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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J. Beuys: A tribute to N. J. Paik' -김홍희

[Joseph Beuys-A tribute to Nam June Paik] 원문 발췌
전시기간 : 2006 년 3월 10일-4월 27일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새로운 영상을 찾아서
-김홍희 전시립미술관장 

백남준, 그가 너무나 아끼는 동료 예술가 보이스에게 한국명을 지어 주다. 우정의 표현이자 그에게 주는 마음의 선물이었겠죠. '보이수(普夷壽)'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충돌하는 동서 문명의 장벽을 허무는 '해원굿' // "동은 동, 서는 서, 이 둘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키플링(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 시인)에게 백남준은 강력한 펀치를 가하다.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서구인들의 교양의 상징으로 높이 받드는 피아노를 때려 부수면서 새로운 창조와 탄생을 추구한 것이다)" -백남준 // "표현은 인간의 자유를 뜻한다. 예술은 인간의 배설적 행위이기 때문에 사회의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 -백남준

비디오 예술의 양식 변화

비디오 예술이란 무엇이며, 백남준은 비디오작업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비디오는 무엇보다 TV와의 관계에서 그 역사적 좌표와 예술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TV는 대중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대중과 불균형한 관계를 이루어 왔다. 조지 오웰이 이미 TV를 일방적인 정치 도구로 예고하였듯이, TV는 보급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송신상의 일방적으로 현대인의 사고를 규정하는 위압적 존재로 군림하였다. 스크린과 방송망이 세계를 지배하는 가운데 현대인은 상상력과 표현력이 위축되고, TV이미지는 현실을 반영한다기보다는 현실의 일부가 되어 이미지 세상을 구축하여 온 것이다. 비디오 예술은 TV의 이와 같은 소통상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대용 TV'로 등장하였으며,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은 좀더 적극적인 애용 TV, 즉 관객을 작품에 끌어들임으로써 상호적 매체'참여TV'가 되려는 예술적 노력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은 그 표현과 양식에서 어떠한 변화를 보인다 해도 항상 관객과의 상호 소통을 다루는 참여의 문제로 귀결된다. 참여 TV로 고안된 초기의 '장치된 TV'나 말기의 위성 작품들은 물론, 가장 형식주의적인 테이프 작품들도 그 색다른 이미지의 효과가 관객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참여 TV의 수행이었다. 그의 전 작업은 내용 면에서는 참여의 문제로 일관되고, 형식면에서는 재사용 수법의 반복적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명확한 분류의 기준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작업 양식상 설치 작업, 테이프 제작, 인공위성을 통한 생방송 작업의 세 범주로 대별할 수 있다. 백남준의 작업은 기술의 진보와 그 발전적 양상을 함께 하기 때문에 이러한 양식상의 분류는 대체로 기술 발전에 따른 시대적 분류와도 일치한다. 즉, 60년대에는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TV수상기로 작업하는 '장치된TV'로 시작하여 '수상기 설치 작업'으로 발전하고, 70년대에는 휴대용 비디오 사용과 함께 비디오 신디사이저의 도움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테이프 제작에 집중하고, 80년대에는 보편화된 인공 위성의 활용과 함께 그의 우주 작업이 전개된다.

TV설치 예술
1963년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은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 예술의 문을 여는 효시 적인 전시회였다. 백남준은 이 전시회를 통하여 전자 비전으로 전자 음악의 영역을 확장시키겠다는 그의 복합 매체 이상을 실현했을 뿐 아니라, 전자 비전을 비디오 예술로 구현시킨 최초의 참여 TV인 '장치된 TV'를 제작, 전시함으로써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등단하였다.

백남준의 장치된 TV는 주로 텔레비전의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 묘를 창출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그 조작 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적 테크닉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예측할 수 없는 비결정성의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었다. 부퍼탈의 13대의 장치된 TV들은 우연 작동에 의해 각기 다른 13종류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한 공간에서 동시에 보여짐으로 문학이나 공연 같은 시간 예술에서는 불가능한 동시적 시각을 제시하였다. 결국 13개의 이미지들은 기존의 재현 예술에서는 불가능한 동시적 시각을 제시하고, 그 미묘한 차이들을 함께 보이는 '동시 시각적 감흥'을 유발함으로써 기존의 지각 경험과는 다른 새로운 지각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퍼탈의 장치된 TV는 인식론적 차원의 최초의 참여 TV가 되는 것이다.

