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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학고재] 윤석남: 14명 여전사, 역사의 주류 되다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 학고재에서 2021년 2월 17일(수)부터 4월 3일(토)까지 열린다 [작성중]

갤러리 학고재 전지장 내부

윤석남(1939년 만주에서 태어남)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를 연다. 윤석남은 아시아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린다. 가부장적인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반기를 든 여성주의의 움직임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가로 손꼽힌다. 이번 전시에서는 역사 속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 연작과 대형 설치 작업을 함께 선보인다. 전시개막에 맞추어 김이경 소설가가 동명의 책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한겨레출판, 2021)을 출간한다. 전시 서문은 지난 20여 년간 윤석남 및 한국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지속해온 김현주 추계예술대학교 교수가 쓴다.

전시는 온·오프라인에서 동시 개막한다. 학고재 본관에서는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등 14인을 그린 채색화와 연필 드로잉을 선보인다. 본관 안쪽 방을 가득 채운 설치 〈붉은 방〉(2021)도 만나볼 수 있다. 본관 전시 및 김이경 소설가의 책에 포함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도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 그중 오광심, 이병희, 조신성, 김향화, 동풍신, 부춘화, 윤희순, 이화경 등 8인의 초상을 학고재 오룸(OROOM, online.hakgojae.com) 온라인 전시 공간에서 추가로 선보인다.

<붉은 방 2021>

[붉은 방에 대해서] 학고재 본관 안쪽 방에 들어서면 대형 설치 작업 〈붉은 방〉(2021)을 만난다. 윤석남은 〈핑크 룸〉(1996-2018), 〈블루 룸〉(2010-2018) 등의 ‘방’ 연작을 꾸준히 제작해 왔다. 그중 붉은색 종이를 활용한 〈붉은 방〉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흘린 피와 열망을 상징하기 위하여 붉은색을 선택했다. 종이 콜라주 850여 점과 거울 70점이 전시 공간의 세 개 벽을 가득 메운다. 종이 콜라주는 작업 초기에 그려둔 200여 가지 도상을 바탕으로 수작업했다. 밑바탕을 그리고 가위로 오려낸 후 두 장의 한지를 맞대어 붙이는 방식으로, 수행적인 노동을 요구하는 작업이다.공간 내부에 자리한 50여 개의 나무 조각에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추상화해 그려 넣었다. 각기 다른 표정과 몸짓을 한 나무 조각들은 옛 마을 어귀의 장승 무리를 연상시킨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위에 이어서 앞으로도 조명할 인물이 많다. 지난해 서울 종로구에서 관내 3개 도로 구간에 전통과 역사적 특성을 반영한 명예도로명을 부여했다. 학고재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 율곡로 3길에는 ‘여성독립운동가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성해방운동가이자 덕성학원의 전신 근화학원을 설립한 차미리사(1880-1955) 선생이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교육을 실천한 장소다. 근화학원 학생들이 이곳에서 만세 운동을 했다. 이러한 인물을 염두에 두고, 역사 속 여성 독립운동가의 기록을 그림으로 복원해내는 작업을 앞으로도 이어갈 예정이다. 100인의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을 그리는 것을 장기 목표로 삼았다. 사진 기록에 근거하여 그려야 하는 작업의 특성상 자료가 많지 않아 난항을 겪기도 했다. 윤석남은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다”라는 굳은 소신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1885-1918): “1915년 벌목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나는 목재 창고 근처에서 중키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노동자들은 그가 러시아어, 조선어, 중국어에 능통한 통역관이라고 수군거렸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라 김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노동자들을 대했고 사업주 앞에서 그들의 권익을 옹호했다. 때문에 러시아인,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를 사랑하고 모든 점에서 그를 신뢰했다.”– 러시아의 우랄 지역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노동자 김시약의 회고 1885년 러시아 연해주의 조선인 정착촌 시넬니코보(일명 영안평)에서 여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함경도 이주민 출신인 아버지 김두서는 조선인, 중국인 이주노동자와 러시아 당국을 연결하는 통역사로 일했는데, 알렉산드라는 어려서부터 그 모습을 보며 민족차별, 계급차별에 눈을 떴다.

