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형 TV를 백남준 30년간 태클 걸다(ATTACT)보니 쌍방형 INTERNET 되다 <작성 중>
SFMoMA는 테이트 모던과 조금 다르게 새롭게 유튜브로 단장하다 백남준은 미디어학자 맥루언을 말한 지구촌 시대, TV(1963)를 비디오 아트에 도입하고 일방형 소통매체 TV에 공격(attack)을 가해 쌍방형 소통매체인 INTERNET(1993)으로 바꿈으로써 인류가 하나의 지구촌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온몸으로 구체적으로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는 비주얼 시각 세계를 구현했다. 1993년에 선보인 미켈란젤로 천장 벽화를 뉴미디어 디지털 아트로 변형시킨 작품은 미켈란젤로 원본보다 더 독보적인 작품으로 길이길이 높게 평가받을 것이다.
[뉴욕 타임스] 백남준 '바이 바이 키플링' 1986년 작품에 대한 오마주 기사. 백남준 "스타워즈 만드는 100만 분 1 비용으로도 우리는 위성 아트를 통해서 동과 서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 수 있다"라고 말한다.
[01] 전시란 엇인가? 사건이 일어나는 것(Something happens)" -백남준. 이번 목포 백남준 전시로 10가지 사건
01 백해영 갤러리와 백해영 관장이 이곳 고향에서 목포시민들로부터 좋은 호응(크레디트)를 얻다.
02 김순주 선생 목포 MBC '시민아카데미' 백남준 특강이 있었다.
03 오프닝 때 퍼포먼스하고, 마무리로 목포대 미술학과에서 백남준 특강(김형순기자)이 있었다.
04 목포 시립 예술 무용단(박수경 예술감독) 공연이 있었다.
05 목포 시립 교향악단 4중주 연주회(정헌 예술감독 및 지휘자) 연주가 있었다.
06 목포 근대건물 문화유산 연구가 신형배 선생 등 미술관계자 10여 명 알게 되다.
07 이은주 작가와 재독작가 이욱 등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08 목포 시장의 정보화마인드가 더욱 강해졌다. 목포 행정직원들에게도 문화예술 행정에 영감을 주었다.
09 마무리 단계에서 색동 아트상품 전시도 열려 전시를 더 풍요롭게 했다.
10 근대도시 문화유산 발자취와 이순신 장군 목포 유적지 <고하도> 등을 공부로 서울과 목포의 가까워졌다.
백남준 관련 새로운 정보지도
[01] 상당히 궁금했던 이 퍼포먼스의 연도와 배경을 이번 서울관 백남준 아카이브전에서 찾아내다 이 작품은 백남준이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교수로 있을 당시 1978년 그의 구상을 학교 측에서 듣고 동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제자들이 스스로 모델이 되어주었다. 가장 백남준이 하고 싶었던 작업인데 이전에는 모델료가 너무 비싸서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모델이 되었던 학생들은 지금 뉴욕에서 교수와 갤리리스트가 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Video Venus> 제작 모습(1978년) ⓒ Photo: Ivo Dekovic 이 작품에는 남녀와 사제의 위계를 철저히 파괴하는 백남준의 사상이 드러나느데 그는 예술가를 마치 시대의 경계와 편견을 깨고 시대의 악습에 불지르는 방화범으로 봤다는 점을 반영한다
[02] 지금 생각해보면 동대문 창신동 백남준 큰 대문집 굿은 동네 잡귀신들 다 모셔다 놓고 배불리 대접하고는 귀신달래기 페스티벌이었던 것이다 -이경희
[03] 집단지성 1) '위키피디아(사전)' 2) '유튜브(영상)' 3) 인터넷(뉴스와 정보)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정보와 지식의 공유사회를 구현하다.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한 지구촌 글로벌 시대 코뮌 공동체를 구현하다.
[04] 중심과 주체를 거부하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백남준도 비슷하게 생각하다.
[05] 하버드대 역사학자, 교과서가 백인 우월주의를 가르치는 방법: 백남준이 약소국에 대한 미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서 너무 실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역사서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지배자의 자기정당성을 미화시키는 것일 뿐. 미국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625 그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은 한국이 미국보다 더 잘 나가는데 잘 모른다. 그래서 백남준은 중국의 그 유명한 역사서 <사기>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역사에서 인디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야만국 수준이다. 미국의 양심적인 사학자 하워드 진 책에만 인디언에 대한 보다 객관적 기술이 있을 뿐이다 https://news.harvard.edu/gazette/story/2020/09/harvard-historian-examines-how-textbooks-taught-white-supremacy/?fbclid=IwAR3MldRWOaH8gbT3bRV3qpHo_ScdMNdOMNxaq6Fdyqjf4CgkV9l0102bC_8
[06] 미술관이란? 사회적 사건을 기억하는 장소, 동시에 역사를 재구성하는 장소. 역대의 탁월한 문화예술이 수집되고 보존되고 기록되고 연구되며 고유의 전통과 규율에 입각한 가치평가기준및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미술관의 기관적 성격을 대표한다. 동시에 권위적 위상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과 권위의 공공문화 예술기관인 미술관의 사회적 입지 및 전문기관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미부여는 세계 어디서나 동일하다 - 김은지 백남준 생각 비슷
[07] "콜라주가 유화를 대체하듯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1970)" - 백남준. [추신] <무당이자 부처인 백남준> 백남준은 요셉보이스에게서 거꾸로 샤머니즘을 배워 무당이 되었고, 존 케이지에게서 거꾸로 선(禪)을 배워 부처가 되었고 그것을 예술을 통해 형상화하고 세계화했다. 정말 그랬나?
