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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미술사

[전남대] 세미나 백남준 미디어론: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

<백남준과 30세기> 이에 대한 아주 쉬운 설명 사이트 https://nam-june-paik13.tistory.com/31

 

[백남준과 30세기] 이에 대한 알기 쉬운 설명

[백남준과 30세기] 이에 대한 알기 쉬운 설명 한국, 2번이나 새천년을 열었다. 자부심, 가져도 된다. 이제 3번째 새천년을 열어야 한다> -백남준과 30세기 첫번째 새천년 열다: 고려금속활자(쿠텐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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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확장과 융합> "내일은 아름다울 것이다" -백남준과 미디어론

전남대 문화대학원 20151016일과 23() 오후7-10시 아래 사진 백남준의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미대) 수업장면 1979 -도박-비행기표 미디어+靈媒(a spiritualistic medium) meditator(match maker) 산자와 죽은 자의 화해, 추천도서 Shamanism+Cyberspace Mina Cheon 천민정저 2009 MICA교수 [관련사진] 15020151016일 하나_백남준과 미디어와 광주 [1교시] 01

백남준 뒤셀도르프 미대 수업장면

<1> 1995년 광주: 인포 아트와 뉴미디어(신석기)

<2> 백남준·맥루한: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 04

<3>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 백남준의 시간론 07

_백남준은 왜 유명한가? [2교시] 08-14

<1> 백남준, 탈영토 제국주의자

<2> 93년 베니스비엔날레와 전자초고속도로 10

<3> 몽골코드: 굿, 미디어, 도약하는 원시적 생명력 12

_백남준 첫 전시: 세계미술계 빅뱅 [3교시] 15-21

<1> 비디오아트 탄생: 인터미디어혁명

<2> 랜덤액세스(서구근대주의 해체) 19

<3> 피드백 쌍방소통과 문화민주주의 21

20151023일 넷_[백남준의 대안아트 [4교시] 22-29

<1> 사이버네틱스와 TV연작

<2> 에로티시즘아트 24 <3> 위성아트(지구촌 TV코뮌) 27

<4> 백남준 오웰예언 뒤집기: 소통과 참여 28

<5> 레이저 아트(뉴미디어)[구겐하임전] 29

다섯_백남준 예술론과 플럭서스 [5교시] 30-34

<1> 폼 잡는 예술 교란시키는 사기론

<2> 유용성을 무력화하는 무상(無償)예술 31

<3> 파시즘에 반대하는 반애국주의 32

<4> '플럭서스'의 골자는 반예술주의 33

여섯_백남준이 미디어(아트)[6교시] 35-38

<1> 백남준이 미디어가 되는 사례(워크숍1)

<2> 백남준의 10대 작품 선정해보기(워크숍2) 36

<3> 백남준(세계적 국가브랜드) 활용하기(워크숍3) 37

[질문]: 미디어란 뭔가 [대답]: 미디어란 영매(靈媒, a spiritualistic medium or meditator 즉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시키는 것 소통시키는 것 끊어지다리잇고 또 잇고하는 peace maker 부모 사이에서는 자식이 매개자로 미디어역할을 한다 김형순(金炯淳): <백남준에 홀리다(360쪽 예정)> 출판사 작업 중 켄 저작권문제가 남아있다. 백남준 첫 전시 1963년에 있었는데 50주년인 2013년부터 오마이뉴스 3년간 백남준 연재기사를 묶은 것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지난 527일부터 74일까지 뉴욕에 가 백남준과 관련된 사람과 그 흔적과 장소를 따라 리서치하다.

[백남준 1교시] 백남준과 미디어와 광주<16> 2

<1> 1995년 광주: 인포 아트와 뉴미디어(신석기)

<2> 백남준·맥루한: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

<3>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 백남준 시간론

"예술가의 역할을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우리는 지금 백남준 은하계에서 살고 있다. 스마트폰 있어도 우리는 다 백남준의 후손이다.

백남준 29살 대 모습 한 시대를 앞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예언자(visionary artist)

-인상파는 자연이 주는 빛의 효과를 그렸다면, 미디어아트는 전자파가 주는 빛의 아름다움

-한국에서 1995년 이전 예술은 구석기 시대, 1995년 이후 예술은 신석기시대라면 어떨까

<1> 1995년 광주: 인포 아트와 뉴미디어(신석기)

질문: 백남준과 미디어아트와 광주는 어떤 인연이 있나?

김형: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첨단의 뉴미디어아트가 소개된 곳은 바로 광주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인포아트(백남준 기획)> 100(?) 달러가 들어간 이 아시아 초특급 전시(백남준이 개인 돈을 너무 투자해 빚을 많이 지다)는 누가 왔는가? 가상현실의 창시자인 '스콧 피셔'를 비롯해 컴퓨터 천재 7명과 인공지능(AI study)과 관련된 작품 그리고 서구에서 이름난 미디어 아티스트인 빌 비올라와 게리 힐, 누벨바그의 기수 장-뤽 고다르 등 42명의 비디오작품이 소개되었다. 전시기획은 백남준과 신시아 굿맨 등이 같이 했다. 신시아 굿맨은 큐레이터도 같이 이행했다. [신시아 굿맨 저서: 컴퓨터 예술의 세계 미진사 1994 190]

[1995년 인포아트전에 관련된 연합뉴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인포아트(INFO ART 정보아트전)이다. 10개국 50명의 작가가 참여해 42개의 비디오 작품 등 과학문명과 예술의 접목을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과 신시아 굿맨(IBM미술관장)이 함께 전시기획을 맡았다. 작품을 직접 만지는 방식(촉각)을 도입했다.

첨단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래생활의 총아인 쌍방향TV(최근에 상품화)와 가상현실, 멀티미디어, 인터넷 등을 활용한 작품이 대거 등장할 이 전시는 비디오위주로 꾸며졌던 종전의 수준을 뛰어넘어 세계 최대 규모의 <테크놀로지아트>가 선보인다.

전시는 3부로 구성, 1부는 작품과 관객의 소통을 도모하는 쌍방향 예술작품전이다. 가상현실을 발명해 이를 발전시킨 미국의 '스콧 피셔(Scott Fischer)''마이론 크루거(Myron W. Krueger)'를 비롯해 프랑스의 '에드몽 쿠쇼(Edmond Couchot)', 네덜란드의 '제프리 쇼(Jeffrey Shaw)' 25명이 참여했다. 관객이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다.

2부는 아시아의 비디오아트와 멀티미디어전이다. 백남준과 그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 한국의 박현기 씨와 홍콩의 엘렌 파우 등 아시아작가 18명이 출품한다. 3부는 미국과 유럽의 비디오 [03]예술 전으로 미국의 빌 비올라(Bill Viola)와 게리 힐(Gary Hill), 프랑스의 장-뤽 고다르(J.-L. Godard) 42명의 비디오작품이 진열된다.

질문: 당시 큐레이터를 맡으셨는데 그 특징에 대해 설명을?

김홍: "인포아트(Info Art 정보예술)는 지금은 하이-미디어아트라고 하죠. 전엔 '혼합 미디어(Mixed Media)'로 페인팅에 다른 것 넣는 것이지만, 지금은 전자기술이 들어간 '전자매체'라 그 차원이 다르죠. 정보, 소통, 컴퓨터기술이 다 합쳐진 그래서 멀티아트 이걸 '인터미디어(Inter Media)'라고 명명했죠. 그 해 월간미술 주최로 백남준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나온 '비빔밥아트'가 바로 멀티미디어 혹은 인터미디어예요. 그의 비디오아트에 춤, 공연, 영상, 사운드 등 별것이 다 들어 있잖아요"

김형: 백남준은 이 특별전에 뉴욕미술계 인맥을 총동원해 뉴욕현대미술관 진수를 보여주다. 당시 내로하는 유명 큐레이터와 작가를 광주로 불러들여 세계미술조류에 어두운 한국미술계의 견문을 넓혔다. 또 백남준은 김홍희 관장을 한국 큐레이터로, 미국 큐레이터로 신시아 굿맨을 지명했다. 현대미술에서 정보와 미디어를 얼마나 중요한지 한눈에 인식시켜줬다.

<1995년 백남준이 기획한 광주비엔날레 [인포아트]에 대한 대담>

*미술평론가 황인: 학부에서 공학을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다

황인: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의 테크놀로지아트는 왕 초보 수준이었죠. 오히려 당시 포털 '다움(Daum)'이란 회사가 처음 생겨 참가해 관객참여정보, 정지영상 인터넷 중계 등을 선보였고 그 후 그게 성장했다. 김형: 황인선생의 현장증언입니다. 황인: 인터랙티브는 여기서 이야기하는데 로봇공학에 많이 쓰이죠. 내가 대학원에서 회화도 했지만 학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ASTA(Art Science & Technology in Asia)라는 높은 수준의 인터랙티브 아트를 구현하려했으나 당시 국내미술계는 그 이해도는 낮았죠. 1회 국제학회가 2004년 일본 동경 대에서 있었고 학회결성은 늦어졌어요.

김형: 역시 공학을 공부한 미술전공자라 남다르군요. 황인: 1995년 백남준이 없었으면 광주비엔날레의 출발 자체가 안 되었죠. 김형: 백남준은 1992년 과천현대미술관,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순회전, 1995년 광주비엔날레 이게 다 시리즈처럼 한국미술의 현대화와 세계화에 힘썼죠. 이렇게 과로를 하시고 1996년 쓰려지셨죠. 정말 정부도 못하는 일을 한 개인작가가 한 것인데 이에 대한 보상이나 공로에 대해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한국미술계사람들이 전혀 모르거나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

황인: 한국미술은 축제만 좋아하지 공부를 안 하고 뒷감당을 못해요. 그래서 인포아트가 계승 발전되지 못했어요. 제가 테크놀로지아트를 하려 하니 너무 빠르다고 주변동료들이 말리더군요. 당장의 성공에 급급한 한국미술계의 행보가 거듭되니 발전이 없죠. 김형: 백남준은 선생이 한국미술을 비약적으로 점프(jump)시키려했으나 이를 감당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저 국내에서만 이름을 날리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가요.

[04] 황인: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 테크놀로지아트를 할 수 있어요. 한국은 모든 걸 유행으로 받아들이죠. 백남준도 유행상품처럼 취급되었죠. 김형: 핵심을 찌르네요. '센세이션니즘'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제 백남준 기사도 보면 백남준이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벗었다>는 기사의 검색 수는 정말 높죠. 황인: 꼭 공학적일 필요는 없어요. 공학에도 시대정신이 있어요. 그 정신을 읽고 해석 적용할 수만 있으면 돼요. 백남준이 구체적인 공학의 흐름은 몰랐지만 거시적은 시각은 항상 옳았어요. 21세기에도 백남준은 계속 유효하죠. 김형: 백남준은 올드미디어든 뉴미디어든 지금 봐도 너무 참신하고 현대적이죠.

백남준-광주 민주화운동에 관심 그러나 그 기원이 되는 고인돌(1995년 작)에 더 관심

백남준은 또 '인포아트'에 자신의 작품 '고인돌'을 직접 출품하다. 또한 그는 순천 등 이 지역의 고인돌(최초의 설치미술)에도 관심이 매우 높았다. 이곳 유적을 통해 선사시대 옛 선인들이 보여준 생활양식이 주는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든 '전자 비디오조각'이다. <사실 고인돌만큼 선사시대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자극을 주는 것도 없다>

백남준은 항상 시간과 공간의 구획을 허물고 하나로 엮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두었고 그것이 '비디오'라는 미디어를 통하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이 작품도 그런 측면을 보인다. 원시와 현대라는 시간적 차이와 선사시대의 삶의 방식과 현대의 삶의 상황과 같은 공간적 환경적 차이에도 어떻게 인류가 상호소통하면서 발전(진화)해 왔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2> 백남준·맥루한: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

"TV(미디어)는 생각하면 할수록 신석기가 생각난다" -백남준

질문: 미디어에서 확장이 중요한가?

김형: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모든 기술은 인간 기능(function)을 확장시킨다"라고 말했죠. 의복은 피부의 확장이고,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이고, 컴퓨터는 두뇌의 확장이고, 전기는 중추신경의 확장이다. 그래서 매체(미디어) 기술은 감각기능의 확장이다. 책은 눈의 확장, 라디오와 전화는 귀의 확장, 텔레비전과 영화는 눈과 귀의 확장이다. 책을 시각매체, 라디오를 청각매체, TV를 시청각 매체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겠죠.

그의 저서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

네티: [매체에 따라 인식방법이 다르다] 그렇다면 시각장애자와 청각장애자의 경우처럼 시각매체인 책으로만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과 청각매체인 라디오로만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마치 코끼리 인식에 있어서 시각장애자와 청각장애자의 차이를 보면, 시각에 의존하는 청각장애자의 코끼리상은 실제 모습과 비슷하겠지만 시각이 가려진채 청각과 촉각 등에만 의존하는 시각장애자의 코끼리상은 실제와 멀어진 모습이다.

질문: '미디어는 메시지다' & '미디어는 마사지'? -TV를 마사지하라

김형: 맥루한은 또 미디어는 메시지이고 마시지라고 했는데 이제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은

[05] 좋은 나쁘든 그 속에는 그 미디어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마사지라고 했는데 이제 미디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즐거운 마시지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불쾌한 마시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바람직한 미디어는 <엄마의 약손 같은 미디어> 아닌가 싶다.

이런 뉘앙스는 기계를 의인화해 인격과 인간성을 불어 넣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요즘 흔히 쓰는 '터치(마사지) '도 이런 개념에서 나왔으리라. 기계마저 예술이 된다면 그 세상은 분명 아름답다. 하긴 백남준은 이뿐만 아니라 TV로 새와 물고기와 정원도 만들었다.

