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거중요전시행사

[김환기백년전_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전]_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2013년 2월 27일부터 6월 9일까지
 <네이버> 온라인 감상 김환기탄생 100주년>
artssearch.naver.com/search.naver?rev=6&where=arts_arts_list_viewer_theme&themeId=259&flash_idx=0 

[작가소개 김환기]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1913년 3월 26일 (전라남도 신안)에서 출생 1974년 7월 25일일 뉴욕에서 사망 니혼대학교 미술학 학사뷔1940년 서울 개인전수상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경력1963 한국미술협회 이사장1959-1963 홍익대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 환기미술관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전 그의 집인 환기미술관에서 그의 대표작 70여점의 소개된다 

김환기 I '세레니티(VII-65)' 178 *125cm 1965 [왼쪽]. '7-VI-69 #65' 코튼에 유채 178 *127cm 1969년[오른쪽] 김환기는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자라서 그런지 청색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예민한 촉수를 가진 것 같다. 청색의 다양한 변주와 섬세한 감각에서 단연 최고이다. 청색의 아름다움을 통렬하고 처절하게 보여준다. 

김환기 I '10-VIII-70 #185(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점화 292 x 216cm 1970년 ⓒ 환기미술관 

김환기의 그림 중 1970년 대표작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환기화백 말년 뉴욕에서 고향의 산천과 그리운 사람들을 무수한 점(별)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보면 압도할 만큼 푸른 점을 나타낼 도판이 없어 그림 제목이 된 시를 함께 남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중에서 / 그별을 처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가 /어디서 무엇이되어 다시만나랴 
- 김광섭

김환기 I '새벽별' 캔버스에 유채 143*143cm 1964 파리시절 

환기화백의 파리시절 작품이다. 그의 청색에 담긴 무양은 한국적 정서의 원형을 건드리면서 한국적 기화를 상징화 단순화하고 있다 

"내 예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소. 여기에 와서 느끼는 것은 시정신이오.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파리에 와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 같소. 밝은 태양은 파리에 와서 알아진 셈" - 김환기  1957.1 파리에서 

환기미술관은 한국 근·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알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전을 개최합니다. 본 전시는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의 첫 번째 신호탄을 알리는 전시로서 김환기 작업 세계의 전반을 아우르는 유화, 드로잉,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실험을 통한 시대별 대표작 70여 점과 함께 그의 일생을 따라 가 볼 수 있는 사진과 기록자료, 작가의 유품을 통해 수화 김환기의 삶과 예술세계를 총망라하여 보여준다 

김환기 뉴욕작업실 재현. '무제' 코튼위에 유채 211*46cm 1971[오른쪽] 

그만의 독특한 색채는 환희 그 자체다 세련된 감각과 우아한 기품은 참으로 그 당시로는 드문 일이다. 

김환기 I '14-Ⅲ-72 #223' 코튼에 유채 254*200cm 1972 [왼쪽] 한국의 산천을 연상시키는 분위기가 깔려있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에 생각해 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 1973년 1월 8일 김환기 일기 중에서 

김환기의 1971년 뉴욕 스튜디오 재현 사다리 이젤 파이프 가방 애용한 가방과 기타 대형화구 등이 놓여있다.

김환기 I 'Universe 5-IV-71 #200' 코튼에 유채 254*254cm 1971 [오른쪽] 

여기는 1971년 뉴욕 스튜디오 재현 사다리 이젤 파이프 가방 애용한 가방과 기타 대형화구 등이 놓여있다.

김환기 I '7-VI-69 #65' 코튼에 유채 178 *127cm 1969 

감상자는 그의 그림 앞에서 정신을 잃고 있다. 꼼작달싹하지 않는다. 무아지경이다. 미적 상상력을 최대로 발휘하며 그림의 커다란 바다에 빠진다. 그의 청색은 서양의 코발트 블루와는 다른 쪽밫 반물색 반파랑의 색채가 한국의 하늘을 연상시키는 점이 특징이다. 거기다 여기서는 캔버스보다 코튼(coton)에 그리기에 버짐효과를 내어 한국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김환기 I 'Universe 5-IV-71 #200' 1971 

환기선생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바다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이번 탄생 100주년전은 그의 집(환기미술관)에서 전시되어 아주 편안하게 보이고 깊은 사색의 바다에 빠지게 한다. 여기 감상자의 옷색깔 자체도 환기의 환희의 청색으로 물들인 것 같다.

김환기 '무제' 22-III-70, 코튼에 유채 150×100cm 1970 ⓒ 환기미술관 

김환기 I 'Universe 5-IV-71 #200' 1971 ⓒ 환기미술관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컬렉션A More Perfect Day: Collection of Mudam Luxembourg] 
아트선재센터 2013년 4월 13일-6월 23일 (총 62일) 회화, 설치, 사진, 영상 등 약 30여점 참여작가 23명 

에이야-리사 아틸라, 마이클 애쉬킨, 피에르 비스무스, 실비 블로셰, 크리스토프 뷔헬, 마사야 치바, 알랭 드클레르크, 다미앙 드루베, 예스페르 유스트, 미셸 마즈러스, 가스톤 다마그 & 마누엘 오캄포, 로버트 & 샤나 파크해리슨, 앙트완 프럼, 토비아스 푸트리,장-루이 쉴러, 네드코 솔라코브, 볼프강 틸만스, 수-메 체, 교이치 츠즈키, 카라 워커, 프란츠 베스트 

[부드러운 교란(Gentle Disturbance)_백남준을 말한다] 백남준아트센터1층에서 2013.1.29-6.30까지 
"당시 한국에서 맑시스트가 된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 백남준 
[오마이뉴스관련기사: 예술적 교란으로 사회의 금기를 깨다] http://bit.ly/155h2kl
 


