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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MMCA] '한국실험미술' 연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

오마이뉴스 관련 기사 https://omn.kr/24mcf

 

한국 실험 미술의 최초를 엿볼 수 있는 곳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 전, '서울-뉴욕-LA'에서 9개월간 소개돼

www.ohmynews.com


관련 블로그 https://seulsong.tistory.com/2238

 

[MMCA/뉴욕구겐하임] '한국실험미술(60-70년대)' 9개월간 전시

[국립현대미술관-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공동기획]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개최 [1]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주요 작가와 대표 작품 국내외 소개한다 -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

seulsong.tistory.com

[MMCA]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 연계 특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개최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전시 연계 특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개최 / [] 미술관 내 금기시 되어왔던 실험적인관람 행동들 참여자들과 현장 시연 -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시 연계 일탈반항실천 해프닝 - 사전신청을 통해 온라인 오픈채팅방에서 금기 행위 토론 및 공유 후 선정 - 78() 오후 2, 4시 총 2회 운영(회당 최대 100명 선착순 참여 가능)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직무대리 박종달)은 서울관에서 진행중인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시 연계 행사 일환으로 참여자들이 정한 미션을 다함께 동시 수행하는 해프닝 형식의 특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를 운영한다.

526일 개막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시는 미국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과 연구 협력하여 1960-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주요 작가 29명과 작품 약 95점을 국내·외에 소개하고 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한국미술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세계 미술계의 일원으로 영역을 확장했던 실험미술의 역사를 조망하며, 기성세대의 형식주의에 반발하며 진행했던 다양한 전위적 활동을 선보인다. 이를 확장하여 서울관 6, 7 전시실 내부에서 78() 오후 2, 4시 총 2회에 걸쳐 기존의 제도화된 미술관 전시 관람의 규칙과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일탈과 해방의 시간을 참여자들과 함께 누려본다.

뉴욕에서는 백남준 실험 미술 진행 1965

기존 미술관 전시 관람 시 금기 되어왔던 행동들을 다양한 참여자들의 논의를 통해 수집하고, 그중 선정된 금기 행위들을 워크숍을 통해 시연한다. 앞서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mmca.go.kr)에서는 626일부터 참여신청을 받아 온라인 오픈채팅방을 열고 미술관 내 진행 가능한 실험적인 행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누워서 전시보기’, ‘박수치고 큰소리로 웃기등 관람의 실험적 행위 등에 대해 열띤 토론과 의견을 공유했다. 이를 통해 최종 선정된 금기 행위는 워크숍 당일 오전 공개하고, 이를 현장에서 5분여간 직접 실천해보는 해프닝이 진행된다. 오픈채팅방 참여자 및 당일 현장 접수자를 포함하여 회당 최대 100명이 선착순 참여 가능하며, 당일 로비에 마련되는 특별워크숍 데스크에서 등록하면 행위에 필요한 물품과 재입장 확인 스티커를 받을 수 있다. 행사 참여는 무료이지만, 전시실 입장을 위한 전시 관람권은 별도 구매해야한다.

특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는 관람객의 직접 참여를 통해 한국의 1960-70년대 격동기에 청년작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전위적 실험미술을 한층 잘 이해하고 더욱 많은 국내·외 관람객들의 관심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시는 716()까지 진행된다. 일반인 전화 문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02-3701-9500)

<추신> 1967<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8<강변에서의 타살> 비교 / 사진 저작권 국립현대미술관 외 강국진 정강자 등

1967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1968년에 있었던 <강변에서의 타살>은 강변에서 열린 무겁고 진지한 해프닝이었다면 19671년 전에 열린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가볍고 경쾌하다. 한국 미술사 최초의 해프닝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이 해프닝에는 강국진, 김영자, 김인환, 심선희 등 참가했다.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평론가 오광수가 각본을 썼고 무동인과 신전인 10여 명이 작품 발표에 참여했다.

김영자가 의자에 앉아 비닐우산을 펼침과 동시에 나머지 작가 전원이 의자를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돌며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시작되었다. 작가는 한국의 전래 민요인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며 촛불에 불을 붙여 우산에 꽂았다. 계속해서 원을 그리던 이들은 별안간 촛불을 끄고 달려들어 우산을 찢은 후, 이를 밧줄로 감아 밟으며 해프닝을 마무리 지었다.

행위가 끝나고 작가 중 한 명이 관객에게 해프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해프닝이란 캔버스를 벗어난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미적 사건이며 그 자체가 표현 행위인 것이다. []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현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만이 여기 온 목적의 전부이다."