질문: 맥루한은 미디어를 구분했나?

맥루: 매체 간에 놓여 있는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감각기관의 수에 따라 뜨거운(hot) 매체와 차가운(cool) 매체로 구분했다. 맥루한은 언어학자답게 히틀러를 독일영웅으로 만든 보다 집중적인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 산만한 TV'차가운 미디어'라고 명명하며 미디어를 분류했다. 또 그는 인류역사를 '구어문화·필사문화·인쇄문화·전자문화'로 구분하면서 전자시대에는 지구촌이 미디어로 하나의 부족이나 공동체가 되는 시대가 된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뜨거운 매체(Hot media)는 정보 전달량이 풍부하고 사용자의 낮은 참여 요구: 라디오, 영화, 서적, 사진, 신문, 잡지 그리고 차가운 매체(Cool media)는 정보 전달량이 부족하고 수용자의 높은 참여 요구 직관적, 감성적: 전화, TV, 만화 등등 Any hot medium allows of less participation than a cool one, as a lecture makes for less participation than a seminar, and a book for less than a dialogue. 김형: 이 구분이 애매모호하다.

질문: 비디오아트에서 미디어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나?

김형: 그것을 바로 네트워크겠죠.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인간과 우주의 연결> 같은 것 네트워킹은 인류가 같이 가야하는 공존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시간-공간 사이의 연결]

* 파스칼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공간 시간 인간>

질문: 인터미디어는 왜 융합미디어인가?

김홍: "음악이라는 것, 미술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 중복되어 만나는 <3의 영역> '인터미디어(융합)'의 성격이 있죠. '플럭서스(반예술운동)'도 그렇지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도 인터미디어다. 음악적인 요소와 시각적인 요소와 피아노와 TV같은 새로운 오브제아트 전시 포스터에서 보는 개념미술 등 다양한 매체가 고루 활용되었다 그래서 인터미디어다. 여기에 더 추가하면 백남준은 해프닝(몸이라는 미디어)에서 비디오(비디오라는 미디어)로 넘어갈 때 그 자체가 인터미디어죠. 매체만 행위()에서 TV나 전자비디오로 바뀐 거지 거기에 깔린 미학은 같아요. 뉴미디어에는 게다가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들어간다.

질문: 비디오아트에서 어떻게 회화를 할 수 있나?

- TV모니터에 전자선으로 그림을 그려 하나의 캔버스로 대체하는 시대

백남: 그 범위의 차이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비디오아트에서는 다 빈치처럼 정확한 그림, [06] 피카소처럼 자유로운 그림, 르누아르처럼 컬러풀한 그림, 몬드리안처럼 깊이 있는 그림,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성 넘치는 그림, 폴록처럼 격렬한 그림을 비디오그릇에 다 담을 수 있다. 그런 대상을 다 형상화할 수 있다"고 그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보기보다는 그 나름의 역할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회화라는 장르가 절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설] 비디오는 그릇이 커서 모든 회화의 장점을 다 담을 수 있다

질문: 백남준의 비빔밥회화가 현대회화에서 영향을 준 예는?

김형: 그 예가 바로 게르하르트다. 그는 나는 어떤 목표도, 체계도, 경향도, 강령도, 양식도,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일종의 융합이고 비빔밥정신이다. intermedia 혹은 multimedia이다. 그는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 게르하르트. 동독출신으로 사실주의와 팝아트 그리고 시대정신의 정수가 잡식과 혼탕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에게 사진, 회화, 추상, 구상 다 뒤죽박죽이다. 통섭, 융합, 하이브리드[fusion and hybrid]의 미술이다. 일관된 작업방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끝없는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작가다.

김형: [백남준 나는 TV(뉴미디어)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대상을 그리는 미술'을 구석기에 비유한다면 '소리를 보는 그리는 미술'은 신석기에 비유할 수도 있다. 백남준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상을 그리는 미술이 아니라 소리를 보는 미술을 추구한다. 공간에 시간을 들여와 제3의 예술이라고도 볼 수 있는 다원예술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음악과 소리가 TV로 시각화하면서 비디오아트로 탄생된다. 이런 발상은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선불교개념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It is not too difficult to justify Kant's music with Cage's philosophy" -Nam June. Paik

질문: 백남준을 미디어아트의 선각자로도 볼 수 있나?

진중: 흔히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이었다. 비디오를 넘어 로봇, 레이저, 인공위성 등 다양한 매체로 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미디어 아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온당할 게다. 실제로 미디어아트의 역사를 다룬 책은 최근 백남준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보다 먼저 워홀이 비디오를 사용했고, 그에 앞서 포스텔이 TV모니터를 설치했다. 퍼포먼스 위성중계 역시 백남준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남준처럼 미디어 자체를 주제로 삼아 철저하고 일관되게 미디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 아트의 아버지'는 역시 백남준이다.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그리고 20세기 전체를 뒤샹의 시대라 부른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백남준의 시대가 될 것이다. 대중은 카메라로 이미지를 복제하는 수준을 넘어, 컴퓨터로 이미지를 변조, 합성, 생성하고, UCC도 그렇고 어떤 의미에서 디지털의 대중은 모두 백남준의 후예다. [*보들레르의 소리 색채 음향(공감각) 미학을 백남준은 미디어아트로 구현]<한편의 논문>

백남준은 그의 전자아트에서 유럽성당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중세건축에서 스며드는 빛이 연출하는 짜릿한 전자 황홀경과 '색깔·소리·향기'의 언어에 '시각·청각·촉각'을 결합한 보들레르 시에서 융합의 미를 발견한 것인가. 다만 백남준은 그런 요소를 전자방식으로 바꿨다.

백남준과 보들레르의 같은 점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관점(비전)'에 있다. 보들레르의 제자 랭보는 이런 예술가를 '견자(見者)'라 했다. 반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보들레르가 반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상징적 '시적 비전'을 썼다면, 백남준은 경계를 허무는 반위계적이고 비선형적인 사이버화된 '전자 비전(Television)'을 썼다는 점이다.

<3> 비디오아트는 시간예술

[07]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근이다" -백남준 1991

질문: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을 쉽게 풀면?

"비디오아트는 시간개념 바뀌는 혁명이자 시공간의 궁극적 경계선을 탐색하는 유일한 예술이다" - 프레드릭 제임스(F. James 미국의 저명한 포스트모던평론가)

박만: 노스탤지어는 기존의 시간개념을 넘어 과거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과거에 이루지 못한 미래의 꿈과 비전을 제시하며 무한제곱의 원동력이 되게 하고 그것을 되새김질(피드백)하는 실천행위이다. 이것을 통해 과학·기술·철학 그리고 문화·예술이 융합하고 공존할 수 있는 차별화된 세계관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이 말은 더 적극적으로 보면 비디오를 통해 인간이 마치 조물주처럼 시간의 속도를 조정하거나 시간의 순서를 앞뒤로 뒤바꿀 수 있기에 인간이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가정이다.

백남준은 비디오테이프로 모든 걸 녹음하고 보존하면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이로써 인간이 신에게 도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 면에서 비디오아트는 기존의 시간개념을 바뀌는 혁명이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구별하고 인간이 시간을 조절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린다.

백남준은 시대에 따라 시간개념의 진화를 이런 순서로 봤다.

윤회부터 [...]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기

'인도의 시간개념-그리스의 시간개념-성서의 시간개념-뉴턴의 시간개념-베르그송의 시간개념-깁스의 시간개념-후설의 시간개념-하이데거의 시간개념-사르트르의 시간개념-케이지의 시간개념-위너의 시간개념-슈톡하우젠의 시간개념' 순으로 진화되었다고 봤다. 여러분의 시간관은

또 이런 말도 했다. 1950년 이전의 예술가들은 추상적 공간을 발견했고 1950년 이후의 비디오예술가들은 추상적 시간을 발견했다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면 몇 년(?)은 걸린다.

백남준은 1992년 자신을 동서 문명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작가 중 하나라고 평한 적이 있는 '오토 한(O. Hahn)'과 인터뷰에서" 비디오는 우리가 시간을 변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매체로 현재를 과거로 과거를 현재로 되돌릴 수 있다" 백남준은 그의 친구 '예를링에게 보낸 편지'(1962)에서 "내 작품은 그림도 조각도 아닌 단지 시간예술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했는데 결국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 비디오에 한번 찍히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백남준

그에게 영원을 손에 쥘 수 있는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이 평생 그의 화두였다.

[백남준 2교시] 백남준은 왜 유명한가?<16> 08

<1> 백남준은 탈영토 제국주의자

<2> 93년 베니스비엔날레와 전자초고속도로

<3> 몽골코드: 굿(셔면), 미디어, 도약하는 야생주의(원시주의)

<1> 백남준의 탈영토제국주의자

-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내가 바로 세계를 호령하는 문화제왕이다](30)

- <우리가 서구에서 만들어놓은 게임에서 이길 수 없으면 그 룰을 바꿔라>(60)

질문: 백남준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죠?

김홍: "백남준은 전설처럼 신화화 된 상태로 그 기행만 알려져 있지 그 밑에 깔려있는 의미가 어렵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모를 수도 있어요. 백남준을 센세이셔니즘으로만 보기에 그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한국에선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죠."

그러면 백남준은 천재이고 괴짜이고 기인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주는 영감은?

-신인류 노마드 탄생 예고 그리고 인터넷 시대 예고

그는 한국출신으로서 유일하게 열등감도 전혀 없는 열등감 제로 포인트 인간이었다. 당시에 한국에는 2대의 캐딜락이 있었는데 그 중 한대가 캐딜락을 타고 다니고 동대문 창신동 집이 3천 평이고 차 수리공이 10명이나 있고 남준의 부친인 백낙승씨는 한국 최초의 재벌로 일본의 니혼대 상과와 메이지대 법과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여권번호 6번이고, 백남준은 71920년대부터 1300여 대의 방직기를 갖춘 태창방직을 경영했고 홍콩과도 무역했다. 또한 그의 조부 백윤수씨는 당시 종로·동대문 일대 포목점 중 50~70%를 독점했고 조선말 왕실의 상복·제복 등을 도맡았다. 그런 것보다 경기중학교 다닐 때 일제강점기이고 사실 일본어로 된 것이지만 세계문학전집과 세계문화사와 세계사상사 등을 다 섭렵했다. [참고] 나는 유럽에서 배운 것 없다.

김훈: 모국어로 쓴 책을 어디까지 읽었나? 대답: 이태준, 정지용, 유진오, 한설야, 박태준, 김기림을 읽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매혹시킨 것은 단연코 정지용이었다. 정지용은 언어의 의미와 언어의 시각적 이미지를 모두 장악한 시인으로 저를 매혹시켰다. 그렇게 날카롭고 가파르고 또 시각화한 언어에 저는 매료되는 것이다. <결론 엄청난 독서가>

백남준의 위대한 점은 비디오아트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그걸 끝까지 밀어붙인 힘은 뭔가. 그런데 이런 것의 배경은 뭘까요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돈과 권력도 기술도 능력도 아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자존감(자부심)이다.

우열등감에서 나온 자존심이 아니라 긍지과 자부심에서 나온 진정한 자존감이다. 내 부족한 [09] 자존감을 백남준이 채워준다. 그는 나에게 진정한 에너지원이 되는 것이다. <1000년을 우려먹을 문화자본> 같은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우랄알타이부터 밀려서 몽골로 오고 또 밀려서 한반도로 오고 이 작은 한반도 반쪽이 되었고 식민지 분단을 경험하면서 한국인의 사고와 행동이 아주 편협해졌죠. 유치한 좌우 논쟁 지역차별들이 우리사회를 주도하고 있다.

한반도출신으로 백남준만한 인물이 있는가. 단군, 세종, 장영실, 이순신, 정약용 등등과 비교가 안 된다. 하지만 백남준도 스키타이 단군도 높이 평가했다.

질문: 당신은 어떤 예술가?

백남: 나는 세계적인 예술가이면서 세기의 예술가이다 이렇게 자신감 있게 말하는 백남준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의 잃어버린 자존감을 결핍된 자의의식 되찾고 싶다. <제국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백남준은 우리에게 탈영토 제국주의를 권한다. 백남준이야말로 단군 이래 세계를 호령한 문화적 칭기즈칸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호랑이였다. 백남준 I '호랑이는 살아 있다' DMZ 452000. 세종문화회관 1층 로비에 설치 한국은 21세기를 맞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당시 고갈된 백성들이 자존심을 이렇게 탄식했다

아아 우리 겨레여/마치 자루속에 같인것 같구나/삼면(三面)은 바다로 둘러 쌓이고/북방(北方)은 높은 산으로 가리웠으니/사지(四肢)는 항상 오므라들고 굽혀져서/기개(氣槪)와 뜻 어디에 편단 말인가/성현(聖賢)은 만리(萬里) 저 쪽에 있으련만/누가 능히 이 어둠을 열어주나/고개들어 세상 바라보니/견문(見聞)이 좁고 정()이 흐릿하구나/남의것 모방(模倣)하기에 급급하고/제것을 갈고 딲을 겨를이 없구나/백성들의 입안에 자갈을 물리고/어리석은 것 하나만을 받들게 하네/차라리 단군(檀君)때의/질박(質樸)한 고풍(古風)이 그립고나

이 사진을 보라 백남준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나 뒤로 단군이 보인다-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참가한 백남준

그의 자신감/베니스비엔날레에서 보여준/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자부심/그는 멜빵 패션/언제나 작업이 가능한 복장/해맑은 미소/천진의 얼굴/ 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그에게는 돈이 안 보인다/권력을 말할 것도 없고/명예도 우습다/단지 창조하는 자의 기쁨만을 즐긴다/그의 눈빛에는 경쟁자가 없다/앞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그는 랭보가 말하는 견자(Voyant)/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있다/3천 년대를 내다보고 있다/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3천 년대가 종종 나와서/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나는 불행하게도 그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하여간 이 사진을 보니/오늘 나의 맥 빠진 기운이 조금은 나아진다/내 기운을 살려주는 그의 기품이 멋지다/그는 정말 예술을 하는/보따리 노마드다

[도올 백남준 1992년 석도화론 중에서] "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게 없어.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가 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같았어. 그래서 다시 음악의 본고장 독일에 가서 보니깐 거기서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10] 질문: 미국의 저명 미술사가도 백남준 왜곡이 심하다?