장치된 TV의 중요성은 새로운 이미지를 산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하나의 조각적 오브제가 되어 수상기 설치 작업의 기본 단위로 작용한다는 점에 있다. 백남준의 설치 작업은 영상 이미지의 창조와 수상기의 조각적 구성이라는 별개의, 그러나 상호 연관되는 두 작업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며, 설치된 수상기의 이미지 성격과 그 생성 방식에 따라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설치된 수상기 이미지가 그 내부 회로 변경에 의해 특수한 시각적 효과를 산출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내부 회로를 조작하는 대신에 비디오 테이프를 사용하여 좀더 현란한 시청각적 이미지를 얻어내는 경우이며, 셋째는 폐쇄 회로 설치를 통하여 카메라가 포착한 현장이 동시에 모니터로 피드백 되어 거울의 효과를 창출하는 경우이다.

첫째 그룹의 설치 작업은 1963년 부퍼탈의 장치된 TV전시에서 시작하여 6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다. 1965년 그의 첫 미국 개인전에 전시되었던 <자석 TV>는 장치된 TV로 활성화시킨 대표적 설치 작업이다. 수상기 외부에 자석 막대기를 매달아 관객이 그것을 움직일 때마다 다양한 형태의 추상 패턴을 얻도록 고안한 이 <자석 TV>야말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참여 TV인 셈이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1965~1967)와 (1963~1981)는 복수의 모니터를 사용한 대규모 설치 작업이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12개의 수상기들이 화면에 초생달에서 보름달까지 변화하는 달의 모습을 보이도록 내부 회로가 변경되었고, 24개의 수상기를 사용한 역시 브라운관 조작으로 화면 위의 전자 직선이 시계 바늘처럼 시간의 흐름을 알리고 있다. 시간의 은유인 달과 시계를 주제로 한 이 같은 시간의 시각화 작업을 통하여 백남준은 순간과 영원은 동일하다는 동양 철학에 입각한 그의 시간 개념을 표출한다.

내부 회로를 조작하는 첫째 그룹의 설치 작업이 정적인 분위기와 명상을 자아낸다면, 비디오 테이프를 사용하는 둘째 그룹의 설치 작업은 팝아트 경향의 다채로운 시청각 효과를 창출한다.

이 그룹의 작품은 비디오 촬영기와 비디오 합성기의 사용으로 테이프 제작이 가장 활발하였던 70년대 중반에 많이 제작되었다. VTR의 발명은 TV 내부 회로 조작이 마련하는 제한된 이미지, 즉 변형된 방영 이미지나 음극선이 만드는 추상적 패턴으로부터 무한한 이미지 세계로의 진입을 뜻했다. 다시 말해 휴대용 카메라와 함께 세상은 온통 이미지의 원천으로 변해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디오 이미지로 화하는 것이다. 더구나 촬영된 비디오 이미지는 전자적 현란함을 띄고 새로운 타입의 시청각적 복합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이다.

1975년에 처음 선보인 <물고기가 하늘을 날다>는 20개의 수상기들이 바닥을 향해 천재에 매달려 있는 색다른 설치 작업이었다. 비디오 테이프가 방영하는 물고기, 비행기, 댄서들의 나는 동작을 보기 위해 관중들은 바닥에 누워야 한다. 물고기를 공중에 띄워 문맥을 벗어나게 하고, 앞을 보는 대신 위를 보게 하여 감상의 시각을 바꾸고, 또한 여러 장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동시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이 작품은 몇 차원에서 관객의 지각 변화를 요구하는 차며 TV로 기능 하는 것이다. 같은 해의 <비디오 물고기>에서는 물탱크에 담긴 산 물고기와 투명한 물탱크 뒤에서 어른거리는 비디오 영상 물고기를 병치하여 일종의 전자 수족관을 만든다. 백남준은 여기서 산 물고기와 전자 물고기를 함께 놀게 하여 자연과 문화의 조화를 시도할 뿐 아니라, 물고기의 영상적 재현과 현실적 제시를 통하여 재현과 제시라는 현대 미술의 미학적 문제를 부각시킨다.

