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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이우환이 쓴 '백남준론' 아니 그에 대한 '인상기'

백남준白南準 - 비디오를 넘어서(전문) - 이우환

위 두 작품을 보면 그 발상이 거의 같다. 관계항이다.
백남준은 동양과 서양의 관계항을, 이우환은 문명과 자연의 관계항을 이야기 하다


- 아래는 글 첫 부분 <백남준 거지패션>

백남준, 찌는 듯이 더운 한여름에도 두 겹 겹쳐 입은 쭈글쭈글한 셔츠에다 또 두꺼운 스웨터를 둘둘 감고, 바지 위에 또 한장의 후줄그레한 바지. 거기에다 벨트를 두 개씩 매고 다니는, 그 기상천외한 모습이란 정말 구경거리다. 게다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게자한 눈초리, 무엇과 접해도 히죽히죽 웃기만 하는 입매, 망연히 종잡을 수 없는 얼굴지음은, 때로는 만나는 사람을 아연하게 만든다.

거지 아니면 열병환자로 오인하기 십상인 그 모습은, 오히려 그가 너무 때묻지 않고 감도가 높은 인간인 데에 기인한다. 으스스한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자연히 몸에 배어버린 무어랄까. 본능적인 자기방어와 자의식 과잉의 표출이라고나 할까.

백남준하면 대칭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사계절 내내 어디에 가든 얼어붙은표정을 허물지 않고모자와 조끼와 외투로 무장하고 다니는 그의 친구 요셉 보이스다. 먼 장래. 20세기 최후를 장식할 위대한 기인전 필두에 이름이 연이어질 두 사람은 왜인지 페어인 경우가 많고 현대판 한산습득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두 사람의 표현활동은 사용하는 미디어나 방법론이야 다르지라도 하는 일 저지르는 짓마다 사회문화 모든 것에 걸쳐 늘도발적이며 선구성에 차,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때가 없다.

 

보이스가 원체험에 근거한 표현파임에 비해, 백은 에트랑제인 나그네 짓거리파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니만큼 일의 성격에도 상이한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외견상으로나 일에 있어서나 어딘가 깊은 지점에서 페어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이 멜랑콜릭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둘을 뒤어로 생각할 때, 현대라고 하는 분열적인 시대상이 한층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어쨌든 두 사람 다. 어떠한 의제로부터도 자유로운 듯한 표표한 행동거지에는 어딘가 선승을 방불케하는 구석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찮은 일상의 작은 일거리 하나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천지이변이라도 예고하듯이 무언가 신화 냄새 풍기는 일을 줄곧 벌려대기도 한다.

한데, 보이스보다 다소 일찍 행동을 개시한 백은, 출발 당시부터가 아주 광기를 띠고 있었다. 피아노 공연 중, 객석의 존 케이지 목에 걸린 넥타이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가위로 조각조각 잘라버리기도 하고, 바이올린을 중단中段자세로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에 내리쳐 부숴버리곤 하는 해프닝,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헝겊에 머리를 갖다대고 그려대는가 하면 어떤 때는 보이스에게 부탁해서 도끼로 피아노를 갈가리 패어버리는 것 같은 연주회를 연다.

정교한 기계의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먼 조잡하기 짝이 없는, 도대체가 엉터리로 짜맞춘 묘한 로봇을 화려한 거리를 걷게 하는가 하면, 미녀 첼리스트인 샬로트 무어먼 양의 그 눈부신 멋진 유방에 수상기를 매달아놓고는 첼로를 연주하게 한다.

이러한 짓거리를 이어오는 동안에, 그는 드디어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 거장으로 치켜올려져 있다. 창조주인 양하는 표현의 전문가, 송장처럼 엉겨 굳어버린 작품, 그런 것에 치명적인 충격을 가하고 해체작업을 진척시키는 가운데, 열린 표현의 새로운 지평으로서 그는 비디오를 발견했고 키워낸 것이다.

만인을 예술가로 추켜세워 좀더 자유롭게, 보다 싱싱하게, 항상 신선한 표현을 즐길 수 있는 미디어로서, 거기에 비디오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는, 종래의 정적이고 로고스적인 화재(그림의 재료)와는 달리, 이미 넘쳐 흘러서 돌아다니고 움직이는 파토스적인 화재이며, 마구 그려내는 화가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이다.

