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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유튜브

[백남준&시간론] <13강> 어떻게 시간의 주인으로 사나?

<2020 유종의 미> [백남준&시간론] <13> 어떻게 시간의 주인으로 사나
백남준의 5차원 예술 5차원 사기론: 시간도 역시 불가능한 되감기를 가능하다는 사기론

시간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취하는 것이다.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길이다. 일종의 황홀경이다. 오케스트라의 표정을 보라 완전히 도취되어 있다. 순간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다. 혹은 시간 예술이란 시간을 시각화해서 영구화시키는 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경전 

https://www.youtube.com/watch?v=OVZNaOGIbrg&t=2802s 

시간의 개념이 바뀌는 혁명▲ 백남준 I '스위스 시계(Swiss Clock)' 1채널 비디오 설치, 시계, 3개의 모니터, 비디오카메라 183×305×305cm 1988. 이 시계는 커다란 추가 달린 골동품 벽걸이로 만든 것으로 '시간의 물질화'를 시도한 작품이다.백남준은 비디오테이프로 모든 걸 녹음하고 보존하면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이로써 인간이 신에게 반은 도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 면에서 비디오아트는 기존의 시간개념을 바뀌는 혁명이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구별하고 인간이 시간을 조절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린다.백남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 시간개념을 '인도의 시간, 그리스의 시간, 성서의 시간, 뉴턴의 시간, 베르그송의 시간, 깁스의 시간, 후설의 시간, 하이데거의 시간, 사르트르의 시간, 케이지의 시간, 위너의 시간, 슈톡하우젠의 시간' 순으로 정리했다.

백남준 움직이는 시간

"당신이 나의 TV를 보게 된다면 제발 30분 이상 지켜보기 바란다. 눈을 4분의 3 감아라" -백남준
백남준 어굿난 시간을 말하다. 백남준은 현실을 절실하게 느끼지도 그렇다고 과거와 미래로 도망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지간 여행을 권유한다. -김남수 전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 연구소 연구원

내 작품은 그림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시간예술입니다. (1962년 롤프 예를링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1962년) 백남준은 시간을 잘게 나누는 방식의 예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을 흐름 그것을 통채로 강렬하게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시간을 자기마음대로 편집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간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삶의 공기를 낯설게 호흡하는 거기에 최대의 쾌락과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다.

"우리가 비디오로 작업하기 전에는 색이 시간의 기능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백남준(임의접속 정보) 1980년 //우리는 색동옷을 때때옷이라고 한다. 때때옷이란 시간옷이다. 시간옷을 색동옷이다. 고로 시간은 색깔이다. 백남준 생각이다. 색동옷 다시 말해 풍부한 시간으로 가득찬 때때옷은 시간으로 넘친다.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빛의 음악적 파동을 통해서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낯선 시간대로 미꾸러지는 도구다. 일종의 타임머신이다. -김남수 

"가장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삼령역(PSI) 즉 정신의 힘이다." -백남준. 신화적 태고의 시간과 근대적 테크노 세계다 가 하나로 합쳐지는 결정적 순간이다. 태고와 현대를 연결하고 신화와 하이테크 화해시키고 동서양 대등해지는 세상의 시간이 바로 백남준의 세계가 잘 보인다(김남수). "알프스 산에 가서 삼국지나 읽어야겠소" -백남준 

시간의 독재적인 흐름으로부터 나와 자유와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두려움과 열등의식이 없는 비대칭구조 관점에서 세계가 평등하다는 큰 그림으로 21세기 지구촌 그림을 기리다.
[주관적 시간] 하루 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 시간의 대한 주관적 관점도 있다.(하루=만년) 
산업사회에서 시간은 돈이다. 정보사회에서 시간은 무엇인가 이것을 묻지 않을 수 없죠. 시간: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도구, 창조적 재미를 만드는 도구(?) 찰나=영원(나의 생각)

백남준 월요강좌 (1강부터 12강까지) 자료집(겨울호 검토용) 384쪽(사진 빼고도 사진을 넣으면 500쪽) 백해영갤러리 텍스트 아카이브 추가. 백해영갤러리 기획 백남준과 친구들 엮음 지난 토요일 너무 늦게 가 재본 못함 새해 첫 강좌 때 간단한? 그리고 내년에 13강부터 24강까지 자료집(봄호) 출간 예정

백해영 갤러리

<<백남준 음악가에 가깝다 미술도 음악이어야>>
'백남준은 작곡가에 가깝다' [백남준] 미술가보다는 작곡가에 더 가깝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Arnold Schönberg 硏究)』이고요 샬럿 무어먼 한 모든 퍼포먼스 액션 뮤직이라고 하잖아요. 백남준은 이런 공연을 다 작곡으로 보다. '음악계의 브리태니커'로 통하는 영국 '그로브 음악 대사전'에 한국 음악인 29명이 올랐다. ... 이 사전은 모두 다섯차례 개정을 통해 1980년 전 20권 체제를 갖춘 음악사전의 대명사. ... 그로브'에 실린 한국 음악인은 작곡가 윤이상, 김순남, 얼킴, 강석희 ... 아침이슬'의 가수 김민기, 그리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이름도 올랐다.

