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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미술사

[윤석남] 미국 여성작가 '오키프'보다 낫다

한국 여성들 사랑이 넘쳐 남을 도와주다 보니 팔이 아주 길어졌다. 천수 관음보살이 되다. 이 정도 작품(윤석남 작가)이면 미국의 여성작가 '오키프'보다 낫다. 윤석남의 작품은 자애로움과 강인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오마이뉴스 기사> http://omn.kr/drgv

 

마흔에 시작한 작가의 삶... '그녀'의 이야기

[리뷰] 2015 SeMA Green 윤석남전 '심장' 6월 28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www.ohmynews.com

1979, 40세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자기만의방(A Room of One's Own)’, 곧 작업실을 갖게 된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첫 열정으로 오롯이 작품활동에 몰두해 온 페미니스트 작가 윤석남. 인고의세월을 긍정적인 태도로 견뎌온 자신의 어머니를그려내고 조각하던 그녀는 시나브로 여성의 삶,동식물의 생태 등으로 그 관심사와 조형 언어를성공적으로 확장시키며 과거에 머무르는 작가가 아닌여기, 오늘을 이야기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설치 작가로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윤석남의 1980년대 초기작부터 2015년 최신작까지 약 30년간의 작품들을 망라하여 한 공간에서 선보이는 <2015 SeMA Green:윤석남심장>전은 서울시립미술관이 한국 작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격년제로 개최하고 있는‘SeMA 삼색전(블루, 골드, 그린)’ 중에서 원로 작가를초청하는 ‘SeMA Green’의 두 번째 전시이다.전시는 크게 네 가지 주제로 나뉜다. 윤석남이 지닌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들로구성된 방, 자아를 해체하고 만물(萬物)과 소통하고자하는 의지가 표출된 작품들로 구성된 공간, 그리고그녀의 작품 속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는 문학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섹션, 마지막으로 작가가초기부터 현재까지 그 끈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만들어오고 있는 역사 속의 여성 위인들로 구성된 섹션으로 이루어진다.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http://omn.kr/4tu8

 

버려질 뻔한 너와가 '미인도'로 되살아나다니...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윤석남전, 학고재 본관에서 11월 24일까지

www.ohmynews.com

붉은 밥(Red Meal), 125x10x158cm, acrylic on wood, 2003

윤석남의 초기작부터 최근작을 한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연대기 순으로배열되는 고전적인 회고전 형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이번 전시는, 커다란 주제 속에서 서로 다른 시기의작품들이 공명하는 장으로서 관람객들에게 다가가고자한다. 이를 통해 윤석남의 열정적이면서도 한 없이 너그러운, 만물에 대한 마음과 삶에 대한 태도가 실로다양한 형식의 작품들로 표출되어 왔음을 흥미롭게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서울시립미술관

<여성신문>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891

 

“지금은 따뜻한 마음, 배려가 필요해요” - 여성신문

바로 지금,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층 중앙에는 거대한 심장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작가 윤석남은 이 분홍빛 심장에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신의 재산을 쌀과 바꿔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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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이자 소설가, 기자였던 아버지 윤백남씨에 대한 기억은.

“중학교 때였다.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 학교는 좋았는데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잘하는 건 잘하고 못하는 건 못하는 아이였다. 그때 아버지가 성적표를 보시더니 ‘석남아, 낙제만 안 하면 돼.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돼’ 하셨다. 중학교 때도 학비를 내던 시절이었으니 낙제하면 돈이 들지 않나.(웃음) 아버지는 신발이 두 개인 적이 없었다. 하나가 생기면 하나는 후배에게 주셨다. 또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란 갔다가 다시 서울로 환도했을 때 피란민들이 집을 점령하고 있더란다. 나가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남의 집에서 살았던 분이다. 26살 아래인 당신 부인에게는 꼭 존댓말을 하셨다. 항상 존댓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26살 차이가 나신다.

“아버지는 유명한 소설가였고, 어머니는 신문에 연재되는 아버지 글의 팬이었다. 그 작가가 어느 날 자기 집으로 하숙을 들어온 거다. 그러니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됐겠나.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집에 하숙을 왔는데. 아버지가 하숙집 딸을 꼬여서 도망을 갔다. 45살 유부남이 19살짜리 처녀를 데리고 도망간 게 우리 어머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미워했다. 솔직히 싫어했다. 그건 잘못한 일이고, 아버지니까 용서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작은아버지가 유명한 전기공업자였고, 한국전력 전신인 조선전업 고문이었는데 어머니는 한 번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자기 형의 첫째 부인이 아니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어려운데도 10원 한 장 손 안 벌리고 자신이 다 감당했다. 두 번째 부인, 평생 그게 당신의 응어리였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굉장히 사랑하셨던 것 같다.

“사랑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다시 태어나도 니들 아버지하고 결혼할 거다’ 그러셨다. 내가 아버지를 뭐라고 비난하면 ‘넌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라고만 하셨다. 남편을 정말 존경하고, 오로지 남편만을 위해 사셨다. 95에 돌아가셨는데도 아버지 무덤을 좋은 데다 안 모셨다고 우셨다. 그래서 나중에 두 분을 좋은 곳에 모셨다. 그런 사랑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출처 : 여성신문(http://www.wome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