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밋밋한 이 세계에 양념과 같은 것이다. 이 상투적인 세계에 그나마 예술적 충격이 없으면 인간들은 정말 스스로 파멸할 것이다. 예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건조한 세상이 재미없다 보니 예술이 비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위대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이 두 마디로 그의 서구와 모든 게임은 끝났다.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끌어온 것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런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 순회전을 기획하며)
-한마디로 전위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나의 실험적 텔레비전은 “완전 범죄”를 가능케 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 1964
-미국인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항상 즐거워하거나 자극받을 필요는 없다. 미국에는 지루한 음악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부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지루한 음악을 작곡하지 않는다. 나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나 자신도 가난하다. 나는 매 순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백남준은 한국이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룩한 것은 재벌이 아니라 바로 시장통 사람들로 보다.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사람들 서민들 덕으로> "나는 한국인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에서 찾는다. 세계경제의 경쟁력은 유통과 자유시장 기능인데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은 이 문제를 1백 년 전에 이미 해결하여 놓았던 것이다. 일제 하에서도, 6·25동란과 군사독재, 부정부패, 산업화, 재벌독점, 환경오염에서도 이 두 시장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 불만 났다하면 제일 먼저 터지고 타는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불타 폭삭 주저 앉았나 싶더니 다음날 여지 없이 제일 먼저 문을 여는 곳 전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지 않는 이런 곳을 경제속도가 달라졌다고 방치하면 근본을 잃는다" -1999년 2월 18일 백남준
-예술가에게 실수는 오히려 천재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들의 8・15로 돌아가자. 해방 20년이 다가온다. -슈투트가르트 좀 아카이브, 1965년
-아이폰은 백남준 아이디어다 -존 헨하르트
<부록>백남준 부친(일본에서 메이지 대학 법대와 니혼대 상대를 나온 지식인)이 운영하는 태창방직 사진 1920년대 방직기가 300여대(아래사진)가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은 당대 지금 삼성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부잣집 막내아이들이었다 아래 사진은 그의 유치원 다닐 때 캐딜락(유치원 동창인 이경희여사와 함께)을 타고 다니고 당신 한국에서 캐딜락이 2대가 있다고 당시에 차 수리공이 10명이 되었다고(당시는 차가 자주 고장이 나서 수리공이 많이 필요했다고) 동대문집이 3천평이나 되고 그러니 백남준 부친이 사업가로써 친일을 했다기보다는 불가피하게 일본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백남준은 그런 것이 싫어서 굶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예술가가 되려고 결심했다는 고백했다
아버지가 친일이냐 아니냐 논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였기에 일제시대 친일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일본과 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남준은 그런 점이 싫어서 예술가가 되려고 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친일이란 아주 적극적이고 악질적인 친일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식민지시대에는 대부분 사람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도 하고 눈치를 보며 산 것은 사실이다
[백남준과 하버마스(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 하죠 공론장 이론으로 유명 아직 생존)는 소통철학에서 통한다] 68혁명 당시 하버마스
프랑크푸르트학파 출신의 현존하는 최고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는 유럽의 지성인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계몽주의적 이성주의(?)를 믿는다. 그는 신체적 장애가 있다 19살 때 보리외과 수술에도 연설에 불편을 줄 정도도 입이 기형이다. 역설이지만 그래서 소통철학의 대가인가. 인생의 아이러니다 그래서 입보다 귀가 발달한 것인가요
그는 10대를 나치시절에 보냈는데 그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로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사회였기에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출현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개인 의견 여기서 미디어가 중요하다 미디어과 대통령과 국민을 이간질시키는 일방적 미디어가 되면 독재자가 등장한다) 그에게도 백남준의 미학에서 강조하는 쌍방형 소통방식이 역시 중요하다. 가장 취약한 것 혹은 가장 연약한 것을 연결시키고 소통시키는 것이 그의 철학적 테마다
<백남준 주제는 왔다갔다 통신 소통 유통 이런 것이 그의 관심거리다>1993년 백남준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요원들과 작업하는 모습 진짜 장난꾸러기는 여기에 있군요 이것 타고 울람바토르에서 베니스까지 왔다갔다 하겠다는 소리죠 노마드 작가로서 재미있는 점은 자연 반 문명 반 둘의 조화에 두고 있다. 뒤에는 바로 단군이 보이네요 정식이름은 스키타이 단군이죠 즉 우리가 유목민의 후손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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