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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미술사

[손장섭] 나무, '신'과 동급으로 그리다

<이양하 선생(1904년 생 전 서울대문리대 학장, 영문학자, 수필가)의 글은 훌륭하기는 하나 연배가 있어서 그런지 엄숙주의가 있기는 하네요. 나이로 봐서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이양하 선생은 나무를 '견인주의자'라고 할 말은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오늘 다시 읽어보니 나무를 '물과 흙과 태양의 자식'으로 비유했군요. 대단합니다. 나는 나무를 '물과 불과 흙의 삼중주'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거의 비슷하네요. 그래서 '천지목'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았다. 하늘과 땅과 태양의 합작인데 나무가 또한 놀라운 것은 인간처럼 '직립(être debout)'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는 식물이지만 거의 인간과 동급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조상들은 나무를 인간과 동급이 아니라 더 높여서 신과 동급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신령한 나무를 신목(神木)이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서 신목을 가장 빼어나게 묘사하고 재현하는 화백이 있으니 그가 바로 '손장섭'이다. 수백 년 역사의 증인으로 이 땅을 지켜온 나무의 아우라를 대신 말해준다..

손장섭 I 신목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는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이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不滿足)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孤獨)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나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以心傳心) 의사(意思)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장이 친구나,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 올 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에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厚待)하고 새와 바람은 박대(薄待)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해 하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놓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 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默禱)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온갖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嚴肅)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理由)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 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보고, 흔히 자기 소용(所用) 닿는 대로 가지를 쳐 가고 송두리째 베어 가곤 한다. 나무는 그대로 원망(怨望)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로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간 재목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 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意者)요, 고독의 철인(哲人)이요, 자신의 분수를 아는 현인(賢人)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輪廻說)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이양하

<나무찬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 Les arbres communiquent entre eux, ils sont sensibles, réactifs. Capables de s’adapter aux variations météorologiques de la lumière et du vent ils ont aussi des capacités d’apprentissage. Mais à quoi pensent-ils quand ils s’agitent au gré du vent ? 나무는 서로 의사 소통하고 민감하고 반응한다. 빛과 바람의 날씨 변화에 적응할 수 있고 또한 학습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와 나무를 흔들 때 무슨 생각을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