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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서 '작가의 죽음' 선언

[뒤죽박죽 백남준 이야기]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 첫 전시에서 작가의 죽음을 선언하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말을 바꾸면 전시의 주인공이 관객임을 선언했다는 메시지가 된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백남준이 기획한 INfo Art 전에 관한 이야기


1995년 백남준이 기획한 광주비엔날레 때 인포아트(정보아트전시, Info Art) 특별전 설치할 때 백남준 미국기술자 폴 게린 작가, 이정성 기술자가 참여하다.

백남준이 이 전시에 당시 서양의 첨단의 미디어아티스트를 초대하다. 백남준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과학문명과 예술의 접목을 통하여 정보사회에서의 예술의 첨단형식을 검증해 보이는 테크노아트 전시회로, 첨단의 정보기술을 사용하는 정보예술은 주제인 ‘경계를 넘어’와도 부합된다. 지구적 차원의 인간소통은 물론 예술과 기술, 예술과 사회, 예술과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통합을 시도했다. 백남준, 김홍희선생을 이 특별전의 한국큐레이터로, 또 신시아 굿맨(C. Goodman:<컴퓨터예술의 세계> 저자)을 미국큐레이터로 임명하다.

[김형순]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큰 역할이 했다고요? 

[이영철] "백남준이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태동시키는 데 기여가 컸어요. 이에 앞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도 95%가 그의 공로입니다. 그해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을 열었고요. 그리고 광주비엔날레에서 미디어아트란 개념자체가 없던 시절 '인포아트'라는 제목으로 백남준의 제자나 외국 동료작가를 데려와 선보였어요. 백남준은 이미 오래전에 세계 최초로 미디어아트 정교수가 되었고, 미국 내 미술대학에 미디어아트학과나 그 관련스튜디오가 생길 때마다 자문역을 도맡아 해왔었죠."



백남준 2000년 구겐하임 전시 때 시연을 해 보인다!! 녹음이 되어 있는 테이프를 벽에 붙이고 녹음기의 소리를 내 수 있는 헤드를 그 위를 스쳐가면 소리가 나는데 잘하면 녹음기처럼 제대로 소리가 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삑 하고 소리가 날 수도 있다. 랜덤 액세스 관객을 전시에 참여시키는 일종의 유혹장치이다


[백남준 개인전 W3] 학고재 본관에서 2015.01.21-03.15까지 


백남준 샬럿 무어먼 

백남준의 환상적 예술파트너 샬럿 무어먼 그의 마를린 먼로였다 무어먼을 신비한 베일에 쌓인 여인으로 표현하고 있군요 가운데 무어먼의 상징은 첼로가 보인다 

20년간 백남준 작품 기술지원자 이정성 선생 

일본의 기술자 아베에 이어 1988년부터 백남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의 작품의 기술적 측면을 지원한 이정성 선생 그는 거의 20년간 백남준의 전시를 따라다니며 독일과 미국에서 주로 활동했고 일년의 3-4개월은 한국에서 7-8개월은 외국에서 생활했다 

[이정선선생] 백남준의 “손”으로 불리는 그는 백남준작품 기술전문가로, 1988년 다다익선 작품을 만들 때부터 기술파트를 담당해 백남준 작가와 20년 동안 40~50점의 작품을 함께 하였다.그는 20여 년을 ‘백남준의 손’으로 살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하였고 경기 양평 출신의 이정성씨는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기술학원을 다니다가 군 제대 후 청계천의 세운 전자상가에서 전파상을 차리면서 본격적으로 가전제품 기술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이름 없는 기술자였던 그가 백남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다다익선 작품의 TV를 협찬한 삼성전자가 백남준에게 이정성씨를 추천해서였다고 그는 백남준과 작품을 할 당시, 작가에게 재차 설명을 요구하거나 의문을 달아본 적이 없다고 했고, 못 알아보는 기호가 적힌 메모를 받아도 걱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와 백남준은 밥을 먹다가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다가도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계획을 늘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백남준의 작품을 다룰 줄 아는 비디오 아트 기술자이며 백남준이 스케치하고 이정성이 만든다’ 고 할 정도로 백남준의 아이디어는 그의 손을 거쳐 현실화됐고, 백남준의 작품 전시가 열리는 곳에는 늘 그가 참여하였다. 그는 ‘가족 같은’ 백남준의 작품과 함께 해온 시절이야말로 언제나 행복했다고 말했다. "선생님 상상 속의 기계를 내가 멋진 작품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열광했어요.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보람이 있었어요" 


문화민주주의자 백남준은 TV가 독불장군처럼 고약한 독재자처럼 혼자 자기하고 싶은 말만 하고나서 남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방식, TV가 하는 말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이런 TV의 소통방식에 백남준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서 백남준은 TV의 주인인 인간이 그 먹통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인으로서 화면의 내용을 마음껏 조정하고 관리하고 왜곡 확대 등 변화를 주는 보다 쌍방적인 소통을 원했던 것이다. 백남준의 참여TV는 바로 이런 쌍방소통의 개념을 예술로 시도한 것이다. 사실 이런 작품은 볼거리는 없지만 번뜩이는 그의 아이디어와 개념에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아래는 백남준이 전시의 주인공인 관객에게 TV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한 화면통제장치이다. 

[1992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 회고전'에서 일어났던 그 열풍 다시 부활?] 

올해 초, 타계 9주년을 맞은 백남준이 세계굴지의 뉴욕 가고시언갤러리(미술파워 세계8위) 전속작가가 됐다. 작고한 작가 중에는 드문 예이다. 백남준은 최근 학고재갤러리 백남준 전에서 TV로봇 '톨스토이'가 4억5000만 원에 팔려 관심을 끌었다. 1992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 회고전'에서 일어났던 그 열풍이 다시 부활할까.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http://omn.kr/bl7s 

백남준 '톨스토이(1995)' 톨스토이는 말년에 동양사상에 심취해 노자의 도덕경을 러시아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 최근 학고재갤러리에서 4억 5천 팔렸다고 한다. 

