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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문화 오아시스 시립미술관_이우환전

[부산시립미술관] 부산시민의 문화 오아시스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이우환 작품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이우환은 아직도 한국에서 백남준처럼 저평가되어 있다 그는 가야사람에 속한다 가야는 독특한 철학의 전통을 가진 지역이다 그는 한국사람으로 일본에 가서 일본의 모노하 미술을 세계화해 일본의 큰 은인이 되었다

진짜 예술을 이야기하는데 진짜가 어디 있는가? 이 말 자체가 사라진지 오래된 낡은 언어이다. 진짜 예술을 찾는 사람은 마치 죽은 신을 믿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우환

내 경우에 예술이라는 것은 종교와 과학 사이에 있는 것이다 종교는 무조건 믿어야 하고 과학은 객관적으로 철저히 증명해야 하고 예술은 이 양쪽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면서 이걸까 저걸까 늘 의심을 제기하고 반추(feedback) 혹은 반성하는 것이죠 -이우환

괴테의 위대한 점은 단테의 신곡에서 처럼 일방적으로 신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적인 목소리도 들어보고 이상적인 목소리도 들어보자는 것이다 그 어느 것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그런 양면성을 동시에 보려는 시도가 그를 위대하게 한 것이다. 양의의 예술은 그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우환

이우환 바람

사실 우리는 이우환에 대해서 10%정도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을 제대로 이해한 드문 예술가이다. 현대미술은 타자와의 대화라고 이우환은 말한다. 보이스는 엄청난 타자인 코요테와 통신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진정 '만신'이 되었다라고...

이우환 이 퍼포먼스를 직접 보고 청천벼락을 맞았다고... 이우환은 백남준처럼 언어 이전의 사운드 아트에 관심을 보였다. 베를렌 시인의 말처럼 무엇보다 음악이다 음악은 언제나 경이롭다고... 사실 그것은 늑대의 울음소리에 비슷한 것이리라. 문명을 다 지우고 태초의 원시 시대로 돌아가 선사시대의 상상력을 불러낸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야생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다.

부산 시립미술관과 이우환

부산 시립미술관은 이우환을 만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다 관계망이 복원되다

이우환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 답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빼어난 해설가이기도 하다. 보기 드문 명문이다(아래)

"만남이란 미학적으로 시적 순간의 경험이다 그리고 이 시적 순간은 여백 현상으로 열리는 장소에서 일어난다. 만남은 자연이나 인간이나 사건을 포함한 타자와의 대면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열림의 장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작가는 만남을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작품을 만들어 장을 열어보이는 것이다. 만남은 때때로 웃음이기도 하고, 침묵이기도 하고 언어와 대상을 넘어선 차원의 터뜨림이다" -이우환그의 저서 <양의의 예술> 중에서 *양의(兩儀)란 철학에서 음과 양 혹은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

이우환 i '물(物)과 언어' 1969 모노하의 대표적 작품

긴장과 이완이라는 대립 속에서 동서의 우연한 만남 같은 조응의 기운이 작품 주변을 감돈다

[이우환의 푸코에 대한 명쾌한 해설] 푸코가 감옥에 대해서 썼는데 사실 이것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잖아요 그런데 거기다 성의 문제까지 언급함으로써 역사를 흔들어버렸어요 욕망이나 충동 같은 것은 누가 막거나 감독할 수 없는 것이죠.그런 감성을 중하게 말했다는 것은 역사주의라는 게 얼마나 억지 체제인지를 알고 그것을 쳐부수는 것이죠 감옥이 뭐예요 감옥을 사회를 찌르고 전복시키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감옥의 역사에 대해서 쓰다는 자체가 테러리즘이죠 푸코는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을 끄집어내어 역사의 위선을 고발하고 시간성과 공간성을 재조명한 사람이다 - 이우환

이우환 i '관계항' 자연석과 철봉 2015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그의 설치 작품 대부분은 자연과 문명의 묘한 대비를 보여준다. 이 2가지 요소가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 거기에서 생명의 기본요소인 물과 불의 조화와 융합과 같은 천지인의 원리와 우주의 비밀도 담고 있다 철판이 윙크 하는 모습도 보인다 조용한 유머다