유럽의 전위운동 플럭서스에서 백남준은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해프닝아트를 주동했는데 이것은 각 사람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오줌발이 누가 세고 오래가는 가를 경쟁하게 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애국주의를 가장 싫어했는데 당연하다. 나치즘이야말로 가장 애국주의가 아닌가. 그러나 백남준은 정말 애국을 많이 한 사람이다. 키작은 백남준은 싱거운 서양큰애들을 가지고 높다 

백남준은 소통과 참여를 방해하는 부르주아문화교양이 만든 서구중심의 왜곡되고 굴절되고 조작된 질서를 비위계적이고 비선형적인 교란장치를 통해 그 주파수를 바꿔놓은 사람이다. 세상이 제대로 된 정상궤도로 달릴 수 있도록 그런 면에서 그를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든 트릭스터(Trickster)라고 하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다 

1940년대 나온 맑시즘 관련책자 백남준아트센터전시 

백남준 빼고 이 세상에 진정한 맑시스트는 없는 지 모른다. 그는 맑시즘을 부드러운 교란과 평화적인 예술의 그릇에 담아 풀었을 뿐이다. 백남준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맑시즘을 (디지털미디어) 아트로 푼 사람이다. 예술이란 인류애의 미학적표현에 다름 아니라 그런 것인가 그러나 나는 맑스를 모르고 그래서 백남준을 잘 모른다 

- 백남준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죠? 
"백남준은 전설처럼 신화화 된 상태로 그 기행만 알려져 있지 그 밑에 깔린 있는 의미나 철학이 어렵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모를 수 있다. 백남준을 센세이셔니즘으로만 보기 때문에 백남준 대한 진정한 
이해와 평가가 한국에는 제대로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 백남준은 10대 막강한 독서가로 쇤베르크, 맑스도 섭렵했는데? 
"당대 최고부잣집(지금으로 치면 삼성가) 막내로 태어난 백 선생은 집안도 좋았지만 워낙 타고난 기인이에요. 어려서 마당놀이 할 때도 피아노건반처럼 선을 그려놓고 퍼포먼스 하듯 노는 것을 보고 피아노를 시켰다는 일화도 있고요. 어려서부터 아방가르드적 기질이 있었어요. 10대에 이미 쇤베르크 판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헤맸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죠. 맑스에 대한 열광은 그 당시 지성인과 엘리트는 다 맑시스트였죠. 그런 정서가 어린 백남준에도 전파되었고 그 나이에 그걸 받아들인 거죠. [김형순질문 김홍희대답]
 

장 폴 파르지에 영상다큐. 프랑스어 자막 "그 당시 맑시스트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백남준은 10대에 철학적으로 맑스 예술적으로 쇤베르크가 그의 스승이었다. 여기 댜큐는 백남준과 인터뷰 내용을 장 폴 파르지에가 1990년 편집한 것인데 자막에 이렇게 적혀 있네요 당시 한국에서 맑시스트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À cette époque en Corée il était dangereux d'être marxiste 

장 폴 파르지에가 만든 이 다큐는 백남준이 갓을 쓰고 그가 10대에 작곡한 그의 첫번째 곡을 연주하는 모습인데 백남준처럼 가장 한국적인 분위기와 멋을 풍기는 사람은 못 봤다. 그는 자신이 몽골형통인 것은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다. 싸이의 말춤은 전형적인 몽골스타일이다. 싸이는 얼굴도 몽골식이고 말춤도 몽골식이다. 아래 갭션 이게 제가 작곡했던 첫번째 곡이에요 Voici ma premiere composition 

백남준이 '참여와 소통'을 통해 이룩하려고 한 '전자민주주의'는 맑스가 '인간소외와 착취사회'를 해결하려고 한 '계급혁명'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이념보단 확실히 예술이 더 위력적이고 지속적이고 인간적이고 평화적이다 

1967년 옷을 벗은 채 첼로를 연주했던 작품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전시장 영상자료. 샬롯의 누드첼로연주. 백남준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다 그래서 행위예술의 창안한다. 그는 서구의 근대라는 우상과 성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서구인들이 흔히 하는 명연주 다시 말해 근대적 교양과 고상한 취미와 고급문화로 생각하는 연주를 깨고 섹스로 하는 연주를 도입한다. 이것은 바로 아방가르드정신의 면모인데 서구의 고급문화저급문화의 이분법을 깨는 것이다.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 유럽의 근대적 가치과 부르주아적 정형을 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연주한 샬롯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나중에 재판에서 예술로 인정을 받아 석방된다 

백남준의 섹슈얼리티 미학은 전복시키는데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첼리스트 무어먼과 해프닝아트인데 원래 섹스란 남자가 여자를 연주하는 것이다. 섹스트로니크의 경우에서 보듯 섹스의 발동을 거는 것은 남성이고 거기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런데 백남준은 자신이 때로 첼로가 되어 여자가 남자를 연주하도록 한다. 앞에서 어근한 일종의 전도이다. 그러면서 무어먼은 첼로를 연주하다가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 준비되었던 드럼통에 몸 전체를 담근다. 그러면 물이 넘친다. 이 해프닝은 일종의 자연과 문명의 순환을 은유한다. 다시 말해 물과 불의 순환이다. 물인 여자와 불인 남자가 또다시 뒤집어져 물이 불이 되고 불이 물이 된다. 물과 불이 서로 물린다. 서로를 안는다. 물아일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색즉시공의 원리에 빠진다. 서구의 위계적 이분법을 깨는 동양미학의 구현이다. 