백남준은 기계의 인간화, 일상의 축제화, 시간의 예술화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죠. 여기서 보면 뉴욕뒷골목 고물상에서 사온 것을 만든 그의 TV로봇은 정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다. 그의 조형능력은 탁월하다 잡동사니의 비빔밥미학인데 그의 특이한 장난기와 골목대장의 개구쟁이 같은 개그감각 유머감각도 한 몫 한다. 차가운 기계부속품이 온돌보다 더 따뜻하고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백남준은 또한 기계와 인간마저도 서로 적으로 보는 서구적 개념을 탈피해 특히 현대에 와서는 서로 공존하며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백남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60이 넘은 나이에 한국과 미국 독일을 긴 비행기시간을 감당하며 양적으로 질적으로 너무나 많은 작품을 몰입했는데 신이 좀 쉬라는 뜻인가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꼭 10년간 부처와 같은 맑은 영혼의 어린아이로 돌아가 생애 후반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그리고 2005년 <엄마>라는 유작은 남기고 어린왕자처럼 지구의 별이 되어 하늘로 돌아갔다 

[단독] 비디오아트 백남준, 세계 굴지 화랑 가고시언 전속작가 되다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73933.html 
[아트리뷰] 가고시언 2014년 미술계 파워 세계 8위 http://artreview.com/power_100/ 

[백남준] 1963년 첫 전시(독일 부퍼탈)에서 '작가의 죽음' 선언 

백남준 I 백남준의 첫 전시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에서 쿠바TV를 보고 있는 백남준과 칼 오토 괴츠. 미국의 백남준 전문가 존 핸하르트 큐레이터는 비디오아트를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사진술의 발견과 버금가는 미술사의 혁명"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 국립현대미술관 

7년간 정말 혼신을 다해 준비한 독일 부퍼탈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는 13대의 실험TV와 4대의 피아노를 통해 비디오아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정말 그 개념과 전시기획에서 선각적이고 천재적이다 '‘랜덤 액세스 뮤직' '참여TV'같은 실험적 음악미술을 통해 관객이 전시의 주인이 됨을 실험한다. 

백남준 I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괴짜)에게 바치는 비디오' 영상제작: Wolfgang Ramsbott(볼프강 람스보트) 1961. 그가 29살 때 고뇌하는 철학자적 면모. Courtesy Kunsthalle Bremen ⓒ The Estate of Nam June Paik 

그는 기존의 서양에서 주류였던 작가중심의 수직적 전시를 해체하고 관객중심의 수평적 전시를 선보였다. 다시 말해 그는 선언한 것이다. 작가는 죽었다고 그리고 관객이 주인이라고 이것은 바로 그의 휴머니즘에서 온 것인데 인간소외가 없는 사회(막스의 영향)에 대한 유토피아 사상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전시에서 이런 유토피라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백남준보다 7년 후인 1970년에 발간된 <텍스트의 즐거움>라는 저서에서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선언했다 백남준과 같은 맥락이다 청년 백남준은 이러한 내용을 ‘동시성’, ‘참여’, ‘임의접속’ 등등에 관한 16개의 테마로써 종합적인 큐레이팅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연구자들 사이에 점차 활발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진다. 

백남준 <나의 파우스트> 연작 중 하나 '예술' 


'나의 파우스트(My Faust)'는 뉴욕의 13개의 케이블 TV 채널 수에 맞추어 교육·농업·통신·정보·종교·의약·경제·환경·연구개발 운송·인구·예술·국수주의·자서전 등의 주제로 13개의 고딕성당으로 된 비디오 제단을 만든 것이다. 각기 25개의 TV 모니터를 배치하고 3개의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를 사용했으며 성당 프레임에는 주제와 연관된 이미지를 콜라주하거나 오브제를 부착했다. 

백남준이 바라보는 <나의 파우스트>는 오늘날 13개의 분화된 사회문제와 이슈를 통해 보다 은유적 검증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이 연작을 통해 대중의 우상인 TV를 다른 세계로 보여준다. 백은 초창기 자신의 자전적인 노트와 낡은 자동차 번호판, 장난감 자동차 등이 담긴 낡은 여행용 가방을 괴테의 자서전 제목을 그대로 따 <시와 진실 1961-72>이라는 제목으로 제시한 적이 있는데, 이제 그가 3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괴테이름을 빌어 제시한 것은 그 자신이 개인적 관심이자 곧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되겠다. 

"백남준은 자신이 창조한 시간 속에서 산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시간 어디에선가 그는 늘 추앙해 마지않던 몽골의 칭기즈칸처럼 말을 타고 시베리아, 페루, 네팔 등지를 뛰어다녔다. 아득한 미래에도 십만 살의 나이로 살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지난 2006년 물리적인 육신은 작고했지만 그는 지금 실존한다" -류진


철학은 가장 높은 단계에서의 삶의 전략이자 기술이다. 다만 일반인들이 그것이 좀 어렵기에 멀게 느껴질 뿐이다. 하긴 미술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미술 아닌 것이 어디 있다 이 세상에 형태와 색깔이 없는 것이 어디 있나. 그럼에도 일반인들은 현대미술을 진절머리 나게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이 이렇게 관객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인생 좀 생각하고 살라고 하는 우정 어린 충고가 아닐까 사실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철학서적이나 현대미술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렇지 않은가 

프랑스라는 나라가 나하고 맞지 않은 부분도 많지만 내가 프랑스를 좋아하는 한 가지 이유는 프랑스고등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철학을 잘 할까 고민하는 것과 대학입시에서 철학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시험을 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인생의 철학과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그 답을 찾을 때 철학적 소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류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에 기초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자신의 욕망에 진정 충실한 사람은 절대로 부정부패를 할 수 없다 욕망은 이성과 다르게 계산하거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과 기호가 뭔지를 솔직하게 물고 그걸 즐기는 것이다남에게 그럴듯하게 행복하게 보이는 삶이 아니라 나에게 그러한 진정 행복한 진정 내가 하고픈 욕망에 충실한 삶을 말한다 

인문이란 말 그대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나 창문(window)이라고 재해석해도 되겠지요.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고 남이 좋아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삶을 살고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삶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지로 사는 삶 자신의 욕망을 억제(관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호와 생각을 발휘하면서 사는 것 이런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려면 가장 필요한 영양분이 바로 인문학이겠죠. 그중에서 철학이나 미학이 아닐까 싶은데요. 

