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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서울) 개최 후 NY 구겐하임미술관 2023.09.01~2024.01.07), LA 해머미술관(2024.02.11~05.12) 순회전>
[국립현대미술관-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공동기획]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개최
[1]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주요 작가와 대표 작품 국내외 소개한다 -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등 29명 대표작 약 95점, 자료 30여 점 - 청년작가연립전, 제4집단, 아방가르드협회, ST 학회, 대구현대미술제 등 주요 전시와 입체미술, 해프닝, 실험영화 등 전위적 실험 통한 격동기 한국 조명하다 -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로비엔날레 등 당시 청년작가들의 국제 미술계 활동상 재조명, 동시대 한류의 원형(原形) 주목하다 - 5월 26일(금)부터 7월 16일(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최 이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2023.09.01. ~‘2024.01.07.), LA 해머미술관(‘2024.02.11.~05.12.) 순회전을 연다
[2] 국내외 이해도 및 관심 향상을 위한 연계프로그램 진행 및 국ㆍ영문 도록 발간 - 학술행사(5/31), 작가 퍼포먼스(6월), 교육 프로그램(6-7월) 등 개최 - 동시대 연구 논문 및 당시 선언문, 작가글, 비평문을 수록한 국·영문 도록 발간 <작성중>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직무대리 박종달)은 근대화, 산업화의 국가 재건 시대에 청년작가 중심의 전위적 실험미술을 다룬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을 5월 26일부터 7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이하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기획 및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2018년부터 시작된 양 기관의 국제적 협력과 공동 연구가 실현된 결과물이다. 특히 한국 실험미술의 대표 작가 및 작품, 자료를 국내외에 소개하는데 의의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강수정 학예연구관과 구겐하임미술관 안휘경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는 작가 인터뷰, 작품 실사 및 학자들과의 지속적인 협력을 통해 이번 전시를 구현했다. 서울 전시에 이어 9월 1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내년 2월 11일부터는 LA 해머미술관에서 순차적으로 전시가 개최된다.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당대 한국미술의 면모를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미술계의 일원으로 그 실천의 영역을 확장했던 한국의 실험미술 역사를 조망한다. 1960-70년대 당시 국제 사회는 68혁명, 반전 평화운동, 페미니즘 등으로 인식의 전환기를 맞았으며, 한국은 6.25전쟁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압축적 근대화와 산업화의 급속한 사회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경제 개발의 물질적 풍요와 정치ㆍ사회적 억압 등의 사회 변화는 일상속에서 ‘나’를 중심으로 예술의 의미를 모색해 온 청년작가들에게 모순된 토대로 작용했다. 이들은 예술과 사회의 소통을 주장, 보수화된 기성세대의 형식주의에 반발하며 그룹 또는 개인으로 기존의 회화, 조각의 영역을 벗어나 오브제와 입체미술, 해프닝, 이벤트와 영화, 비디오를 포함한 다양한 매체들을 전위적‘실험미술’의 이름으로 포괄하며 역동적인 사회 현상을 반영하였다.
한국실험미술(60-70년대) 전시 연계 프로그램
안휘경 구겐하임 큐레이터 / 한국실험미술(60-70년대) 전시 연계 프로그램 5월 31일 학술 // 강연자: 이상록, 강수정, 안휘경, 윤진섭, 조수진, 정연심 참가 토론자: 김찬동, 이필, 전유신
한국 실험미술 1967년 이렇게 선언하다. 여기서 시작하다. 압축된 근대화와 산업화의 급속한 사회 변화 속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미술에 대한 촉발점과 돌파구는 불가피했다.
전시는 6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었다.
1963년 기하추상회화 그룹 ‘오리진’(Origin)을 창설했다. 1967년에는 청년연립작가전’에 참갛다. 사각형과 삼각형, 패턴과 빨강·노랑·파랑 등 오방색을 사용한 기하 추상 회화를 선보였다. ‘동시성’ 시리즈는 ‘형태, 색채, 공간 세 요소가 같은 가치로 두고 하나의 평면 위에 놓는다. 그의 ‘동시성’ 시리즈는 근작에서는 색감과 형태가 점차 부드러워지다.
1967년 12월 14일 국립중앙공보관(National Information Center) <물과 불의 연금술>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리듬감이 넘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민요를 부르면서 촛불에 불을 붙여 우산에 꽂았다. 1967년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각본 오광수) /// 해프닝은 비의도적이고 // 이벤트는 의도적인 것이다 여기 제목이 잘못 된 것 같다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며, 이는 한국 미술사 최초의해프닝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평론가 오광수가 각본을 썼고 무동인과 신전인 10여 명이 작품 발표에 참여했다. 김영자가 의자에 앉아 비닐우산을 펼침과 동시에 나머지 작가 전원이 의자를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돌며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시작되었다. 작가들은 한국의 전래 민요인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며 촛불에 불을 붙여 우산에 꽂았다. 계속해서 원을 그리던 이들은 별안간 촛불을 끄고 달려들어 우산을 찢은 후, 이를 밧줄로 감아 밟으며 해프닝을 마무리 지었다.
행위가 끝나고 작가 중 한 명이 관객들에게 해프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해프닝이란 캔버스를 벗어난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미적 사건이며 그 자체가 표현행위인 것입니다 […]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현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만이 여기 온 목적의 전부입니다."
이 발언에는 해프닝의 미적 체험과 행위만이 일면 강조된 듯 보인다. 그러나 오광수에 따르면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극단적 현대의 문명을 비유한 비닐우산과 순수한 정신을 비유한 촛불을 대비하여 문명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으려 한 작품이었다. 이에 더해 작품에 참여한 일부 작가는 이 해프닝이 기성 미술계와 제도에 대한 관습을 짓밟는 비판 또한 내포하였음을 밝혔다.
한국에서 해프닝 행위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1960년대 말~1970년대초까지 <투명풍선과 누드>(1968, 도판 18), <한강변의 타살>(1968, 도판 19) 등으로 이어졌다. 이를 바라보는 당대 일반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으나, 해프닝은 한국 실험미술가들에게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였으며, 그로 인해 기성 미술계를 비판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 이예림
첫째, ‘청년의 선언과 시대 전환’에서는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전위적 실험미술의 양상들을 소개한다. ‘오리진’, ‘무동인’, ‘신전동인’ 등의 신진 예술인그룹의 활동과 이들이 연합하여 개최한 《청년작가연립전》(1967)을 통해 국전(國展)과 기성 미술계를 비판하고 ‘반(反) 미술’과 ‘탈-매체’를 최초로 주창한 청년예술가들의 주요 작품과 해프닝 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서승원의 <동시성 67-1>(1967), 정강자의 <키스미>(1967), 강국진의 <시각 Ⅰ,Ⅱ>(1968), 이태현의 <명> (1967)등이 소개된다. 또 초기 해프닝 강국진, 김영자, 김인환, 심선희 등의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과 첫 페미니즘적 작품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의 <투명풍선과 누드> (1968) 등 금기를 넘어선 이들의 활동이 펼쳐진다.
