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기술과 통신에 관심이 많았던 백남준은 정보의 확산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슈퍼하이웨이(고속도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앞에서 전자가 더 붙는다. 그는 1974년 그의 ''탈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서'라는 에세이에서 21세기는 이제 26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정의했다. S'intéressant aussi bien aux technologies qu'aux communications, Nam June Paik emploie le terme de « super higway » (autoroute) face à l'accélération grandissante de la propagation de l'information. Visionnaire, il va définir en 1974, dans son ''Media Planning for the Postindustrial Society? The 21st Century is now only 26 years away'' (Planification des Médias pour la Société Postindustrielle ? Le XXIe Siècle n'est plus que dans 26 ans)pour le Rockfeller Center ce que sera la technologie du XXI° siècle.
백남준 TV를 피아노처럼 깨부수지는 않았다. 그러나 쌍방형 INTERNET(쌍방 미디어와 통신기술로 지구촌은 하나가 될 것이다. 백남준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 일방형 TV를 태클을 걸고 공격하다. "나의 10대 시절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쇤베르크를 발견한 것이다. 쇤베르크는 단순한 음악가가 아니라 서양미술에서 고질적 계급을 소멸시킨 전위예술가이며 음악을 소리개념으로 확장시킨 인물이다" - 백남준. "세계의 역사는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백남준 <평> 백남준은 주 특기는 확 뒤집어 엎는 것 즉 전복이다. 그래서 쇤베르크를 좋아했고 맑스를 좋아했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도 그 축을 흔들어 새롭게 쓰려고 했다.
칸딘스키와 쇤베르크는 절친이었다. 칸딘스키는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으로 이뤄진 음악을 듣고 추상회화를 창안했다. 여기서 미래의 음악과 미래의 미술이 탄생하다. 쇤베르크도 화가였다. 융합적 예술가들이다. 백남준의 전자아트도 칸딘스키와 쇤베르크의 영향이 크다.
인류평화를 노래한 '존 레논'과 비디오아트로 인류평화를 기원하며 굿판을 벌린 '백남준'은 서로 통한다. 멀리는 '칸트'의 영구평화론과도 맞닿아있다. 백남준 예술 2단어로 요약: 비빔밥과 짬뽕. '비빔밥' 멀티(융합)미디어, '짬뽕' 인터(상호)미디어 혹은 모든 예술 장르를 합친 것(조원제의 창조물). 이런 기질은 어디서 왔나? 바로 대륙문화와 해양문화를 통섭하는 반도 기질이다.
백남준 TV아트가 인터넷이 되기 전까지 30년 동안은 백남준은 완전히 엽기적이고 미친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는 비저너리한 작가이면서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예술가라는 것이 인터넷의 등장으로 증명되었다
[백남준, 몽골 세계지배 노하우-노마드-실크로드 등 통해 인터넷 발상하다] '세계사'와 '세계화'라는 말이 13세기 몽골제국에 의해서 처음 생겼다.
<몽골은 '세계사'의 기원을 만든 나라다. 그리고 '인터넷 원조(조상)'인 '실크로드'를 처음 열었다. 스키타이 족 등 '등자'를 발명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말을 타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이 가장 빨랐다. 또 오늘날 네트워킹 원조인 '역참(400KM마다 1500여 개 역참 Station or Platform이 있었다. 여기서 먹고 자고 쉬고 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재충전하는 정박소)'이라는 '디지털 경영(거미줄 같은 방사형 연결체계로서 지금의 인터넷 링크시스템과 같은 구조. 아래 사진)'을 통해서 전 세계를 지배하다. 종교나 사상이나 지역이나 출신에 차별 두지 않고 '포용정책' 쓰면서 매우 효율적이고 합리적 정치-행정시스템을 가진 제국이었다. 몽골은 고려를 당시 그 어느 나라보다 특대우해 주다. 몽골지배층은 고려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최고영예로 생각>
'세계사'와 '세계화'라는 말이 13세기 몽골제국에 의해서 처음 생겼다. 그러니까 모든 것에서 서양보다 동양에서 생긴 것이 많다. 백과사전도 중국이 유럽보다 2000년 전에 먼저 만들었다. 백남준이 서양인 중 일부지만 동양인을 얕잡아 보는 것 같은 사람이 등장하면 백남준은 나는 몽골의 후손이라는 말을 사용해 상대방을 압도하기도 했다.
정보화시대, 인류의 난제인 평등문제 많이 해소되다. 일인 미디어 유튜브 시대, 누구나 서울대교수가 될 수 있다. Fluxus운동, Flow: 흐른다. 움직이는 '유동성'을 말한다. '유랑, 유목' 디지털 노마드 시대에 맞는 운동이다.
나는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백남준.
여기서 백남준이 말하는 TV란 산업경제가 아니라 공유경제를 의미. 신석기 초기까지는 사유재산이 없었다. 신석기 후기로 청동기에 가면 사유재산 개념이 생긴다. 여기서 부터 잉여생산이 생기고 그 곡식을 보관할 창고가 생기고 그래서 사유재산이 생기고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계급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백남준은 TV 즉 INTERNET은 사유재산처럼 혼자 독점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공유경제 공산품(사회공공재)으로 보고 있다. 미디어 공동시장도 여기서 나온 개념이다. 생존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사상가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의 소통론인 <공론장>이론과 거의 유사하다.
