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화백] 국제갤러리 및 국립현대미술관 자료 계속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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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은 50년을 앞서 살았다. 회화의 새 가능성을 연 영원한 모던 보이, 그가 지금 살아 있었다면 BTS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유언 "남이 안 하는 새로운 것을 해야 해" 말년에는 모든 미술 단체에서 해방되어 자신만의 길을 걷다.
그에게는 김환기 선배와 이중섭(동갑이고 일본 동경 문화학원 동창)과 장욱진(1살 아래) 등과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크가 있었다. 홍익대 교수도 했지만, 그마저 그만두고 결국 모든 것에서 완전한 벗어난 자유인이 되었다.
위 사진 설명: 덕수궁 유영국 전시장 입구 2016.11.06 유장하면서 여백이 많고 세련된 색채에 미니멀한 요소가 가미되어 매우 모던하게 느껴진다. 그리스 이오니아식 기둥과 현대적 회화가 썩 잘 어울린다. 그런 면에서 고전과 현대는 통한다.
유영국이 없었다면 한국미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될 뻔했다
한국 20세기 미술사에 유영국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아마 한국현대미술사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유영국은 대부분 한국화가들이 하지 않는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믿었던 추상회화를 했다는 점이다. 그만의 독보적 길을 걸었던 것이다.
유영국은 근현대사의 격동기인 1916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났다. 그는 울진에서 큰 부자 유 부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이 동네 사람들 다 이 집 때문에 살았다. 경성제2보통학교 경복중고 그는 4학년 때 반장이 되었고 일본인 담임 1년간 동급생 중 문제가 있는 동급생 동향을 밀고하라는 요구했는 유영국이 이걸 받아들일 수 없죠 그래서 담임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학교를 자퇴하다. 그는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영혼 그는 이런 상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상선학교를 진학하려 했으나 입학 허락이 안 되고 그는 자유로운 삶의 구가할 수 있는 미술을 하겠다고 결심하다 입학에서 경계가 없는 일본에서 가장 진취적 학풍을 가진 문화학원에 입학하다. 별천지 즐거운 곳 국경에 없는 학교 외국인도 자유롭게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었다 군국주의 벗어나 자유로운 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학교였다. 이대학 창립자 이사쿠는 교육철학 확고했고 일본제국주의 거슬린다고 해서 징역 살이 할 정도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도쿄 문화학원에 입학한 후 처음 추상미술을 접하게 된다. 당대 전위적 예술 운동의 최전방이었던 추상미술의 대가 무라이 마사나리, 하세가와 사부로 등과 함께 자유미술가협회, 독립미술협회, 신조형예술그룹(Neo Beaux-Arts Group) 등 다양한 단체와의 교류를 시도하며 20세기 전반의 전위적인 당대 미술 경향이었던 초현실주의, 추상미술에 깊이 매료된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에 일제 대동아 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선언으로 강화된 군국주의 정책과 전위미술에 대한 탄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모색하던 유영국은, 경주 남산 불상을 소재로 한 사진 콜라주 연작을 시도한다. 새로운 예술적 기법뿐만 아니라 표현적 다변성을 고심하던 작가는 오리엔탈 사진학교(Oriental Photographer's School)에서 수학하며 사진을 통한 새로운 조형 질서를 탐구함과 동시에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 조형 요소를 중심으로 구축된 자연 추상이라는 자신만의 추상세계관을 설정한다. 태평양전쟁이 절정이었던 1943년에 귀국한 유영국은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기간 동안 고향인 울진에서 한 가족의 가장으로, 어부로, 그리고 양조장 경영인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작가는 틈틈이 작품을 제작하며 신사실파(1948, Sinsasilpa/New Realist Group), 모던 아트협회(1957), 현대작가초대전(1958), 신상회(新象會, 1962) 등 한국미술 단체를 두루 이끌며 생업과 작품활동을 힘겹게 지속했다.
2016년 유영국 탄생 100주년 전 오른쪽 그의 아드님유영국 화백의 아드님은 부친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아마 BTS가 되었을 것이라는 농담도 한다 유영국 덕수궁전 2016년 11월 6일 100주년
유영국, 1977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다. 그 후 심장박동기 착용 10여차례 심장 및 고관절 수술 후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다 번번히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신세 이런 와중 1994년 그의 최고작이 나온다. 그는 노인이 되어도 흥분이 더 필요하다며 "요즘 나는 그림 앞에서 팽팽한 긴장을 느낀다"라고 그린 작품이 바로 1994년 붉은 산, 푸른 산이다.
유영국 무한대 정신적 자유와 놀라운 조형적 아름다움과 에너지 넘치는 충격적 색채는 우리에게 영원한 선물로 남기다.