1960년대 한국에서 네온아트가 나왔다 현대미술은 재료의 독창성에 오는 것인데 하여간 대단하다. // 강국진, 〈시각I,II〉, 1968, 네온 조명, 스테인리스 스틸, 280×46×46cm(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강국진은 1960–70년대에는 행위와 설치, 1980–90년대에는 판화와 회화 작업에 주력하며 일평생 다양한 미술 매체를 실험했다. 그는 1965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료들과 ‘논꼴’ 동인을 1964년 창립해 1967년까지 3회의 공동 전시를 열고 동인지 『논꼴아트』(1965)를 발간했다. 1967년 강국진은 다시 ‘신전동인’을 결성한 뒤 단체 회원들과 함께 《한국청년작가연립전》(1967)에 참가해 개인 작가의 해프닝으로는 최초의 작품인 〈색물을 뿜는 비닐 주머니〉(1967)를 선보였다. 그는 또 정찬승, 정강자와 함께 해프닝 〈투명풍선과 누드〉(1968), 〈한강변의 타살〉(1968)을 발표하기도 했다. 강국진은 1960년대 후반에는 네온사인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시각I,II〉(1968)처럼 산업 재료를 활용한 작품으로 새로운 시대감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예림
정강자, <키스미>, 1967/2001재제작, 혼합매체, 120 x 200 x 50 cm. 아라리오갤러리 소장 미국 팝아트 설치미술가 '로버트 인디애나' 연상 시키는 '전강자'의 <키스 미> 1967년 작 2001년에 재제작. 당시로는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 ‘신전동인’의 주요 회원인 정강자는 1967년 《한국청년작가 연립전》에서 〈키스미〉를 전시했다. 위아래 치아가 다 드러나 보이는 입술을 거대한 석고로 만들고 밝게 채색한 대형 입체 작품이다. 치아 위에는 선글라스를 쓴 여성의 머리, 가정용 고무장갑, 유리 플라스크가 설치되어 있다. 정강자는 과장된 신체 부위를 통해 남성의 성적 시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주체로서의 성적 욕망’에 대한 강령을 선포하려고 시도한다. 그 당시 활동한 소수의 여성 예술가 중 한 명인 정강자는 “우리는 사회, 정부에 의해 억압받고 있고, 그들의 시선은 우리에게 쏠려 있다”며 “‘문제적’인 여성으로 치부되는 것이 너무 만연해 이러한 비난을 가시화하려고 노력했다”라고 설명했다. 안휘경
[1969년 백남준 미국에서 김구림 손잡고 한국실험미술에 참여한다]
1969년 해외에서 백남준이 김구림과 연합(한국실험미술)해 참가했다. 마침 '제1회 서울 국제현대음악제(9월 5일)' 열렸다. 백남준 작곡, 김구림 연출 '피아노 위에 정사'다. 두 남녀가 벌거벗고 피아노 위에서 연주가 아니라 정사를 하는 센세이션한 작품이다.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명동 '국립국장'에 1회만 공연했다. 정찬승과 차명희가 이 해프닝 포퍼머로 등장했다.
[김구림]
김구림 'Electric Art II' 1969 작. 2013년에 재제작한 작품/ 네온아트와 함께 당시로는 대단한 작품 국내에서 전자아트의 용감한 실험이다.
김구림 이 작품 실물은 처음 보다 작가로 부터 설명은 여러번 들었지만 여기에 비닐이 사용되었다. 여기데 담요를 덮고 다시 불을 붙이고 다시 불을 끄고 삶의 죽음의 무한반복이다. 온통 세상이 검은 색이다. 절망적 시기를 죽지 않고 넘겼다. 이것은 회화의 거부정신이 담겨 있다 죽음의 시대, 그 시대를 불태우려는 방화범 심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다 오브제아트는 물론 설치 개념미술까지 다 들어있다. 한국 실험미술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다. 이 작품은 김구림 군대생활에서 죽지 않을 정도로 터지고 주변에 죽음과 관련된 사건이 터지면서 절규하듯 만든 작품으로 제목이 죽음의 태양 II 1964년 작 이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급이 있는 미술관이라면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런던 테이트 모던에 소장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김구림, 〈1/24초의 의미〉, 1969, 16mm 필름, 컬러, 무음, 9분 14초, ed. 2/8,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소장
〈1/24초의 의미〉는 제작 당시 서울의 에너지와 역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을 담아낸다. 김구림이 감독과 편집을 맡고, 정찬승, 정강자 등의 작가와 공동으로 제작한 영화로, 초당 24개의 프레임을 개별적으로 연결하여 제작한 것에서 작품의 제목이 유래했다.
영화는 1969년 3월에 개통(2003년 철거)된 삼일 고가도로의 달리는 차에서 차창 밖을 촬영한 장면으로 시작하며 그곳에서 촬영한 장면이 삽입되었다. 중앙극장(2014년 철거)과 같은 랜드마크를 빠르게 지나며, 영화는 분주한 교차로, 공사장, 송전탑,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 놀이공원에서 노는 아이들, 거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급격한 현대화의 순간에 있는 대한민국 수도를 담은 시각적 몽타주이다. 모든 것이 “생산과 소비의 대도시로서의 서울”을 나타낸다. 동시에 이 작품은 가속화된 도시화 속에 무너진 사람들에게 출몰하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낀 도시를 보여준다.
<수정사항> 김구림, <24/1초의 의미> 작품 설명(11p): 기존 가치와 관습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견지한 김구림(金丘林, 1936‒)은 회화와 판화, 조각, 설치미술을 비롯하여, 퍼포먼스, 대지미술, 비디오 아트, 메일 아트에 이르는 실험적인 작품들을 지속해왔으며, 실험연극, 실험영화, 음악, 무용에도 종횡무진 개입해왔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에 참여하여 개념과 과정을 강조하는 전위적인 미술 활동을 펼쳐나갔으며, 1970년에는 다양한 분야의 젊은 예술인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전위예술집단인 제4집단을 결성하여 미술, 연극, 영화, 패션, 음악 등을 종합한 총체예술을 추구하였다.
<1/24초의 의미>는 제4집단을 결성하기 한 해 전에 만든 실험 영상작품이다. 1초에 24컷이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이 작품은 흑백과 컬러가 혼재되어 있고 달리는 차 안에서 본 삼일고가도로, 세운상가, 고층빌딩, 육교, 옥외광고판, 방직공장 등 근대화된 도시의 모습을 빠르게 편집하여 담고 있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한 도시인의 권태로운 일상적 행위의 장면들(하품, 흡연 등)이 영상 중간 중간 등장한다. 이렇게 불연속적이고 비논리적인 전개 과정으로 파괴와 잔인함, 지루함과 일상을 느리게 혹은 매우 빠른 속도로 중첩시켜 재생하는 이 영상은 급속히 산업화돼가는 한국 현대사회의 단면들을 인상적으로 포획한다.
현대적 발전의 장면들과 함께, 카메라는 거리에서 자고 있는 사람, 길가에서 꽃을 파는 노파, 기계 뒤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 그리고 폐허가 된 낡은 문을 지나쳐 간다. 카메라는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정찬승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멈춘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화면 속에서 정찬승은 서양식 정장을 차려입은 채, 혼자 어슬렁거리면서 연거푸 하품을 하거나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 인물은 도시 생활에 대한 무관심과 권태감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작품은 “현대인의 기계화된 삶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도시민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찬승의 존재는 현대인의 과도한 자극과 피로에 굴복하지 못하도록 저항하고 간섭한다.
1969년 7월 21일 서울 아카데미 음악실에서 초연될 때, 〈1/24초의 의미〉는 원래 조명과 음향이 준비된 가운데 20명의 무용수들의 신체에 김구림이 제작한 다른 오브제들과 함께 투사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문제로 구현되지 못했다. 대신 영화 이미지들의 슬라이드가 흰색 보디슈트를 입은 김구림과 정강자, 두 사람의 움직이는 신체에 투사되었다. 안휘경
김구림 작품은 당시 하도 즉형적이고 센세이션하기에 일반 신문에는 나오지 않고 당시 대중지인 선데이서울에 나왔다 이런 기사가 나오면 선데이서울 판매가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런던테이트 모던에서 이 선데이 신문에 나왔던 김구림 자료를 다 수거해 갔다 한국과 영국의 차이다.