게다가 그런 비디오를 가능케 하는 것은 늘 산다는 것의 놀이를 개발한다는 놀이정신이다. 요즘에는 당시(唐詩)를 브라운관에 빗댄 캔버스에 옮기기도 하고, 드로잉이나 판화, 트럼프 등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 어느 것도 유쾌한 놀이정신에 차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기는 하나, 그의 놀이에는 강렬한 독기가 떠돌고 있어서, 마음놓고 즐기기에는 너무 자극이 강할 때가 많다.

흔히 현대를 기술技術의 시대, 전자의 시대, 비디오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백남준의 비디오는 전자기술이라든가 관념적인 영상, 기호의 증식을 무턱대고 찬미하는 것과는 비슷하나 다른 것이다.

온갖 커머셜이 맥락도 없이 혼재하며, 전장으로 날아간 폭격기가 다음 순간 원래 위치로 되돌아간다. 얼굴을 붉히고 더듬거리면서 필사적으로 얘기하려는 남자의, 언어를 멀리 뛰어넘은 몸짓과 입놀림, 원시인의 촌락인가 생각하면 오늘날의 뉴욕 시가가, 그리고 낙서, 만화, 누구의 무엇인지 알 수없는 영상이 전후맥락 없이 뒤섞이고, 갖가지 색, 언어, 소리, 음이 반발과 조화를 이루며 심포니처럼 울려 퍼진다.

인용과 콜라주로 얽히고설키면서, 시간과 함께 숙성하여 거대한 강이 되어 흐른다. 관리되고 정리된 어떤 다큐멘터리나 통제하에 만들어진 영화보다도, 그의 비디오는 변화에 넘치며 너무 자유로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고독까지도 기쁨에 말려들게 만드는 희안한 작용을 한다.

비디오의 산 모습은, 보는 이를 욕망에 떨게 하는, 정말이지 에로틱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의 비디오에 접하게 되면 나는 때때로 강렬한 엑스터시에 빠지게 된다. 그러고는 내가 개나 돼지 못지않은 죄 없는 어처구니없는 인간인 것이 오히려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백남준은 동양인이고 한국인이다. 그 탓인지 그의 세계에는 서양의 거장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신의 죽음이라느니, 자아의 붕괴니 그 광적인 몸부림으로부터의 무미건조한 사실 확인이나 말초신경적 자극의 표현의 쾌락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에스프리가 있다.

인간이나 문명은 커다란 하나의 현상자연이며, 원자폭탄이나 비디오의 발명이라고 해봤자, 대우주의 절묘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나 미래에 대해서도 그다지 비관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으며 헤브라이의 예언자를 연상시키리 만큼 그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여실히 장난스런 터트림에 몸을 내맡기고 있듯이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그는 결코 비디오를 하나의 독립된 표현물로 대상화하거나, 영상만을 절대시하지 않는다. 비디오를 바라보게 놓인 불상, 온 방 가득히 놓인 정원수의 어두운 숲 여기저기에 켜놓은 비디오·텔레비전, 다양한 영상이 비춰지는 TV 앞에 금붕어가 놀고 있는 수족관을 놓아보기도 하고, 브라운관을 통째 빼버린 텅 빈 TV 틀 안에 촛불을 켜놓기도 하고…….. 이러한 것은, 전자 시대를 구가하는 사람들의 비디오 지상주의로는상상도 못할 일이다.

비디오는 광장공간과 자연환경을 조성시키는 촉매이며, 정물이나 조각과도 함께 놓이기도 하고, 그것자체가 정물 아니면 조각, 타블로, 혹은 글자, 언어이기도 하다. 비디오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확정된 대상으로서의 결정체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호흡과 행동을 같이하는 친구이면서 동시에 내 손이 컨트롤하는 데 따라 요염한표정을 보이는 불가사의한 생물인 것이다.