[08] <백남준 어원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백남준, 이어령 선생 회갑 때 보낸 메시지 중 하나 어원에 대한 정보를 상호교류하고 있군요. 이미지: 문구: '한국의 말(言) 말(馬) ト루(中心) マル(中心) 마을(village) ムラ(village) 마음(心) In Korean, mal (word) mal (horse) maru (center) maru (center) maeul (village) mura (village) maeum (heart) 백남준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에게 보낸 회갑 축하 메세지 중에서, 1993 From Paik's message in celebration of the sixtieth birthday of Lee Oyoung, the former Minister Culture, 1993'
[09] 액자 백남준 전시 포스터(2019 테이트 모던), 거실에 다시 걸어보다. 테이트모던 포스터 역시 수준이 있다. 이 포스터 하나만 가지고도 백남준 예술세계 골자가 되는 10가지 키포인트를 추려낼 수가 있다. 포스터는 정말 예술의 예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백남준 포스터 역시 심플함의 극치로 최고의 포스터였고 샌프란시스코 포스터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10] <과거는 말의 속도(몽골제국)가 세계를 지배하다 중간에 배의 속도(영국제국)가 세계를 지배했다 지금은 인터넷 속도(한국 등 탈영토제국)가 세계를 지배한다>백남준의 예화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만금의 말>이 있다. BC 700전 중국황제는 부하에게 100만 금을 주면서 하루에 1500킬로미터 달리는 말을 구해오라고 했다는 전설적 이야기 물론 부하는 그것 구하지 못한다 [평] 지금은 인터넷 속도가 세계를 지배하지만 당시에는 말의 속도가 세계를 지배했다는 상징적 의미다 몽골이 한 때 세계를 지배한 것은 바로 말의 속도때문이었다.
[11] "미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준다. 그것을 우리는 미술의 힘과 에너지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미술을 잘못 안 것이다. 미술이 바로 세계 문명을 이끌고, 인간의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다. 새로운 미술 사조와 양식이 태어날 때마다 세계 경제에 큰 ‘변화와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미술이 세계 혁신과 시대 정신과 새로운 세계관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이주헌. 백남준과 생각이 비슷하다.
[12] 넘어진 피아노 밑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가 보인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둘의 우정은 국경을 넘어 너무나 아름답다. 백남준은 한국의 무당 요셉 보이스는 독일의 무당 두 거한 무당이 만났으니 꿍짝이 잘 맞을 수밖에 없다. 백남준의 보이스를 잊지못해 그의 추모굿을 서울갤러리 현대 뒷마당에 벌렸다 하늘의 가위은 뭔가 한국전통무당은 칼 거울 방울이 나오는데 요셉 보이스의 굿에는 항상 지방과 펠트 천이 나온다. 그 이유는그것이 생명을 살리기 추위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진저작권 최재영
[13] 백남준은 1997년 괴테상에 이어, 또 다음해 11월에는 일본의 노벨상이라 하는 '교토상The Kyoto Prize'(상금 약 5억 원)을 받았다. 백남준은 답례로 <위너와 맥루한: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라는 수상 연설을 했다. 또한 수상 인터뷰에서 "표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며 예술은 인간의 배설행위로 사회의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라면서 표현의 자유가 인간행복의 핵심임을 밝힌다. [추신] 마침 일본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1998년 교토상(철학 예술부문에서 메달과 증서, 부상 기금 5억원)을 받게 되어 사실은 별로 받고 싶지 않았지만 백남준 2000년 뉴욕 구겐하임 전시회를 앞두고 미술관에서 요구하는 제작비 등 재정적으로 너무 궁색해 마지못해 시상식에 참가했고 1996년 뇌줄중으로 몸이 불편한 그는 부인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시상식장에 갈 수밖에 없었겠죠. 백남준은 싸구려 파란 점퍼를 입고 천왕에게 손짓으로 인사를 했고 일본어를 잘 하면서도 영어로 시상식에서 답사를 했다. 연설도중 바짓단을 돌돌 올린 것(??)을 부인 시게코가 보고 기성세대에 대한 그의 마지막 야유를 읽을 수 있었다고 부인을 말했단다. - 김영순 전 예술의 전당 전시감독의 증언 사진 이경희여사 기자로 참석
[14] '추'라고 쓰고, '미'라고 읽는다. '추'는 '미'의 부정이 아니고 미의 '다른 얼굴'이다. -움베르토 에코. 이런 미학의 원조는 '보들레르'다.
[15] [21세기 공부는 정말 남 주려고 하는 것이다] 열심히 배워서 유튜브와 위키페디아에 최신 지식과 최고급 정보를 공유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정보와 지식으로 예술과 문화로 코뮤니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앞이 꽉 막힌 인류의 미래에 희망의 숨구멍을 터주는 것이고 인류가 구원받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 같은 실험인지 모른다.
[16]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편집은 랜덤 액세스 방식 역순의 편집으로 되어 있어 흥미롭다.
