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년 전 인터뷰 이영철 선생 광주로 찾아가다
2013년 2월 3일 이영철 관장 인터뷰 원본 소개 당시 내용이 너무 많고 길어 줄일 수 밖에 없었다 <제목 백남준 시대가 왔지만 백남준 연구는 없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②] 이영철 전 백남준아트센터관장
2013년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1년간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 기자 말
▲ 광주금남로에 있는 아시아문화개발원 원장실에서 인터뷰하는 이영철 미술평론가. 샤먼 풍(?)의 패션이 특이하다
백남준은 우리 나이로 서른살이 되었을 당시에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인 마치우나스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황색 재앙은 바로 나다"라는 매우 자신감 넘치는 선언을 했다. 서구 예술 현장의 한 복판에서 세계예술계를 통째로 흔들어 보이겠다는 포부와 자신감을 드러낸 말로 여겨진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백남준 만큼 서구 예술 무대를 종횡으로 누비며 최상의 역할과 자부심을 과시한 인물이 또 있을까
백남준은 속칭 창조성에 있어 천재성을 보여준 예술가이면서 심오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자신을 고래에 비유하며 누구에게도 간섭받거나 조정당하지 않는 '사유의 잠수자'라고 했다고 하지만 백남준은 바다 표면의 잔물고기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어두운 바다 속의 철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가장 깊은 곳을 내려가는 존재가 가장 멀리 가장 넓은 것을 어루만질 수 있을 것이다. TV는 그리스어로 ‘멀리 본다’는 뜻이라 한다. 그는 이런 철학을 예술화했다. 비디오아트는 그래서 놀라운 발상이다. 유투브, 인터넷, 스마트폰, SNS 심지어 노래방까지 그의 아이디어에서 온 것이라고 백남준과 절치하였던 존 핸아트라는 큐레이터가 말했다.
비디오아트 탄생 50주년을 맞아 이런 예술세계를 펼치는 데 열정을 바쳐온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 관장을 광주에 내려가 만났다. 그는 2015년 개관 예정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컨텐츠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총괄 계획을 짜고 있다고 한다. 백남준을 만나 예술에 대해 새로운 눈을 떴다고 하는 그는 이제 또 어떤 새로운 일을 전개해서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지 벌써 궁금해진다. 백남준은 누구인가 다시 그에게 사무실과 레스토랑을 다니며 집요하게 종일 질문을 했다.
▲ 백남준 I '자화상' 혼합재료 61×69×40cm 1989
[01] 백남준 선생과 이영철 관장이 좀 닮아 보이는데요?
하. 신비화하면 시기 질투 모함이 밀려와요. 글쎄요. 박수무당과 대샤먼의 차이겠지요. 어느날 우연히 사진을 보다가 백남준 선생님의 두손이 나와 아주 꼭 닮았다는 것을 알고 놀랬어요, 염상섭인가 누구인가 소설 속에서 발가락 닮은 것으로 부자지간에 사랑을 확인하려 했던 서글픈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하지만 닮은 것이 하나도 없이 단지 발가락만 닮았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에요. 어린애 같고 일에 있어 엄격하고 책을 좋아하고(하지만 전 고전에는 정말 무식해요) 독불장군 처럼 거침없이 말을 하고(그러나 다른 사람 욕은 절대 안하시는 점에서 백선생님은 저와 다릅니다) 권력자나 가진 자에게 아부는 아예 할 줄 모르고. 아 무엇보다 아주 착한 분이에요. 전 덜 착하지만 그래도 착한 것은 일단 같다고 봐요. 그리고 생활면에서 오거나이즈 완전 잘 안되는 것, 어수선하고 주변이 늘 지저분한 것도 좀 비슷해요. 백선생님은 6개국어를 한데요. 근데 전 부끄럽게 영어도 버버거리거든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줄여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백선생님에게 플럭서스 아트에 대해 간단히 정의한다면 뭐라 하시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유를 위한 자유'라고 딱 잘라 말했는데 저는 아주 공감해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목적론이 아니라 '자유를 위한 자유'가 훨씬 정확한 표현이라 봐요. 근데 전 생각만 도발적인데 비해 백 선생님은 생각과 행동에 있어 시차가 별로 없어요. 아주 정확하고 빨라요. 예술 행동에 있어 완전 도발 그 자체에요. 생각 속에서 제 나름의 안테나를 세워 그분의 마음을 읽어내고 예술 행동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무척 고심했어요.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으로 3년간 일하며 온통 그 세계에 빠졌었지요. 지금도 언제 어디서나 그분에 대해 생각을 하며 일하고 있어요. 저에게 귀중한 것을 많이 알려주시지요. 제가 발견한 것은 아주 넓고 무궁무진한 그분의 사유와 예술 속에 일정한 코드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차츰 이야기를 하기로 하죠.
