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조각이란 무슨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를 보다 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조각하는 것이다> [독일 문화 대통령 보이스] 탄생 100주년을 맞는 요셉 보이스, 내년 독일은 보이스로 시작해서 보이스로 해가 저물 예정이다. 그는 사회적 조각의 창시자다. 백남준의 절친이면서 그의 선의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순교자 같은 삶을 살다. 독일을 세계미술로 끌어올리다. 그 공로의 60% 백남준 덕이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는 소묘가, 조각가, 액션 및 설치 예술가, 교사, 정치가 및 활동가였다. 마르셀 뒤샹, 존 케이지, 앤디 워홀 그리고 백남준과 함께 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예술의 본질, 물질성, 언어, 경계 및 임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의 작업은 그 범위가 보편적이며 인문주의, 사회 철학 및 인류학에 관한 질문을 탐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군인으로서의 그의 경험은 사회의 급진적인 민주화를 가져오려는 그의 실천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64년부터 그는 자신의 삶을 조각할 수 있는 재료로 여기게 되면서 더이상 자신의 생애와 작품을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 이 모델은 그의 사회 조각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는 1982년 보이스의 도큐멘타 기고 "7000 Oaks"로 정점을 이루었다. 지금도 보이스는 예술적, 정치적 담론에 눈에 띄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Joseph Beuys 탄생 100주년(2021)은 뒤셀도르프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과 협력하여 북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문화과학부의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미술사학과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래 원문
joseph beuys was a draughtsman, sculptor, action and installation artist, teacher, politician and activist. along with marcel duchamp, john cage and andy warhol he is widely considered one of the most significant artists of the 20th century. he fundamentally altered the nature, materiality, language, boundaries and tasks of art. in his practice – universal in its scope – beuys explored questions pertaining to humanism, social philosophy and anthropology. his experiences as a soldier in world war ii had a profound influence on the evolution of his practice, which sought to bring about a radical democratisation of society. from 1964 onwards he no longer distinguished between his biography and his artwork, having come to view his life as material to be sculpted. this model became the point of departure for his theory of social sculpture, which culminated in 1982 with beuys’s documenta contribution »7000 oaks«. now as then beuys exerts a palpable influence upon artistic and political discourse. »beuys 2021. 100 years of joseph beuys« is a project of the ministry of culture and science of the state of north rhine-westphalia in collaboration with the heinrich-heine-universität düsseldorf. the project is based in the department of art history.
독일 '슈피겔'지 [요셉 보이스 탄생 100주년] 보이스에 대한 저서 4번째 내는 Hans Peter Riegel 인터뷰 기사 <작성중>
요셉 보이스의 '사회적 조각'이란 눈에 보이는 무슨 조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다 바람직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모든 퍼포먼스를 말한다. 가장 쉬운 예로 거리에 나무를 심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100% 대학에 무료로 다니는 세상 이런 것이 다 사회적 조각인 셈이다.
"예술은 현실의 혁명적인 원동력인 동시에 모든 사회적 행위의 근간이 되며, 이를 바탕으로 미학의 개념은 폭넓게 확장되어야 한다. 이게 바로 내가 가장 널리 알리고 싶은 사실이다." - 요셉 보이스
요셉 보이스 유라시아 개념을 매우 중시했다. 이 점에서는 백남준과 100% 같다.
[출처] <요세프 보이스, 우리가 혁명이다> 저자 송혜영
보이스 유라시아 시베리아 교향곡 제32장' 1966.10.15 코펜하겐 갤러리 101 Photo: Kaare P. Johannesen
보이스는 그가 좋아한 슈타이너의 입장 즉 "동양인의 직관과 서양인의 이성이 조화를 이룰 때 동서 화합은 가능해진다: 공감했다. 보이스에게 유라시아는 궁극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대립된 요소들이 경계를 초월해 화합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십자가 분열'은 동서 양극의 분열과 갈등을 지적하고 있으며 '유라시아'는 이를 극복하려는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요셉 보이스의 <사회적 조각(social sculpture)이란 무슨 조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보다 더 민주적이고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가장 쉬운 방법이 우선 나무를 심는 것(아래 7000그루 참나무 심기 퍼포먼스 사진)이다. 참나무 옆에 현무암을 같이 세운다. 현무암은 거름처럼 참나무에 신선한 공기를 제공한다고... 참나무와 현무암의 관계는 물과 불처럼 상생의 관계와 같다. - 요셉 보이스
요셉 보이스 왈 "모든 게 다 예술이고, 모든 사람이 다 예술가다" 사회를 개선하면서 보다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만 한다면(사회적 조각)... 보이스는 삶을 개선하는 모든 사람을 예술가라고 했다. 그런 개념을 '사회적(삶을 보다 인간적 사회로 변화시키는) 조각'이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이죠.
요셉 보이스가 생각하는 조각 개념 3가지 1. 따스한 조각 2. 사회적 조각 3. 사고하는 조각(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힘을 '사고하는 조각'이라고 한다.
"교육이 예술이다" -요셉 보이스 / "가장 미학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인 것이다(가장 교육적인 것이 가장 미학적인 것이다)" - 백남준 / 백남준과 보이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한 셈이다. 지금 한국의 입시 교육은 지옥이지만(사실 이것도 우리의 논리가 아니고 강대국의 논리다) 한국의 교육이 예술이 되면 한국이 세계에서 최고의 국가가 될 것이다.