[17] "우리는 오랫동안 유목민이었으며 앞으로는 다빈치의 그림을 줘도 가지고 다닐 수 없다. 무게가 없는 예술(춤과 노래)만이 전승되고 발전할 것이다 " -백남준
[18] "우리의 몸을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우리의 생각을 (빠르게 쉽게 싸게) 옮기는 시대가 되었다" -백남준
[19] 생산자가 자기만의 정보와 지식을 가진 사람의 모여서 형성된 집단지성이 자유롭게 올리는 '유튜브 온라인 동영상'이나 다양한 콘텐츠와 높은 식견을 가지고 나름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집단지성이 온라인으로 만든 백과사전 '위키페디아' 역시 백남준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20] <무선통신은 곧 선의 정신이다> 백남준이 미디어에 대해서 다른 누구보다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샤머니즘과 선불교 등 동양적 사유에 대한 탁월한 이해 때문이다 -조정환. 백남준 17세에 맑스와 쇤베르크의 결합을 시도했듯 서구 제국주의와 몽골제국주의 결합을 꿈꾸다. 서구제국주의는 전자기술 등을 신기술을 말하며, 칭기즈칸은 빠른 속도의 원거리 이동서비스에 탁월한 장치인 '역참제'라든가, 국경 없는 사회 등을 의미한다. 동시에 백남준은 '기술에 대항하는 기술'을 언급을 하면서 인간의 기술화가 아니라 '기술의 인간화'를 강조하다. 백남준은 "탈근대의 핵심적 생산수단인 모든 정보재산에 대한 고유와 자유로운 접근 그것에 기초안 다중 코뮤니즘의 상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비디오 공동시장' 발설하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유사하다. 핸하르트는 백남준이 '스티브 잡스'에게 영감을 줄 만큼 시대를 앞선 천재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이폰으로 음악 영화 다운 받는 아이디어는 이미 오래전에 백남준이 상상한 것이다. 생산자가 자신의 동영상을 자유롭게 올리고 공유하는 '유튜브 온라인 집단지성'과 '위키페디아' 역시 백남준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21] <울림에 대하여> 장자는 우리가 일종의 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타자와 마주쳐서 그에 걸맞는 소리를 내야 한다. 피리가 소리가 나는 것은 비어 있는 구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소리를 낼 수 없다. 타자를 만나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진정한 소리는 타자와 마주치면서 발생한다. 거기서 울림이 오는 것이다. 타자가 없는 혼자만의 소리는 소음일 뿐이다. 내가 비워질 때만 나와 마주치는 타자에 걸맞은 소리를 내는 피리가 될 수 있다. -강신주. 여기에 나오는 일부 내용은 사르트르의 대타존재가 같은 논리다.
[22] 자칭 정보 아티스트(Information Artist)라고 한 백남준이 세계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미국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이 독점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백남준이 원한 것이다. 그래야 인류가 전쟁 없이 더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970년 백남준의 이 작업은 티뷰 코뮌(TV COMMUNE)에서 본격 시작된다. 백남준이 6개국어를 하고 전 세계 유명 신문을 읽은 이유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미국 정보부의 블랙리스트 1번이었다(아직 물증은 없다) 개인이 미국정보부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졌기에
[23] 아메리카 인디언, BC 2만 5천과 1만년 사이 시베리아 몽골계 아시아인이 베링해협 그 당시 '빙하기'라 해수면 낮아 육지로 걸어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알래스카, 록키 산맥으로 그리고 중남미 남단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다. 이들 인구는 대충 북미와 중남미 합쳐서 1억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 앞으로 우리가 미국도 해링해협 지하철도 공사중 완성되면 기차 타고 갈 수 있다.
[24] 아메리카 인디언 수우족 '기도문' 아래 백남준 '인디언'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 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취 둔 교훈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나의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25] [1] 레오나르도만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르누아르처럼 다채롭게,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폴락처런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 백남준의 시. 전자아트는 이런 걸 다 담을 수 있다. [2] 맑스에서 슈펭글러까지 톨스토이에서 토크빌까지 그 어떤 예언가도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인 주차문제를 예견하지 못했다 - 백남준 1968[3] 언어의 경직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21세기의 살 길이다. - 백남준. 그는 1973년 영상시대(유튜브 전성시대)를 예언하다.
[1] 백남준은 일거수일투족이 예술이었다. 누가 사진을 들이대면 그를 배려해 최대로 멋진 포즈를 취해줄 줄 아는 대가적 너그러움과 여유가 항상 몸에서 풍긴다
[02] <백남준이 생각하는 비엔날레 성공을 위한 3가지 조건> 광주 최적지.
"비엔날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3개의 조건이 있어. 1) 미술시장과 2) 창조적 예술가들이 있어야 하고 3) 개최도시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가 있어야 해. 서울이나 도쿄(東京)이나 베이징(北京) 등 동양권에서 이런 3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도시는 없어. 동양에서는 어디서 해도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지.
그러나 광주의 경우는 그래도 국내융화(融化)라는 부산물이 있어. 1천만달러 정도 써서 국내용 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해도 되겠다는 생각에서 조건부로 참여했지" 그가 밝히는 조건이란 총경비의 7%를 특별전시비용으로 내놓으란 것. 그렇게하면 세계미술사에 광주비엔날레의 이름을 한 줄 남길만한 행사를 치를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호암상 예술상 수상 백남준
[03] 『내 나이는 먹었어도 비디오 예술은 아직 유년기야. 10년은 할 일이 남아있어』 비디오아트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있는 백남준(白南準.63) 시간과 세계에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도, 흥미진진한 일도 무궁무진해 보인다.
세계미술사에 족보가 없는 비디오아트의 길을 걸으면서 세계적 미술상(93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아 그 업적과 실력을 인정받았던 백씨가 이번에는 국내의 권위있는 호암상(湖巖賞)예술상을 수상했다.
21일 호텔신라에서 헐렁한 모직 와이셔츠에 빗지 않은 머리 그대로 나온 백씨는 『호암상은 나같이 아티스트 플러스 영세사업가 같은 사람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상』이라며 수상소감을 말했다.
국내외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돈도 꽤 많이 모았을 것 같지만 그는 자신이「전형적인 예술가」는 아니라며 여전히 비디오 아트 일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한국미술계에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그의 비용지출 항목을 하나 더 늘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뉴욕에 한국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열었던 복합문화제 나이맥스 전시,그리고 지난93년 자신이 25만달러(개인 돈 당시 3억을 기부하다 지금으로 치면 10억은 될 것이다)를 내놓아 미국 휘트니비엔날레 한국유치에 공헌한 일도 그중 일부다. 당시까지 미국밖을 한번도 나간 일이 없는 휘트니비엔날레의 한국유치는 뉴욕미술계에서도 화제를 모았던 일대 사건으로 백씨의 국제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네번씩 보러 온 사람도 있었다더군. 요즘같이 바쁜 시절에 네번을 찾아왔다면 무엇을 챙겼어도 챙겼을 것 아냐.』 시작할 때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 다음부터의 일은 예술가 자신, 보는사람 자신의 몫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서 오랫동안 서구사회에서 살면서 몸에 밴 개인주의.합리주의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이 늘어야 하지만 많다고 해서 꼭 결과가 좋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지난 84년 뉴욕.파리.베를린.서울에 생중계 된 우주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국내에 크게 소개된 백남준씨는 그후 국내에서의 활동폭을 넓혀 최근엔 미술계의 몇몇 굵직한 사안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오는 9월 열리는 광주 비엔날레도 그중 하나.백씨는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행사 하나를 맡아 진행 중에 있다.
