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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랩소디II] 'TV', 30년 태클 후, 'INTERNET'

[뉴욕 타임스] 백남준 '바이 바이 키플링' 1986년 작품에 대한 오마주 기사. 백남준 "스타워즈 만드는 100만 분 1 비용으로도 우리는 위성 아트를 통해서 동과 서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 수 있다"라고 말한다. <작성 시작 중>

백남준 런던 테이트 모던 회고전 포스터

SFMoMA는 테이트 모던과 조금 다르게 새롭게 유튜브로 단장하다 백남준은 미디어학자 맥루언을 말한 지구촌 시대, TV(1963)를 비디오 아트에 도입하고 일방형 소통매체 TV에 공격(attack)을 가해 쌍방형 소통매체인 INTERNET(1993)으로 바꿈으로써 인류가 하나의 지구촌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온몸으로 구체적으로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는 비주얼 시각 세계를 구현했다. 1993년에 선보인 미켈란젤로 천장 벽화를 뉴미디어 디지털 아트로 변형시킨 작품은 미켈란젤로 원본보다 더 독보적인 작품으로 길이길이 높게 평가받을 것이다.

백남준의 'TV 촛불'

[1]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전자촛불) 발명은 선사시대 혹은 고대사에서 불을 발명과 같은 것이다. TV 촛불에서 그런 점을 암시하고 있다. 가장 연약한 빛 덩어리 초는 전 세계와 우주를 밝히는 가장 강력한 빛과 등대와 같은 것이 된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닫힌 코로나시대에 백남준은 SNS, 유튜브, 페북, 트윗 등 열린 회로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 광명의 작은 촛불을 밝혀놓았다.

[1] 1960년 어느 날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새로 태어났지!
1963년 독일 부퍼탈,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갓 잡은 황소머리로 고사!
1973년 TV 부처, 내가 부처인가 부처가 나인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그래, 지구는 아직 안녕하신가?
-박정진(시인, 인류학자) '백남준의 천재를 위하여' 라는 시 구절 일부

  It rains in my TV as it rains in my heart

[1] It rains in my TV as it rains in my heart 내 마음에 비가 내리듯 내 TV 에도 비가 내린다 -백남준 1974 // 다른 버전 It rains in my computer as it rains in my heart 내 마음에 비가 내리듯 내 컴퓨터에도 비가 내린다 -백남준 1968

[1] 백남준은 30년 전 1992년 도올과 인터뷰에서 21세기는 백수 전성 시대라고 예언하다. 그래서 예술가의 역할이 하나 더 추가된다고. 자신의 창작 활동과 함께 예술가는 그의 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직업이 없어도 하루 종일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하긴 백남준이 만든 인터넷이 있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산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더 재미있게 사는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중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장 재미있는 놀이일 수 있다.

[1] 예술이란? '모방본능(MIMESIS μίμησις)'과 '유희본능'에서 왔다. 예술과 생태는 마이너스다. MINUS WAY OF THINKING(이우환) -1000%(백남준), 마이너스(여성)가 있어야 플러스(남성)가 힘을 쓴다. 그래서 여성이 최우선이다. 그래서 '매트릭스'다. 예술은 여성이고 음이고 마이너스다. 역사학에서는 '남성'이 중요하지만 인류학에서는 '여성'이 중요하다. 인류학이 보다 원천적이다.

백남준 자택(아파트) 5층

[1] Nam June Paik fell a sudden stroke in April Easter morning 1996 IN His house and STUDIO(SOHO 110 MERCER Street 5th floor NEAR NEW YORK UNIVERSITY) Because of overwork and too long plane ride.

백남준은 1996년 4월 부활절 아침 초대받지 않는 손님 뇌졸중으로 그의 집이자 작업실인 머스 스트리트 110번지 5층에서 과로로 쓰러지다 이에 대한 부인 시게코의 상세한 증언을 여기에 옮기다.

