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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미술사

[부고] 아! 김창열 화백, 물방울로 상흔을 다스리다

[르몽드]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 타계 한국전쟁에 참전 거기서 받은 충격과 트라우마를 그의 독특한 예술적 모티프 즉 물방울 시리즈로 치유하고자 했고 인간의 고통을 상징적 인류보편주의로 승화시키다. 1월 5일 91세(한국나이 92세)로 사망하다 [HOMMAGE] Kim Tschang Yeul C'est avec une grande tristesse que nous avons appris la disparition de Kim Tschang-Yeul, artiste coréen incontournable de la scène contemporaine internationale. Né en 1929, il était célèbre pour ses peintures figurant des gouttes d'eau en trompe-l’œil 김창열 화백 애도합니다. 세계 현대 미술에서 한국의 핵심 작가 김창열의 실종을 알게 된 것은 큰 슬픔이다. 1929년에 태어난 그는 미술의 본질인 트롱프 뢰유(trompe-l’œil) 충실한 화가로 물방울 시리즈 그림으로 유명했다.

[김창열(Kim Tschang Yeul) 작품세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에서 여동생과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당한 전쟁의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기억(trauma)을 지우기 위해 물방울을 열심히 그리다 그의 그림 포퍼먼스는 결국 자신(ego)을 비우고 없애고 지우는 무화(Néant :Non-being:Make oneself nothing)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노장사상이나 선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담겨 있다. 추상과 구상 현실과 이상주의 중간지점에 서 있다. 서구의 기하학적인 수학의 논리가 담긴 그림이라기보다는 동양의 도리와 인의예지를 중시하는 수신의 철학이 담긴 작품들이라고 볼 수 있다. 

Kim’s water drop paintings speak a language that amalgamates the discourses around photorealism and abstract expressionism, situating themselves in an ambiguous space between reality and the abstract. According to Kim, he does not interpret his subject as realistic depictions of actual water drops, but “idealistic” ones. Kim explains that the continued act of painting water drops helps him erase painful and traumatic memories of Korean War broke out between 1950 and 1953, where he witnessed the deaths of his younger sisters and friends. In a way, the incessant act of painting water drops served as a therapeutic tool for him, bringing his art closer to surrealism and spirituality. Many have speculated about the meaning behind his obsession with water drops. On the subject of their repetitious painting, Kim has stated: 'I've said often that painting water drops is a way of erasing my ego. This is an idea close to Taoism and Zen Buddhism. In the West, I feel that Marcel Duchamp and Dada came closest to these philosophies.'

비디오를 붓으로, 물방울을 혼으로 변형시킨, 백남준과 김창열 <아래>김창열 물방울 연작 '회귀(Recurrence) SHP3000(1993년) 'SH08002(2008년)'

백남준(1932~2006)과 김창열(1929~), 그들은 엇비슷한 세대로 1969년 백남준이 김창열을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시키는 것을 계기로 가까워졌다. 이때부터 김창열은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어릿광대 같은 백남준의 광기와 구도자 같은 김창열의 열정으로 넘치는 두 사람이 같이 서 있는 사진을 보니 서로에게 응원의 손짓을 보내면서 눈빛이 단번에 통하는 것 같다. 백남준의 천진무구한 웃음과 김창렬의 과묵한 표정이 음양의 조화처럼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김창렬의 물방울, 모든 물질의 근원이자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젖줄을 주는 어머니로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이 세상에서 물보다 두루 이익을 주는 것이 없다는 비유가 떠오른다.

그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물방울'을 그린 것이 아니라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파리의 가난한 아틀리에에서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또 마음에 안 들어 유화색채를 떼어내 재활용하기 위해 캔버스 위에 물을 뿌려놓았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햇살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습니다." 또한 김창열은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자신과 예술에 대한 정체성을 찾으려 누구보다 고심한다. 바로 그때 이 세상의 모든 번뇌를 깨끗이 씻어줄 것 같은 물방울이야말로 자신에 맞는 오브제라 생각한다. 또한 물방울이 불교의 공(空)이나 도교의 무(無)와 같은 동양적 세계관을 잘 상징하기에 이에 몰입한다.

[갤러리현대 자료] 2021년 1월 5일, 김창열 화백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김창열(1929-2021)은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과 동양의 철학과 정신을 상징하는 천자문을 캔버스에 섬세하게 쓰고 그리며, 회화의 본질을 독창적으로 사유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부친 김대권과 모친 안영금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명필가였던 조부에게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고, 훗날 <회귀> 연작을 통해 그러한 기억을 작품에 녹여 냈다. 어린 시절 서예와 미술 시간을 가장 좋아했으며, 중학생 2학년 무렵에는 가족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1946년, 서울로 내려와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근 일 년 동안 서울의 월남민 피난 수용소에서 지낸다. 이듬해, 사설 미술학원인 경성미술연구소에 등록하고, 이어 서양화가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검정고시로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학업을 중단한다. 1952년 경찰전문학교의 속성 과정을 마친 그는 제주도로 파견되어 근무하는데, 이 인연을 계기로 2016년 김창열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한다.