모든 철학은 시대의 아들이다. 내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내가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진다는 뜻이고 내가 예술을 한다는 것은 내가 세계를 보는 관점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말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진나라에서 천문학, 지리학, 음악, 농학, 의술 등의 내용이 담긴 백과사전 같은 책이 바로 '여씨춘추(呂氏春秋)'인데 백남준이 프랑스 200주년 기념 로봇 디드로(백과사전파) 로봇을 만들어서 이런 부제를 '여씨춘추(呂氏春秋)'로 붙인 것은 백남준의 지적 교양과 참신한 아이디어 결합된 백남준다운 사건이다 게다가 문화적 자긍심에서 동서가 구별이 없는 의미도 있어 참 멋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 대학자격시험 문제(미술대학의 경우) 중에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의 혁명을 요약한 말 "콜라주가 오일페인팅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라는 백남준의 인용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주는 메시지가 뭔지를 나름으로 해석해 보라는 문제가 출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정말 이런 점이 멋지다. 백남준은 정말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 인간의 전형이 아닌가!! 

백남준 TV첼로 2001년 작품 서울 옥션에서 

아주 고급스러운 단순성이 돋보인다 그래서 스마트하다 

[창조교육] 창조교육에서 학생들의 시행착오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또한 그런 과정을 겪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는 앞서가는 교육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실패의 과정을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말하기가 없는 영어교육, 쓰기가 없는 국어교육, 토론이 없는 사회교육, 실험이 없는 과학교육, 퍼포먼스(실기)가 없는 예술교육 등은 그래서 다 문제다. 창조경제도 마찬가지다. 실패한 아이디어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이를 잘 활용해야 성공할 수 있다 

TV 숫사슴(stag) 1996 

백남준의 섹스아트 중 하나로 1996년 백남준이 하반신 불편해지고 모든 에너지의 근원인 성에너지를 더욱 잃게 되고 다시 말해 남성으로서의 기능이 떨어지게 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아주 긍정적인 의미의 작품이다. 그 내용에는 섹시한 여성 등도 많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백남준이 쓰러지고 나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섹스치료법을 받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젊은 여성이 백남준의 몸을 마시지를 하는 방식으로 다시 기운을 차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의 심경을 TV아트로 전환한 작품, 숫사슴은 남성의 성에너지를 말하고 흔히 영어에서 총각파티라고 할 때 쓰이는 용어다. 백남준의 특이한 유머감각이 여기도 보인다. 남성 페니스가 3개나 있다. 


백남준 I 'Video Venus' 1978년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Performance ⓒ Photo: Ivo Dekovic "나는 검은 옷을 차려 입고 음악을 연주하는 성이 제거된 남녀의 고인물 같은 분위기를 휘젖어 놓고 싶었다" 1967 백남준의 섹스아트에 대한 철학 피아노 연주에 따라 여성의 몸이 다르게 움직인다 상호교감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때 가능한 일이다 

[백남준 여성시대 도래의 예언] 


백남준의 이때 애인은 샬럿 무어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환상적 예술파트너였다 섹스행위를 연상시키는 둘의 몸 연주는 뉴요커들의 부러운 눈길로 받으며 이루어지고 있다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이 섹스연주에서 남자가 여자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연주하고 있다는 점이다바로 여성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다백남준의 전설은 뉴욕에서 이렇게 시작된다이게 언제인가요 1960년대죠 


1973년 파사데나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체스(섹스)를 '두고 있는' 뒤샹 

백남준 1978년 작품은 마르셀 뒤샹과 같은 섹스아트의 맥락으로 보인다 

제2부 남준 안에 무당 있다. - 내 사랑 백남준 중에서 

1974년 웨스트베스 작업실에서의 백남준과 시게코. copyrighrt Tom Haar. 사진저작권 이순출판사 

남준의 어머니는 무속신앙을 믿는 분이셨다. 그의 어린 시절 속에는 무당을 집안으로 불러다 굿을 하거나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점쟁이를 찾아가 점괘를 받아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어릴 때 친숙하게 접해서인지 남준은 한국의 무속문화를 사랑하고 무한한 자부심을 까지고 있었다. 얼마나 자부심이 높았던지 때때로 나와 말싸움을 벌일 정도였다 

그날 우리는 동양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그였다일본에 선도 좋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에 비하면 무척이나 따분하지무슨 소리예요 둘다 각자의 이론과 배경을 가진 철학 아니에요. 위아래가 어디 있어요.(나는 발끈했다)절대 아니야 한국의 무당이 훨씬 창의적이라고흥미롭게 그는 한국의 샤머니즘을 그의 어머니처럼 종교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예술적인 영감을 얻는 소재를 삼았다. 어느 날 이런 얘기를 했다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그래서일까. 남준 안에는 무당의 신기 같은 것이 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고 미친 듯 무대 위를 뛰어다니던 퍼포먼스장면 그리고 샬럿 무어먼과 함께 전위적 공연을 했던 순간들을 들여다보면 남준은 영락없이 신들이 무당의 모습 그대로였다남준 스스로도 굿장이를 즐겨 자처했다. 1984년 귀국 당시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예술은 매스게임이 아니에요 페스티벌이죠. 쉽게 말하면 잔치입니다. 왜 우리는 굿이 있잖아요. 아는 굿장이예요. 여러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도록 부추기는 광대나 다름이 없는 것이죠"실제로 그는 뒷날 신명나는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1990년 7월 남준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뒷마당에서 자신의 가장 절친한 진구이자 동료인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는 진혼굿을 치렀다. 