[02] 백남준은 직접 뵌 적이 있는지 그의 이름은 언제 알게 되었는지요?
부끄러워서 인사도 못했어요. 제가 학생 시절이었으니까요. 난 학부에서 사회학을 하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했지만 대학 1학년 때부터 미술에 관심 많아 그때 처음 백남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당시 북아현동에 공간을 마련해 <무제>라는 미술비전공자 친구들과 동호인 서클 만들었어요.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는 비평가들의 말에 그게 예술인 되나하고 궁금했죠. 당시에 <독서생활>이라는 월간지가 있었는데 그 기사에서 백남준이 TV에 얼굴 내밀고 있는 흑백 사진의 이미지가 기묘하고 재미있었어요. 술 좋아하는 장욱진 선생의 시적인 세계와 천진함이 저에게는 오히려 힘들었던 반면에 백남준의 그것은 아주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TV로 하는 예술, 그것은 조상이 없는 예술이잖아요. 알란 카프로의 환경 예술 같은 것도 흥미롭긴 하지만 TV와 사회현상의 관계 속으로 누비며 이뤄지는 예술이 어렵게 느껴젔어요. 기성품 예술의 시조인 뒤샹도 이해가 안되는 마당에 백남준의 예술은 한없이 모르겠더라구요. 근데 서구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니 도대체 이게 뭘까 하고 궁금했죠.
70년대는 한국에서 다양한 유형의 개념 미술이 확산될 때인데, '개념, 논리, 현상'을 다루는 미술 언어를 파악하는데 온통 관심이 있었는데 느닷없는 백남준의 의미가 당혹감을 주었던 시절이에요.
[03] 미국의 잘 알려진 현대미술사가들이 백남준을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
몇 년전 출간된 <20세기 현대미술>(로잘린 크라우스, 할 포스터 외) 책을 보면 다른 현대작가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백남준을 왜곡하고 있어요. 백남준을 플럭서스 그룹 운동의 한 작가에 불과하고 샬롯 무어먼 같은 체리스트를 성적으로 대상화시켰다는 비판이 있어요. 피상적인 해석이고 백남준에 대한 연구가 미국에서 너무나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어요. 케이지, 보이스,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등과 비교하면 백남준을 말이 안될 정도로 다뤄지고 있어요. 생존해 있을 당시에는 세계 10작가 안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사실상 연구는 극히 미진한 상태입니다. 미술의 역사는 대부분 엉터리입니다. 더욱이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 지금 우리는 미디어 예술의 은하계 속에서 살고 있는데, 서구 이론계에서 백남준 연구는 참담한 지경입니다. 후기구조주의 연구하는 분들이 백남준을 살펴야 했는데 서구에서 관심 밖이 되었어요. 그들에게 백남준 코드가 안보이는 거라 봐요. 전설적인 기획자 하랄드 제만 조차도 백남준을 단 한번 자신의 전시에 초청했는데, 무어맨의 퍼포먼스로 소개했을 뿐이에요.
시각예술의 논리적 문맥에서 보자면 백남준이 안보이는 거지요. 음악에서는 아예 언급 조차 없고. 제가 보기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예술의 범위 안에 있어요.
