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림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내년에 열리고 순회전으로 뉴욕 구겐하임에서 전시가 열린다. 구겐하임 관계자들 김구림 선생님 작업을 최근에 방문했다고 한다> 오브제 아트를 하려면 많은 공구가 필요하다. 작가는 작업하기 편하기 공구를 이런 방식으로 걸어 놓고 사용한다. 87세에도 그의 창작욕은 20대 못지않다. 다만 체력이 너무 달리고 걷기가 불편해 힘들어하신다. 그래도 왕성한 식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시는 것 같다. 또 이에 못지않게 많은 음반과 음향 시설 또한 그의 작품에 영향 주는 뺄 수 없는 요소이다.
<김구림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내년에 열리고 순회전으로 뉴욕 구겐하임에서 전시가 열린다. 구겐하임 관계자들 김구림 선생님 작업을 최근에 방문했다고 한다> 오브제 아트를 하려면 많은 공구가 필요하다. 작가는 작업하기 편하기 공구를 이런 방식으로 걸어 놓고 사용한다. 87세에도 그의 창작욕은 20대 못지않다. 다만 체력이 너무 달리고 걷기가 불편해 힘들어하신다. 그래도 왕성한 식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시는 것 같다. 또 이에 못지않게 많은 음반과 음향 시설 또한 그의 작품에 영향 주는 뺄 수 없는 요소이다. <작성 중>
[최근 많은 주목을 받는 이건용 선생 등에게 해프닝과 이벤트 퍼포먼스와 설치미술 등의 개념을 잡아주기도 했다] <김구림 화백 서양에서 안티 아트의 상징인 뒤샹처럼 반미술을 평생 추구하다. 마침내는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기반이 되게 초석을 놓은 큰 공로자다. 김구림 선생님 한국 미술에서 뭐든지 처음 한 사람이다.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 작가가 바로 김구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앞으로 그에 대한 한국미술사적 공로는 다시 써져야 한다. 요즘 말하는 토탈아트 모든 예술 분야를 통합하는 아트 마치 영화가 제7의 예술이듯 그런 INTEGRAL ART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미술은 물론 무용 영화 음악 시인 사진 행위 예술 연극 등등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환경의 악조건 속에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당시 흥미로운 용어는 단체의 대표를 회장이라고 하지 않고 <통령>이라고 했으니 말이 되기도 했다 대통령보다 더 높은 '통령'이었다. 그러니 정치가들 좋아할 리가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앙정보부에서 요시찰인물이 되었다고 차라리 추방시켜라! 해서 일본으로 가게 된다. 김구림 1973-1975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해프닝과 이벤트 확실히 구분할 정도로 제대로 안 사람은 70년대 김구림밖에 없었다. 〈삽, 1973〉과 〈걸레, 1974〉<제4집단> 등이 이때 나온 작품이다. 당시 한국보다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았던 일본미술계를 통째로 경험하면서 배우게 된다)
1969년 김구림 '24분의 1초' 세계미술사로 봐도 기념비적인 한국최초 비디오작품이다. 산업화 초기 속도 문화에 치이는 인간소외와 문명비평을 주제로 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도 좋은 것 같다.
1969년 한국의 천재적 실험 영화의 전설인 김구림은 이제 막 시작되는 산업 사회기 낳은 소외와 권태 그리고 개발 속도에 치이는 도시 문명 등을 풍자하고 고발하는 영상으로 전 세계 미술계와 영화계에 충격을 던지다. 영국은 300년 산업사회를 주도했지만 이만한 영화 혹은 영상을 못 만들었다. 산업사회의 문제를 주제로 한 예술품을 만들지 못했다. 런던 테이트미술관과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그리고 프랑스 영상전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보 김구림 선생 장흥 작업실에서 최근 평창동 작업실로 이사하다/김구림 선생님 최근 장흥 작업실을 없애고 평창동 저택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거의 6개월이 걸리다. 가나아트센터와 토탈미술관도 보인다. 2번째 방이 작업실이다.