슈피겔 1979년 4월 11일 45호 표지화 : 많은 사람은 그를 불쌍한 미치광이이자 사기꾼일 뿐이며 골칫거리 예술가로 본다. 뉴욕의 예술계는 지난 금요일부터 그를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펠트 모자와 스포츠 조끼를 입은 이 남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Beuys는 더 나아가려 한다. 그는 녹색당을 위해 헌신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Der Grosste weltruhm für einen scharlatan(최상의 국제적 명성을 얻은 사기꾼 보이스는 연구자에 의하면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있다고 본다. 그는 스스로 신화를 과장되게 창조했다는 비판이다. the greatest world fame for a charlatan)"사기꾼 요셉 보이스, 그러나 그에 대한 명성은 세계적이다"
[슈피겔] 세기의 예술가 Joseph Beuys에 대한 토론: 그의 전기 작가 Hans Peter Riegel 왈, 그를 좌파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가장 큰 착각.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문주의와 지구환경 보호를 위한 음모론자 혹은 교란자다. 그의 100주년을 맞이해 책을 내다 * 보이스는 전시회 때 칠판 100개를 준비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개념화 칠판에 적는다. 하도 내용이 많아 칠판이 100개는 필요하다. 그 버려진 칠판이 지금도 잘 보전되고 있다. 그의 칠판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관객이 미여지다. 그는 무슨 교주처럼 인기가 높았나보다
요셉 보이스 전시에서 자신의 작품 개념을 설명하는데 100개의 칠판이 필요하다고 아래 사진 뒷배경에도 그런 흔적이 보인다.
<요셉 보이스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할 때 이 대학 입학 절차에서 실패한 학생 모두를 자신의 수업에 받아들여 결국은 대학에서 해직되고 말았다> <세계적 작가 리히터(세계에서 그림값이 가장 비싼 작가) 등 동료 교수가 연대 항의 투쟁으로 다시 수업이 허용되었지만 결국은 해직되고 말았다>
Beuys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공부를 축제로 만들고 많은 항의를 하는 통로로 삼았다. 모든 인간은 예술가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이전에 입학 절차에 실패한 학생들을 자신의 수업에 받아들였다. 당시 과학부 장관인 요하네스 라우(Johannes Rau)는 이러한 이유로 1972년 그를 해고했다.
학생 단식 투쟁과 Peter Handke 및 Gerhard Richter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의 연대 투쟁 이후, Beuys는 그의 교수직과 그의 작업실을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고용되지 않았다.
요셉 보이스는 뒤셀도르프 조각과를 졸업하고 이 명문대학 조각과 교수가 되었지만 진정한 교수였기에 해직교수가 된다. 이런 사건을 두고 뭐라고 해야 하나 참으로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백남준도 이 대학교수였는데 일주인 딱 하루 수업만 했지만(뉴욕에서 작업 활동하면서 독일에는 비행기로 1주일에 1번밖에 안 왔다) 전혀 해고되지 않았는데 대조적이다. 독일에서는 대학 정년제(권력 비판을 아무리 심하게 해도 해고하지 못하게 법으로 못박아 놓다)가 있고 해고가 없는데 요셉 보이스는 그런 틀마저도 벗어나는 귀재였다.
요셉 보이스의 상징인 지방과 팰트는 그에게 있어 따스한 온기 미학을 상징하는 물체이다. 보이스에게 펠트는 인간의 몸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펠트의 무채색은 눈에 띄지 않지만 모든 화려한 색들과 잘 어울리며 밝은 세상을 보여준다.
그에게 펠트는 생명의 온기를 간직하는 살아있는 인간존재를 암시하며 또한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구하는 부활을 의미한다. "Chair with Fat(1964년 작품)"이나 "Felt Suit(1971년 작품)"처럼 뚱뚱하고 펠트는 초기에 보이스 예술의 명백한 상징이 되었다. 예술가가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의 한 구석에 몇 킬로그램의 버터를 바르는 유명한 Fetteecke(1981년 작품) 만들었다.
보이스가 사망한 1986년 직후, 아카데미 관리인이 기름을 제거했다. 작품 "Bathtub"(1973년 작품)도 오해를 받아 전시실에서 파티를 마친 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식기 세척기로 사용되었다.
<보이스는 '꿀벌'에서 가장 완벽한 조각과 기하학적 조형미의 극치를 본다> 1961년 보이스는 조소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에 그의 예술적 관점은 조각에서 설치 및 공연 예술로 점차 바뀌었다.
1965년의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방법'에서 보이스는 금박과 꿀로 얼룩진 얼굴에 청중이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팔에 있는 죽은 동물에 그의 예술을 더 가까이 접목시키다. 토끼가 인간보다 위대하며 토끼는 그 어려운 현대미술을 이야기하면 바로 알아듣는다고 봤다.
서구의 이성주의를 비판한 것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와 통한다 여기서 우리가 조목할 것은 바로 꿀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꿀보다 꿀벌의 생존 양식에 더 관심이 많다.
그들은 모두 따스한 온기로 이뤄지고 있으며 이 온기 집단에서 바로 조형의 과정이 완성된다. 꿀벌은 따스한 요소 강하게 흐르는 요소를 간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결정체의 조각을 완성한다. 꿀벌은 규칙적이고 완벽한 기하학적 벌집을 형성한다"
인간에게 스승이 있다면 바로 토끼(인간 영혼을 높여주고 촉진하는 영매자)다. 그 어렵다는 현대미술을 토끼가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한다. -요셉 보이스
요제프 보이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4세 루프트바페에 지원한 클레베 예술가 협회 지원을 받으며 작업하다. 1946년에 뒤셀도르프 예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전쟁 중에 이미 그림과 스케치를 만들고 있었고 조각을 전공하게 된다.
보이스는 조각가 에발트 마타레(Ewald Mataré)의 제자로 1952년에 학업을 마쳤다. 여기서 슈타이너의 인지학에 큰 관심을 두었다. 보이스가 유라시아에 관심을 둔 것을 바로 슈타이너 영향이다. 1950년대 초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953년 부퍼탈에 있는 폰 더 하이트 박물관(Von der Heydt Museum)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독일 다름슈타트에 위치한 헤센주 미술관(Hessian State Museum)에 가면 7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보이스(Beuys) 대표작을 화상 '칼 스트뢰어( Karl Ströher)'가 대량 구입해 컬렉션한 '보이스 블록(Block Beuys)'이라는 30년간(1949~1979) 광범위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나도 다름슈타트를 가 봤는데 이런 미술관이 있는지 몰랐다. 그렇게 끌리는 도시는 아니었다. 여기서 하계 국제 실험 음악제가 열린 곳이다. 백남준 케이지 윤이상 슈톡하운젠이 참가하다.