<40년 전인 1992년 백남준은 도올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예언을 했다>
백남준의 예언: 21세기는 백수(혹은 비정규직) 전성 시대라고, 여기에 대안으로 백남준 인터넷과 SNS를 착안하다. 그러면서 백남준 앞으로 <예술가의 역할>은 백수들이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대안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 본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백남준 백수로 살면서 세계를 호령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다.
취업: 노동 소외자가 된다. 임금 '노예'가 된다. 백수: 노동 소외를 겪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활동'가다. 자기 삶의 매니저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21세기는 20세기와 다르다. 21세기는 20세기의 황혼기다.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다 백수였다. 시인과 예술가, 사상가와 프리랜서가 다 백수다. 공자 맹자 예수 노자 소크라테스 연암 박지원, 보들레르, 맑스, 백남준이 다 백수다. 백수가 평가절하된 것은 20세기 자본주의 때문이다. 그들은 백수를 격멸했다 그러나 인류문명사의 모든 지혜는 백수에게서 나왔다. 그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벌써 망했다.
탈영토 제국주의. 남의 영토를 쳐들어가지 않고 다른 나라를 영구히 지배하는 것이 바로 정보지식과 문화예술의 힘이다. 우리는 지금 한글로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만든 언어다. 누가 만들었고 언제 만들어졌는지가 이렇게 확실한 언어는 그 어느나라에도 없다. 허나 우리 언어를 더 살리기 위해선 특히 한문고전과 다언어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 과학성, 합리성, 독창성 등을 기준으로 세계의 문자들에 순위를 매겼을 때 한글이 단연 1위를 차지했다는 발표하다.
백남준은 현대예술과 현대과학의 압축파일이다.
'음양'이 합쳐져 먼저 '수화(물과 불)'가 생기고 그 다음에 '목금(나무와 쇠)'이 생기면서 형체가 확연히 드러나 사람의 몸이 생겼다. 사람은 '지수화풍(물과 불, 바람과 흙의 기운)'이 화합하여 만들어진다. 근육과 기육은 모두 '지'에 속하고, 정혈과 진액은 모두 '수'에 속하고, 호흡과 따뜻함은 모두 '화'에 속하고 영명(靈明 신령)과 활동은 모두 '풍'에 속한다 -붓다. 몸과 우주의 화려한 대칭의 향연. 몸은 소우주. 천체는 대우주, 둘은 같은 하나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의학이란 사람 몸을 우주 천체로 보고 공부하는 학문이다. "사람은 천지의 '기'로써 태어난다"/<나의 이름은 5행(금토화목수) 중 '금화수'에서 왔다> 더 자세히 풀어보면 이렇다. '금(김金Gold)'-'화(형炯Fire)'-'수(순淳Water)' 내 이름이 5행법칙에서 벗어나 있나. 등기될 때 동서기가 한문을 잘 못 적었다고. 원래는 김형돈. 하여간 내 이름 속에는 모든 사물의 근원인 물과 불이 들어있다.
스위스 취리히 여기서 백남준 1991년 쿤스트하우스(Kunsthaus Zürich)에서 큰 회고전을 열다. 위 취리히 역 사진 2019년
유럽 미디어를 보면 한국에서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은 공포뉴스가 너무나 많다. 특히 북한에 대한 악의적 뉴스가 심각하다. 그러나 한국에 온 외국인들 상황이 정반대라 완전 당황한다. 2019년 스위스 취리히 갔을 때도 당신은 북한 사람 같지 않고 좋은 사람 같다 남한에서 오신 거죠?라고 할 때 유럽인들이 얼마나 가짜 공포 뉴스에 찌들고 또 찌들었는가를 체감하게 된다.
[1] TV 족보: 중세 고딕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백남준도 쾰른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보고 영감을 얻어 전자아트 시작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2] 화소 족보: 프랑스 인상파 중 점묘파에서 시작하다. [3] HDR(고화질) 족보: '카라바조' 등 바로크 미술에서 시작하다. [4]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족보: 초현실주의에서 왔다. * 결론 미술에서 'something new' or 'happening'을 강조하는 것은 이를 통해 인류는 기존의 세계를 더 확장시키고 발전시켜 인류문명을 진화 혹은 진보시켰기 때문이다.
<4차산업시대 미술을 알아야 산다> 외국에 상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서양미술사 공부는 필수다. 이같은 정서를 읽지 못하고서 상품을 팔겠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또한 콘텐츠를 적극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프랑스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작품만 전시할 게 아니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전시해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 작품은 옷을 벗고 있는 근육질 몸매이지만 엄청 불편하고 긴장된 자세를 하고 있다. 반면에 미륵반가사유상은 너무나도 편안한 자세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백남준의 ‘TV부처’ ‘TV로댕’ 등의 시리즈를 함께 관람할 수 있다면 더 큰 시너지효과를 낼수 있다.