백남준 TV침대.1972.1991 

백남준의 TV침대 영상 중 아주 야한 장면이 많은데 여기서는 찍히지 않았다. 이것은 샤롯과 같인 해프닝을 자주했는데 샤롯이 암에 걸려 건강이 나빠지자 이런 침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계와 섹슈얼리티와 인간과 경계가 없는 백남준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TV 침대 백남준은 TV도 침대처럼 친근하게 봤다 그뿐 아니라 TV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비디오 내용이 담겨져 있어 인간의 행복한 성생활에 대한 염원과 인류의 공존과 평화에 대한 염원도 담겨 있다 

[자기소개_남준스타일] 나는 3개의 서양언어와 3개의 동양언어를 배우고 홍콩에서 카이로 그리고 레이카비치를 방랑한 이 소수대륙 소수국가에서 온 한국인 - 백남준 

너무나 귀여운 장난꾸러기 백남준 그의 해프닝아트는 어쩌면 어린 시절 골목대장하면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어려서 놀라운 해프닝아트의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그게 예술인지도 모르고 예술을 한 시대가 그립다. 예술이란 자유를 위한 자유이고 무목적의 행위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장난으로 좋아서 위성아트를 했는데 그게 나중에 인터넷의 아이디어가 될 줄 누구 알았으랴 무용성의 유용성 그게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것이다. 백남준의 말대로 예술은 인간의 자살 등을 최대로 막아주는 안전벨트이다 

[백남준의 또 다른 면 그는 참 조심스러운 사람이야] 그가 소위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면 텔레비전 나가서 일본말 잘하고 일본친구들 많고 하면 마구 일본말로 떠들 수 있겠어요? 전혀 안하는 사람이라는 거.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문화예술계에서는 백남준을 인터뷰하는데 상당히 거북해해요. 백남준에게 질문하면 백남준은 영어로 대답한단 말이야. 동경대학 출신이. 그렇다고 그쪽에서도 백남준에게 일본말로 하라고 강요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저쪽에서도 막판에는 영어로 할 수밖에 없어. 사석에서는 안그러지 물론. 사석에서 밥 먹을 때 영어로 대답이야기 할 사람이 어딨겠어. 일본친구들 앞에서.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도 동경대학 동창생들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어. 그러나 공식석상에 나오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단 말이야. 근데 그게 ‘저 사람은 훨씬 나보다 심중으로 강한 사람이다’라고 느낀 것은 ‘내가 동경대학 나왔고 그랬으면 내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아, 이건 참 이건 이슈가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만큼 백 선생은 용의주도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에요. 일본에 관련된 부분만큼은. - 이용우미술평론가 

[백남준 자칭 3류 예술가] http://bit.ly/EUlsC 
"넥타이는 맬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술 수도 있다." 

백남준 살럿 휴먼 첼로 1965년 뉴욕 사진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을 포기한 순간부터 굉장히 자유로웠다" - 백남준
 

사실 백남준은 독일에서 자신의 예술파트너를 구했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구세주처럼 미국에서 예술파트너를 만났다. 그녀는 바로 줄리아드 출신의 재원인 샬럿, 그녀는 남준을 받아줄 줄 아는 지극히 현명한 여자였다. 그만큼 배포가 컸다. 샬럿이 없다면 남준도 없다. 남준이 없이 샬롯이 없다. 둘은 부부는 아니지만 예술적 파트너로 최상이었다. 백남준은 샬럿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그의 천재성을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했다. 이 작품을 보라 샬럿이라는 여자가 얼마나 남자를 제대로 받아줄 줄 아는가 서양남자도 아니고 동양남자를 그는 백남준이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천재인 것을 알았기에 거장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100%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정말 백남준은 최고의 행운을 만난 것이다. 백남준은 여기서 자신의 몸을 첼로로 바꿨다. 첼로는 인간공학과 문명이기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이것을 연장한 것이 TV이고 바로 인간의 몸이다. 백남준은 TV를 통해서 인간이 확장되고 지구촌을 만들 거라는 맥루한의 생각을 지지했다 
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hmyhm1990&logNo=120164066104 



이 사진은 처음 보는 것이다. 백남준이 뒤샹에 대한 열등감이었나. 뒤샹이 완전히 벗은 여자와 체스를 두는 유명한 사진이 있는데 하여간 매우 인상적이다. 피아노에 따라서 완전히 벗은 어린 소녀가 몸짓이 달라진다. 피아노의 감흥을 받아서 그런가. 나중에는 완전히 누워버리는 장면도 있다. 역시 백남준다운 멋진 발상이다. 백남준은 소녀를 통해서 사람의 연장인 피아노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싶었던 것인가 예술가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사람인데 백남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뒤샹 워홀 피카소 백남준은 같은 족속이다. 이런 해프닝아트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백남준이 얼마나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http://www.namjunepaik.eu/paik_on_photographs.html 

[백남준의 선물6_국제학술심포지엄 2013.4.26] 강연자료사진 중에서 

백남준의 첫 전시장 모습.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고 피아노를 부스면 예술이 된다.  서구근대성의 성상의 파괴자 백남준 예술적 전복자 백남준은 최고의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식민지나라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사실 추방자이기도 하고 도망자이기도 하고 정치망명자이기도 하고 유럽에서는 약소국 작가로 예외자 소외자였는데 그것의 대안으로 소통의 미학을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추방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과거전통음악 혹은 예술을 추방하는 것인지 아니면 서양미술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려고 한 것인지 이런 결론을 도달하려면 더 세밀하고 정확한 미술사적 접근과 해석이 요구된다. 그런데 그의 첫 전시에 서양예술을 상징하는 뮤즈를 욕조에서 해체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백남준 독일 부퍼탈에서 연 첫 전시홍보를 위한 전단자료로 사용한 1960년 4월 27일 경향신문 4면 

1963년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시도한 랜덤 액세스를 통해 관객이 전시에 참여하는 시도 다시 말해 즉흥작곡에 참여하게 하는 방식은 오늘의 댓글과 같은 것이다. 소외론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소통론을 내세우며 그는 서구적인 기준에서 소외된 동양작가로 이걸 소통의 장치로 삼았으니 참으로 선견지명이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보니 소통과 참여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런데 댓글은 게릴라성이라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튀어나올지 몰라 고의로 조작하고 왜곡하는 기존의 미디어방식의 소통을 교란시키고 당황하게 한다. 백남준은 진정 고등사기꾼이고 소통의 교란자임에 틀림없다. 백남준은 역시 문화민주주의자이고 작가이기에 훨씬 그 수가 높다 들키지 않고 볼 수만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성을 드러낸다. 