1902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학교에 진학했고 이때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노동자 파업을 조직하며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914년 말부터 군수공장이 밀집한 우랄 지역에서 통역사로 일하면서 노예계약으로 고통받는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싸웠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극동지역 볼셰비키 지도자로서 국제군을 조직해 반혁명 백위군에 맞서 싸우는 한편, 1918년 러시아 감옥에 수감된 이동휘의 석방 운동을 전개하고 반일·반제국주의를 표방한 한인사회당 결성에 힘을 보탰다. 연해주에서 내전이 격화되자,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반전 선전 활동을 펼치고 한인사회당 동지들과 조선인 적위대를 창설했다. 1918년 9월 하바롭스크가 일본군과 백위군에게 함락된 뒤 마지막 탈출선을 탔으나 결국 붙잡혀 총살당했다. 그가 죽고 3년 동안, 하바롭스크 사람들은 그의 시신이 떨어진 아무르 강에서 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전시 주제>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 – 미술과 문학으로 조명하다. 지난 2019년, 3·1 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하여 잊힌 독립운동가,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려는 사업이 다각도로 진행됐다. 당해 자료 기준 훈장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수가 종전의 170여 명에서 470여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전체 1만 5825명 중 3%에 불과한 숫자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남성 위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미 알려진 위인에 대한 연구에 편중되어 있기도 하다. 모두가 3·1절마다 유관순 열사를 기린다. 그런데 그보다 한 살 어린 소녀, 매우 비슷한 삶을 살았으나 우리가 잊은 인물이 있다. “남쪽에는 유관순, 북쪽에는 동풍신”이라 불리며 함경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동풍신(1904-1921) 열사다. 만세를 외치다 일제에 의해 생을 마감한 순국열사 중에는 김향화(1897-?)라는 이름도 있다. 동풍신은 이북 출신, 김향화는 기생 출신이기에 역사에서 소외됐다.

학고재 본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박자혜(1895-1943)의 초상을 만난다. 독립운동가 신채호(1880-1936)의 아내다. 1920년 신채호와 결혼하기 이전의 활동에 대해서는 조명된 사례가 많지 않다. 박자혜는 1919년 3·1운동 당시 간호사로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민족적 울분을 느꼈다.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하였고, 만세 시위와 동맹파업을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으나 대중에게는 그 이름이 아직 낯설다. 전시장 중앙 벽에는 김마리아(1892-1944)의 초상을 걸었다.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널리 신망받은 인물이다. 3·1 운동을 일으키는 데 적극 가담하였으며 체포 후 극심한 고문을 겪어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1944년 투병 끝에 숨을 거둘 때까지 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족의식을 잃지 않았다. 1962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정정화>

<정정화(1900-1991)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얻고 싶었던 것을 얻었고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가는 지금, 나는 그토록 갈망했던, 제 한 몸을 불살랐으나 결국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한 채 중원에 묻힌 수많은 영혼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대신해 조국에 가서 보고해야만 한다. 싸웠노라고,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나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을 생각해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회고록 〈장강일기〉 중에서

1900년 8월 서울에서, ‘양대 판서 집’으로 불리던 대갓집의 2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1910년 동갑내기 김의한과 결혼했다. 신랑의 아버지 김가진은 남작 작위까지 받은 고위인사였으나 일제에 반대해 대한협회 회장과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였다. 1920년 망명한 남편과 시아버지를 찾아, 정정화는 홀로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부모가 지어준 묘희란 이름을 정화로 바꾸고 수당이란 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해 3월 혼자 국내에 몰래 잠입해 임시정부의 자금을 모금한 것을 비롯해, 이후 세 차례나 임정의 밀사로 국내를 오가며 자금 조달 임무를 수행했다. 1922년 3차 잠입 때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 용기에 탄복한 임정요인 조완구는 ‘조자룡 같은 담력’을 가졌다며 “정정화의 온몸이 담 덩어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1945년 마흔다섯 나이에 해방을 맞을 때까지 임시정부와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망명 생활을 하였다. 특히 윤봉길 의거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임정이 8년간 5000km가 넘는 대장정을 할 때, 임정의 안주인으로 불리며 흔들리는 임정을 지켰다. 1943년에는 이념을 넘어 각 정파의 여성들과 힘을 합쳐 대한 애국부인회를 재건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러나 해방된 뒤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전쟁 때 남편은 납북되고, 자신은 서울에 남아 있었단 이유로 부역죄로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산가족의 한을 풀지 못한 채 1991년 아흔한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마리아>

김마리아(1892-1944)  1) “너는 왜 대일본제국의 연호를 쓰지 않는가?” “나는 일본 연호를 배운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다.” 2) “너는 언제부터 조선의 독립을 생각해 왔는가?” “한시도 독립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없다.” 3) “여자가 어째서 남자들과 함께 운동을 했나?” “세상이란 남녀가 협력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서 만들어지고 좋은 나라는 남녀가 협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 심문과 재판 진술 중에서

1892년 황해도 장연에서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에 교회와 소학교를 세운 개화인사였다. 부모를 일찍 여읜 뒤 의사며 독립운동가였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머물며 학업을 이어갔다. 고모 김필례, 김순애, 고모부 서병호, 김규식 등 민족운동에 헌신한 집안 어른들을 보며 어려서부터 강한 민족의식을 가졌다.