이영: "몇 년 전 출간된 <20세기 현대미술>(로잘린 크라우스, 할 포스터 외) 책을 보면 다른 현대작가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백남준을 축소 왜곡하고 있어요. 백남준을 '플럭서스'(전위예술단체)의 한 멤버로만 봐요. 백남준의 해프닝아트 파트너인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케이지', '보이스',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등과 비교하면 백남준을 말이 안 될 정도로 다뤄지고 있어요. 시각 예술의 문맥에서만 보자면 백남준이 안 보이는 거죠. 음악계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고요.

질문: 백남준아트센터도 국립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영: 제가 보기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범위 안에 있다. 백남준 연구가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나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백남준은 초국가적인 장기프로젝트이다. 경기도 차원에서 지원하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예산이 들어가는 국립미술관 수준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김형: 사실 유럽은 터키도 포함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다 제국의 경험이 있다. 유럽에서 독일은 사실 이 경험이 미비하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미국보다 더 큰 항공모함을 만들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제국을 경험했고 그 이전에 몽골이 유럽까지 지배하는 제국을 경험했다.

백남준은 1993년 일본이 신화적 인물로 바꿔버린 스키타이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 보고 그에게 오마주를 보냈다 백남준은 기존의 기록역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진 자의 기록으로 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특이한 관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단군 시리즈 작품 중 하나 여기서 백남준은 탈영토 제국주의에 대한 열망이 유감없이 나타난다.

<2> 93년 베니스비엔날레와 전자초고속도로(뉴 실크로드)

데뷔 30년 만에 문화 칭기즈칸 되다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수상

"선사시대, 우랄알타이족의 사냥꾼인 우리는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핀란드)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몽골처럼 더 멀리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을 봤다."

이런 그의 이상을 예술로 이룩하다. 백남준은 1962"황색재앙(13세기 초 몽골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 받은 유럽인의 공포감)은 바로 나다"라며 세계를 호령하는 문화계의 칭기즈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바로 독일 첫 전시 30년 만에 세계최고의 미술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1993)에서 독일작가 '한스 헤케(H. Haacke)'와 함께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다 분단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백남준'은 남북만 아니라 세계의 '하나 됨'을 추구했다. '헤케'는 독일 나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촉구[11]했다. 한국출신의 백남준이 독일대표로 뽑힌 건 파격적인 일로 독일에서도 반대여론이 있었다. 역으로 그건, 백남준이 독일에서 영웅이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 상을 타면서 백남준은 "상을 타는 건 좋은 일이나 올림픽처럼 꼭 상을 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백남준은 2년 후 독일 <캐피털> 지가 발표한 미술가 중 세계 5위에 오를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한다.

수상작 제목은 '전자초고속도로'인데, 백남준은 '마샬 맥루한'처럼 '지구촌'을 주제로 삼았다. 동서가 미디어환경의 변화에 따라 교류와 소통을 통해서 서로 만나야 한다는 주제를 표현했다. 최초의 실크로드 개척자인 '마르코 폴로'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등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고비 사막부터 유목민의 이동수단인 말과 코끼리 등을 타고 가는 모습이다. 실크로드가 업그레이드되어 백남준은 <전자(정보)초고속도로>를 상상했다.

그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우주선을 타고 가는 한민족의 전설적 시조 '단군'이다. 그런데 이 단군 앞에 '스키타이 왕'이 붙어있다. 백남준은 스키타이를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했던 고대 유목기마집단으로 기원전 6세기 흑해북쪽에서 발원하여 기마의 스피드로 시베리아, 몽골고원, 한반도 남단까지 진출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보면 백남준은 단군을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이나 실증주의적 역사관으로 보지 않았다. 백남준은 국가(국경)의 개념을 넘어 북방계 기마민족 유목민계통으로 본 것이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백남준에게 주는 의미] 위 작품은 전자초고속도로 중 하나로 제목은 '칭기즈칸의 귀환'이다. 위성시대 전자아트를 상징하는 TV를 자전거에 싣고 백남준이 칭기즈칸이 되어 귀환하는 것 같다 정보는 너무 중요하기에, 동서는 계속 접촉해야 한다

아시아 중 유럽을 벌벌 떨게 한 나라는 중국의 황제가 아니라 몽골의 칭기즈칸이었다. 그런데 칭기즈칸의 후손을 자칭하는 백남준은, 그냥 정복자 칭기즈칸 아닌 하이테크의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 정치·경제보다 문화·예술이 진정 인류를 하나로 엮는데 최선책이라 생각이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인 '실크로드-전자초고속도로(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의 부제는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이다. 서울이 아니라 울란바토르를 붙인 건 백남준이 자신의 뿌리를 한반도로 국한시키지 않고 멀리 몽골로까지 확대해서 봤기 때문이다.

[사진] 영토시대에는 말이 가장 빠른 나라 몽골이 세계를 지배했지만(러시아 200년 지배) 탈영토시대에는 인터넷이 가장 빠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메시지인가. 이 작품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1995년 작품 백남준의 기마민족(Equestrian people) 아트선재소장

[결론: 쫄지 마라] 지금은 네트워크가 가장 빠른 인터넷을 가진 나라가 바로 21세기 제국이죠. 김대중 대통령이 이 부분을 성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넓은 땅이 아니라 빠른 말의 속도로... [12] 우랄알타이 시베리아 몽골 부 이후 깡그리 잃어버린 우리의 자존감을 되살리자.

<3> 몽골코드: 굿(샤먼), 미디어, 원시(야생)주의

김홍: 싸이가 생긴 것도 꼭 몽골 사람을 닮았지만 그 말춤이 기마민족의 어떤 상징성 가지고 있어요. 사실 '백남준문화재단'에서 지난 1 29일 추모행사를 열 때 싸이 공연 연결하려고 했어요. 백남준의 기마사상, 몽골코드를 싸이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2012 10, 영국 '텔레그래프' 지가 '강남스타일 영감의 원천은 백남준'이라고 보도했다.

[백남준 독일 아헨대학에서 자신이 몽골후손임을 증명하려고 몽골반점 퍼포먼스] 그래서 백남준 몽골을 좋아했다. 그는 몽골후손이라고 언제어디서나 자랑하고 다녔다 백남준이 몽골을 좋아한 또 다른 이유는 몽골이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도 지배하지 않고 연결(네트워킹)하는 방식이었기에 분란이 없었다. 몽골에서 아내가 남의 남자의 애를 배도 관대하게 여기는 풍속은 여기에서 시작, 그렇다면 우리는 백남준의 예술을 통해 탈영토 제국을 경험해보자.

이영: 1962년에 그런 말을 했을 때 그는 이미 '칭기즈칸'입니다. 그 해가 바로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이라 몽골에서 성대한 축제가 있었고, 독일에서는 그와 관련된 국제스포츠행사도 많았어요. 시사에 민감하던 백남준이 충분히 그걸 활용한 겁니다. 농담처럼 백남준이 말했지만 그것은 진담에 가깝다. 텃세가 판을 치던 인터내셔널리즘 시대의 국경을 넘나들며 글로벌 아트의 세상을 연 백남준은 지금부터 860년 전에 이미 최초의 글로벌 세상을 살았던 그 몽골리언의 세상으로 날아가 정보고속도로의 아이디어를 예술계로 끌어들인 겁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작은 눈보라를 일으키며 순간적 수면을 뒤흔드는 고래라고 여겨본 적이 있다 [...]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누구도 바다 깊이 잠수해 있는 나를 바라보지 못하며 따라서 누구에게도 조정 당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제 나는 비로소 심오하고 일관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궤적을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미솊 푸코 Two lectures

위에서 언급한 칭기즈칸의 한 "말에서 내려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라는 말을 백남준이 계승해 전자세계를 이용해 대륙을 잇는 위성아트를 한 거죠. 그는 언제나 외부를 향해 가정 멀리 떠나는 자였고, 내부로는 가장 먼 곳으로 잠수해 들어간 고래였어요. <고래처럼 가장 깊은 곳까지 잠수하고 위성처럼 가장 먼 곳까지 날아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상상하는 제왕이다라는 결론> 살아있는 암고래의 질 속으로 들어가라 <비디오아틑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 것이다.>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 1995] 5개 국어로 되어 있고 내용도 독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로제타 석에 백남준 예술론이 요약되어 있다. 백남준은 1995년 로제타석() 형식에 영어·프랑스어·독어·일본어·한국어 5개 국어로 자신의 예술의 골자가 담긴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라는 작품을 발표 그 중 독어와 불어로 쓴 일부를 소개하면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아-몽골리언 요소를 좋아한다(Ich mag das chaotische sibirisch- mongolische [독일어])"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몽골선조들은 이 노마드적 문화의 이름으로 내게 영감을 준다(Mes ancêtres mongols m'inspirent sans doute ce nomadisme culturel [프랑스어]"

[13] [몽골의 문화상징 굿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늘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 위한 예식이자 통과의례다. 삶이 피폐하거나 마음이 괴로울 때 같이 모여 고민을 집단적으로 푸는 것이다. 그래서 굿의 원형은 당연히 개인굿이 아니라 대동굿이다. 대동이란 말 그대로 크게 하나가 되는 것인데 요즘은 그런 것이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굿이란 미신이 아니며 일종의 사회적공공의 적을 추방시키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 아니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몸을 푸는 것(warming-up)이다.

[비디오아트도 일종의 강신굿] 그의 예술은 한 판의 강신무와 같다. 백남준은 미술가보다는 생활이나 존재 자체에서 저절로 예술이 우러나오는 놀이꾼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그래서 백남준 예술은 굿으로 볼 수 있다.

굿은 현대적 개념으로 보면 퍼포먼스와 설치의 결합이다. 그리고 그의 비디오아트는 일종의 '비디오 굿'으로 볼 수 있다. 음악에서 미술로, 미술에서 행위예술(퍼포먼스), 행위예술에서 비디오아트로 전전한 그에게 비디오는 '굿'을 전달하는 매체일 뿐이다.

[백남준의 (전자)굿은 1) 지구촌 위성굿과 2) 친구 추모굿 3) 퍼포먼스 굿 등 다양] 서구인들이 독점한 판을 깨고 세계인과 나누는 새로운 판짜기 쉽게 말해 문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새로운 세계질서를 개편하는 것이다 질문: 굿이란 뭔가? 김형: 굿이란 남이 주어진 판을 깨고 자신이 스스로 판을 이루는 과정인데 그 시대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들 예컨대 독재, 독점, 독선, 독단의 논리를 휘두르는 세력을 작살내는 것이다.

[샤머니즘 가장 수평적인 종교이자 무자본주의적 종교다]

"몽골은 정복했지만 소유하지 않았다" -<칭기즈칸법전>. 물론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박정진 교수의 말처럼 샤머니즘은 그런 면에서 예술인류학을 제창한 인간종교의 원형이다.

샤머니즘은 이렇게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을 통합하고 모든 종교와 예술의 융합시킨다. 신통은 바로 돈에서 자유로울 때 나온다. 몽골은 이슬람교 기독교 유교 고등종교까지도 샤머니즘 아래에 두었다. 모든 종교를 포용했다. 그래서 탱그리(하늘 푸른 하늘 영원한 하늘 경천애인)가 발생하는 것이다.

질문: 굿과 미디어는 관련이 있나?

형순: 우리 굿에서는 무당이 산자와 죽은 자마저도 소통, 세상에 이렇게 원활할 '미디어'가 어디 있는가. 백남준은 "굿의 어원은 '' 즉 정신자체이니 미디어와 굿은 같은 말이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그의 예술은 몽골전승의 굿과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고, 전자시대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라는 해석이다. 백남준에게 '미디어'란 중세개념으로 신과 교류하는 '매개체(meditator)' 혹은 '영매(靈媒(a spiritualistic medium) meditator 산자와 죽은 자의 만남과 화해)'를 뜻한다. 다시 말해 굿과 샤머니즘, 미디어와 퍼포먼스는 서로 같다는 설명이다.

[14] 질문: 당신은 왜 극단적인가?

대답: 나의 몽골유전자 때문이야. 몽골사람들 선사시대에 우랄알타이 쪽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라드(스칸디나비아 북부 핀란드 포함)까지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들은 농사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 바로 봤다. 그들은 언제 더 먼 곳을 보러 떠나야만 했다. 여기서부터는 간단한 해석 <더 먼 곳을 보다>를 영어로 고치면 <텔레비전(TELE-vision)>이 되죠.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중남미 페루가 나와요. 우리와 페루가 관계가 있다는 소리인데요. 하여간 그렇고 또 북구 라플란드도 나온다.

질문: 당신은 왜 몽골을 좋아하는가?

