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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미술사

[인상파] 마네가 대선배, 그 시대를 다시 보기

인상파의 문을 연 마네 그러나 인상파라는 말은 모네의 작품에서 왔다

마네는 인상파 전위부대에서 항상 총 대장이었다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 모네는 과연 누구인가? 맨 오른쪽 끝에서 2번째 키큰 사람이 모네다 모든 인상파 화가들 오직 마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집중하고 있다 화가는 앙리 팡팽 라투르(Henri Fantin-Latour) 제목 'A Studio at Les Batignolles(1870)'

어느 시대나 화가와 시인을 긴밀하다 랭보 베를렌 금방 알아볼 수 있네요 아래작품 By the Table (1872) 화가는 앙리 팡팽 라투르(Henri Fantin-Latour) [여기 등장하는 인물 왼쪽부터 오른 쪽에 앉아 있는 사람 : Paul Verlaine, Arthur Rimbaud, Léon Valade, Ernest d'Hervilly, Camille Pelletan.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 있는 사람 : Pierre Elzéar, Émile Blémont, Jean Aicard. un vase rempli de fleurs, au premier plan, qui serait un symbole du poète absent, Albert Mérat.

파리에 대형백화점(Le bon marche)에서 세계에서 처음 생기다 발터 벤야민이 파리에서 이걸 보고 산업사회문명비평 글을 쓰다 파리는 산업소비사회가 되면서 오스만이라는 도시행정가가 파리를 중세도시에서 계획도시(대로 Boulevard 생성)로 변모시키다

그리고 철의 시대 에펠탑이 생기고 현대건축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다 그리고 무엇보다 엑스포 연이어(1855-1867-1878-1889-1900 이때 에펠탑이 세워지다)

파리에서 열리다 보들레르는 이런 현대도시의 변모 속에 상징적이고 지성적인 현대시가 탄생시키다. 도시의 시궁창도 다 보여준다 아케이드에 요즘처럼 셀프 서비스(self-service) 가게가 처음 들어서다 그리고 모네의 철도역을 그리기 시작하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트 프로젝트

<마네가 모네보다 8살이 많군요> 마네가 그린 모네 그림, 모네는 항상 부인을 동반하고 다녔고 그림 그릴 때도 예외는 아니다. 마네는 모네가 너무나 열심히 배 위에서까지 그림을 그리자 그에게 용기를 주고 칭찬해주는 차원에서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아래 마네작품은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에서 온 것(?)> 마네와 보들레르는 절친이었다. 마네는 부친이 판사로 상류층이었고 보들레르도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저주받는 시인과 화가의 길을 걸었다. 보들레르는 유명한 말을 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엽기적이다(Le beau est toujours bizarre)". 바로 마네의 그림이 당시 기준으로 허접하고 당혹스럽고 엽기적이었다.

두 사람은 완벽하게 통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네는 그림을 그릴 때 지극히 평면적으로 쓱쓱 그렸다. 당시 사람들이 볼 때 성의 없는 건성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당시로는 그런 그림은 그림이 아니었다 그는 그럼에도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서 거품이 없는 회화를 그린 것이다. 그의 그림은 파티장에 잠옷을 입고 등장하는 사람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이 호크니의 작품(호크니 선생님, 좋은 하루 되세요!)의 오리지널이 있다. 누구의 작품인가? 영국의 교양 있는 상류층 인사들이 예술가 호크니에게 경의를 표하는 내용이다.

쿠르베 선생 안녕하세요 어느날 쿠르베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허름한 복장을 하고 동네를 지나가는데 이 지역의 명성 높으신 인사들이 무명의 예술가 쿠르베를 알아차리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장면이다

[1848년은 전 유럽 혁명기 ‘광란의 해’] <프랑스 2월혁명>, <독일 3월혁명>, <빈 혁명>, <베를린 혁명>,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뵈멘 크로마티아의 반란>, <헝가리 혁명>, <이탈리아 혁명> <차티스트 운동> 그런데 최근이 이런 유럽 혁명기가 1968년에도 똑같이 반복되다. 프랑스 독일 체코 등등