1969년 작곡가 강석희 전 서울대 음대교수는 서울에서 '제1회 국제현대음악제'를 주최했다. 한국에서 앞으로도 일어나기 힘든 가장 아방가르드한 음악적 사건이었다. 강석희는 이 행사에 백남준을 위촉하고 그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백남준은 의뢰를 받은 지 며칠 지난 후에 노래악보를 강석희에게 보냈다. 제목은 '콤포지션' 이 작품은 1969년 세계 최초로 초연되었다. 남녀가 그랜드 피아노 위에서 드러누워서 연애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액션 뮤직이었다. 백남준이 뉴욕에서 1967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한국판이다. 당시 명동극장은 초만원 이 공연 후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주최 측은 대처안이 의논되었고 결국 단발로 끝나고 말았다. 백남준과 강석희의 인연과 우정은 이렇게 무르익어갔다.
1984년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위성아트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로리 앤더슨>이다. 미국의 연주자이자 음악가다. 1970년대 뉴욕 아방가르드의 한복판에 있었던 그녀는 1980년대에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전위적 환경) 그녀는 시카고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20세에 그녀는 미술사, 조형 예술 및 조각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다. 1970년대 초반에 그녀는 뉴욕 아방가르드의 한가운데를 자주 방문했다. 그녀는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고 종종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연에 참가했다. 그녀의 공연 중 하나의 노래로 나오는 "O Superman"이 1981년에 대히트를 치다 이 노래는 그녀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주고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를 맞았다. 백남준이 1984년 위성아트에 그녀를 선택했다.
<강석희 작곡가, 한국의 슈톡하우젠(?) 전자음악의 선구자> 백남준과 긴밀한 친구였던 전 서울대 음대교수 강석희 (작곡가 1934년생) 윤이상(尹伊桑)의 제자이자, 진은숙(陳銀淑)의 스승, 가야금 연주자 한테라의 스승이기도 하다. 88서울올림픽 음악감독을 하다. 백남준보다 2살 아래다. 강교수는 학력을 보면 베를린 예술대 음악학 석사이면서 동시에 베를린 공대 전자음악 공학석사다. 확실하게 백남준과에 속한다(안동고 졸업 서울대 작곡과 학사, 독일 하노버 국립 음악연극미디어대 음악학 석사, 독일 베를린국립예술대학교 음악학 석사 그리고 독일 베를린공대 전자음악공학과 공학 석사)
서울 출생이며 독일에서 공부하였다. 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윤이상(尹伊桑)의 제자이자, 진은숙(陳銀淑)의 스승이다. 대한민국 현대음악의 산 역사로, 대한민국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 을 1966년에 발표했다. 한국 전통음악을 현대 작곡기법과 접목시켰으며 가야금 연주자 한테라의 스승이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도 예술적 영향을 주고 받았다. 88서울올림픽 음악감독으로도 활약하였다. 2020년 8월 16일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의 출현은 갑자기 되었다기보다는 괴테시대 색채론으로 올라가고 가깝게는 추상미술의 대가 칸딘스키와 몬드리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추상미술을 추상음악을 바뀌면서 비디오아트가 탄생했죠. 그러니까 칸딘스키가 백남준에 영향을 줬다고 봐야죠. 어쨌든 문화산업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선도사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대미술이 산업기술적 논리에 큰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이제는 디지털 논리와 현대미술의 접점을 어떻게 융합하고 깊이 교접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플럭서스 flow 흐른다: 유동성, 유연성, 유머성. 정치적으로 지방자치 지지>
- 국가 개념을 초월하는 ‘세계주의’적 예술의 성격
- 파괴를 통한 창조라는 신념의 ‘혁신주의’
-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있다는 ‘우연성’ 미학
- 플럭서스 예술의 형식적 특성인 ‘인터미디어(혼합매체)’
- 예술과 인생의 뿌리깊은 이분법을 해소하는 ‘예술/인생 통합 장르’
- 예술 행위의 산물로서 공연예술의 ‘일시성’
- ‘재미’를 추구하는 예술
- 행위의 단순성과 절제된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간결성’의 미학
- 추상적 개념 대신에 구체적인 실체를 대두시키는 ‘구체주의'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015&fbclid=IwAR3pAOwh2AZkFIUUvW8VJfUPLkF3r8FVgBfOm7Ys_duLXscJH8uNbc8NuyQ
<'플럭서스' 21세기 백수전성시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려줌>
20세기 서구미술사에서 가장 큰 운동은 바로 전반기에 바우하우스 운동과 후반기에 플럭서스 운동이다. 이들 특징은 문화와 예술의 민주화에 초점 맞추다. 20세기 고체사회를 액체사회로 바꾸려 했다. 고정성(hardware)보다 유동성(software)을 강조하다 <아래는 덴마크에서 열린 플럭서스 공연> 93년 서울에서 플럭서스공연(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 아시아 최초로 열렸다.
