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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귀환 10년 기념 특별전

외규장각 의궤 귀환 10년 기념 특별전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개최  10년간의 외규장각 의궤 연구 성과, 학술대회와 대중강연도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 2022. 11.01(화)~2023.03.19(일)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 외규장각 의궤 297책 등 460여 점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왕의 통치 노하우는 뭔가?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스스로 따르게 한다그렇게 하려면 왕이 백성에게 <(인의예)>를 잘 지켜야 한다  2왕은 언제나 백성 앞에서 절을 하는 자세로 예를 지키면서 나라를 다스리다 3조선의 왕은 백성을 두려워하고 항상 ''를 지켰다. 지금과 너무 다르다

조선 왕조 의궤 보면 조선이 대단한 왕조였음을 증명. 입 다물어지고 머리가 숙여진다.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조선시대 아카이브 특징은 편집용과 수집용(비편집된 자료)이 다 있다.

세계에서 이런 방식의 기록문화유산 희귀하다. 조선시대 의궤는 기록문화유산의 꽃,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 등록은 당연하다. 10년 전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한 조선시대 의궤 일부가 프랑스 문화부 장관 자크 랑 등의 협조로 한국으로 돌아오다 프랑스에서 편집한 것은 표지가 약간 다르다. COREEN이라고 쓴 것은 프랑스에서 표지를 약간 바꾼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윤성용)은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10년을 기념한 특별전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지난 10년 간 축적된 외규장각 의궤 연구 성과를 대중적인 시선으로 풀어냈다.

전시는 3부로 구성되었다. 1왕의 책, 외규장각 의궤에서는 왕이 보던 어람용 의궤가 가진 고품격의 가치를 조명한다. 또 의궤 속 자세하고 정확한 기록과 생생한 그림에서 읽어낸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를 소개한다. 2로서 구현하는 바른 정치에서는 의궤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고 의례儀禮로 구현한 조선의 예치禮治가 담고 있는 품격의 통치철학을 살펴본다. 3질서 속의 조화는 각자가 역할에 맞는 예를 갖춤으로써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조선이 추구한 이상적인 사회에 관한 이야기다. 그 이상이 잘 구현된 기사년(1809)의 왕실잔치 의례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국왕을 위한 책에서 모두가 보는 외규장각 의궤로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나고 그 전체 과정을 기록한 것이 의궤이다. 그 중에 단 1부는 최상급 재료를 들이고 조선 최고의 화가와 장인들이 참여하여 정성스럽게 엮고 장황粧䌙*한 어람용 의궤를 왕에게 올렸다.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이 어람용이다. 어람의 높은 품격을 지닌 외규장각 의궤 전시는 우리 문화의 자부심을 선물할 것이다* 장황粧䌙: 서책의 본문과 표지를 묶어서 장식하는 것

자세하고 정확한 기록, 현장감을 더하는 반차도와 도설

실록에는 1846년 헌종이 아버지인 익종(효명세자)의 능을 옮긴 일을 단 3줄로 남겼다. 반면 의궤에는 그 절차를 총 9책으로 자세히 기록했다. 행차 모습을 그린 반차도班次圖와 행사에 사용된 기물을 그린 도설圖說은 천연색으로 그려 지금까지도 어제 만든 것처럼 선명하다.

왕을 왕답게, 신하를 신하답게

조선시대 왕은 모범적인 의례를 구현하여 예를 실천하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움직여 스스로 따르게 하는 예치를 추구했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맞는 예를 갖춘 질서 속에 조화를 이루는 것은 조선이 추구한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공신녹훈功臣錄勳 의례에서 신하는 충심으로 보필하고, 국왕은 충신을 예우함으로서 신의信義를 보인다. 그 행사의 세세한 절차를 의궤에 담아 공신녹훈의 의미를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그밖에 볼거리, 느낄거리, 즐길거리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가 전량 전시된 대형 서가는 특별전의 감동을 기억할 포토존으로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의궤의 생생한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여령*과 잔치를 꾸민 준화樽花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외규장각 의궤 중 영국국립도서관이 구매하여 소장하고 있는 󰡔기사진표리진찬의궤󰡕를 실제와 똑같이 복제하여 관람객이 직접 넘겨보며 어람용 의궤의 품격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너비 10m의 대형 화면에서 디지털 콘텐츠로 변신한 기사년의 <진찬의 3D 영상>을 감상하면서 관람객은 왕실 잔치의 손님이 된다* 여령女伶: 전문 예인藝人으로 의례 중에 행사의 진행을 돕던 사람

외규장각 의궤 귀환 10년을 기념한 이번 특별전시에서 관람객들이 외규장각 의궤에 담긴 고귀한 뜻과 이야기를 온전히 느끼시기를 기대한다.