1986년에 작고한 요셉 보이스에게 바치는 <보이스/보이스>(1987)보이스 복스(Beuys Vox)’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VLKRUKPKN는 50개의 수상기가 하나의 거대한 사다리꼴 화면을 이루는 기념비적 규모의 설치 작업이다. 새로운 확대 기술이 보이스의 이미지를 사다리꼴 대형 화면에 클로즈업시키고, 다양하고 화려한 이미지들이 무기체적 구조물에 활력을 불어넣어 하나의 전자 생명체를 만든다. 관객은 이러한 압도적인 전자 환경 속에서 눈으로 본다기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새로운 지각경험을 맛보는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하여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에 설치한 <다다익선>은 무려 1,003개의 수상기로 만든 탑 모양의 초거대 조형물이다. 3개의 테이프가 방영하는 이미지들을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반복, 병치시킨 이 기념탑은 그 규모뿐만 아니라 시각적 효과에서도 생태를 변화시키는 마력의 탑으로 변한다.
<보이스/보이스>에서는 수십 개의 화면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를 만들더니, <다다익선>에서는 복수 이미지들의 동시적 시차적 방영으로 시각적 다양성을 산출하다. 이렇게 이미지의 파편화 혹은 복수 화를 통하여 미시적 시각을 제시하고, 또 단일 이미지의 확대를 통하여 거시적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백남준은 새로운 지각 형태를 개발하고, 참여 TV강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세 번째 그룹의 설치 작업은 거울 구조와 같이 수상기가 피사체를 반영하는 피드백 구조 때문에 나르시스 신화에 입각한 나르시시즘 비디오 미학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다. 수상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관조하는 예술가 또는 관객은 대상화된 자신, 즉 '나'로부터 분리된 나의 분신을 대면하게 된다. 이러한 나르시시스트적 상황 역시 참여의 문제로 귀결된다.

예를 들면, 1969년 하워드 와이즈 화랑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비디오 그룹전 <창조 매체로서의 TV>에 출품했던 <참여 TV>는 제목 그대로 관중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폐쇄 회로 설치 작품이었다. 수상기 앞의 관객이 카메라가 포착한 자신의 이미지를 관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즉 관객이 수상기 외부에 설치된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내면 화면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이 채색되고 왜곡되어 일종의 추상 패턴을 만들게 된다. 여기서 관객은 또 하나의 자기를 대면하는 심리적 긴장으로터 이완되어 이미지 창조 작업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비디오 테이프 예술
비디오는 상호적인 매체이다. 그 매체의 상호성은 우선 매체와 친숙할 수 있는 비디오의 메카니즘에 기인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점은 비디오를 통한 새로운 이미지 개발이 인간 지각을 변화시킨다는 생태학적 차원의 소통 문제에 관계된다. 백남준의 비디오 테이프 작업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직접적이고 첩촉적인 참여 TV를 만드는 일로 일관되어 있다. 그는 비디오 테이프의 직접적이고 접촉적인 효과를 배가하기 위하여 그 제작 과정에서 콜라쥬 편집 수법을 사용한다. 회화적 콜라쥬가 현실의 우연적 요소를 화면에 차용하여 예술의 내적 논리를 파괴하고 동시에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듯이, 음악적 비음악적 원천들로부터 다양한 소리의 합성을 만드는 음악적 콜라쥬 테이프 역시 비논리적 구성 자체가 제시하는 새로운 미학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백남준이 1968년 보스턴의 WGBH-TV의 실험 방송 <매체는 매체다>프로그램을 위해 제작한 비디오 테이프 <전자 오페라 1번>은 콜라쥬 기술에 의한 이미지의 반복, 중첩, 분열 등 백남준 특유의 단음식 스타카토 양식을 보이는 초기 대표작이다. 콜라쥬 수법에 의한 이미지의 시청각적 효과는 비디오 신디사이저 개발과 함께 첨예화되었다. 백남준이 1970년 일본인 기술자 아베의 도움으로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해 구축한 비디오 신디사이저는 일종의 영상 마술사로, 촬영된 이미지를 변형, 왜곡, 채색할 뿐 아니라, 컴퓨터 조작으로 순수 추상 패턴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백남준은 결국 콜라쥬 수법과 신디사이저 사용으로 새로운 지각 경험을 요구하는 직접 접촉적 혼성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70년 길거리에 신디사이저를 설치하고 테이프를 제작하였던 <비디오 코뮌>을 비롯하여, 1972년 <뉴욕의 판매>, 1973년의 <글로발 그루브>, 1977년의 <과달케널 진혼곡>등은 신디사이저에 의한 비디오의 양식적 특성을 과시한 대표적 테이프 작품들이다.