그가 독일에서 첫 전시를 할 때 쓴 전시홍보지를 보면 모든 경향신문 1960-1961년 것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4월혁명을 지지하고 독재자를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5.16 군사쿠데타 때 잠시 폐지조치되기도 하는데 이런 방식은 백남준의 영리하고 약은 정치적 메타포이다. 외국인이 읽을 수 없는 경향신문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그런 사실 역시 백남준스타일의 전형이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인터뷰] 백남준비디오아트 탄생50주년 2013. 01.30(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김홍희관장, 2017카셀도쿠멘타 총감독 선정위원에 위촉(2013.4.17) [오마이뉴스관련기사] http://bit.ly/VNjEAj

- 백남준은 음악가인가 미술가인가 
"백남준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독일 뮌헨대학에서 고전음악을 공부하게 되는데 백남준은 이런 클래식 회의를 가지게 되고 피아노 사이에 피아노 사이의 음악 없을까를 생각해 두 대로 치는 피아노를 치는 발상도 하게 되죠. 그런 어떤 고전음악 돌파구를 찾고 있었는데 그 때 존 케이지 만남 우연히 만나 사상적으로 크게 매료되죠. 존 케이지 말하는 음악은 문학 철학이 다 음악이고 음의 화음보다 소리의 조직을 음악이라고 보죠, 바로 비트음악 몸의 맥박을 비롯한 신체의 소리 거리의 소리 일상과 기계의 소리 등 모든 소리가 음악의 기원이 된다는 생각했죠. 음악도 작곡을 해서 연주라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조직으로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발상 그걸 주역에서 얻어왔죠 그러다보니 비결정성 우연의 소리의 도입이 중요하게 봤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된 셈이다. 서구인이지만 동양정신에 함몰된 철학자에게 서양음악에 젖은 동양인 반대 입장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죠. [백남준은 이걸 모래 씹은 것 같다고 해죠] 소음 침묵 정적 호흡소리 들리지 않는 차원의 소리까지 음악이 될 수 있었죠. 이런 새로운 음악철학이 백남준으로 하여금 음악의 고정관념 깨고 되고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어 행위음악이 되죠. 그래서 매우 자극적 충동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죠. 이것은 결국 음악이라는 장르의 한계 벗어나 전자음악이 있듯 전자미술 전자비전으로 확장 탈장르의 현상을 보이게 되죠 미술의 범위가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죠" 

[이영철 초대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인터뷰] 백남준비디오아트 탄생50주년 2013.02.02(토)  
"백남준은 최초의 근대에 대한 강박증이나 열등감이 없는 비근대적 예술가다" - 이영철 
[오마이뉴스관련기사] 
http://bit.ly/15kAveD 


- 백남준과 존 케이지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백남준은 스승이 없어. 존 케이지 백남준의 스승이 아냐. 길잡이 하지 않았어. 특별히 가르친 것도 없어. 한국사람 항상 오해해. 오해 안했으면 좋겠어. 모든 사람이 스승이라는 차원에서 모두가 스승이겠지만 배움과 가르침 관계에서 스승은 존재하지 않아요. 상호학습이야. 대화 속 깨닫는 거야(방향제시에 도움을 준 것?) 자극제 역할을 한 거죠. 넥타이 잘랐지. 존경하는 사람의 넥타이를 어떻게 잘라. 20살이나 많은데 어떻게 잘라(아버지뻘) 이게 얼마나 파괴적 속성(못 말리는 성정 타고난 그의 파괴성)이 있어. 뭐냐면 상대를 압도시키는 힘이 있는 거야. (동양사람 백남준 사람 체구도 크지 않고 서양사람 웃기면서 압도하는 것) 그는 총사령관이야. 영원히 총사령관이야. 자기가 대통령이야. 백남준 이외는 슈퍼가 존재할 수가 없어. 백남준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야. 불교적으로 단독성(사상적인 면에서 동양이 풍부하다?) 어디 저녁밥 먹으면서 이야기계속합시다" 

[박만우백남준아트센터관장] 백남준비디오아트 탄생50주년 2013. 02.25(월) 백남준아트센터관장실 
[오마이뉴스관련기사]
 http://bit.ly/10yMFhg 


