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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타데우스 로팍(서울)] 'R. 라우센버그' 개인전 12월 23일

미국 작가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개인전 ⟪코퍼헤드 1985/1989(Copperheads 1985/1989)⟫를 '타데우스 로팍 서울(서울 포트힐 서울특별시 용산구 독서당로 122-1, 포트힐빌딩 2층)'에서 2022년 11월 3일~12월 23일까지 연다. <작성중> <이미지 타데우스 로팍(서울) 제공> 용산구 독서당로 122-1(포트힐 빌딩), 2층에서

타데우스 로팍 서울

이번 전시는 라우센버그의 작업 세계에서 주요한 작품군인 <코퍼헤드(Copperhead)> (1985/89) 연작>을 소개하며, 특히 그 출발점이 된 <코퍼헤드 바이트(Copperhead Bites)> 연작 8점이 본 전시의 주를 이룬다.

구리 지지대를 활용한 일련의 페인팅 작품들은 1985년에 제작되어 전시된 이래 처음으로 함께 전시된다.

 12점으로 구성된 <코퍼헤드 바이트> 연작은 라우센버그가 금속에 실크스크린 기술로 이미지를 찍어내고 아크릴 물감과 변색 약품을 적용시키는 등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이후 그가 선보인 15개의 금속작업들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매서운 눈' Silkscreen ink, enamel and tarnish on copper with bronze frame 1989

로버트 라우센버그, 매서운 눈(코퍼헤드), 1989. 구리에 실크스크린 잉크, 애나멜, 변색 약품, 청동 액자, 123.8 x 245.7 cm

미국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단의 시니어 큐레이토리얼 디렉터 <줄리아 블라우트> 전시를 직접 소개하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코퍼헤드 1985/1989⟫ 내용: 구리 지지대를 활용한 작품 11점과 일련 작품의 기반이 되는 사진 작품 6점 전시

미국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단의 시니어 큐레이토리얼 디렉터 <줄리아 블라우트>의 전시를 직접 소개하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코퍼헤드 1985/1989⟫ 내용: 구리 지지대를 활용한 작품 11점과 일련 작품의 기반이 되는 사진 작품 6점 전시 장소

줄리아 블라우트

"내 작품 이미지. 구리를 베어 문 자국인 셈"

"나는 예술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재료가 활용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 새로운 재료는 신선한 연상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고유한 물성과 특유 성질을 지니며, 이는 우리가 무언가 다른, 제3의 접근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 – 로버트 라우센버그

작업 중인 라우선버그

라우센버그는 <코퍼헤드 바이트> 연작을 통해 그만의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였고, 이후 10 여 년의 기간에 걸쳐 구리, 황동, 알루미늄, 청동 등 다양한 금속 지지대를 활용한 실험을 이어 나가며 꾸준한 형식적 발전을 추진하였다.

작품의 제목은 작품을 개념화시키는 작가의 작업 방식을 더욱 부각하며 더 나아가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수단으로써 작용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금속 지지대에 이미지를 새기는 일련의 작업 과정을 빗댄 것이라고 설명하며 작품 내 이미지들이 구리를 베어 문 자국인 셈이라고 덧붙였다.

로키 칠레 1985

<코퍼헤드 바이트>는 라우센버그 해외문화교류 프로젝트(Rauschenberg Overseas Culture Interchange project; ROCI)의 선상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예술을 매개체로 국제적인 협력을 이루고 또 다양한 소통을 촉진하고자 고안된 프로젝트다.

작가는 여러 국가를 방문하여 다른 문화권에 존재하는 예술 형태를 경험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11개국을 걸쳐 진행된 국제적 전시를 통해 신작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1984년, 칠레에서 연구를 진행하던 라우센버그는 구리가 칠레 경제에 중요한 원자재임을 알게 되었고, 금속을 작품에 접목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고무되었다. 작가는 칠레 북부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에 인접한 구리광산과 주조공장을 방문하여 다양하고 선명한 색조를 얻을 수 있는 변색 약품 활용법을 전수하였다.