1993년 3월 ‘예술의전당’ 개관기념축제의 일부로서 자유소극장에서 개최되었던<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 THE SeOUL OF FLUXUS>은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베를린관장으로서 플럭서스 20주년 기념행사(1982년)와 30주년 기념행사(1992년)를 조직하였던 르네 블록이 예술감독으로 참여하였다. <사진저작권: 천호선><1995년 광주비엔날레 백남준 김홍희 선생 등등> 1995년 광주비엔날레 백남준은 예술은 역사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기에 광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비엔날레가 열리는 것을 대환영하다. 광주는 이제 전 세계미술가들에게 가장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그가 서구에서 배우고 경험한 모든 실력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이 행사가 성공하도록 돕다.영상작업으로 홍보대사까지 하다. 그러나 지나친 과로로 다음에 뇌졸중으로 쓰러지다
[백남준&요셉 보이스] '2인전' 신라갤러리(삼청동)에서
문학은 책이 아니다(Literature is not book) 1988 2 color TV monitors, acrylic paints, globes, books, satellites dishes, original one - channel video 116.84 × 182.88 × 101.6 cm
백남준 TV아트가 인터넷이 되기 전까지 30년 동안은 백남준은 완전히 엽기적이고 미친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는 비저너리한 작가이면서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예술가라는 것이 인터넷의 등장으로 증명되었다
<백남준은 심각하고 진지한 것을 싫어했다> 백남준이 인류를 구원하는 방식 중 인터넷(정보와 지식은 누구나 거의 공짜로 나눠 가지면서 즐겁게 사는 것)도 한 방식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바로 유머감각이라고 했다. 백남준 연구가 리비어는 백남준에게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이거라고 했다. 백남준은 활력 넘치는 유머기질를 가졌다. 그는 예술이라는 게임의 조커(Joker)와 같은 존재였다. 그에게 모든 것은 장난감이었다. 그의 예술론은 독일 시인 '실러'의 시에서 나온다.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유희정신을 찾는 것이다(실러의 말)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포퍼먼스 예술가의 길을 가면서 TV의 세계와 음향기를 포함한 자유와 다양성 시각적 즐거움 인식론적 관심 같은 새로운 장르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렬한 한 순간의 황홀감에만 도취하는 시대는 끝났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할 때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려고 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21세기는 90%이상(?)이 백수가 되는 시대다. 이럴 때 예술가는 뭘 해야 하나를 묻고 있다. 백남준은 그 대안을 내 놓았다. 예술가는 첫째 창작물을 만든다. 둘째 백수들이 직업을 가지지 않고도 하루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고 했다. 백남준은 우선 인터넷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21세기는 그것으로 부족하다. 제2의 인터넷이 나와야 한다. 그것이 백수를 구원하는 지름길이 되지 않겠나 예술가들 어깨가 더 무거워지고 있다.
백남준 어떻게 시간의 주인으로 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시간은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다. 지금까지는 신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비디오는 신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기계라고 했다. 백남준은 비디오를 통해서 시간을 끌어당기고, 압축하고, 잘게 자름으로써 시간에 리듬감을 주고 뒤엎어가며 시간의 법칙을 벗어나고 시간의 갇혀 사는 감옥을 탈출하려고 했다. 백남준의 실험 TV가 등장한 이유다. 현실에서 불가능하고 분열되어 있고 모순적이고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을 비디오하면에 담으려고 했다. <아래> 시간의 주인이 되려면 시간의 가변성을 육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시간을 시각화한 것이다. Swiss Clock, 1988, closed-circuit camera, clock, 3 TV monitors, tripod, dimensions variable
<백남준은 1965년-1968년까지 뉴욕의 갤러리아 보니노(Galeria Bonino)에서 전자아트(Electronic Art) 연작 전시로 네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이 시리즈 작품은 Nixon TV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제작된 것으로 Caged McLuhan(존케이지의 예술론과 맥루언의 미디아론이 합쳐진)에 기반하고 있다. 아래는 1968년 4월 17일~5월 11일에 개최된 전시회와 함께 발행된 카탈로그다. 전시회에는 Ayo, Mary Bauermeister, Robert Benson, Robert Breer, Christo, Ray Johnson 및 Otto Piene도 참여했다. Allan Kaprow 글도 포함되어 있다.
닉슨은 1960년 유명한 TV토론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지 못해서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했다.
백남준은 미디어 효과의 전환점을 목격하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 Nixon was defeated by John F. Kennedy because he failed to win a positive image in the famous TV debate in 1960. Paik created this work by witnessing the turning point in the effects of media. <아래> 2.Nixon TV, 1965/2002, 2 TV monitors, coil, signal generator, amplifier, condenser, timer, 1channel video, color, silent, dimensions variable.