- 왜 첫 전시제목이 음악의 전시인가? 
"백남준이 음악전공자가 아니었다면 비디오아트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리를 시각화하는데 있어서 미술전공자가 전혀 흉내 낼 수 없는 사운드에 대한 탁월한 리듬감과 템포감각이 이었기에 이것이 가능했고 그래서 그는 비디오아트를 창시할 수 있었다. 그는 이원화된 서구의 현대예술의 교란시키면서 예술에 있어서의 음악과 미술을 융복합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그래서 현대미술에 엄청난 파장과 충격과 영감을 줄 수 있었다. 그의 TV전자매체는 결국 서양악기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UCC도 그런 측면에서 나왔고 1960년대 누벨바그영화의 기수인 장 뤽 고다르가 말한 '카메라의 만년필화'도 유사한 콘셉트라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의 행위음악은 결국 공간과 신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비인간화된 인간의 문명을 생명의 원천으로 회복시키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 이번 교란자라는 주제로 열리는 상설 전에 대해서 한마디 하신다면요? 
"탁월한 세계관을 가졌고 백남준은 보다 더 근원적이고 내재적인 인간의 욕망을 분출시키면서 파괴가 아니라 사회의 변화와 전복을 꿈꾸었죠. 예술을 통해서 개인적으로는 '섹스(Sexuality)'와 사회적으로 '혁명'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거죠. 부드러운 교란이란 결국 예술의 형태를 취하기에 당연하고요. 정치적 도구나 정치선전이 아니었잖아요. 여기서 일상적 삶이 중요한데(후설이 말하는 생활세계[Lebens Welt/Le monde de vie]와 같은 개념) 그 도구인 법 제도와 정치이념과 경제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전복을 꿈꾼 거죠. 자연이 모태이고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 물 흐르듯 살아야 하는 본연의 것을 망각하고 당시 철학자들이 자본의 편의성 때문에 오히려 권력의 지배를 받고 '생활세계의 황폐화 혹은 식민지화' 되고 있다고 지적한 거죠. 이런 사회에서 백남준이 말한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급>이라는 말도 있지만 '생활세계'에서 쌍방형 피드백이 필요한 것이죠. 60년대 히피문화나 좌절한 유토피아를 다시 되찾아오려고 하는 것이 백남준이 생각하는 이상향이죠. 나중에 신명나는 세계로서의 '글로벌 글루브'에서 그런 철학이 잘 발현한 작품이죠 " 

[백남준, 한국의 위대한 엄마성 TV아트로 세계화] 
http://americanart.tistory.com/871 


백남준 I '엄마(Ommah)' 2005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저작권 도정숙 

켄 백 하쿠타씨에 의하면 삼촌(백남준)은 "19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두루마기를 뉴욕에서 휠체어를 타고 고미술상을 다니다 구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서도호의 집 연작은 백남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백남준의 유작인 이 작품은 제목이 '맘(Mom)'이 아니라 그냥 한글로 '엄마(Ommah)'다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엄마와 조국이 무척이나 그리웠나보다 결국 조국의 엄마자궁으로 돌아갔다 [사진출처아래] 
daejeon.kbs.co.kr/bbs/ezboard.cgi?db=k_daejeoncol13&action=remote&dbf=192&page=2&depth=1 

[백남준유치원친구 수필가이경희여사] 백남준비디오아트 탄생50주년 2013. 03.23(토) 서재에서 인터뷰 
[오마이뉴스관련기사] bit.ly/14DNsSX 


- 백남준과 같이 보낸 어린 시절이야기 좀 해 줄 수 있나요? 

"나는 무남독녀로 형제 없이 혼자서 자랐기 때문에 몸이 보통 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폐문임파선을 앓아서 학교에 거의 못가서 6학년을 재수했습니다. 백남준과 동갑이라 같이 중학교에 입학을 해야 되는데 나는 1년을 묵어서 같은 해에 중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게 그 때 무척 부끄럽게 생각되었어요. 백남준은 수송초등학교에서 경기중학교로 진한하고 나는 1년을 묵고 다음 해에 숙명여중에 입학을 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건강이 안 좋았던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몸이 약해서 한 때는 마치 연중행사처럼 1년에 한번씩 병원에 입원하곤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백남준은 외국에 있으면서도 내가 입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고 알고 있었더군요" 

[두츠, 아빠의 그림일기展] 2013.4.24(WED)-5.28(TUE) 갤러리 통큰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74번지 2층)


두츠(Ndoye Douts)/50x70cm 

[유난히 큰 자동차가 눈에 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크기이다. 이는 두츠가 자동차를 마련했다는 경제적 안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동차는 아이와 함께하고픈 시간의 크기와도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이렇듯 이번 전시는 부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동심을 특유의 서정성으로 표현한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2013년 두츠는 프랑스 국적으로 바뀌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물고기의 등장으로 연결시켰다. 그의 성(姓)인 Ndoye는 아프리카어로 물고기란 뜻이다. 결국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두츠, '어떤' 확장된 모습으로, 또 '다른' 그의 이야기가 시작될지 궁금해진다. 

두츠의 "100=1, 1=100" _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두츠는 "100=1, 1=100'이라는 주제를 통해 '같음'을 강조하기보다는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전체와 개체, 국가와 개인, 신과 인간이 '같다'라는 관념적 해석을 내리지 않고,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통해 지향성을 역설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호 '=' 는 '위하여' 내지는 '에게'로 해석된다. 의미를 확대해보면, 인간은 신에게 다가가야 하고 신은 인간에게 다가올 때, 신과 인간, 즉 심성(心性)과 신성(神性)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과 신의 관계는 물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모두를 위하는 삶,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향하는 삶, 타인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관용의 미덕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바로 '100=1, 1=100'의 정체인 것이다. 


[두츠는 누구인가?] 두츠(N. Douts)는 1973년, 세네갈에서 태어나 다카르 국립예술학교에서 “서민 지역의 무질서 건축연구”라는 논문으로 수석 졸업을 했다. 2000년, 아프리카 비엔날레 ‘젊은 작가 모음 전’에 참여하면서 갤러리 기획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2001년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설치미술 “TRAIN-TRAIN MEDINA (Medina의 지루한 일상)”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프랑스 TV5와 벨기에 RTBF 방송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2004년에는 오랫동안 구상해온 작품 “100=1, 1=100”을 발표하면서 서구미술계에 이름을 각인시켰다. 2006년에는 다카르비엔날레에서 유럽연합 예술가위원회가 주는 대상을 받으면서 프랑스, 벨기에, 이태리, 스페인, 미국등 유서 깊은 미술관 및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2008년 3월, 한국의 아프리카미술관에서는 개관기념전으로 두츠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아프리카적인 수묵화의 감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은행과 기업이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워싱턴의 World Bank는 "100=1, 1=100"이라는 주제로 한 작품 100점을 모두 사들였다. 