이 발언에는 해프닝의 미적 체험과 행위만이 일면 강조된 듯 보인다. 그러나 오광수에 따르면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극단적 현대의 문명을 비유한 비닐우산과 순수한 정신을 비유한 촛불을 대비하여 문명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으려 한 작품이었다. 이에 더해 작품에 참여한 일부 작가는 이 해프닝이 기성 미술계와 제도에 대한 관습을 짓밟는 비판 또한 내포하였음을 밝혔다.

1968 강변에서의 타살

<강변의 타살>, 이 해프닝은 유럽의 68혁명과 관련 없이 냉동시대(한국은 68혁명을 받아들일 분위기가 안 되었다. 그해 1·21일 북한에서 김신조 등 내려왔고, 또 울진 삼척지역에 북한 간첩 침투(1030~112) 사건 등 그야말로 냉동기였다) 속에서도 19681017일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에서 한국 미술계 대사건인 <한강변의 타살>이 일어났다. 실험주의 미술인의 해프닝, 이벤트, 사건이었다.

<강변의 타살> 해프닝 연출 방식이 궁금

<()강변의 타살> 해프닝 연출 방식이 궁금하다 <아래를 읽어보니 해프닝 연출을 어떻게 했는지 알겠다> 강국진은 2명의 동료 작가들과 함께 제2 한강교 아래에서 기성미술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들은 먼저 한강에서 물을 길어온 뒤, 모래사장에 각자가 들어갈 만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작가들이 스스로 그 속에 들어가면 관객들은 모래로 구덩이를 메우고 그 위에 사정없이 물을 퍼붓는다.

다시 작가들이 구덩이에서 나와 각자 몸에 비닐을 걸치고 문화 사기꾼’(사이비 작가), ‘문화 실명자’(문화 공포증자), ‘문화 기피자’(관념론자), ‘문화 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문화 보따리장수’(정치 작가), ‘문화 곡예사’(시대 편승자)라고 쓴다. 큰 소리로 그것을 읽은 뒤 그들은 그 비닐들을 모아 태우는 화형식을 갖고 매장하는 행위를 벌였다. 그것은 제도권 문화 및 국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자 실험적 해프닝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위상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행위였다

화형식

이 행사에서 '문화고발장'이라는 것을 쓴 다음에 이를 불태우는 해프닝을 통해 기성 문화세력을 비틀고 조준했다. 그 선언문을 읽다 보면 <문화보따리장사(정치작가)>, <문화사기꾼(사이비작가)>, <문화기피자(관념론자)>, <문화부정축재자(사이비대가)>, <문화곡예사(시대편승자)> 등의 명명이 보인다. *1968년 당시 3명의 예술가는 문화사기꾼(사이비 작가), 문화실명자(문화 공포증자), 문화기피자(관념론자), 문화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문화보따리장수(정치 작가), 문화곡예사(시대 편승자) 등을 쓰고 나서 그 글을 읽고 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다. 이를 통해 당시 한국의 구태의연한 기성문화 세력을 매장하고 타살하는 문화비판 행위를 펼쳤다. -파이낸셜 뉴스

그들은 한국 현대사회에서 역사의식과 문화적 자각 없이 예술가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사이비로 칭하고, 사실주의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사실주의로 눈치를 보며 왔다갔다하는 시대미학의 편승자를 문화 곡예사라 칭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사이비가 제도권 미술계와 사회에서 대가(大家)로 대우받는다고 간주하고 그것을 매장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상징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강변의 타살>은 고질화되어 가는 현실사회의 문화적 모순과 기성 미술계의 그릇된 타성을 고발하는 퍼포먼스였다.

한국에서 돌발성 행위 미술 현장에는 언제나 '정찬승' 그리고 강국진 정강자가 있었다

한국에서 돌발성 행위 미술 현장에는 언제나 '정찬승'이 있었다. 물론 강국진, 정강자 등도 동참했다. 정찬승은 진정한 순수예술가였다. 1980년대 한국을 탈출 뉴욕에서 정크아트 등 활동하다가 90년 이후 귀국했으나 얼마 살지 못하고 타계하다.

<해프닝과 이벤트 서구에서는 해프닝은 우연적, 이벤트는 의도적인 것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별 생각이 혼합해 쓴다> <사람을 땅에 묻는 해프닝도 있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인가?>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가 주최하고 강국진기념사업회가 제작 및 후원하는 ‘2018년 한강변의 타살해프닝 리메이크에는 문재선, 심혜정, 정기현, 허은선 등 4명의 퍼포먼스 작가들이 고증을 바탕으로 퍼포먼스 재연에 나선다.

