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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다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

[제목]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다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

-예술은 밋밋한 이 세계에 양념과 같은 것이다. 이 상투적인 세계에 그나마 예술적 충격이 없으면 인간들은 정말 스스로 파멸할 것이다. 예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건조한 세상이 재미없다 보니 예술이 비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위대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백남준(1962) 30살 발언: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짐이 서구를 다 쓸어버릴 황화다)"
백남준(1992) 60살 발언: "서양의 룰로 이길 수 없다면 그 룰을 바꿔라"
이 두 마디로 그의 서구와 모든 게임은 끝났다.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끌어온 것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런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 순회전을 기획하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 최초의 쌍방향 방송이다. 나는 이것을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자랑할 수 있다. TV문화는 레이더로 시작되었으며, 레이더는 쌍방향이다. 즉 TV는 쌍방향에서 시작된 것이다.

-민주주의란 뭔가? 말대꾸하는 것이다. 

-나의 환희는 거칠 것 없어라. 1977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1992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 1962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 사람들하고 우리들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3천 년 전 우리 것을 몽고 사람들이 보존하고 있어요. 난 공자, 노자, 이런 사람들 이전을 좋아해요. 신석기시대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역사가 엉터리입니다. 대부분 읽고 생각해볼 가치가 없는 쓰레기뿐입니다. 백남준 (김용옥, <석도화론> 중에서), 2001
-나는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DNA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1988
-"길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라고 베블렌이 말한다.
나는 " 내 가슴에 비가 내리듯 내 컴퓨터에 비가 내린다" 라고 말하겠다.
"내 컴퓨터에 비가 내리네" 가 나의 비디오 첫 작품이 될 것이다.
그것은 현상의 비와 컴퓨터 비의 혼합이다.
나의 두 번째 작품은 센티멘탈한 컴퓨터가 될 것이다.

-콜라주가 오일 페인팅을 대신하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왜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하느냐고 많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그들에게 생중계 위성방송은 나의 무모함에 와닿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험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생방송은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현실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생중계는 베타멕스처럼 리와인드가 안 된다.
우리들의 인생처럼

-내 인생의 하나의 행운은 존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요셉 보이스가 거의 무명일 때에 만나놓은 것이다.
따라서 금세기의 두 연장자와 역경시대의 동지로서
동등히 교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외국을 맴도는 문화현상이다.

-한마디로 전위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콜라주가 유화를 대체하듯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백/아베 영상 합성기”, <비디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 1974
-선생께서는 비디오아트가 앞으로 커다란 발전을 맞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러리라 확신합니다.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 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다 이뤄놓았습니다. 그는 입구는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어 놓았지요. 그 조그마한 출구가 바로 비디오아트입니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입니다.
“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생각하지 않았다”(1974년 이르멜린 리비어와의 인터뷰), <백남준 :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2009
-난 구라파에 가서 보고 음악이나 미술 수준에 관하여 매우 실망을 느꼈다. 내가 가서 본 르네상스 이후의 위대한 실물들이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 그러나 거대한 사원에 들어가서는 좀 위압감을 느꼈다. 그 위압감의 본질이 고딕의 하늘을 찌르는 듯한 공간 처리에도 있겠지만 난 무엇보다도 스테인드글라스의 신비로움에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벽에 건 그림과는 달리 빛이 투과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빛이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저 건너 바깥에 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빛 때문에 인포메이션이 생겨난다. 그래서 난 그걸 좋아했고 그것을 내 아트로 옮겨보았다.백남준 (김용옥, <석도화론>, 2001)

나의 실험적 텔레비전은 “완전 범죄”를 가능케 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 1964

-
미국인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항상 즐거워하거나 자극받을 필요는 없다. 미국에는 지루한 음악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부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지루한 음악을 작곡하지 않는다. 나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나 자신도 가난하다. 나는 매 순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레오나르도처럼 정확하게 / 피카소처럼 자유분방하게
르노와르처럼 화려하게 /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풀록처럼 간결하게 /제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텔레비젼 스크린 캔버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백남준-아베 영상합성기”, <비디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 1974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1965
-나는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계를 사용한다. 1980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이다. 1961
-원래 예술이란 사기다. 속이고 속는 거다. 독재자가 대중을 속이니까 예술가는 독재자를 속이는 사기꾼, 그러니까 사기꾼의 사기꾼이다. 고등 사기꾼 말이다. 1984
-만약 현대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는 5차원의 사기인 것이다. 1986
-얼마만큼이 생이며 얼마만큼이 연출이며 얼마만큼이 사기가 되느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진리는 가면의 진리다.
월간 <춤>, 1986년 11월

<백남준은 한국이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룩한 것은 재벌이 아니라 바로 시장통 사람들로 보다.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사람들 서민들 덕으로> "나는 한국인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에서 찾는다. 세계경제의 경쟁력은 유통과 자유시장 기능인데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은 이 문제를 1백 년 전에 이미 해결하여 놓았던 것이다. 일제 하에서도, 6·25동란과 군사독재, 부정부패, 산업화, 재벌독점, 환경오염에서도 이 두 시장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 불만 났다하면 제일 먼저 터지고 타는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불타 폭삭 주저 앉았나 싶더니 다음날 여지 없이 제일 먼저 문을 여는 곳 전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지 않는 이런 곳을 경제속도가 달라졌다고 방치하면 근본을 잃는다" -1999년 2월 18일 백남준

-예술가에게 실수는 오히려 천재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다.