대답: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사람들하고 우리들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3천 년 전 우리 것을 몽골사람들이 보존하고 있어요. 난 공자, 노자, 이런 사람들 이전의 사람들을 좋아해요. 신석기시대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역사가 엉터리야. 대부분 일고 생각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뿐. <백남준은 기록역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질문: 몽골하면 굿(샤머니즘)과 연결하지 않을 수 없죠?

김형: 백남준은 말하기를, 그의 어머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했다. 물론 백남준 자신은 어머니처럼 샤머니즘을 종교로 믿는 건 아니나 샤머니즘에서 예술적인 영감의 소재로 끌어와 샤머니즘을 예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백남준 5주기에 열린 최재영의 백남준 굿 사진전을 보면 피아노는 걷어차고 요강으로 연주하는 백남준 피아노굿으로 가장 한국적 미를 연출한 백남준 귀신세력과 신명세력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은 신명의 기운 귀신의 위세를 누린다는 것이 또한 굿의 정신이다. 다시 말해서 기의 주도권을 되찾는 것인데 그러나 굿의 본정신은 이미 많이 사라졌고 박제화되었다. 일본강점기와 일부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그 본질이 축소·왜곡·훼손되었다.

<백남준 피 속에 흐르는 몽골코드: 샤머니즘과 미디어 네트워킹>

- 기술에는 야생성이 없고+주술에는 과학성이 없고+융합의 축제 예술(네트워킹) 31

선사시대에는 예술(art)에서 주술(magic)이 들어갔지만 21세기에는 예술(art)에서 주술 되신 기술(technology)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백남준이다. 다시 요약하면 과거에는 예술과 주술이 현재는 예술과 기술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현대미술에서도 여전히 굿 같은 주술적인 요소가 그 강력한 생명력 때문에 많이 남아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또 이렇게 말했단다.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거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그리고서 백남준은 야생적 사고와 원시적 생명력 결핍이 현대인의 비극은 낳는다고 봤고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레비스트로스와 같은 맥락이다.

[백남준 3교시] _백남준 첫 전시: 세계미술계 빅뱅<16> 15

<1> 비디오아트 탄생: 인터미디어혁명

<2> 랜덤액세스(서구근대주의 해체)

<3> 피드백 소통과 문화민주주의

<1> 비디오아트 탄생: 인터미디어혁명

백남준의 인터미디어 시도는 사실 첫 전시에서부터 시작됐다. 제목도 특이하다. 1963년 만 31살 때 '음악의 전시(Exposition of Music)'이다.

질문: 그렇다면 비디오아트는 음악과 관련이 깊은가요?

음악을 전공한 백남준이 전시제목을 '음악의 전시(Exposition of Music:음악의 가시화, 시각화)'라고 한 건 그렇다 하더라도 미술에 음악을 도입한 도발적인 시도는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바뀐 것만큼 세계미술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7년간 이를 악물고 준비 때로는 비싼 TV사느라 점심도 굶어가면서...

박만: 악기의 연장으로 소리를 시각화한 백남준의 TV아트, 이건 결국 영상, 소리, 리듬감을 시각화하면서 사운드와 비주얼을 통합하는 방식이다. 기존 영화방식이나 영상과는 전혀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제3의 탁월한 리듬감과 템포감을 발굴한 거죠. 그런 면에서 비디오아트는 음악전공자가 아니면 하기 힘든 장르다.

시공간을 넘어 음악이 미술이 되는 전시 융합 그의 첫 전시제목이 <음악의 전시회_전자 텔레비전>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그의 첫 전시에는 가관인 4대의 '총체 피아노' 13개의 실험TV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소통과 대화가 가능한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뿔, 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그는 기존음악에 만족하지 않고 피아노와 피아노 사이의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없을까 고민했다. 작곡된 걸 연주하는 게 아니라 연주하다 작곡이 되는 '랜덤액세스' 방식의 '무조음악'을 추구했다. 그런 창작과정에서 유발되는 우연성, 비선형, 비위계성도 중요함을 암시한다. 음악에서 미술로 왕래하는 인터미디어 혹은 융합아트고요

[16] 첫 전시은 서구미술계에 소리 소문 없이 떨어진 원자폭탄이다. 그 소리가 크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무기는 쌍방형이 가능한 전자TV 조작하기, 피아노 부수기, 뉴미디어 아트, 랜덤액세스라는 기발한 방식이다

질문 : 백남준 첫 전시는?

김형: 백남준이 독일에서 단단한 각오로 7년 준비(그 중 3년은 전자공학공부 독일:2년 일본:1)한 첫 전시회가 1963년 부퍼탈에서 열렸을 때 그 의도는 예사롭지 않다. 베를린공대에서 강연도 들었고 일본에서 운 좋게 미국인보다 트랜지스터 원리를 2년 앞서 발견한 전자공학자 '우치다 히데오'와 백남준과 함께 비디오합성기를 발명한 '슈아 아베'를 만나 전자아트에 도움을 받는다.

질문:  TV로 아트를?

백남: 처음에 나는 작곡가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미학자이자 산문가였죠. 그리고 행위예술을 했지만 배우는 아니었어요. 한 번도 배우수업을 받아 본 적이 없죠. 나는 심지어 수줍음을 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TV를 연구했죠. TV는 영화가나 화가의 분야이지만 사실 난 이 분야에 흥미가 없었고 자격도 없어요.

"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고 싶었던 것예요. 그는 테크놀로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우습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그걸 인간화했다" -독일평론가. "자유롭고 거침없고 천진난만한 남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즐거운 저항과 도발을 놀이로 삼는 작가였다" -이어령

[청각과 시각을 통합] 김형: 백남준은 서양의 이항대립적(이원론) 사고보다는 물아일체 같은 동양의 일원론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겠죠. 동양에서 음양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듯 그에게는 음악과 미술이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런 면에서 음악전공자인 백남준이 시각예술가가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다.

그의 전시개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데서 왔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리(sound)가 시각(sight)이 되는 '사운드아트'가 나온다. 기존의 시각중심을 넘어 오감이 총동원된 즐거운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실험예술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이런 개념은 다원예술[사방팔방으로 통하는 예술]과도 통한다.

[예로 그의 첫 대학수업] 김형: 백남준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제자를 존중한 그가 일방적 수업을 할 리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학생과 공동으로 현대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원시적 생명력을 되살리는 해프닝아트에 '()'을 가미한 수업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원조 격인 1968년 샤먼과 함께 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도 이번에 선보이지만 10년 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보다 25살이 어린 같은 대학 제자 '자니스 거이'와 함께 백남준이 피아노를 치면 '누드비너스'가 음에 맞춰 몸을 변주하는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오감을 최대로 확장시키며 뒤틀린 우리 내면을 풀어주는 걸작이다.

[17] 이런 작품을 백남준이 교수가 되기 전부터 무척하고 싶었지만 모델료가 너무 비싸 못 하다가 드디어 수업시간을 통해 천지인이 하나이듯 자연과 인간과 음악이 하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 그의 제자 '이보 데코빅'이 이 퍼포먼스를 영상에 담았다.

<비디오 비너스> 뒤셀도르프 대학 첫 수업장면 1978

참여TV는 쌍방형을 말하나] 당시 첨단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미디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의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더 중요하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동안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품으로 계속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TV에 회화그리기가 가능한가] 피아노를 대신할 악기로 도입한 TV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전자펜의 기원이죠>

[멀티미디어 혹은 인터미디어 총체적 전시] 백남준은 작가만 아니라 포스터도 직접 제작하는 그래픽디자이너로 전시장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큐레이터로,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전시를 총괄하는 기획자로 또한 개념미술가로 그 몫도 다 했다.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큐레이터로서 백남준'에 대한 재평가 붐이 일어나고 있단다.

백남준의 첫 전시서문은 그가 존경하는 피에르 빌헬름이 썼다. 첫 구절은 "이번 전시가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는 시적 언어로 시작한다. 이는 서로 불협화음과 충동을 일으킬 것 같은 미술과 음악과 TV 등을 융합해 시공간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매체예술이 탄생된 것으로 본 것 같다.

[근대주의의 해체와 추방] 백남준의 친구인 요셉 보이스는 전시 개막 1시간 뒤 나타나 그 피아노 중 한 대를 마치 어떤 표적물을 정확하게 강타하듯 그렇게 박살을 냈다. 보이스는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고 피아노를 부수면 행위예술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리라.

[18] 이 괴상한 전시를 서구백인중심의 헤게모니를 흔드는 '빅뱅'이나 세계미술계에 소리 소문 없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적이다. 백남준의 이런 저런 의도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범죄' 같다. 백남준도 "예술이 고등사기라면, 비디오아트는 5차원 사기다"라는 하지 않았나.

이렇게 전단지 하나 만드는 방식도 기존의 방식을 교란시키고 당황하게 하는 것으로, 그 아이디어가 자신의 정치성이 들통 나지 않게 하고 그가 염두에 두었던 정치적 메타포와 의도가 뭔지를 후대에야 깨닫게 되는 고단수였다. 소대리(아래)가 서구인의 기를 죽이다.

또 욕조에 뮤즈를 훼손시켰고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포스터에서 대문자로 강조한 알파벳만 따오면 '추방(EXPEL)'[근대추방]이 되는데 그 뜻은 불분명하다. 냉전과 이념대결을 추방하자는 건지 아니면 서양미술을 추방한다는 뜻인지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독일인 겁주기, 데미안 허스트도 백남준에 비하면 아주 하급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내건 건, 백남준이 셔먼아티스트로서 한국의 터주대감[대감놀이]을 이곳에 모셔와 텃세부리는 서양인의 기를 꺾고 같이 놀자고 한 것인가. 하여간 소머리에서 냄새가 진동하자 전시가 시작되기 3일 전 독일경찰이 출동해 이를 제거하게 된다. 독일엔 두개골동물은 지하 1m에 묻어야 하는 법이 있단다.

19세기 과학혁명으로 유럽이 산업화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원 확보와 인력이 필요해지자 식민개척과 제국주의에로 박차를 가한다. 거기서 얻은 이득으로 호사와 권력을 누릴 때 랭보는 그들 제국주의자를 향해 야만의 문화라고 선포하며 아프리카로 떠났다. 백남준의 포스터에 적힌 '추방'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는 바로 그렇다.

다시 재현하기 힘든 전시 백남준의 첫 전시는 이처럼 뒤샹의 반미술과 쇤베르크의 반음악을 합친 것 같다. 당시로는 유례가 없고 상상하기 힘든 전시였다. 특히 흥미로운 건 갤러리입구의 정원과 현관, 화장실 욕조와 지하실까지도 총체적 전시공간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동서를 넘어 랭보와 백남준은 시대의 우상파괴자라는 면에서 같다. 서구문명을 비판하는데 서구인이 아닌 동양인이 시도한 건 드문 일이지만 백남준은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 등을 부수고, 서구적 가치를 뒤흔들고 서구문명을 희화시키면서 'TV아트'라는 새로운 예술로 이원론에 갇힌 그들의 난제를 풀어보려고 했나보다.

백남준은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이라고 했는데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를 부순 것도 그렇고, 위에서 보듯 서양뮤즈가 욕조 속에서 양 팔다리가 잘린 채 있는 장면도 그렇고, 이런 이미지는 서양미술숭배에 대한 파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긴 이 세상에 버려야 할 편견과 독선과 아집이 잘못된 우월감 등이 얼마나 많은가.

<2> 랜덤액세스(서구근대주의 해체)

[19] -백남준 미학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자 무기

-뒤통수를 치는 도깨비장난 같은 예측불허의 방식

-"서양이 만든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룰을 바꿔라"

첫 전시 작품 중 [랜덤액세스(작곡하기)]가 있다 유명하다 가장 그다운 작품이다. 막대꼬치에 꽂혀 있는 레코드를 관객이 즉석에서 마음대로 골라 변형해 작곡할 수 있는 방식이다. 관객이 전시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으로 이 말은 롤랑 바르트가 1968 <저자의 죽음>에서 한 "독자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총괄] 작가만이 아니라 관객도 참여하는 예측불허의 게릴라 방식으로 서구인들이 만든 근대라는 이분법적 위계를 깨고 차별과 소외가 없는 세상을 이루는 예술적 무기 같은 것이다. 왜 그는 이런 방식을 취했는가. 그는 소통이 없는 숨 막히는 세상과 가치가 하나밖에 없는 답답한 세상에 구멍을 내고 싶어 했다.

가장 창조적 순간은 바로 그 직전에 무질서와 혼란 속 파괴의 틈새를 파고드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유럽에서는 통한 것은 나치즘의 악몽 이후에 나왔기 쇤베르크의 12음기법,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프로이트의 무의식세계, 아르토의 잔혹극 등도 같은 맥락이다.

김형: 랜덤액세스(Random Access 비순차적 접근, 임의접속)는 일종의 카오스이론 비슷하다고 할까요. 작가가 정한 어떤 규칙이나 각본을 정하는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과 비위계성을 기반으로 삶과 우주를 아우르는 다의적 개념이다 현실을 비틀어 삶에 충격을 주는 방식이 특징이다. 현실을 비틀어 삶에 충격을 주거나 우연성을 기반으로 삶과 우주를 아우르는 다의적 개념이다. 반예술보다 무위예술(anart)에 가깝다.

질문: 랜덤액세스 우리 주변에서 예를 들면?

김형: 도깨비장난 같은 것으로 <엇박자> 김수자의 <보자기> 같은 것 는 현대예술의 개념어로 백남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일종의 흔들기 내지 어지럽게 만들고, 순차적인 것을 뒤죽박죽 만드는 것이다. 무질서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은 체계가 있다. 동양엔 이미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와 같은 랜덤액세스가 있다

[전문가해설] 질문: 백남준 미학의 핵심이 되는 '랜덤액세스'가 뭔가요?