1973년 WNET을 통해 방송된 Global Groove는 전 세계 사람들의 춤과 노래와 대중문화 등을 골고루 콜라주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백남준이 처음 만든 유튜브다 '비디오 공동시장'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백남준은 2차 대전 이후 보다 투명하고 상호 소통과 상호 이해가 잘 되는 사회(지구촌)를 만들고 싶어했다. 백남준의 맥루언을 말한 본격적인 지구촌 시대에서 가장 큰 꿈은 바로 전쟁 없는 사회(warless society)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이르멜린 리비어 글을 약간 재맥락) People join up with each other, on the basis of post-World War ll, mutual understanding all over the world, that is, a warless society. It is the dream of a global village.” (Irmelin Lebeer)
<백남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소통이 막혀 숨을 쉴 수 없는 곳에 구멍을 팍팍 내가 다녔다 그에게 two-way communication이 중요한 이유다> “Like McLuhan say, we are antenna for changing society. But not only antenna 〔…〕 My job is to see how establishment is working and to look for little holes where I can get my fingers in and tear away walls.” -Nam June Paik
“McLuhan이 말했듯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안테나이다. 하지만 안테나만이 아니라 〔… 〕 반면 나의 일은 시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고, 벽에 손가락을 넣고 그 벽을 부술 수 있는 작은 구멍을 찾는 것이다.” -백남준
신라 금관은 전통적 스키타이 양식이다. 그 배경은 간단하다. 아시아의 유목민 벨트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스키타이-흉노 혹은 훈족-북방아시아 우랄알타이-시베리아-만주-한국-에스키모-인디언> <아래사진>신라 금관의 조상인 '틸리야 테페 금관(지금은 아프카니스탄 황금 약식, 스키타이 양식 혹은 흉노족 양식)' 국내 첫 선을 보이다.
<한국은 학문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 전문 사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우리나라에서 번역본이지만 최초의 [정신분석대사전]이 나왔다. 거기 편집을 맡은 적이 있다. 이 사전의 저자 서문이다>
최초 정신분석 사전은 1931년-1938년 사이에 <정신분석 핸드북 사전(Handwörter-buch der Psychoanalyse/Dictionnaire de main du psychanalyse)>이라는 제목으로 리처드 스터바(Ri- chard Sterba)에 의해 편집이 시작되었고, 나치의 오스트리아 점령으로 출판사가 문을 닫기까지 5권의 별책을 출판하였다. 이 사전은 정신분석 개념을 검토하거나 조사하는 형태라기보다는 오히려 프로이트 개념의 일반 용어집 형태로 구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그의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알파벳순으로 용어를 정리하는 이 작업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여러분에게 엄청나게 힘겨운 짐이 될 것이네. 내부적으로 솟아오르는 동기가 아니고, 단지 외부적 유혹에 이끌려 마지못해 하면서 이 작업에서 어떤 효과를 내려고 한다면 이 일을 하지 말게.” 지그문트 프로이트(S. Freud), <정신분석 일반 사전(Dictionnaire général de la psychanalyse)>서문(1936)>, OC, XIX, 287-289, GW, Nachtragsband, 761, SE, XXII, 253. Richard Sterba, <Handwörterbuch der Psychoanalyse>, 5 vol., Vienne, Intern. Psychoanalytischer Verlag, 1936-1938.
프로이트는 한 사전이 내부적 요구나, 욕망 또는 충동에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유명한 ‘도라’[본명 이다 바우어(Ida Bauer)] 사례 분석에서, 사전은 어린이가 어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말의 진실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성의 지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S. Freud), 「히스테리(도라) 분석의 단편」(1905), <다섯 가지 정신분석(Cinq Psychanalyses)>Paris, PUF, 1954, p.74을 발견하는 그런 곳과 같은 것으로 항상 외롭고 금지된 즐거움의 세계를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독일어권 거의 모든 유럽 정신분석가처럼 미국으로 추방된 스터바(Sterba)는 알파벳 L에서 이 중형 사전의 편집을 중단했고 라가슈(D. Lagache)에게 쓴 편지에서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이 용어집이 나의 과대망상에서 왔는지 혹은 히틀러 때문인지, 혹은 20년 후에나 완성될지 잘 모르겠다.”
이 핸드북 사전은 이런 종류의 모든 작업에 모델로 활용되었다. 1967-1968년에 발행된 사전도 마찬가지인데 이 시기에는 분열과 의심의 눈총을 받고 있던 국제 정신분석 운동이 총결산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고, 정보의 공유와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할 필요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명칭의 사전이 사용되고 있었다. 어휘 사전(glossaire), 사전(dictionnaire), 백과사전(encyclopédie), 용어 사전(vocabulaire)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정신분석 학회(APsaA)의 보호 아래 공동으로 발행한 <정신분석 개념 및 용어 해설집(Glossary of Psychoanalytic Terms and Concepts)>[180개 항목과 70명의 집필자]은 실용적이고 의학적인 프로이트주의 정통을 표방하였다. 같은 각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폴란드 영토에서 태어나 나치즘에 쫓겨 미국에 정착한 미국인 정신분석가 루트비히 아이델베르크(Ludwig Eidelberg, 1898-1970)의 지도 아래 640개 항목과 40명의 도움 편집자와 함께 편집된 야심작 <정신분석 백과사전(Encyclopedia of Psychoanalysis)>이 발행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분명하고 합리적인 영국 정신분석가 찰스 라이크로프트(Charles Ry- croft)가 600개 항목으로 된 <정신분석 비평 사전(Critical Dictionary of Psychoanalysis)>을 발간했는데, 이 사전은 일관성과 평이성에서 공동 저작이 갖출 수 없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전은 또한 후기 프로이트주의[특히 멜라니 클라인과 도널드 우즈 위니코트]의 개념을 고려하면서 프로이트주의를 반영한 최초의 사전이었다. 라이크로프트(Rycroft)는 검토를 해가면서 열린 자세로 하인츠 코후트, 자크 라깡, 셀프 심리학과 같은 현대 정신분석의 흐름을 짧고 간결한 문체로 풀이했다. 이것은 도그마티즘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라이크로프트(Rycroft) 사전은 프랑스와 그 이외 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사전을 편찬하는 출판사의 모델이 되었다.