떠나간 벗을 위로하기 위해 마려된 이 자리에서 동해안 별신굿으로 유명한 김석출 김유선 부부가 초대되었다갓을 쓰고 도포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1시간동안 너무나 진지하게 굿을 벌였다. 죽은 자에게 보내는 음식을 상징하는 쌀이 든 밥그릇을 피아노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요세프 보이스 사진 위에 쌀을 뿌리기도 했다. 

이날 굿판에는 500여면의 관객이 참여 흥미진진한 퍼포먼스를 지켜봤다. 또 한국은 프랑스 방송국에서도 이날의 굿 장면을 촬영해 프랑스전역에 방송했다예술과 버무려져 진행된 이날 굿은 오후 4시쯤 끝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굿이 끝날 무렵 거센 모래바람과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관중들이 모두 돌아가자 천둥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져 일대 전기가 모두 나갔다고 한다. 

더 이상한 것을 바로 굿을 벌였던 마당 한가운데 큰 느티나무가 벼락을 맞아 시들어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준의 신기가 정말 보이스의 영을 부른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쑥덕거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절묘한 우연이다. 

[백남준, 굿의 예술화 현대화 실험]
 [오마이뉴스 관련 기사] http://omn.kr/bksi 


"초기 행위음악에서 플럭서스 해프닝을 거쳐 비디오 아트에 이르는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사상적 통찰과 상상적 미학 실험의 산물이며, 소통과 참여라는 그의 진취적 예술이념 역시 자신의 의식 속에 내재하고 있는 동양정신과 깊게 맞닿아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샤마니즘은, 백남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간, 이승과 저승의 소통과 조화를 신봉하는 샤마니즘적 사유방식에 대한 참조, 그 문화적 기능과 의미에 대한 숙고를 통해 대중 소통, 관객 참여, 나아가 전 지구적 문화교류를 추구하는 상호성의 예술을 개념화한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무속과 해프...닝, 샤마니즘적 ‘마술’과비디오 ‘미술’, 구체적으로는 샤마니즘과 백남준 예술의 유추를 상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첨단의 테크노 문화와 고전 동양사상 사이의 동질성과 차이를 인식하고백남준 작업에 나타나는 아시아성 또는 한국성을 이해할 수 있다. 샤마니즘과 비디오 아트는 영험적 초자연 세계와 물질적 자연세계,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매체적 기능을 통해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고인간 주체와 자연 대상의 소통을 증진시킨다는 유사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과 비디오 작업으로 새로운 영상미학을 제시한 백남준의 매체실험을 신화를 전수·재현하는 샤먼적 행위의 실천에 비견할 수 있는 한편, 샤머니즘을 문화의 차이를 넘어 교감의 형식과 가능성을 추구하는 백남준 예술의 은유로 파악할 수 있다. 

백남준은 샤머니즘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류의 기원과 역사를 해석하고, 한국의 선조를 샤머니즘 신화에 결부시킴으로써 몽골, 우랄알타이계의 아시아 정체성을 강조한다. 또한 1963년 자신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 아트의 효시가 되는 역사적인 전시회인 <음악의 전람회>(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 방금 잡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머리를 내걸어 주위를 경악시킨 샤먼적 행위 역시 유럽의 아방가르드화단에 자신의 뿌리를 알리는 일종의 인종적, 민족적 선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차대전 중 중앙아시아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타타르 족의 보살핌으로 회생한 후 샤머니즘에 경도된 요셉 보이스에게 분신과 같은 혈육애를 느끼고, 그가 죽은 후 추모굿(1990년 현대화랑)을 열어준 백남준의 정서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홍희의 굿모닝 미스터 백 중에서 


대가집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굿판을 보고 자라난 백남준에게 굿판과 같이 떠들썩하고 혼란스러운 해프닝은, 존 케이지와의 인연이 ‘운명적’이듯, 어쩌면 백남준을 위한 운명적 장르였는지 모른다. 백남준은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작품을 만들 때 무의식으로 만들지만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것은 무당이다. 매년 10월이 되면 어머니는 1년 액을 때우기 위해 무당을 부른다. 24시간 해프닝이 된다. 혼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밤에 이루어지는 예술. 그것도 그녀의 예술이 된다. (중략) 무당은 돼지머리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춤춘다. 그 리듬은 중국 아악 리듬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의 리듬은 싱코페이션이 있는 삼박자로 3박자, 5박자, 7박자로 이어지는 홀수가 많다. 내가 작곡하면 거의 3박자, 5박자가 되던 것은 결국 나의 예술은 한국의 미술, 그 중에서도 민중의 시간예술, 춤, 무당의 음악에 가까운 것이다.” 

1990년 7월 20일 백남준의 보이스 추모굿 장면 중 처음 보는 것 사진출처 갤러리현대 

그러면 무속 신앙을 물려받고 무당의 제식에 익숙한 백남준은 자신이 택한 예술 장르, 해프닝과 비디오 아트를 통하여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은 결국 무속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해프닝은 전통예술개념을 부정하는 인터미디어와 비고정성 개념으로 참여 이상을 실현한다. 미술과 연극의 인터미디어이자, 시간과 공간의 비고정적 환경인 해프닝 환경에서 관객의 역할은 수동적 감상자에서 능동적 주체로 전환되며, 자신을 ‘지금 여기’의 미학적 요소로 상정한다. 비디오 역시 해프닝으로부터 이 두 개념을 전수받고 있지만, 매체의 특성상 이 두 개념이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즉, 비디오는 인터미디어의 총화로서, 회화적 이미지와 조각적 오브제,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의 중간형태일 뿐 아니라, 예술과 기술,예술과 유흥 사이에 위치하며 우리의 인생과 생활에 개입한다. 