김홍: 총알처럼 이분법적 위계를 깨는 '랜덤액세스' 서구의 합리주의-이분법적 위계 죽이는 총이다. 랜덤액세스이라는 백남준 작품은 기존의 전제주의나 획일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어요. 동서의 이분법, 장르적 이분법, 남녀의 이분법,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 등 모든 이분법을 깨는 게 바로 비선형 다시 말해 비디오가 TV의 일방적인 걸 쌍방적으로 바꾸는 방식이죠. 그렇게 이분법적인 위계를 총알처럼 깨는 데 최고 무기가 바로 '랜덤액세스'예요.

[20] 백남준의 이런 시도는 사실 첫 전시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기존음악에 만족하지 않고 피아노와 피아노 사이의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없을까 고민했다. 작곡된 걸 연주하는 게 아니라 연주하다 작곡이 되는 '랜덤액세스' 방식의 '무조음악'을 추구했다. 창작에서 그 과정과 거기서 유발되는 우연성도 중요함을 암시한다.

이영: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어떨까요. 흔히 '랜덤액세스'는 무작위의 접속을 말하는데 이제 누구나 그것을 하고 사는 인터넷 세상이 왔잖아요. 미리 준비한 게 아니라 우연히 떠오르는 걸 반복하며 사는 거죠. 언제 어디서 어떤 이와 어떤 일로 어떻게 만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예술을 하려면 그런 비상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라 봐요. 선불교의 화두집에 온통 그런 이야기가 가득하고요. 백남준이 남긴 드로잉 가운데 '삼계무법[벽암록 37칙 반산화상의 삼계(三界) 무법(無法) 마음이 곧 부처, 부처가 곧 사람]'이 그런 내용입니다."

박만: 그렇죠. 백남준에게 있어 '랜덤액세스'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1963년 첫 전시에서 나온 건데요. 랜덤액세스 즉 '임의접속' 언제 어디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시공간 넘어서잖아요. 지금 다 어디에서 와이파이가 터지면 다 접속이 되는 '유비쿼터스' 세상이잖아요. 커뮤니케이션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게 가능해진 겁니다. 과학적 측면만 아니라 인문적, 문화사적 차원이나 현대소통이론에서도 그렇고 모든 아트 커뮤니케이션의 분기점이 되는 건 바로 정보에 있어 '제공자'만이 아니라 오늘날 당연히 여기지만 '수용자'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거죠.

수용자의 공간 참여, 신체개입이 현대미술을 전환시키는 축이잖아요. 더 이상 미술이 객관적 관조의 대상 아닌 거예요. 이건 결국 환경미술이나 설치미술과도 연결되는데, 환경미술은 여기서 '감상자의 신체를 에워싼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뜻합니다.

문화사로 보면 비디오아트도 백남준 천재가 그냥 태어나는 것 어디 있어요. 주변 지적토양을 빨리 흡수할 수 있었고, 1963년 당시 <누벨바그> 영화가 나오면서 '장 뤽 고다르' '카메라의 만년필화' 그래서 결국 수용자가 'UCC'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와야 영화가 돈과 자본과 권력이 조작되지 않는 진정한 인간 해방적 소통매체가 된다는 것. 이게 다 백남준과 같은 문맥입니다. 결국은 수용자의 참여가 관건이지요."

"책은 랜덤액세스가 가능한 정보의 가장 오래된 형태" -백남준

-뉴욕도 랜덤액세스한 도시다

질문: 뉴욕이 왜 좋아요? 대답: 더러우니까 좋지. 범죄가 많고(백남준은 정말 뉴욕체질) 자동차가 점령하고 쓰레기통으로 넘치는 소음도 만만치 않은 뉴욕의 거리 그런데 그 보이지 않은 구석진 곳에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이가 있다. 그들이 바로 [구글-페북-아이폰-유튜브-트위터]가 그렇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21] 질문: 뉴욕에서 1등 하려면 어떻게? 백남: 뉴욕 같은 1급 예술도시에서는 누가 뭘 조금 더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남이 하지 않는 뭔가 색다른 것을 해야 한다 질문: 그러면 당신의 차별화정책은? 백남: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은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각 피아노의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하였다

<3> 쌍방형 피드백 소통과 문화민주주의

-TV는 이제 독재자가 아니라 문명을 풍자하는 비평가다

질문: 민주주의가 뭔가? 백남: "말대꾸하는 거야"(촌철살인)

쌍방형 소통방식을 강조 문화민주주의자 백남준의 요즘말로 댓글 다른 말로 피드백의 혁명이다. 소리 없는 혁명이다. '상호작용(interactive)'하는 예술을 추구했고, 이게 결국 60년대엔 <참여TV>, 70년대엔 신디사이저로 편집한 <비디오아트>, 80년대엔 생중계한 <위성아트>로 진화된다.

미디어는 맥루한 말대로 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키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페북, 트윗, 유큐브, 블로그> 등등 지금은 분명 <피드백 혁명시대>. 쉽게 말하면 <말대꾸를 할 수 있는> 시대 댓글은 바로 그 한 가운데 있다 댓글은 아슬아슬한 한국민주주의를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처럼 보인다. 이것을 쉽게 손댈 수가 없다. 거꾸로 댓글을 보수든 진보든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그만큼 파급력이 크다는 소리다. 국정원 사건이 그 예이다.

TV전시가 어떻게 비디오아트의 기원이 되냐는 사람도 있지만 모니터로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1963년을 비디오아트의 시발점이라 해도 좋으리라. 비디오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적 사고다.

[백남준 작가중심(수직적 전시)에서 관객중심(수평적 전시)로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꿨다] 그리고 마침내 '대중예술가'시대, '문화민주주의'시대를 연 셈이다. '랜덤액세스'란 이처럼 작가가 정한 어떤 규칙이나 각본을 정하는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과 비위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 된다. 예술가는 철학이 있는 엔터테이너이다,

백남: "TV라는 게 낙하산식으로 하는 독재자 방식이니 가관이야. 윗사람이 얘기하고, 아랫사람이 예 하고 듣는 게 TV이거든. 뭐 동서양을 막론해서, 근데 대답하는 게, 말대꾸하는 게 민주주의야. TV은 여태껏 말대꾸를 못했잖아" 일방적 소통과 쌍방적 소통의 차이를 TV와 위성의 차이를 통해 설명하면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다.

[백남준 4교시] 백남준 대안아트: 비디오·위성·레이저<23> 22

<1> 사이버네틱스와 TV연작

<2> 에로티시즘 아트 <3> 위성아트(지구촌)

<4> 백남준 오웰예언 뒤집기: 소통과 참여

<5> 구겐하임전 레이저 아트(뉴미디어)

백남준은 기존의 예술과 다른 TV아트를 첫 전시에서 선보였고 서양미술계에 빅뱅을 일으키다. 이것은 그 이후에서 대안아트로 발전해서 1 비디오아트(시간을 넘어서는 사이버네틱스)와 몸 철학을 근거한 에로티시즘 아트, 2 위성아트(지구촌 경계를 넘어서는 예술TV코민 그리고 글로벌 그루브 굿모닝 미스터 오웰) 3 레이저아트(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넘어서는 예술) 구겐하임 회고전 등으로 진화한다.

<1> 비디오아트(사이버네틱스) TV연작

[유럽문명 전반에 대한 실망하고 그 대안아트 창안]

질문: 유럽의 첫인상은?

백남: 난 유럽에 가서 보고 음악이나 미술 수준에 관하여 매우 실망을 느꼈다. 내가 가서 본 르네상스 이후의 위대한 실물들이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 그러나 거대한 사원에 들어가서는 좀 위압감을 느꼈다.

그 위압감의 본질이 고딕의 하늘을 찌르는 듯한 공간 처리에도 있겠지만 난 무엇보다도 스테인드글라스의 신비로움에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벽에 건 그림과는 달리 빛이 투과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빛이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저 건너 바깥에 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빛 때문에 인포메이션이 생겨난다. 그래서 난 그걸 좋아했고 그것을 내 아트로 옮겨보았다. 드디어 비디오아트라는 신대륙을 발견하다.

[새로운 과학적 대안, 사이버테닉스] 기계마저도 예술이 되는 시대는 아름다운 세상을 추구

'사이버화된 세대(Cybernated Generation)'라는 제목이 붙은 1965 4 2일 타임지표지. 그 부제가 '컴퓨터사회(The Computer in Society)'다 당시 '사이버네틱스'가 대유행하다

질문: 사이버네틱스는 새로운 과학질서체계인가?

백남: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진공관 안에서 양극과 음극 사이에 그리드(전극)를 첨가시켰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불교적 '3의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독일인의 이 발견은 지난 대전에서 영국 상공의 독일전투기를 격추시키게 한 <사이버네틱스>를 탄생시켰다. 불교에서는 또한 업은 윤회 관계는 영혼의 재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열린회로 안에 있는 것이다.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P288"

[22] 이런 개념은 정보화시대 여러 면에서 새로운 사유의 촉진제가 되어 정치, 사회, 철학, 예술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사이버네틱스와 예술을 처음으로 연결하려 한 이 분야의 이론가이자 작가인 '로이 애스코트(Roy Ascott 1934-)'는 백남준이 1966년에 선언한 '사이버화된 예술(Cybernated Art)'을 뉴미디어아트의 시작이라고 봤다.

https://en.wikipedia.org/wiki/Roy_Ascott

질문: 새로운 관계? 백남: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앙카레는 새로운 <무엇>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 시대라고 했는데 나는 이에 동의한다. 새로운 관계=새로운 연결=새로운 네트워킹 뒤집어엎는 것이 백남준의 악취미 다시 말해 코페르니스적인 전환을 요구하다. "서구가 만든 법칙이 안 맞으면 새로운 룰을 만들어라"

[TV연작] 1) TV정원 2) TV부처 3) 달은 가장 오래된 달TV

-TV에 생명을 불어넣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하나, 'TV정원' 인간과 자연과 기술의 공존

질문 : TV정원을 만든 이유는? 대답 : 하이테크만 강조하면 전쟁이 난다 어머니 품 같은 자연과 함께 할 때 완전해진다 인간과 자연과 기술의 공존하는 인간적 삶이다 Our life is half natural and half technological. Half and half is good. You cannot deny that high tech is progress. We need it for jobs. Yet if you make only hightech, you make war. So we must have a strong human element to keep modesty and natural life.

, 'TV부처', 동양정신과 서양기술의 만남_동서 문화의 창조적 융합_새로운 관계

백남준은 1974년 기념비적인 'TV부처'를 발표해 뉴욕미술계의 지축을 흔든다. 작품은 비디오가 피사체를 촬영해 녹화하고 모니터로 생중계되는 실시간 피드백이 된다. 그래서 관객은 작품과 쌍방 소통하는 방식을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어 자신도 모르게 작품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TV부처'는 유럽, 미국, 아시아 국립미술관 등에서 가장 많고 소장된 백남준의 대표작으로 그 버전도 다양하다. 그 형식은 단순해 보이나 그 사상은 심오하다.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하이테크가 만나야 동서가 창조적으로 융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동서 문명의 선후, 비교우위 등은 들어설 여지는 전혀 없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동양의 생명사상과 서양의 기계문명이 사이좋게 공존한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도 부처의 마음으로 돌아가 삶의 번뇌를 내려놓고 거울에 자신을 들여다보며 주변의 것과도 상응하게 된다. TV와 부처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고요가 또한 관객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뭔가 모를 감흥을 일으킨다.

[23] [백남준과 이우환] 백남준의 TV는 이우환의 철판이고, 백남준의 부처는 이우환의 돌이다. 그러서 상당히 명상적이고 동양적이다. 백남준의 TV는 서양기술(테크놀로지)을 부처는 동양의 사상을 상징한다. 이우환의 철은 문명의 산물이고 돌은 자연의 유물을 의미한다. 백남준의 서양과 동양의 만남과 이우환의 문명과 자연의 만남 이런 것은 동양의 관계성 미학의 핵심인지 모른다.

, 달은 가장 오래된 TV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근간이 ''가 아니고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남준의 달은 그냥 달이 아니라 '전자 달' 혹은 '달 인공위성'이다. 그의 'TV연작' 중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백남준다운 작품이라는 평가받는다. 1965년부터 구상해,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12대 모니터를 통해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의 달 모양을 한 공간에서 동시에 보여준다. 시간의 고정성보다는 가변성을 실험한 이 작품은 백남준 자신의 시간철학을 전자아트로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예술이 얼마나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또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얼마나 시간의 주인노릇을 하며 자신의 시간을 자유자재로 구가하는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우리에게도 던지고 있다.

질문: TV란 당신에게?