『비엔날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3개의 조건이 있어.미술시장과창조적 예술가들이 있어야하고 개최도시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가 있어야 해. 서울이나 도쿄(東京).베이징(北京)등 동양권에서 이런 3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도시는 없어.
동양에서는 어디서 해도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지. 광주의 경우는그래도 국내융화(融化)라는 부산물이 있어. 1천만달러 정도 써서 국내용 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해도 되겠다는 생각에서 조건부로 참여했지.』 그가 밝히는 조건이란 총경비의 7%를 특별전시비용으로 내놓으란 것. 그렇게하면 세계미술사에 광주비엔날레의 이름을 한줄 남길만한 행사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액티브 인 아트 앤드 툴메이킹』(Interactive in Arts and Toolmaking)이라고 이름 붙인 그의 구상은 비디오아트의 차세대주자가 될 쌍방향대화형 비디오아트를 세계 최초로 전시하는 것. 예를 들면 TV브라운관 앞에서 관객이 자석을 쥐고 스스로 음극선의 변화를 그려 보이는 자신의 초기단계 쌍방향 대화형 비디오아트에서부터 이미 이 방면에서는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 이를테면 컴퓨터 앞에 선 관객이 부는 입김에 따라 화면 속의 꽃잎이 흩날리는 프랑스작품 등 최첨단 비디오작업을 한자리에 모아 놓을 계획이다.
타인의 시선은 철저하게 무시하지만 세속적 관심이나 유행의 흐름은 누구보다 정확하게 예측하면서 자신의 일을 펼쳐온 백남준씨는 세계미술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작가다. 몇 년 전부터 준비에 착수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부근의 비디오아트 미술관 신축계획도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그의 노력의 하나다.
『비디오아트는 말하자면 2년마다 새로운 종류의 물감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분야지.나는 한 10년 더 일할게 남아있어.이 미술관은 내가 죽든 살든 2007년이면 개관할 거야.』 현대미술을 이끌어 가는 유명한 작가지만 백남준은 생활인으로서는영점에 가깝다. 뉴욕 소호거리의 스튜디오에서 밤늦게까지 작업하다 잠들어 오전 10,11시나 돼야 일어난다는 그는 기상 후에 신문보는 데 두어시간씩 보내는 게 보통이다. [출처 중앙일보] 호암상 예술상 수상 백남준
[04] 백남준 1996년 '호암상'을 주면서 사실은 삼성미술관에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을 열려고 했었는데, 그 해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삼성 측은 포기해야 했고 또 2000년 뉴욕 구겐하임 전시가 예정되어 있어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백남준은 나중에 이를 고려해서 뉴욕 구게하임 전시 순화전으로 서울 삼성미술관(로댕미술관)에서 다시 열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전시의 총책을 맡은 것은 안소연 디렉터. 백남준은 지나친 과로(안색이 안 좋다)로 호암상 받은 후 미국 뉴욕으로 돌아가자 마자 쓰러지다. <아래> 호암상 받을 때 사진
[05] 과거에는 육체와 정신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서구의 이원론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도 정신을 차리면서 육체와 정신이 서서히 가까워지다가 지금은 하나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몸 철학'이 대유행했다. 이 말은 육체와 정신이 하나라는 원효가 오래 전에 말한 몸과 마음의 하나로서의 '마음(일심론)'과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 여기서 마음을 마음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통합한 '넓은 의미의 마음'이다. 이것을 서양은 이제야 깨달았다. 이런 종류의 프랑스 철학자가 바로 '메를로 퐁티'다.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나의 몸이다(Je suis Mon Corps)"
[06] "예술가는 좀 게을러야 해. 그래야 이것저것 궁리할 시간이 많지" -백남준 1996
[07] <백남준이 생각하는 비엔날레 성공을 위한 3가지 조건> 광주 최적지.
"비엔날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3개의 조건이 있어. 1) 미술시장과 2) 창조적 예술가들이 있어야 하고 3) 개최도시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가 있어야 해. 서울이나 도쿄(東京)이나 베이징(北京) 등 동양권에서 이런 3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도시는 없어. 동양에서는 어디서 해도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지.
그러나 광주의 경우는 그래도 국내융화(融化)라는 부산물이 있어. 1천만달러 정도 써서 국내용 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해도 되겠다는 생각에서 조건부로 참여했지" 그가 밝히는 조건이란 총경비의 7%를 특별전시비용으로 내놓으란 것. 그렇게하면 세계미술사에 광주비엔날레의 이름을 한 줄 남길만한 행사를 치를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호암상 예술상 수상 백남준
[08] <한국 현대미술 15인전>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따로 열어
한국관 제1 전시실에는 전수천씨의 설치 작품이, 제2 전시실과 제3 전시실에는 김인겸씨의 설치 작품과 윤형근씨의 작품이 전시되며, 곽 훈씨의 설치 미술은 전시관 앞 야외 공간에 전시되었다.