1968년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투명풍선과 누드 / 기성 아카데미즘 미술을 비판하기 위해서 기획된 해트닝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김흥수 누드화 풍기문란으로 철거 등등 한국 미술사 속에 보수적 미의식을 꼬집다
[한강변의 타살] 유럽의 1968년 혁명과 관련 없이 1968년 냉동 반공주의 속에서도 1968년 한국 미술계 대 사건인 <한강변의 타살>이 일어났다. 실험주의 계열 미술인의 해프닝, 이벤트, 사건이다.
'부정 축재' <문화보따리 장사>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 선언문을 읽으며서 불태우다. 프랑스의 <스펙터클 사회>라는 책이 나온 것처럼 '예술의 자본화와 상업화'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한국 미술계 자각을 촉구했다. 2년 후 1970년 김구림 주도로 <제4집단>이 만들어지고 그 행위아트로 <기성문화예술 장례식>을 거행하다. 이전까지 모든 미술을 버리고 이제 완전히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거나 폭력을 쓰는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이지만 정부의 엄청난 탄압과 감시로 거리 행사는 1회로 끝나고 말았다.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한강변의 타살>, 1968, 그해 10월 17일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아래 강변에서 열린 퍼포먼스의 기록,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 황양자, 정강자 유족, 정무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김미경 컬렉션 제공
1968년 냉동 반공주의 시절에, 전위예술가들 실험미술을 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다 요셉 보이스가 말하는 '사회적 조각(social sculpture)'이란 무슨 조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다 민주주의 적이고 인간적인 더 진보한 사회를 디자인(개념화)하면서 그런 아이디어를 사회적 행위로 표출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사회적 조각의 예를 든다면 바로 보이스가 실행한 7,000그루의 떡갈나무심기다. 하긴 보이스는 독일 녹색당 창당 멤버였다.[전 세계 68혁명과 1968년 한국전위미술 관련성, 있다 없다 논쟁]
1. 68혁명은 전 세계 현상이었다. 일본도 68혁명이 격렬했다. 이우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것도 일본에서 경험한 68혁명 때문이었다. 그는 서구에서 만든 허위 근대의식을 처절하게 쳐부수다. 그는 모던을 근대와 현대와 구별하면서 근대를 심각하게 비판하다. 그래서 서구에서 살아남았다.
2. 그런데 우리나라 전위미술은 68혁명과 관련이 있나 없나? 그런데 1968년은 우리나라 냉동 '반공주의'가 극에 달했다. 그래서 68혁명을 받을 분위기가 안 되었다. 1968년 1월 김신조가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내려왔고 그와 유사한 사건(아래 3 참고)이 너무 많았다. 이런 저런 최고의 냉각기였다. 1968년 한국상황: / 하나: 1월에 김신조의 북파 공작원 일당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목적으로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 / 둘: 이틀 뒤 동해에서 미국 정보함인 푸에블로호, 북한해역 침투 푸에블로호 피랍 / 셋: 그해 10월 사흘간 무장공비들이 연달아 침투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났다
둘째, ‘도심 속, 1/24초의 의미’에서는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함께 시행한 실험적인 시도들을 조명한다. 실험미술의 선두에서 활동했던 김구림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1969)를 상영하고, 또 김구림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을 감쌌던 <현상에서 흔적으로>(1969)를 재해석해 새롭게 제작한 드로잉 <구겐하임을 위한 현상에서 흔적으로>(2021)가 최초 공개된다. 미술, 영화, 패션, 연극, 무용, 종교, 문학을 넘나드는 실험적 작업을 시도한 ‘제4집단’이 도심에서 펼쳤던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8.15.) 등의 해프닝도 자료로 소개한다.
<한강변의 타살> 2년 후인 1970년 김구림 주도로 <제4집단>이 만들어지고 그 행위아트로 <기성문화예술 장례식>을 거행하다. 이전까지 모든 미술을 버리고 이제 완전히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거나 폭력을 쓰는 일과는 혀 관련 없는 것이지만 정부의 엄청난 탄압과 감시로 거리 행사는 1회로 끝나고 말았다.
[1970년 김구림의 혁명] 그나마 한국미술을 위기에서 구하다 // 1970년 김구림 작가 <현장에서 흔적으로: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1탄 대지미술)과 <현장에서 흔적으로: 경복궁 현대미술관을 묶는 장면>(2탄 설치미술)으로 한국미술을 불태우고, 한국미술 900만원짜리 라며 광목천으로 싸 길거리에 내팽개치다. 한국미술의 새 출발점을 제시. 그는 한국미술의 구세주였다. 그의 공로에 비해서 건강이 걱정될 뿐이다. 그는 고집스럽게 어린아이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한 작가다. 대중성이 없었고 오히려 통속성이 강했다. 런던 테이트 모던 큐레이트 팀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모두가 외면한 <선데이서울>에 나오는 그의 소중한 아카이브를 모으고 있다. 그의 미술이 한국에서 통하지 않자, 일본에 10년 활동 대성공(〈삽, 1973〉과 〈걸레, 1974〉를 동경에 전시하였을 때 반응은 폭발적, 수많은 일본 미술계 거물들과 교류), 미국에서 17년(1984~2000) 망명 생활을 한 셈이다.
1970년 김구림 한국미술 불타고 900만원짜리라며 광목천으로 싸 길거리에 내팽개치다.
1탄 현장에서 흔적으로 -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 1970
2탄 현장에서 흔적으로 - 경복궁 현대미술관을 묶는 장면 1970
국립미술관 900만원이라고 광목천으로 싸서 길바닥에 내팽개치다.
김구림은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6월 10일~7월 9일)에서 초대작가로 〈현상에서 흔적으로(II) -경복궁 현대미술관을 묶는 장면〉라는 제목으로 미술관 작품값을 '일금 900만원'이라는 매겨 놓고 구시대 유물 같은 경복궁미술관(당시 국립미술관)을 마치 시신을 염하듯이 외관 30cm 폭 흰 광목천으로 묶고, 그 천을 매장해 하늘로 보내고 새로운 걸 지향하는 현대미술을 하자는 의도의 설치 작품을 출품했다.