라플랑슈(J. Laplanche)와 퐁탈리스(J.-B. Pontalis)가 집필하여 아주 유명해진 <정신분석 용어 사전(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417개의 항목]에 대해서 말해 보자. 이 사전은 프로이트 저작에 충실히 적용된 구조적인 관점에 따라 용어를 번역하기 위해 단어를 엄선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정신분석 개념을 유일하게 제대로 확립한 최초의 사전이다. 이 사전은 앞서 편찬된 사전처럼 기술적인 약술이 아니라, 알찬 내용의 참조 문헌[20줄에서 15쪽에까지 이르는]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신분석 개념들을 분석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다. 말하자면 독특한 정신분석적 발견을 고찰하기 위해 정교하게 개념들을 분석하였다. 자크 라깡의 강의와 과학사에 대한 프랑스 전통을 잘 보여준 이들 저자들은 다른 저서가 갖지 못했던 이론적 위력을 발휘했으며 그래서 저자의 두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지는 곡예의 연출을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품질이 바로 성공이다. 라플랑슈(J. Laplanche)와 퐁탈리스(J.-B. Pontalis), <정신분석 용어 사전(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Paris, PUF, 1967. 라이크로프트(C. Rycroft), <정신분석 비평 사전(A Critical Dictionary of Psychoanalysis)>, New York, Basic Books, 1968. E. Burness, M. D. Moore, D. Bernard Fine, <정신분석 어휘와 개념 해설집, 미국 정신분석 학회 편(A Glossary of Psychoanalytic Terms and Concepts, APsaA)>, Library of Congress, 1968년. <정신분석 백과사전, 루트비히 아이델베르크 편(Encyclopedia of Psychoanalysis), Ludwig Eidel- berg(éd.)>New York, The Free Press, et Londres, Collier Macmillan, 1968.
치료적인 허무와 무미건조한 언어와 성자적(聖者的) 전설의 침범은, 세기말에 일어난 인체 공학의 물결에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너무도 수수방관하게 되어 프로이트주의 운동의 일반화된 분열을 가져오게 했다. 정신분석은 곧 마술과 과학주의 사이에서, 비합리주의와 약리학 사이에서 밀려나 아카데믹한 꿈속에서 잃어버린 영광을 찾으려는 할머니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 보편주의는, 제자들이 창시자 영웅의 노스탤지어에 빠지면서 황혼기로 인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5-1990년에는 1960년대와는 전혀 다른 제2세대 사전이 나타났다. 한 부류의 사전은 개념 간의 연결이 되지 않으면서 도그마적인 기능을 발휘했고 각 학파의 저서만을 풍성하게 다루었으며, 또 다른 부류의 사전은 과잉 다양성 또는 무정부적인 범람으로 다각적이고 괴상한 모습을 띠어 개념과 논문과 저자들의 목록이 무한정 소개되었으며 결국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아는 것처럼 돼 버렸지만 정작 훌륭한 저자들은 끔찍한 암장(岩漿, magma) 속에 빠지게 하는 위험에 놓이게 했다. 1902년-1938년 수요 심리 학회와 빈 정신분석 학회의 선구자이었던 엘케 뮐라이트너(Elke Mühlleitner)가 편집한 걸출한 정신분석 용어 사전은 제외한다. 엘케 뮐라이트너(Elke Mühlleitner), <정신분석 전기(傳記) 사전(Biographisches Lexikon der Psychoanalyse)>1902-1938 수요 심리 학회와 빈 정신분석 학회 회원, Tübingen, Diskord, 1992. 참조.