정신여학교 시절 빼어난 학업능력과 지도력으로 주위의 신망을 받았으며, 교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일본에 유학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선언문을 기모노 속에 숨겨 국내로 들여와서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적극 가담했다. 이 일로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고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고질병을 얻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자마자 활동을 재개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아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하고 조직을 확대하던 중, 동지의 배신으로 검거돼 또 한 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21년 병보석으로 출감된 뒤 비밀리에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1923년 미국으로 유학했다. 가정부, 점원, 행상 등으로 일하면서 대학교에서 교육학과 사회학을 공부하는 한편,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는 등 민족운동을 계속했다. 1932년 귀국해 원산의 신학교에서 교육 계몽사업에 헌신했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1944년 3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뇌일혈로 투병 중 숨을 거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밖에도 더 많은 여성 전사들이 소개되고 있다.

<전시장 풍경>

윤석남은 이매창, 허난설헌, 김만덕 등 한국의 여성 위인들을 화폭에 담아 왔다. 이번 연작은 그중에서도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장기 과제다.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 많으므로 지속적인 연구를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일 년여 간 김이경 소설가와 함께 이들에 관한 자료를 조사했다. 김이경 소설가는 윤석남이 그린 인물의 삶에 소설적 상상력을 더하여 독특한 역사기록으로 풀어냈다. 치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고, 대중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문체로 서술했다. 김이경이 쓴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한겨레출판, 2021)이 이번 전시 개막에 맞추어 출간된다.

<고운 세필로, 강하게 그린다–윤석남의 인물 채색화>
윤석남은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후 채색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면을 응시하는 당당한 눈빛에 매료되어, 여성의 시선을 드러내는 채색화를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 2018년 학고재에서 《윤석남》(2018)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었다. 2015년경부터 그려온 채색화 연작을 최초로 발표한 자리였다. 전시 제목에 걸맞게 자화상을 다수 출품했다. 1982년도에 연 첫 전시부터 줄곧 어머니와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자신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처음이었다. “자랑스러운 나의 엄마”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것이 많았으나 자신을 드러내기가 못내 망설여졌다는 그가 고운 세필을 쥐고, 강렬한 필치로 스스로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주위의 벗들을 그린 초상 연작을 OCI 미술관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수년간 개인의 삶을 돌아본 윤석남이 이제 역사 속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복원한다.

채색화를 그리며 과거복식 등을 참고하고자 한국의 초상화를 모은 책을 구입했다. 방대한 분량 속 여성의 초상은 가장 뒤편에 이름도 없이 단 두 점 실려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그려진 그림이었다. “왜인지 울화가 치밀었다.” 어려운 시대, 나라를 위해 싸운 여성들의 삶을 조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윤석남은 역사가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화폭에 기록하기로 했다. 남아 있는 사진 자료를 참고하여 얼굴을 묘사하고, 각 인물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배경과 몸짓을 구상해 그려 넣었다. 윤석남의 초상에서 인물의 손은 크고 거칠게 표현된다.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신체부위라고 생각해서다. 그는 자립적인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투박한 손이 작고 고운 손보다 아름답다고 본다.

[작가 소개] 윤석남,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윤석남 작가

윤석남은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행하며 살다 40세 불혹의 나이에 붓을 잡았다. 1982년 문예진흥원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85년 여성 작가 김인순, 김진숙과 함께 ‘시월 모임’을 결성하여 여성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여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뉴욕)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뉴욕)에서 수학했다. 서울시립미술관(서울), 아르코미술관(서울), 인천아트플랫폼(인천), OCI미술관(서울), 학고재(서울)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천), 경기도미술관(안산), 제주도립미술관(제주),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수원) 등에서 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1996년 베니스비엔날레와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했다. 2018년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에서 개최한 《세계의 초상화들: 한국(Portraits of the World: Korea)》(2018~2019)에 작품을 선보여 주목 받았다.

1996년,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제8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인 1997년에 국무총리상을 받으며 동시대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15년 제29회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했다. 2019년에는 여성주의 문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테이트 컬렉션(영국),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서울시립미술관(서울), 아르코미술관(서울) 등 국내 주요 국공립 미술관과 퀸즈랜드 미술관(브리즈번, 호주), 오리건주립대 조던슈니처미술관(오리건, 미국), 타이베이 시립미술관(타이베이), 후쿠오카시 미술관(후쿠오카, 일본) 등 해외 유수의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윤석남은 현재 경기도 화성에서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며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