쟝 폴 파르지에는 백남준 예술의 특성을 '이중'이란 개념으로 풀이하였다. 그가 말하는 이중이란, 이중으로 나뉘는 분리 작용과 이중으로 겹치는 중복 작용을 함께 포함하는 이중화 작업으로서, 파르지에는 이것이 백남준 예술의 기조를 이루는 핵심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백남준의 이중에 대한 집념은 동일 이미지를 분열, 중첩시키는 이미지의 반복 작업 또는 재생 작업에서 감지된다. 그밖에도 특정 이미지를 한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주제를 부각시킬 뿐 아니라, 동일 이미지들을 여러 작품에 거듭 사용하여 작품간의 문맥적 연결을 시도한다. 예를 들면 <글로발 그루브>의 반나체 고고 댄서는 백남준 테이프의 광고 모델처럼 이후 다수의 테이프 작품에 재등장하여 백남준 이미지 목록을 구성한다. 또한 백남준의 테이프마다 거의 초대되는 아방가르드 동료들인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알렌 기스버그 등은 이미지의 반복적 차용에 의해 우상화되는 스타 이미지로 변신한다.

이렇게 백남준은 동일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미디어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한편 재래 예술의 유일성을 훼손시킨다. 대향 생산에 의한 수적인 확산이 재생산을 위한 새로운 미학을 낳게 하는 질적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발터 벤야민도 말하지만, 백남준은 동일 이미지의 반복적 사용으로, 또한 복제 가능한 비디오 테이프 제작으로 재생산 시대의 예술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중성에 입각한 백남준의 비디오 테이프는 복제 예술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모방을 통하여 풍자하는 '메타 비평'을 수행한다. <뉴욕의 판매>는 상업주의와 광고 문화의 현장인 뉴욕을 풍자적으로 모방함으로써 상업주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고를 획일화시키는 광고의 지대한 영향을 다시 한 번 생각케 한다. <과달케널 진혼곡>은 무대를 2차 대전의 참혹한 현장이었던 태평양 남서부 솔로몬 제도의 과달케널 섬으로 옮겨 전쟁의 기억을 회상시키고 문화와 이념의 차이에 따른 지역적 분쟁을 고발한다. 백남준의 현실 비판은 직설적이라기 보다는 풍자적이거나 은유적으로 심각한 내용을 익살을 통해 표출하기 때문에 프랭크 질레트의 말처럼 '숭고함과 희극성' 사이를 왕래하는 양면성, 혹은 이중성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위성 중계 공연 예술
80년대 비디오 예술의 새로운 양상인 'TV 방송 예술'은 무엇보다 그것이 생방송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생방송은 녹화 방송과는 달리 '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인생의 불가항력적 요소들을 그대로 반영한다. 예측할 수 없는 인생같이 생방송은 방송상의 과실을 삭제할 수도, 회복할 수도 없는 불운과 함께, 우연에 의한 뜻밖의 효과가 일어나는 행운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생방송은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인생처럼 리얼하다. 삶과 같이 직접적으로 와 닿는 이러한 생방송이야말로 상호 소통적 참여 TV의 이상적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은 TV 생방송 공연을 위성 중계를 통하여 전 지구에 동시 방송함으로써 사방 소통의 참여 TV를 성취한다. 생방송을 통한 시청자와의 수직적 소통을 위성 중계를 통한 지구적 차원의 수평적 소통으로 확장하여 결국 사방 소통을 이루는 하나의 '지구촌'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직 수평의 상호 소통을 이루는 백남준의 위성 공연은 그의 행위 음악의 연장으로서 비디오 '전자 오페라'에 이어 우주적 차원의 참여 TV를 실천하는 ' 우주 오페라'가 되는 것이다.