▲ 2009년 6월에 자신이 기획한 <신화의 전시- 전자 테크놀로지>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04]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
사상은 어려운 것 아닌가요.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야할 필요가 있는 일이지만 명확히 한계가 있지요. 어차피 아는 것 만큼 뵈는거니까 모두가 동일하게 강박증을 가질 이유는 없다고 봐요. 동서고금의 통섭은 평생 가는 과제일테고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렵지요. 음식을 입에 떠먹여 달라고 불평만 하는 것은 재미없어요. 난해하면 문제가 있는거라 여기는 포퓰리즘적 사고가 모든 분야에 만연해 있는게 더 문제에요. 정서적 소통을 강제하는 것은 어떤 문제와 대한 진지한 접근을 사전에 봉쇄해 버리기도 합니다. 가령 이어령 선생님의 스타일로 백남준을 이해시키는 것이 표준이 된다고 누군가 생각한다면 곤란하죠. 청년 시절의 백남준의 고뇌, 역사적 책무감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죠? 백남준은 삶의 끝자락에서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성과 영성이 분리되지 않은 영매 과학자이자 인문학적 야만인 같은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신경 발작과 신체적인 전기 현상의 관계를 고민했으니까요. 작고하기 직전에 백남준이 했던 동영상 작업 속에 전기 신경 발작의 작품이 있어요. 서양 사람들이 그의 코드를 보지 못하는 까닭은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낯선 관계 때문이 아니라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 때문이라 봅니다.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 볼 수 없다는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의 도움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의 도움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전체상이 그려지는 것이라 봐요. 서양 사람들이 주도해온 지난 이백년 역사를 더 이상 믿을게 없으니까, 새 그림 그려야 하는거죠. 백남준은 이십대의 나이에 그것 알았고, 알았으면 실행해야 하는거고, 마음 약해져서 뒤돌아보지 말고 혼자 앞서 나간거죠.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 중심의 예술 개념이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이거든, 니체는 그것을 계보학이라 불렀어요. 독일 시절에 백남준이 독일 친구들과 모여 니체를 읽었다고 해요. 우리에겐 역시 백남준의 사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리고 항상 중요합니다.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에 대해 자성해야 합니다. 그와 절친했다는 친구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05]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백남준이 큰 역할이 했다고요?
아무도 그 이야길 하지 않아서 이상할 지경이에요. 베니스에서 가장 큰 영예의 상을 받았고,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전도 그 무렵에 있었고, 바로 이어서 백남준이 한국관 건립에 95퍼센트 공로(5퍼센트는 문광부의 기여)가 있었고 같은 해에 광주비엔날레가 만들어졌자나요. 그 당시에 내부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말이 되어본 적도 없어요. 이상하지 않나요? 백남준은 워낙 큰 인물이라 소소한 경과 이야기하질 않는 성격입니다. 왼손이 모르게 오른 손을 사용하는 사람이죠. 소인배나 평범한 사람들이 흔히 하게 되는 생색이란 일절 상상도 못할 분입니다. 광주비엔날레 인포 아트 전의 실질적인 기획은 백남준이 했다고 보아야지요. 미디어아트가 워낙 생소하니까. 그리고 백남준은 미디어아트의 정교수로는 세계 최초일 뿐 아니라 미국 내 미술대학들에 미디어아트 학과나 스튜디오가 생길 때 온통 자문역을 도맡아 했어요. 그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분을 ‘구루’라고 하지요. 광주비엔날레 인포아트 전에는 백남준의 친구와 제자들로 채워진 것입니다.
[06] 당시 진보미술계는 백남준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하던데요?
백남준에 대해 진보 쪽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요. 기술의 발전이 예술의 발전에 결정적이라는 '기술결정론'은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백남준을 기술결정론자로 보는 과도한 입장에서는 비판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것을 개선하는 정의의 편에 있지 않다고 보는거죠, 진보 쪽에서는 백남준을 사회의 여러 다양한 사회정치적인 문제, 타자, 소수자 문제에는 별반 주제적인 관심이 없는 맥루한주의자로 분류하니까 그렇게 된거지요. 인류학은 원래 서구가 비서구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공로가 큰 학문 분야인데 백남준의 인류학적 관심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소재주의에 빠져버려요. 샤머니즘을 예술적으로 이용했다는 비난조의 언급도 그런 인식의 결과지요. 하지만 실세로는 그와 정반대라 봅니다. 그는 인간과 기계, 자연과 문화를 공생 혹은 동맹 관계로 보았던 생명 철학자입니다. 백남준이 활동하던 시기의 유럽에선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적 사고가 지식계의 지반를 흔들었고 맥루한의 미디어론과 위너(N. Wiener)의 사이버네틱스 등이 한참 충격을 주고 있었죠. 또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잔혹극의 창시자 아르토입니다. 그의 초기 콘서트들은 다다나 초현실주의의 순수 연극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죠. 63년 첫 개인전이 바로 그 정점이고 바로 그 현장에서 비디오아트가 탄생하게 됩니다. 매우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서양의 역사가들이 이것을 외면해 버린 거죠. 백남준은 기술과학을 바탕으로 참여와 소통 미학의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21세기 창작의 새로운 예술 개념을 제창한 인물입니다. 벅민스터 풀러 같은 건축가도 있지만 백남준은 시간 예술가입니다. 20세기에 미래를 가장 멀리 내다 본 작가인거죠.