*박병선 박사(1923~20111123)의 노력으로 외규장각 의궤는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박병선 박사를 기억하고자 이 분의 11주기가 되는 1121()~27()에는 무료관람이다. 20231월 중에 지난 10년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학술대회와 대중 강연을 연다. 또 전시품 일부는 더욱 다양한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 교체하다.

ㅇ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10년 동안 외규장각 의궤를 연구하고 그 성과를 공개해왔습니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의 해제와 원문, 반차도, 도설 등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외규장각의궤 DB를 구축했고 외규장각 의궤 학술총서 총 6권을 발간했다. 아래 url로 접속하시면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연구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외규장각의궤 DB: https://www.museum.go.kr/uigwe/

 

외규장각 의궤

 

www.museum.go.kr

외규장각의궤 학술총서 열람 및 다운로드 https://www.museum.go.kr/site/main/archive/report/category/category_116

 

학술·출판 > 역사학 > 외규장각 의궤 총서

국립중앙박물관,학술·출판 > 역사학 > 외규장각 의궤 총서

www.museum.go.kr

효종국장도감의궤() 孝宗國葬都監儀軌() 659(현종 즉위) / 48.9×35.9×9.3/ 어람용 / 외규19

1659(효종 10) 5월에 승하昇遐한 효종孝宗(재위 1649~1659)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어람용 의궤이다. 장례를 주관하는 임시 관서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설치해서부터 5개월 뒤 시신을 묘소인 영릉寧陵으로 옮겨(발인發靷) 장사지내고, 창경궁으로 돌아와 문정전文政殿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국왕 장례(국장國葬)의 전 과정을 기록하였다.

권상 마지막에 30면에 걸친 <발인반차도>가 수록되었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 빈전殯殿에 모시고 있던 효종의 혼백魂帛과 재궁梓宮()을 모시고 묘소를 향해 가는 발인發引 행렬을 그린 것이다.

선도先導관원으로 시작해서 국왕의 평소 행차 때와 같은 구성의 길의장吉儀仗과 국왕 장례에서만 쓰는 의장인 흉의장凶儀仗, 그 뒤를 따르는 여러 관원들로 이루어진 모습이다. 조선 후기 국장 발인 행렬의 일반적인 구성을 잘 보여준다.

<서궐영건도감의궤 西闕營建都監儀軌>1832(순조 32) / 45.2×33.4×5.1/ 어람용 / 외규262

1829(순조 29) 10월에 발생한 경희궁慶熙宮(서궐西闕) 대화재를 계기로 1830(순조 30)부터 1831(순조 31)까지 진행된 재건축의 내용을 담은 어람용 의궤이다. 궁궐의 중심부에 위치한 주요 전각의 공사 내용과 사용된 부재 내역이 전각별로 정리되어 있어 당시 공역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앞부분에 실린 건물 그림 도형圖形은 해당 전각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융복전隆福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집경당集慶堂, 사현합思賢閣의 정면 모습을 그린 것인데, 팔작지붕 또는 맞배지붕 같은 지붕의 구조는 물론 용마루의 형태와 양쪽 끝에 얹은 취두鷲頭, 추녀마루의 잡상雜像, 창호窓戶의 수량과 모양까지 세세하게 묘사하였다.

[부록] <전시 패널>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Pinnacle of Propriety: The Uigwe, Records of the State Rites of the Joseon Dynasty

전시를 열며
[프롤로그] 외규장각과 의궤
. 왕의 책, 외규장각 의궤
1. 어람御覽의 품격
1)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2) 어람용 의궤의 장황粧䌙
2. 하나하나 상세하게
1) 왕릉 이전을 위한 논의
2) 궁궐 건축의 모든 것
3. 생생하게 그림으로
1) 형태를 설명하는 도설圖說
제사용 그릇, 제기祭器

찬궁欑宮을 지키는 사수도四獸圖
2) 행렬 구성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
국왕의 장례 그림 <발인반차도發引班次圖>