연말 맞아 2020년 12월 28일 오늘은 특별히 이만열 교수가 오셨다

이만열 교수와 함께

백해영 갤러리 백남준 강좌 13번째 <백남준과 시간론> 우연찮게 이만열 교수가 마침 이곳을 방문하셔서 간단히 그의 근황과 소개를 들어보다. "미국정치는 여야를 떠나서 완전히 마비되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미국 정치 너무 걱정이 많이 된다고. 백남준에 대해서는 기술과 예술의 선순환계적인 제3의 아트를 시도했다고 보다. 이만열 교수, 2011년 박지원 한문 고전소설 12편 영어로 번역하다. 2020년 연말 맞아 백해영 갤러리에 오시다. 이만열 교수 국적이 한국과 미국인데 한국인으로 최초 미국 대선에 나갔다고 그의 말에 의하면 민주당과 공화당 할 것 없이 부정부패와 사기 투성이 무능한 미국정치에 대한 경고장 보내다.

다음 강좌 미래 소개 <14강> [백남준&사상론] I  <15강> [백남준&은하계]  I <16강> [백남준&사이버(네틱스)]  I  <17강> [백남준&사기론] 등등

[1] 14강 예고 그의 작품에는 선불교, 샤머니즘, 주역, 노장사상, 음양(오행) 사상, 천지인 사상 등 아시아의 종교적 요소가 용해되어 있으며 맑시즘, 노마디즘, 페미니즘, 에로티시즘, 프로이트주의, 생태환경보호주의, 반전평화사상, 동서 평등과 우애(형제애) 사상, 몽골 코드, 유라시아 코드 등 그리고 종교를 통한 깨달음을 자신의 예술에 반영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며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미디어의 장난을 교란시키면서 언론의 허위를 꿰뚫는 현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조선: 맹자를 중시한 성리학 지배, 왕의 힘이 상대적으로 견제되다. 일본: 역성혁명을 중시하는 맹자 자체를 아예 수입 거부

[2] 백남준을 공부하면 서양미술사, 서양문명사, 동양문화사, 중국사상사, 동양철학, 선불교 등을 저절로 배우게 된다. 칭기즈칸과 마르코 폴로 등등 인물을 통해서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특히 서양현대미술가들 선구자들이 항상 등장한다. 그만큼 백남준 예술의 철학과 사상계는 높고 깊고 넓다. 한국역사에서 창조적 인물사는 물론이고 한국역사의 중요문서인 삼국유사마저 거꾸로 백남준을 통해서 다시 배운다. 백남준의 핵심어인 노스탤지어와 피드백이라는 것이 뭔지 깨닫게 된다.

[3] 그들은 서구의 지성인 중에서 지성인 당대 최고의 지식과 정보를 갖춘 사람들이다. 서구의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독일의 하버마스 등이 있다.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하버마스는 지금 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철학이 공론장 소통론이다. 백남준의 소통과 참여 철학과 통한다. 요즘 상당히 대중적인 철학자 정신분석가인 지젝도 여기에 낀다. 발터 벤야민이 생존하고, 백남준이 살아있어 두 사람이 토론이 붙었다면 재미있었을 것 같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다 보들레르의 제자라는 점이다.

[4] 백남준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인 게 사실 지식인의 허영이기도 하지만 10대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맑시즘의 측면도 있고, 프로이트 무의식과 리비도 그리고 에로티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동양의 노장사상. 동양의 우주 통계학인 주역 등 몽골 코드인 샤머니즘까지 다양한 층위가 작동한다.
[5] 백남준 서구 사상계를 평정했지만 그에게 가장 힘든 상대자는 맑시스트였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5-1) 그들은 우선 무소유주의자(사유재산 부정) 최고의 지성이면서 최고로 가난한 사람이라 가장 무섭다. 5-2) 그들은 무신론자이다. 서구에서 나름 신과 대결하는 철저한 사람들이다 5-3) 서구에서 최고의 지식인들."

[5] 김훈: 당신의 작품들은 공간성 안에 시간성을 끌어들이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공간 안에 시간을 끌어들일 때 얻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백남준: 저는 비디오 예술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한 군데로 비벼서 엮어내려는 것입니다. 비디오라는 미디엄을 통하면 이것이 가능해집니다. 시간과 공간의 구획을 허물고 그 두 가지 범주를 엮어 놓을 때 새로운 자유의 마당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계와 기계적 장치들은 인간 쪽으로 가까워져서 인간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1981년 한국방문

[1] <야만시대와 문명시대의 구분을 없애 버리다> - 선사시대를 정말 제대로 공부하고나서(?) 20세기 최고의 지성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선사시대를 정말 제대로 공부하고 나서 브라질 아마존에 가서 원시림을 경험하고 나서 야만시대와 문명시대의 구분을 없애 버리다. 선사시대가 21세기보다 더 선진적이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1981년 한국에 왔을 때 사진

[2] 그들은 서구의 지성인 중에서 지성인 당대 최고의 지식과 정보를 갖춘 사람들이다. 서구의 맑시스트의 가장 대표적 인물은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독일의 하버마스 등이 있다.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하버마스는 지금 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철학이 공론장 소통론이다. 백남준의 소통과 참여 철학과 통한다. 요즘 상당히 대중적인 철학자 정신분석가인 지젝도 여기에 낀다. 맑시스트인 발터 벤야민이 생존해 백남준이 살아있었을 때 토론이 붙었다면 재미있었을 것 같다. 두 사람을 공통점이 있다. 다 보들레르의 제자다.
<<2020년 연말을 맞아 약간의 일상이야기 추가>>
<삶이야기 하나> <전남 신안군 '태평염전' 여의도 면적의 2배다> 전남 신안군의 보물섬 ‘증도’는 옛날부터 물이 귀한 곳이라 하여 시리(시루) 섬으로 불리었고, 전증도와 후증도가 하나의 섬으로 합해지면서 증도라 부르게 되었으며,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섬으로 2007년 12월 1일자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