우리가 집필한 이 정신분석 대사전은 이런 두 경향과는 반대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별 유용성도 없는 것을 풀이하거나 어휘 개념을 복원시키는 그런 식은 아니다. 이 사전은 용어 사전이나 용어 풀이도 아니며, 특별히 프로이트의 재발견을 탐구하는 도구도 아니다. 이 사전은 정신분석 사상 체계의 모든 요소를 조사하고 분류하고자 했고, 지난 20세기 동안에 이어져 온 정신분석 개념의 독특한 지식 체계와, 쉴 새 없이 재해석 되어 온 프로이트 작품의 역사와 프로이트 작품의 근본적인 독트린,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의 계보, 그들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런 시각에서 이 사전은 정신분석이 만들어 내고 전파시킨 개념과 정신분석을 수용한 23개 나라들 그리고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저자들의 문헌과 정신 병리적 실체를 유일하게 고려하여 편찬한 최초의 사전이다. 여기에는 정신분석이 투영된 분야, 가령 정신의학이나 인류학 등과 같은 분야에 어떻게 영감을 주었는지를 서술하고 있고, 정신분석이 임상적인 방법을 구성한 근본 원리 또는 원형적인 치료 원리를 소개하고 있으며, 정신분석이 토대로 하고 있고, 정신분석이 발명하였으며, 정신분석이 영감을 받은 심적 현상과 치료 기법을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전은 탄생과 가계, 죽음과 섹슈얼리티, 광기 그리고 정신분석이 설정하려 했던 것과 창립되었을 때의 제도, 프로이트주의의 원형, 제각각의 학파와 그 학파의 역사가 어떻게 변모했는지에 대한 담론과 행위를 소개하고 있으며, 다른 지적 운동과 정치적, 종교적 운동이 정신분석적 발견에 어떻게 모순적인 투영을 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 사전은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직계 가족들, 프로이트의 스승들, 중요한 의미를 담은 편지를 주고받았던 작가와 예술가들,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과의 만남, 요제프 브로이어(Josef Breuer)와 공동 집필한 <히스테리 연구(Études sur l’hystérie)>와 마지막 저서인 <정신분석 개요(Abrégé de psychanalyse)>을 포함해서 1891-1938년 사이에 발행된 23권의 프로이트 저서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1895년에 집필되고 1950년에 씌어진 <과학적 심리학 초고(Esquisse d’une psychologie scientifique)>와 <윌슨 대통령(Le Président Thomas Woodrow Wilson)>이란 두 권의 다른 책도 첨부하였다. 프로이트는 <윌슨 대통령>의 서문을 썼지만, 윌리엄 불리트(William Bullitt)와 함께 공동 저자로서 본질적인 기여를 했다고 했다.
표제어 명칭은 어떤 저자들이 어떻게 창안했고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쓰였나를 증명하고 각 개념과 임상적 실체와 영역, 방법, 연구 대상, 행위를 명확하기 위하여 이탤릭체로 정의된 논문의 문헌을 표제어 바로 밑에 소개하였다. 명칭을 절대적으로 원어로 사용해야 할 때에는 매번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여 원어 개념을 보전하였다.
각 항목 밑에 중요한 책 제목이나 자료 그리고 쓰도록 허락된 고문서 참고 문헌을 소개했고,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관련된 또 다른 항목의 출처를 달았다. 24권의 프로이트 저서에 관련하여 우리는 독일어로 된 최초의 발행 날짜와 장소를 표시했고, 영어와 프랑스어로 된 다양한 번역을 번역자와 함께 소개하였다. ‘정신분석 연대기(Chronologie)’를 책 마지막에 첨부하였다. 이 연대기에서 정신분석의 기원에서부터 출발하여 전개된 정신분석 역사의 주요 사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 미셸 플롱.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낭시와의 대화(Conversation with Nancy)>(2002)에서 김순기와 낭시는 오늘날 예술에서 내용의 부재에 관해 논하며 동서양 철학의 차이와 접점을 심도 깊게 다룬다. <데리다와의 대화(Conversation with Derrida)>(2002)에서는 세계화에 저항하는 ‘침묵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동양 정신성의 관점에서 해체주의의 근간을 고민하는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2014년 5월 20일 화요일 오후 4시 아트선재센터 지하 1층 아트홀에서 김순기 개인전 연계 컨퍼런스 “어떻게, 침묵은, 저항은, 김순기의 예술(Comment arrive, Silence, Résistance, Dans L’art de Kim Soun Gui)”이 열린다. / 이번 컨퍼런스에는 애론 레비(Aaron Levy, 슬라우트 파운데이션 디렉터), 박준상(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 장-미셀 하바테(Jean-Michel Rabate, 펜실베니아대학교 영문과 교수) 등이 발제자로 참여하여 김순기의 예술 세계뿐만 아니라 그의 인터뷰 작업에 등장하는 장-뤽 낭시(Jean-Luc Nancy)와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철학적 사유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또한,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화상 대화를 가진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세계화 시대에 예술이 직면한 위기 속에서 저항의 방법을 모색해온 장-뤽 낭시(Jean-Luc Nancy)와 김순기가 스카이프 연결을 통해 토론을 펼칠 예정이다.
기획: 사무소 주최: 아트선재센터, 주한 프랑스 문화원 모더레이터: 김선정, 자끄 술릴루 패널: 김순기, 박준상, 애론 레비, 장-뤽 낭시, 장-미셸 하바떼.