[07] 백남준 연구가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나야 하고, 백남준아트센터도 국립 기관으로 되어야 한다고 어디선가 말씀하셨죠?
네. 너무 당연하고 이젠 좀 급해졌어요. 그의 이름이 지워져 가고 있어요. 외국에서도 기념전들이 있지만 그의 위업에 비해 너무 그냥 그래요. 벌써 추억이 되어 가는 것 같아 슬프지만 백남준아트센터 개관식 당시 무대에서 이렇게 말하게 기억나요. “국내외 귀빈 여러분 백남준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는 초국적 예술가였으나 이제 모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연어가 생애에 걸친 아주 길고 위험한 여행을 마치고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듯이 그는 우리 곁에 왔습니다.”
백남준은 초국적인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국가브랜드위원회라는 게 생겨 위원장을 만찬에 초청하였고 힘있는 여러 분들을 찾아 다녔는데 사실은 힘이 없더라구요. 그냥 휘발성 발언일 뿐 생각과 실천에 있어 근육도 뼈도 없어요. 국가적 차원에서 백남준 연구를 적극 지원해야 백남준아트센터는 경기도 차원이 아니라 국립 수준에서 강력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국내외에 그에 대한 연구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의 이름을 이용한 사람들은 많아도 그를 정작 이해하려고 덤벼드는 사람이 너무 드문 것 같아요. 지구촌의 많은 젊은 이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08] 백남준을 '천년을 써먹을 세계적 문화가치'라는데 정부가 어떻게 활용해야죠?
우리나라 문화관광부는 가장 많은 일들을 하는 부서지만, 힘이 없어요. 지성과 문화적 가치를 세워 국민의 지식수준을 높이겠다는 플랜이 없어요. 관광이 더 중요하고 복지 아니면 콘텐츠 산업의 육성에 예술을 팔아먹는 식이에요. 지금이 1인 기업 시대, 1인 미디어 방송 시대잖아요.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잖아요. 국민 전체의 지식 수준 높이는 일에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김구가 원했고 백남준이 실현하고 싶어 했던 나라, 두뇌강국, 문화강국이 되는 거죠.지금이 비디오 세상아닙니까. 올해가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를 세상에 내놓은 지 50주년인데 정부는 몰라요.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만나 수년전부터 그런 이야길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탄생 80주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비디오 아트 정신을 전국적으로 개화시킬 수 있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왼통 백남준 작품 값만 이야기를 할 뿐 백남준의 사상과 진가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어요. '천년 써먹을 세계 거장' 그건 싸구려 구호일 뿐이야. 광고 시대에 맞는 광고 카피죠. 뒤샹도 20세기 현대미술의 창시자가 되는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난 한국미술계에 묻고 싶어요. 한국사회의 지성사에 예술의 중요성을 입증해 내는데 얼마나 우리가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예술이 문화의 꽃이라는 것을 국민 누구나 당연시 하는 바로 그때가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때 이겠지요. 일단 정부가 마음 고쳐먹고 나서야 해요.
▲ 백남준 연구자들을 위해 펴낸 <백남준의 귀환> 개관전 행사 도록과 합본 형식으로 출간된 A4 대형판의 658쪽. 이제까지 출간된 백남준 서적 중에 가장 전문적인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절판.
[09] 백남준아트센터 관장하실 때 편저로 <백남준의 귀환>을 내셨는데 왜 저서로 만들지를 않았는요?
양심상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지요. 백남준이 그렇게 중요한 글을 많이 남겼는데, 그걸 모은 책이 단 한권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저서를 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내서라도 급한 것은 이해하지만 어설픈 저서는 정말 곤란한 것이라 봐요.