우리를 웃기는 엉뚱한 틈새(여백) 같은 것이 유머다. 이것을 얼핏 보면 시간성과 시대성을 부정하는 일시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로 비칩니다 그러나 유머란 일종의 풍자이고 여유이고 사치이고 프라이드이고 유희적인틈새 혹은 여백이기도 하다 -이우환

이우환 i '관계항' 침묵 B 자연석과 철판 1983/2015

이우환 그는 진정 돌과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리는 그는 무엇보다 바람의 사람이었다 돌 자연과 철판 문명이 만나서 바람을 일으킨다 그것이 바로 문명이다

백남준과 이우환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보이다. "나는 레비스트로스의 <아생의 사고>를 읽으면서 종적인 것만이 아니라 횡적인 것도 오랫동안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리라는 암시를 받았다. 그의 더욱 다양하고 폭넓은 사상을 접하며 내가 새로 재생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우환

이우환 i '대화' 캔버스에 유화 혼합안료 291*281*6cm 2014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이우환은 무엇보다 타성에 빠진 서구미술에 새로운 바람과 영감을 넣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래지향적 비전을 제시한 독창적인 현대미술이다.

감성은 각자가 느끼는 것이지 작가가 말할 부분이 아니다. 괴테는 "작가가 스스로 작품에 대해 언급을 많이 할수록 작품 자체의 에센스는 줄어든다" 라고 말했어요 니체처럼 까다로운 철학자도 괴테에 대해 "그는 예술가 개인이 아니라 문화"라고 칭찬했어요 물론 예술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으로서 담당할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요 진리는 감춰지기를 좋아한다는 말도 있어요. 예술은 감춰진 오랜 수수께끼 폭로하지 않으려는 독특한 속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화가는 보이기 위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 그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우환

이우환 i '대화' 캔버스에 유화 혼합안료 291*281*6cm 2014

그는 서구에서 단절된 소통의 관계망을 다시 회복시키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무한의 세계를 심도 깊게 보편적 감성으로 표현한 작가다.

예술가는 무엇보다 체력이 필요해요. 누구나 잘 아는 백남준씨는 불철주야 책 읽고 공부하고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이길 저길을 걷고는 하루에 저녁을 두 세번 먹고 전람회 또 전람회 미팅 또 미팅 싸우고 울고 병마에 시달리고 그리고 쓰려졌어요. 이것이 오늘날의 진정한 예술인의 모습이에요 - 이우환

이우환 i '대화' 캔버스에 유화 혼합안료 291*281*6cm 2014

그를 동양적이라고 하기에는 보다 세계적이다 그는 서양철학에도 도통한 사람이다 그의 전공이 서양철학이기 때문이다. 그의 관계는 극도의 긴장 속 커다란 울림을 주는 게 특징이다

이우환의 여백이란 동양화에서 말하는 그저 비어있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여백은 천지인이 개입된 공간의 울림이 있어야 여백이 있다고 본다 그에게 여백이 없으면 훌륭한 그림이 아니다. 예컨대 산과 산 사이에 울림(vibration)을 일으킬 때 여백이 생긴다고 본다 그린 것과 그리지 않는 것 등 그 주변까지 전체를 포함한 것의 상호작용(correspondence)에 의한 울림이 생길 때 진정 여백현상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이우환 i '대화' 벽면에 아크릴 색채 2015 그리고 대호 발굴 2015 바닥면에 아클릴 색채 모래그림 51*78cm

백남준이 2000년 구겐하임 회고전이 있었고 이우환은 11년 후인 2011년 구겐하임 회고전이 열렸다. 전자는 디지털 방식이고 후자는 아날로그 방식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찍이 노마드적 삶을 통해서 세계의 지성을 섭렵했다 그리고 동양의 철학을 서구인에게 설득시키고 감동시킬 정도로 자신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냈다. 이들의 특징은 천진성과 단순성이다. 무엇보다 대화를 화두로 삼았다. 관계와 소통이 키워드다. 이들은 적어도 서양을 제대로 안 사람이기에 서구인들이 듣지 못하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것이 먹힌 것이다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그들과 다르게 잡았던 것이다 그래서 서구인을 당황하게 했다