<요셉 보이스의 대한 '한스 페터 리겔'(Riegel 61세, 취리히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작가이자 경영 컨설턴트이다. 어린 나이에 그는 Beuys 전 교수와 마찬가지로 뒤셀도르프에 살았던 Jörg Immendorff(임멘도르프)의 비서이자 조수였다. 보이스에 관한 리겔의 2013년 첫 번째 책은 아티스트 아이콘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Beuys 전기의 네 번째 책이 이제 출판되었다)의 생각 '슈피겔' 기사 중에서> 독일 '외르그 임멘도르프(Jörg Immendorff)' 회화작품
보이스는 예를 들어 기존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사회를 원했다. 그는 지금의 의회 민주주의 시스템에 반대했다. 직접 민주주의를 원했다. 또한 국가가 모든 것, 특히 학업 교육을 포함한 학교 시스템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걸 요구했다. Beuys는 소위 국가 중심적 권력 시스템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언론도 역시 여기에 포함했다. 내 생각에 그는 "Box-in이 아니라 Box-out(상자 밖에서) 생각하기"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선구자라고 생각한다.
요셉 보이스 컬렉터 Karl Ströher 전시회에서 Haftmann과 Joseph Beuys
[슈피겔] 세기의 예술가 Joseph Beuys에 대한 토론: 그의 전기 작가 Hans Peter Riegel 왈, 그를 좌파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가장 큰 착각이다.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문주의와 지구환경 보호를 위한 음모론자 혹은 교란자다. 그의 100주년을 맞이해 책을 내다.
* 보이스는 전시회 때 칠판 100개를 준비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개념화 칠판에 적는다. 하도 내용이 많아 칠판이 100개는 필요하다. 그 버려진 칠판이 지금도 잘 보전되고 있다. 그의 칠판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관객이 미여지다. 그는 무슨 교주처럼 인기가 높았나보다.
뒤셀도르프 아트 아카데미 입구의 요제프 보이스. 그는 교수시절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독일에서 교수가 자전거 타고 다니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뮌스터에 갔을 때 노 교수가 자전거로 출근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플럭서스 삶의 유동성(고체사회가 아닌 액체사회를 바라다) 모든 존재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유동성을 삶과 예술에 확대해 플럭서스는 삶과 예술 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사이의 경계를 허물다
요세프 보이스의 인생경력과 작품경력 1921년부터 1964년까지 1961년 대학교수되다. 보이스는 어려서부터 백남준과 똑같이 칭기즈칸에 관심이 높았다. 그의 유라시아 마인드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아래 칠판이라는 작품 <사회적 조각 예: 바로 교육을 예술작품처럼 만든 것>"(민주 시민 키우는, 전인 교육을 시도하는)교사라는 직업은 훌륭한 예술 작품 같다" -요셉 보이스. 보이스 68혁명 때 <학생당>을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고, 교육민주화와 문화민주화와 녹색민주화에 기여하다. 보이스가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은 그가 주제에 대해 지식인으로 그에 대한 개념을 너무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청산유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놀라운 설득력을 발휘했기에 그에게 매려되기도 했다고 한다. 보이스는 전시장에 100개의 칠판을 마련 거기에 그의 개념미술 사회적 조각품으로 남기다. 이 칠판을 나중에 작품이 되고
청년 시절 나치 전투조종사로 2차 대전에 출격,러시아 상공에서 격추당해 눈밭에서 사경을 헤매게 된 그는 그 지역 타타르인의 원시적인 민간요법으로 기적적으로 소생하게 된다. 이것을 예술가 출발의 통과의식으로 간주하면서 그는 삶과 행위 그 자체가 예술이고 예술행위를 통해 문명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타타르인이 요법으로 그의 몸에 발라 주었던 기름덩이와 몸을 감싸 주었던 펠트천 담요는 이후 그 자신이 벌이는 예술행위에서 뺄 수 없는 상징적 소재와 재료가 된다.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아메리카는 나를 좋아한다" <이 작품은 요셉 보이스가 샤먼 예술가로서 미국의 원죄인 인디언(미국땅 원주인) 학살을 주제로 한 것이다. 인디언들 원한을 달래주는 '넋풀이굿'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아메리카는 나를 좋아한다》 1974년, 미국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보이스는 펠트 천에 싸여 들것에 실린 채 구급차를 타고 르네 블록(René Block) 갤러리로 향하였다. 갤러리 바닥에 건초더미, 펠트 천, 《월스트리트 저널》 등을 깔아 놓고, 그곳에서 코요테와 3일 동안 생활하였다. 보이스는 커다란 펠트 천을 두른 채 지팡이만 내놓고 코요테와 대화를 시작하였고, 코요테가 보이스에 익숙해지자 펠트 천을 벗고 코요테와 함께 창 밖을 바라보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3일이 지난 후 보이스는 갤러리에 도착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외부와 일체 접촉하지 않은 채 미국을 떠났다. 이 퍼포먼스에서 코요테는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코요테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신성시하던 동물이었는데, 백인들이 아메리카를 점령하며 코요테를 비천하고 교활한 동물로 낙인 찍는다. 따라서 보이스에게 코요테는 잃어버린 아메리카의 참모습, 아메리카 땅이 겪은 정신적 충격을 상징한다
[보이스의 최고의 걸작 '코요테' 1974년] 베를린의 르네 블록 갤러리는 1974년 뉴욕에 새로 문을 열었고, 이를 계기로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도 나를 좋아한다!(like America and America likes Me)〉는 보이스의 행위를 추진하였다. 그해 5월 21일 뒤셀도르프를 떠난 보이스는 5월 23일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그는 펠트로 둘러싸인 채 곧바로 구급차에 실렸고, 들것에 의해 동물의 축사가 된 전시장 안으로 운반되었다. 그리고 철조망의 울타리 안에서 보이스는 코요테와 함께 3일을 보냈다. 코요테의 자리에는 건초더미가 마련되었고, 보이스를 위해서는 덮개용 펠트와 손전등, 가죽장갑과 지팡이, 트라이앵글이 준비되었다. 이외에도 전시장 바닥에는 월 스트리트 저널들이 놓여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첫날의 코요테는 적개심을 갖고 보이스에게 접근했으며, 펠트를 뒤집어쓴 보이스는 코요테의 동작에 맞추어 행위를 진행했다.