. 로써 구현하는 바른 정치
1. 왕조의 정통을 세우다
1) 국본國本을 정하다
2) 어진御眞, 위엄을 더하다
3) 왕실을 높이다
2. 신하와 백성을 향하다
1) 충신忠臣을 기리다
2) 천하의 모범이 되다
3) 만백성을 돌보다
. 질서 속의 조화
1. 기사년己巳年 봄날의 왕실 잔치
1) 의례로 드러내는 효의 가치
2) 질서 속에서 함께 즐기다
2. 그날의 잔치 속으로
[에필로그] 조선왕조의궤, 그 이후
이제 다시 의궤로

전시를 열며

외규장각外奎章閣 의궤儀軌가 우리 품으로 돌아온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우리는 외규장각 의궤를 이리 들여다보고 저리 들여다보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찾아내었습니다. 이제 그간의 이야기들을 한 자리에 모아 여러분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의식의 궤범軌範의궤는 조선시대 중요 국가 행사의 전체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그중에서도 외규장각 의궤는 오직 왕만을 위해 만든 귀한 책입니다. 생김새도 귀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더욱 귀합니다. 예법禮法으로 왕조의 정통을 세우고 백성을 아우르는 품격의 통치, 그곳으로 가는 길이 의궤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귀한 책,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시작합니다.

[프롤로그] 외규장각과 의궤

여러분은 지금 외규장각外奎章閣 안에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왕실의 상징인 금보金寶와 옥책玉冊, 선왕先王의 보배 같은 글귀와 유구한 역사를 담은 왕실 족보 등. 조선의 정체성이자 왕조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중에 가장 많은 것이 의궤儀軌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외규장각 의궤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입니다.

외규장각은 한강이 끝나는 바다 위 강화도에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강화도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와 왕실의 안전을 지켜주는 보장지처堡障之處였습니다. 가장 안전한 땅에 특별히 건물을 지어서 보관할 만큼, 외규장각 의궤는 귀한 책이었습니다. 어떤 점이 특별했기에, 어떤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처럼 귀하게 보관했던 것인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 왕의 책, 외규장각 의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후 그 전 과정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기록물입니다. 한번에 3부에서 많게는 9부를 만들었는데, 그중 1건은 왕이 읽어보도록 올리고 나머지는 관련 업무를 맡은 관청이나 국가 기록물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로 보냈습니다. 왕에게 올린 것을 어람용御覽用,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한 것을 분상용分上用이라고 합니다. 외규장각 의궤는 몇 권을 제외한 대부분이 어람용입니다.

왕이 열람을 마친 후 어람용 의궤는 왕실의 귀한 물건들과 함께 규장각 또는 외규장각에 봉안奉安하였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꺼내보면서 예법에 맞는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왕을 위한 책 외규장각 의궤는 후세後世를 위한 모범적 선례先例이자 영구히 전해야 할 왕조의 정신적 문화 자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1. 어람御覽의 품격

일국一國을 경영하는 왕의 권위가 지극하듯이, 왕의 손길이 닿는 어람용 의궤 또한 그에 어울리는 품격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또한 후세의 왕들에게 대대로 전해야 했기에 국격도 상징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람용 의궤는 일반 서책에서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장황粧䌙* 방법을 썼습니다. 최상의 재료만 모아서 가장 뛰어난 솜씨의 장인匠人이 조선만의 미의식으로 완성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람용 의궤는 일반적인 서책書冊과는 다른 격조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눈길을 사로잡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화려함, 일부러 내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아함. 이것이 바로 어람의 품격입니다.

* 장황: 서책의 본문과 표지를 묶어서 장식하는 것

1)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어람용 의궤는 최상의 재료를 써서 최고의 전문가가 만들었습니다. 은은하게 품위가 배어나는 비단 표지와 반짝반짝 빛나는 놋쇠 장식, 깨끗하고 윤기 나는 고급 종이에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쓴 글자, 섬세한 솜씨로 그려 넣은 그림까지. 어느 하나 평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습니다.

분상용 의궤는 행사 진행을 담당하는 관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책입니다. 중요한 국가 행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종이로 표지를 만들고 실로 묶는 일반적인 서책書冊보다 격을 높였지만, 튼튼한 삼베로 표지를 만들고 화려한 장식은 생략하여 실용성을 높였습니다.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비교>