서구인 중 그들의 영향으로 괘도 수정을 한 나라만이 앞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한 나라는 독일이다 그 다음 프랑스이고 미국이다 백남준은 독일에서 이우환은 프랑스에서 환대를 받았다 물론 미국에서도 환대를 받았다 조금 시간이 늦기는 했지만 구겐하임 전시가 그것을 중명한다. 이들은 미국작가 리처드 세라를 연상하게 한다. 그는 미국에서는 드물게 매우 저항적 작가였다 그는 부시 정권 때도 stop BUSH라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세라는 정말 위대한 작가다. 백남준은 TV를 종이처럼 사용했다면 세라는 철을 종이처럼 사용했고 이우환은 돌을 종이처럼 사용했다


나는 미국사람들에게 "당신들 중국미술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뭔가 고맙긴 하지만 난 납득이 안 간다 당신들이 중국작가를 좋아하는데 어떤 위치에서 중국미술을 좋아하는가 " "당신들은 중국미술을 미국입장에서 혹은 중국입장에서 보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아무도 대답을 못한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미움을 산다 이에 대해서 대답하는 사람 한 사람 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중국미술을 잘 모르지만 중국의 경제와 위치가 막강해서 거기서 엄청난 에너지를 품어낸다고 생각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대답한다. -이우환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그는 점 하나로 세계미술을 호령하다 그에게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이다 그는 극도로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개입을 절제한다. 자신을 비움으로 타자의 개입을 더 넓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면에서 서양미술의 공간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어리석음을 질타하다

부산시립미술관 앞마당 이우환 전시작품 "이우환은 예술가의 개입을 극도로 자제한다. 최소한의 수단과 최소한의 개입과 최소한의 작품으로 공간을 완전히 새롭게 창출해낸다" -독일 평론가

이우환에게 작품이란 자아와 세계가 만나는 장이다. 신체란 자아와 세계를 연결하고 매개한다. 상호의존적 주체성이라는 불교적 연기와 공의 의미를 설명할 때 도입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작가의 신체적인 행위와 나타난 선 하나 점의 위치 방향성 붓 자국의 나타남과 사라짐 그리고 그려진 부분과 그려지지 않는 부분의 조응관계가 그가 보여주는 그림의 전부다 -박영택

이우환은 푸코처럼 역사주의를 깨려고 한 사람이다 푸코의 경우를 보면 역사학 대신 인류학이나 계보학(혹은 고고학)을 들어 나온다. 백남준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 몽골리언 코드 즉 인류학적인 관점이다 백남준 이우환 푸코는 이런 면에서 역사주의를 부정하고 진정한 역사인 선사시대의 계보학적 원형(니체의영향)과 연속적인 역사학과 다르게 불연속적인 고고학적인 접근 그리고 때묻지 않는 태초의 이야기를 복원시키려 한 사람이다

이들은 역사서를 고정된 것이고 언제나 승자의 논리이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의 목소리로 본 것이다 백남준은 그래서 중국의 유명한 역사책인 <사기>마저 사기라고 했다 이런 시도는 바로 우리가 근대주의에서 배운 제국주의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보들레르적이고 그의 제자인 발터 벤야민적이고 또한 니체적이다

부산시립미술관 입구

부산시립미술관 앞에 공공미술 베르나르 브네 작품

부산시립미술관에 이우환 공간이 생겨 더욱 생명력을 불어넣다

백남준 I '덕수궁' TV모니터 컴퓨터 네온볼 300*500*50cm 1992

부산시립미술관 입구의 상징 같은 대문인 백남준 작품 전자 파르테논을 연상시키나 실은 덕수궁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긴 덕수궁의 건축양식이 파르테논 신전에서 온 것이다

[부산시립미술관] 이 텍스트아트를 보고 기절할 뻔 했다 감동 받다 한국 제도교육의 문제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해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다

[부산시립미술관 2017 신소장품점] <New+Acquisitions> 2018.02.18.~2018.05.06까지 전시장소 3층 대전시실에서 열린다 전화: 051)740-4241

줄리안 오피(Julian Opie) Walking in Shoreditch 2 220*210*3.5cm

조은필 블루 20*216*120cm 이끼 연료 합판 http://choeunphil.com/

나의 작업은 블루를 주된 조형 요소로 하여 일상적 소재를 초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전환하는 설치 작업이다. 이것은 자신의 작업에서 느끼게 되는 관람자들의 반응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낯 선 순간의 체험과 현장성에 대한 근원적 실험이자 도전이다. -작가의 변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전 Ⅱ <피란수도 부산 : 절망 속에 핀 꽃>] 부산시립미술관 2층 대전시실, 2층 소전시실 2실에서 2018-03-16~2018-07-29까지. 회화, 드로잉, 사진 등 81점

김봉진(1926~) 부산출생 I '계림(경주 일대)' 캔버스에 유채 24x33cm 1945

사진을 찍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다. 김봉진은 1946년 개교한 서울대미술과 1기 입학하였으나 학업을 잇지 못하고 1948년 통영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으로 이후 40여년 동안 후학 양성에 힘써 왔다.