그는 코요테가 접근하면 몸을 숙이며 코요테를 맞이하였고, 코요테가 뛰어오르면 함께 뛰어올랐으며, 가끔씩 트라이앵글을 세번 울렸다. 특히 지팡이를 휘두르며 코요테와 어울리는 그의 모습은 목동의 이미지를 떠올렸으며, 여기서도 그는 휘어진 손잡이가 아래를 향하도록 거꾸로 지팡이를 잡았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스는 코요테의 건초더미에서, 코요테는 보이스의 펠트 안에서 머물게 되었고, 삼일째인 5월 25일 보이스와 코요테는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행위를 끝낸 보이스는 도착할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공항으로 운반되었다.
이 행위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객들에게 공개되었고, 보이스는 코요테의 반응에만 집중했다. 보이스에 의하면, 코요테는 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한 첫 번째 이주자로서 미국의원주민인 인디언들과 교류했지만, 오늘날에는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동물이 되었다. 따라서 코요테가 인디언들의 주술적인 문화를 대변한다면,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의 자본주의를 의미하고, 구급차와 들 것은 물질주의에 빠진 현대인의 심각한 위기 상황을 경고한다. 결국, 보이스는 코요테를 통해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존재했던 태초의 정신적 문화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다. 1979 베를린 르네블록 갤러리 뉴욕에서 15년만에 문을 닫았지만 보이스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보충자료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Z-u1dgZJV9E
샤머니즘의 주술행위를 상기시키는 갖가지 설치작업과 퍼포먼스로 그가 세계 미술계에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자 1974년 그때까지 독일과 소원한 관계에 있던 미국 화랑가에서 그에게 초청장을 보내게 된다. 선뜻 초청에 응한 그는 펠트담요로 자신의 몸을 둘둘 만 채로 독일공항을 떠나 미국공항에 도착,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에 그대로 실려 뉴욕 르네블록 화랑에 도착하자마자 화랑 측이 미리 마련해 둔 화랑 내 동물우리에 들어가 그곳에 이미 갇혀 있던 늑대 코요테와 낯선 만남을 갖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수도사처럼 얼굴까지 펠트담요를 뒤집어쓴 그는 갈고리 지팡이로 낯선 침입자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는 코요테를 집적거린다. 3일간 지속된 이 퍼포먼스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계심을 푼 코요테는 낯선 이방인과 잠자리를 같이함은 물론 밖에서 매일 넣어주는 월스트리트저널 신문뭉치에 방뇨도 하게 된다.
요셉 보이스는 앤디 워홀을 정말 세게 비판하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지구를 떠나라" 이 말은 바로 미술 공장 공장장이었던 앤디 워홀을 두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보이스는 1986년 사망하고 앤디워홀은 1987년에 사망하다. 앤디워홀이 보이스 인물화를 안 남길 리가 없다. 두 사람은 1980년 뮌헨과 나폴리에서, 1982년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장소는 주로 전시장, 그러나 백남준과 보이스는 호형호제하는 절친한 친구였지만 보이스와 워홀, 우정이 맺어지지 않았다. 단지 독일과 미국의 거장을 대표했을 뿐이다.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아메리카는 나를 좋아한다 <이 작품은 요셉 보이스가 샤먼 예술가로서 미국의 원죄인 인디언(미국땅 원주인) 학살을 주제로 한 것이다. 인디언들 원한을 달래주는 '넋풀이굿'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스의 최고의 작품이다. 미국의 원죄를 다르면서 독일은 나치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사죄를 여러 번 했지만 미국은 원주민 학살에 대한 사죄가 전혀 없었음을 은근히 비꼬다> 코요테는 미국인 싫어하고 인디언들이 숭배하는 동물이다. 보이스는 토끼를 인간보다 더 영험한 생명체로 봤듯이 코요테를 동물이 아니라 신성한 위치로 올려 놓는다. 이 작품은 코요테을 통해 변방으로 밀어붙이는 문명세계의 패권주의를 조롱함과 동시에 대지를 어머니 삼아 자연의 형제로 사는 인디언의 본질적 삶의 추구를 모든 이들에게도 촉구한다
<뒤샹과 보이스 그리고 워홀 삼각관계 그런데 보이스는 뒤샹의 침묵이 과장되었다고 비판하다> 뒤샹은 '차가운' 예술, 보이스는 '따뜻한' 예술이라고 단순화할 수 있을 것 같다. 뒤샹은 동력을 중시하는 차가운 의자로 표현한 반면, 보이스는 온기를 중시하는 따뜻한 의자로 표현했다.