본격적 차원의 위성 예술은 백남준의 우주 공연 작품 1984년의 <굿모닝 미스터 로웰>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뉴욕과 파리에서 동시에 지행되고 있는 공연 프로그램이 베를린, 로스엔젤레스, 서울 등 국제 대도시들로 중계되는 하나의 지구적 사건이었던 <오웰>은 막대한 공연 규모나 중계 범위에서 위성 예술의 새로운 국면을 먹었을 뿐 아니라, 백남준 자신에게는 우주 오페라 3부작의 막을 여는 의미 깊은 작업이었다. 뉴욕으로부터 로리 앤더슨과 피터 가브리엘의 노래, 존 케이지와 머스 커닝햄의 음악과 춤, 알렌 기스버그와 피터 올로프스키의 시 낭송과 함께,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의 요셉 보이스의 피아노 연주, 밴보티에 '쓰기'와 콩바스 '그리기'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위성중계로 전세계에 방영함으로써 백남준은 TV에 대한 오웰의 부정적 시각을 부정하고 상호 소통 매체로서의, 예술 매체로서의 TV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백남준은 <바이 바이 키플링>을 그의 우주 오페라 제 2편으로 마련하였는데, 여기서는 동성의 만남이라는 특정 주제에 의하여 소통의 문제를 부각시킨다. 1986년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에 때를 맞춘 <키플링>은 동서양을 잇는 세 도시, 뉴욕, 동경, 서울에서 공연이 벌어지고, 그것이 보스턴과 캘리포니아에 동시 중계 방송되는 태평양 횡단의 우주 공연이었다. 뉴욕에서는 피립 글래스, 테이빗 튜더의 음악과 리빙 디어터 무용단의 춤이 소개되고, 낙서 화가 키스해링이 출연하였다. 이들과 함께 김금화의 신 딸 최희아와 가야금 주자 황병기가 협연하여 동양과 서양의 출연진이 자기를 함께 하였다. 동경에서는 일본의 음악가 사카모도, 건축가 이소자키, 의상 디자이너 이세 미야운데 아시안 게임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가 미국의 최초 여류 마라톤 주자의 해설로 중계되었다.

<키플링>은 <오웰>보다 좀더 많은 사건을 취급하고, 테이프를 다양하게 사용하였으며, 지역 인물을 많이 등장시킨 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가장 현저한 점은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일 뿐 이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영국의 시인 키플링의 단언을 반박하듯, 동양인과 서양인의 만남의 장면들을 한 화면에서 병치시키는 새로운 양분 스크린 수법을 사용한 점이다. 미국측의 해링과 일본측 미야키의 우주를 통한 만남이 한 화면 위에서 펼쳐지고, 카베트와 사카모도의 내민 손들이 화면에서 이어져 위성 악수를 만든다. 또한 뉴욕과 동경에 헤어져 있는 미국 쌍둥이 자매를 화면을 통해 다시 결합시킴으로써 양분된 스크린을 통한 우주적 만남의 효과를 배가한다. 그러나 가장 드라마틱 한 만남은 서울 한강변을 달리는 마라톤 경기의 긴장감이 뉴욕으로부터 연주되는 필립글래스 음악의 격앙되는 리듬에 맞추어 한층 고조됨으로 음악과 운동이 혼연일체가 된 점에 있다. 글래스 음악의 '전자 오르가즘'은 목전의 승리를 앞두고 시간과 함께 가중되는 달리는 신체의 고통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백남준은 마라톤 경주 실황을 그래서 음악에 맞추어 중계함으로써 동과 서의 만남에 음악과 운동의 만남을 교차시켰던 것이다.