Apres La Pluie 비가 내린 후에 

# 회색 _ 삶의 행렬을 빛으로 향하게 하는 색 # 파란색 _ 고단한 삶에 활력을 갖게 하는 색 
# 초록색 _ 도시에서 새로운 고향을 만드는 색 # 연두색 _ 신의 빛인 노란색이 현실을 머금은 색 
# 주황색 _어디론가 떠나기를 바라는 유전자의 색 # 빨간색 _ 삶의 무게를 훌훌 털어내는 열정의 색 
# 연보라색 _ 모두가 함께 하나 되는 그물망의 색 # 남색 _ 고단한 몸을 감싸 안으려는 휴식의 색 
# 보라색 _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을 꾸는 색 # 흰색 _ 인간과 신을 서로에게 향하게 하는 색 
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izgreen&logNo=10131324791&categoryNo=18&viewDate=&currentPage=1&listtype=0&from=postList

[김현정-Rebirth] 가나아트스페이스 1층 2013.4.17-4.23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도솔 갤러리 4.29-5.15 

김현정 I 'Rebirth 058' LED and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 162*108cm 2012 

김현정 I 'Rebirth 018' mixed media on fine art paper, printed by pigment printer 110*140cm 2010 

"인간은 유한 속에 살지만 무한을 지향하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환생과 부활을 꿈꾼다. 유한성 즉 죽음에 대한 극복에 있어 가장 매력적인 단어는 부활 또는 환생이고 그 환생의 중심에 나비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나비에게 알에서 번데기로 그리고 멋진 나비로 환골탈회를 거듭하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활이란 결국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저장하는 생명의 위대한 힘을 말하는 것이리라. 

김현정 I 'Rebirth' 

나비는 가려린 날개로 수 만 킬로를 난다. 그러한 생명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인고의 과정을 겪으며 욕심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비웠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각기 나름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나의 작품속 이미지에 보이는 수학방정식은 모두 무한대이거나 제로이다 

생명, 비움, 부활이라는 이미지의 형상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기법과 더불어 21세기 인간이 만든 위대한 빛이라는 LED전원을 선택해 보았다.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생명이 없는 인공의 물체를 통하여 자연과 생명을 이야기하고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음을 시도하고 싶었다. 

작품 앞에 나비모양으로 선 작가 김현정 

이제 또 한 번 허물을 벗고 새로운 생명을 찾기 위한 새로운 여행을 떠나려 한다. 나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웠을 때 자신의 꿈을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듯이 내 스스로를 비워야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새로운 작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맴돈다. 그것이 <논어> 속 '회사후소(繪事後素: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이후에 한다는 말로, 본질이 있는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뜻함)'의 의미가 아닐까 

하얀 눈이 실컷 쏟아져 덮어버리고 영혼만 가볍게 날아오르고 싶다". 2013년 봄 김현정 

[만 레이전]
 런던 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에서 2013.2.7-5.27까지 

1929년 리 밀러의 사진 Man Ray Portraits is the first major museum retrospective of this innovative and influential artist's photographic portraits. 

Focusing on his career in America and Paris between 1916... and 1968, the exhibition highlights Man Ray's central position among the leading artists of the Dada and Surrealist movements and the significant range of contemporaries, celebrities, friends and lovers that he captured: from Marcel Duchamp and Pablo Picasso to Kiki de Montparnasse, Lee Miller and Catherine Deneuve. 

Featuring over 150 vintage prints and key works from international museums and private collections, the exhibition also demonstrates Man Ray's use of revolutionary photographic techniques and early experiments with colour, as well as surveying his published work in leading magazines such as Vogue and Vanity Fair 

<쉬어가는 코너> 


[세기말 작가 뭉크] 이 작품을 보면 무섭기보다는 너무나 아름답다 예언자 뭉크는 오늘의 시대를 이렇게 미리 내다본 것인가 

[베를린 100개의 갤러리 중 하나 18미터 갤러리] 

Regina Battenberg 1962 in Stuttgart geboren. 1982–1987 Staatliche 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Stuttgart. Lebt und arbeitet in Stuttgart. © Regina Battenberg, »Schrille Stille« 18미터 갤러리 이 이름은 처음 아파트에서 작품을 전시할 때 그 통로공간이 18미터에서 유래했다. 이곳에서 기획했던 두번의 전시로 사람들이 많이 다녀 이웃항의로 계약파기의통보를 받았다. 초기 창업때 이야기다 
www.18m-galerie.de/seiten/kunstler/battenberg.html 

[17세기 실크에 컬러잉크로 그리다 4월 27일 보르도에서 경매예정] 


12연작 중 6번, 왕후이(1632-1717 가장 유명한 황정화가)가 그린 중국 황제강희(1662-1722)의 남쪽지방 순회 Voyage d'inspection dans le Sud de l'empereur Kangxi (fragment du rouleau n°6 ), par Wang Hui (1632-1717). Crédits photo : ALAIN BRISCADIEU SVV BORDEAUX
 
www.lefigaro.fr/culture/encheres/2013/04/18/03016-20130418ARTFIG00357-la-chine-s-eveille-en-province.php 