태평염전 여의도 2배 크기

신안 증도 소금밭 낙조전망대

신안 증도 소금밭 낙조전망대

<증도> 들어서면 소금 생산지 태평염전을 마주하게 되는데 1953년 전증도와 후증도를 막아 형성되었으며, 국내 단일 염전으로 최대 규모(140만평), 한해 1만 5천 톤의 천일소금을 생산, 예전의 석조 소금창고를 리모델링하여 <소금 박물관>으로 활용 <태평염전>과 더불어 근대문화 유산으로 등록. 문의 061) 240-8355(신안군청 문화관광과) 061) 275-0370(태평염전)

지중해 분위기다 여기는 베드로의 집 

그리고 근처에 바다 맞닿은 12사도 예배당…신안 ‘섬티아고 순례길’ 노둣길로 연결된 증도 병풍리 4개 섬에…하나하나가 그림 같은 작품 신안 증도면 병풍리 대기점도 선착장에 세워진 ‘베드로의 집’. 짙푸른 지붕과 하얀 외벽이 그리스 지중해 감성을 자극한다. 예배당 옆 작은 종탑과 화장실도 눈부시다.

태평염전 김상일 대표이사와 백해영 갤러리 관장

[김상일 태평염전 대표이사 누구?] 국제그룹 파리주재 국제상사 무역회사 영업사원, 영화업· 골프장 사장 등 경력 다양. 1974년 김 대표는 그 당시 국내 굴지기업이였던 국제그룹 소속의 국제상사에 입사해 회장실 직속 기획팀에 배치. 열정으로 업무에 임했던 그는 얼마 되지 않아 능력을 인정받았고, 4년 후 파리지사로 자리를 옮겨 해외 마케팅 부문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과거를 회상하면 파리에서의 생활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6년 간 파리지사에 머물면서 유럽인들의 여유를 배웠고 그 곳에서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항상 어디를 가든 제가 즐겁게 일하는 방법을 찾다보니 파리의 생활도 좋았던 기억만 남습니다”

파리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을 뒤로하고 1984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소위 ‘잘 나가는 브랜드’로 불리던 ‘프로스펙스’의 영업부장직을 맡았다. ‘프로스펙스’는 80년대 중반만 해도 가장 잘 나가는 스포츠 브랜드. 당시 그룹 내 부장급 인사 모두가 원하는 자리일 정도로 좋은 직위 기억합니다. 하지만 1년 후 그룹이 해체됐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오래 있진 못했습니다”

[백남준의 '춘' 이야기와 나의 유치원이야기] 지금이 성탄절 주간이라 195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가족사진 을 소개합니다.  내가 어려서 마산에서 살았는데 내가 음악에 좀 예민했던 것은 축음기 victor(일본제) 있었기 때문이다.

1959년 12월 24일 마산에서 가족사진

백남준 어려서 유치원 동창생 이경희와 숨바꼭질하다가 그녀에게 '춘'을 느꼈다고 한다. 굉장히 조속했네요. 나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다. 내가 집에 와서 한 유치원 여자아이 옆에 내 자리를 배치해 달라고 유치원 선생에게 압력을 가하라고 떼를 썼다는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난 기억이 안 나지만... 아래는 유치원 졸업식 날 집에 와 찍은 사진. 동백으로 만든 꽃다발이네요. 백남준 어려서 유치원 동창생 이경희와 숨바꼭질하면서 그녀에게 '춘'을 느꼈다고 하는데 엄마 말에 의하면 나도 유치원 다닐 때 한 유치원 여자아이 옆에 내 자리를 배치해 달라고 집에 와서 떼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1959년 마산에서 유치원 졸업식 후 집에서 기념 사진

[백남준은 1949년 처음 비행기 타고, 나는 1959년 처음 비행기 타다] [1] 1945-1948년 해방공간 좌우대립 심했다. 고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남준은 경기보통학교 시절에 우익학생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얼굴에 피가 낭자했다. 그런 모습으로 하교한 일을 자주 보자 그를 계기로, 백남준의 아버지 백낙승, 그와 함께 백남준 1949년 홍콩로이든 스쿨으로 전학(백남준 1949년 비행기 타다 여권번호 7번)

[2] 나는 1959년 김해 비행기장에서 처음 비행기를 타다. 왜? 당시 유래가 없는 태풍 사라호로 모든 교통수단이 끊어지다. 그래서 나와 부친이 마산에서 서울 올라가는데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팔을 좀 다쳤다. 그리고 1959년 27살 백남준, 독일에서 실험음악에 깊이 경도. 윤이상 등도 만나다

1959년김해공항

아래사진 1959년 27살 백남준, 그때 백남준의 모습 독일에서 실험 음악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윤이상 등도 만나면서 친분을 나누었군요.

1959년 백남준과의 그의 동료들

[백남준 첫 사랑과 나의 첫 사랑] 백남준의 첫 사랑은 일본동경대 유학시절 프랑스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면 나의 첫사랑은 연상의 여인 이었다.

1968년

나의 첫사랑 연상의 여인, 오른쪽. 발레리나(연습과정에서 코피를 많이 흘렸다는 말이 기억난다. 밤에 화장을 지울 때 가장 아름다웠다. 화장품이 PONY였나) 인상이 좀 예리. 나와 나이 차 많았는데 나에게 존댓말을 쓰다. KBS 탤런트 1기생이기도 했다. 왠지 병색이 있어 보인다. 1968년 성탄절 전야에 같이 폭설이 내리는 날 남산과 명동을 산책한 일이 기억난다. 백남준 첫 사랑이야기는 앞에서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백남준이 사랑한 시인 정지용 그리고 나의 시 습작 40년] 나는 40년간 시를 쓴 무명인사다. 그런데 지금도 제대로 된 시가 없다. 군대 늦게 가 1980년 01월 10일 제대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시를 써봤다. 