그 후로도 수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뒤샹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명한 보이스는 생애 말기인 1985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자본주의와 코뮌주의, 그리고 전체주의 체제가 진행된 이후 마르셀 뒤샹의 작업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좌우간 나의 관심은 마르셀 뒤샹을 다르게해석하고 그의 작업)을 확장시키는 데 있었다. 나는 그의 작업에서 비롯된 가장 중요한 간격을 메우고자 했고, 그런 점에서 '마르셀 뒤샹의 침묵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말했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미술을 포기하고 체스게임에만 몰두했는데시대의 뒤쳐진유행처럼 그의침묵은 인정되었다"
<예술적 교란으로 사회적 금기를 깨다. 기존의 모든 예술을 부정하다(Fluxus members break social taboos with artistic disturbance. And deny all art that has already existed in the past)> 1962 독일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창립식 인간이 할 수 있는 괴상한 짓은 다 했다. 그 중에서 백남준은 관중을 가장 많이 웃겼다. 마치우나스의 젊은 시절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머리를 위한 선>을 선보인다. 그리고 소 한 마리 잡아 먹듯 그들은 그랜드 피아노 한 대 완전히 해체시켜 버린다. / 서양미술사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요셉 보이스] 지금부터는 진짜 현대미술이다. 요셉 보이스는 한 마디로 말하면 현대서구미술를 제대로 조롱한 어떻게 보면 모욕을 준작가죠. 백남준과에 속한다. 슈테델미술관
<뒤샹과 보이스 그리고 워홀 삼각관계 그런데 보이스는 뒤샹의 침묵이 과장되었다고 비판하다> 뒤샹은 '차가운' 예술, 보이스는 '따뜻한' 예술이라고 단순화할 수 있을 것 같다. 뒤샹은 동력을 중시하는 차가운 의자로 표현한 반면, 보이스는 온기를 중시하는 따뜻한 의자로 표현했다.
그 후로도 수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뒤샹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명한 보이스는 생애 말기인 1985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자본주의와 코뮌주의, 그리고 전체주의 체제가 진행된 이후 마르셀 뒤샹의 작업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좌우간 나의 관심은 마르셀 뒤샹을 다르게해석하고 그의 작업)을 확장시키는 데 있었다. 나는 그의 작업에서 비롯된 가장 중요한 간격을 메우고자 했고, 그런 점에서 '마르셀 뒤샹의 침묵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말했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미술을 포기하고 체스게임에만 몰두했는데시대의 뒤쳐진유행처럼 그의침묵은 인정되었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 모든 동물은 사람보다 더 훌륭한 예술가다. 토끼는 최고의 예술가다. 토끼는 사람보다 그 난해한 현대미술을 더 잘 이해한다. - 요세프 보이스. Everyone is an artist. All animals are better artists than humans. Rabbit is the best artist. Rabbits understand the contemporary art that is hard to understand better than humans. - Joseph Beuys
<예술적 교란으로 사회적 금기를 깨다. 기존의 모든 예술을 부정하다(Fluxus members break social taboos with artistic disturbance. And deny all art that has already existed in the past)> 1962 독일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창립식 인간이 할 수 있는 괴상한 짓은 다 했다. 그 중에서 백남준은 관중을 가장 많이 웃겼다. 마치우나스의 젊은 시절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머리를 위한 선>을 선보인다. 그리고 소 한 마리 잡아 먹듯 그들은 그랜드 피아노 한 대 완전히 해체시켜 버린다. / 서양미술사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전시 제목이 바로 <최신음악의 국제 페스티벌>
뒤샹 이후 서양미술은 죽었다 -백남준. 그래서 서양인 중 누구도 가지 않은 모니터에 전자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전자 페인팅(비디오아트)의 길을 가다. 서양의 전자첨단공학과 동양의 심오한 사상과 철학을 하나로 합치다. 그런 면에서 르네상스 인간의 전형이다. 15세기 서양미술이 다빈치(1452-1519)로 시작했다면 20세기 세계미술은 백남준(1932-2006)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래, 첫번째 사진 '시대정신전' 카셀7> 2차대전 후, 유럽미술은 미국미술 그린버그 모더니즘 이론과 추상표현주의 주도로 맥을 못 추다가 프랑스 앵포르멜(Informel) 나왔으나 힘이 미약했고, 북유럽의 코브라(Kobra)가 3번의 전시로 오래가지는 못하고 단명했다. 이런 열악한 상태에서 독일이 나름 큰 역할을 하다. 그것이 바로 유럽미술의 부흥을 꾀하며 1955년 국제적 전시행사인 <카셀 도쿠멘타>다. 처음 열었을 때는 4년마다 다시 5년마다 열리고 100일간 전시했다. 이 행사는 나치시대 과오를 반성하는 데서 시작하다. 이 도시가 군수공장이 있는 곳을 국제미술의 도시로 바꾼 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프랑스의 앵포르멜 그리고 코브라도 참여했다. 유럽 추상을 대표하는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작품이 선보였다. 1960년대 들어와 유럽미술계 활력을 넣은 사람은 바로 이브 클랭 그의 1958년 4월 28일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에서 열린 <빈 공간>을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회화적 감수성의 구역으로 선언하다. 그리고 1960년 인체측정을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했고, 누드모델의 몸을 마치 살아있는 붓처럼 사용했다. 이런 와중에 보이스는 개념미술의 행보와 맥락을 잡아갔다. 클랭(1962년 사망)과 만초니(1963년 사망)의 아이디어가 기발했지만 단명했다. 이 무렵 보이스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 독일 쾰른에서는 1957년 하인츠 마크 등 주동으로 <제로그룹>이 결성되었다.