[디나모전] 카푸어 터널 모렐레 뒤샹 등 네온 아트 모 그랑 팔레에서 전시 Hanging Neon, Stephen Antonakos. Crédits photo : Sébastien SORIANO/Le Figaro
 

www.lefigaro.fr/arts-expositions/2013/04/16/03015-20130416ARTFIG00453-dynamo-plein-la-vue-au-grand-palais.php 

[프랑스 고졸자격 시험 문제 Baccalauréat 대해서] 


프랑스 고졸 자격 시험(바칼로레아)이 6월부터 시작되지요 그 논술제목이 우리나라 대학원시험보다 더 어려워보이네요 예를 들면 <예술이 인간과 현실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http://cafe.daum.net/ejutaek/N8uB/8412?docid=4165450129&q=%C7%C1%B6%FB%BD%BA%20%B0%ED%C1%B9%C0%DA%B0%DD%20%BD%C3%C7%E8

[예] 프랑스 고졸자격 시험 문제 1장 인간(Human) 
<질문01>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질문02> 꿈은 필요한가? 
<질문03>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질문04>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질문05>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질문06>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질문07> 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질문08> 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질문09>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질문10>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질문11> 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www.francesoir.fr/actualite/societe/baccalaureat-2012-la-philo-leur-a-donne-du-fil-a-retordre-237931.html 

그밖에도 2장 인문학(Humanities) 3장 예술(Arts) 4장 과학(Sciences)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6장 윤리(Ethics) 등이 있다 

A : 저도 예전에 저 문제들 한번 보고 깜놀 했었죠. 프랑스는 교수임용 방식도 완전 다르다고 들었어요. 무슨 고등사범학교였던가? 아무튼 일반 교수들보다 더 높은 자격을 소지한 자들이, 일단 해야하는 것들이 중고등학교에 돌면서 강의하는거라던데요. 그래서 어릴 때 부터 의식의 수준이 높나봐요. 
B :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조선시대우리도 이런 시험을 보기는 했죠 과거시험 논술형식이 아니라 한시형식으로 시험봤죠 
C : 우리나라의 경우 고교에 우수한 박사급 교사들이 포진해야 합니다.그리고 대학은 교양과정에 가장 우수한 교수가. 대학스스로가 교양과정을 아주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는데 생각을 바꾸어야.  저도 예전에 이 시험문제를 놓고 충격을 받은 적이. 이 정도의 사유를 고교졸업반이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박사를 마쳐도 이 정도의 질문에 제대로 된 자신만의 대답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박사과정에서 도대체 뭘 공부하는지?) 프랑스의 저력은 '사유의 힘'에서 나온다고도 할수가 있겠네요. 
B : 사르트르가 프랑스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죠 
A : 네 샤르트르 뿐만이 아닌 것 같더라구요, 암튼 그 최고 교육 자격증을 갖게 된 사람들은 모두 중고등학교 강의를 한다고 하던데...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철학자들 수두룩하죠. 

[프랑스대입에서 왜 철학이 가장 중요한 과목인가] 

http://www.transeet.fr/2012/06/18/sujet-bac-philo-2012justeavantlebac.html 

프랑스가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삼고 또한 대학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논술시험과목으로 여기는 것은 혁명의 결과일 것이다. 혁명이 없었다면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안 가르쳤을 것이다. 철학은 국민의 높은 사고력과 건강한 비판력을 키워주기에 권력가들이 싫어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혁명을 통해 단두대에서 태양왕의 목을 쳤기에 다시 말해 민중(레미제라블)이 승리했기 때문에 이런 교과과정이 가능한 것 아닌가 싶다. 이런 현상은 같은 민주국가인 영국이나 독일에서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관련 사이트_왜 교과과정에 철학과목이 필요한가] http://blog.ohmynews.com/chamstory/498939 

[파리 공원이나 정원 중 Top 10] 파리 5구에 있는 식물원 다른 곳은 아래에서 검색 


Le jardin des Plantes est un jardin botanique situé dans le Ve arrondissement. Les grandes serres abritent un jardin d'hiver, une serre mexicaine et une serre australienne. La roseraie est un des points forts avec plus de 170 variétés à observer. Crédit photo : DR 
www.lexpress.fr/diaporama/diapo-photo/tendances/voyage/top-10-jardins-parcs-squares-parisiens_1241983.html?p=3#content_diapo 

[세기적 철학자 사르트르] 

세계의 모든 고민을 혼자 다 뒤집어 쓴 사람처럼 표정이 심각하다. 하긴 20세기는 이념과 철학의 시대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사르트르 사진. ⓒ Henri-Cartier Bresson


20세기 / 세계적 문제아 
노벨상을 거부할 정도로 / 엉뚱하고 배짱 두둑한 놈 
자유에 미쳐 머리가 돈 놈 
세계 문제를 / 마치 자기 문제인 양 / 온통 뒤집어쓰고 고민한 사나이 
문학은 오직 / 실천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행동파 
자유가 주는 고뇌와 괴롬 / 온몸으로 밀어내며 / 프로메테우스처럼 살았던 철학가 
지독하게 못나고 / 사팔뜨기에다 꼴사나운 안경잡이 
갖은 정치 참여로 / 좌충우돌 / 시행착오가 많았던 놈 
그래도 / 늘 최선의 선택 속에 / 우주를 보며 / 인류와 대화했던 삶의 열애자 
지식인 허위 깨고 / 늘 약자 위한 / 외길 지킨 민중의 지지자 
살아 있음의 기쁨 / 글 쓰는 일로 확인하며 / 자기의 반역 사상 / 끊임없이 떠벌린 수다쟁이 
1991. 8. 23  시 제목: 사르트르 

[신간소개] 자크 랑의 문화전쟁 - 그의 문화정책 10년 프랑스문화정책 


문화정책의 최종목표는 삶의 질 향상::융합과 통섭의 문을 열어제치는 것이 절실하다 - 경제성장(발전)이 삶의 질 향상과 연결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자크 랑 미테랑정부시절 문화부장관 