비디오 이미지는 또한 전자적 운동으로전개되는 이미지의 흐름이 비고정적 이중 장면을 창출하고, 그 이중 장면의 이중성이 특수한 양태로 보는 이의 지각적 반응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피드백 미캐니즘으로 생물학적 차원의 관객 참여가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객 참여 이슈는 비디오를 대중문화, 대중매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이렇게 관객 참여로 상호연결되는 해프닝과 비디오는 라이브 아트, 즉 예술과 인생의 통합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며, 인생 장르적 반예술 실천으로 전통재현예술의 위상을 훼손시킨다. 

보이스추모굿에서와 같이 굿과 퍼포먼스의 결합이 시도되기도 한다. 해프닝과 굿판의 유사성을 비교해보면 백남준 예술이 얼마나 샤머니즘 전통과 결부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선 해프닝은 집단참여 예술로서, 굿은 민중적 기복이나 집단정화를 위한 사회적퍼포먼스로서 소통과 참여의 맥락을 같이한다. 예컨대 해프닝의 능동적 관객처럼, 굿판의 구경꾼은 제관으로 뽑혀 신내림과 접신의 엑스터시를 경험하며 행사의 일원이 된다. 


또한 무복, 무악, 무화, 무가, 무극, 무담, 무언 등의 총체적 문화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굿은 음악, 미술, 연극 등 다장르 사이에존재하는 인터미디어로서의 해프닝 형식과 유사하며, 굿판의 현장성과 장소성은 시공적으로 비결정적인 해프닝의 현장미학에 비견될 수 있다. 이처럼 해프닝과 굿은 관객참여 양상, 인터미디어 형식, 비결정성의 미학에서 공유점을 갖는데, 바로 이러한 점들이 관객을 분리시키고 각본에 의존하며 타장르들을 위계적으로 종합하는 연극, 오페라와 같은 전통공연예술과 다른 점이다. 

해프닝과 굿의 이러한 양식적 유추를 통해 비디오 아트와 샤머니즘의 매체적 환유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해프닝의 비결정성미학이나 인터미디어 양식이 비디오 아트로 연장되고, 관객 참여 이슈가 비디오에서는 기억을 담보하는 생태학적 차원의 참여나 사용자 친숙형의 인터페이스 미캐니즘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이나 가상현실의 발전이 미디어를 영매靈媒 현상으로 파생시키는 현 테크노 문화에서 비디오와 샤머니즘은 매체와 영매의 동일한 어원을 환기시키듯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남준은 “매체는 중세 신학적 개념으로 신과의 교접을 의미한다. 굿의 기원,무당의 액소시즘은 얼, 몽고말로 영혼을 의미하는 얼이다. 얼은 미디어와의 유사어이며, 미디어는 굿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1990년 7월 20일 뒤로 삼성TV가 보이고 한국인의 생명줄인 쌀을 뿌리고 있다 죽은 영혼를 달래고 새로 부활하라는 메시지다 

굿과 해프닝, 샤머니즘과 비디오 아트는 소위 주객체의 인터액티비티 개념으로 상호연결되는데, 장르적으로 보면 해프닝, 비디오 아트, 무속굿은 모두가 시간성에 기초한 시간 장르라는 점에서 미학적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해프닝, 비디오 아트, 굿은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일반적 의미의 시간 장르가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잡아두거나 역류시키는 특수한 시간 장르라는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그것은 마치 꿈의 시간처럼 비연속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맥락적인, 우리를 공리적인 좌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비합리적인 시간성으로 그것이 관객에게 새로운 지각 경험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의미를 갖는다. 

백남준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과 함께 동시성, 통시성을 담보하는 해프닝, 비디오의 시간성에 주목하면서 현재 속에서 ‘생’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나 비디오 생방송 예술의 의미를 강조한다. “생예술은 인간의 불가항력적 요소들을 그대로 반영하며, 예측할 수 없는 인생같이 우연과 사고를 동반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 탄생, 죽음 같은 중요한 일은 일생 단 한번 일어나듯, 생예술의 의미는 그것이 똑같이 되풀이 될 수 없다는 일회성에 있다" 

백남준 I '북경원인' 1992, 각종 전자기기 부품, 알루미늄, 철, 플라스틱, 램프 2, 14인치 컬러TV 2, 8인치 컬러TV 3, 레이저 디스크 1, 디스크 플레이어 1, 150 x 178 x 72 cm 

위 작품을 보면 그의 비빔밥미학이 뭔지 알 수 있다. 로봇은 백남준 예술의 진면목을 어김없이 드러내 보이며, 작가가 "비빔밥의 미학"이라고 부른 창조적 혼합을 아날로그, 디지털적으로 화려하게 구사하고 있다. 구식 라디오와 TV 박스를 근간으로 각종 소도구가 첨가되어 한 인물의 캐리커쳐가 만들어지고 TV 화면에는 작가의 비디오 영상이 현란한 조합과 변화의 율동적인 아라베스크를 펼치며 낡은 물건의 조합에 표정과 생명을 불어넣는다. 백남준의 상상력과 유머는 우리의 상상을 즐겁게 자극하며 동시에 시간과 공간이 자유자재로 압축되고 혼합되며 반복되는 4차원의 세계로 인도한다 