작가의 설치가 드러나자 미술관 측은 초상집 같다는 이유로 26시간 만에 천을 철거했다. 미처 모든 걸 완전히 철거할 수 없었기에 그 천이 남아있어 '흔적'을 완성한 셈이다. 뉴욕에서 이번에 이런 의도로 '구겐하임'미술관 장례를 치르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현대미술의 장으로 거듭나게 하는 이벤트를 멋지게 치른다면 정말 흥분되는 최고의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현장에서 흔적으로 - 경복궁 현대미술관을 묶는 장면 1970
1970년 김구림 경복궁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을 하나의 죽은 시신으로 봤다 김구림은 수준도 되지 않은 작품에 수두룩에서 쌓아놓은 국립현대미술관을 그냥 볼 수가 없었다. 불태울 수는 없고 그것을 산 송장으로 보고 이걸 염하기 위해서 30cm 흰 광목으로 두른 후 그 끝자락을 큰 돌로 얹어 미술관 전체를 묶었다. 김구림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진정한 미술관이 아니라는 퍼포먼스다. 그 다음날 26시간만에 다 철거되었다. 이 설치 작품을 이번에 구겐하임에 확장하다. 이제 미술관 장례를 제대로 치르고 관객과 호흡을 같이하는 모두가 즐기는 곳은 거둡 나야 한다는 것이 그 메시지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계엄령 선포와 정치적 집회 금지, 대학 폐쇄, 언론 검열 등을 규정한 유신헌법이 시행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전시된 〈소멸-화랑 내 술집(1973년)〉은 또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연설과 표현의 형성과 제정을 위한 주권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이강소, 〈소멸-화랑 내 술집〉, 1973(2018 인화), 종이에 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 78.7×108.8cm(10) / 이강소는 지하 명동화랑의 개인전에서 술집을 열었다. 〈소멸-화랑 내 술집〉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이강소가 자주 방문했던 동네 선술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서른 살이던 이강소는 당시 서울에서 유일하게 현대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상업화랑인 명동화랑의 개인전에 술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구입하여 설치하고 막걸리와 안주를 제공했다. 그는 심지어 메뉴가 적힌 입간판도 설치했다. 개막식 밤에 촬영한 흑백 사진에는 낯선 사람들과 미술가 김구림, 정찬승, 평론가 김인환, 유준상 등 친구들이 어울리고,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담겨 있다. 방문객들이 평범한 삶에서 덧없는 순간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였다. 이강소는 “저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표현하는 대신에 무언가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소멸—화랑 내 술집〉은 1970년대 초반의 이강소의 대표작으로, 그는 주체와 객체, 존재와 부재 사이의 관계적 이분법을 통해 존재의 문제에 다가갔다. 그는 박제된 동물과 썩은 물고기를 작품에 포함시키거나 강둑의 갈대를 전시 공간으로 가져오곤 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계엄령 선포와 정치적 집회 금지, 대학 폐쇄, 언론 검열 등을 규정한 유신헌법이 시행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전시된 〈소멸—화랑 내 술집〉은 또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연설과 표현의 형성과 제정을 위한 주권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원래 1975년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서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마지막 순간에 작가의 〈무제 75031〉 (도판 80)로 대체됐다. 안휘경
성능경 1974.06.01 이후 날마다 작업, 박정희 언론 검열에 대해 사회적 정황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가짜 뉴스를 날마다 가위로 잘라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하면서 상당히 심리적 공포감 속에 작업했다고. 작업을 주로 새벽에 하다 // 마침 그때 1974년 12월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가 발생하다. 박정희 유신 정권의 언론 탄압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기로 했던 회사들이 무더기로 해약하고, 그 결과로 동아일보에서는 광고를 채우지 못한 부분을 백지로 내보내거나 아예 전 지면을 기사로 채우다
성능경 1975 위치, 1976 사과 / 탈각의 미학, 1970년대부터 권력에 대한 저항, 신체의 자기주장, 예술의 탈물질화, 일상성의 회복 지향
성능경은 1970년대부터 신문, 사진, 행위의 요소를 결합해 일상성과 신체성을 탐구하며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특유의 개념미술을 추구해 왔다. 작가는 1974년 《제3회 ST전》에서 〈신문: 1974.6.1 이후〉(1974)라는 이벤트를 실행했다. 이후 성능경은 〈신문 읽기〉(1976), 〈8면의 신문〉(1977), 〈현장 1〉(1979) 등 신문의 지시성을 해체하고 편집 권력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일련의 작업을 선보였다. 그는 또 1975년 제2회 대구현대미술제에 출품한 〈액자〉(1975)와 〈사진첩〉(1975) 등의 사진 작품을 통해 동어반복의 토톨로지(tautology) 개념을 추구했다. 이듬해 성능경은 〈위치〉(1976), 〈사과〉(1976) 등 행위의 과정에 주목한 사진 여러 장을 설치 작품으로 구성해 발표했다. 이는 사진 기록을 위해 연출된 작가의 신체 행위의 결과물 그 자체로 행위미술인 사진 작품이었다.
[이건용] 이벤트 개념에 ‘논리’를 더한 자신의 행위를 ‘이벤트-로지컬’(event-logical)로 명명. 이는 ‘일상 행위’를 작가의 계획된 논리 아래 강박적으로 반복하게 하여, 본래 목적과 맥락에서 일탈시켜 그 자체를 새롭게 사고하도록 하는 작품이다.
이건용의 〈장소의 논리〉는 작가가 운동장에서 막대기로 둥근 원을 그려놓고, 몸을 원의 앞, 안과 밖으로 옮겨가며 “여기”, “저기”라고 지칭한 다음, 원의 안에서는 “여기”, 원의 앞에서는 “거기”, 원의 밖에서는 “저기”라고 말한다. 그다음 원을 돌면서 “어디, 어디, 어디...”를 외치다 사라지는 내용이다. 원의 안과 밖에서 언어와 손짓으로 지시하는 ‘여기’, ‘저기’는 신체의 이동에 따라 계속 위치가 전환된다. 이에 따라 신체와 장소는 새로운 관계를 맺고, 언어도 새롭게 파생되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손의 논리〉는 작가의 논리적 계획을 통해 오직 두 손이 만들어 내는 행위와 형태를 통해 하나의 사건으로 전환되는 작품이다.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맞닿거나 손가락을 접고 펴는 가운데 손가락들은 엄지손가락끼리만 맞닿거나, 네 개의 손가락이 마주하는 형태로 보이게 된다. 이 이벤트는 두 손가락이 서로 접히는 방식에 의해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는 명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각을 의도한 작가에 의해 엄지의 위치에 따라 변화하는 손가락들의 위계라는 사회적 의미로 확장되었다. 즉, 획일적인 사고와 신체의 구속이 자행되던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강수정