1996년 3월 신시네티에 가겠다는 남준을 말렸다 그곳은 뉴욕보다 추웠다 지독히 추위를 타는 사람이기에 더욱 그랬다. 존 케이지도 빙판에 넘어져 1달 이상 고생한 적이 있는 곳이다

"내 전시가 열리는데 어떻게 안가" 다행이 남준은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아이고 너무 춥네 추위 몸살이 왔다 그 피로가 가시기전 남준은 또다시 삼성재단 호암상 수상자가 되어 서울로 가야했다

남준은 당뇨등 등 증세로 건강한 체질이 아니었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서서 전시장에서 쓰러져 잔 것도 결국 당뇨병에 그 원인이 있다 그는 단 것을 좋아했다 소변이 불편했다 하여간 다행이 별 사고 없이 남준은 서울에서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국을 다녀온 다음날 1996년 4월 9일 머서 스트리트 5층에서 저녁 식사 갑자기 재치기 멈추지 않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떨구고든 바닥에 쓰러졌다 삽시간에 의식을 잃었다 왼쪽 반신을 마비시킨 뇌졸중이었다. 남준 정신 차려요 아무리 불러도 눈을 뜨지 못했다. 4층에는 그의 조수인 본 매카바시가 살고 있었다. 주치의에게 연락해 앰뷸런스 불러 백남준 사는 곳 바로 옆에 있는 뉴욕대학 부속병원인 유태인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내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렸다 "그 외롭고 힘든 나날 가난의 터널 지나 이제 명성을 얻어 가는데 이렇게 쓰러지다니" 앰뷸런스 울고 응급실 울고 나는 엉엉울었다 좀 괜찮아질 거라는 간호사의 말에 거의 위로를 찾았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남준은 정신 차렸다. 핏기 없는 파리한 모습 남준은 나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걱정마 오늘이 부활절 나는 절대 죽지않을 거야" 일그러진 얼굴 평온 최악의 상태는 넘겼다

일방병실 옮기자 백남준은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남준은 말했다. "시게코 나 당장 나갈래 이런 곳에서 못 살아 병원에 갇혀 살아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다 절망적 상황 극단적 행동이 나온 것이다. 입원 다음날 새벽 5시에 한국인 조수 이정성씨에게 전화해 걸어 나를 빨리 퇴원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청천벼락 같은 소식에 이정성씨사 한숨에 달려왔다 새벽에 병원에서 퇴원을 허락할리없었다. 백남준은 뭘 그리 생각하는지 긴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는 말했다고 한다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서 생각해 내가 왜 이렇게 쓰러져야 하지 세상은 참 불공평해 신도 불공평하고..."

한평생 예술에 모든 것을 바친 그에게 시도 때도 없이 분출하는 창작에 대한 영감과 열정으로 바쁜 그 자식을 낳고 키울 시간 없었던 그가 반갑지 않는 손님 불청객인 뇌졸중 이렇게 쓰러지다니 남준은 하고 싶은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자신에게 닥친일이 믿을 수 없어 놀라고 슬퍼하 고절망했다 -나의 사랑 백남준 중에서

아래 건물 머서스트리트 110번지 5층이 백남준의 집이다 지인을 통해 시게코여사를 방문하고 작업실을 사진찍어보려 했으나 시게코여사의 건강상태가 최악이라 다음으로 미루다

[1] 백남준의 작업실을 재현한 백남준 아트센터

[1] 독일은 백남준의 영원한 예술적 고향 '나의 예술적 고향, 라인란트의 백남준'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3층에서 9월30일까지 지금 독일미술연구가 김순주 씨의 기획으로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3층에서 <나의 예술적 고향, 라인란트의 백남준>이라는 아카이브전이 9월30일까지 열린다.

라인란트란 통일 전 서독 경제부흥의 견인차역할을 하며 독일경제의 기적을 이끌어 낸 라인 강 주변지역을 말한다. 자연히 독일에서 경제수준이 가장 높다. 백남준은 이렇게 경제요건이 좋은 라인란트에서 예술의 꽃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 Estate of Nam June Paik(Museum Kunst Palast, Dusseldorf)

이 지역은 백남준의 주 무대였다. 독일의 파리라는 부자도시 '뒤셀도르프'가 있고, 그 오른쪽엔 백남준의 첫 전시(1963)가 열린 '부퍼탈'이 있다. 그 아래로 전자음악 발상지 '쾰른'이 있고, 그 아래 왼쪽으로 '플럭서스'(1962)운동이 시작된 '비스바덴'이 있다. 그 아래로 백남준도 참가한 '국제신음악강좌'(1957)가 열린 '다름슈타트'가 있다.

