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도 잠시 기자였다> 백남준 독일에 유학했을 때 1957년 이후 일본의 음악전문잡지 통신원 즉 기자를 한 셈이다. 아래는 1963년 6월 8일 <요미우리> 신문 백남준 소개기사인가 당시 그는 작곡가로 기록되어 있네요.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말은 나중에 생긴 것이죠.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 뭐 그런 내용 같네요. During his studies in Germany, Paik wrote for the progressive Japanese music journal <Ongaku Geijutsu(音楽芸術)> For its October issue in 1957 , he contributed an article. <The Bauhaus of Music Attending Darmstadt New Music lectures>, describing the new legendary music course.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 백남준은 일본의 진보 음악 저널인 '음악예술(1957년 10월호)'에 기고하다.. 새로운 전설적인 음악인 <바우하우스 다름슈타트 신 음악 강의>에 대해서 설명하는 글이었다.
1962년-1963년 독일에서 백남준(작곡가)이 일본 요미우리 기고문 인가. 제목은 파괴의 아름다움 백남준은 '저항자, 전복자, 반란자, 교란자, 이탈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뉴욕타임스 부고기사에서 그는 '성공한 반란자'는 제목을 붙였다. 그의 파괴가 진정한 창조의 어머니임을 증명했기 에. 어설픈 파괴 전복 반란은 성공할 수 없고 성공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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