백남준은 미국에서 40년 살았는데 그 나라에선 백남준에 대한 단일 연구 서적이 단 한권도 없어요. [피드백]이라는 중요한 책이 있지만 백남준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나마 가장 앞서 간 연구서입니다. 그 외엔 없습니다. 존 핸아르트라는 큐레이터가 전시 도록을 자신의 책 처럼 만들어 출간했는데, 내용이 솔직히 엉망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쓴 글도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연구자들 글을 모아서 자기 이름으로 냈어요. 그리고 프랑스에도 없어요. 독일에선 박사 논문을 출간한 저서가 한권 나와 있지만, 그 책의 발간 후 저자가 상당히 곤경에 처했던 것으로 압니다. 비디오 아트를 누가 처음 시작했느냐를 놓고 논란을 유발시켰던 책이니까요. 백남준의 친구였던 볼프 보스텔이 연도를 조작해서 백남준과 함께 비디오 아트 창시자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걸 고발했다가 저자가 독일 미술계에서 곤경에 빠졌어요. 그러니까 연구서는 없고 세계 곳곳에서 전시한 카탈로그만 더러 있어요.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반면에 한국에선 잘 모르면서 그에 대한 저서들이 여러권 나와 있어요. 자신들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백남준 이름이 필요했던 책들입니다. 백남준 자신이 남긴 중요한 글들, 인터뷰들이 많은데 제가 그 책을 내기 전까지는 그분 자신의 책은 한권도 나온게 없었어요. 백남준을 가장 존경하는 독일에선 백남준의 글 모음집은 몇 권 나와 있어요. 비엔나 현대미술관에서 63년 첫 개인전을 리바이벌하며 만든 책(도록 으로 나왔지만)이 다행스럽게 도움이 많이 되는 본격적인 책입니다. 백남준에 대한 저서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 봅니다. 미디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뒤샹 보다 어렵지요. 그러므로 한국에서 지금까지 나온 백남준 서적들은 위험천만한 문제작들이라 봅니다. <백남준의 귀환>이란 책을 낸 배경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고, 장차 영어 독자를 위해 출간할 목적으로 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사되지 못했어요. 상황이 아주 복잡했고 골치 아픈 정치적 이유가 있었어요. 백남준 일을 하면서 너그러워 지는 게 아니라 깊숙이 원한이 생기더라구요. 세상을 확 바꿔버리고 싶은 생각이 더 크게 들고, 정치가가 되려는 생각을 왜 한번도 안했지? 하고 되물은 적이 많아요. 백남준아트센터를 경기도에서 만든 것은 절반의 비극과 절반의 희극이에요. 그리고 백남준 현상은 한국에선 염불 보다 잿밥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아요. 슬프게도 헤밍웨이 소설 <바다와 노인> 같은 이미지가 떠올라요. 얼마나 끔찍이 외로웠을까. 온통 다 뜯어 먹히는 처절한 전장에서 홀로 선 그의 내면을 본다는 것 때문에 정말 날밤을 샌 적이 너무도 많아요. 그 순간들에서 저는 백남준을 보았지요. 정말로 이제 한국이 21세기를 생각한다면 백남준 연구를 위한 국제적인 페로우쉽 제도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마지막에 그걸 하려고 노력하다 아트센터를 그만 두었어요. 무지한 자들과의 전투는 항상 고달퍼요. 협상도 어느 정도지 영혼을 팔 수는 없자나요. 백남준의 첫 전시를 분석하는 책을 저서로 낼 예정입니다. 일본어와 영어로 낼 겁니다.
[10] 백남준의 <랜덤액세스>를 일상에서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는지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어떨까요. 흔히 랜덤액세스는 무작위의 접속을 말하는 데 이제 누구나 그것을 하고 사는 인터넷 세상이 왔자나요. 미리 준비한 게 아니라 우연히 떠오르는 걸 반복하며 사는거죠. 언제 어디서 어떤 이와 어떤 일로 어떻게 만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예술을 하려면 그런 비상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라 봐요. 선불교의 화두집에 온통 그런 이야기가 가득하고 백남준이 남긴 것 드로잉 가운데 ‘삼계무법’이란 것이 있어요.
[11] 백남준을 샤먼아티스트라고 하는데 왜 그에게 굿이 중요한가요?
죽은 자와 산자가 소통하는 매체가 굿이잖아요. 중세 때 미디어(media)는 '영매'를 가르켰다고 해요. 백남준은 굿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현대의 샤먼이었어요. 하늘과 지상 세계를 연결하는 일을 하는게 예술가의 미션인 것이지요. 고조선의 단군의 본 뜻은 하늘입니다. 몽골어로 탱그리라고 하구요. 탱그리가 백남준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알아야 백남준 코드로 입문 가능해요. 주술과 예술은 원래 같은 뿌리인 것이고 테크놀로지는 그 매개 역할을 한 것이지요. 백남준을 몽골의 대장장이 샤먼으로 볼 경우에 많은 것이 쉽게 이해된다고 봐요. 전시장 앞에 걸어둔 소대가리는 굿판이니까 그렇게 했으나 백남준의 속내를 알면 경천동지할 일입니다.