'한강변의 타살' 재현 퍼포먼스 20181013일 서울 양화한강공원에서 1968년 해프닝 '한강변의 타살'을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퍼포먼스가 판아시아 주최로 진행됐다. 사진은 권영일 작가가 촬영했다. 그 당시로 보면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기획이었다. 해프닝 아트로 수준이 있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사진저작권 정강자, 아라리오갤러리

정강자 유신반대시위 1973년

경향신문 관련 기사 https://m.khan.co.kr/culture/art-architecture/article/201802091819001#c2b

 

[보다, 읽다]1960년대 파격과 저항의 블랙리스트 정강자와 ‘유신 반대 시위’

지난 달 30일 서울 아라리오 갤러리 정강자 회고전에 갔을 때 가장 놀라운 작품은 1968년 작 ...

m.khan.co.kr

<1968년 경향신문 기사 전문경향신문 강변의 타살 해프닝에 대한 기사 내용 제목: 문화 고발(?) 해프닝 쇼 "이 무슨 미친 짓이냐"고 빈축 //

정강자, 물총세례를 받다

1968년 10월 17일 하오 4시 제2한강교 아래 백사장에서는 '한국청년작가연합회원'이며, 홍익대 미술대학 졸업생인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자칭 전위 작가라는 세 사람이, 네 번째 해프닝을 벌여 행인의 눈길은 끌었다. 삽 3개, 바께스 3개, 색 비닐천, 성냥, 휘발유 1동, 가위, 흰 페인트 붓, 사인펜의 재료를 써서 이들이 만들어 낸 작품을 보면 1) 삽으로 구덩이를 파서 기다란 비닐 천을 몸에 감고 모래 구덩이 속에 들어가 목만 내놓은 다음 2) 관중이 물총을 쏘아 대자 3) 도로 일어나 품고 나와서 비닐을 걸치고 4) 흰 페인트로 각자가 몸에 걸친 색 비닐천 위에 文化告發狀을 쓴 다음 5 관중에게도 메모지를 배부하여 고발장을 쓰게 하고 6) 다시 이 고발장을 다시 읽어가며 태워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 의해 문화 고발(?)당한 사람은 1) 문화·사기꾼 사이비작가) 2) 문화·실명자(문명공포증자) 3) 문화·기피자(관념론자 19세기적 현대비평가) 4) 문화·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5) 문화·보따리장수(정치 작가) 6) 문화·곡예사(사실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사실로 눈치 보며 왔다 갔다 하는 시대미학의 편승자)라나, // 이 수상한 예술행위(?)를 시종 지켜보면 10여 명의 관중과 40여명의 기자들은 날씨도 추운데 이 무슨 미친 짓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다.

1968년 10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서 서양 미술의 목을 치다 자부심 없으면 불가능하다. 1965년 '요셉 보이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까 서구 우월주의 목을 날렸다. 1968년 '정강자' 등 <강변의 타살>은 한국 미술의 목을 친 사건으로 68혁명 영향이 없었다지만 당시 홍익대 미술 대학 수준을 인정하고 싶다. 기획력과 창의력이 기발났다. 자부심이 있었다. 세계적 수준으로 한국 미술을 끌어올렸다. 한국 미술이 그 방향을 잃었을 때 다시 돌아가야 하는 본향이 아닌가 싶다

트윈 폴리오

[1] 세시봉(C'est Si Bon) 무교동 음악감상실 19680201일에, 포크 가수의 산실, 무교동 음악감상실) 2인조 트윈폴리오(윤형주, 송창식) 데뷔하다. 원래는 1967년 말 세시봉 트리오였다(포함 이익균, 군 입대로 포기)
[2] 세시봉(C'est Si Bon) 무교동 음악감상실 19680530일에, 투명풍선과 누드 해프닝(Transparent balloon and Nude Happening) 정강자와 '청년작가연립전' 작가들 및 관객

<첫 페미니즘 작품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의 '투명풍선과 누드'(1968)>

한국일보

한국 최초의 누드 해프닝이 정강자와 강국진 및 '청년작가연립전' 작가들에 의해 1960-70년대 포크송 가수의 데뷔 무대였던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시연되었다. 둔탁한 타악기 음악 리듬에 맞추어 정강자가 상반신을 벗은 채 어두운 무대 위에 나타나 의자에 앉는다. 강국진과 정찬승을 비롯한 청년작가연립전 작가들은 끈끈한 투명풍선을 불어 정강자의 몸에 붙인다. 투명풍선을 잔뜩 붙인 정강자가 의자에서 일어서면 작가들은 갑자기 달려들어 투명풍선을 터트려 부순다.

사진저작권 강국진

여기서 섬세하고 여린 투명풍선으로 장식된 여인의 몸은 전형적인 의 스테레오타입을 상징하나, 거친 폭력 앞에 부서져 적나라하게 노출됨으로써 그 는 파괴된다. 그것은 음악과 빛이 동반되었으며 작가들과 관객이 함께 참여한 퍼포먼스였다(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시공사, 2003), pp. 92-9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