장 뤽 낭시의 죽음: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실종, "인류는 코로나와 같은 높이와 같은 입장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진지하게 평등하게 만나야 한다" "Covid-19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단서를 준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말을 걸면서 소통하려 한다. 그것은 빠른 시간 안에 우리가 함께 서로 동등한(평등한) 위치에 설 필요가 있다. 그때 우리는 바이러스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진정으로 만나게 된다" 200권의 저서를 남기고 떠난 프랑스 철학자 낭시, 그의 무위공동체 사상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무위자연과 비슷한 '무위공동체(La Communauté désœuvrée)'를 제안한 아주 선량한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가 사망하다. <70권>의 저서를 남기다. 김순기 재불 작가와 이 철학자와 인터뷰한 영상을 작품화하기도 했죠. 낭시는 또한 이런 역설적 진리를 설파. "혼자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혼자이다(Être singulier pluriel)" 화엄불교와 비슷하군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백남준 작품 프리벨맨이다. 이 작품을 복원하는데 7년 걸렸다. 독일이 미디어아트 박사 5명 대표자 Dr. Wulf Herzogenrath 과 1명 더 추가 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장소: 프랑크푸르트 커뮤니케이선 박물관(DER PRE BELL MAN VOR DEM MUSEUM FÜR KOMMUNIKATION FRANKFURT) 입구
복원에 참가한 사람은 이렇다: [1] Prof. Dr. Wulf Herzogenrath, Experte(백남준 전문가) [2] Prof. Dr. Bernhard Serexhe, Experte [3] Dr. Franziska Stöhr, Expertin [4] Dr. Hanna B. Hölling, Expertin [5] Mario von Kelterborn, Sammler Moderation: [6] Dr. Kia Vahland, Süddeutsche Zeitung
“인생에서 세 가지(원형, 삼각형, 사각형) 기하학 도형을 피해야 한다. 악 순환(돌고 도는 악의 끝없는 순환과 반복), 삼각관계(사랑의 삼각형), 정사각형(너무 모질고 각진 사각형) 사유와 정신 - 마리오 베네데티.
동서의 '상보' 필요: 백남준 'TV 부처' 철학, 서양철학: '실체(현상)' 중시, 동양철학: '신체(수신)' 중시:철학은 대뇌이고, 삶은 신체이다. <서양철학 대뇌중심, 동양철학 신체중심>
인간이 대뇌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신체를 존재로 보아야 한다.<메를로-퐁티[몸 철학자]가 서양에서 이런 동양철학을 주장하다>존재는 신체이다. 자연은 신체이다. 자연은 존재이다. 신체는 정신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1] 프랑스가 우리보다 선진국: 저명 철학자와 철학저서 생산, 철학수출국 [2] 독일이 우리보다 선진국: 독일 모든 대학은 독일인과 외국인 학생에게 대학등록금 무료. 기초학문 발달. 교육철학: 학벌보다 평생학습자로 유도. [3] 한국은 프랑스보다 선진국: 대중교통시스템, 인터넷서비스, 도시생활 보안시스템(security)에서. 남의 물건을 대부분 가져가지 않는다. [4] 한국은 독일보다 선진국: 최초금속활자, 팔만대장경, 한글우수성 면에서. [5] 한국은 미국보다 선진국: 의료서비스에서 특히 그렇다.
1961년 독일 괴짜들 https://www.youtube.com/watch?v=QWE2Cq2boPg
<백남준 멘ㅌ> 작곡가 ‘존 케이지’ (John Milton Cage Jr., 1912 ~ 1992) 존 케이지 (John Milton Cage Jr., 1912년 9월 5일 ~ 1992년 8월 12일)는 미국의 작곡가이다. 우연성 음악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조작된 피아노(prepared piano)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음렬주의, 전자 음악 등의 음악을 작곡하였다. 대표작으로 ‘4분 33초’, ‘상상 풍경 No.4 (Imaginary Landscape)’ 등을 작곡했다.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하였다. 1년 정도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적이 있으나 화성이나 이론에는 자기 적성에 안 맞다며 유럽을 떠났다. 다방면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작곡가 강석희 와도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우환 미술세계: 고인돌의 현대화. 고인돌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에서 이런 작가가 나왔다는 것은 당연하다. 잘 생긴 돌이 하나 생기려면 억겁의 세월이 필요하다. 돌에는 선사시대부터 역사가 담겨 있다. 이우환은, 인간이 만든 이념 혹은 사유보다 자연이 만든 돌이나 바람이 더 위대하다고 본 것이다. 요셉 보이스처럼 합리적 이성주의보다 관계적 상호작용을 중시하다. 서구의 고민하는 철학적 문제를 어느 정도 숨통을 터주다. 그가 서구에서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그는 파리와 일본에서 교수를 하면서 동서의 조율자 내지 중간자 역할도 나름 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1960년대 일본에 가서 새로운 화풍이 모노파의 헤드가 되었다. 나름 국제적 역할을 한 셈이다. 그의 회화는 결국 한국의 서예전통을 세계화 현대화했다고 볼 수 있다. 돌과 철판의 관계맺기 관계망은 자연과 문명의 대화를 통해 인류가 나아갈 길이 열린다고 예언한 셈이다. 서구의 근대주의는 실패한 것을 선언한 셈이다. 그는 결국 점과 선으로 돌아갔고 모든 사물의 원류인 돌로 석기시대 고인돌로 돌아갔다. 이우환 돌로 유리판을 깨다. 이것은 근대(작가가 작업에 100% 개입)를 부정하고 현대(작가가 작업에 1%도 개입하지 않는다)를 창조하는 걸 상징한다. 그런데 이 퍼포먼스는 곽인식의 영향이 컸다. 백남준은 멀리서도 곽인식을 많이 응원했다. 백남준 비엔나에 있을 때도 일본에서 열리는 곽인식 전시에 격려편지를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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