백남: 돈 버는 깡통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사랑도 하고 섹스도 하고 소통하고 명상하고 성찰하는 인간이었다. 더 나아가 백남준에게 달은 가장 오래된 TV였다.  TV는 또 그에게 부처였고 정원이었고 신체가 된 예술(TV 브라)과 자연이 된 예술(TV 정원)> 음악이었고 예술이었다. 서양인은 TV라는 첨단의 기계를 만들 줄 알았지 여기에 인격을 부여할 줄을 몰랐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보지 못했다 백남준은 여기에 동양의 생명사상 평화사상을 불어넣어 TV를 진정 인간의 친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TV는 여전히 정치선전과 경제이득의 저급한 도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에로티시즘 아트(몸 철학)

질문: 뒤샹과 백남준의 에로티시즘은 어떻게 다른가

김형: 그 차이는 뒤샹을 역시 오브제아트로 에로티시즘을 표현했고 백남준은 소리를 통해서 이미지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에로티시즘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뒤샹의 변기는 바로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고 백남준의 피아노 치는 소리는 바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이미지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싱싱한 페니스로 심포니를 연주하다(Young Penis Symphony) 1962년 작

[백남준은 미디어로서 몸으로 철학을 하는 예술가] 예술: 퍼포먼스와 액션 뮤직 그리고 더 나아고 섹스아트 혹은 에로티시즘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예술의 영역이자 도전분야였다. '싱싱한 페니스로 심포니 연주(Young Penis Symphony)'를 실제로 나중에 퍼포밍했다. 악기가 아니라 남자의 으로 연주하는 심포니라는 그 발상이 기발하다. 에로틱한 야생주의 원시적 생[25] 명력의 회복이라는 셔먼정신과도 통한다,

네티: 그 제목도 충격적이고 도전적이다 1965년의 교향곡 5번에서 백남준은 남성연주자로 하여금 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게 하고, 아름다운 여성연주자는 바이올린의 활을 그녀의 으로 연주하도록 한 후 즉시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들으며 성행위를 하게하고, 8번을 듣고 또 다시, 9번을 듣고 또 다시 성행위를 하도록 하였다 '영 페니스 교향곡'에서는, 10명의 젊은 청년들이 그들의 으로 종이를 뚫게 하고 종이를 뚫는 소리를 음악이라 하였다.

[몸이 중시되는 배경과 그 철학] "몸과 성과 음악 퍼포먼스 그리고 에로티시즘, 몸 철학을 중시하는 건 전후 인간의 과잉한 관념이 낳은 괴물을 퇴치하려는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질문: '에로티시즘'에 깔린 백남준의 철학은 뭔가?

김홍: 모든 것이 문자화되면서 소통이 단절 그래서 몸이 중요하다. 말 이전의 몸으로 하는 시대에는 인간이 신과 직통했는데 모든 게 문자화되면서 그 소통은 단절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백남준은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적 생명이 넘치는 영매 즉 '미디어'를 통해 이를 되찾으려 여기서 '인터미디어 샤먼' '디지털 샤먼'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질문: 당신에게 퍼포먼스는 뭔가?

백남: 축소된 우리 인생을 즉흥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김형: 매 순간 치열하게 사는 법이다.

박만: "그의 예술에 액션이 들어가게 된 배경은 본격적으로 2차 대전이후에 미술시장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그걸 넘어서려고 했는데 작가들의 고민은 1963년이 되었지만, 예술의 상품화는 더 심화되고 그래서 시장에서 내다팔 수 없는 작업을 하다 보니 결국 '비물질화'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 대표적 예술이 바로 '액션음악, 퍼포먼스, 해프닝'입니다. 백남준은 바로 그런 요소를 공유한 거죠.

이영: 백남준에게 왜 몸을 중시했나고요? 그것은 바로 이런 '부르주아 교양취미(?) 이것은 항상 좋은 자리에 참석하여 좋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고, 좋은 음식만 먹고, 좋은 소리만 듣고, 좋은 말만 하고 고상한 척, 유식한 척하고 행세를 하는 것이에요. 결국은 가진 사람, 있는 사람에게 기대고 기존의 질서만 유지하려고만 하는 거죠.")' 부수는 데 사용한 무기가 바로 ''이죠. 그래서 예술에 몸을 도입해 행위음악, 해프닝아트가 생긴 거고요.

그런데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 건 그가 말하는 몸 예술은 발레나 고전무용과는 전혀 달라요. 그건 이미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방식으로 철학이 없는 그저 우아한 몸짓일 뿐이거든요. 백남준은 몸을 던진 것은 바로 깨달음과 각성을 얻기 위한 행위라고 봐요. 백남준을 관념주의자 '헤겔'로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그에게 '니체'가 중요해요. 독일 유학할 때 교과 과정에서도 있었고 독일친구들과 니체를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백남준이 예술에 몸을 대입하는 방식이 예술이론보다는 우선적으로 몸이 먼저입니다. 예술적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방식이죠. 그러니까 그는 몸으로 춤을 추는 철학을 한 셈이지요."

[26] 네티: 백남준 예술의 또 다른 맥은 '성의 고찰'이다. 제프 쿤스보다 더 감당할 수 없는 퍼포먼스라 정말 버겁다. 구보타 시게코의 'Vaginal painting' 샬럿 무어먼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그의 작품 '영 페니스 심포니' 마치 인간의 성에 대해서 도덕이나 윤리는 언급 자체를 하지마라 천부인이 내린 본능이란 '성역'이니까 라고 항변하다.

[사진] <엄청난 소용돌이 '섹스 오페라'>1967 2 9일 뉴욕에서 공연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포스터. 오페라를 섹스 하듯 연주하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Opera sextronique)' 엄청난 큰 스캔들이 작품은 '성인용'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유명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발표하게 된다. 이 작품은 1966년 독일 아헨에서 초연됐는데 1967년 뉴욕공연에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백남준은 이 전시포스터에 "진지함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음악에서 성을 제거한 건 도리어 음악의 진지함을 해치는 것이다. 음악도 문학도 미술과 동등한 위치의 고전예술이다. 따라서 음악도 음악계의 '로렌스', '프로이트'가 필요해"라고 적었다.

미리 신고한 이 공연, 주최 측도 경찰이 음란한 공연으로 볼 수도 있었기에 200명 사람만을 엄선해 초대장을 보냈고 일반인은 입장을 금했다. 그 순서는 1 '전자 비키니 입기', 2 '상의 벗기', 3 '하의 벗기', 4 '완전누드'로 연주하기였다.

그런데 2막이 시작되고 샬럿이 가슴을 드러내자 사복경찰 3명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 그녀의 상반신을 코트로 덮고 즉각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공연의 작곡가이자 제작자인 백남준도 연행됐으나 공연장에 양복 차림으로 점잖게 앉아 있어 훈방 조치됐고, 샬럿도 나중 풀려났지만 외설혐의로 재판에 붙여졌다.

이 사건은 외설과 예술의 자유논쟁으로 확대되어 미국예술계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다. 샬럿이 법정에 서자, 애가 탄 백남준은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미국 예술가뿐 아니라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유명예술가 장 자크 르벨에게도 편지를 보내 뉴욕지사에게 그녀의 사면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요청하다. 빈털터리인 백남준은 더 적극적으로 변호사 비용을 얻기 위해 1968년 뉴욕타운 홀에서 '재판기금모금연주회'를 위해 가야금연주자 황병기씨를 뉴욕까지 불러냈다.

미국법원은 이 해프닝이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그들은 이 분야의 대스타이자 아이콘으로 백남준은 이렇게 청교도 전통으로 성에 강박관념이 심한 미국사회의 촌스러움을 걷어낸다. "난 검은 옷을 차려입고 음악을 연주하는 성이 제거된 남녀의 고인돌 같은 분위기를 휘저어놓고 싶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질문: 백남준이 이런 몸 철학에 열광하는 이유는?(1/2)

김형: 거기에 모든 예술의 원천이 되는 원시적 생명력이 넘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27] 면에서 볼 때 백남준은 서양과학이 추방시킨 야생적 사고의 복원을 요구한다. 서구에서 끔찍한 나치 역사가 그에게 큰 각성을 주었으리라. 그래서 백남준은 야생적 사고와 원시적 상상력 결핍이 현대인의 비극은 낳는다고 봤고 이것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레비스트로스와 같은 맥락이다. 원시적 에로스가 가지는 생명력을 중시한다.

[결론] 백남준이 이런 해프닝을 도발한 건 성적 억압을 일삼는 기존사회의 통념을 깬 <예술적 교란자>

<3> 위성아트(인류공존)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위성아트 통한 지구촌 평화공동체 염원_종교에 의존하지 않는 제3의 인류공존의 길

그런데 그 누구도 우리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주차문제를 고민한 적이 없지 않은가. 나는 끊임없이 매개를 바꿉니다. 아마도 어떤 문화적인 유량 벽은 나의 조상 몽고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모릅니다. 인간이 무엇을 발명해내는 일은 한 번도 없어요. 다만 인간은 새로운 관계(네트)를 설정할 뿐이죠."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족보는 어디에서 시작하나 TV코뮌에서 시작해서 글로벌 그로브를 거쳐 굿모님 미스터 오웰로 3부작으로 이어진다.

백남준 유토피아 : 위성아트를 왜 시도했는가?

대답 :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을 피하며 진보하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복과 전쟁이 아닌 위성아트를 통해 보다 평화로운 커뮤니케이션의 기획자로서 예술가와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이다

질문: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세계는?

백남: 코뮌과 화엄세계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미래인 코뮌(Commune)을 이룩하고 <TV 코뮌>과 그리고 지구촌 시대 모든 인류가 하나의 축제의 장을 여는 글로벌 그루브 끝으로 위성시대의 화엄세계(작은 먼지 속에 온 우주가 모두 담겨 있다 나도 구하고 남도 구하다)이 열리는 세상이다 그 전제조건은 소통과 참여다.

"21세기는 1984 1 1일부터 시작된다" -백남준

김형: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때 백남준은 "21세기는 1984 1 1일부터 시작된다"라는 놀라운 말을 던진다. 그는 20세기에 이미 21세기를 연 셈이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를 꿈꾼 지 20여 만에 세계를 지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다.

김홍: 그는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전후 무후한 위성아트라는 예술품을 발명했다. 인터넷과 SNS의 원조가 되는 전자초고속도로를 구현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경계 없이 [28] 축제의 삶을 누리며 소통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을 기원했다.

김홍: 80년대는 지금까지 해온 TV방송, 비디오, 행위예술까지 총망라하는 만든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60년대TV,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결합된 <종결 판>이에요. 이게 주는 메시지는 매체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전 세계 사방팔방과 소통을 이루는 도구임을 강조한 거죠. 또한 기술자·예술가·대중을 부각시켰어요."

이 작품명은 영국의 괴짜사회주의자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1946년부터 2년간 쓴 소설제목에서 차용한 것인데, 이 내용은 1984년에 되면 '빅 브라더(Big Brother 가상의 독재자)'가 나타나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상이 온다는 내용을 담겨있다. 백남준 위성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러나 백남준은 오웰의 생각이 반만 맞았다며 '빅 브라더'론을 조롱했다.

김홍: 그는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전후 무후한 위성아트라는 예술품을 발명했다. 인터넷과 SNS의 원조가 되는 전자초고속도로를 구현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경계 없이 축제의 삶을 누리며 소통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을 기원했다.

<4> 백남준 미스터 오웰과 맑스 뒤집기: 소통과 참여

질문: 당신예술의 골자(키워드)?

[대답]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은 예술의 독재, 또는 독백예술이다"

백남준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참여와 소통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문화민주주의를 뜻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참여와 소통이 요구된다. 2부에 가서 다시 상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김형: 10대 백남준은 예술적으론 '쇤베르크'에게서 철학적으론 '맑스'의 영향을 받았다. 쇤베르크는 음의 주종관계를 해체하고 12음계 동일하게 보는 '화음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작곡가이고, 맑스는 '소외와 착취'라는 말을 발명한 사회 혁명가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런 사상이 백남준 예술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조명한다. 이렇게 오웰도 맑스도 조롱했다.

김훈: 맑스주의로부터 탈각해 나간 청년기의 정신 궤적이 궁금하다. 대답: 맑스는 제 청년기의 질환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맑스주의에 빠졌다. 나는 그런 이상하고도 강렬한 허영심이, 저뿐 아니라 지식인 전체를 향해서 어떻게 그렇게 밀려들 수 있는 것인지, 그런 미신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며 왜 인간을 사로잡을 수가 있는 것인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김훈: 소설가

<소통과 참여>라는 그의 키워드는 어디서 나왔나 10대 백남준은 예술적으론 '쇤베르크'에게서 철학적으론 '맑스'의 영향을 받았다. 쇤베르크는 음의 주종관계를 해체하고 12음계 동일하게 보는 '화음의 민주화'를 이끌었고, 맑스는 '소외와 착취'라는 말을 발명해 사회의 평등을 구현하려는 혁명을 이끌었다 [소통의 반대는 불통, 독재 그리고 참여의 반대는 소외, 배제]

[29] 백남준은 그의 스승인 맑스도 죽였다. 맑시즘의 핵심어인 '착취와 소외'를 백남준은 '참여와 소통'으로 극복한다. 다시 말해 시민의 참여로 독재를 막고 정보혁명을 통한 소통으로 전쟁을 막는다고 봤다. 맑스가 계급투쟁의 방식으로 세계를 해방하려고 했다면 백남준은 평화적인 예술과 소통으로 세계를 구원하려 했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사회>에 대한 대안]

질문: 당신의 종교는? [대답] 나는 종교가 없다. 내가 맑스를 배운 다음에 장사하지 않는 예술 하겠다고 하니까 다들 웃더군요. 그러니까 난 맑스한테 큰 은혜를 입었다 맑스 없이 백남준 없다. 백남준은 맑스의 문제제기에 명확한 답을 준다

[참고] [백남준이 17살 이전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 나는 한국에서 17살 반이 될 때까지 살았다. 나는 그곳에서 중요한 2가지를 배웠다. 바로 맑스와 쇤베르크다. 맑스는 설명할 필요 없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이었다.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움 때문에 세계대전을 2 차례나 겪은 후였다. 맑스는 우리에게 유토피아건설과 과학적 논리를 제공했다. 또 하나는 그 시대의 유행병이기는 하지만 서양의 천재 혁명가인 맑스도 섭렵했다. 또 백남준은 서양인도 잘 모르는 서양의 전위작곡가 쇤베르크를 좋아했고 그의 음반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등을 누볐고(나중에 동경대 유학해서서 그를 주제로 논문을 쓰다)

<5> 구겐하임전 레이저 아트(뉴미디어)

[뉴밀레니엄 구겐하임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나서 3년간 준비 끝에 2 11일부터 4 26일까지 2000년 벽두에 뉴욕미술계를 뒤흔드는 '구겐하임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The World of Nam June Paik)'가 뉴욕을 강타했다. 휘트니미술관이 그의 데뷔전이었다면 68세 맞아 구겐하임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은 그가 다시 세계적 예술가로서 우뚝 서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실제로 백남준은 1960대부터 레이저에 관심이 있어고 여건이 안돼 하지를 못했고 1980년 초 독일의 실험예술가 '호스트 바우만'과 함께 레이저를 활용한 비디오 작품을 발표했고, 베니스 비엔날레가 끝나고 2년 후에는 독일 뭔스터에서 바로크건축에 레이저를 쏘아 올리는 작품 '바로크 레이저(Baroque Laser)'도 발표하기도 했다.