▲ 백남준 I 'TV 피아노(TV Piano)' 1988. AK 플라자 소장. 백남준의 예술은 음악인지 미술인지 혼돈을 일으킬 때가 있다. 그의 예술은 장르의 경계도 넘어선다.
[14] 왜 백남준은 모든 것을 그토록 부서버리고 자르고 그렇게 파괴적이었던 것일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시원하게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부셔버려야 해요. 새로운 야만인이 오는 것을 기다려야 해요. 백남준의 힘은 그가 새로운 야만인의 성정으로 세상에 왔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세상을 다 걸고 싸우는 그 명분을 아무나 스스로 설정하기 어렵지 않나요. 정치가들 중에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나요. 영구혁명을 꿈꾸던 인물이 예술가였으니까 용납이 되었을테고 그렇지 않다면 감옥을 들락날락했을 수도 있겠지요. 백남준은 위대한 전사였어요. 다정다감하고 완전 아이 처럼 굴었고 집 없는 사람 처럼 세상을 떠돌았지만 그 정신은 정말 대단히 위대했어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죠. 유를 부서야 창조가 나와요. 파괴없이 창조없어요.
겁쟁이나 좀비들에게 창조는 없습니다. 창조자들에게 기생하거나 합세하여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그들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죠. 기존의 것들을 부셔서 잡석으로 만들어 길을 내는 자, 그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사람을 창조적인 야만인이라고 부르죠. 1회 백남준예술상을 수상했던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노 라투어의 표현을 빌자면, 백남준은 근대성에 대한 강박이 없던 유일 인물입니다. 그는 세계 최초의 ‘비모던’ 예술가였죠. 탈모던이 아니에요. 로컬리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하고 실천에 옮겼던 최초의 글로벌 아티스트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가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는 이미 미래를 살았던 사람이라서 지금 이 시대의 예술가인 것입니다. 현대미술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쓰여질 필요가 있지요.
▲ 뉴욕타운 홀에서 퍼포먼스중인 백남준의 즉흥연주 1968. 백남준은 피아노를 잘 쳤지만 머리와 손 등으로도 피아노를 쳤다.
[16] 초기의 백남준의 행위 예술은 부르주아 교양 취미를 공격한 것인가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죠. 좌파의 공식이고 우파의 사치스런 치장에 해당하는 말이지요. 그러나 난 좀 다르게 봅니다. 노랭이 관객이 한명도 없는 콘서트 장에서 백인 문화의 총아라 할 수 있는 피아노를 서정적으로 치다가 어느 순간 넘어뜨리고 총격전의 장면을 연출하는 그에게 어떤 소리가 의미있었던 것일까요. 그는 뭔가 논증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가령 죽을 때 내는 그 마지막 소리, 섹스할 때 여성이 내는 악보 없는 소리 같은 것이죠. 여성의 몸 처럼 생긴 바이올린이 바닥에 끌리면서 내는 소리가 얼마나 풋풋하고 흥미로운가요? 등등 고상한 것에 질색을 했지만 부르조아들만 좋아하지는 않아요. 말스의 예술적 취향도 고상한 것이었어요
▲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 [New & Now_서울시립미술관 2012 신소장작품] 2013년 1월18일-3월1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1층에서 백남준-보이스 사진전시 중
[19] 백남준과 존 케이지 그리고 보이스와 뒤샹은 어떤 관계인지요?
백남준에겐 스승이 없어요. 존 케이지는 백남준의 스승이 아니에요. 케이지가 가르친 것도 없구요. 그냥 백남준이 그의 공연에서 어떤 착상을 얻게 되었고, 감동했고 그래서 일본 음악 잡지를 위해 통신원(백남준은 일본의 음악전문지의 음악기고가였다)으로 일하던 당시에 케이지를 인터뷰했고 당당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면에 대해 질문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곤 했어요. 케이지의 선지식이 좀 나이브했던 것에 백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더욱이 케이지 뿐 아니라 서양인들에게 크게 알려졌던 일본의 선지식인 스즈키에 대해 세일즈맨이라며 혐오했죠. 일본에서는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미국에서는 평화주의자인 척 하는 그의 위장된 신비스런 말들이 일종의 사기꾼 혹은 막되먹은 거짓말쟁이 장삿꾼으로 본 것이에요. 좀 일반화시키자면 독일인의 역사 의식에 비해 일본 사람들의 비겁한 태도가 백남준이 보기에 상당히 문제로 보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백남준은 보이스의 영향을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어떤 흔적도 없습니다. 그 반대면 몰라도. 서구 문명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20세기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던 시기에 전위 예술가들은 바깥에서 무언가를 가져와 포장을 했다고 할 수 있어요. 케이지는 선불교로 반문명적 예술행위를 포장했고, 보이스는 타타르족 이야기를 지어내 자신의 비합리적 정치적인 예술을 포장했어요. 보이스는 백남준 보다 11살, 케이지는 20살이 많았지요. 그런데 보이스를 만들어낸 것이 백남준이 아니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긴 해요. 보이스 예술의 새로운 탄생의 내막에 백남준이라는 귀재의 상상력과 새로운 착상들이 작동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왠지 그런 예감이 들어요.