[최근 많은 주목을 받는 이건용 선생 등에게 해프닝과 이벤트 퍼포먼스와 설치미술 등의 개념을 잡아주기도 했다] <김구림 화백 서양에서 안티 아트의 상징인 뒤샹처럼 반미술을 평생 추구하다. 마침내는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기반이 되게 초석을 놓은 큰 공로자다. 김구림 선생님 한국 미술에서 뭐든지 처음 한 사람이다.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 작가가 바로 김구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앞으로 그에 대한 한국미술사적 공로는 다시 써져야 한다. 요즘 말하는 토탈아트 모든 예술 분야를 통합하는 아트 마치 영화가 제7의 예술이듯 그런 INTEGRAL ART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미술은 물론 무용 영화 음악 시인 사진 행위 예술 연극 등등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환경의 악조건 속에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당시 흥미로운 용어는 단체의 대표를 회장이라고 하지 않고 <통령>이라고 했으니 말이 되기도 했다 대통령보다 더 높은 '통령'이었다. 그러니 정치가들 좋아할 리가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앙정보부에서 요시찰인물이 되었다고 차라리 추방시켜라! 해서 일본으로 가게 된다. 김구림 1973-1975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해프닝과 이벤트 확실히 구분할 정도로 제대로 안 사람은 70년대 김구림밖에 없었다. 〈삽, 1973〉과 〈걸레, 1974〉<제4집단> 등이 이때 나온 작품이다. 당시 한국보다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았던 일본미술계를 통째로 경험하면서 배우게 된다)
1964년 작 '태양의 죽음'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 소장이 되면서 국내보다 영국에서부터 더 인정을 받다
그리고 이번에 가나 아트에서 두꺼운 김구림 작가 도록 2권을 발간했다. 최근 페인팅과 오브제 작품을 총망라하다.
1969년 김구림 '24분의 1초' 세계미술사로 봐도 기념비적인 한국최초 비디오작품이다. 산업화 초기 속도 문화에 치이는 인간소외와 문명비평을 주제로 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도 좋은 것 같다.
김구림 선생은 이 세상의 모든 원리를 동양 철학의 핵심인 음과 양으로 설명한다. 음양 시리즈는 그가 평생 추구하는 작품의 주제이다. 60년대 한국에서 괴상한 미술가로 중앙정보부에서 추방시키다.
그래서 1973~75년 일본에서 작업 첨단 미술과 접하다 일본언론에서 대서특필 유명작가가 되다. 그러나 귀국에 이에 만족하지 않고 어렵게 미국 비자를 받고 뉴욕으로 80년 초에 학생비자로 가게 된다.
그가 들어간 학교는 로스코 라우센버그 등이 나온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학교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고 영어 부족으로 고생했지만, 재학생 전시에서 1등상을 타기도 했다.
1992년에는 백남준과 2인전을 하기도 했고 90년대 뉴욕에서 LA로 옮겨 작업하다. 이쪽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돌 끈 작업실도 있다고. 2000년 미국에서 귀국,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과천에서 전시하다.
화보 여기가 김구림 작가 작업실이다
화보 김구림 작가의 도서관 같은 아카이브와 자료실
화보 여기는 김구림 선생님 휴식을 취하는 방이다. 주방도 보이고 식사도 여기서 하신다.
화보 김구림 작가도 음악과 미술의 경계가 없는 분이다. 존 케이지처럼 작곡할 때 그냥 그림 스케치 방식으로 악보를 그린다. '조지안' 스피커라 하네요
화보 김구림 선생님 머리 속에 팔만대장경이 다 소장되어 있다. 작가란 일반인 보다 1000배의 에너지를 가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화보 60년대 70년대 한국은 일본에서 나오는 미술수첩이 가장 큰 정보소스였다고
화보 김구림은 사실 미술보다 거의 영화감독으로 출발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다. 아래 여러 영상자료를 도서관 서재처럼 보관하다. 찍을 사진이 너무 많은데 다음에 다시 와서 찍으라고 해서 그냥 몇 컷만 찍었다 전시실도 있고 수장고 등도 있다.
유튜브 24분의 1초의 의미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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