유영국 인간의 논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유를 점-선-면-형-색 등을 통해 기하학적 조형으로 변형시키다 유영국 건축적이고 디자인적인 요소가 풍부한 이 정도의 조형양식이라면 40-50년은 앞서 산 것 같다. 아래 1930대 작품인데 소실되어 그의 따님이 고증과 도판자료에 따라 다시 재현하다. 유영국 화백의 딸 유리지(Lizzy Yoo, 1945-2013) 교수는 금속공예가로 서울대 응용미술과, 템플대학원 졸업 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냈다.
유영국의 돈 철학 1) "돈은 살아가는데 수단이 되어야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돈이 없어도 그림을 못 그리지만, 돈이 너무 많아도 그림을 못 그린다."
[유영국 한국 미술계 생태계 균형감을 잡아주다] 이런 한국 미술계 교통정리한 후 1960년대에는 모든 미술계 조직활동을 내려놓다. 국전이 너무 보수화되자 1960년 '현대미술가 연합'을 만들고, 이 이전에도 1947년 김환기와 함께 '신사실파'에서 순수추상운동을 펼치다 이후 1950년 '50년 미술가 협회', 1957년 '모던아트협회' 등을 이끌었다.
삶의 에너지를 고조시키는 숭고한 상승미, 추상의 우주 속으로
나도 어려서 명랑하고 따뜻하기에 노란 색이 좋았다
유영국은 고된 산행을 하듯 끊임 없는 탐구와 창작열을 태웠던 그의 회화적 이상주의 그러나 이마저도 넘어서려는 절대주의의 경지로 가는 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산은 작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 안에 있다. 색채에서 산의 맥박과 호흡과 살결이 느껴진다.
이 작품 보면 조형(arts platiques/plastic arts)이란 단어 의미가 절로 이해돼
<유영국은 결국 산으로 돌아갔다 반면 김환기는 결국 점으로 돌아가다. 그 점은 별이 되고 그것은 화폭에서 거대한 빅뱅을 일으키다 구름이 스치는 하늘과 파도가 넘치는 바다가 만나 뒤섞여 새파아란 우주만물을 그려내다> 빅뱅 이론은 우리 우주가 138억년 전에 하나의 점에서 시작됐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였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모두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거나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전 우주가 하나였다.
유영국 부인은 아직도 생존하다 나이가 104세 아래 사진이 유화백의 부인(김기순 여사) 모습이다. 어제 국제갤러리 방문 전시회에 대해서 매우 만족했단다. 그런데 유화백이 그림을 그릴 때 엄마처럼 항상 옆에서 지켜봤다고 한다 남편에게 창작의 에너지를 불어넣은 것이다.
[유영국 한국 미술계 생태계 균형감을 잡아주다] 이런 한국 미술계 교통 정리한 후 1960년대에는 모든 미술계 조직활동을 내려놓다. 국전이 너무 보수화되자 1960년 '현대미술가 연합'을 만들고, 이 이전에도 1947년 김환기와 함께 '신사실파'에서 순수추상운동을 펼치다 이후 1950년 '50년 미술가 협회', 1957년 '모던아트협회' 등을 이끌었다./
유영국 건축적이고 디자인적인 요소가 풍부한 이 정도의 조형양식이라면 40-50년은 앞서 산 것 같다. 유영국 화백의 아드님은 부친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아마 BTS가 되었을 것이라는 농담도 한다 아래 1930대 작품인데 소실되어 그의 따님이 고증과 도판자료에 따라 다시 재현하다. 유영국 화백의 딸 유리지(Lizzy Yoo, 1945-2013) 교수는 금속공예가로 서울대 응용미술과, 템플대학원 졸업 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냈다./유영국 인간의 논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유를 점-선-면-형-색 등을 통해 기하학적 조형으로 변형시키다/<유영국은 당시에 드물게 그 어떤 구속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유영국 50년을 앞서 살다. 미래지향적이었다. 영원한 모던 보이였다. "그가 지금 살아있었으면 BTS가 되었을 것이다"(유영국 아들의 말). 그의 획기적인 컬러감각은 지금 우리시대와 맞는다. 그는 당시에는 아주 예외적 인간이었다. 특이한 점은 사업에서도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시대 중고시절 반장을 하면서 일본 담임이 학급에서 문제있는 학급원들 명단 적어내라고 하자 거부하고 졸업을 1년 앞두고 자퇴하다. 그러면 어떻게 일본 유학을 갔나? 고향을 떠나 서울에 유학 중국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다. 그는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 유영국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지지(포용과 개방)했다고 한다 (유영국 아들의 증언)/덕수궁 유영국 전시장 입구 2016.11.06 유장하면서 여백이 많고 세련된 색채에 미니멀한 요소가 가미되어 매우 모던하게 느껴진다. 그리스 이오니아식 기둥과 현대적 회화가 썩 잘 어울린다. 그런 면에서 고전과 현대는 통한다./유영국, 1977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다. 그 후 심장박동기 착용 10여차례 심장 및 고관절 수술 후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다 번번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신세 이런 와중 1994년 그의 최고작이 나온다. 