항목 어람용 분상용
책의冊衣
책 표지
초록경광주草綠輕光紬
초록색 고급 비단
홍정포紅正布
붉은색 삼베
표제表題
표지 제목
제첨題簽
흰 비단에 제목을 쓰고 붉은색 비단으로 테두리를 두른 후 표지에 붙임
묵서墨書
표지에 먹으로 제목, 날짜, 보관기관을 직접 씀
책지冊紙
본문에 사용한 책종이
초주지草注紙
닥나무로 만든 두껍고 매끈한 고급 종이
저주지楮注紙
닥나무로 만든 일반 종이
장황粧䌙
책종이를 묶는 방식
놋쇠 변철豆錫邊鐵, 국화동박철菊花童朴鐵 5, 원환圓環
겉에 놋쇠 판(변철)을 댄 후 국화꽃 모양 못(국화동박철)을 박아 고정
가운데 국화동에 둥근 고리(원환)를 달아 완성
쇠 변철正鐵邊鐵, 박철朴鐵 3, 원환圓環
쇠 판(변철)을 댄 후 못(박철)을 박아 고정
가운데 못 머리에 둥근 고리(원환)를 달아 완성
인찰선印札線
글자 쓸 자리를 잡기위해 그은 줄
화원畫員, 당주홍唐朱紅
화원이 붉은 안료(당주홍)로 직접 선을 그음
인쇄印刷, 상묵常墨
줄을 새긴 나무틀에 검은 먹(상묵)을 바른 후 찍음
글씨체 사자관寫字官, 해서체楷書體
글씨를 잘 쓰는 전문 관원(사자관)을 선발하여 반듯한 글씨체(해서체)로 정성껏 씀
서사관書寫官, 일반 글씨체
각종 글씨 쓰기를 담당하는 관원(서사관)이 일반 글씨체로 씀
반차도班次圖
사람이나 기물이 늘어선 행차 그림
육필肉筆 중심
인물과 기물을 화원이 손으로 일일이 그린 후 채색
인각印刻 중심
반복되는 인물들을 나무에 새겨 도장처럼 찍은 후 채색

2) 어람용 의궤의 장황粧䌙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대부분 초록색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푸른색 비단이나 염색하지 않은 소색素色 비단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비단에 들어간 무늬 중 가장 많이 쓰인 것은 구름무늬입니다. 두둥실 뜬 뭉게구름에 하늘하늘한 꼬리를 드리운 모습입니다. 화려한 연꽃넝쿨무늬가 표현된 비단도 많이 썼습니다. 풍성한 잎사귀가 달린 넝쿨이 큼직한 연꽃 봉오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구름이나 연꽃 사이사이 반짝이는 보배무늬가 들어간 비단도 보입니다. 영조英祖 때에는 왕실이 앞장서서 검소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때 만든 의궤는 별다른 무늬가 없는 비단을 사용하여 단아한 멋을 살렸습니다.

표지와 책지(내지)를 묶을 때 쓰는 금속인 변철邊鐵은 초기에 문양이 없는 놋쇠 판을 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도 다양한 문양을 새겼습니다. 가장 많은 것은 넝쿨무늬입니다. 유연하게 휘어진 줄기와 잎사귀, 활짝 핀 연꽃을 가득 새기고 여백에는 작은 점을 채웠습니다. 영조 때 만든 의궤 중에는 꽃송이 사이에 마름모꼴의 보배무늬를 넣어서 영화로움을 더한 변철도 있습니다.

변철 위에 박은 못은 국화동菊花童으로 장식했습니다. 빗금으로 꽃술을 표현하고 그 주위에 8장의 꽃잎이 둘러싼 모양, 꽃잎을 2겹으로 만들어서 화사함을 더한 모양 등 다양합니다. 작은 못 하나까지 아름답게 장식한 세심함이 느껴집니다.

2. 하나하나 상세하게

역사 기록물로서 조선왕조의궤의 가장 독보적인 가치는 내용의 상세함에 있습니다. 행사나 의례가 끝난 후 실무를 담당했던 도감都監에서 생산했거나 다른 관청으로부터 받은 공문서를 모아 그대로 베껴 엮었기 때문에 일의 준비와 진행 내용을 모두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행사를 설명하는 기록으로는 가장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의궤 기록의 상세함은 실무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습니다. 행사의 추진 배경과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진 의사결정 내용 등 일이 진행되어 가는 맥락도 설명하였습니다. 실록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 궁궐 건축이나 수리 같은 분야도 포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의궤는 하나의 행사를 진행할 때 참고하는 단순한 결과보고서의 수준을 넘어서 국가 주요 사업의 추진 원리와 지향점을 보여주는 국가 경영 지침서인 것입니다.