<프랑스 2월혁명> 1848년 2월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유럽 제국에도 파급되어 빈 체제의 붕괴를 초래했다. 7월 왕정은 소수의 대지주·은행가·대부르주아지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정부는 이들 계급과 밀접한 관계였다. <독일 3월혁명> 1848년부터 1849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시민혁명. 파리의 2월혁명은 독일에 중대한 영향을 불러일으켜 1848년 3월 5일에는 남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하이델베르크에 모여 전독일 통일회의 준비를 결정했다. <빈 혁명> 184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빈에 혁명이 발생, 군중은 란트하우스의 의회로 쇄도하여 궁전까지도 포위했다. 황제는 시민 요구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궁정 반대파의 사직 요구에 굴복, 런던으로 망명했다. <베를린 혁명>베를린에서는 1848년 3월 5일 시민의 폭동이 발생했고, 7일에는 국회 소집, 헌법 발포의 청원이 결의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1848년 5월 18일부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의 성(聖) 바울 교회당에서 열린 최초의 국민의회이다. 의원은 약 600명으로 자유주의자가 다수를 점했다. <뵈멘 크로마티아의 반란> 2월혁명은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체코인의 민족주의를 자극, 1848년 3월 프라하에서 봉건제의 폐지와 시민 자유의 요구를 결의했던 민족 평등의 원칙에 따른 연방제를 요구하는 청원이 제기되었다. <헝가리 혁명> 2월혁명은 헝가리(Hungary)에서는 코슈트가 지도하는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헝가리의 완전한 자치권을 요구하고 근대 국가에의 개혁법(3월법)을 성립시켰다. <이탈리아 혁명> 이탈리아의 자유 통일 운동은 2월혁명에 의해 더한층 왕성해져 북이탈리아의 밀라노 시민을 ‘밀라노의 5일’ 폭동으로 유도했다. 이것을 계기로 전이탈리아가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과 통일의 전쟁에 총궐기했다.

인상파이전 사실주의 쿠르베가 있었다 쿠르베 '오르낭(쿠르베 고향 프랑스 동남쪽)의 장례식(1849-1850)' 서양미술사에서 마네 '풀밭위에서 점심식사'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왜 그런가?

참고로 맑스의 파리 망명기는 1843년–1845년이다. 그리고 1948년 프랑스에서는 2월 혁명이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이 태동하는 시기였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 작품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기존의 그림에서는 꼭 등장하는 영웅이나 성인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작품 속에는 분명한 주인공이 없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평범한 쿠르베의 고향사람들이다. 어떤 분의 장례식 장면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주인공이 없는 것이 주인공이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 즉 시민의 시대를 넘어 민중의 시대가 왔음을 알려준다. 쿠르베 1871 파리 코뮌를 지지했다고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런 시대 배경과 관련이 있다

쿠르베 이 작품(화가의 작업실 1854-1855)에 깜짝 놀란 만한 것은 맨 오른쪽에 보면 시인 '보들레르'가 책을 읽고 있다. 보들레르(백남준과 발터 벤야민의 대스승)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전체에서 최고의 예술가였다. 빅토르 위고보다 한 수 위다. 인상파에서 마네와 함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물론 미술평론으로 인상파를 지지했지만 그는 현대시를 창안한 시인으로서 근대도시의 탄생과 함께 모던한 삶의 전형(modernity)을 표현했다 '도시의 산책자(flaneur)' '도시의 관찰자'라는 라이프스타일을 발명해낸 것이다.

'괭이를 든 사람(1860)'은 사실 밀레의 최고작이다. 농민과 노동자의 힘든 모습을 잘 묘사하다. 이 그림은 어디에세 영감을 받은 것인가? 바로 쿠르베의 '돈 깨는 사람(1849)'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사실주의자 쿠르베는 서양미술사에서 처음 노동자 막일하는 사람을 등장시키다. 이런 그림에는 주인공이 따로 없다.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단지 어떤 사실을 표현한다기보다는 그 속에 이미 사회와 시대에 대한 비판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서양의 모든 미술사는 한마디로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의 과정을 경제적으로는 산업화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밀레의 이삭(추수를 하고 나서 미쳐 가져 가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곡식)줍기[1857] 추수 후 버려진 이삭을 줍고 있다 그런데 왜 맨 왼쪽 가난한 농부는 프랑스 혁명군의 모자를 쓰고 있나? 뒤로는 이미 추수를 다 마치고 산처럼 쌓인 밀더미를 볼 수 있다. 오른쪽 멀리 경찰이 보인다 밀레는 얼핏보면 평범하고 소박한 농촌을 그린 것 같지만 당시 혁명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 그림에 비너스나 성자 영웅 제왕 성서 인물이 등장했지만 농민이 그림의 주인공인 것은 거의 처음이다

이런 화풍은 누구의 영향인가 바로 쿠르베이다. 그리고 고흐는 이런 밀레의 민중화를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그의 작품을 모사하며 끝도 없이 데생 연습을 했기에 미술학교 근처에도 못 갔지만 서구에서 최정상의 화가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 아래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머리 위에도 혁명군 모자를 쓰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