부산의 서양화 1세대 작가로 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미술 활동을 시작한 김봉진은 사생을 통해 얻은 인상파작이고 사실적인 화풍의 구상회화를 구사하고 있다. 1955년 결성한 미술단체 '군록회'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왕성한 작품 제작 활동으로 후배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서정성이 깃든 자연 풍경과 어촌풍경, 길위의 꽃, 아이들의 모습들 온화하고 정겨운 작품이 주를 이룬다.

김봉진의 <계림>은 근대기의 작품이 드문 우리 현실에서 1945년 작품으로 연대기적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다. 잎이 진 근경의 나무들 사이로 작은 사당 혹은 집이 한 채 보이는 이 풍경화는 40년대의 경주 일각을 보여준다. 특별하게 색상을 쓰거나 구성을 한 흔적은 찾기 힘들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기교나 의미를 담으려 하지 않는 그의 특징을 보여주며 현장성과 시대성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우신출  I '중절모' 종이에 유채 24.5*28cm 1936 부산시립미술관 소장품

1930년대 한반도에 일본제국주의의 유럽풍 세련된 문화가 유입되던 시대 모던 보이나 중년 신사의 멋을 상징하는 중절모 쑥색이 너무 시크하다. 이런 컬러는 내가 좋아하는 색이다.

이 작품의 작가 우신출(禹新出, 1911~1991)은 평생에 걸쳐 인상주의 화풍을 자기언어로 습득하고 체득한 화가로 여겨진다. 붓을 들고 대지와 만났던 인상파 화가들처럼 우신출은 평생 자연을 만나 붓과 물감으로 눈부신 빛과 색채의 세계를 열었다.

이러한 그의 창작정신은 열세 번에 걸친 개인전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던 단체전을 통해 외부로 소통되었다. 인물과 정물, 풍경 등을 담은 그의 그림들은 투박하고 거친 붓질과 소박한 주제의식에서 출발해 매우 감각적인 터치로 유화의 제 맛을 잘 살리고 있으며 이러한 특징은 지역 자연풍경 회화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박영선 I '파괴된 서울' 1950

이러한 전쟁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안 됟다. 그림을 통해 후대에게 전쟁의 비참함과 파괴된 서울의 몰골을 유감 없이 당시의 증언자로서 처참한 도시의 모습을 나름 형상화하고 있다

정인성 41*51cm 부산시립미술관 소장품

1952년 부산 광복동 사진 속 주인공은 영화감독 박구을 찍은 사진이다 당시 지식인들의 배고품과 헐벗음을 담배 한 모금에 달래는 모습 같다



[부산시립미술관 일본 근현대미술 특강 장면, 강사 서경식(도쿄경제대학)]

부산시립미술관 일본 근현대미술 특강 장면, 강사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그의 강연을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첫 부분만 잠시 듣고 나오다 "일본사람 중에서 이중섭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좀 충격적이기는 했다" 이중섭은 부인이 일본여자이고 일본에 유학한 화가인데 말이다

[마츠모토 슌스케(松本俊介, 1912-1948)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화가 마츠모토 슌스케(松本俊介, 1912-1948)의 회고전이다. 13살 때 병으로 청력을 잃은 후 화가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츠모토 슌스케 그에게 있어 그림이란 세상과 소통하는 문이자 자신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검은 윤곽선을 다용(多用)한 초기 작품에서 청색과 곡선을 기조로 한 작품군(群), 날카로운 선을 이용한 도시 풍경화까지, 짧은 경력에 비해 그의 화풍은 다양하게 변화했다.

한 가지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전쟁으로 인한 암울한 시대상과 화가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한 우수에 젖은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김상미 일본통신원

[사에키 유보(1898-1928)] 오사카 출생.