백남준 뉴욕전시 소개 

TV Buddha Re-Incarnated, 1994. Vintage Buddha head, chassis, computer monitor, keyboard, telephone, and Samsung 13-inch TV] One of the most recognizable of Paik’s sculptures is Video Buddha, (1976–78). A sculpted Buddha figure gazes at his image in the TV monitor that is recorded by closed circuit video. The historical/religious significance of the Buddha figure makes it an apt metaphor for ...contemplation, yet there seems to be conflict between the desires to look away from and into the self. Decades later, Paik reinterpreted this theme by placing the Buddha sculpture in front of a computer monitor in Buddha Re-Incarnated (1994). The connection is not made through a contemplative gaze, but rather through a telephone receiver linking the Buddha figure, which has cyborg components, to the computer monitor. Perhaps this is a commentary on the technological advances that allow for immediate real-time communication of voice and image. Paik may also be commenting on the nature of the relationship and the connection between the mind and objective reality. 
http://www.sculpture.org/documents/scmag01/june01/paik/paik.shtml 

사진 저작권 피터 무어(Peter Moore) 1965년 뉴욕에서 플럭스 소나타 (Flux sonata)4번 제목의 포퍼먼스 작품으로 랜덤 액세스 방식으로 소리를 이미지화하는 가상적 행위로 보인다 

Nam June Paik, Untitled, Newspaper drawing, 1990s 

백남준의 신문지 낙서화 이런 장르의 드로잉이 왜 독창적인가 아니 무엇보다 매우 아름답다 시각적으로 그렇고 조형적으로 그렇고 회화적으로도 그렇고 색채로도 너무 아릅답다. 그렇다 또한 천진난만의 미학이다 천진이라는 하늘의 진리라는 뜻인데 여기는 하늘의 닿은 그림이라는 뜻도 된다 

그것을 바로 신문에 난 기사도 그렇고 거기에는 시대정신이 담겨 있기에 시대정신+작가사유가 상생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이는 것이다. 백남준은 이제 낙서화가로 재조명해야 한다.사이 톰블리보다 낫다 이부분에서 좋은 평론이 나와야 한다 아직 글이 나오지 않고 있다 

사실 이런 작업은 1963년부터 시작된다. 그는 419학생혁명에 대해 유일하게 제대로 보도한 경향신문 위에 자신의 첫 전시 홍보용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다. 독일에 있을 땐데... 독일에서는 1962년 슈피겔지 언론사 탄압하는 큰 이슈가 터졌고 백남준은 서울에 있는 형에게 부탁해 경향신물을 구입한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정치적이다 

여기 월스트리트 저널에도 레닌이 등장하는데 흥미롭다. 백남준은 정치를 예술화한 것이 아니라 예술을 정치화했다 그래서 그는 민중미술과는 전혀 다르다. 정치는 아래서 위를 보는 것이지만 예술은 위에서 아래를 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기가 막히게 잘 융합한 것이다. 바로 백남준이다 그래서 그는 정말 교활한 정치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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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소리(sound)가 영상(image)이 되는 포퍼먼스를 한국에서 처음 소개] 

1992년 유럽초대전을 <백남준·비디오 때·비디오 땅>전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백남준 회갑을 맞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7월 30일부터 9월6일까지 백남준 대회고전을 연다 부대행사가 국제학술대회도 열렸지만 92년 춤의 해를 맞아 김현자의 춤과 함께 8월 한국문예회관 대극장에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비디오소나타>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공연장이 변경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행사가 무사히 끝났다. 비디오를 마이크처럼 잡고 피아노 연주를 해 소리가 어떻게 영상으로 변형이 되는지 한국관객에게 실감나게 보여줬다. 화면에 백남준 코가 보인다. 사진촬영 이창훈 

[백남준, 1993년 베니스에서 '문화칭기즈칸' 되다]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http://omn.kr/bm9n

ddhakdl오마이뉴스 관련기사[ 백남준 1993년 베니스에서 문화칭그즈칸 된다백남준 I 마르코 폴로 1993 

백남준은 만 29살에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 즉 내가 문화칭기즈칸으로 전 세계 미술을 호령해 보겠다고 선언하고 30년만에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로 나가 황금사자상을 타면서 그의 약속을 지켰는데 그때 그가 만든 제목은 바로 전자슈퍼하이웨이였다 다시 말해서 전 세계를 전자아트를 통해서 통일시키겠다는 포부를 구현한 것이다 거기에는 여러 작품이 있다 노마드 백남준 전자초고속도로 위성안테나를 달고 자동차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당시 독일에서 나온 도록 표지다 바로 뒤로 단군 스키타이왕이 보이네요 

백남준 아트센터 초대 학예실장 토비아스 버거 인터뷰 서양인의 화려한 수사와 논리적 디테일이 돋보이네요 인터뷰 중 인상적인 것은 거리의 유랑자 같이 보이는 백남준은 유희적 풍자와 비평적 풍자를 비밤밥으로 만드는 훌륭한 정치가였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버거는 비스바텐이 고향인데 어려서 백남준을 봤군요. 


새해 미술계의 시선은 지난 29일 9주기를 맞은 비디오아트 거장 고 백남준(1932~2006)에게 일제히 쏠렸다. 그동안 그가 너무 ‘저평가’ 됐다는 공감대 속에 세계 굴지의 미국 화랑 가고시안과 고인의 대리인인 미국의 장조카 켄 백 하쿠타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기 때문이다. 가고시언의 적극적인 작가 마케팅을 통해 고인의 작품 값과 미술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아졌다. 