1) 왕릉 이전을 위한 논의

8세에 왕위에 오른 헌종憲宗(재위 1834~1849)은 성인이 된 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묘 수릉綏陵을 더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이에 헌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전을 제안합니다.

왕릉을 옮기는 것은 많은 인력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행에 옮길 것인지를 결정하려면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헌종실록󰡕에는 이 부분이 매우 짧게 언급되어 있어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이때 만든 의궤는 29책이나 되어서 상세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날짜별로 정리된 기록을 따라가면, 헌종과 신하들의 의견이 엇갈리자 며칠에 걸쳐 토의하고 또 2차례 현장 확인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왕과 신료들이 의견을 조율해 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2) 궁궐 건축의 모든 것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건축공사와 관련된 것도 있습니다. 궁궐이나 종묘, 왕실 사당을 새로 짓거나 수리한 일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이런 의궤를 통틀어서 영건의궤營建儀軌라고 부릅니다.

지금 남아있는 영건의궤는 특별한 건물이거나 규모가 매우 큰 공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때에 전반적으로 수리하고, 순조純祖(재위 1800~1834) 때에 대대적으로 재건축한 경희궁慶熙宮 같은 경우입니다. 당시의 의궤를 펼쳐보면 공사 배경부터 건물별 수리 내용, 사용한 자재의 종류와 수량, 공사에 참여한 장인匠人의 이름과 지급받은 품삯까지 조선시대 궁궐 건축의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의 정면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궁궐건축 문화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3. 생생하게 그림으로

사람들은 의궤를 조선 기록문화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기록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아름다운 그림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상의 세부 특징을 잘 묘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빨강파랑노랑초록 등 천연색으로 채색되어 있어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의궤 속 그림은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진을 보듯, 조선시대 국가 행사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시각자료입니다. 글자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림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궤 속 그림은 감상하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그림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목적을 가진 행사였는지, 예법禮法에 맞는 의례 절차와 형식을 갖추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형태를 설명하는 도설圖說
의궤 속 그림 중 특정한 행사 장면이나 건물 구조, 행사 때 사용한 물건의 형태 등을 그린 것을 도설이라고 합니다. 설명하려는 대상의 기본적인 생김새뿐만 아니라 비례감, 색감, 전반적인 분위기까지 글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에서 도설이 포함된 의궤는 172(60%)입니다. 그중 대략 70%에 해당하는 115책이 왕실 장례식과 관련한 의궤들입니다. 기간이 길고 매우 복잡한 장례를 차질 없이 치르기 위해서 명확하고 상세한 규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만큼 도설도 많이 수록하였던 것입니다.

제사용 그릇, 제기祭器

조선시대 왕실 제사는 조상의 은덕에 감사를 표하고, 대대로 내려온 왕위의 정통성을 지금의 국왕이 이어받았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의례입니다. 그래서 제사에서는 절차와 형식은 물론 사용하는 물품 하나까지도 왕실의 위상과 예법에 걸맞은 법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 때 쓰는 그릇인 제기는 법식에 따라 만든 후 의궤에 각각의 명칭과 수량, 재질, 크기를 적고 그 옆에 완성된 모습도 그려놓았습니다. 다음에 제기를 만들 때 참고하여서 크기나 모양이 달라지지 않도록 한 조선시대 방식의 표준화 지침인 것입니다. 덕분에 의궤 속 도설과 똑같은 모습을 한 왕실 제기들이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찬궁欑宮을 지키는 사수도四獸圖

왕과 왕비의 장례 때 재궁梓宮()을 모신 건물 빈전殯殿과 관련한 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와 묘소인 능의 조성 과정을 담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에는 사수도라고 하는 매우 강렬한 그림이 있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의 그림입니다. 왕과 왕비의 재궁은 능에 묻기 전까지 찬궁欑宮이라고 하는 집 모양의 구조물 안에 모셔두는데, 이때 나쁜 기운이 스며들지 못하게 막아 돌아가신 왕과 왕비를 지키는 의미로 찬궁의 안쪽 벽에 사수도를 붙였습니다.

장례의식이 끝나면 찬궁은 모두 불에 태워버리기 때문에 찬궁에 붙인 사수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오직 의궤에 실린 사수도 그림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행렬 구성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

국가 의례나 왕실 행사에서 왕과 왕비, 여러 관원과 군인들이 줄을 지어 행차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과 깃발가마 등 기물의 순서를 그린 것이 반차도입니다. 장중한 행차 의례를 실수 없이 진행하기 위해 사람과 기물의 위치를 미리 그려보고, 행사가 끝난 후에 정성껏 다시 그려서 의궤에 실었습니다.