그는 노인이 되어도 흥분이 더 필요하다며 "요즘 나는 그림 앞에서 팽팽한 긴장을 느낀다"라고" 그린 작품이 바로 1994년 붉은 산, 푸른 산이다./유영국 덕수궁전 2016년 11월 6일 100주년"한국사회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는 비현실적으로 느낄 정도로 탁월하다" -덕수궁 도록 글에서/[국제갤러리] 6월 9일 유영국 20주기 기념전 《Colors of Yoo Youngkuk》 개최 전시기간: 2022년 6월 9일(목)–8월 21일(일) 전시장소: 국제갤러리 K1, K2, K3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 유영국/유영국 경성(지금 서울)에 제2교보시절(경복고 전신) 졸업 1년을 앞두고 4학년 때 그는 반장이었는데 12월에 일본 담임은 반장에게 1년 동안 봐온 동급생 중 문제가 될 만한 (blacklist) 명단 제출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한다. 결국 일본 담임으로부터 엄청난 구타를 당하고 더 이상을 참지 못하고 자퇴를 했다. 부친이 이 사실을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식민시대란 한마디로 철저한 감시사회(동족끼리 상호감시체제, 백남준의 청소년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이고 그 차별과 탄압을 감당하기 힘들 시절였다. 그는 이런 일에도 어떻게 일본에 유학을 갔는지 물었더니 아드님 답변은 결국 중국계 다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이 부분은 그의 경력에 잘 나오지 않는다). 아래 그림은 분위기가 어둡다. 아마 청소년기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이후 그가 자유를 추구한 이유다./“색채란 써보면 참 재미있는 거요. 옆에 어떤 색을 가져와야 이 색도 살고, 또 이 색도 살고...또 그림이란 게 그래요. 음악의 경우와 심포니 같은 걸 들으면, 멜로디가 흐르다가 갑자기 ‘자자자 잔~’하지요. 그림도 이렇게 보는 사람에게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림은 시각예술이니까 입하고 귀하고는 상관없고, 그러니까 색은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색채는 균형과 하모니를 이루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주 세밀하게 계산을 해낼 수는 없지만...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영국/"그림이 안 팔리는 시대를 주로 살았지만 팔린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음으로써, 나는 하고 싶은 생각, 하고 싶은 일을 그만큼 한 셈이라는 생각도 한다. 안 팔리니까 빨리 그릴 필요도 없고, 지금과는 달리 물감이나 캔버스 등의 재료도 넉넉지 못한 시기가 많았으므로 많이 그릴 여유도 적었다. 그러니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 유영국. 오른쪽이 유영국 화백 아들의 뒤모습/유영국 말년에 작업하는 모습 건강이 악화되어 인공심장(심장박동기)을 달고 작업하다/천재 사업가 유영국,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 중 하나가 비즈니스다. 사업을 잘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창조다. 그는 미술에서 산 그림이라는 사업을 했다. 인간의 논리적 사고가 들어가는 기하학적 추상이었다./2016년 유영국 탄생 100주년 전 오른쪽 그의 아드님/유영국 20주기 기념전 《Colors of Yoo Youngkuk》은 산과 자연을 모티브로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절제된 조형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영국 작품만의 예술사적 의미를 조망하는 자리로, 국제갤러리 서울점 전관(K1, K2, K3)에 걸쳐 선보입니다. K1에서는 유영국의 대표작과 50년대 및 60년대 초중반 작품들을, K2에서는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완숙기'에 이르는 중후기 조형작들과 사진 및 드로잉, 아카이브 사료를, 그리고 K3에서는 기하학적 추상과 조형실험이 절정에 달했던 60년대 중후반 및 70년대 초기작을 조명합니다./Commemorating the 20th anniversary of Yoo Youngkuk’s death, 𝘊𝘰𝘭𝘰𝘳𝘴 𝘰𝘧 𝘠𝘰𝘰 𝘠𝘰𝘶𝘯𝘨𝘬𝘶𝘬 surveys Yoo's art historical legacy across all three of the gallery’s spaces (K1, K2, K3) in Seoul. This much anticipated exhibition highlights works that display the essence of the artist’s distilled formal aesthetic with his signature motifs of mountains and nature that are portrayed with vibrant primary colors and meticulously calculated geometric compositions. The K1 space centers on the artist’s representative works and works from the 1950s and early to mid-1960s, while the K2 space focuses on works painted from the 1970s to the 1990s—the mid- to later period of Yoo’s career when his exploration of basic formal elements had reached maturity—along with the artist’s series of photographs, drawings, and archives. Displayed across the K3 space are works produced from the mid- to late 1960s and early 1970s, which embody the artist’s commitment to geometric abstraction and formal experime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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