유보는 1917년 오사카부립키타노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가와바타 회화학교에 입학한다. 후지시마 타케지에게 사사받음. 1923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에 프랑스로 건너간다. 사토미 카츠죠의 소개로 만난 블라맹크에게서 질책을 받은 것을 계기로 이후 자신으 내면에서 스며나오는 포비즘적인 작풍으로 전환한다. 1926년부터 약 1년반 동안 일시 귀국. 함께 프랑스로 갔던 사토미 카츠죠, 마에다 칸지등과 [1930년 협회]를 결성, 제1회전에서 유럽 체재시의 작품을 출품한다.


또한 제13회 이과전에도 유럽 체재시의 작품이 특별전시도며 이과상을 수상, 순식간에 일본 서양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1927년 다시 도불. 작품에는 광고 포스터 등이 더해진다. 마지막까지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추구하며 혼신의 힘을 다한 창작활동을 이어갔지만, 1928년 30세라는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쉬어가는 코너>

<요셉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 1990년작 부제 늑대의 걸음으로

이에 대한 미술평론가 '박용숙'의 글을 보자

우리는 그의 굿판에 왜 피아노가 뒤로 넘어져 있는지 안다. 유명한 존 케이지의 피아노 해프닝의 인용이다. 실험미술가들이 흔히 하는 '이름 바꿔치기'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뒤샹은 변기에 화랑에 옮겨 샘으로 이름을 변조했다 멋진 사기극이다. 백남준이 이 굿을 <늑대걸음으로> 붙인 이유다. 살아있는 자가 있는 곳은 이승이고 죽은 작가 있는 곳은 저승이다. 백남준은 진혼굿을 통해 저승에 있는 요셉 보이스를 이승으로 불러내야 한다. 굿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마술이다. 이것이 현대미술이 시도하는 이름바꿔치기 이벤트이다. 백남준은 샤먼의 진혼굿에 이런 이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실제로 그는 몽골의 샤머니즘에 정통하다

백남준 파리 공연 포스터

그의 <늑대걸음으로>는 이승과 저승을 왕래하는 이름 바꿔치기의 이벤트이다. 몽골의 사면은 늑대를 저승사자로 생각한다. 늑대는 빛과 그림자 그 중간점에 이승과 저승을 왕래한다. 조형언어로 말하면 이승은 만질 수 있는 세계이고 저승은 만질 수 없는 세계이다. 늑대는 이 모순의 세계를 오고 간다. 늑대의 춤은 이 두 모순의 세계를 오가는 무당이다. 백남준의 춤은 무당춤이 무색할 정도로 멋지다.[...] 샤먼은 이승과 저승이 둘이 아니고 하나도 아닌 이 묘한 세계를 왕래한다는 뜻이다 그가 자신의 이벤트에 <늑대걸음으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다. 이승과 저승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늑대의 이야기가 현대미술의 텍스트임을 암시한다

사진 저작권 ⓒ 천호선 80년대 한국에 왔을 때 백남준 모습

백남준은 독일에서 7년간 유학하면서 왜 그렇게 많은 것을 때려부셨나? 그 비싼 피아노를 도끼로 수도 없이 깨부셨다 그의 별명은 문화 테러리스트다 그 이유는 뭔가 그것은 아마도 유럽의 기존의 예술적 기반을 완전히 쓸어버리려고 한 것이리라. 유럽문화를 <제로포인트>로 돌려놓으려고 한 것이다.새로운 예술 쓰기 위한 터 잡기 아니면 터 다지기가 아닌가 싶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을 새로 열기위한 격한 몸짓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새로운 예술은 비디오아트다

이를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백남준 처음 독일유학을 뮌헨에서 했는데 그때 그 대학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생각해 자유로운 대학인 프라이부르크 음대로 옮겼다 거기서 지도교수 포르크너 박사를 만났다 하루는 교수가 동양에서 온 젊은 청년에게 그동안 작곡한 작품을 보여달라고 하자 백남준은 악보대신 도끼를 꺼내 피아노를 내리치려고 하자 교수는 잠깐 하면서 자네는 내가 담당하기 힘드니 다른 선생을 찾아보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이 제자의 음악적 아이디어와 수행방식을 보고 <비상한 현상>이라는 말을 남겼단다

이런 백남준의 파괴행위를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즉 '단(斷)'은 '각(깨달음)'이라는 진리다 모든 것을 부셔 버리고 제로로 만들 때 진정한 깨달음이 오고 거기에서 새로운 시작이 온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