이건용 <신체항> 71년, 제8회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1973년) // 그에 대한 소개하는 내용이 당시 파리비엔날레 소식지(아래 왼쪽)에 소개되고 있다. // 뒤샹 오브제를 전시장에 가져다놓는 것이 작품이라고 했는데 이건용은 자연을 그대로 전시장에 가져다놓는 것을 작품이라고 본 것인가 흙이 묻어 있는 나무를 통채로 전시장에 옮기다 이것은 박정희의 국토종합개발개획으로 인한 자연환경파괴를 고발한 작품이기도 하다. // 1973년 프랑스에서 열린 ‘제8회 파리비엔날레’는 이건용이라는 이름 석자를 세계에 알린 무대로 손꼽힌다. 당시 그는 큰 나무의 뿌리와 둥치를 전시장에 들여다 놓은 ‘신체항’이라는 작품으로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항이란 일종의 수학용어로 조건 혹은 경우를 뜻하는 말. 그의 작품을 풀자면 ‘신체의 조건’쯤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건용은 자신이 구상한 작품을 실내에 들이기 위해서 나무를 2m 50cm로 잘랐다. 나무를 무너지지 않게 올려놓는 일이 관건이었는데, 나무가 들어갈 크기의 궤짝을 든든하게 짜 나무를 세우고 흙을 채워가면서 꾹꾹 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흙을 다져 넣기 시작하면, 그 힘이 굉장하기 때문에 무너질까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드디어 비엔날레 오프닝이 있는 날 아침, 궤짝을 제거하는 순간 ‘뻥’하는 소리가 전시장을 뒤흔들었다. 흙을 다져 넣어 물렸던 힘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굉음이 났지만, 작품은 안전했다. 상상만 할 뿐 실제로는 볼 수 없었던 지층을 구조물로 만들어낸 이 작품을 현지인들은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다. 바깥의 자연을 인공의 전시장 안으로 들여놓은 것은 마치 하나의 선언과도 같았다. 이에 대해 이건용은 이 작품에 대해 자연의 일부분을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영역 안에 들여놓음으로써 화랑이나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작품을 보여주는 독립된 공간으로만 생각하고, 거드름을 피워댔던 미술이라는 영역과 그 틀을 확 바꾸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건용 <신체항> 71년, 제8회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1973년) // 그에 대한 소개하는 내용이 당시 파리비엔날레 소식지(아래 왼쪽)에 소개되고 있다. // 뒤샹 오브제를 전시장에 가져다놓는 것이 작품이라고 했는데 이건용은 자연을 그대로 전시장에 가져다놓는 것을 작품이라고 본 것인가 흙이 묻어 있는 나무를 통채로 전시장에 옮기다 이것은 박정희의 국토종합개발개획으로 인한 자연환경파괴를 고발한 작품이기도 하다. // 1973년 프랑스에서 열린 ‘제8회 파리비엔날레’는 이건용이라는 이름 석자를 세계에 알린 무대로 손꼽힌다. 당시 그는 큰 나무의 뿌리와 둥치를 전시장에 들여다 놓은 ‘신체항’이라는 작품으로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항이란 일종의 수학용어로 조건 혹은 경우를 뜻하는 말. 그의 작품을 풀자면 ‘신체의 조건’쯤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건용은 자신이 구상한 작품을 실내에 들이기 위해서 나무를 2m 50cm로 잘랐다. 나무를 무너지지 않게 올려놓는 일이 관건이었는데, 나무가 들어갈 크기의 궤짝을 든든하게 짜 나무를 세우고 흙을 채워가면서 꾹꾹 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흙을 다져 넣기 시작하면, 그 힘이 굉장하기 때문에 무너질까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드디어 비엔날레 오프닝이 있는 날 아침, 궤짝을 제거하는 순간 ‘뻥’하는 소리가 전시장을 뒤흔들었다. 흙을 다져 넣어 물렸던 힘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굉음이 났지만, 작품은 안전했다. 상상만 할 뿐 실제로는 볼 수 없었던 지층을 구조물로 만들어낸 이 작품을 현지인들은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다. 바깥의 자연을 인공의 전시장 안으로 들여놓은 것은 마치 하나의 선언과도 같았다.
이에 대해 이건용은 이 작품에 대해 자연의 일부분을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영역 안에 들여놓음으로써 화랑이나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작품을 보여주는 독립된 공간으로만 생각하고, 거드름을 피워댔던 미술이라는 영역과 그 틀을 확 바꾸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종현, 〈작품 73-13〉, 1973, 황마와 폼으로 덮인 보드에 유화 물감을 얹은 철조망, 나사, 120 × 240cm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소장
[하종현] 철조망과 용수철을 사용한 작품들을 처음 선보인 것은 1972년 제3회 《72년·AG전: 탈관념의 세계》에서다. 전통적 회화의 경계에 도전하며 그는 용수철이나 삐죽삐죽한 철사를 채색하거나 패널을 가로질러 한 줄 한 줄 펼쳤다. 용수철들을 중앙에 모아 화면 밖을 향해 돌출되게 한 것도 있다. 〈작품 73-13〉은 폼이 덧대진 합판을 가벼운 붓질 자국이 있는 마포를 덮어씌운 후, 그 위에 그리드 형태로 철조망을 배치하고 나사로 고정한 것이다. 이 대량 생산된 재료들은 도시의 급변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증명한다. 동시에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한국 전쟁 이후 서울에 철조망 울타리를 치고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미군 주둔지를 상기시킨다. 폼이 덧대어져 마치 피부처럼 폭신한 캔버스의 뒤쪽을 파고든, 감옥의 철창을 떠올리게 하는 철조망의 뾰족한 끝은 유신헌법을 통과시키며 1972년 출범한 박정희 독재 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1973년과 1974년 사이 하종현은 새롭게 찾은 재료들 - 예를 들면 손톱-을 더하고 크기를 달리하면서 이 연작을 확장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구조를 나만의 방식으로 파괴하려고 시도했다”고 하는 유명한 〈접합〉 연작에서 자신이 계속해서 탐구해온 회화의 물성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 안휘경
하종현
송번수, 〈공습경보 I, II, III, IV, V〉, 1974, 종이에 스크린프린트, 103 ×103cm (5), 〈공습경보 I, II, III〉: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공습경보 IV, V〉: 작가 소장
[송번수] 실크스크린 기법의 일종인 세리그래프(seriegraph)라는 판화 기법을 활용하여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반복적 이미지는 판화라는 매체가 갖는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시간이나 상황의 변화를 나타내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작가는 판화 기법을 기반으로 하여 매체의 경계를 넘는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였다. 그 대표적 예로, 제3회 AG 전시에 소개된 AG 포스터를 반복적으로 이어 붙인 폭 3m, 길이 27m의 대형 작품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판화 작품을 거대한 오브제이자 설치미술과도 같은 차원으로 치환하였다.
이 시기 송번수는 국내 사회·정치적 상황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공습경보〉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사면체의 다이아몬드형 패널 안에는 마스크를 쓴 인물이 등장하며, 그 모습에는 어둠 속에 번지는 섬광과 같은 불빛이 빨강, 노랑, 파랑으로 비추어 있다. 〈공습경보 I, II, III, IV, V〉는 1974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송번수의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작품이다. ‘공습경보’는 적의 항공기가 공격할 준비가 되었을 때 위험이 임박함을 알리는 호출 신호이다. 노란색은 ‘경계경보’, 파란색은 ‘공습경보’, 초록색은 ‘경보해제’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1970년대 한국이 실제 북한의 직접적인 공격이 아닌, 오염, 질병, 사회적 억압 등 다양한 잠재적 위험을 가진 상태이며, 이것이 공습경보 상태와 유사하다고 일컬었다. 이예림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아쉽게도 서울 비엔날레 1회로 끝나다 서울 비엔나레 선정위원(총감독) 미술평론가 이일이 위촉되었다 1974년 11월 한국미술역사 20년 젊은 세대의 도전은 한마디로 모혐과 시련의 역속, 소외와 방황으로 점철되었다.