구겐하임 전시에서 하이라이트인 '야곱의 사다리'는 인공 광선이 주는 감미로운 숭고미를 구현한 것으로, 구약에 신의 축복을 받아 일취월장하는 전설적 인물 '야곱'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이는 지상과 천상을 잇는 네트워킹으로 그의 예술이 이제는 지구촌뿐만 아니라 전 우주와도 연결되고 확장됨을 입증했다.

1996년에 쓰러진 후 합병증으로 백내장까지 생긴 그가 어떻게 4년 만에 이런 큰일을 해냈을까. 시게코의 책을 보면 백남준은 "시게코, 내가 왼쪽은 못 썼지만 오른쪽은 살아 있잖아, 이건 내가 아직 창작을 해야 한다는 계시야, 안 그래"라며 열정으로 다시 불태웠다. 시게코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 "이 사람이 정말 예술의 신으로 부활하려는구나"라고 적어 놨다.

[백남준 5교시] 백남준의 예술론과 플럭서스<23> 30

<1> 폼 잡는 예술 교란시키는 사기론

<2> 유용성을 무력화하는 무상(無償)예술

<3> 파시즘에 반대하는 반애국주의

<4> '플럭서스'의 골자는 반예술주의

<1> 폼 잡는 예술 교란시키는 사기론

-나는 폼 잡는 예술은 하지 않겠다 -백남준 2000

[참고] 여기는 품 잡는 예술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부르주아 교양취미(?) 이것은 항상 좋은 자리에 가서 좋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고, 좋은 음식만 먹고, 좋은 소리만 듣고, 좋은 말만 하고 고상한 척, 유식한 척하고 행세를 하는 것이에요. 결국은 가진 사람, 있는 사람에게 기대고 기존의 질서만 유지하려고만 하는 거죠.")' 부수는 무기가 바로 ''이죠.

[백남준 어법] 백남준의 예술의 사기론 어떻게 해석? 김형: 백남준의 어법을 이해해야 한다. 백남준은 진지한 내용일수록 더 유쾌한 언어로 표현한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이다

"원래 예술이란 사기다. 속이고 속는 거다. 독재자가 대중을 속이니까 예술가는 독재자를 속이는 사기꾼 그러니까 사기꾼의 사기

꾼이다. 고등사기꾼 말이다" -백남준 1984 전두환 군사독재시절에 상당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우상숭배를 잘하기에 사기를 잘 당하는데 그것을 사기를 치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백남준어록] "당신은 현대예술에서 용도변경의 귀재다 이것도 일종의 사기다. 미술은 기본이 착시다. 넥타이는 멜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를 수도 있다. 얼마만큼이 생이며 얼마만큼이 연출이며 얼마현대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는 5차원의 사기인 것이다.

예술의 목적은 여러 형태의 우상숭배를 파괴하는데 있다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백남준 우상파괴주의자: 예술의 목적이 그 어떤 형태의 우상도 파괴한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얼마만큼이 생이며 얼마만큼이 연출이며 얼마만큼의 사기가 되느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진리는 가면의 진리다" 1986년 춤

[결론] 현대예술이 고등사기라면, 비디오는 5차원의 사기다-1984

[고등사기1] 첫 전시 귀로 음악을 듣는다는 상식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눈으로 음악을 들으라고 한다. 그런데 백남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입으로 음악을 듣는다를 들고 나왔다.

[31] [고등사기2] 침묵도 소음도 포함되는 확장된 음악인가요?"아무리 정적이라도 들리지 않는 소리의 전파가 있고, 아무리 침묵이라도 나의 호흡소리 있는 거잖아요. 침묵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침묵음악이 된 거죠. 이런 음악철학은 결국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거죠.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고등사기3] 이른바 행위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진중: "예술은 사기"라는 그의 말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맥락을 보니, 마르세 뒤샹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뒤샹은 소변기를 미술관에 가져와 작품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오늘날 그의 소변기는 미술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장품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사기'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사기'도 비슷하다.

기계를 사용하는 인간은 기계가 허용하는 것만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백남준은 TV가 허용하는 것만 하면서도 그 한계의 밖으로 나가, TV를 더 이상 TV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석을 이용한 간단한 속임수로 TV의 뒤통수를 쳐서 '수상기(이미지를 수신하는 기계)' '제상기(이미지를 제조하는 기계)'로 둔갑시킨다.

매체 안에 머물면서 동시에 매체 밖으로 나가는 것. 이는 탈출의 마술과 비슷하다. 출구 없는 공간에 갇혀 있던 마술사가 밖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이게 속임수임을 안다.

질문: 백남준의 예술의 사기론 어떻게 해석?

이영: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라고 했는데, <수십 가지가 더 있다>해설: 전 공감해요. 목적론적인 '무엇으로부터 자유'보다 '자유를 위한 자유'가 더 좋거든요. 전 생각만 도발적인데 백 선생은 생각과 행동에 있어 시차가 없이 특히 예술에서는 완전한 도발 그 자체다. [결론] 진정한 사기는 감동 전율 환희 뭐 그런 것, 미술의 착시와 소설의 픽션은 같은 것이다

<2> 유용성을 무력화하는 무상(無償)예술

-물질화로서의 퍼포먼스: 돈 버는 예술을 하지 않기 위해서 퍼포먼스를 한다

예술이란? 자유를 위한 자유 예술이란 무목적 실험이죠. -백남준

백남 : 한마디로 전위 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다시 말하면 예술이란 <목적이 없고 자유를 위한 자유위한 것이다.

[32] [무욕주의와 무소유주의] 선불교의 원리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다. 임제록 우리는 어떻게 75%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5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3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9%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10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서구문명과 예술로부터 탈주로 열다 -백남준

[무목적성과 무화는 통한다] 퍼포먼스 질문: 당신의 작품이 주는 의미는? 백남: 그것도 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1, 2년을 겨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술의 민족성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팔자 좋은 사람이다. 저는 그렇게 팔자가 좋지 않아서, 더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론] 백남준은 예술을 자유을 위한 자유라고 했다. 철저하게 無償行(아무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예술)의 이론이다. 노자의 무위자연과 닮았다. 이런 무용성을 칸트는 무목적적 합목적성이라고 했다. 비디오아트의 무용성은 결국 인터넷이라는 지구상에 가장 큰 유용성을 낳았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기적이고 예술의 위력이다 예술은 그런 면에서 가장 무능해 보이지만 가장 유능한 장르이고 가장 바보스럽게 보이지만 가장 천재적 영역이다.

<3> 파시즘에 반대하는 반애국주의

-가장 극단적 애국주의가 뭐죠 그것은 바로 파시즘이죠

"한국의 예술은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한국을 떠난 6·25사변 즈음은 말이 아니었다. 김순남과 이건우, 신재덕 등의 좋은 음악가들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꽃을 피우지 못하였다. 지금은 모두가 신식 예술을 하지만 그 때는 그들이 진정한 신식 예술가들이었다. 나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고 참는다.

[애국주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선전하는 길은 내가 잘되면 저절로 된다] 그러한 면에서 애국의 길을 너무 노골화하지 않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는 말을 앞세우는 국수적인 애국자가 늘 이기는 것 같다. 국제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반반이어야 토론문화가 살아난다. 세계주의자가 늘 패배하는 나라에서는 문화의 시야가 좁아진다. 특히 건전한 토론문화는 문화의 균형을 생산하지만 성숙되지 못하면 인신공격만 난무하여 적대적인 문화만 양극화한다. 이제는 군사독재도 사라졌으니 한번 모두가 뭉쳐 뛰어 볼만하지 않는가. 한민족은 기마민족의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자꾸 뻗어나가야 산다.

질문: 후학들에게 해 주는 말은? 1992년 과천현대미술관 관객과 대담

대답: 될 수 있는 대로 애국자가 되지 말아라! 애국자는 결국 정치가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적 관심을 반은 줄여야 한다. 요새 정치가 개판이라는데 아마도 정치적 관심을 희석시키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신문을 보면 사분지 삼이 정치다. 구미 신문을 보면 700%가 전문가를 위한 기사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구 수학, 물리학, 역사학, 철학, 이런 거를 더 공부해라." 그 대신 내로우 베이스드 스페시알리스트(narrow based specialist 특별[33] 한 영역의 전문가)가 되어라!

<4> '플럭서스'운동의 핵심 반예술주의

-반예술운동, 반애국주의와 같은 맥락

1962년 비스바덴에서 파격적 반예술운동 플럭서스 첫 공연에서 피아노를 파괴하는 멤버들

['플럭서스'에 참여한 백남준] 딕 하긴스의 '그래피스 119'. 1962년 플럭서스 공연 중 하나로 하긴스, 트로우브리지, 백남준, 보이스, 슈미트, 클린트베르크, 포스텔, 놀즈, 스포에리 등등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_조지 브레히트 George Brecht_존 케이지 John Cage

헨닝 크리스티안센 Henning Christiansen_로베르 필리우 Robert Filliou

루드비히 고제비츠 Ludwig Gosewitz_알 한젠 Al Hansen

제프리 헨드릭스 Geoffrey Hendricks_딕 히긴스 Dick Higgins_조 존스 Joe Jones

우테 클롭하우스 Ute Klophaus_밀란 크니작 Milan Knizak

알리슨 노울즈 Alison Knowles_아더 쾨프케 Arthur K pcke

만프레드 레브 Manfred Leve_조지 마키우나스 George Maciunas

백남준 Nam June Paik_벤자민 패터슨 Benjamin Patterson

로버트 레펠트 Robert Rehfeldt_디터 로스 Dieter Roth_게하르트 륨 Gerhard R hm

타카코 사이토 Takako Saito_토마스 쉬미트 Thomas Schmit

다니엘 스포에리 Daniel Spoerri_앙드레 토트 Endre T t_벤 보티에 Ben Vautier

볼프 보스텔 Wolf Vostell_에멋 윌리엄스 Emmett Williams

1960년대 초 백남준을 이야기하면서 떼놓을 수 없는 미술운동이 바로 '플럭서스'. 이 단어에는 '흐름'(flux)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플럭서스=흐름(flow)이라는 뜻 시대의 흐름에 막을 때 거기에 구멍을 내는 운동이죠.

이는 고대철학자 헤라클레토스가 주장한 "만물은 창조의 흐름에서 유전한다"와 같은 맥락이다. 이 운동은 뉴욕에서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 건축가 조지 마치우나스(1931-1978)에 의해 발원된다 그는 1962년 서독 미 공군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 그 중심지가 뉴욕에서 비스바덴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슈톡하우젠을 따르는 전위음악가도 많았고, 이미 실험음악과 행위예술에도 관심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해 9월 비스바덴에서 첫 공연의 닻을 올린다.

"난센스와 불합리함, 네가 승리자다" 20세기 유럽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전반기가 바우하우스 가구건축디자인운동이고 후반기는 플럭서스 반예술 전위미술운동이다. 몸 철학과 야생적 사고와 반예술주의 운동인 플럭서스(fluxus) 관련성이 깊다.

당시에 가장 진보적이고 반항적인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플럭서스다. 시대의 흐름이라는 뜻으로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했다. 뉴욕과 달리 독일과 유럽에선 여러 도시를 순회한다. 9월 독일 비스바덴에 이어 10월에 암스테르담, 11월에 코펜하겐·런던·[34] ·파리 등에서 공연했다. 백남준은 이 기관지 <데 꼴라주>의 편집도 맡는데 이 책에 나오는 '플럭서스 섬'을 보면 당시 그 회원들의 이상향이 보인다.

마치우나스는 1963년 뉴욕 소호에 본부를 창설하고, 그해 "부르주아의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 "죽은 예술, 모방·인위적 예술·추상적이고 환영적이고 수학적인 예술을 추방하라, '유럽주의'를 추방하라"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발표했고, 196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게시했다. 문명의 위기와 서구의 종말을 논했다. 그들은 머리보다 몸을 정신보다는 육체를 중시했다. 그래서 몸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행위예술(performance) 혹은 해프닝이다.

요즘 새로운 사실로 밝혀진 것은 백남준이 플럭서스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플럭서스가 백남준의 영향을 받았다는 새로운 연구가 나오고 있다. 1962년 독일에서 비스바덴(경제적 수준도 높고 당시 가장 미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 플럭서스 회원 중에서도 가장 광적이고 창의적이고 해괴한 퍼포먼스로 30살인 백남준 최고의 찬사를 받다."

