Eros , c'est la vie)"라고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말을 했다. 맞다. "에로스는 최고의 에너지다" 왜 그런가?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뒤샹이 과학, 공업, 기하학, 물리학 등 기계적 실험을 작품에 반영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의 미술은 이전에 관심이 되지 못한 정치사회적·의미적·매체적 환경과 대결을 벌리다. 뒤샹은 화가로서 삶을 내려놓았기에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옵, 팝, 키네틱, 다다, 광학, 레디메이드 등을 동시다발로 발명했다. 뒤샹은 초기에 입체파화가였다. 그런데 '계단에서 내려오는 누드(국립현대미술관자료: 살과 피가 있는 인간의 형상을 뼈만 있는 도형으로 축소한 미래의 사진은 인간형태를 추상적으로 도식화하는데 모델을 제시)'를 발표했고 1913년에 뉴욕 아모리쇼에서 출품되었는데 사실 이 그림을 능가하는 입체파 작품은 없다. 그는 이 작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린 셈이다. 앞으로 더 그린다고 해도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냥 한방에 끝낸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천재인 뒤샹도 폴 세잔처럼 프랑스 보자르미대시험에 낙방했다는 점이다.
시인 아폴리네르는 그가 테크놀로지적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화가의 감수성을 가졌다는 것이 그의 예술세계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 미술에서 아무도 가 보지 않는 미개척 영역에 도전하고 그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미술을 손으로 그린 것도 아니라 가슴으로 그린 것도 아니고 머리로 그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개념미술의 초기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는 미술을 가장 치열한 지적결과의 하나로 본 것이다.
<추신>미술이란 심미적인 것을 벗어나 뭔가를 그리거나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것을 내가 선택해서 전시장에 가져다 놓는 거라고 뒤샹은 생각했다. 여기서 선택이 바로 창조가 된다. 매우 혁명적이 개념이다. 제3의 미술이라 할만한 '레디메이드'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뒤샹은 "미술은 어원상 만들기를 의미한다. 뭔가 만든다는 건, 물감의 색을 고르고 팔레트에 짜고, 물감을 칠할 지점을 정하고 미술을 결국 모든 게 선택이다. 하지만 원한다면 물감이 아니라 기계로도 제작할 수 있다. 이미 남이 만들어놓은(레디메이드)를 활용할 수도 있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이고 선택하는 이는 바로 당신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1915년 '자전거 바퀴'가, 1917년 드디어 그 유명한 '샘'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왜 작품 제목이 '샘'인가? 그것은 세상의 기원을 그렸기 때문이리라. 이 작품은 남성용 변기로 여성의 자궁 혹은 성기를 그린 것이다. 새로운 미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서양 리얼리즘의 대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다. 서양 미술사는 한마디로 누드화 변천사다.
이 점에 대해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어 뒤샹 전문가인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미술관 큐레이터에게 물었더니 그는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그것이 서양 누드화 전통의 새로운 버전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런데 왜 여성의 자궁이 중요했을까? 모든 생명이 바로 여기에서 기원하기 때문인가. 물론 여기에 해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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