휴전 후 서양화가 이상복의 화실에서 조수로 일하던 그는 또래의 작가들을 만나 어울렸고, 김영환, 이철, 김종휘, 장성순, 김청관, 문우식, 하인두와 함께 1957년 ‘한국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를 창립해 동인전을 개최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을 시작한다. 기존의 화단 질서에 반기를 든 젊은 작가들은 ‘현대미협’을 통해 당대 전위 미술의 주요 경향인 앵포르멜의 흐름을 주도한다. 1950년대 김창열도 물감의 흔적과 캔버스 표면의 질감, 붓을 휘두른 작가의 몸짓을 강조하며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를 담은 앵포르멜 계열의 추상 연작 <상흔>과 <제사> 등을 제작한다. 김창열은 1961년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가 경복궁미술관에서 연합전을 열고 통합 결성한 ‘악뛰엘’에서도 창립 멤버이자 그룹의 주축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신문과 여러 매체를 통해 시나 에세이를 발표한 문필가였던 그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변화를 상징하는 텍스트인 악뛰엘의 선언문도 직접 작성한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해진 존엄들 여기 도열한다. 그리하여 이 검은 공간 속에 서로 부둥켜안고 홍조한다”고 쓰면서 뉴미술을 향한 열정과 그 도래를 천명한다.

김창열은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며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소개하고, 1963년 서울의 프레스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갖는다. 1965년부터 4년간 미국 뉴욕에 머물며 록펠러재단의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Arts Student League)에서 판화를 전공한 그는 첨단의 미술 환경에 적응하며 작품 제작을 이어간다.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 당대 미국 주류 화단 흐름에 영감을 받은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반복되며 리드미컬하게 배열된 <구성> 연작을 그리며 변화를 모색한다. 백남준 도움으로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좀 더 다양한 미술 경향이 공존하는 파리로 돌아간다.

작가는 1970년 파리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팔레조의 낡은 마구간에 아틀리에와 숙소를 마련한다. 작업실에 머물며 작품에 정진하던 중 아내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 여사를 만난다. (그는 마르틴 질롱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다. 첫째 김시몽은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둘째 김오안은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어렵게 생활하던 시절, 작가는 캔버스를 재활용하기 위해 뒷면에 물을 뿌려 물감이 떨어지기 쉽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화폭에 맺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영롱한 빛을 발하는 ‘물방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작품의 주요 모티프로 삼기 시작한다.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살롱전 《살롱 드 메》에서 처음으로 ‘물방울 회화’ <밤의 행사(Event of Night)>(1972)를 공개한다. 1973년 놀 인터내셔널 프랑스에서 물방울 회화만을 모은 첫 프랑스 개인전을 개최한다. 김창열은 이후 50년 넘게 물방울이라는 소재에 천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물방울 회화를 창조한다. 프랑스에서 먼저 이름을 알린 그는 1976년 갤러리현대 개인전을 통해 한국에 처음 물방울 회화를 선보였고, 미술계 안팎으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며 작가의 인지도도 크게 오른다.

초기 물방울 회화에서 물방울은 전쟁으로 인한 작가의 상실감과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정화와 치유의 수단이었다. 생전 작가는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로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이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 들어, 작가는 캔버스가 아닌 거친 마대를 사용해 표면의 즉물성(卽物性)을 강조하고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날것의 바탕과 그려진 물방울의 이질감이 강조되며 실제 물방울의 물질성은 사라지는 효과를 얻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마대 자체를 여백으로 남긴 이전 작품과 달리 한자의 획이나 색점, 색면 등을 연상시키는 <해체> 연작을 통해 보다 직접적 구체적인 동양의 정서를 끌어들인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자를 물방울 회화에 도입한 <회귀(Recurrence)> 연작을 본격적으로 그리면서, 천자문과 도덕경을 통해 동양 철학의 핵심적 사상을 담아내려는 의지를 더욱 강조한다.

1990년대에 만발한 <회귀> 연작은, “문자와 이미지의 대비를 넘어 음양의 철리와 같은 동양적 원천에로의 회귀”(이일)이자, “글자라는 기억의 장치가 물방울이라는 곧 사라져버릴 형상과의 미묘한 만남”(오광수)이며, “한문이라는 시각적 경험과 지성의 전통을, 현대적 기록법의 형태적 변수들로 변모”(필리프 시룰니크)한 작품으로 호평을 받는다.

<회귀> 연작에서 작가는 먹으로 한지에 문자를 겹쳐 빼곡하게 쓰거나 캔버스에 인쇄체로 또박또박 천자문을 쓰고, 그것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무리 지어 있도록 화면에 그린다. 천자문과 도덕경 등의 글자들은 화면에 구성적인 요체로 자리 잡아 이제는 잊힌 역사적 흔적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는 현실의 물방울과 어우러져 시공을 초월한 조화로움을 드러낸다. 1990년대 작가는 돌과 유리, 모래, 무쇠, 나무, 물 등을 재료로 물방울 회화를 설치미술로 확장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노랑, 파랑, 빨강 등 캔버스에 다양한 색상을 도입하며 또 다른 도약을 시도한다.

생전 김창열은 국립현대미술관(1993), 선재현대미술관(1994), 드라기낭미술관(1997), 사마모토젠조미술관(1998), 쥬드폼므미술관(2004), 중국국가박물관(2005), 부산시립미술관(2009), 국립대만미술관(2012), 광주시립미술관(2014)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60여 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퐁피두센터, 일본 도쿄국립미술관, 보스턴현대미술관, 독일 보훔미술관 및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리움미술관 등 주요 미술 기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 그는 양국의 문화교류 저변 확대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1996년에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201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2017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한다. 2013년 대표작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했으며, 이를 계기로 2016년 제주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한다. 서울 평창동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2019년까지 신작을 발표했다. 2020년 갤러리현대에서 물방울과 함께 문자의 도입과 전개 양상에 초점을 맞춰 기획한 《The Path(더 패스)》전이 생전 마지막 개인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