백남준에게 독일은 가장 오래된 고향이고, 라인 강은 그의 예술적 영감을 준 젖줄. 백남준은 라인 강 물결에서 TV주사선을 봤고 "눈부신 날, 라인 강의 물결을 세라"고 노래했다. 예술과 TV를 오묘하게 결합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켰다.

'시게코' 증언에 의하면 백남준은 독일에서 예술가에 대한 최고 존칭인 '마에스트로' 칭송을 받았고, 웬만한 카페에 가도 '마에스트로' 오셨다며 융숭하게 대접했고 또한 독일인은 백남준을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했단다. 뒤셀도르프 시 전차에는 백남준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다.

백남준은 1989년 2회 '쿠르트 슈비터스(K. Schwitters)'상, 1991년 '고슬리 황제반지(Goslar Kaiser Ring)'상,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독일대표) '황금사자상', 1997년 '괴테 상', 1998년 독일 구겐하임개관(1997년) 후 '토머스 크렌스(T. Krens)'상, 2001년 8회 '빌헬름 렘브루크(W. Lehmbruck)'상 등 독일 최고예술상은 다 휩쓸었다.

이는 그가 독일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징표다. 백남준은 명실공이 독일명예이주예술가였다. 그래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그가 독일대표미술가로 나간다. 그런데 그는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을 받았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많지만 최근 취재한 독일작가 '알프레드 23 하르트' 씨의 대담에도 그 단초가 보인다.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건, 알다시피 2차 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세계미술을,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했다. 독일은 변방이었는데 70년대 '요셉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혜성처럼 나타나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아트'를 창안해 독일미술을 세계적 위상으로 끌어올려 '아트스타'가 되었다.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을 뒤바꾼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다빈치' 같은 예술가였다"

내가 생각할 때 백남준이 독일에게 환영을 받은 건 바로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쟁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으로 굉장한 심적 압박과 정신적 충격을 받아 주체할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천개 손도 모자란다는 '천수관음보살'처럼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해방감과 통렬한 웃음을 선물하며 새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서 백남준은 서구의 눈먼 의식인 '합리주의·과학주의·이성주의'가 결국 괴물 같은 나치즘을 낳았음을 지적한다. 그 대안으로 동양의 통합적이고 일원론적인 사상을 도입해 서구의 이원론적이고 분열적 사고의 대척점으로 제안한다. 그래서 정신과 관념보다는 몸과 일상을 중시하고 생명감 넘치는 야생적 사고를 독려한다.

게다가 동서 문화를 꿰뚫으며 6개 국어를 하는 백남준의 서구에 대한 이해는 유럽의 최고지성도 뛰어넘기에 그에 대한 독일인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백남준은 서구인을 비판할 때조차도 폭소를 터지게 해 자기편으로 만든 데 능수능란한 유혹자였다. 또한 그의 친화력은 소문이 났고 한번 알게 된 사람에 대한 우정은 참으로 깊었다.

백남준은 작은 나라에서 온 예술가가 서양 작가를 능가하려면 그들을 웃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한번은 누가 그의 스승격인 '존 케이지'에게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뭐가 제일 아쉽겠는가?"라고 질문했더니 그는 "백남준의 재담을 듣지 못하는 것이 제일 서글플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의 재치 넘치는 유머는 탁월한 아포리즘이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서구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예컨대 "현대예술은 예술을 하지 않는 게 예술이다"나 "우리가 세계사의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꿔라"라든가 30살에 선언한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나 그의 부퍼탈 첫 전시의 부제가 '추방'인 것은 그가 기존의 예술을 거침없이 해체하고 전복시켜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그는 선언만 아니라 실제 몸으로 그것을 보여줬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퍼포먼스가 바로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것이다. 피아노는 서구인의 성상으로 부르주아 교양취미의 상징이지만 서구미술의 출구를 찾으려면 그런 정신이 필요함 알린다.