행렬이 포함된 의례에서만 반차도를 그리기 때문에 외규장각 의궤 297책 중 반차도가 수록된 의궤는 60(20%)에 불과합니다. 수량은 많지 않지만 사람 한 명 한 명, 기물 하나하나 손으로 그려서 채색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왕실 행렬의 생생한 현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왕의 장례 그림 <발인반차도發引班次圖>

외규장각 의궤 반차도 중 가장 많은 것이 <발인반차도>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관을 모시고 묘소까지 가는 행렬을 그린 것입니다. 행렬 구성이 잘 정비되어 있고 조선 후기 내내 큰 변화가 없기 때문에 반차도에서 의례 내용을 읽어내기에 좋은 예시가 됩니다.

효종孝宗(재위 16491659)<발인반차도>16591028일 창덕궁을 출발한 발인 행렬이 경기도 여주에 있는 묘소 영릉寧陵까지 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돌아가신 왕의 혼백을 모신 가마와 재궁을 실은 가마가 중심에 서고 그 주위를 수많은 관원과 군인, 각종 깃발과 의장물儀仗物이 에워쌌습니다. 효종이 살아계실 때의 권위와 선왕先王으로서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있습니다.

. 로써 구현하는 바른 정치

의궤는 국가 의례나 행사에서 모범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모범적인 의례란 바른 예법을 잘 따른 의례입니다. 의례에 맞는 예법을 규정한 것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같은 전례서典禮書라면, 의궤는 그 예법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의 경험을 모은 것입니다.

의례에서만 예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국왕이 추구해야 할 바른 정치도 바른 예법을 따르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나 충, 신의信義 같은 사회적 덕목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예입니다. 왕이 먼저 바른 예를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따르게 하는 것, 그것이 예로써 구현하는 바른 정치입니다.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의궤, 거기에 만세萬世의 모범이 될 조선의 의례 경험과 품격의 통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1. 왕조의 정통을 세우다

바른 예법으로 나라를 이끌기 위해서는 신하와 백성들이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권위가 있으면 위상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실의 위상을 정립하고 강화하기 위한 의례가 각별히 중요했습니다. 특히 왕에게는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는 사회적 인정, 즉 정통성을 세우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정통성에서 나라와 백성을 이끌 자격과 명분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왕과 왕실의 위상과 정통성은 의례를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확인되었습니다. 왕조의 정당한 후계자를 공표하거나, 국왕에게 위엄을 부여하거나, 왕실의 지위를 격상하는 의례입니다. 바른 예법에 따라 엄숙하면서도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왕과 왕실의 특별한 존재감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1) 국본國本을 정하다

왕세자는 장차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입니다. ‘나라의 근본이라는 의미로 국본國本이라고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세자를 정하는 책례冊禮는 왕실을 이어가고 나라를 안정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왕세자 책례는 공식적인 왕위 후계자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의식입니다. 궁궐 한 가운데 정전正殿에서 성대하고 엄숙하게 거행하였습니다. 이때 왕세자는 왕만이 입을 수 있었던 최고의 예복인 대례복大禮服을 입고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보는 앞에서 왕으로부터 죽책竹冊, 교명敎命, 옥인玉印을 전해 받았습니다. 정통성 있는 왕위 후계자임을 상징하는 의물儀物들입니다. 책례를 거침으로써 왕세자는 여러 왕자 중의 한 사람에서 단 한 명의 후계자로 지위가 격상하게 됩니다.

2) 어진御眞, 위엄을 더하다

어진御眞은 왕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어진을 그릴 때는 도사도감圖寫都監이나 모사도감模寫都監을 설치하였습니다. ‘도사는 왕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그리는 것이고, ‘모사는 이전의 어진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입니다. 도감이 설치되면 도화서圖畫署 화원 중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그림을 맡기고, 인물화에 조예가 깊은 관료를 선정하여 작업을 감독하게 했습니다.

어진이 완성되면 대신들이 모여 살펴보는 봉심奉審 의례를 행하였는데, 이때 실제 왕을 대하는 것 같은 예를 갖추었습니다.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예복을 입고 어진을 모신 건물 앞에서 4번 절을 하는 사배례四拜禮를 올린 것입니다. 어진에 대한 의례의 격을 최고 수준으로 높임으로써 어진의 주인공인 국왕의 위상을 강화한 것입니다.