반면 미국의 전위미술은 전자아트와 연결된다 여기서 백남준이 큰 역할을 하다/[유토피아& 비전 1971~1981》] 안나 룬드(Anna Lundh, Swedish, 1979~) 진행형 프로젝트, 혼합 미디어 매체, 퍼포먼스, 온라인 프로젝트, 가변크기, 작가 소장
<Q&Q-2028>은 2018년의 사람들이 10년 뒤 미래에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참여형 프로젝트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안나 룬드는 E.A.T.가 1971년에 실행했던 <텔렉스: Q&A>에 영감을 받아 <Q&Q-2028>을 기획했다. <텔렉스: Q&A>는 E.A.T.가 1970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유토피아& 비전 1971~1981》전시의 일환으로 기획한 프로젝트였다. E.A.T.는 “1981년의 삶을 탐구할 전 세계 사람들을 잇는 소통의 링크”를 구현하고자 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스톡홀름을 비롯해 뉴욕, 도쿄, 아마다바드에 텔렉스 통신소를 설치했다. 각 지역의 참가자들이 텔렉스를 통해 10년 후인 1981년에 관해 질문하면 과학자, 예술가 등의 전문가들과 일반인이 질문자에게 텔렉스로 답변을 전송했다. 안나 룬드의<Q&Q-2028>의 첫 번째 ‘Q’는1971년에 제기된 질문들을 지칭하며, 두 번째 ‘Q’는 2018년 현재 새롭게 생성될 질문들을 의미한다. E.A.T.가 텔렉스만 이용했던 것과는 달리, <Q&Q-2028>의 참여자들은 전시장에 놓인 설문지와 웹사이트를 통해 미래에 대한 질문을 남길 수 있다. 룬드의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된 것은 <Q&Q-2022>로, 2012년 3월부터 뉴욕의 여러 지역과 뉴 뮤지엄과 함께 제작한 웹사이트를 통하여 1년 간 질문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2018년, 이번 전시와 함께 룬드는 새로운 버전 <Q&Q-2028>로 한국의 관람객들에게 10년 후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1978년 삭발 정천승과 이건용 당시 박정희 정권이 미니스커트 장발단속에 저항하는 포퍼먼스 작품 정찬승 한국 실험예술 순교자 실천가 반항가 당대 최고의 전위 예술가 자발적 히피 등 따라다니는 별칭이 많다. 피아노 위에서 남여가 사랑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피아노 정사(백남준 작곡 김구림 연출) 퍼포먼로 유명하다 1968년 10월 한강변의 타살은 양화 한강공원에서 참가 한국에서 돌발성 행위미술 현장에는 언제나 정찬승이 있었다 그는 진정한 순수예술가였다. 1980년대 한국을 탈출 뉴욕에서 정크아트 등 활동하다가 90년 이후 귀국했으나 얼마 살지 못하고 타계하다.
네째 ‘“거꾸로” 전통’에서는 한국의 전위미술과 전통의 특수한 관계를 다룬다. 통상 전위미술이 전통의 부정을 추구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전통예술의 재발견을 통해 ‘거꾸로’ 그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아부다비 구겐하임미술관 소장품인 이승택의 <무제(새싹)>(1963/2018)와 <무제(낫)>(1969)등을 선보인다. 전통의 재발견을 통한 전위적 실험미술의 행보는 한국미술의 탈서구화 및 전통과 현대의 긍정적 계승으로 이어졌다.
이승택, 〈무제(새싹)〉, 1963(2018 재제작) 옹기에 채색, 146×68×68cm, 102.5× 42.5×42.5cm, 179×68.5×68.5cm, 192× 68.5×68.5cm, 118×47×47cm, 163.5×64×64cm, 구겐하임 아부다비소장
이승택의 ‘비조각’에 대한 급진적 실험은 현대에 대한 찬양을 피하고 민속과 토착적인 것을 껴안았다. 이승택은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신념을 강조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적 유물들을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언급해 왔다.
1961년 시작한 〈옹기〉 연작은 공예, 구체적으로는 한국 가정에서 전통적으로 음식을 보관하고 발효시키거나 담을 때 사용했던 유약을 바른 토기 그릇(또는 오지)에 기반했다. 당시 대량생산품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이를 견디지 못한 장인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이승택은 옹기라는 매체를 찾아냈고 이를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전문 기술을 연마했다. 실제로 그가 디자인한 그릇들이 서울 퇴계원 근처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크기나 형태 면에서 전통적이지 않은 이승택의 옹기들은 원래의 일상적 용도와 상관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되었다. 기존의 조각들처럼 바닥에 놓이기도 하고 벽이나 천장에 걸리기도 했다. 〈무제(새싹)〉는 1963년에 처음 제작되었고 이승택의 중요한 대형 설치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작품은 세 세트(지지대가 있는 두 세트, 지지대가 없는 한 세트)로 구성되는데 각 세트는 여섯 점의 조각품들로 이루어진다. 다양한 크기로 독립적인 눈물 형태의 조각들은 전통 옹기의 적갈색 테라코타로 칠해졌고 불꽃 같은 문양이 들어갔다. 이 작품은 이승택이 이 작품들을 처음에 어떻게 ‘야외에서’(en plein air) 전시했는지 보여준다. 예술을 밖으로 가져온 이승택은 자신의 비조각들을 전시장의 물리적, 개념적, 상업적 굴레에서 해방시켰다. 안휘경
다섯째, ‘‘나’와 논리의 세계: ST’에서는 작가 스스로 작품에 대한 논리와 이론의 토대를 정립하며, 한국미술에 개념적 설치미술과 이벤트를 맥락화한 전위미술단체‘ST(Space&Time)’학회(1971-1981)의 활동상을 소개한다. 이들은 예술개념의 문제를 분석·철학적으로 접근하여 매체의 본질을 언어에서 찾고자 했으며 동서양 이론을 통합적으로 연구하고 사진, 사물, 행위, 이벤트 등 다양한 양식으로 표현하였다. 대표 작품으로 이건용의 <신체항>(2023), <손의 논리>(1975), <신체 드로잉 76-1 78-1>(1978) 등, 성능경의 <신문 1974.6.1. 이후>(1974)와 ‘미술로서 사진’의 가능성을 실험한 <거울>(1975), <사과>(1976) 등이 소개된다.
박현기, 〈무제(TV돌탑)〉, 1982, 단채널 영상, 컬러, 무음, CRT 모니터, 돌, 가변 크기, 구겐하임 아부다비 소장 © 박현기, 사진: 구겐하임 아부다비 제공
[박현기]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과 다른 비디오아트 작가들을 1974년 처음 만났다. 국내 대부분의 가정에서 볼 수 있던 전지구적 상품, 텔레비전에 대한 계속적인 호기심은 사용자들이 비디오 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었던 획기적 발명품 백-아베 신디사이저로 이어졌다. 1979년과 1982년 사이, 박현기는 그의 주요 비디오 연작 〈무제(TV 돌탑)〉를 만드는 데 이 신디사이저를 사용했다. 이 연작은 1979년 제15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발표되었으며, 비디오 부문에 초대된 것은 처음이었다. 〈무제(TV돌탑)〉는 큰 돌 몇 개와 CRT모니터를 돌탑의 형태로 쌓은 것이다. 모니터상에서는 싱글 채널 비디오로 바닥에 흩어져 설치된 다른 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돌이 재생되고 있었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돌들은 쌓는 과정에서 떨어진 것들로 최종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매 설치 때마다 특정 환경의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창작 장소의 돌을 사용했다.
‘돌탑’은 전통적으로 마을이나 절의 입구를 표시하고 액운을 막는 용도였다. 박현기는 한국 전쟁 중에 처음 돌탑을 보았다.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신하던 중 같은 경로로 피신하던 다른 피난민들이 평화를 기도하며 남긴 돌탑이었다. 근대화 이전 대한민국의 주술 문화 관습을 되돌아보는 건축적 형태를 감상함으로써, 〈무제(TV 돌탑)〉는 전후 시대의 테크노필리아와 근대화의 가속을 향한 당시 정부의 야심에 질문을 던진다. 이를 통해 자연과 문화, 기술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간의 현대적 체계를 흔들려 한다. 안휘경
여섯째, ‘청년과 지구;촌 비엔날레’에서는 당시 청년작가들의 돌파구가 되었던 해외 비엔날레와 AG의《서울비엔날레》(1974),《대구현대미술제》(1974-1979)를 상호 교차하여 한국 실험미술의 국제적 면모를 선보인다. 1960-70년대는 국제 교류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특히 제8회《파리비엔날레》(1973), 제13회《상파울로비엔날레》(1975) 등은 한국의 젊은 실험미술 작가들이 세계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심문섭의 <현전>(1974-1975), 박현기의 <무제(TV돌탑)>(1982), 이강소의 <무제 75031>(1975) 등 당시 작품들을 선보인다.