[20] 이야기를 바꿔 자신이 곧 '황색재앙'이라 했던 백남준, 새로운 시대의 예술 칭기즈칸을 꿈꾼 것이었을까요?
영웅들이 활거하던 시대의 백남준에게 그럴 수 있죠.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 그가 1962년에 그런 말을 했을 때 그는 이미 칭기스칸이었어요. 그 해가 바로 칭기스칸 탄생 800주년이었습니다. 몽골에서 대단한 축제가 있었고 독일의 국제 스포츠 행사를 통해 그 사실이 크게 알려졌었어요. 매스컴 뉴스에 아주 민감하던 백남준이 충분히 그것을 활용했던 것이죠. 농담 처럼 백남준이 말했지만 그것은 반농담 반진담입니다. 백남준에게 천리와 심리는 하나니까요. 백남준 어법은 늘 그런 식이지요. 그는 복화술사입니다. 백인여자 사지를 절단해 욕조에 쑤셔넣은 뒤 핏빛 물감을 풀어놓은 그 장면의 연출은 어디서 착상을 한 것일까요.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서 가져왔어요. 뮤즈 살해의 잔혹극이었지요. 서구 문명의 몰락을 절규하며 새 문화를 그려내고자 했던 대단한 문학가이자 연출가였던 아토냉 아르토의 저 유명한 잔혹극의 백남준 버전인 셈이지요. 노마다의 황제 칭기스칸은 오늘날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 세상에 오는 것이지요. 백남준이 바로 그 교차로에 서 있었기에 다른 이 보다 빨리 많은 것을 보았고 거침없이 내질렀던 것입니다. 텃세들(오리지널)이 판을 치던 인터내셔널리즘 시대의 국경을 넘나들며 글로벌 아트의 세상을 연 백남준은 지금부터 860년 전에 이미 최초의 글로벌 세상을 살았던 그 몽골리언의 세상으로 날아가 정보고속도로의 아이디어를 예술계로 끌어들인 겁니다. 성인 칭기스칸이 “말에서 내려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라고 한 것을 백남준이 받아 전자 세계를 이용하여 대륙간 위성예술을 한 것이지요. 그는 언제나 외부를 향해 떠나는 자였고 내부로는 가장 먼 곳으로 잠수해 들어간 고래였어요. 딕 히긴스의 위험한 음악 연주 당시에 백남준이 그랬어요. “암고래의 보지 안으로 기어서 들어가라”고. 고래는 어두운 곳에서 전파로 교신하자나요. 그거 생명의 음악 아닙니까. 지금 예술가들이 사운드 아트라고 하는 것을 잘 들여다 보면 백남준이 이미 너무도 충분히 했던 것들의 연장에 있어요. 고래 새끼들의 축제.
▲ '칭기즈칸의 복원(The Rehabilitation of Genghis-Khan)' 1993[뒷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전시된 백남준 작품 중 하나.
백남준의 수수께끼 풀기
[21] 어느 글에서 백남준의 유토피아를 '해원상생(평화공존)'로 보셨는데요?
선형적 시간 매듭의 저 가없는 끝에 있는 지점으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온통 다 끊어진 것들을 이어놓은 회로로서의 유토피아. 도래할 것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할 평화 세상으로서의 유토피아지요. 2009년 <고르디아스 매듭 다시 묶기>라는 제목으로 백남준의 선물이라는 국제세미나를 열었어요, 지금도 백남준의 선물 계속 되고 있지요. 정주민의 왕 알렉산더가 소아시아 지방을 정벌하였을 때 기둥에 묶여 있던 매듭을 무력(칼)으로 잘라내서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고르디아스매듭 이야기지요. 칼로 베지 않은채 풀지 못하는 정주민의 무력에 맞서 유목민이 그것을 치유하며 다시 연결하는 시대가 바로 지금 필요한 것이자나요. 백남준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았고 평생 그것을 한 것입니다. 동과 서의 연결이 바로 바이 바이 키플링, 글로벌 그루브 등의 작업이죠. 연결을 위해 우리는 인터페이스를 창안해야 합니다.