[1] 그런데 제대로 된 시가 한 편 없네요!! ㅎㅎ 시를 쓰게 된 동기는 1970년 나에게 너무나 큰 존재였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 그리고 10년간 고민 했다. 인간의 죽음과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삶의 의미는 뭔가? 일종의 바니타스(vanitas)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꼭 10년간의 물음 끝에 답이 나왔다 "고통이 구원이다" 이것은 사실 삶에 대한 내 나름의 수준 높은 긍정이었던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과 비슷한 생각이다.
[2] 그때부터 시 쓰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2500년 전 부처가 이미 했던 것. 부처가 내놓은 대안은 바로 고집멸도(苦集滅道 Suffering, the origin of suffering, and the way to release from suffering 고난이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지름길)다. 쉽게 말하면 고통이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설인데 내가 생각한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니까 내 고민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3] 80년대 김수영 시와 수필, 너무 재미있고 스릴이 넘쳐 아껴서 읽었다. 한꺼번에 다 읽어버리면 싱거울 것 같아서. 백낙청 선생 출판협회강당에서 김수영 시 강연할 때도 들은 기억 난다. 90년대 였나. 하여간 그리고 그와는 성격이 매우 다른 천진난만한 인품을 지닌 천상병을 즐겨 읽었다.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고. 그의 목소리 얼마나 큰지 천둥소리 같았다. 두 사람은 천생 시인. 기존언어의 틀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랜덤 액세스 시인들. 그래서 천재들이었다. 암흑기 같은 80년대, 그들 때문에 잘 넘겼다. 나를 버티게 하는 거목들

백남준의 '춘' 이야기가 담긴 백남준의 드로잉 편지 이경희 엮음.

1996년 백남준 작품 

[1] 위 작품은 1996년 백남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후 생명감 넘치는 태초의 원초적 성의 세계와 세계보편주의자인 그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회고하면서 그런 노스탤지어 정서를 작품화 한 것이다.

지난 번 주제 한국적인 백남준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다"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밤 35년 만에 귀향했다. 6월 30일 출국하게 된다. 그때 배웅하러 나간 이경희 여사와 유치원친구 박한수(왼쪽)씨 그리고 백남준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각자의 궤도를 돌다 1984년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습니다. '유치원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2] 삶과 죽음 그래서 그가 어려서 자란 큰대문집이 그의 작품에 드러난다. 이런 백남준 감각세계를 가장 잘 대변한 시인을 바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다. 그는 이런 시를 토로하다. "수천 년 전에 생의 도둑에게 빼앗겼던 우리들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듯이 둘을 옷을 벗고 키스했다. 뒤엉킨 두 알몸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하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다. 둘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3] <백남준의 드로잉 편지> 속에 나오는 백남준이 좋아한 정지용 시 '난초'
난초 잎은 차라리 수묵 색

난초 잎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 잎은 한밤에 여는 다문 입술이 있다
난초잎은 별빛에 눈떴다 돌아눕다
난초잎은 드러난 팔구비를 어쩌지 못한다
난초 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 잎은 칩다

백남준 루트 3.5 1996년작

[4] 백남준은 시간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것이 바로 시각예술가의 권능으로 본 것이 아닌가. 그게 바로 <루트 3.5>다. 즉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거기에 0.5가 들어간 시간인가. 

글쎄올시다 1996

[5] 백남준 과거 현재 미래를 넘어서는 시간, 즉 메타시간을 "글쎄올시다(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있다)". 혹은 "밥 먹자" "기가 막히다"라는 말로 추상화하다. 백남준의 큰 대문 집 보인다.

<<'성의 예술화'에서 가장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만이 최고 예술가(I)>> 

백남준 Kalden TV Paik 96 

[6] 위는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후 이경희 여사에게 보낸 작품 중 하나 Kalden TV Paik 96 백남준은 60년대 이미 마릴린 먼로 사진을 활용한 팝아트 풍의 이런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성의 예술화에서 가장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만이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뒤샹의 마지막 작품을 그걸 획득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반쯤 정도 성공했다. 백남준은 그것을 온전하게 완성하려고 한 것인가.
[7] 위 작품 백남준이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난 후 이경희 여사에게 보낸 작품 중 일부.
제목 Kalden TV Paik 96 백남준은 60년대 이미 마릴린 먼로 사진을 활용한 팝아트 풍의 이런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성의 예술화에서 가장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만이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뒤샹의 마지막 작품을 그걸 획득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반쯤 정도 성공했다. 백남준은 그것을 온전하게 완성하려고 한 것인가.

[8] "사실 돌이켜보면 백남준 작가만큼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 가득한 작업을 강렬하게 추구한 작가도 드물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비롯하여 많은 퍼포먼스가 이런 경향을 여과 없이 관철하고 있다" -백남준 연구가 전문가 김남수(전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
[리뷰] "백남준이라고 하는 한국인" 자신의 정체성이 확실. 아래는 황병기 선생의 글.

[6] 1977년 도쿠멘타 카셀에서 백남준의 TV 정원을 보고 감동을 받고 그를 평생 지원한 일본 갤러리스트 와타리 여사, 그녀가 소유한 와타리움 미술관, 이를 설계한 사람이 바로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이군요. '교보문고'도 이 건축가의 작품이죠. 이 미술관에서 백남준 전시가 여러 번 열렸다.

<리뷰> 백남준은 로봇 루소를 만들면서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자 사회계략론자인 룻소보다 2300년 전 사람 <노자>를 생각하다.

