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시대의 예언가 백남준> - 황인(미술평론가) 1987년 그가 갤러리 현대에서 근무할 때 백남준을 처음 만나다. 소중한 에피소드 많네요. 1984년 1월말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존 케이지가 음악을 맡은 '머스 커닝햄 무용단 공연'이 있었다(잘 몰랐던 이야기) 당시 백남준의 생생한 모습을 반짝이는 보석처럼 증언하고 있다
1984년은 특별한 해였다. // 새해벽두(1월 2일 새벽)에 백남준의 지휘로 뉴욕, 파리 서울 등지에 동시중계되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위성중계 생방송이 있었다. 그리고 1984년 1월말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머스 커닝햄 무용단의 공연이 있었는데 존 케이지가 음악을 맡았다.
미술대학 학생이었던 나는 그 공연의 뒷자리 일반석표를 샀지만, 7*50 쌍안경 덕분으로 퍼포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스웨터 차림의 존 케이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경복궁인가 어딘가에서 주웠다는 마른 나뭇가지를 부비면서 나는 소리를 증폭시켜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백남준과 일말의 인연을 맺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
1987년 7월 현대화랑에 입사를 하고 나니 백남준이란 아득한 이름이 갑자기 눈앞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백남준은 원래 원화랑의 정기용대표와 긴밀한 관계의 작가였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성사되는 데에도 원화랑의 정기용대표의 초기참여가 큰 역할을 했다. 위성방송에 투입된 경비의 일부는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등 참여예술가들의 판화작품을 제작, 전시, 판매하여 메꾸었는데 이 일 또한 '원화랑'이 담당하였다(84년 2월).
원화랑은 현대화랑과 협력적 관계였다. 국내에서 백남준의 오브제 작품이 본격적으로 전시되는 데에는 현대화랑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원화랑, 현대화랑이 퍼블리셔로 참여하여 신촌의 <윤인근 공방>에서 백남준의 판화를 제작하는 일도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이루어졌다. 다다익선을 자주 언급하는 백남준의 작업세계와 판화는 제법 잘 어울리는 장르였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한 당시 한국의 경제는 단군이래 최고의 호경기였다. 미술계도 마찬가지였다. 현대화랑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작가에 따라서는 큰 돈을 거머지는 일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 돈을 순수하게 미술작업에 재투자하기보다는 재테크에 활용했다.
백남준은 달랐다. 작품을 팔아 1억의 수입이 생기면 거기 2억을 더 빌어 3억짜리 새로운 전시기획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삶의 모든 에너지와 능력을 오직 창조적 계획에 쏟아붓기만 하는 대책 없는 빚쟁이의 삶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일상은 호사와 먼 소탈함 삶이었다. 백남준은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큰 부잣집 아들로 성장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소유의식이 없는 듯했다>
어쩌다 현대화랑 편집실에 들렀을 때 마침 자리에 있던 미술계 후배들이 내게 백선생님 사인을 원했다. 부탁을 드리니 시원시원하게 사인을 해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들었다. 사인을 자신의 작품의 일부로 간주한 결과 그 또한 소유할만한 재화 가치로 인정하여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선뜻 해주기를 꺼리던 일반 작가와는 달랐다.
그런 성격은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자신만의 고유의 브랜드(作風)를 소유하려 않는다. 작품 하나하나에 꼼곰하게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미래학자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세계를 스펙터클하게 펼치는' 데에 더 열중하는 모험가 스타일에 가깝다.
백남준은 예술가이자 동시에 사상가였다. 그런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작품에는 그의 사유의 편린이 작품 속에 텍스트로 직접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1988년 제작의 어떤 비데오 오브제 작품에는 아예 독서 편력기를 열거해놓았다.
정지용, 김동리, 소월, 유진오, 김소운, 이광수, 서정주, 노천명 등 한국문인들 그리고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시인), 다니자키 쥰이치로(谷崎潤一郞 소설가) 미키 기요시(三木淸 철학자) 등의 일본문인들. 사마천, 두보, 도연명, 양계초 등 중국문인들 그리고 카프카, 헤세, 세익스피어 등 서구문인들의 이름이 망라되어 있다. 그의 지적여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아카이브가 그 자체로 작품으로 변환된 케이스다.
그를 이해하려면 작품 하나하나를 분석하기보다는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컨텐츠와 정보의 정체가 뭔지를 살펴보는 일이 더 유익할 때가 많다. 백남준의 작품은 비데오 아트이자 테크놀로지 아트다. 때에 따라서는 작품과 제품의 구별이 쉽지가 않다. 브라운관을 작품으로 볼 것인가 혹은 교체가능한 부품 혹은 제품으로 볼 것인가는 판단이 쉽지가 않다.
그러나 이는 분리가능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 스스로 이 점을 명확하게 하여 어떤 작품에는 예비용 소모품 부품을 몇 개 더 준비하여 작품에 딸려 보내기도 한다. 이럴 경우 하나의 작품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 요소가 무언가 위계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위계의 최정점에는 그의 사유를 지탱하는 컨텐츠, 정보가 자리잡고 있기 마련이다. 늘상 재료라는 틀과 정보를 구별해야 하는 자세, 이런 점이 그의 작가적 행보의 차별점일 것이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열렸는데, 이는 백남준의 명성을 신뢰하는 국제적 레벨의 작가들과 기획자가 참여하였기에 가능한 행사였다. 백남준 자신도 '신시아 굿맨'과 함께 특별전 인포아트(Info ART)전의 디렉터로 참여하였다. 정보(Info)를 예술 혹은 사회현상의 키워드로 다루는 일이 다소 낯설 때였다. 이때 '다음(Daum)'이 등장한 사건은 의미심장하다.
다음 포탈사이트는 두 명의 청년이 1995년 4월 인터넷 기반의 소박한 버츄얼 갤러리로 출발했다가 그해 9월에 개최된 제 1회 광주비엔날레를 인터넷에 생중계하면서 유명세를 타며 성장일로에 올라섰다.
백남준의 정신세계를 이어가는 작가들이 국내에 별로 없다고 한다. 예술 혹은 사회현상을 ‘정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인포아트로 출발한 ‘다음’이야말로 백남준의 정신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충실하게 이어나가고 있는 집단이 아닌가 한다.
백남준의 세계를 재료적 틀을 제거한 채 ‘정보’ 그 자체로만 보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렸다. ‘나의 예술적 고향: 라인란트의 백남준’전에는 백남준의 (물질적인) 작품이 없다. 작품이라는 틀이 없기에 오히려 백남준의 본질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전시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백남준 소경(小景) 하나. // 88올림픽을 앞두고서 있었던 어느 술자리. 이날의 주빈은 물론 백남준이었다. 국내최고의 지성이라 자부하던 모선생의 현학적 발언이 늘어지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자신이 최근 독서한 신서를 1권부터 15권까지 하나하나 지루하게 설명해나가자 불편한 분위기는 당연지사. 차마 제지를 못하는 동석자들 사이에서 투정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침묵으로 일관하던 백남준이 한마디 툭 던졌다.
“혹시 얼마전에 나온 16권은 읽었소? 아뇨. 내가 서울에 오기 전 뉴욕에서 그 저자의 l6권째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이란 게 15권까지 자신이 쓴 게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마디로 분위기는 급변시키는 촌철살인의 재치였다. 역시 정보에서는 한 수 위의 독서광 백남준이었다. - 끝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1987년 백남준을 만나서 그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갖추다. 일본 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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