3) 왕실을 높이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선왕先王의 왕비는 왕대비로, 이전의 왕대비는 대왕대비로 지위를 높이고 그에 어울리는 귀한 호칭을 정해 올립니다. 이 호칭을 존호尊號라고 하고,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존숭의례尊崇儀禮라고 합니다. 왕실에 경사가 있거나 왕의 특별한 업적이 있을 때, 돌아가신 왕의 업적을 기릴 때도 존호를 올렸습니다.

왕실 구성원에게 존호를 올리는 것은 곧 왕실의 위상을 높여 위엄을 더하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됨됨이나 사회적 지위가 명칭에서 드러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귀한 의미의 호칭을 덧붙이는 것은 큰 공덕이 있음을 세상이 인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특히 돌아가신 왕을 존숭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지위를 더욱 존엄하게 함으로써 그 후손인 현재 왕을 높이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2. 신하와 백성을 향하다

조선의 왕이 권위를 강화하고 왕실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 것은 결국 질서를 잡아서 나라를 잘 이끌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법으로 위엄을 갖춘 왕이 다음으로 할 일은 신하와 백성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조정朝政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을 누리는 것, 그것이 바른 예를 실천함으로써 이루고자 한 바른 정치의 모습입니다.

그 첫걸음은 신하를 예로써 대하고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자세를 내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의信義에 기반을 둔 군신관계를 정립하고, 백성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하려는 애민愛民의 자세입니다. 왕의 권위는 내세운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신하와 백성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1) 충신忠臣을 기리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에게 공신功臣의 칭호와 다양한 특혜를 내렸습니다. 이것을 공신녹훈功臣錄勳이라고 합니다.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은 정공신正功臣으로, 작은 공을 세운 사람들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삼았습니다. 정공신은 소수였지만, 원종공신은 수백 명, 수천 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반 백성이나 노비도 포함되었습니다. 공신녹훈이 끝나면 국왕과 공신들이 모여 회맹제會盟祭를 열었습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서로 의리를 지키고 대대로 나라에 충성하자고 맹서하는 의식입니다.

공신녹훈과 회맹제는 군신君臣이 하나 되는 의례입니다. 신하는 충심忠心으로 왕을 보필하고, 왕은 충신을 예우함으로써 신의信義를 보이는 것입니다. 나아가 왕과 관료 및 사대부,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가 함께 나라를 지키고 왕조를 이어간다는 인식을 확인하는 의례이기도 했습니다.

2) 천하의 모범이 되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유교적 혼인 의례로서 신랑이 신부를 직접 맞이하여 오는 친영례親迎禮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올린 후 그곳에서 생활하는 기존 관습을 따랐기 때문에 친영례는 쉽게 보급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왕실은 앞장서서 왕실 혼례에 친영례를 도입하였습니다. 국왕의 의례는 평범한 사대부의 집에서 개최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왕비로 간택된 신부의 집에 사신使臣을 대신 보냈습니다. 이후에는 신부를 위해 별궁別宮을 마련하고, 국왕이 여기로 가서 신부를 맞아 궁궐로 오는 방법을 썼습니다. 덕분에 왕실의 격조를 유지하면서 친영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왕실이 먼저 모범을 보인 결과 18세기 이후에는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린 후 신부와 함께 돌아오는 혼인 의례가 민간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3) 만백성을 돌보다

유교의 성인聖人 맹자孟子항산恒産(안정적인 먹거리)이 없으면 항심恒心(바른 마음)도 없다.”라고 했듯이 의례나 예법도 백성의 삶이 편안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들은 예의 실천이 백성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습니다. 이 의례를 친경親耕이라고 합니다.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 경칩驚蟄이 지나면 길한 날을 택하여 도성 동쪽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농경의 신에게 제사를 올립니다. 그 후 근처에 마련한 밭 적전藉田에서 소가 끄는 쟁기를 5번 밀어 땅을 갈았습니다. 이 행사에는 왕세자와 여러 신하들, 그리고 평범한 농부들도 참여했습니다. 국왕이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의 생업生業을 보호함으로써 백성과 고락苦樂을 같이 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질서 속의 조화

각자가 역할에 맞는 예를 갖춤으로써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것. 조선이 의례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상적인 사회 모습입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예를 실천하며 함께 만드는 질서,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리는 안락함은 크게 보면 나라를 경영하는 지향점이지만, 작게는 한 번의 행사에서도 실현하고자 한 가치였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왕실 잔치입니다. 왕실 구성원과 초청받은 손님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관원들, 잔치의 흥을 돋우는 악공樂工과 여령女伶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의례 절차를 따르면서 즐거움을 나누는 왕실 잔치를 통해 예로 만든 질서 속에서 모두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사회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1. 기사년己巳年의 왕실 잔치

기사년(1809) 음력 122.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경사스러운 의례가 열렸습니다. 20세의 젊은 왕 순조純祖(재위 1800~1834)가 할머니 혜경궁惠慶宮을 위해 개최한 행사입니다.