로키 칠레 1985

로버트 라우센버그, 코퍼헤드 바이트 IV / 로키 칠레(가운데), 1985. 구리에 실크스크린 잉크, 아크릴, 변색 약품, 245.9x 123.8cm 

작가는 당시 습득한 경험과 기술을 토대로 플로리다 캡티바 섬(Captiva)에 소재한 작업실로 돌아가 더욱 광범위한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고, 이로써 편평한 구리판 위에 이미지를 만들고 변색 기법으로 마무리 한 12<코퍼헤드 바이트>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일련의 작품은 1985년 산티아고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라우센버그 해외문화교류전: 로키 칠레(Rauschenberg Overseas Culture Interchange: ROCI CHILE)에 전시된 바 있다. 각 작품에는 동물, 건축물 파사드, 그래피티, 각종 표지판 등 다양한 도상이 담겨있다.

이는 작가가 연구차 칠레를 여행하는 동안 촬영한 흑백 사진에서 추출한 이미지로, 당시 촬영한 6개의 사진 작품 또한 함께 전시된다. 포장도로와 자갈길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 쌓인 코카콜라 병, 그리고 작가 작업 전반에 자주 등장하는 도상인 새 이미지의 배경으로 나타난다.

민첩하게 흩뿌려진 변색 약품들은 구리판 위의 회화적 붓놀림으로써 자리할 뿐만 아니라 금속 특유의 반사 성질을 저해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실크스크린 기법의 매개 과정에 작가의 손길이 더해진다.

라우센버그는 칠레의 이미지를 담은 동일한 세로 형태의 <코퍼헤드 바이트>에서 더 나아가 <코퍼헤드> 연작을 제작하였고, 이번 전시에서는 3점의 <코퍼헤드> 작품을 선보이며 전시의 맥락을 견고히 한다. 로키 칠레이후 1989년에 제작된 <코퍼헤드> 연작은 구리 페인팅의 크기와 형태의 발전을 꾀한 작가의 실험 정신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미지를 중첩하여 밀도를 만들고 하나의 격자를 이루듯 구성했던 1960년대 작품과는 달리 도상을 병렬 구조로 나열함으로써 보다 서사적으로 구성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소통의 수단이 되는 다양한 이미지와 그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작가의 지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세 개의 독립적 패널로 구성된 <사촌(Cousins)>(1989)은 금속 작업 중에서도 보기 드문 형태의 작품이다. 붉은 실크스크린 로버트 라우센버그, 매서운 눈(코퍼헤드), 1989. 구리에 실크스크린 잉크, 애나멜, 변색 약품, 청동 액자, 123.8×245.7cm

로키 칠레 맨 왼쪽 1985

잉크로 찍어낸 해바라기 들판과 푸른 잉크를 사용하여 담아낸 들이치는 파도의 장면을 각각 상단 2개의 패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육지와 바다의 이미지를 담은 이 작품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부정할 수 없는 그들의 연대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는 작품의 제목으로 더욱 고조된다.

더불어 왼쪽 패널에 매달린 구리 오브제는 작가의 상징적 작품 <콤바인>(1954-64)에서 집약된 아상블라주(assemblage)에 대한 작가의 꾸준한 천착을 보여준다. 이러한 후기 <코퍼헤드> 연작은 버려진 금속을 활용한 작가의 조각 연작 <Glut>(1986-89/1991-94)과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점도 시사할 만하다.

라우센버그는 60여 년의 예술 인생에 걸쳐 자신의 작업에 다양한 매체와 혁신적 기술을 도입하였고, 과감한 접근과 광범위한 실천을 통해 20세기 예술 지형 형성에 큰 기여를 한 바 있다. <코퍼헤드><코퍼헤드 바이트> 연작, 그리고 일련의 흑백 사진 작품을 망라하여 선보임으로써 작가의 작업 세계를 조망한다.

[작가소개] 그의 작품은 워낙 특이해 특정 사조의 미술로 구별되기가 힘들다.

80년대 라우센버그

로버트 라우센버, 그는 60년이 넘는 작가 생활 동안 광범위한 경험, 평생에 걸친 협업, 새로운 소재와 기술에 대한 실험 정신을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해왔다. 작가는 특정 사조로 구별되기를 거부했지만 추상 표현주의 이후 거의 모든 전후 미술 동향에 영향을 미친 선구자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화이트 페인팅(제로 회화)는 그의 친구였던 존 케이지를 통해 백남준에게 영향을 주다 그가 공부한 뉴욕 <스튜던트 아트 리그> 미술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이 학교 졸업전이 열렸다. 거기에서 라우센버그 작품이 출품된 것을 봤다.