한국관에서의 전시와는 별도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딸린 행사로 열리는 <호랑이의 꼬리 - 95 베니스 한국 현대미술 15인전>(6월8일~10월15일)도 한국 미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관 본 전시의 작가·작품이 `‘동질성과 이질성’이라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제 안에서 선정됐다면, 이 특별전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미술의 다양성과 발전 과정을 포괄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회이다. 곽덕준 윤명로 조덕현 임옥상 백남준 등 회화·설치·조각·비디오 부문에 참여해 `‘한국 미술 30년’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회화에서는 곽덕준, 윤명로, 이규선, 이종상, 임옥상, 정연희, 하종현 등 7명의 27점, 조각에서는 심문섭., 조성묵 등 4점, 설치에서는 김수자, 안성금, 윤석남, 이형우, 조덕현 등 5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최재은씨가 일본대표로, 백남준, 이우환, 김진수, 차우희, 홍명섭 작가는 아시아나 특별전에 출품되다>
1세기의 역사를 쌓아오는 동안 세계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했던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최초로 문을 열고, 한국 작가가 창작 부문 특별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세계 미술 속에서 한국 미술이 차지하는 위상이 한 단계 올라갔음을 의미한다. 한국 미술은 이제 세계 미술의 한 흐름을 담당하는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09] 호랑이보다 호랑이 꼬리가 더 무섭다. 1995년 베니스에서 열린 '호랑이 꼬리(The Tiger's Tail)'라는 특별전은 한국미술이 이제 세계 미술계에서 무서운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백남준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개관할 때 백남준의 세계적 미술계 인맥이 총동원되었다. 그분들이 움직이도록 보이지 않게 로비를 했다. 1993년에 백남준이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탔기 때문에 그의 말이 먹혔다. 또 한국관(세계 25번째, 동양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 독립관) 개관 기념 국립현대미술관이 특별전인 <호랑이의 꼬리(한국작가 15인 소개)>를 열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전시 제목도 백남준이 정한 것이다. 그때 국립미술관 측 담당 학예연구사는 안소연 씨. 그녀는 후에 삼성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0] [베니스에서 개최된<호랑이 꼬리전>포스터] 이런 의미에서 1995년은 최소한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하 는 일에 있어서는 그 원년이 아니었나 싶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실험적인 전시 기획으로 유명한 미토(水戶)아트 타워와 아이치(愛知)현립미술관에서 각각 "마음의 영역"과 "환류(環諦)"라는 제명의 한국현대미술전을 개최한 바 있고 영국 에딘버러의 프룻 마켓(Ruit Market)전시장을 통해서도 우리나라의 현 대미술가들이 소개된 바 있다. 또한 독일 슈투트가르트치 제6회 소형 조형물 트리엔날레와 터키의 이스탄불 트리엔날레, 그리고 프랑스의 제3회 리용 비엔 날레 등에 한국대표가 참가하여 한국미술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을 새롭게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문화올림픽을 방불케 하는 이들 국제 무대에서 한국작 가들이 구색맞추기의 들러리로서가 아니라 담론을 이끌어 내는 관심의 대상으 로 부각되었다는 점을 특기해야 할 것이다.
'95년도에 있었던 한국현대미술의 해외전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 로는 무엇보다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을 개관한 일일 것이다. 비엔날레 창립 10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에 한국은 카스텔로 공원의 부지 내에 26번 째이자 마지막으로 독립된 국가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는 향후의 전시 프 로그램이나 내실의 문제를 떠나 일단은 세계 미술무대에 한국을 독자적으로 선포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에 남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베니스 비엔날레와 때를 맞추어 베니스에서 한국현대미 술 특별전을 조직한 이유 는 한국관 개판을 기념한다는 자축의 의미도 있었 지만 무엇보다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술인구가 집결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한국현대미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세계 에 알린다는 목표가 전제되었다. [호랑이의 꼬리(Tiger's Tail)] 라 명명된 전시회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태리의 무디마(Mudima)현대미술재단이 주선하여 베니스 현지에서 전시장소를 물색하고 15인의 한국 현대미술가를 당당히 세계무대에 소개한 이 전시는 한 국미술의 세계화 대열 그 첫머리에 우뚝 서있는 백남준에게 여러모로 빚진 바 가 맡다. 혼자 힘으로 세계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무수한 어려움과 세계 화된 문화가 내포하는 엄청난 양의 부가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이기에 이번 전시회의 조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던 것이다.
<추신> 정보교류와 여행이 자유로운 이 시대에 우리는 남발되고 있는 "국제화"라는 용어에 대해 오히려 둔감해져가고 있지만 해외에 나가서 혹은 외국인과 마주했 을 때 그들이 알고 찌는 우리의 작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 다. 우리는 60-70년대의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동족상잔의 경험을 지닌 처참한 나라의 이미지를 일소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국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는 이들에겐 아직까지도 그저 졸부의 나라라는 인상만을 남겨두고 있으니 말 이다. 문제는 문화이다. 훌륭한 가문의 가정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는 사실을 공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문화를 가진 나라에 대한 인식은 그 나라의 유구한 역사, 민족성에 대한 이해와 존중까지도 내포한다. 이 세기를 문화전쟁의 시대라 일컬을 만큼 각국마다 해외에 자국의 문화심기에 열을 올리 는 이유도 문화야 말로 그 나라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때 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신라시대 이후 주변국에 영향을 미치며 전승되었던 맡은 문화유산들이 오늘날 크리스티(Christie's)나 소더비 (Sotheby's)등 세계 주요 경매시장의 관심을 고조시킬 만큼 "국제화"되어 있 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우리 정부나 국민들이 여기에만 만족한다면 그것은 선대의 유산에만 의존하는 삶이 아닐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오늘의 어법에 맞는 문학 경쟁무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선행조건으로 한다.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 온 "호랑이의 꼬리"라는 전시제목은 한국인 또는 그 문화의 정체성을 가장 함축 적으로 그리고 해학과 겸양의 미덕을 고스란히 담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11] [호랑이의 꼬리전]의 기획의도는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적인 흐름을 재현하면 서도 현재 진행형의 다양성을 포괄한다는데 있었다. 6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 국현대미술은 서구 모더니즘을 우리 토양에 맞게 체화시켜 소위 한국적 미니멀 리즘이라 일컬을 수 있는 단색조회화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 로서의 민족주의적 전통과 사회 속의 현실미술의 대두를 보게 되었으며 근래에 와서는 산업사회화와 상업자본주의화를 겪으면서 파생된 문명을 비판하고 그 본질을 제고하려는 움직임의 시각적 표출로 변천하였다. 하종현. 이종상, 윤명루 백남준. 조성묵, 심문섭, 이규선, 정연회, 이형우. 곽덕준, 임옥상, 윤석남 조덕현. 김수자. 안성금 등의 작가들이 이 흐름을 단면적으로나마 대표하여 보여주었다. 본래 백남준을 포함하여 총 15명의 작가를 선보인 [호랑이의 꼬리 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귀국전을 가지면서는 유감스럽게도 14명의 작가 작품만을 소개할 수 밖에 얼었다. 베니스 현지에서 제작한 백남준의 「행복한 호피 인디언」과 초대형 비디오 선박 「콘티키」가 운송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작 가의 활동무대인 미국으로 곧장 철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니스의 18 세기식 건물인 팔라쪼 벤드라민(palazzo Vendramin ai Carmini)에 설치되 었던 전시를 대한민국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이라는 전혀 다른 환경에 전위시 킴으로써 본래의 전시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세 계인들에게 오늘의 우리미술을 알리는데 일조한 전시회를 우리에게 친숙한 공 간에서 재해석하여 우리 국민과 함께 감상하고 음미하는 기회를 갖는다. 의의를 두었다.