-행복이냐? 아마… 배반이냐? 아마… 출세주의냐? 아마… 겁쟁이냐? 아마…
우리들의 8・15로 돌아가자. 해방 20년이 다가온다. -슈투트가르트 좀 아카이브, 1965년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한마디로 전위 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넥타이는 멜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를 수도 있다.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끌어온 것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런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1993년 휘트니베엔날레 서울 순회전을 기획하며

한국의 재벌은 결코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 사람을 이길 수 없다(독점기업도 건드리지 못하는 양대 <남대문 동대문>시장의 기능을 우리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란의 *'샤' 왕조(1077년부터 1231년까지)가 결국 바자의 상인들에게 진 것처럼 말이다 *(페르시아어: خوارزمشاهیان) [...] 자본도 변변치 않은, 노력투성이의 경제라 시장상인은 아무도 무섭지 않고 특혜금융도 필요없다 양대시장이 거대부패와 특혜융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 불만 났다하면 제일 먼저 불타 폭사 주저않았나 싶더니 다음날 제일 먼저 문을 여는 곳 전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지 않는 이런 곳을 경제속도가 방치하면 근본을 잃는다. 이런 자유경제가 자본주의의 능률을 최상으로 끌어로리고 한국을 지킬 것이다 -백남준
 
-현대 문화에서 비디오 아트가 크게 자리 잡은 것은
백남준의 예술과 놀라운 상상력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텔레비젼을 이용한 프로젝트, 설치 미술, 행위 미술, 공동 제작,
새로운 예술 도구 개발,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중 매체 문화 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언어를 재해석한 선구자적 존재이다.  -존 헨하르트

-아이폰은 백남준 아이디어다 
 -존 헨하르트
 
<내용이 계속 이어진다>
- 예술가는 외줄 타는 사람이다.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역사를 쓰는 것이 예술이다 -백남준


<부록>백남준 부친(일본에서 메이지 대학 법대와 니혼대 상대를 나온 지식인)이 운영하는 태창방직 사진 1920년대 방직기가 300여대(아래사진)가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은 당대 지금 삼성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부잣집 막내아이들이었다 아래 사진은 그의 유치원 다닐 때 캐딜락(유치원 동창인 이경희여사와 함께)을 타고 다니고 당신 한국에서 캐딜락이 2대가 있다고 당시에 차 수리공이 10명이 되었다고(당시는 차가 자주 고장이 나서 수리공이 많이 필요했다고) 동대문집이 3천평이나 되고 그러니 백남준 부친이 사업가로써 친일을 했다기보다는 불가피하게 일본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백남준은 그런 것이 싫어서 굶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예술가가 되려고 결심했다는 고백했다
아버지가 친일이냐 아니냐 논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였기에 일제시대 친일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일본과 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남준은 그런 점이 싫어서 예술가가 되려고 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친일이란 아주 적극적이고 악질적인 친일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식민지시대에는 대부분 사람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도 하고 눈치를 보며 산 것은 사실이다


[백남준과 하버마스(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 하죠 공론장 이론으로 유명 아직 생존)는 소통철학에서 통한다] 68혁명 당시 하버마스

프랑크푸르트학파 출신의 현존하는 최고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는 유럽의 지성인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계몽주의적 이성주의(?)를 믿는다. 그는 신체적 장애가 있다 19살 때 보리외과 수술에도 연설에 불편을 줄 정도도 입이 기형이다. 역설이지만 그래서 소통철학의 대가인가. 인생의 아이러니다 그래서 입보다 귀가 발달한 것인가요

그는 10대를 나치시절에 보냈는데 그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로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사회였기에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출현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개인 의견 여기서 미디어가 중요하다 미디어과 대통령과 국민을 이간질시키는 일방적 미디어가 되면 독재자가 등장한다) 그에게도 백남준의 미학에서 강조하는 쌍방형 소통방식이 역시 중요하다. 가장 취약한 것 혹은 가장 연약한 것을 연결시키고 소통시키는 것이 그의 철학적 테마다

<백남준 주제는 왔다갔다 통신 소통 유통 이런 것이 그의 관심거리다>1993년 백남준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요원들과 작업하는 모습 진짜 장난꾸러기는 여기에 있군요 이것 타고 울람바토르에서 베니스까지 왔다갔다 하겠다는 소리죠 노마드 작가로서 재미있는 점은 자연 반 문명 반 둘의 조화에 두고 있다. 뒤에는 바로 단군이 보이네요 정식이름은 스키타이 단군이죠 즉 우리가 유목민의 후손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