백남준 '단군 스키타이 왕' 1993년 우주선을 타고 가는 전자 유목민으로 묘사

<스스로 뿌리를 선택하지 않은 삶은 백남준을 전에 없던 유목민으로 만들었다>

백남준에게 한국은 ‘선택’한 나라다. ‘모국’이나 ‘조국’, ‘고향’과 같은 개념은 그의 의식에 없었다. 1932년 7월 20일, 그가 태어난 서울 종로는 백남준의 유목 루트 중 한 지점에 불과하다. 그가 34년간의 타지 생활을 마치고 우리나라에 돌아온 건 ‘회귀 본능’ 과는 거리 가 멀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선임학예연구원 김성은은 그의 귀환에 대해 “백남준이 한국에 돌아와 한국을 위해 활동한 것도, 작품에 한국적 모티브를 사용한 것도 뿌리로의 회귀가 아닌 유목적 사유와 실천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백남준은 자신과 세계, 시간과 공간을 자기 방식으로 해체하고 새롭게 배치하여 인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예술가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직선적인 인과관계를 초월한 사유를 가지고 스스로 뿌리를 선택하지 않은 삶은 백남준을 전에 없던 유목민으로 만들었다. -백남준아트센터 자료 

작품목록도 없고 아직 저평가된 백남준, 그러나 요즘 다시 새로운 도약의 기운이 일고 있다 

갤러리 확고재에서 열리는 백남준전 장면 뒤로 인터넷을 상징하는 W3라는 작품이 보인다 


현재 프랑스 파리 루이 뷔통재단 전시장에 선보이고 있는 백남준의 TV 로댕 

백남준 I 앤드워홀 

백남준이 좋아했던 앤디 워홀을 TV 로봇로 형상화하다 

백남준 I 고인돌 1995 

1995년 백남준이 한국에 처음으로 광주에 비엔날레를 여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선 보인 작품이다 백남준은 남도지방의 선사시대 고인돌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1998년 백남준의 뉴욕에서의 모습 

[백남준 추모 9주년에] 이경희여사(백남준 유치원친구)가 말하는 천재란 어떤 사람인가? 

1. 기억력도 좋아야 하지만(백남준 전화번호부가 없다 왜냐하면 다 외운기 때문에 1년 전에 본 큐레이터 이름을 100% 암기) 어린아이 같은 사람 2. 제가 백남준과 캐딜락을 같이 타고 명동에 있는 유치원을 다녔는데 어린 시절 백남준 집 3000평이라 동산이 있었는데 거기서 놀다가 제가 이마 다쳐 피가 흘렀는데 백남준이 1984년 30여년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때 전화로 하는 말이 어렸을 때 나하고 놀다 다친 이마가 괜찮은지를 묻는 사람 3. 백남준이 나에게 뭔가를 부탁했을 때 안 들어주면 절교한다고 자기표현을 그대로 말은 거침없이 하는 사람 4. 백남준 선생이 윤이상와 같이 공연하고 싶다는 한국 신문에 기사가 났는데 저희 주변에서 공연을 하지 말하고 전해달라고 해서 제가 백남준이 미국에서 전화가 왔기에 한국에서 그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를 말했더니 백남준 소리를 확 지르면서 이경희씨하고는 안 만나면 되지 않겠어라고 용감하게 말하는 사람
http://tvcast.naver.com/v/303538/list/8549

바이올린이 바다위에서 춤추다 

백남준의 드문 사진 

백남준은 유럽문화혁명기 격동의 시대에 증인이기도 하다 비틀즈 68혁명 히피운동 반전운동 등등 그는 치열한관객으로서의 역할도 크게 했다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다 나는 예술가다. 나는 동양적인 예술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양적이다(Je ne suis pas bouddhiste je suis artiste. Je ne cherche pas a faire de l'art oriental. Je suis oriental)" - 백남준 

백남준의 드문 사진 

이런 비디오찍는 장면은 보기 힘들죠 백남준은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에 비디오를 마치 음악을 연주하듯 그렇게 리드미컬하게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 

[백남준예술론] 예술에는 귀천도 없고 동서도 없고 고급과 저급도 없다 

백남준은 예술에 귀천이 없고 동서가 없고 고급과 저급이 없음을 그의 첫 전시에서 보여준다. 당시 첨단전자매체인 TV와 고급악기인 피아노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대가리(샤머니즘)를 같이 걸었고 관객이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리 작가라도 어찌할 수 없는 <랜덤액세스음악>을 선보였다 

그래서 예술에서 저급과 고급의 경계를 없애고 지금까지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직적 권위적 일방적 전시를 허물고 수평적 민주적 쌍방적전시의 신기원을 세웠다. 이것은 이미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8)>에서 복제시대 고급과 저급의 화해를 새롭게 조명한 문화이론과 같은 것이다. 

백남준은 TV라는 악기로 섹스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최고미인이자 지성인이고 토털 아티스트이고 전위음악가인 셜럿을 만나 그의 섹스오페라를 한없이 다양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둘은 하늘이 내린 예술적 파트너로 천생연분이었다 

백남준이 이미 매체를 활용한 전자민주주의를 언급했지만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 민주화과정으로 미술사의 혁명적인 빅뱅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은 이를 위해서 행한 것은 극단적 테러리즘과 에로티시즘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술작품이기에 평화적이고 해프닝적이다. 

백남준의 부인 시게코는 남편 백남준은 도무지 서로 만날 수 없고 결함될 수 없는 두 요소를 하이브리드하게 결합하여 더 강렬한 예술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했는데 정말 백남준은 <TV부처>에서 첨단전자매체와 선불교를 결합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바로 TV를 무당의 방울처럼 사용하면 무당과 TV의 만나게 하는 환상적이니 비디오아트를 탄생시켰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면 TV와 달(칭기즈칸 혹은 동양문화상징)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가히 천재적이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가 그것인데 이런 상상력을 우리를 놀라게 한다. 과거에는 달이 TV이고, 현재는 브라운관이 TV이고, 앞으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달TV다. 이런 시대를 랭복가 말하는 견자의 입장에서 내다본 것이다 

60년대 사이버네틱스와 백남준의 전자아트 

백남준의 사이버네틱스예술론 

이 다이어그램은 1965년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전시할 때 수록한 백남준의 전자예술론 

'사이버네이트된 예술'의 델타 T의 값과 '사이버네이트된 삶'을 위한 예'술'의 델카 X의 값은 여기에 다시 밑이 
'당신'이고 위가 '나'인 로그를 붙이면 로그 '존 케이지'에서 루프 '먀샬 맥루한'을 빼고 이를 다시 '노버트 위너'로 나누면 그 해답은 ?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진공관 안에서 양극과 음극 사이에 그리드(전극)를 첨가시켰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불교적 "제3의 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독일인의 이 발견은 지난 대전에서 영국 상공의 독일전투기를 격추시키게 한 사이버네틱스를 탄생시켰다 -백남준 