백남준의 판화를 고급스럽게 가구화하다

[1] 백남준 I '전자요정_진화·혁명·결의' 석판화 1989. 8명의 혁명가 왼쪽부터 '장 폴 마라', '루소', '올랭프 드 구주', '당통', '디드로', '자크 루이 다비드', '로베스피에르', '볼테르' <백남준 에디션>에서 전시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당통 1989 전자조각이라고도 하는 전자로봇

[2] 백남준 I '전자요정_진화·혁명·결의' 중 당통 백남준 이 작품 하면서 서양사의 문제를 지적하다. 당통 아무리 혁명이라고 하지만 폭력을 써도 되느냐고 호통을 치다. 프랑스대혁명은 서양사의 최고 사건으로 서양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지금의 세계 민주주의는 프랑스 혁명에 빚지고 있다. 그럼에도 백남준은 이를 호통치다. 우리나라는 2016-2017년 촛불로 백남준이 알려준 비폭력 시위에 성공하다.

<<백남준, 찬양하는 독일과 미국의 미술사가, 철학자들>>

[1] 독일과 미국의 백남준 찬미자 독일의 헤르조겐라트 Prof. Dr. Wulf Herzogenrath 

[2] 그리고 미국의 핸하르트(미국스미소니언 국립미술관 시니어 큐레이터)또 이런 말도 했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3]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문화)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백남준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가장 징표적 인물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비디오아트는 시간개념을 바꾸는 혁명이자 시공간의 궁극적 경계선을 탐색하는 유일한 예술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예일대교수

[3-1] 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결국 뒤죽박죽이 특징인데, 백남준은 가장 원시적인 주술적 예술과 첨단 기술 테크놀로지 예술의 뒤죽박죽이기에. 예일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 사르트르 연구로 박사. 하버드 대학, 샌디에고의 캘리포니아 및 예일 대학 등을 거쳐 현재 산타크루즈의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 미국의 현존하는 탁월한 비평가. 『사르트르』 『언어의 감옥』 『침략의 우화』 『정치의 무의식』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등 저서
[3-2] 그는 장 폴 사르트트 연구로 예일대에서 박사를 받다. 미국의 발터 벤야민. 2012 년, 현대 언어 협회로부터 평생 학술 공로상을 받다. 60년대 하바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그는 György Lukács, Ernst Bloch, Theodor Adorno, Walter Benjamin, Herbert Marcuse, Louis Althusser 및 Jean-Paul Sartre 와 같은 사상가들에 관점에서 학문을 접근하다. Son analyse du postmodernisme tente de le considérer dans son contexte historique. Jameson rejette donc explicitement toute opposition moral

[4] <국작가들이 행복한 이유는 위에서 보듯 백남준이라는 큰 빽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백남준이 한국작가들이 세계로 뻗어나갈 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별자리는 북두칠성이다. 한국의 작가(예술가)들 행복하다. 그가 우리에게 세계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되고 본보기가 된다. 우리가 기댈 큰 (배경 빽)이 있기에 마음이 든든하다. 이제 백남준도 넘어서는 작가가 나와야 한다.

<<백남준 56-57-58-59년대 돌아가서>> 
[1] 백남준 1956년 현악 4중주 작곡, <음악에 있어서 바우하우스, 음악예술(동경 일본음악잡지)>에서 논문 발표. 1958년 <20.5세기의 음악> '자유신문(백남준 형 백남일이 발행한 신문)'논문 기고,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와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 '자유신문(서울)' 논문 기고 

[2] 1959년 해트닝 <존 케이지 오마주전> 11월 13일 뒤셀도르프 22갤러리에서
백남준은 20대 후반 이런 불경에 심취했다. 위 장면은 백남준이 '오르기날레'에서 선어록을 읽는 모습이다. 그는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모든 가시적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그걸 응시해야하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백남준은 특히 '벽암록'(18번)에 나오는 '무봉탑'(無縫塔)을 좋아했다

[3] <백남준에게 피아노를 부수는 것은 일종의 수행이자 명상이었다. 그런 행위를 하다가 인터넷 발상을 한 것이다.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일종의 단[斷]의 철학(깨달음을 통해 기존의 모든 가치를 잘라내는 행위)이다> 다음 강좌 예습이죠.
[4] "백남준은 샤머니즘 요소가 강했고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것에도 심취했죠. 피아노를 부수는 행위가 그에게는 어떻게 보면 수행이나 명상이었을 거예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급진적 사고로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샀죠." 시게코 여사와 공동 인터뷰 중

[참고] 대중방송 관심 왜냐하면 왜곡 막기>[백남준 미디어에 관심은 많아 대중 공영 TV에도 적극 참여] 
[3] 비디오아트 국립방송 창시 1978년, 우리도 라우센버그와 똑같은 경험을 했는데, 6년동안 우리는 TV실험실에서 작업했다. 작업결과는 WNET 채널13을 통해 뉴욕 대도시 전역에 방송되었고, 10만명 정도 시청했다. 얼마 후 작업결과는 공영TV로 중계되면서 나라 전체에 방송되었고, 40억 시청자를 상대해야 했다. 나는 록펠러재단(하워드 클라인)과 러셀 코너와 함께, 비디오아트 국립방송의 창시자가 되었다. 국립방송은 적은 예산으로 운영할 수 있었지만, 우리 예산의 20배가 넘는 전문 광고업자를 고용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프로그램은 첫 방송 시리즈 이후 잊힐 수밖에 없었다.