[12] 세계에 흩어진 백남준 작품 수리하는 전문 전자 엔지니어 5명 백남준 10주기를 맞이하여 서울에 다 모이다. 일본의 아베는 연로하여 빠지다. 맨 왼쪽 분은 제외 그는 백남준으로 베를린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일본학자. 뒤로 백남준 1997년 뮌스터에 출품한 작품의 일부. 여기는 삼성 자동차 박물관인가
[13] 갤러리나 미술관 현장에서 큐레이팅에 도움이 되는 신간이 나왔군요!! 책의 수록을 위해 내용을 수정 보완했다. 집필에는 일곱 명의 큐레이터 김선정, 김성원, 김홍희, 백지숙, 안소연, 이영준, 이영철과 연구자 김해주, 문혜진, 박가희, 윤지원, 이지원, 전효경이 참여했다. https://newsis.com/view/?id=NISX20210318_0001375731&fbclid=IwAR2KDeON5LmbWTwhPJ3IOWJOdBgPEM4Bvhwgnvynyp2nic_8s0iZzsA7yBw
[14] 시대정신을 꿰뚫어야 봐야 하는 철학자로 사상가로 에세이스트로 번역가로 세계 미술사의 전문적 안목을 갖춰야 하는 큐레이터는 정말 그 나라에게 가장 유능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인 것 같다. 1) 돈문제 기금을 마련하고 2) 사람 모우기: 세계적인 문화예술인 팝문화예능인 방송언론인 참여시키기 3) 다양한 인맥 네트워킹 만들기 4) 목표를 향해 돌진하되 무엇을 찾아야 하며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 센스있게 캐치하여 그 방향성을 만들어가기 등등 정말 할말이 많다. 외국어를 포함해 소통능력 사람들 참여시키는 능력 게다가 대인관계의 원활함과 친화력과 고도 기획력 전시공간의 탐구와 전시방식의 혁신 그리고 자금력까지 정말 넘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21세기는 큐레이터와 영화감독이 국가문화창조의 기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가 하긴 한국여성들 여건만 되면 못할 일이 없다. 큐레이터는 영화감독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비바 Curator! Curare!
[15] 김홍희 선생은 큐레이팅을 백남준 선생에게 직접 사사한 셈이니 운이 좋은 편이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정보아트>전에서 아트와 테크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큐레이터 신디아 굿맨과 함께 한국쪽 큐레이터를 맡았으니 그것도 대단한 일이다. 이 전시는 사실 현대미술의 불모지인 호남에서 처음 열렸다는 것은 정말 이곳 입장에서는 큰 행운을 맞은 것이다. 이런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첨단의 최고전시로 전세계 유명 뉴미디어 작가들 총집합시키다. 호남은 영남보다 산업화에서 많이 뒤졌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정보화 시대에는 더 발전할 가능성의 여지가 많아졌다. 아주 드물기는 해도 이이남 작가가 이곳 정보아트의 불모지에서 디지털아트를 개척했으니 놀라운 일이다. 당시 김홍희 선생의 경험담을 아래 짧은 글에서 엿볼 수 있다.
[16] 북미 '인디언(영어)'과 남미 '인디오(스페인어)'는 '몽골(스키타이)' 계다. 우리의 같은 몽골리언 혈통이다. 동북아시아 살던 이들은 언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갔나? 구석기 시대 베링 해협으로 빙하기가 끝나고 해빙기가 시작될 때 걸어서(혹은 배를 타고) 디아스포라처럼 아메리카로 '이주'한 것이다! 백남준이 규정한 한민족 계보학을 보면 페루까지 기원하는 이유일 것이다.
[17] 현대의 인간이 너무나 타락하니까 현재의 무당도 (시대의 흐름 속에서) 타락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당만큼 위대한 존재도 드물다.