[22] 이제 결론적으로 백남준 예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뭔가요?
천리와 심리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믿음. 그것이 백남준 코드의 열쇄입니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끈. 오늘날엔 인터페이스라는 말을 쓰기도 하네요. 신체적 접촉, 일방이 아니라 쌍방, 결과보다는 과정, 수직보다는 수평, 동시다발적 소통방식, ‘자유를 위한 자유’를 위해 사람들 간에 접촉과 대화를 전지구적으로 확대하는 일이중요해요. 백남준 선생님이 좋아하는 선시 중에 무봉탑이 있어요. 이음새가 없는 탑을 말합니다. 모바일, 유투브, 소셜 네트워크 등 바로 요즘이 그런 시대잖아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의 진리를 담은 스투파. 조각은 단지 조각이 아니라 스투파가 되는거죠. 그것이 너무 크고 넓어 모든 인간을 담고도 남아 도는 탑으로서의 예술.
▲ 아시아 문화전당 조감도를 보면서 이 사업을 소개하는 이영철 원장. 무등빌딩 5층과 6층을 아시아문화개발원의 사무실로 쓰고 있는데 여기저기 서적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23] 끝으로 이영철 선생님 지금 현재 아시아문화전당(아시아문화개발원) 내용을 채우는 일에서 큰 책임을 맡고 계시는데 백남준의 인류학적 상상력을 반영하게 되는지요?
당연합니다. 그분이 육화된 모습이 바로 지금의 전당이라 봅니다. 전당은 글로벌 아시아의 미래 가능성을 과학과 창의성에 기반한 복합적인 지식문화센터로 갈 겁니다. 이미 시작된 지식 사회는 새로운 위기와 새로운 가능성이 공존하는 냉엄한 경쟁 사회입니다. 물론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승자가 되어야 하지만 엄청나게 많이 생겨날 패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미리 고민하고 준비하는 전문적인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집단지성의 시대를 여는 초석으로서 이 전당이 세계적으로 말이 좀 되는 기관이 되도록 그림을 그려나갈 것입니다. 순진하게 그러나 상대적으로 바른 관점에서 산적한 문제들, 온갖 예상되거나 그렇지 못한 장애들을 극복해가는 선택을 할 것입니다.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에 한국 정부는 지식에 대한 관심도 호기심도 없습니다. 금권 정치가 인식과 정서 모두를 철저히 망가뜨리고 있어요. 예술인들은 빠르게 전면적으로 ‘좀비화’되고 있습니다. 기관들은 이제 스펙터클한 이벤트를 생산하는 유령의 집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포스트포디즘 체제로 이행하고 있는 지금의 다중 시대에 백남준식의 정치적 감각, 예술적 사유, 창조적인 실험 정신은 훨씬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 믿어요. 백남준아트센터의 관장으로 있으면서 구입한 한점의 비디오 조각품이 있는데, 칭기스칸의 귀환이란 작품입니다. 그것은 백남준의 초상입니다. 17년간 주인을 찾지 못해 떠돌다 마침내 집을 찾아 왔던거죠. 이 시대에 백남준은 하나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86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새로운 글로벌 시대의 칭기스칸. 그가 바로 백남준이니까요. 바울 처럼 미션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최산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이영철] 누구인가] 당시 아시아문화개발원장 및 대표이사, 비평가이자 기획자 이영철은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석사를 마치고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일을 하다가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현대미술사 박사과정을 다니던 중에 2회 광주비엔날레 일을 위해 도중에 귀국하였다.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아시아문화개발원>(대통령령 특별법 28조 근거)의 원장(대표)직을 맡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위한 싱크탱크 역할을 담당하는 정부기관. 그는 2회 광주비엔날레와 1회 부산비엔날레 예술감독을 역임했고,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창립 총감독, 백남준 국제아트페스티벌 총감독 역임했다, 저서로 평론집 <상황과 인식>, <현대 미술과 문화 정치학 총서> 백남준 자료집 <백남준의 귀환> 등이 있다.
[참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사업은 2002년 고 노무현대통령이 '광주 문화수도육성' 선거공약으로 발표(12.14)로 시작되었고 올해 11년째를 맞고 있다. 2015년에 개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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