백남준은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이라면서 독일인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여러 사회적 우상과 편견을 깨지 않으면 새로운 출구를 찾을 수 없음을 경고한다. 백남준이 피아노를 부술 때, 백남준 이상으로 통쾌함을 느낀 것 독일인이다. 왜냐하면 독일인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고정관념을 백남준이 대신 깨줬기 때문이다.

문화칭기즈칸으로서 백남준은 독일에서 이렇게 황제가 되는데 여기에 호형형제하며 지낸 '요셉 보이스'가 좋은 파트너가 된다. 그렇게 해서 백남준의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고, 동양사상과 서양예술을 능수능란하게 결합한 '전자아트'와 '신체아트'를 낳았다. 이는 후에 '위성아트'와 '레이저아트'로 더 발전된다.

백남준은 이렇게 마네, 피카소, 뒤샹 등을 능가하며 서양미술에서 패러다임을 바꾸는 세계적 예술가가 된다. 그는 독일생활 20년 만에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 신설된 '비디오'과 교수가 된다. 이 대학은 '리히터', '보이스' 등을 배출한 독일최고의 명문이다. 마침 '시게코'와 신혼 기간이었고 1977년부터 '독일감격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래사진] 독일 뒤셀도르프 시내전차에 그려진 백남준의 큰 얼굴사진. 그는 독일에서 거의 신화적 존재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너무 완벽하면 신이 화를 낸다"는 문구가 전차에 적혀있다. 

[1] 독일은 왜 미술의 강세인가? 그것은 독일은 돈을 어느 정도 벌 수는 있지만 그 이상 벌면 세금 때문에 오히려 수입이 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부자가 되면 돈을 모으지 않고 골동품이나 미술작품 등을 산다. 그리고 그림을 사면 국가에서 세금면제를 해 준다 독일이 미술에서 강세인 이유 중 하나다.

백남준 말이 생각난다. 백남준이 어느날 독일인 컬렉터에게 왜 그렇게 그림을 사느냐고 물었다 그 독일인이 하는 말 2차대전이 끝나고 나니 남는 것을 그림밖에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는데 일리가 있다 부자가 작품을 가지고 있으면 정말 부자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재산은 인간을 자유하게 하지만 너무 많은 재산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부자유하게 된다 그래서 치명적인 불면증에 걸리기 쉽다 여기에는 약이 없다 한 가지 유일한 치료법은 비싼 그림을 사는 것뿐이다. 그림을 사면 슈퍼리치도 잠을 깊이 잘 수 있다 부자가 문화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기에

[1] "비디오 예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한 군데로 비벼서 엮어내려 합니다. 비디오라는 미디어를 통하면 이것이 가능해집니다. 양자의 구획을 허물고 두 범주를 엮어 놓을 때 새로운 자유의 마당이 열립니다." 백남준과 김훈 1995년 인터뷰 중에서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1] 하나, [미디어 그 자체가 메시지. 그걸 의미화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의 민주화를 작품화하지는 않는다. 미디어의 창조적 가능성을 실험해 가면서 미디어 자체를 메시지에 일치시켜 나간다. 그렇다고 나는 예술에 메시지를 담는 것이 쑥스럽다. 더구나 나처럼 돈 없는 예술가는 메시지를 주업으로 하는 영화 시장과 대항할 수는 없다. 나는 그것보다 더 본격적인 것들, 더 고귀한 것들을 추구한다. 나는 예술에서의 ‘의미’를 탈각하려는(탈의미화하려는) 세계 속에서 살아 왔고,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 메시지야란 통속적일 것일 뿐이다. ‘말’을 하려면 ‘말’을 사용하면 된다. ‘말’을 하기 위해 새로운 미디어를 개척할 필요는 없다