1966년에 백남준이 딕 하긴스의 편집한 마니피니스토에 쓴 글인데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노자는 약함이 강함을 이간다고 했지만 그것은 단지 심증이었을 뿐 그런데 서양의 과학자가 물증(물리학)으로 이것을 증명했다는 뜻인가 

사이버네틱스와 궤를 같이하는 사이보그 출현 

이불의 '사이보그' 1999년 

[1985년 도나 헤러웨이(Donna Haraway) <사이보그> 선언하다] 아래 작품 
20세기말 선두적인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포스트 모더니스트인 도나 헤러웨이  역시 페미니즘 간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헤러웨이는 그녀가 쓴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성』 이란 저서에 수록된 "사이보그" 부분에서 여성 정체성에 수많은 균열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서구에서의 일반적인 여성에 대한 지배에 대해 상술하면서 그녀는 "모든 여성들을 자연적으로 하나로 묶는 '생물학적 여성'의 존재란 없다." 고 말한다. 즉 그녀는 '여성'을 단일한 범주로 묶는 일련의 분류, 종합 작업은 '타자'인 여성 안의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백인이 아닌 모든 여성을 배제한다. '흑인'이라는 범주는 흑인 여성 및 흑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배제한다. '여성'이라는 범주, 또는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들이 타파하고자 하는 바로 그 위험을 창출한다. 그 위험이란 어느 한 집단, 인종, 성에 의한 다른 인종, 집단, 성의 지배, 나아가 주변화된 자들에 대한 지배이다(155)  

실, 반박해야 할 것은 '메타 서사' 또는 '거대서사'의 전체를 아우르는 권위이다. 메타 서사에 가차없이 반대하는 입장과 비슷하게, 헤러웨이는 "사이보그 페미니스트들은, '우리'는 통합에 있어서의 자연적인 기반을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며, 어떤 구조도 전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 '우리'중 어느 누구도 더 이상 타인에게 특정한 현실의 모양새를 강요하는 상징적, 물질적 가능성들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범주화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뿐 아니라 여성의 타 여성에 대한 지배라는 문제를 초래한다. "`우리'는 현실상 그러한 지배들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헤러웨이는 기술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백인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범주는 본질적으로 순수한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이에 주목하도록 독촉 받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러웨이는 사이보그라는 범주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범주의 비순수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백남준 I '로봇_테크노 보이2' 

백남준 I '낙서 드로잉페인팅' 

백남준 I 잡지 신문 위에 낙서화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 백남준 


백남준은 테크놀로지를 통한 인간적 소통으로 미래를 사유하는 자였다. 백남준은 아트(예술)와 커뮤니케이션(기술) 만나는 사과씨앗같이 생긴 교집합에서 그 꿈을 실험하기 위해 위성아트 실험하다. 그는 여기 비디오아트 편집에서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만의 활달하고 통통 튀는 음악적 리듬감을 준다 

1984년 새해 첫날 모든 종류의 피드백을 만들어냈다. 그의 예술 20년(1964-1984)의 총집합이다. 그가 꿈꾸던 상호소통시대 몸을 1센티도 움직이지 않고 생각을 전달하는 미래의 인간 정주유목민이라고 개념을 만들어낸다. 1974년 그가 예언한 전자초고속도로를 누비며 그는 몽골 유목민의 광할한 제국에서 쌍방향 소통을 꿈꾼다. 

백남준은 예술과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의 깊이를 성찰하는 사유자이자 미래를 디자인하는 예언자였다. -그는 전자매체와 해프닝아트를 결합 새로운 출구를 발견하고 거대한 전파력과 통신망을 지난 TV를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닌 이질적 분야 간 통섭이 이뤄지는 대중 참여공간으로 인식한다 

근대적 시공간의 개념을 넘어 물리적 관념에서 이탈하여 미디어시대의 소통과 통신을 대한 창조적 신매체로 가능성을 확장하고 미학적 윤리적 정치적 관점에서 새로운 문화 참여공간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백남준은 누구인가? [유튜브] http://www.youtube.com/watch?v=ehGsV6bnpbc 

<백남준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을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로 봤다 그리고 단군을 유목민의 원조로도 본 것이다 그래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울란바토르에서 베니스까지:정보초고속도로' 시리즈 작품 중 하나로 만들다 아래> 백남준 '단군 스키타이 왕' 1993년 우주선을 타고 가는 전자유목민으로 묘사하다.<인사동 앞에 이를 벤치마킹한 전자석장승을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이 정도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겠지만 아니면 이 작품의 에디션을 만들어도 좋을 듯>

백남준에게 한국은 ‘선택’한 나라다. ‘모국’이나 ‘조국’, ‘고향’과 같은 개념은 그의 의식에 없었다. 1932년 7월 20일, 그가 태어난 서울 종로는 백남준의 유목 루트 중 한 지점에 불과하다. 그가 34년간의 타지 생활을 마치고 우리나라에 돌아온 건 ‘회귀 본능’ 과는 거리 가 멀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선임학예연구원 김성은은 그의 귀환에 대해 “백남준이 한국에 돌아와 한국을 위해 활동한 것도, 작품에 한국적 모티브를 사용한 것도 뿌리로의 회귀가 아닌 유목적 사유와 실천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백남준은 자신과 세계, 시간과 공간을 자기 방식으로 해체하고 새롭게 배치하여 인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예술가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직선적인 인과관계를 초월한 사유를 가지고 스스로 뿌리를 선택하지 않은 삶은 백남준을 전에 없던 유목민으로 만들었다. -백남준아트센터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