라우센버그 화이트 페인팅 제로 회화

라우센버그 그는 지우는 그림을 했다. 그는 서양페인팅 전통을 계속 지워나갔다. 거기에 다시 페인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오다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워홀보다는 뒤샹에 가까웠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너무 파괴적이라고도 했지만 라우센버그는 이를 부정했다 아래 그의 말을 들어보자. / "나는 아무것도 파괴적이지 않았다.... 나는 내 가르침에서 나 자신을 정화하려고 ... 그래서 나는 모노크롬으로 이미지 없는 그림 작업 하고 있었다(“It was nothing destructive. I was trying to purge myself of my teachingso I was doing monochrome no-image.”).” Tanya Grosman과의 대화에서 Robert Rauschenberg, 인터뷰 , vol. VI, 아니. 197655

백남준 영화Film 위한 선Zen

그는 초기작 <콤바인>을 통해 회화와 조각, 핸드메이드와 레디메이드, 예술가의 손과 기계적으로 재생산된 이미지 간의 담론을 이끌어냈으며, 화면 내에 일상 오브제를 포함시키는 혁신적인 시도를 꾀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를 거리에서 얻은 선물(gifts from the street)’이라고 칭하며 예술 작품의 경계를 재정의하고 확장하고자 했다.

'Rauschenberg-Weil' Black Mountain College' 시절

라우센버그는 미국 캔자스시티 아트 인스티튜트(Kansas City Art Institute)와 프랑스 파리 줄리앙 아카데미(Académie Julian)에서 수학하였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로서 조형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탐구하게 된 것은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소재의 실험적 학교, 블랙 마운틴 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에서였다.

그는 1948년 입학 이후 동료 예술가이자 후에 그의 아내가 되는 수잔 베일(Susan Weil)을 만났다. 또한, 화가이자 바우하우스(Bauhaus) 교사로 재직했던 요제프 알버스(Josef Albers)에게 사사했으며, 오랜 친구이자 예술적 동료가 된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와 안무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깊은 교류를 나눈 바 있다.

세 사람은 시, 음악, 무용, 영화를 결합한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Theatre Piece No. 1>(1952)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현대 미술사 맥락에서 첫 번째 해프닝(Happening)’으로 여겨지는 주요 작업이기도 하다. 퍼포먼스 당시 라우센버그의 <White Paintings>(1951)가 천장에 매달려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에 깊은 영감을 받은 케이지는 주변의 소리를 작품으로 끌어들이는 <4’33”>(1952)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1953년 말까지 라우센버그는 다양한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와 재료를 본인의 작품 <Red Paintings>(1953-54) 내로 포섭하였고, 이는 추후 작가의 기념비적인 작품 <콤바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염소 박제부터 도로 표지판, 퀼트 이불보에 이르는 다양한 재료가 결합된 작품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고 관람자와 작품 간의 새 관계를 창출해냈다.

1962, 작가는 신문이나 잡지, 본인이 촬영한 사진을 활용하여 실크스크린 기법에 회화적 붓놀림이 더해진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라우센버그는 1963년 뉴욕 유대인박물관(Jewish Museum)에서 첫 회고전을 개최하였고, 1964년 개최된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에서 국제 회화 부문 대상을 수여받았다.

라우센버그는 수십년의 예술 인생에 걸쳐 연주자, 장인, 엔지니어와의 다양한 협업을 이어왔고 이는 전 세계를 아우르며 진행되었으며, 이런 행보가 작가의 작업 세계 전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폴 테일러(Paul Taylor) 등의 전위적 작품을 위한 조명, 무대 및 의상 디자인은 물론, 본인의 퍼포먼스 작품 <Pelican>을 위한 안무를 직접 기획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엔지니어 빌리 클뤼버(Billy Klüver), 프레드 발트하우어(Fred Waldhauer) 및 예술가 로버트 휘트먼(Robert Whitman)과 함께 예술과 기술 실험(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E.A.T.)을 공동 설립하였다. 이는 예술가와 엔지니어의 협업 프로젝트로, 라우센버그는 클뤼버와 함께 트랜지스터 라디오 기술을 통합한 <Oracle>(196265)과 반응형 조명 설치 작품 <Soundings>(1968)를 제작하였다.