백남준은 동양과 서양의 지역적 이념적 차이는 예술과 운동 같은 비정치적 교류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고 믿고, 그러한 신념을 '예술과 운동의 칵테일'이란 새로운 이학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한다. 예술과 운동의 칵테일이란 착상은 백남준 우주 오페라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손에 손잡고>에서 기본 테마로 부각된다. "예술과 운동은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매체들이다. 그러므로 전 지구적인 음악과 춤의 향연은 전 지구적인 운동의 향연과 함께 행해져야 한다."라는 취지와 함께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경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 작품은 서울 KBS-TV와 뉴욕 WMET-TV가 공동 추최하고, 이스라엘, 브라질, 서독, 중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등 10여 개 나라가 참가한 최대 규모의 위성 작업이었다. <손에 손잡고>는 <오웰>이나 <키플링>과는 다르게 쇼적 프로그램보다는 이야기 구조에 의해 진행되었다. 우주의 방문객 모비우스 박사가 잔학하고 무지한 인간을 파멸시키고자 한다. 구원을 바라는 지구의 대변인은 그 심판자로 하여금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채로운 공연을 관람하도록 권유하면서 용서를 구한다. 전세계 10여 개 나라에서 벌어지는 노래와 춤의 향연, 그리고 서울 올림픽 실황 중계가 모비우스 박사에게 헌정되는 프로그램이며, 그것이 <손에 손잡고>의 내용이 된다.

백남준은 <손에 손잡고>에서 동양과 서양의 만남뿐 아니라 중국, 소련 같은 공산 국가들과의 만남도 이루었다. 결국 예술과 운동의 칼테일은 이념의 장벽을 초월하여 '지구를 하나로 감싸듯' 뭉쳐놓았다. 더구나 광대한 팝음악 팬과 운동 팬을 한 자리에 모아 가장 높은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예술과 운동의 칵테일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참여 TV가 아니겠는가?

결국 백남준의 우주 오페라 3부작은 <오웰>에서 TV 매체의 상호 소통 가능성을 역설하고, <키플링>에서 동양과 서양을 만나게 하고, <손에 손잡고>에서 이념과 취미를 초월한 하나의 지구촌을 만들어 전 지구적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그의 참여 TV이상을 실현한 셈이다. 또한 이 마지막 작업에서는 이전의 두 작업과는 다르게 주요 지역의 공연을 타지역에 보내는 중앙 집권식의 구심적 방송을 탈피하고, 전지역이 공연에 참가하는 지역주의 적인 혹은 민주적인 탈 중심의 중계 방송을 수행함으로써 실제적 의미의 사방 소통을 이룩할 수 있다.

새로운 이미지, 막강한 소통의 힘
'장치된 TV'에서 시작하여 우주 공연에 이르기까지 30년간의 비디오 작업을 통하여 백남준은 "마치 출렁이는 전자 대양처럼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들 조명벽, 월 투 월 TV" 라는 그의 비디오 환상을 투입시키고 있다. 그는 20여 년 전에, 콜라주가 전통 유화를 대신하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며, 우리는 종이 없는 사회에 살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지금 유화는 여전히 벽에 걸리고 종이는 아직도 필수품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이라는 대중 매체는 비난과 변호 속에서 부인학 수 없는 현실로, 가장 막강한 소통 매체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비디오 예술이 창조한 새로운 이미지는 새로운 지각 경험을 유발하여 인간 형태의 변화를 초래할 뿐 아니라, 그것이 보내는 예술적 메시지는 대중 취미를 고양시키고 비판 능력을 신장한다. 상호 소통을 예술 목적으로 삼는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은 비디오의 이러한 잠재력을 활용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접촉 적인 참여 TV를 만든다. 머지않은 장래에 2인치 두께의 얇은 대형 TV수상기가 개발되고, 원하는 페이지를 찾아보듯 원하는 장면을 마음대로 찾아볼 수 있는 임의 추울 방식의 비디오 시스템이 개발되면, TV화면이 벽의 그림을 대신하고, 책이 무용해지리라는 백남준의 예견이 맞아들어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김홍희/ 쌈지스페이스 관장, 2006 광주 비엔날에 총감독, 저서로는 '백남준과 그의 예술', '플럭서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