[1] 독일 쾰른 출생. 1954년에 그는 dé-coll/age라는 단어를 발견. 비행기의 동시 이륙과 충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다. 그는 이 용어를 미학적 철학을 의미하는 데 사용했으며, 라이브 공연의 창작에도 적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현대 생활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에로틱한 사건이 조합되고 병치되었다. 그는 음절 구분 단어 dé-coll/age를 강조하면서 자연 및 생물학적 시스템과 문화 및 사회 구조에서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과정 모두에 적용되는 용어의 변증법적 의미를 강조했다. 1958년 Vostell은 The Theatre가 거리에서 발생하는 유럽 최초의 해프닝(Happening in Europe)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962년 조지 마시우나스, 조지 브레히트, 백남준 등과 함께 플럭서스를 설립하고 비스바덴 박물관에서 제1회 국제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독일. 그는 1969년 쾰른의 Gallery Art Intermedia와 협력하여 인간 행동과 사회적 조건의 골화를 지적한 그의 첫 번째 시멘트 작업(Concreting, bétonnage)인 Stationary Trafic을 실행했다. 1962년 Vostell은 Happenings, Fluxus, Nouveau Réalisme 및 Pop Art에 관련된 예술가들의 이론적인 글과 선언문을 다루는 잡지인 Dé-coll/age: Bulletin aktueller Ideen을 창간하고 편집했다. 철학, 성찰 및 귀중한 대상으로서의 예술. 이 관행은 1955-60년대 세대가 주장하는 다다이스트 전통("모든 것이 예술이다")에 새겨져 있다. 쾰른에서 시청각 및 전자 음향 실험의 자극적인 분위기는 Vostell의 Action-music(Fluxus 콘서트)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1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해프닝 아카이브(오늘날 Malpartida에)를 설립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스페인 카세레스의 말파르티다에 Vostell Museum을 설립했다. 이 박물관은 중요한 Fluxus 컬렉션과 포르투갈 아방가르드 전용 룸에 전시됐다.

[1] 구보타 시게코 작가 64년 처음 일본에서 백남준을 만나 그는 열렬히 좋아했다 “That was only the beginning of his struggles as an artist. After his father died, Nam-june had no money. His mother used to say ‘spend money like water’ but Nam-june did not have money to do so. You know, it is easy to sell food in the supermarket but it is hard to sell art,” said Kubota.

Paik moved to New York, the mecca for artists, met Kubota, and the two fell in love.“Being so poor, Nam-june didn’t want to get married and be responsible for his family but just wanted to concentrate on his art. That was his style of life, which I understood,” said Kubota.

Paik’s stubborn resistance against marriage broke down, however, finding out about Kubota’s uterine cancer. As Kubota had no insurance coverage in the U.S. and had to return to Japan for treatment, Paik proposed to her right away.

Another thing Paik was generous with, despite his lack of money, was buying materials for his works, Kubota remembered.

“One day, Nam-june brought home an ugly looking Buddha that he had bought at an antique store. Using it, he showcased his first ‘TV Buddha’ at an exhibition in Bonino Gallery, and it received great response. I thought ‘Oh, this guy is a genius.’ I couldn’t complain about how he uses money!” she said.

[1] <작품명: Wrap Around the World Man, 250 x 240 x 160cm 1990><백남준 역시 인류학적이고 글로벌하고 전지구적. 천지인의 형상인가?>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로 전 세계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Wrap Around the World Man,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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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남준 이 세상을 보는 시선 비관적인 같은데 낙관적이고 비현실적인 것 같은데 현실적이고 부정적인 것 같은데 긍정적이고 파괴적인 것 같은 데 창조적이고 반맑스적일 것 같은데 맑스적이고 비지성적인 것 같은데 지성적이고 바보같은데 진짜 천재다. 서양적일 것 같은데 동양적이고 세계적일 것 같은데 한국적이다 아니 그런 일체의 경계가 없는 종교와 사상의 테두리가 없는 열린 세계시민이고 인류보편적 지구인이다. 평생 순백한 눈빛 같이 해맑고 천진한 아이였다.

[1] 재불작가 김순기 1982년 뉴욕자택에서 백남준 만나 인터뷰하고 작품화

백남준에게 묻는다. 중국과 몽골의 차이는 뭔가? 중국은 농경문화 정착민이 산다. 그래서 땅에 집착한다. 그러나 노마드는 땅에 집착하지 않는다. 백남준은 가장 오래된 문서는 바로 <납세기록>이라고 말한다. 글이란 결국 납세기록=사유재산을 말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이런 시대 이전을 동경한다. 그런 면에서 사상적으로 노마드를 계승한다. 그러나 백남준 디지털 노마드다. 정착민은 종이에 글로 기록하고, 노마드는 머릿속에 글 없이 기록한다. 우리나라 무게 없는 머리 속에 담는 예술은 '창(판소리)'은 바로 후자에 속한다.

