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어떻게 뉴욕 소호 머서 거리 110번지 꼭대기 다락방에 집을 얻을 수 있었나 플럭서스의 창시자(1961년)이기도 한 마키우나스는 건축가집안이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이다 그래서 부동산업자가 될 소지가 없지 않았다. 주변 예술가들에게는 배신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주변에 가난한 예술가들을 좀 도와주고 싶었던 것인가.
마키우니스의 부친은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에 이민 온 지 몇 년 안 되어서 뉴욕시립대학교 건축과 교수가 되었다. 드문 예인데 그만큼 능력이 출중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데 마키우나스도 사업에 남다른 수완을 보였다. 버려진 뉴욕 소호 공장지대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임대료가 싸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뉴욕의 후진지역인 이었으나 예술가들이 모여 살다보니 고급스러운 동네가 되면서 지금은 호화 부티크 거리가 넘쳐나는 지역이 되었다. 부동산값 은 천정 부지로 뛰고 결국 백남준은 운 좋게 이 곳에 둥지를 튼다. 마키우나스와 의견충돌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행운을 얻었다.
백남준 꼭대기 다락방 팔라고 했고 마키우나스 백남준이 거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안 팔려고 했다. 결국 돈 문제가 거론되고 그런데 마키우나스도 백남준 부잣집아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백남준은 이제 막대한 유산을 받을 것처럼 뻥을 치고 일종의 사기지만 말이다. 꼭대기 창고를 내주고 가격은 1만 2000 달러에 낙찰, 일단 3000달러를 낸 후 매달 1000달러를 내기로 했다. 그래서 1974년 백남준 소호에 집을 가지게 되었다. 운수대통한 셈이다 <아래사진> 소호 머서 거리 110번지 5층 꼭대기 창고 1974년에는 여기가 마키우나스 친구들 모이고 창고였다. 1번째 사진은 1964년 백남준 모습이고. 2번째는 내가 2015년에 뉴욕에 갔을 찍은 사진이다. 백남준 집은 맨 꼭대기 5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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