[2021년, 보이스100주년] 2032년, 백남준 100주년 
https://www.youtube.com/watch?v=bikLjgeGxBw&t=87s 

[1] [백남준과 보이스 유라시아 작가이고 독일 문화 대통령 보이스] 내년 탄생 100주년을 맞는 요셉 보이스, 내년 독일은 보이스로 시작해서 보이스로 해가 저물 예정이다. 그는 사회적 조각의 창시자다. 백남준의 절친이면서 그의 선의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순교자 같은 삶을 살다. 독일을 세계미술로 끌어올리다. 그 공로의 60% 백남준 덕이다.

[2] Beuys 2021. 100 years of joseph beuys« is a project of the ministry of culture and science of the state of north rhine-westphalia in collaboration with the heinrich-heine-universität düsseldorf. the project is based in the department of art history.  Joseph beuys was a draughtsman, sculptor, action and installation artist, teacher, politician and activist. along with marcel duchamp, john cage and andy warhol he is widely considered one of the most significant artists of the 20th century. he fundamentally altered the nature, materiality, language, boundaries and tasks of art. in his practice–universal in its scope–beuys explored questions pertaining to humanism, social philosophy and anthropology.

[3] His experiences as a soldier in world war ii had a profound influence on the evolution of his practice, which sought to bring about a radical democratisation of society. from 1964 onwards he no longer distinguished between his biography and his artwork, having come to view his life as material to be sculpted. this model became the point of departure for his theory of social sculpture, which culminated in 1982 with beuys’s documenta contribution »7000 oaks«. now as then beuys exerts a palpable influence upon artistic and political discourse.

파스칼

<<서양에도 백남준 같은 비빔밥 사상가(?) 바로 파스칼>>
[1] 이들의 통합적 사고 유사하다.[백남준과 비슷한 유럽인 발굴] <17세기 파스칼, 시적이고 영적인 ‘섬세한 정신(esprit de finesse)’과 과학적인 ‘기하학적인 정신(esprit de géométrie)’을 하나로 통합했다. 서양에서는 백남준과 비슷하게 '통합형 사유방식(비빔밥)' 창안자> 그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천재였다. 그의 부친이 회계사 도움 위해 세계 최초로 계산기 발명하다.

<백남준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목숨보다 더한 그의 예술적 파트너 샬럿 무어먼(암으로 먼저 사망 줄리아드 출신의 첼로연주자) 추모음악제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

2000년 백남준 샬럿 무어먼 추모공연 구겐하임미술관

[1] 그는 1996년 뇌졸중으로 인해 그 이후 왼손을 못 쓰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피아노를 연주한 것이다> 백남준은 사실 미술가가 아니다 그의 모든 작품명은 음악에서 쓰는 협주곡 연주곡 피아노 첼로 이런 단어가 들어간다. 그는 사실 전자미술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든 작곡가다. 그가 TV 비디오아트 천재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음악적 리듬감 때문이다 비디오아트 편집할 때 화면에 오케스트라 몸짓이 들어간다. 그런 요소가 없다면 백남준 작품이 저렇게 유명해질 수 없다. 영국음악사전에는 백남준은 미술가 아니고 작곡가로 되어 있다 아니 백남준이 대단한 것은 미술과 음악의 경계를 없앴다는 점이다 백남준에게는 TV가 피아노였다 그는 피아노솜씨가 대단했죠

<2000년 백남준 샬럿 무어먼 추모공연 구겐하임미술관> [박영덕 갤러리] 갤러리 방문해보기

<<성의 예술화에서 가장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만이 최고의 예술가(II)>>

[1] 최고의 예술은 장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유혹'이다.

백남준은 유혹의 유혹 그 극치점을 예술로 표현할 줄 아는 세계 최초의 예술가다. 뒤샹이 그걸 해 보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결국 여자가 되려고 했지만 반 여자로 끝났다. 그러나 백남준은 여자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엄마가 되기도 했다

<<12강좌 중 일부 리뷰>>
[도울은 백남준을 가장 한국적인 작가로 봤다 왜?]
[1]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태어난 백남준, 다시 말해서 그는 전통적 인간으로서 지니는 모든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헌다.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에 개명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인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하는 고전인이 되었던 것이다
[2]그의 말씨와 행동은 1949년에 멈쳐버린(서울 양반 말투와 행동거지) 다시 말해서 백남준이라는 존재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근대적 번용 과정에서 축적된 새로운 문화 측면의 가장 밝은 측면 19세기말 동학으로부터 또한 19세기 여명기중엽 최한기, 이제마로부터 시작해 20세기에 많은 개화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각성된 문화 여명기 폭발적 창조성과 그 맥락, 그 패기, 그 에너지 서구의 가장 아방가르드한 흐름과 일치할 수 있었던 보편사적 사실에서 온 것이다. 이런 도올의 좀 산만한 비평에 대해서 아래에 백남준은 아주 명쾌한 대답을 남긴다. 가장 한국적 가장 세계적 그러니까 가장 한국적 어렵다 모른다.
[3] [백남준&코리아] 백남준 가장 세계적? 가장 세기적? 가장 한국적? 작가 가장 한국을 잘 알아야 가장 세계를 잘 알 수 있고 가장 세계를 잘 알아야 가장 한국을 잘 알수 있다. 