보이스는 온기이론과 플럭서스 활동으로 그 범위를 넓혔다. <카셀3>에 참가했다. 1967년 이탈리아에서는 <아르테 포베라>가 등장하다. 흙과 돌 신문지와 석탄 같은 보잘것없는 재료를 사용해 자연의 순환과 에너지 근원으로 회귀 등의 주제를 들고나왔다. 보이스와 유사한 점이 있다. 물질의 본성과 생명체의 유기적인 순환구조에 관심 가졌다. 이탈리아 마리오 메르츠는 등근 집 이클루를 통해 원시문명을 상기시키다. 마치 보이스가 유라시아를 통해 선사시대의 문화에 관심을 쏟은 것처럼 말이다. 카셀 4차 1968년 학생운동 일어난 혼란한 분위기 속 카셀의 창시한 '보데'는 물러났다 <카셀5(1972)> 하랄트 제만이 기획자 들어와 큰 변화가 있다. 제만은 이미 1969년 태도가 형식이 될 때를 기획해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서 기존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보이스가 필요했다. 여기서 보이스 100일 동안 관객과 민주주의 관한 열변을 통했고 마지막 날 메인 전시장에서 권투시합을 하다. 상대는 '크리스티안 뫼부스'였다. 심판은 보이스 제자인 '아나톨 헤르트베트'가 맡았다. <카셀6>은 사진과 영화를 중시했다. 월터더 마리아 대지미술관 리처드 세라의 미니멀 조각 <카셀7> 기획자 폭스때, 보이스가 마지막 참가했고 다시 회화가 중시되다. 바스키아, 바젤리츠, 임멘도르프, 산드로 키아 등이 참여했다. 그리고 베니스비엔날레(1976)도 참가 82년 베를린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수령이 된 <시대정신>전을 열기도 했다. 보이스는 개념미술의 아카이브 성격이 도드라졌다. -송혜영, 보이스 우리가 혁명이다 중에서
[요셉 보이스 20세기의 종말 런던 테이트 모던 2014년 전시] 백남준과 보이스, 20세기 서구문명사를 다 쓸어버리고 21세기를 다시 쓰다 / 요셉 보이스 죽기 1년 전 1985년 작품 유명 큐레이터 제만이 특별히 주문한 작품 / 랜덤한 배치 / 카셀 D 전시되기도 하다 / 선사시대의 고인돌 이 나오는 예술의 제로점인 원시상태로 돌아가야 진정 21세기를 내다볼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다 / 인류학적인 숭고미를 보여준다 / 백남준 작품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과 주제가 똑같다. 1) 뮌헨 현대미술관 소장 44개 2) 베를린 함부르크역역 현대미술관 소장. 보이스는 현무암 상붕에는 원형의 형무암이 마치 마개처럼 부착되어 있다. 현무암을 있는 그대로 쓴 것이 아니라 현무암의 몸체 상ㅅ에서 화분모양의 원추형을 잘라내고, 이것을 축축한 점토와 펠트로 감싼 후 도려낸 부분에 다시 부착하였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환경파괴와 인간성의 상실을 언급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의 낙관적인 관점은 인간과 자연을 치유하는 회복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이런 현무함을 수술하듯 고친 것은 죽은 현무암을 다시 살려낸 싱징적 의미일 수 있다. 정적인 응과와 동적인 분출을 통해 낡은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종말을 시작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작가의 의미도 엿보인다. 이걸 연골결합(Symphytum)이라고도 한다. 7000그루의 참나무에서 흙속의 현무암이 참나무의 뿌리에 영향을 공급하듯 20세기의 종말에서 점토와 펠트는 죽은 듯이 굳어버린 현무암에 다시 생명을 부여한다. 무언가 움직이고 샘솟는 희망의 메시지 말한다.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is a large installation consisting of thirty-one rough, bulky basalt rocks, which are strewn across the floor in a seemingly random manner. The stones are all a muted beige colour, mottled with patches of grey. Each rock measures between one and two and a half metres in length and has a cone-shaped hole drilled into the upper side of one of its ends. These cone-shaped cavities have been smoothed down and lined with clay and felt, and the pieces of basalt that were removed from the stones have been polished before being placed back into their holes. The rocks lie in loose, haphazard clusters that resemble piles of debris. However, they are broadly arranged in two groups, leaving a long gap down the centre so that viewers can walk among them.
This installation was made by the German artist Joseph Beuys in 1985. It is the third in a series of works that all have the same title and were produced in roughly the same way. The first of these, which comprises twenty-one stones, was conceived in 1983 for the exhibition Tending Towards the Total Work of Art at Kunsthalle Düsseldorf after its curator, Harald Szeeman (1933–2005), asked Beuys to make a new work for the show. While producing this first version of the work, Beuys also prepared another, which includes forty-four stones. The Tate installation is the final large-scale version of this work that Beuys oversaw. The artist was involved in selecting and preparing its stones in 1985, but he died in January 1986, before the work was installed.
Although Beuys made some initial sketches that illustrate possible ways of arranging the stones, there are no fixed rules for installing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This poses a challenge for curators, who must decide how to display the installation and whether to base their decision on previous displays of other versions that the artist helped to install. After Tate purchased this work in 1991, Tate curator Sean Rainbird and Beuys’s former Munich gallerist Bernd Klüser devised a composition for displaying the piece that drew on previous arrangements and the artist’s drawings. The work was first shown according to their plans at the Tate Gallery in 1992 and, aside from very minor alterations, it has been displayed in the same way since.
The title of this installation makes reference to what was at the time the impending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the art historian Mark Rosenthal has suggested that the work expresses a pessimistic view of this by evoking ‘the haphazard aftermath of a calamity’ (Mark Rosenthal, ‘Joseph Beuys: Staging Sculpture’, in Menil Collection 2005, p.84). Furthermore, this work could be seen as a reflection on the physical effects of the passage of time: clay, felt and basalt are materials that were used frequently by Beuys, who often stated that he was interested in basalt’s status as a volcanic rock, and the art historian Victoria Walters has argued that he associated it with ‘a very long-term, geological notion of time’ (Victoria Walters, Joseph Beuys and the Celtic Wor(l)d, Zürich 2012, p.248). In 1984 Beuys claimed that he wanted this installation to allegorise a relationship between the past and the near future to which its title refers:
This is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This is the old world, on which I press the stamp of the new world. Take a look at the plugs, they look like plants coming from the stone age. I took great pains to drill them out of the basalt in a funnel shape and then set them back into the hollows using felt and clay so they cannot do each other harm, and can keep warm. It is something agile, eruptive, lively in this solidified mass – in the same way that the basalt itself was once pressed out of the earth’s interior.