[18] 시인(?)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예민하게 보는 자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예민하게 듣는 자
남이 말 못하는 것을 예민하게 말하는 자
남이 맡지 못하는 냄새(향)를 예민하게 맡는 자
남이 읽지 못하는 시대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자
[19] [인류구원은 네오-샤머니즘에 있다] 아래는 복음서에 나오는 '주 기도문'보다 더 훌륭한 '기도문' 아닌가 <인디언들 다 평화의 神이었고 시인이었다>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 볼 수 있게 하소서!" 헤겔의 서구우월주의 <미네르바의 올빼미>보다 얼마나 더 훌륭한가! "당신이 만든 물건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이들은 다 시인들이었다. 남의 목소리에 예민한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 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취 둔 교훈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나의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20] '샤머니즘'이 중요한 건 그 바탕에 '평화'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21] 중남미에서는 콜롬비아 동상을 무너뜨리더니, 이번에는 캐나다에서 빅토리아 여왕 동상을 무너뜨리다. 과거 식민주의 시대 유물들이 중남미와 북미에서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고 있군요. Statues of Queen Victoria, Queen Elizabeth II toppled in Canada Many cities scrapped Canada Day events as scandal over Indigenous children made them confront their colonial history
[22] 전 MIT교수였던 철학자 홍가이, 백남준 홍가이 70년대(?) 뉴욕에 같이 있을 때도 두 사람은 격렬한 토론이 있었고 홍가이 교수(1948-)가 항상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 백남준은 이에 개의 치 않았다. 그는 이번 세미나에서도 백남준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계속 공격하고 줄기차게 비판했다. 과거에도 홍가이 교수는 1984년 백남준이 한 말 "예술은 사기다"에 대해 예술철학과 언어철학의 입장에서 비판해왔다 그러나 내 생각에 백남준 언어는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다. 그래서 비언어이다. 그런 언어는 독자들이 상상력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주기 때문에 그래서 소통의 여백을 생성하는 수사학이 된다. 자신의 말만 독재자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거기에 들어와 자신의 말을 덧붙이고 펼치면서 신나게 놀 수 있게 하는 언어이다.
[23] 정치적 민주화 경제-사회적 민주화를 이루어져도 문화적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세계사에서 사라진다. 르네상스가 문화적 민주화가 꽃 피웠기 때문에 서양사의 핵심적 요소가 된 것이다.
[33] [Esprits de Shaman] '무당(巫堂)', 곧 '샤먼(shaman)': 'Super Ultra Power'를 가진 초자연적 존재. '신과 직접 교류(신접)'하고, '소통 혹은 신통(Divine Communication)'에 능하다. 특히 가무에 천재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 그들은 신령이나 정령들 통해 '예언'하는 능력을 보이다. '복점'도 보고, '치병의 기적'도 행하고, '제의'를 주관하는 성직자였다. 특히 신이 사람에게 내리거나 꿈속에 나타나서 그 뜻을 알리는 계시하는 '탁선(託宣: 혹은 신탁)'에 능하다.
[34] [동학의 표어들] 보국안민(輔國安民)-제폭구민(탐관오리 학정으로 고통 받는 백성 구원)-광제창생(고통 속 민중, 넓게 구제)-척왜양창
[35] '피카소-앤디워홀-뒤샹'이 백남준과 비교가 안 되는 건 전혀 다른 사회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피카소-워홀-뒤샹'은 레디메이드문명 산업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이고 백남준은 IT문명 정보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이다.
[36] <보들레르는 심미적 실존주의의 창시자다> '보들레르'가 태어나고 23년 후에 '니체'가 태어나다. 보들레르는 태어나고 84년 후에 '사르트르'가 태어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는 사르트르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사르트르는 겨우 '장 주네(Jean Genet, 1970년부터 팔레스타인 주권 운동에 참여하다. 장 주네와 자코메티는 절친이었다)'를 발견하고 그를 높이 찬양했는데(사르트르는 1952년 '聖 주네, 배우와 순교자'라는 책을 쓰다) 사실을 84년 전에 보들레르가 바로 장 주네였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보들레르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보들레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37] “내가 나 자신을 이 세상과 그 종교로부터 이방인처럼 느끼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싶다.”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이방인이라는 시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당신은 황금을 좋아해? - 당신이 신을 증오하듯 나는 황금을 증오해" 두 문장은 같은 메시지다. 니체의 <신의 죽음>을 보들레르는 미리 선언한 셈이다.
[38] 맑스(1820년 생)+프로이트(1856년생)+니체(1844년생)가 다 합쳐진 사람이 바로 보들레르(1821년 생)다. 내가 그를 전공한 이유다. 보들레르는 니체의 도덕적 계보학을 통해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서양의 너무나도 어리석은 이분법 이를 해체시키려는 시도와 신의 죽음 선포(신이 없는 유토피아 유럽사회)를 이미 먼저 보고(견자[見者] 혹은 선견자 voyant) 있었다. 그래서 <악의 미학>을 발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들레르는 '발터 벤야민'과 '백남준'의 스승이기도 하다. 보들레르는 '다원융합예술'과 '공감각 미학'의 선구자. 하지만 사실 나는 보들레르 시 한편 외우지 못한다.사르트르는 맑스로 시작해 실존적 맑스로 갔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맑스로 시작했으나 맑스의 계급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다. 문화에는 우월 없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푸코
[39] 니체의 '초인'철학, 쉽게 말하면 노예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40] 화가는 늘 유동의 세계(Un monde en mouvement) 그려야 한다.
[41] 니체의 <도덕학적 계보학>에서 지금 선 혹은 악이 과거에도 선 혹은 악이었나? 묻다
[42] 예술가는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총체적으로(동시다발적으로 Integral) 보는 사람이다. 깊이는 넓이에 의해 결정된다.