<탈영토제국주, 리뷰>
[1] "소위 세계 일류(탈영토제국주의)가 되면 조국이고 뭐고 없다고!" -1994년 백남준 인터뷰 중에서. [평] 어느 전문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면 그게 바로 탈영토제국주의를 달성하는 거야. 한국은 땅이 작아도 정보 지식 수집능력이 탁월하고 공부 머리가 있기 때문에 21세기는 이것을 할 수 있어!!
[2] <기차 타고 목포에서 베를린 가자> 대세. 실속 있는 선택. 미국만 믿다가 큰일! <기차 타고 유럽 가자!> 이게 대세다. 내년에 갑자기 통일이 올 수도 있다. 1989년 8월 나는 독일 뮌스터에 있었는데 그해 10월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무너졌다. 전혀 예상 못한 일이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남북 대통령 다 통일 되었고 평양과 서울 남북 시민들 다 통일 다만 미국과 일본의 방해만 잘 막아내면 된다

<2
0세기 '텍스트' 시대에서 21세기 '이미지' 시대로>
[1] <20세기 '텍스트' 시대에서 21세기 '이미지' 시대로 변화를 초래하다> 백남준 이미지 시대 치고 나가다. 20세기 문사철 시대:언어와 숫자 성실한 노력, 법칙과 통계 언어와 숫자 중시 개인경쟁 중시. 21세기 시서화 시대:노래와 상상 창조적 발상, 경험과 통찰 감각적 세계 중시 사회협력 중시. 
[2] <한국작가들이 행복한 이유는 백남준이라는 큰 빽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백남준이 한국작가들이 세계로 뻗어나갈 길을 터놓았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별자리는 북두칠성이다. 한국의 작가(예술가)들 행복하다. 그가 우리에게 세계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되고 본보기가 된다. 우리가 기댈 큰 (백)이 있기에 마음이 든든하다. 이제 백남준도 넘어서는 작가가 나와야.
[3] 백남준 덕분에 SNS에서 모두가 나름의 주인공이 되다. 영화배우가 되고, 예술가가 되고, 시사평론가가 되고, 대중 지성인이 되고, 디자이너가 되고 뭐든지 된다. 제가 오늘 여기서 동영상을 찍은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 [4] 백남준의 키워드: 소통과 참여 왜 평화와 공존의 필수사항, 疏외를 극복하는 것이 疏통인데, 이것은 공감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한국 1990년 세계화> 92년 백남준 회갑 전시 93년 국립 휘트니 순회전 95년 광주비엔날레 
[1] 1993년 백남준 한국 동네미술 세계미술로 끌어올리다. 휘트니 미술관 직수입 개인 기부금 그리고 1995년 백남준 제1회 광주비엔날레 그 어느나라에서도 살 수 없는 뉴미디어 전시를 선 보인다.
백남준의 인맥을 총 동원하여 전 세계 최고의 인터넷 아티스트 모야 광주에서 전시하다. 큐레이터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뉴미이어 이론가 신시아 굿맨(Cynthia Goodman )을 초대하다. 그녀는 이분야 저서를 많이 내다.

신시아 굿맨(Cynthia Goodman)과 백남준 1995년 

[2] <가상현실아트의 창시자 스콧 피셔(Scott Fisher) 1995년 백남준 초청으로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인포아트에 광주에 왔었다> “미래에는 맨 눈으로 VR(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VR 개척자 스콧 피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교수는 26일 서울 문화창조벤처단지에서 열린 ‘VR·AR(증강현실) 인사이트’에서 “지금 콘택트렌즈형 VR 기기가 연구되고 있고, 레이저를 안구에 쏴서 볼 수 있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스콧 피셔 교수는 1985년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VR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HMD)와 3D 오디오 등을 개발했다.

스콧 피셔(Scott Fisher)

[3] <가상현실아트의 창시자 스콧 피셔(Scott Fisher) 1995년 백남준 초청으로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인포아트에 광주에 왔었다> “미래에는 맨 눈으로 VR(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VR 개척자 스콧 피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교수는 26일 서울 문화창조벤처단지에서 열린 ‘VR·AR(증강현실) 인사이트’에서 “지금 콘택트렌즈형 VR 기기가 연구되고 있고, 레이저를 안구에 쏴서 볼 수 있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스콧 피셔 교수는 1985년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VR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HMD)와 3D 오디오 등을 개발했다.

<<미디어 아트 기본 요소(입력과 출력:먹고&싸기)>>
백남준은 특별하다. 그런데 백남준의 특별함은 박식과 해박을 관통하여 그 박식과 해박을 뒤집는데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는 미디어 아트의 기본 요소(입력과 출력)을 인간의 기본 욕구인 먹고 싸는 것으로 풀다.

Cynthia Goodman, 김홍희 인포아트의 큐레이터 선정

[1] 백남준의 저서 <인터랙티브 아트 : 지난 20년의 역사와 앞으로의 20년(1995)> 중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첨단의 뉴미디어아트 소개된 곳은 광주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특별전으로 기획한 인포아트다. 여기서 세계최초로 인공지능과 관련된 작품을 소개하다. 백남준 제자 빌 비올라도 그때 참가했다. 100만 달러가 들어간 이 아시아 초특급전시 백남준 여기서도 개인돈이 많이 들어가 1984년 때처럼 또 큰 빚쟁이가 되다.

[2] 여기에 누가 왔는가가 중요하다. 가상현실의 창시자인 스콧 피셔를 비롯해서 커뮤터 천재 7명과 인공지능과 관련된 작품과 서구에서 이름난 미디어아티스트 빌 비올라와 게리 힐과 장 뤽 고다르 등 42명의 비디오작품이 소개되어다. 전시기획은 백남준 큐레이팅은 한국에서는 김홍희 미국에서는 신시아 굿맨(Cynthia Goodman)이었다. 신디아 굿맨은 미국에서 특히 미디어아트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녀의 저서로는 컴퓨터 예술의 세계가 있다. 미진사에 번역

[3] [백남준의 입력(put-in)과 출력(put-out)] 백남준이 진술했듯이 사람의 신체는 먹고 싸는 관계에서 입력과 출력의 양이 동일하지 않다. 이를테면 먹는 것(입력)에 비해 싸는 것(출력)이 미비하다고 말이다. 항문은 단지 싸기만 한다고요? 당신의 항문은 단지 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입처럼 호흡도 한다. 항문에 몸의 기(氣)를 발생시키는 혼음기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항문은 몸의 끝이 아니라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인 셈이다. 그렇다면 입은 단지 시작이 아니라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 아닌가? 그렇다! 몸의 모든 기관은 안과 밖 사이에서 놀이한다. 몸의 모든 기관은 입력과 출력 사이에서 놀이한다. 그런데 그 안(입력)과 밖(출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움직임, 즉 힘(力)이 있다.