(Quoted in Willisch and Heimberg 2007, p.7) Beuys’s suggestion that this installation produces a harmonious relationship between ancient, natural forces and the ‘new world’ may have been linked with his commitment to the ecological movement in this period, which led him to found the German Green Party in 1980.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is also directly connected with another of his major late works, 7000 Oaks: city forestation instead of city administration 1982, which was produced by Beuys for Documenta 7 in Kassel, Germany. To make this work, Beuys placed seven thousand stones on the square in front of the Museum Fridericianum, Documenta 7’s central exhibition space. Over the next five years the rocks were gradually removed and each was placed next to a newly-planted oak tree elsewhere in Kassel. In 1983 forty-four of the stones were moved from the square to Düsseldorf for the 1983 Galerie Schema installation of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before being replaced. Beuys stated that he wanted 7000 Oaks: city forestation instead of city administration ‘to initiate the gradual “straightening process”, the “enlivening process” of nature as well as of the social–ecological, that is, social organism’ (quoted in Eckart Förster, ‘“Gentleness, Indirectness, Imperceptibility, and often ‘Anti-Technics’ are my choices”: on Joseph Beuys’ The End of the 20th Century’, in Menil Collection 2007, pp.62–3)
보이스는 <무더기(The pack)>에 관해 "나는 썰매와 버스를 통해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급한 상황에 대해 뭔가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시 한 번 온전히 되돌아보고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숙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무더기(The pack)>에서 산업혁명의 성과물인 버스는 테크닉에 의존한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에 반해 과거의 운송수단인 썰매는 자연에 의존했던 원시 사회를 의미하며, 펜트와 지방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게 하고, 램프는 어둠을 밝혀주는 도구가 된다. 자세히 보면 버스는 미술관 내부의 막힌 공간을 향해서 있고, 썰매는 버스에 등을 돌린 채 출구를 향해 서 있다. 다시 말해 언제나 출발이 가능하도록 완전하게 무장된 썰매는 현대 문명의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과거의 정신성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Further reading Joseph Beuys: actions, vitrines, environments, exhibition catalogue, Menil Collection, Houston 2005, pp.84, 136–49. Susanne Willisch and Bruno Heimberg (eds.), Joseph Beuys – Das Ende des 20. Jahrhunderts /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Munich 2007. It is Yet To Come: A Dialogue with the Marx Collection, exhibition catalogue, Hamburger Bahnhof, Berlin 2013, pp.11–21. Lucy Watling January 2014 Supported by Christie’s.
보이스의 예술세계에서는 서방의 기독교와 동방의 샤머니즘이 전혀 거부감 없이 조화롭게 엮어냈다. 동과 서, 정신과 물질, 원시사회와 문명사회 유기적 통합세계 속에 하나로 녹아들어 용해된다. 물질과 과학 만능주의 속 황폐화된 문명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그에게 기독교와 샤머니즘이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하여간 보이스이 최고의 걸작인 코요테 1부 2부 3부 이것은 원시시대의 셔먼들이 비밀스런 언어로 동물과 소통하는 영적인 교류를 퍼포먼스아트로 보여주다. 코요테 3부(아래) 백남준과 함께 1984년 도쿄 소게츠 홀에서 선보였다. 보이스도 어려서 피아노를 배워 치는 솜씨가 상당했던 것 같다. 바로 이런 장면이 유럽과 아시아가 하나되는 유라시아 랑데뷰의 전형적 풍경
1969년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열린 기획자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 1933-2005)'이 마련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 전에 보이스와 리처드 세라
[아래] 샤먼집의 줄들 재료: 펠트, 목재, 외투, 토끼가죽, 원고, 구리, 수정체, 가루들 1964-1972 호주 캔버라 국립미술관 <보이스는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십자가형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백남준처럼 샤머니즘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서로 연결한다면서 이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샤머니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샤먼은 물론 온전한 사회에서만 그 임무를 완수하며, 이런 사회는 발전하는 초기 단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로부터 멀어져버린 우리 사회는 상실감에 빠져 있으며, 다시 샤먼을 필요로 하는 절실한 단계에 와 있다. 다시 말해, 샤머니즘은 과거의 한 점으로 표기되지만, 역사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신적인 삶의 표상이 되는 가장 깊은 뿌리가 될 수 있다.”
1969년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열린 기획자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 1933-2005)'이 마련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 전에 보이스와 리처드 세라
<사진> 보이스는 자신의 전시 때 칠판이 100개를 준비해 거기에 자신의 전시개념을 아주 명쾌하게 풀어서 적는다. 1개로는 부족해 100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작품이 된다. 삼성재단은 보이스의 <함부르크 흑판(1975)> 아래 1974.11. 런던의 동시대미술연구소
보이스는 자신의 전시 때 칠판이 100개를 준비해 거기에 자신의 전시개념을 아주 명쾌하게 풀어서 적는다. 1개로는 부족해 100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작품이 된다. 삼성재단은 보이스의 <함부르크 흑판(1975)> 아래 첫번째 사진 소장하고 있다. 보이스 자체가 '사고하는 조각'이었던 것이다."사고하지 않는 사람은 (지구를) 떠나라(Wer nicht denken will, fliegt...raus)" 여기서 사고는 지성인의 고차원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감정, 직관과 영감, 상상력이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오히려 보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잠재된 능력에서 그런 것이 가장 훌륭하게 발휘된다.
"사고하지 않는 사람은 (지구를) 떠나라(Wer nicht denken will, fliegt...raus)" 여기서 사고는 지성인의 고차원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감정, 직관과 영감, 상상력이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오히려 보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잠재된 능력에서 그런 것이 가장 훌륭하게 발휘된다.
<나는 사고를 조각한다> "나는 '머리'와 '무릎' 뿐만 아니라 '팔'로도 생각한다. 나는 '온몸'으로 창의력을 발휘한다" - 요셉 보이스. 보이스는 인간의 사고하는 활동을 창의적인 조각품으로 간주하다.