[43] "우리 사이 좋게 살아요" 야만과 문명의 구분, 그런 거 없어. 그건 허상이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결론
<철학과 역사학이 답을 못하는 것에 인류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철학자 '사르트르'의 한계점을 극복한 사람이 바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다. 현대미술에서 인류학이 중요한 이유다. 백남준의 예술이 인류학을 근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가 아닌가.프랑스 세계 유일하게 고등학교에서 철학이 필수과목. 그래서 프랑스 철학교사는 대부분 철학박사를 가지고 있다. 일반교사가 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인가. 사르트르도 고등학교에서 10년 정도 철학교사를 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프랑스 세계지적 제국의 황제가 되려는 허영심에서 나온 것인가. 그런데 유럽은 3대 철학 전성 시대가 있었다. 1) 그리스 고전주의 철학 전성 시대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2) 독일 관념주의 철학 전성 시대 칸트와 니체 3) 프랑스 실존주의(페미니즘) 후 구조주의 철학 전성 시대 사르트르 보부아르 레비-스트로스 등등 결론 20세기는 프랑스 철학을 생산해 전 세계에 수출을 하다. 21세기는 우리가 가무의 철학을 생산해 전 세계에 수출할 때가 온 것 같다. 구조주의자 '레비-스트로스'는 그랑제콜(수재학교) 출신이 아니다. '사르트르'나 '푸코'는 그랑제콜 출신이다. 여기서 '레비-스트로스'는 그랑제콜만 천재라는 것을 부정한다. 표준화의 일반화를 반대한다. 여기서 구조주의가 나온다. 현대 철학의 군림자였던 사르트르는 사상적으로 레비-스트로스에게 완전히 깨지다. 구조주의자는 운전을 할 때 <중립기아>를 놓은 사람이다.구조주의자들, 현재를 이야기하면서 前史(맑스, 프로이트, 니체)를 중시한다
[44] [1] 레오나르도만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르누아르처럼 다채롭게,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폴락처런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 백남준의 시 [2] 맑스에서 슈펭글러까지 톨스토이에서 토크빌까지 그 어떤 예언가도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인 주차문제를 예견하지 못했다 - 백남준 1968 [3] 언어의 경직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21세기의 살 길이다. - 백남준. 그는 영상시대(유튜브 전성시대)를 예언하다.
[45] 힌두 악기가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보다 더 훌륭해 보인다. Ravi Shankar의 시타르 및 오케스트라 협주곡 2 번 "Raga-Mala"는 인도 라가의 음악적 색상과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결합하여 전통의 융합을 시도하다 사실 이런 연주를 보면 20세기 프랑스의 대석학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적 관점이 정확하게 맞는 것 같다.
https://www.facebook.com/BerlinPhil/videos/339753607883059
제2부<진중권이 본 백남준 미디어 아트론 요약>
01. 비디아와 비디올로지(vediology)는 백남준의 예술적 신앙고백. 비디아(videa)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에서 유래하다.
02. 비디올로지(vediology)는 도상학(iconology)의 전복이라고 할 수 있다.
03. 구텐베르크 종이시대의 종언을 선언하다. 이제 더 이상 역사는 없으며 영상물과 비디오물이 있을 뿐이다.
04. 백남준은 낮은 해상도와 노이즈로 승부를 걸다.
05. TV는 모든 기술적 오작동을 통해 TV아트가 되었다(인터넷 되다)
06.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언의 명제를 실천하다.
07. 랜덤 액세스*(비정형-비연속-비결정주의 개척)-1963 선형성의 파괴, 소음의 도입, 관객의 참여 3요소를 담고 있다.
08. 올드미디어의 아방가르드는 뉴미디어의 개척자이다.
09. 보들레르, 소리 색채 음향(공감각) 미학을 백남준, 미디어아트에 담다
10. 백남준은 일단 알수 없는 길을 가는 가운데 작품이 완성된다. 창조적 우연성 "도(道 Tao)는 회로이다"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
여기에 백남준과 절친, 대표적 히피, 비트 제네레이션 시인 알렌 긴스버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너무 많은 것들'이라는 시. 밥딜런과도 친했다.
너무 많은 공장들/너무 많은 음식/너무 많은 맥주/너무 많은 담배
너무 많은 철학/너무 많은 주장/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공간/너무나 부족한 나무
너무 많은 경찰/너무 많은 컴퓨터/너무 많은 가전제품/너무 많은 돼지고기
회색 슬레이트 지붕들 아래
너무 많은 커피/너무 많은 담배연기/너무 많은 종교/너무 많은 욕심
너무 많은 양복/너무 많은 서류/너무 많은 잡지
지하철에 탄 너무 많은/피곤한 얼굴들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사과나무
너무나 부족한 잣나무/너무 많은 살인/너무 많은 학생 폭력
너무 많은 돈/너무 많은 가난
너무 많은 금속물질/너무 많은 비만/너무 많은 헛소리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침묵
뉴욕 미술관에서 백남준 작품이 고장 나면 고치는 전자기술자 '친티엔류' 사장 지금 샌프란시스코 백남준 회고전에 가셨군요. 뉴욕 전자상가 거리인 캐널 거리(Canal Street)에서 이분을 만나 매우 반가웠다. 백남준을 보는 것 같았다. 백남준 조수 7년 한 미국 작가 라파엘레(동시에 백남준 작품 고치는 전자기술자)가 나를 그와 만나게 해주었다.
백남준은 <근대성>이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는 프랑스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저서: 우리는 한번도 근대인 적이 없다)와 유사하다. 또한 M. 푸코와도 통한다. 병원, 학교, 감옥이 근대성의 산물이라는데 이것 또한 허상이란다. 푸코는 오히려 감시와 처벌 사회를 더욱 강화시킨 것 뿐이라고 본다. 백남준은 근대성(인상파 등 19세기 미술)이라는 쇠창살을 첫 전시부터 여지 없이 부숴버렸다. 그의 관점과 사유는 장르와 시공과 계층을 늘 초월하고 있었다. 백남준의 첫 전시가 열린 1963년이 '마네'가 <풀밭위에서 점심식사> 그린지 100주년(1863년 )이기도 해 더 그런 인상을 준다.
백남준은 서구예술에 대한 숭배를 전복시키고 우리의 시선을 주체화했다. -원용진 [평] 백남준은 1963년 첫 전시에서 서구의 미술판을 쓸어버리려고 했던 것은 사실 미술을 보는 시선에서 우리가 너무 서구로 기울어져 있기에 그 균형감을 찾으려 한 것 같다. 이제는 서양 반 동양 반의 시대로 가고 있다.
독일에서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가 같이 나타나면 그곳이 바로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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