박현기 참가. 1980년 파리 비엔날레(실험미술제 35세 이하 작가만 참가)
한편, 다양한 연계프로그램들도 마련되었다. 평론가 김찬동을 좌장으로 전시 기획자들과 미술사학자 조수진, 이상록, 정연심, 작가겸 평론가인 윤진섭 등이 참여하는 학술행사(5.31)가 개최된다. 또한 전시 기간 중 실험미술사의 대표적인 퍼포먼스인 김구림의 <생성에서 소멸로>(6.14.), 성능경의 <신문읽기>(6.21.), 이건용의 <달팽이 걸음>(6.28.) 등의 재현 작업이 순차적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또한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이 참여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개최된다. 제도화된 미술관 내에서의 관람 행위에 가하는 ‘일탈’과 ‘반항’의 제스처를 실천하는 특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 상시 참여워크숍 <REC:젊은, 생각, 행동>도 예정되어 있다.
다양한 연구논문과 당시 주요 비평글, 선언문 등을 총망라한 국·영문 전시도록도 발간된다. 국문판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영문판은 구겐하임미술관이 각각 편집을 맡았다. 이번 전시는 한국미술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증폭되는 가운데 한국의 실험미술을 서울에 이어 미국 뉴욕과 LA에서 잇달아 선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 일반인 전화문의: 02-3701-950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대표번호)
추신
[MMCA]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 연계 특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 개최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 연계 특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 개최 / [] 미술관 내 금기시 되어왔던 ‘실험적인’ 관람 행동들 참여자들과 현장 시연 -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 연계 ‘일탈’과 ‘반항’ 실천 해프닝 - 사전신청을 통해 온라인 오픈채팅방에서 금기 행위 토론 및 공유 후 선정 - 7월 8일(토) 오후 2시, 4시 총 2회 운영(회당 최대 100명 선착순 참여 가능)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직무대리 박종달)은 서울관에서 진행중인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 연계 행사 일환으로 참여자들이 정한 미션을 다함께 동시 수행하는 해프닝 형식의 특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를 운영한다.
5월 26일 개막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시는 미국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과 연구 협력하여 1960-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주요 작가 29명과 작품 약 95점을 국내·외에 소개하고 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한국미술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세계 미술계의 일원으로 영역을 확장했던 실험미술의 역사를 조망하며, 기성세대의 형식주의에 반발하며 진행했던 다양한 전위적 활동을 선보인다. 이를 확장하여 서울관 6, 7 전시실 내부에서 7월 8일(토) 오후 2시, 4시 총 2회에 걸쳐 기존의 제도화된 미술관 전시 관람의 규칙과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일탈과 해방의 시간을 참여자들과 함께 누려본다.
뉴욕에서는 백남준 실험 미술 진행 1965
기존 미술관 전시 관람 시 금기 되어왔던 행동들을 다양한 참여자들의 논의를 통해 수집하고, 그중 선정된 금기 행위들을 워크숍을 통해 시연한다. 앞서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mmca.go.kr)에서는 6월 26일부터 참여신청을 받아 온라인 오픈채팅방을 열고 ‘미술관 내 진행 가능한 실험적인 행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누워서 전시보기’, ‘박수치고 큰소리로 웃기’ 등 관람의 실험적 행위 등에 대해 열띤 토론과 의견을 공유했다. 이를 통해 최종 선정된 금기 행위는 워크숍 당일 오전 공개하고, 이를 현장에서 5분여간 직접 실천해보는 해프닝이 진행된다. 오픈채팅방 참여자 및 당일 현장 접수자를 포함하여 회당 최대 100명이 선착순 참여 가능하며, 당일 로비에 마련되는 특별워크숍 데스크에서 등록하면 행위에 필요한 물품과 재입장 확인 스티커를 받을 수 있다. 행사 참여는 무료이지만, 전시실 입장을 위한 전시 관람권은 별도 구매해야한다.
특별워크숍 <금지금지금지금지>는 관람객의 직접 참여를 통해 한국의 1960-70년대 격동기에 청년작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전위적 실험미술을 한층 잘 이해하고 더욱 많은 국내·외 관람객들의 관심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시는 7월 16일(일)까지 진행된다. □ 일반인 전화 문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02-3701-9500)
<추신> 1967년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과 1968년 <강변에서의 타살> 비교 / 사진 저작권 국립현대미술관 외 강국진 정강자 등
1967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1968년에 있었던 <강변에서의 타살>은 강변에서 열린 무겁고 진지한 해프닝이었다면 1967년 1년 전에 열린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가볍고 경쾌하다. 한국 미술사 최초의 해프닝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이 해프닝에는 강국진, 김영자, 김인환, 심선희 등 참가했다.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평론가 오광수가 각본을 썼고 무동인과 신전인 10여 명이 작품 발표에 참여했다.
김영자가 의자에 앉아 비닐우산을 펼침과 동시에 나머지 작가 전원이 의자를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돌며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시작되었다. 작가는 한국의 전래 민요인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며 촛불에 불을 붙여 우산에 꽂았다. 계속해서 원을 그리던 이들은 별안간 촛불을 끄고 달려들어 우산을 찢은 후, 이를 밧줄로 감아 밟으며 해프닝을 마무리 지었다.
행위가 끝나고 작가 중 한 명이 관객에게 해프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해프닝이란 캔버스를 벗어난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미적 사건이며 그 자체가 표현 행위인 것이다. […]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현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만이 여기 온 목적의 전부이다."
이 발언에는 해프닝의 미적 체험과 행위만이 일면 강조된 듯 보인다. 그러나 오광수에 따르면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극단적 현대의 문명을 비유한 비닐우산과 순수한 정신을 비유한 촛불을 대비하여 문명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으려 한 작품이었다. 이에 더해 작품에 참여한 일부 작가는 이 해프닝이 기성 미술계와 제도에 대한 관습을 짓밟는 비판 또한 내포하였음을 밝혔다.
1968 강변에서의 타살
<강변의 타살>, 이 해프닝은 유럽의 68혁명과 관련 없이 냉동시대(한국은 68혁명을 받아들일 분위기가 안 되었다. 그해 1·21일 북한에서 김신조 등 내려왔고, 또 울진 삼척지역에 북한 간첩 침투(10월 30일~11월 2일) 사건 등 그야말로 냉동기였다) 속에서도 1968년 10월 17일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에서 한국 미술계 대사건인 <한강변의 타살>이 일어났다. 실험주의 미술인의 해프닝, 이벤트, 사건이었다.
<강변의 타살> 해프닝 연출 방식이 궁금
<(한)강변의 타살> 해프닝 연출 방식이 궁금하다 <아래를 읽어보니 해프닝 연출을 어떻게 했는지 알겠다> 강국진은 2명의 동료 작가들과 함께 제2 한강교 아래에서 기성미술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들은 먼저 한강에서 물을 길어온 뒤, 모래사장에 각자가 들어갈 만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작가들이 스스로 그 속에 들어가면 관객들은 모래로 구덩이를 메우고 그 위에 사정없이 물을 퍼붓는다.
다시 작가들이 구덩이에서 나와 각자 몸에 비닐을 걸치고 ‘문화 사기꾼’(사이비 작가), ‘문화 실명자’(문화 공포증자), ‘문화 기피자’(관념론자), ‘문화 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문화 보따리장수’(정치 작가), ‘문화 곡예사’(시대 편승자)라고 쓴다. 큰 소리로 그것을 읽은 뒤 그들은 그 비닐들을 모아 태우는 화형식을 갖고 매장하는 행위를 벌였다. 그것은 제도권 문화 및 국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자 실험적 해프닝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위상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행위였다.