1982년 김순기 재불작가, 뉴욕 가다. 백남준과 인터뷰 위하여 인터뷰가 그녀의 작품이다. 여기서 인류문명사의 키가 뭔지를 묻다. 답은 세금문제 등등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김순기전 소개기사 [자크 데리다와 대화(2002)] - 침묵이야말로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

사진:2002년 3월 7일 철학자 데리다와 김순기 작가가 파리근교 리조랑지(Ris Orangis)에 있는 데리다 자택에서 대담하는 모습이다. 45분.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영상작품으로 소개되었다

ⓒ 아트선재센터

두 사람의 만남은 김순기의 친구인 프랑스철학자 '낭시'의 소개로 이루어졌는데 산업이 예술을 통제하려드는 비상구 없는 시대로 들어서자 서양철학자과 동양작가가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때로 백 권의 책보다 한 번의 대담이 더 낫다는 말이 있는데 이 두 지성인의 대담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예술마저도 자본화 되어가는 시대, 이를 헤쳐 나갈 길을 모색 중이던 김 작가가 던진 질문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자본이 미술시장을 잠식하는 세계화시대에 예술가의 미래가 있는가"였고 둘째는 "침묵이 진정한 예술의 통로가 될 수 있느냐"였다.

유럽인들 그렇게 잔인하게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하고
최고 부자들이 되고 나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그렇게 끔찍한 전쟁 후에 또 다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서양 전쟁사 너무 잘 아는 백남준 3차 대전 막으려고 인터넷을 발명하다

데리다는 미술에선 '고유성·희귀성·유일성'이 가장 중요한데 자본의 압력으로 이것이 박탈되고 예술이 '동질화·빈곤화·저급화'를 초래한다면 그런 미술시장은 경계해야 하고, 문화투자가 아니라 과잉투기로 왜곡될 수 있기에 저항해야 하고, 이를 막는 데는 작가만 아니라 수집가, 애호가, 전문가도 다 같이 동참해야 한단다.

동양에선 "의미 있는 말이 침묵을 만든다"는 말도 있고, 존 케이지는 침묵도 음악이라 했지만 침묵에 대한 김 작가 질문에 데리다는 "말의 손실을 막기 위해 침묵이 필요하다", "전문가는 침묵이 뭔지 안다"는 말로 침묵의 예술적 가능성과 그 가치를 평가했다. 결론으로 침묵이야말로 타자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말한다.

좀 더 덧붙이면 수사적이고 웅변적인 세계화가 난무하는 시대에 더 많은 소리를 듣기 위해선 침묵이 필요하고 침묵이 보호돼야 한다고, 그리고 이는 또 하나의 저항일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도 중국의 북경, 남경, 상하이 등을 여행한 경험담을 꺼내면서 서양보다 동양이 침묵을 더 중시하는 문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1] 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독자가 책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다. 작가는 하나의 껍데기일 뿐이다)
니체: '신의 죽음'(인간이 어떻게 삶의 주인으로 사느냐가 중요하다)
백남준: '예술가의 죽음'(좋은 전시는 관객이 그 전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쌍방 소통 interactive art)
푸코: '인간의 죽음'(근대성의 상징인 학교, 병원, 언론, 감옥이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감시하고 처벌하고 죽이고 있다)

[1] 인류학은 철학, 종교, 과학, 역사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펼친다. Anthropology transcends the boundaries of philosophy, religion, science and history, and opens up a new realm of knowledge. 백남준이 인류학으로 자신의 예술을 접근한 이유다.