En 1981, Jack Lang a insisité sur la relation entre la culture et l'économie. Sa politique était la popularisation et la modernisation de la culture en encourageant la création artistique du public. Contre cette politique, il y avait des nombreuses critiques depuis le début des années 1990. C'est parce que le relativisme culturel a provoqué la dissolution de la culture et l'identification de la culture au tourisme. Après Jack Lang, il y a six ministres juisqu'à maintenant. Leurs politiques culturelles, en général, visent à préserver l'identité culturelle européenne en défendant l'exception culturelle et puis en insistant la diversité culturelle. Et dans les politiques domestiques de la culture, ils s'efforcent toujours pour que tous les français puissent jouir de la culture. Bref, ce qui est important dans la politique culturelle de la France, c'est l'amélioration de la qualité de vie individuelle. 


Mots clés 문화정책(la politique culturelle), 문화의 민주화(la démocratisation culturelle), 문화 발전(le développement culturel), 문화와 경제(la culture et l'économie), 문화적 예외(l'exception culturelle), 문화적 다양성(la diversité culturelle), 사회적 단결(la cohésion sociale) * 사진들 출처:Wikipedia 

[백남준이 말하는 자크 랑] - 1995년 김홍희 관장과 백남준 인터뷰 중에서 
김홍희[질문] 광주 비엔날레는 특히 미술의 지방 확산과 함께 세계화라는 문제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백남준[대답] 사실 플럭서스는 지방분권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술의 성격에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남을 흉내 내는 것, 즉 유행사조를 따르는 것이지요. 이것이 예술의 큰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를, 즉 토속적인 자기를 주장하는 거지요. 플럭서스가 성공한 것은 토속적 주체성을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주체성은 김일성이 만든 것이 아니었어요. 일본이 전쟁에 지고 나서 만든 것인데, 일본 책을 갖고 근대화한 북한이 일본의 주체사상을 본 딴 것이었지요. 요컨대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 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프랑스의 자크 랑 지방분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리옹 비엔날레 등을 통해 파리예술을 지방으로 전파하는데 성공했고, 그 덕인지 대통령 후보가 된다는 말도 있죠. 

[누벨 바그 자크 드미감독] 카트린 드뇌브 전성기 <쉘브르의 우산()> 찍을 때 귀엽다 

Catherine Deneuve et Jacques Demy sur le tournage du film les Parapluies de Cherbourg en 1963 Photographie Leo Weisse © 1993–Ciné-Tamaris 

[영화감상및 해설] <쉘부르의 우산> 프랑스 누벨바그로 분류되는 자크 드미 감독의 출세작,  일단 자크드미를 말하기 전에 프랑스 누벨바그부터 알아야 한다. 프랑스 누벨바그는 기존 프랑스 영화가 단지 유명 소설을 영화화하는 질의 전통이란 흐름에 반기를 든,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잡지의 평론가들이 모여 만든 사조이다. 당시 평론가로 활동하던 장뤽고다르나 트뤼포, 에릭로메르 등은 ‘질의 전통’에 반대하면서 작가정책을 지지했는데, 이 작가 정책은 당시 감독보다 우선시 되었던 시나리오 작가의 지위를 깎아 내리고(당시에는 영화에서 대사나 언어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감독의 개성과 영화의 시각 효과, 미장센 같은 기법을 중시하면서 영화가 단지 소설을 영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도 감독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또 당시 실존주의 사조로 인해 누벨바그 영화의 내용이(특히 장 뤽 고다르) 논리적 인과관계가 맞지 않고 우연적이거나 동기가 불분명하고, 의식의 흐름기법이 보인다. 

intransit.blogs.nytimes.com/2008/06/19/fete-de-la-musique-in-paris/ 

이 중 한명의 감독이 자크 드민데 이 감독은 플롯은 굉장히 진부한 편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영상미나 형식은 현란하다. 쉘부르의 우산은 내용에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 진부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색채감은 눈 여겨 볼만 하다. 특히 건물 벽은 원색의 강렬한 색으로 대비를 주어서 알록달록 하게 표현하다가도, 또 어떤 장면에서는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색감을 나타내면서 감독의 개성적인 미장센을 보여주고 있다. 또 밖의 거리를 표현할 때는 파란색 톤으로 주어서 내 생각에는 낭만적이지만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연인 둘이 헤어질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독일 표현주의와는 분위기 면에서는 다르지만 미장센을 보면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http://outputinfinity.blogspot.kr/2011/05/lola-by-jacques-demy.html 

그리고 누벨바그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뮤지컬 형식인데 당시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와는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누벨바그가 할리우드와 다른 영화를 추구하거나 대항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예를 들면,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는 서사가 진행될 때는 인물들이 극영화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이 되면 뜬금없이 주인공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하거나, 주변에 있던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같이 와서 춤을 추는 형식이다. 하지만 쉘부르의 우산은 일단 놀랍게도 모든 대사가 노래이다. 또 주인공들은 전혀 춤을 추지 않는다. 물론 주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자크 드미 감독의 초기작을 보면 물론 춤추면서 노래하는 뮤지컬 장면들이 있긴 하다.) 암튼 이런 장면이 할리우드의 뮤지컬 영화와는 다른 뮤지컬 영화를 보여주려던 자크 드미 감독의 의지인 것 같다. 내용은 뻔한 신파조여서 흥미는 덜 했지만, 미장센(특히 색체)이나 뮤지컬의 형식으로 보면 참 재밌는 영화였다. [출처] 쉘부르의 우산(자크드미감독) |작성자 leebok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