화형식
이 행사에서 '문화고발장'이라는 것을 쓴 다음에 이를 불태우는 해프닝을 통해 기성 문화세력을 비틀고 조준했다. 그 선언문을 읽다 보면 <문화보따리장사(정치작가)>, <문화사기꾼(사이비작가)>, <문화기피자(관념론자)>, <문화부정축재자(사이비대가)>, <문화곡예사(시대편승자)> 등의 명명이 보인다. *1968년 당시 3명의 예술가는 문화사기꾼(사이비 작가), 문화실명자(문화 공포증자), 문화기피자(관념론자), 문화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문화보따리장수(정치 작가), 문화곡예사(시대 편승자) 등을 쓰고 나서 그 글을 읽고 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다. 이를 통해 당시 한국의 구태의연한 기성문화 세력을 ‘매장’하고 ‘타살’하는 문화비판 행위를 펼쳤다. -파이낸셜 뉴스
그들은 한국 현대사회에서 역사의식과 문화적 자각 없이 예술가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사이비’로 칭하고, 사실주의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사실주의로 눈치를 보며 왔다갔다하는 시대미학의 편승자를 ‘문화 곡예사’라 칭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사이비’가 제도권 미술계와 사회에서 대가(大家)로 대우받는다고 간주하고 그것을 ‘매장’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상징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강변의 타살>은 고질화되어 가는 현실사회의 문화적 모순과 기성 미술계의 그릇된 타성을 고발하는 퍼포먼스였다.
한국에서 돌발성 행위 미술 현장에는 언제나 '정찬승' 그리고 강국진 정강자가 있었다
한국에서 돌발성 행위 미술 현장에는 언제나 '정찬승'이 있었다. 물론 강국진, 정강자 등도 동참했다. 정찬승은 진정한 순수예술가였다. 1980년대 한국을 탈출 뉴욕에서 정크아트 등 활동하다가 90년 이후 귀국했으나 얼마 살지 못하고 타계하다.
<해프닝과 이벤트 서구에서는 해프닝은 우연적, 이벤트는 의도적인 것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별 생각이 혼합해 쓴다> <사람을 땅에 묻는 해프닝도 있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인가?>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가 주최하고 강국진기념사업회가 제작 및 후원하는 ‘2018년 한강변의 타살’ 해프닝 리메이크에는 문재선, 심혜정, 정기현, 허은선 등 4명의 퍼포먼스 작가들이 고증을 바탕으로 퍼포먼스 재연에 나선다.
'한강변의 타살' 재현 퍼포먼스 2018년 10월 13일 서울 양화한강공원에서 1968년 해프닝 '한강변의 타살'을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퍼포먼스가 판아시아 주최로 진행됐다. 사진은 권영일 작가가 촬영했다. 그 당시로 보면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기획이었다. 해프닝 아트로 수준이 있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사진저작권 정강자, 아라리오갤러리
정강자 유신반대시위 1973년
경향신문 관련 기사 https://m.khan.co.kr/culture/art-architecture/article/201802091819001#c2b
<1968년 경향신문 기사 전문> 경향신문 강변의 타살 해프닝에 대한 기사 내용 제목: 문화 고발(?) 해프닝 쇼 "이 무슨 미친 짓이냐"고 빈축 //
정강자, 물통세례를 받다
1968년 10월 17일 하오 4시 제2한강교 아래 백사장에서는 '한국청년작가연합회원'이며, 홍익대 미술대학 졸업생인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자칭 전위 작가라는 세 사람이, 네 번째 해프닝을 벌여 행인의 눈길은 끌었다. 삽 3개, 바께스 3개, 색 비닐천, 성냥, 휘발유 1동, 가위, 흰 페인트 붓, 사인펜의 재료를 써서 이들이 만들어 낸 작품을 보면 1) 삽으로 구덩이를 파서 기다란 비닐 천을 몸에 감고 모래 구덩이 속에 들어가 목만 내놓은 다음 2) 관중이 물총을 쏘아 대자 3) 도로 일어나 품고 나와서 비닐을 걸치고 4) 흰 페인트로 각자가 몸에 걸친 색 비닐천 위에 文化告發狀을 쓴 다음 5 관중에게도 메모지를 배부하여 고발장을 쓰게 하고 6) 다시 이 고발장을 다시 읽어가며 태워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 의해 문화 고발(?)당한 사람은 1) 문화·사기꾼 사이비작가) 2) 문화·실명자(문명공포증자) 3) 문화·기피자(관념론자 19세기적 현대비평가) 4) 문화·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5) 문화·보따리장수(정치 작가) 6) 문화·곡예사(사실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사실로 눈치 보며 왔다 갔다 하는 시대미학의 편승자)라나, // 이 수상한 예술행위(?)를 시종 지켜보면 10여 명의 관중과 40여명의 기자들은 날씨도 추운데 이 무슨 미친 짓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다.
1968년 10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서 서양 미술의 목을 치다 자부심 없으면 불가능하다. 1965년 '요셉 보이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까 서구 우월주의 목을 날렸다. 1968년 '정강자' 등 <강변의 타살>은 한국 미술의 목을 친 사건으로 68혁명 영향이 없었다지만 당시 홍익대 미술 대학 수준을 인정하고 싶다. 기획력과 창의력이 기발났다. 자부심이 있었다. 세계적 수준으로 한국 미술을 끌어올렸다. 한국 미술이 그 방향을 잃었을 때 다시 돌아가야 하는 본향이 아닌가 싶다
트윈 폴리오
[1] 세시봉(C'est Si Bon) 무교동 음악감상실 1968년 02월 01일에, 포크 가수의 산실, 무교동 음악감상실) 2인조 트윈폴리오(윤형주, 송창식) 데뷔하다. 원래는 1967년 말 세시봉 트리오였다(포함 이익균, 군 입대로 포기)
[2] 세시봉(C'est Si Bon) 무교동 음악감상실 1968년 05월 30일에, 투명풍선과 누드 해프닝(Transparent balloon and Nude Happening) 정강자와 '청년작가연립전' 작가들 및 관객
<첫 페미니즘 작품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의 '투명풍선과 누드'(1968)>
한국일보
한국 최초의 누드 해프닝이 정강자와 강국진 및 '청년작가연립전' 작가들에 의해 1960-70년대 포크송 가수의 데뷔 무대였던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시연되었다. 둔탁한 타악기 음악 리듬에 맞추어 정강자가 상반신을 벗은 채 어두운 무대 위에 나타나 의자에 앉는다. 강국진과 정찬승을 비롯한 청년작가연립전 작가들은 끈끈한 투명풍선을 불어 정강자의 몸에 붙인다. 투명풍선을 잔뜩 붙인 정강자가 의자에서 일어서면 작가들은 갑자기 달려들어 투명풍선을 터트려 부순다.
사진저작권 강국진
여기서 섬세하고 여린 투명풍선으로 장식된 여인의 몸은 전형적인 ‘미’의 스테레오타입을 상징하나, 거친 폭력 앞에 부서져 적나라하게 노출됨으로써 그 ‘미’는 파괴된다. 그것은 음악과 빛이 동반되었으며 작가들과 관객이 함께 참여한 퍼포먼스였다(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시공사, 2003), pp. 92-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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