이 운동은 1960년대 권위적 기존미술과 전통에 벗어나 위에서 보듯 급진적이고 실험적이고 미술운동으로 '반예술'적이었다. 또 당시 냉전 이후 이념 대립의 팽배로 숨 막히게 돌아가는 세상에 구멍을 내고 교란시키며 그 위계를 깼다. 게다가 아나키즘·보헤미안 취향·도가의 무위사상까지도 수용한다.

네오다다의 성격을 띤 이 운동은 예술가의 주체성마저 부정하고 문화민주화와 중앙집중화를 반대하고 지방화를 지향한다. 예술이 상업화·대상화·물질화되는 걸 반대하고 대립되는 갈등이나 충돌이 생겨도 개의치 않는다. 무엇보다 창조적 발상에 높은 점수를 줬다.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을 없애고 삶과 예술의 경계도 허물고 일상과 대중성도 받아들이고 타 장르도 포용한다. 또한 즉흥성·우연성·상호성·비결정성·비위계성을 중시하며 노이지를 포함한 사운드·이미지·일상에서 발견하는 오브제와 텍스트를 활용하고 재미·풍자·유머를 가미해 더 단순하고 간결한 놀이방식을 취했다.

플럭서스라는 어휘를 그 어원적으로 추적해보면 즉 영어로 'FLOW(흐른다)' 소통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세상을 염원하는 것인데, 백남준은 이런 발상으로 '인터넷' 없는 시대에 기술과 예술을 융합해 국경·인종·언어는 뛰어 넘는 '인터페이스' 세상을 만들려했다.

회원으로는 음악가인 라 몬테 영·존 케이지·디 히긴스와 알리슨 놀스 부부·백남준·시게코 오노·조지 브레히트·시인 잭슨 맬로·베이스연주자 페터슨·종합예술가 보스텔 등이 있었다. 그야말로 동서가 같이 한 최초의 국제주의 미술운동이다. 회원 중 하벨과 란즈베르기스은 훗날 체코와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백남준 6교시] 백남준이 바로 미디어(아트)<23> 35

<1> 백남준이 미디어가 되는 사례찾기(1)

<2> 백남준의 10대 작품 선정·설명하기(2)

<3> 백남준(세계적 국가브랜드) 활용하기(3)

[백남준 그 자체가 미디어] 부모사이에 자녀가 둘 사이의 미디어이듯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미디어가 되는 거다. 백남준이 지구촌 글로벌 시대에 동서의 문화와 예술의 징검다리를 놓은 미디어 무당 즉 영매자(meditator)였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네트워킹이라고 한다. 미디어란 네트워팅 하는 사람이죠.

<1> 백남준이 미디어가 되는 사례찾기

질문: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는 미디어아트에서도 선각자라고 할 수 있나? [재방송]

진중: 흔히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이었다. 비디오를 넘어 로봇, 레이저, 인공위성 등 다양한 매체로 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미디어 아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온당할 게다. 실제로 미디어 아트의 역사를 다룬 책들은 최근 백남준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그보다 먼저 워홀이 비디오를 사용했고, 그에 앞서 포스텔이 TV모니터를 설치했다.

퍼포먼스 위성중계 역시 백남준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남준처럼 미디어 자체를 주제로 삼아 철저하고 일관되게 미디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 아트의 아버지'는 역시 백남준이다.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그리고 20세기 전체를 뒤샹의 시대라 부른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백남준의 시대가 될 것이다. 대중은 카메라로 이미지를 복제하는 수준을 넘어, 컴퓨터로 이미지를 변조, 합성, 생성하고, 나아가 UCC라는 동영상을 만들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디지털의 대중은 모두 백남준의 후예다.

<2> 백남준의 10대 작품 선정하기

[각자 해보기] 백남준 작품 10선을 골라보세요

머리를 위한 선(퍼포먼스) 1962, 총체피아노와 랜덤 액서스 1963, K-456 1964, 오페라 섹스트로니크(퍼포먼스) 1967, TV부처& TV정원 1976,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 보이스 위한 추모 굿 1990-. V피라미드(다다익선)1992, 단군 스키타이 1993, 정약용1994,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 1994-1995, 구겐하임 야곱의 사다리 2000, 엄마 2004

[백남준 친구 10]: 샬럿 무어먼, 오노 요코, 머스 커닝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핸하르트 등등 [수상경력]: 괴테상, 교토상 등등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의 예] 존 케이지가 침묵도 소음도 확장된 음악이라고 본 것에 자극을 받은 백남준은 음악이라는 미디어에 몸이라는 미디어를 추가하다.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이른바 행위음악(Action Music)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36]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질문: 미디어 확장과 융합의 개념을 분단국에 사는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대답: 그것은 바로 민족개념의 <확장과 융합>이다. 민족개념의 확장(몽골은 물론 우랄알타이 핀란드와 헝가리까지 확장)과 제3의 창의적 방식으로 융합하는 것 물론 <단일한 독립국가>가 되는 것이죠. 백남준이 말하는 소통과 참여 정보초고속도로의 개념을 남북이 하나 되게 하는데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백남준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우리가 응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마음의 거리가 더 멀지만 그래도 독일의 통일설계가 '에곤 바르'가 활용한 <접근을 통한 변화> 다시 말해 서로 천 번을 만나 회담을 하면 단일독립국가가 된다는 논리인데 그런 방법도 좋고요 이 보다 더 효과적인 남북소통을 위한 백남준의 개념인 네트워킹(우선 방송이 있을 것이고 그 외 여러 방식이 있다. 예컨대 남북무역대표부나 당분간 남북대사를 둘 수도 있다)과 정보초고속도로를 응용한 쉬운 액세스는 없는 것인가 그런 점이 절박해진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다.

질문: 미디어아트의 골자 <확장과 융합>이란 구체적 어떤 것인가?

백남준에게 있어 네트워킹은 또 몽골과 연결시킬 수 있는데요. 몽골을 다른 나를 지배해도 나라와 나라를 네트워킹 시키는 방식을 취해 제국을 관리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몽골이 한때 러시아를 200년간 지배한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긴 시간에 별일이 없었던 것을 바로 중앙집권적방식이 아니라 네트워킹 방식 때문이죠. 일종의 대등한 공존방식이죠.

성인 칭기즈칸이 "말에서 내려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라고 한 말을 백남준이 계승해 전자세계를 이용해 대륙을 잇는 위성아트를 한 거죠. 그는 언제나 외부를 향해 가정 멀리 떠나는 자였고, 내부로는 가장 먼 곳으로 잠수해 들어간 고래였어요.

[추가] 백남준은 끊임없이 어떤 틀과 우상과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영철 평론가는 백남준과 관련하여 그를 깊은 사유의 잠수자들 중 하나라고 해석한 적이 있다. 살아있는 암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라는 도발적 제목이 이를 뒤받침한다. 푸코도 자신을 흔히 고래에 비유했다고 한다. ""바다 깊은 곳에 잠수하면 누구도 보지 못하고 누구의 조정도 받지 않는 그래서 나는 더 심오하고 일관성 있는 궤적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된다"(M.Foucault Puissance /Savoir 1972-1977)

백남준은 그야말로 멀리 내다보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깊은 바다에 잠수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세계와 소통하는 인물인지 모른다. 어떤 형태의 장벽도 헤쳐나가면서 그걸 견디어내는 깊은 사유의 잠수자 말이다.

<가장 멀리 보는 작가 가장 깊은 심연처럼 사유할 수 있다>

백남준이 30살이었을 때 동료 작가 딕 히긴스가 기획한 위험한 음악 2번 연주회에 참가하여 [37] 그는 정장을 한 채 아기욕조에 들어가 머리부터 온몸에 물을 퍼붓고 신던 구두를 벗어 물을 담아 벌컥벌컥 들이키며 관객에게 마셔보라고 건유하면 짓궂게 장난을 거는 해프닝을 벌리며 <살아있는 암 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고 강하게 외친다. 남이 아무도 가지 않은 영역을 침범하고 들어가 보라는 강력한 권유다. 독일 비스바덴에서 1962 딕 히긴스의 위험한 음악 2번 백남준 악보 '살아있는 암 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

[백남준 전쟁세대] 김홍: 1958년 백남준 편지에 해프닝을 작곡하면서 TV 3대를 포함시키고 오토바이소리, 7살 소녀의 울음소리 이런 생소리를 함께 채집한다고 나와 있어요. 1959 '존 케이지 바치는 경의'에서 실제로 그가 채집한 녹음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수탉소리와 오토바이소리를 등장시켜 공연하죠. 백남준은 모든 게 다 음악의 소스가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마리: 백남준과 마리의 공통점은 전쟁의 비명소리 작품에 사용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다. 바로 전쟁이다. 나는 2차 대전을 겪은 세대다. 백남준은 초기 녹음 작업에서 전쟁 중 사람들이 죽을 때 내는 비명 소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 둘 모두에게 친숙한 비명소리다. 우리는 각각 동양과 서양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의 고통을 알고 있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절대로 그것을 다시 겪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했다가 나중에는 매우 정치적이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백남준 독일에서 뮤즈, 플럭서스작가)

[결론 당신에게 TV는 뭔가] 대답: 돈 버는 깡통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사랑도 하고 섹스도 하고 소통하고 명상하고 성찰하는 인간이었다. 더 나아가 백남준에게 TV는 부처였고 정원이었고 신체가 된 예술(TV 브라)과 자연이 된 예술(TV 정원)> 음악이었고 예술이었다. 서양인은 TV라는 첨단의 기계를 만들 줄 알았지 여기에 인격을 부여할 줄을 몰랐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보지 못했다. 백남준은 여기에 동양의 생명사상, 평화사상을 불어넣어 TV를 진정 인간의 친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TV는 여전히 정치선전과 경제이득의 저급한 도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화 민주주의자 백남준은 TV 코뮨 즉 공동체를 통해 상호적 소통과 삶에 참여를 가져오려고 했고 다만 그런 기술이 당시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백남준의 이상은 이제 SNS를 통해 어느 정도 현재화되었다. 기계마저도 예술이 되는 시대는 분명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3> 백남준(세계적 국가브랜드) 활용하기(워크숍3)

[과제] 전쟁세대 백남준 그의 독특한 언어세계인 어록과 거지패션이나 돈 철학 같은 것 등에 대한 것 10가지씩 적어보기 예: 네트워킹이란 뭔가? 백남: 노자가 말하는 도()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 같은 것이다 예: 당신은 불교신자인가? 대답: 난 불교신자는 아니다 나는 예술가다. 나는 동양적인 예술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양적이다

백남준에게 있어 네트워킹은 또 몽골과 연결시킬 수 있는데요. 몽골을 다른 나를 지배해도 나[38] 라와 나라를 네트워킹 시키는 방식을 취해 제국을 관리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몽골이 한때 러시아를 200년간 지배했는데 그렇게 긴 시간에 별일이 없었던 것을 바로 중앙집권적방식이 아니라 지방자치제와 유사한 네트워킹 방식 때문이죠. 일종의 대등한 공존방식이죠.

[도올 백남준 1992년 석도화론 중에서] "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게 없는 거야.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가 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같았어. 그래서 다시 음악의 본고장 독일에 가서 보니깐 거기서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도올 선생도 질문했다. "당신은 나처럼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공부벌레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박식한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백남준은 "난 당신처럼 그렇게 심각한 공부나 독서를 하지 않는다" "내 지식원은 대강 '신문'이다"고 답한 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데 신문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반영한다. <뉴욕타임스>만 잘 읽어도 한국 학자들 서재에 쌓인 책 정보보다 더 명료한 세계사적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3대 정보탱크는 '슈피겔(독일신문)-미정보국(CIA)-미쓰비시'이다."

[과제: 천년 우려먹을 우리의 문화자본] 우리는 백남준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천년을 써 먹을 수 있는 문화자본인 백남준 그를 우리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모셔야 한다. 이영철관장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가 조금만 투자하면 많은 이자를 남길 수 있다는 말인데 그는 앞으로 천년을 수출할 수 있는 문화재란 소리인데 그런데 위정자들이 그걸 이해할까 이탈리아는 2천년 동안 그의 조상들의 유산 때문에 지금도 돈을 벌고 그 문화의 이자들 받고 있는데 천년의 이자를 낼 백남준에 대해 관심이 없어 보인다. [유머 돈 철학과 거지패션 과격성 에로트시즘 인간과 시간과 공간 그 사이 네트워킹]

[과제] 마음에 드는 백남준의 어록 찾아보기

1962 황색재앙그것이 바로 나다

1964 문화적 애국심은 정치적 애국심보다 더 해롭다.

1965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1974 흐르는 물 오묘한 거문고 가락을 타건만, 한 가락 두 가락 아는 이 없구나.

1977 빈 공간의 공포는 모든 예술이 생성되는 근본적인 계기이다.

1977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1980 유목민의 예술은 뇌에 저장할 수 있는 음악, , 춤이다.

1983 우리에게 21세기는 1984 1 1일부터 시작된다.

1988 나는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 시대가 떠오른다.

1988 나는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계를 사용한다.

1992 예술은 보편성이 아니다. 텃세다 1993 그 내용 이어가기 []

1981: Will-Grohmann-Preis

1989: Kurt-Schwitters-Preis, Hannover

1991: Kaiserring der Stadt Goslar

1992: Picasso-Medaille der UNESCO

1993: Goldener Löwe für den besten Länderpavillon auf der Biennale von Venedig

1995: Ho-Am-Preis

1998: Kyoto-Preis

2001: Wilhelm-Lehmbruck-Preis der Stadt Duisbu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