이 해는 혜경궁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어 관례冠禮(성인식)를 치르고 궁궐로 들어온 지 60주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조는 혜경궁의 자애로움에 보답하고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새 옷감을 진상하는 진표리進表裏 의례를 개최하였습니다. 한 달 뒤인 음력 227일에는 왕대비와 왕, 왕비, 초청받은 왕실 친인척들이 모여 축하 잔치인 진찬進饌도 열었습니다.

기사년 봄날의 진표리와 진찬. 왕실의 위엄과 경사스러운 날의 기쁨이 어우러진 화락和樂의 자리였을 것입니다.

1) 의례로 드러내는 효의 가치

혜경궁을 위한 진표리 및 진찬 개최를 명하면서 순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례冠禮(성인식) 회갑은 우리 왕실에 일찍이 전례가 없던 예이다. 봄날의 햇살 같은 따스한 은혜를 갚고자 함은 자식의 지극한 정이요, 만수무강을 기원함은 작은 정성에서 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왕실의 웃어른이자 자신에게는 친할머니인 혜경궁을 생각하는 순조의 지극한 효심은 의례의 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진찬 때 혜경궁에게 올린 음식과 꽃 장식, 양산부채 등 주인공의 위상을 상징하는 의장儀仗의 종류와 숫자를 왕대비나 왕, 왕비보다도 월등히 높은 수준으로 마련하였습니다. 혜경궁은 공식적인 지위가 세자빈으로 그쳤지만 왕실의 가장 웃어른이자 왕의 친할머니였기 때문에 최고 수준으로 예우한 것입니다.

2) 질서 속에서 함께 즐기다

흥겨운 잔치에 음악이 빠질 수 없습니다. 진표리 행사 때에는 헌가軒架, 진찬 행사 때에는 헌가와 등가登歌를 함께 배치하여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등가는 가야금, 거문고, 아쟁 같은 현악기絃樂器가 중심이 되고, 헌가는 피리, 대금, 퉁소 등 죽관악기竹管樂器가 중심입니다. 특히 헌가 악기 중에는 건고建鼓, 삭고朔鼓, 응고應鼓와 같은 대형 북이 포함되어 화려하고 성대한 궁중 음악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진찬 때 등가와 헌가는 번갈아가며 연주했습니다. 왕대비왕비가 혜경궁에게 절을 올릴 때나 혜경궁이 술잔을 들었을 때는 등가와 헌가가 동시에 연주하여 행사 주인공의 위엄과 존귀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2. 그날의 잔치 속으로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 내용과 도설圖說을 활용하여 기사년(1809)의 진표리進表裏와 진찬進饌 행사를 3D 영상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봄날의 잔치 속에서 왕실 의례의 장엄함과 흥겨움을 함께 즐겨보세요.

[에필로그-] 조선왕조의궤, 그 이후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18971012.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高宗(재위 1863~1907)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500여 년 동안 왕이 통치하는 나라였던 조선은 이제 황제의 나라로 변모했습니다.

국가체제는 바뀌었지만 의궤 제작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는 황제에게 올리는 어람용 의궤와 황태자에게 올리는 예람용睿覽用 의궤, 각처에 나누어 보관하는 분상용 의궤 3종으로 만들었습니다. 황제가 보는 어람용은 황제의 상징인 황색 비단으로 표지를 삼고, 예람용은 붉은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습니다.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예법에 맞게 의례를 행하고,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다는 의궤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에필로그-] 이제 다시 의궤로

시대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도 저마다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 모습이 있고, 그것을 실현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습니다. 질서 있고 조화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조선의 방식 중 하나가 바른 예법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조선왕조의궤朝鮮王朝儀軌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함께 외규장각 의궤의 가치를 조명해 왔습니다. 앞으로의 10년 역시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의궤를 들여다볼 것입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우리 역사와 문화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끌어내고, 그것이 쌓이면 또다시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전시의 장을 마련할 것입니다. 이번 전시는 그 긴 여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