[1] "균형을 상실한 비인간의 시대, 차라리 야생의 사고를 회복하라" -코로나시대 대책 À l'ère des non-humains qui ont perdu leur équilibre, plutôt restaurez les pensées sauvages. " In the age of nonhumans who have lost their balance, more than restore wild thoughts. "

[1] <예술이란 카오스를 통해서 카오스를 물리는 것인지 모른다> 철학, 과학 그리고 예술은 우리가 천상계를 뜯어내고 카오스에 뛰어들어가기를 원하다. 그러한 대가로서 우리는 카오스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 철학이란 무엇인가(들뢰즈와 가타리) 중에서

[1] 요셉 보이스는 야생주의로 인류문명을 살려내는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치유에 능한 몽골계 카타르 샤먼이 되려 했고, 백남준은 전 세계의 평화를 가져오는 한반도의 무당이나 인터넷으로 전 지구를 하나 되게 하는 문화 칭기즈칸이 되려고 했다. 두 사람은 60년 전부터 유라시아 시대가 올 걸 예언하다.

[1] 프로이트 무의식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홈 스위트 홈 콤플렉스) 발굴하다. 그러나 68혁명 이후 사회적으로 큰 깨달음을 얻고 그런 지옥에서 빠져나오면서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욕망의 기계 간 충돌, 성가족 해체, 주체 없다)'를 들고 나오다.

[1] 연암 박지원: 당대 최고 가문, 노론 집안 출생한 천재였지만 과거시험 거부(출퇴근이 불가능한 체질), 지성인 백수 그러나 부부 금슬(거문고-비파처럼) 너무 좋고 스트레스 없는 백수로 살다 보니 밤일만 충실, 자녀 많았다. 왜 책을 쓰니까? 스트레스가 없죠? 창조적 언어 표현 즉 책을 쓸려면 고도의 훈련과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자크 라캉'은 자본주의에서는 "성은 없다 혹은 성은 죽었다(Il n'y a pas de rapport sexuel)"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 2007년 백남준 추모 1주기 백남준은 오랫동안 후원자 역할을 한 일본의 갤러리리스 와타리 고이치. 그녀는 와타리 미술관 관장으로 백남준 오마주전을 열었다. 와타리움미술관 와타리 고이치 관장은 "백남준 선생이 잠깐 도쿄에 머무르며 작업 활동을 할 때 저에게 정원에서 식물 좀 꺾어 오라고 해서 가져갔더니 만든 작품이 '케이지의 숲'이다. 그의 천진난만함과 천재성에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고 백남준과의 일화를 소개했다

[1] 보이스, 인디언이 숭배하는 코요테 외에는 아메리칸 대륙에서 더 이상 볼 것이 없다. 라고 한 것은 미국 문명에 대한 일종의 시니컬한 조롱이다.요셉 보이스는 야생주의로 인류문명을 살려내는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치유에 능한 몽골계 카타르 샤먼이 되려 했고, 백남준은 전 세계의 평화를 가져오는 한반도의 무당이나 인터넷으로 전 지구를 하나 되게 하는 문화 칭기즈칸이 되려고 했다. 두 사람은 60년 전부터 유라시아 시대가 올 걸 예언하다.

[1]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 또한 나를 좋아한다'는 요셉 보이스의 이러한 퍼포먼스는 인디언이 숭배하는 동물 코요테를 상징적으로 앞세워 이를 변방으로 밀어붙이는 문명세계의 패권주의를 조롱함과 동시에 대지를 어머니 삼아 자연의 형제로 사는 인디언의 본질적 삶을 은근히 촉구하고 있다. -김해성 미술평론가·부산대 교수

[1] [르몽드] 독일 대표적 화학 회사 바스프(BASF)는 2050년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풍력 에너지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하다. 화학 분야에서 세계 1 위인 독일은 스웨덴 회사 Vattenfall과 함께 북해에 대규모 풍력 발전 단지를 짓기 위해서 투자하기로 결정하다. <추신> 부친이 1957년 이 독일 화학 회사로부터 초빙을 받아 염색기술 연수를 하다.
https://www.lemonde.fr/economie/article/2021/07/05/basf-mise-sur-l-eolien-pour-atteindre-la-neutralite-carbone-en-2050_6087050_3234.html?fbclid=IwAR0LaUio6_IKwriR25DaPAquILe6lbXAao4n6KzdDGzlSFzDDMvBoKLpFs8

 

BASF mise sur l’éolien pour atteindre la neutralité carbone en 2050

L’allemand, numéro un mondial de la chimie investit avec le Suédois Vattenfall pour construire un grand site éolien en mer du Nord.

www.lemonde.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