Soundings 1968

1970, 미국 플로리다주 캡티바 섬에 터를 잡은 작가는 재료의 물질성에 중점을 두고 연구하며 버려진 상자로 만든 벽 부조 작품 <Cardboards>(1971-72)와 꿰맨 천으로 구성된 <Jammers>(197576)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매체 종류를 넘나들며 다양한 인쇄 기술을 실험하기에 로버트 라우센버그, 라우센버그 해외문화교류전, 산티아고 국립미술관, 1985. 사진: 작가 미상. 이르렀는데, 당시 제작된 작품으로는 솔벤트 트랜스퍼 기법 (종이에 이미지를 올린 뒤 특수용액을 뿌려 찍어내는 판화 기법)을 활용한 <Hoarfrosts>(197476)와 멀티미디어 작품 <Spreads>(197583), 그리고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어진 금속 작업 <Shiners> (198693), <Urban Bourbons> (1988-96) <Borealis>(1988-92)가 포함된다.

'Winter Pool '1959 회화 조각 콜라주 '콤바인'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예술 활동 외에도 예술가와 창작 커뮤니티의 대변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709, 예술가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 Change, Inc.를 설립하여 경제적 위기에 놓인 예술가를 도왔으며,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진행된 라우센버그 해외문화 교류 프로젝트(ROCI Project)에 개인 자금을 수급하기도 하였다.

Japanese Claywork 1982

작가는 이 광범위한 투어 프로그램을 위해 멕시코, 칠레, 베네수엘라, 중국, 티베트, 일본, 쿠바, 소비에트 연방, 독일, 말레이시아 등 10개국을 방문하며 예술을 매개체로 문화 간 대화와 이해를 촉진하고 다양한 소통을 하고자 노력했다.

Japanese Claywork 1982
Japanese Claywork 1982

[라우센버그 일본 전시] Japanese Clayworks 1982-1985

 

Robert Rauschenberg | Japanese Clayworks

 

ropac.net

[쿠닝 지우기] 그는 1953년 쿠닝의 그림을 다 지워버리고 그 위에 자신의 서명을 붙이다

드 쿠닝 지우기 ERASED DE KOONING

라우센버그의 초기작 '드 쿠닝 지우기(ERASED DE KOONING)'(1953)는 자신이 존경했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윌렘 드 쿠닝의 드로잉 작품을 지운 휴 자신의 서명을 붙이다. 이렇게 전통 회화에 도전장을 던지며 미국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줬던 그는 평생 회화의 미래와 확장성을 탐구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예술가이자 전성기였던 드 쿠닝에게 다가가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지울 수 있는 그림을 부탁했다. 드 쿠닝은 라우센버그에게 젊은 예술가가 제거하기 어려운 조밀하게 작업한 그림을 주었다. 라우센버그는 다양한 지우개를 사용하여 한 달 넘게 그림 작업을 했다.

라운센버그 천지개벽 같은 콤바인 페인팅, '김구림' 페인팅을 연상시킨다

김구림 2021

라우젠버그 그림을 보니까, 김구림 작가의 페인팅(2021년 작품)이 보인다. 색채가 해맑아 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다. 이런 페인팅은 김구림 아니면 그릴 수 없다. 그의 그림은 기존의 페인팅을 지워버리는 페인팅이다.

화이트 노이즈

라우센버그 순응주의(당시 미국의 주류미술 추상표현주의)를 거부한 네오다다라는 면에서 백남준과 일맥상통한다. 라우센버그의 화이트 페인팅(제로 그림)은 노자나 선불교와 닮았다 백남준의 화이트 노이즈와도 통한다.

<자료> 관련 뉴스 영국 가디언지

 

Robert Rauschenberg: the quiet minimalism of a style hero

The Texan artist was an early pioneer of pop art but his wardrobe was anything but. From monochrome to denim to the way he unbuttoned his shirt, he was an alt style leader of the 1960s

www.theguard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