<돈(Geld)과 자본(Kapital)을 구별하다> 보이스 <예술(사고의 창의력)=자본> 공식을 어떻게 봐야 하나? 여기서 자본은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돈이 아니라 인간의 창의성을 의미한다. 돈은 결코 경제적 가치가 될 수 없다. 일을 수행하는 능력을 자본으로 본다. 창의성과 생산물의 인과관계를 중시하다. 여기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다.
보이스가 뒤셀도르프 미대에서 해직된 것은 자신의 수업에 입학절차를 밟지 않는 학생도 수업에 참여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지만 보이스 당신 대학교수로 너무나 많은 기행과 비상식적인 이벤트로 논란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뒤셀도로프 입학식 때도 보이스의 퍼포먼스는 문제가 당시 지역 언론에서 "교수가 마이크 앞에서 짖어댄다"라는 제목과 함께 원숭이 얼굴과 보이스 얼굴을 같이 실었다고 <아래 첫번째> 보이스 뒤셀도르프 미대 입학식 1967. <2-3번째 사진> 1964년 아헨 공과대학 갈색십자가와 지방모서리. 보이스는 당시 기존 독일 교육제도의 모든 틀을 깨려고 무던 애쓰다. 또한 유기적인 통합정신을 강조하면서 전통의 실기교육관을 벗어나려 했다. 보이스는 사물을정확하게 포착하는 드로잉을 강조하다 보이스는 이것을 <의외 프로그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보이스 왈 "교육이 예술이다". 교사가 된다는 건 나의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을 완성하는 것 같다. 백남준 왈 "가장 교육적인 것이 가장 미학적인 것이다" 둘은 비슷하다. 독일이 지금처럼 세계에서 가장 모범국이 된 것은 68혁명 이후 교육민주화(민주시민 양성) 교육인간화(창의적 인간과 축제적 인간 양성)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등수와 경쟁과 점수를 100% 없애다. 독일은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정치를 참여하면서 <녹색당(교사가 당원의 중심)>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앞서다.
<요셉 보이스의 대한 '한스 페터 리겔'(Riegel 61세, 취리히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작가이자 경영 컨설턴트이다. 어린 나이에 그는 Beuys 전 교수와 마찬가지로 뒤셀도르프에 살았던 Jörg Immendorff의 비서이자 조수였다. 보이스에 관한 리겔의 2013년 첫 번째 책은 아티스트 아이콘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Beuys 전기의 네 번째 책이 이제 출판되었다)의 생각 '슈피겔' 기사 중에서>
보이스는 예를 들어 기존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사회를 원했다 그는 지금의 의회 민주주의 시스템에 반대했다. 직접 민주주의를 제안했다. 또한 국가가 모든 것, 특히 학업 교육을 포함한 학교 시스템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걸 요구했다. Beuys는 소위 국가 중심적 권력 시스템에 대해 실랄하게 비난했다. 언론도 역시 여기에 포함시켰다. 내 생각에 그는 "Box-in이 아니라 Box-out(상자 밖에서) 생각하기"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선구자라고 생각한다.<요셉 보이스의 대한 '한스 페터 리겔'(Riegel 61세, 취리히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작가이자 경영 컨설턴트이다. 어린 나이에 그는 Beuys 전 교수와 마찬가지로 뒤셀도르프에 살았던 Jörg Immendorff의 비서이자 조수였다. 보이스에 관한 리겔의 2013년 첫 번째 책은 아티스트 아이콘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Beuys 전기의 네 번째 책이 이제 출판되었다)의 생각 '슈피겔' 기사 중에서>
Joseph Beuys Lightning with Stag in its Glare(B. 1921, KREFELD, GERMANY; D. 1986, DÜSSELDORF)
Joseph Beuys was born May 12, 1921, in Krefeld, Germany. During his school years in Kleve, Beuys was exposed to the work of Achilles Moortgat, whose studio he often visited, and was inspired by the sculptures of Wilhelm Lehmbruck. Beuys began to study medicine in 1940, but his studies were interrupted when he joined the army and served as a fighter pilot. During a mission in 1943, he was badly injured when his plane crashed in a desolate region of south Russia. This experience would resonate in all of his later work.
After the war, he decided to dedicate his life to art. In 1947, he registered at the Staatliche Kunstakademie Düsseldorf, where he studied under Joseph Enseling and Ewald Mataré. After Beuys graduated in 1951, the brothers Franz Joseph and Hans van der Grinten began to collect his work. Eventually becoming his most important patrons, they organized his first solo show at their house in Kranenburg in 1953. Beuys was appointed professor of monumental sculpture at the Staatliche Kunstakademie Düsseldorf in 1961. The year after, he began to associate with Fluxus artists, principally Nam June Paik and George Maciunas, and later he met Minimalist artist Robert Morris. He helped to organize the Festum Fluxorum Fluxus at the Staatliche Kunstakademie Düsseldorf in 1963, and he participated for the first time in Documenta in Kassel in 1964.
In 1967, Beuys founded the German Student Party, one of the numerous political groups that he organized during the next decade. In 1972, he was dismissed from the Staatliche Kunstakademie Düsseldorf amid great controversy for admitting to his class over 50 students who previously had been rejected. The following year, he founded the Free International University for Creativity and Interdisciplinary Research. He increasingly became involved in political activities and in 1976 ran for the German Bundestag. In 1978, he was made a member of the Akademie der Kunst, Berlin. The 1970s were also marked by numerous exhibitions throughout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Beuys represented Germany at the Venice Biennale in 1976 and 1980. A retrospective of his work was held at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in 1979. He was made a member of the Royal Academy of Fine Arts, Stockholm, in 1980. During the inauguration of the 1982 Documentain Kassel, Beuys planted the first of 7,000 oak trees; in other cities, he repeated this tree-planting action several times in the following years. In January 1986, the artist received the Wilhelm Lehmbruck Prize in Duisburg. On January 23, 1986, Beuys died in Düsseld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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