백남준은 온전한 의미에서 비디오의 창시자인 동시에 비디오의 종말을 고한 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비디오야말로 동서고금,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비추어서 본다는 것, 느낀다는 것, 인식한다는 것, 나아가 학문한다는 것, 아니 산다는 것 전부를 총체적으로 포착하는 새로운 미디어임을 그는 밝혀내었다.

그런가 하면, 결코 비디오에 있어 기호의 데이터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반인간적인 기능주의, 기술만능을 구가하는 것 같은 새로운 전자예술의 미디어라는 발상은 거기에는 없다. 오히려 그는 이미 이루어진 기존의 비디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관리제도시대의 짜여진 삶의 무의미한 기호로의 환원, 기술에 대한 무모한 환상을 거부한다.

그리고 비디오를, 산 인간의 자기 반란을 불러일으키는 적극적인 짓거리의 장, 자신의 땀과 웃음 가운데 서로 손잡고 같이 장난치고, 나아가 자기의 고독과 명상을 심화시킬 수 있는, 생명 있는 상대로 새롭게 포착하려고 한다. 게다가 다양한 인용과 콜라주와 해프닝이 범람하는 그의 우주는, 특정한 작가의 이미지이기보다는 오히려 무명의 세계, 제각기 스스로 나름대로 향유할 수 있는 자유로운 천지임을 한없이 시사한다.

모름지기 그의 비디오는, 통제되고 의미가 부여된 영상을 자석(磁石)으로 비틀고 깨부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혼합시키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비디오를 사용하여 비디오를 넘어서는 일. 여기에 그의 아이러니가 있다. 최첨단 기계와 기술을 전부 구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맥락을 전혀 모르는 야생의 원시인처럼 희희낙락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초인적인 기계나 기술의 미래형과는 달리, 자기가 어설프게 짜맞춘 로봇과 노닐고, 현기증날 것 같은 전파의 떨림이나 복작거리는 영상을 마음 내기는 대로 조작하면서 그것을 주위의 자연이나 광장에 던져놓고 논다. 그렇게 어긋 지나간 맥락 가운데서, 살아 있다는 체험을 고양시기고, 물신화된 일상이 생활 공간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것 - 비디오로 하여금 인간이 사고나 신체를 대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비디오와 함께 있음으로씨 인간의 상상력과 감성, 인력을 더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다.

이우환 작가의 백남준론 '백남준-비디오를 넘어서' 중 맨 마지막 부분이다>

백남준이 참으로 시대의 선구자이며, 새로운 표현자라고 일컬어 지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세계는 단순한 다다적인 부정적 파괴주의나, 압화식(座花式)의 표현으로 기호의 증식과 그 되짜기를 일삼는 구조언어론이나 그와 같은 수정주의를 넘어선 지평으로 열려 있다.

비디오를 살아 있는 동료로 포착하려고 할 때, 그것은 스스로 서구 형이상학하고는 다른 레벨에서, 때 묻지 않고 감도가 높은 인간의 정신성이라고나 할, 산다는 것의 질을 다시 묻는 작업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셈이다.

백남준의 작업은 무릇 인간의 삶을 침전과 정화淨化로 향하게 하고, 굳어버린 제도의 쇠사슬에서 세계를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표현은 최근의 것일수록, 신선한 놀이 가운데 편안함이 넘치고 깊은 엑스터시를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하고, 아나키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조금도 심각하거나 명령적인 인상이 없는 것은, 그 밑바닥에 따뜻한 지혜의 작용과 끝없는 놀이 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남준을 만날 때마다, 나는 자신의 세속화된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진다. 장난스럽게 히죽히죽 웃으면서 의아한 듯이 그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깨우친 듯이 거지인 양하면서도 당당한 그에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임에 비해, 가끔 신사복도 입고 주위에 신경을 쓰면서 사는 나는, 부자유스럽기 짝이 없고 아직껏 불필요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백을 본떠 나도 언젠가는 깨우친 표현자가 되고 싶은지 어쩐지 조차 모르겠다.

백남준 삶과 예술을 조명한 영상 '백남준의 마술(Play It Again Nam)'을 보고 있는 이우환 화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백남준과 이우환,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고를 떠나 이우환에게 백남준은 너무 큰 작가이다. 이우환이 쓴 백남준의 비디오를 읽어봐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