[4] <백남준의 구멍론> Interactive Art 여기서 입력과 출력의 문제 대두. 바로 인터렉티브 아트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밥이 입으로 입력 되면 나중에 항문을 통해 똥이 되어 출력 된다. 비디오아트가 그렇다는 것. 특히 Interactive 그렇다. 이게 모두 생명순환 원리의 기본이다. 사람의 몸에는 10개 정도의 구멍이 있다. "그 가운데 눈은 80%의 입력과 20%의 출력 기능을 갖는다" 

[5] 아래는 그의 구멍론 일부 "사람의 몸에는 10개 정도의 구멍이 있다. 그 가운데 눈은 80%의 입력과 20%의 출력 기능을 갖는다. 귀는 98%를 입력하고 단 2%만을 출력한다. 그러나 이 2%가 매우 중요하다. 부끄러우면 귀가 빨개지는데 이것은 인간을 사회와 어울리게 하고 범죄에 빠져들지 않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고로 부끄럽다는 뜻의 한자 치(恥)는 귀(耳)와 마음(心)이라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귀가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인데, 마음을 통제할 수 없는 자율신경체계라는 의미에서 귀는 정직한 것이다"
blog.daum.net/mudaeppo/16142054?fbclid=IwAR0UEl8gllLwVJApDSH0zwbZ0U7kKDH-Sa0erEBogjNlFDfrzC2LbI-6fzI

[리뷰] <<역사학자와 인류학자 차이>>
[0] 서론 
세계사는 몽골제국이 생김으로 시작되었다. 세계화는 실크로드가 생김으로 시작되었다. 백남준이 몽골과 실크로드(인터넷의 기원) 관심이 많았던 이유인가?몽고(낡고 고리타분한 사람들)는 중국인이 몽골인(용감한 사람들)을 비하한 말이다 중국 러시아 터키 페르시아 완벽하게 정복하다.

[1] 인류학자가 세계역사를 역사학자보다 더 심도 있게 조망하다 예컨대 1) 웨더포드 2)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3) 브뤼노 라투르 4) Jack Goody 5) 박정진 등등 [웨더포드(아래사진)] 13세기 초 칭기즈칸 각 나라의 종교의 다양성을 최대로 존중하다. 반면 15-17세기 유럽은 오랫동안 신교와 구교가 종교전쟁을 하다. "문화인류학자인 잭 웨더퍼드 매켈리스터 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평등, 신앙의 자유, 관용, 다문화주의 같은 보편가치를 가장 먼저 실천한 역사적 인물이다" <참고> news.joins.com/article/21921472

[2] 질문: 몽골제국과 고려의 관계에서 어떤 특이점이 발견되는가?
대답: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힘든 싸움을 벌였지만, 이내 몽골과 고려 사이에 특별한 커넥션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몽골인들은 중국인 등 다른 종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고려 왕실과 결혼하는 것은 오히려 장려했다. 몽골 사람들은 제지술, 조선술, 항해술, 도자기 제조법과 같은 고려인들의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복속시킨 그 어느 나라보다 더 고려를 존경했다.”[주]<몽골 혹은 원나라는 고려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삼았다. 고려 여성은 미모만 아니라 살림 잘하고 똑똑하고 지혜가 높고 요리도 잘하고 원나라는 고려의 왕조를 유지하게 할 정도로 나름 관용적 정책을 썼다. 왜냐하면 몽골은 한반도 한국인과 같은 형통으로 봤기 때문이다>

칭기즈칸, 형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능력이 중요하다(능력중심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 대해 관용정책). 세계의 황제가 된 이유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칭기즈칸은 친화력이 높았다.

[3] 21세기 디지털 노마드 시대(자크 아탈리), 세계사를 보면 농경민과 유목민 구분되는데 역사의 70%를 유목민이 주도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유목민이 거의 사라지는가 했는데 21세기 디지털 유목민이 다시 전 세계를 호령하게 되었다.

[4] 질문: 21세기에 칭기즈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대답: “대부분의 제국이나 위대한 나라는 비전을 가지고 건국된다. 시간이 흐르면 비전이 뿌옇게 되었다가 결국에는 사라진다. 칭기즈칸의 후예들 또한 비전을 상실했다. 그저 바라는 게 재물과 권력을 누리는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제국은 결국 붕괴했다. 칭기즈칸은 정치적인 이념이나 종교에 휘둘리지 않는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문제들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통합된 세계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오늘날 정치지도자·종교지도자들은 이념으로 넘친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비전을 제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우리는 150여 년간 민족들과 종교들이 평화를 유지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시대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 오늘날에는 그런 평화를 달성할 수 없는지 묻기 위해서다.”

[저자소개]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 미국 미네소타 주 매칼래스터 대 인류학과 교수, 부족 연구 전문가. 세계사 속 부족민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중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이 동서 문명 교류에 끼친 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98년에 서구 학자로는 최초로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 산을 방문한 이래 20년 동안 몽골 제국 연구에 전념했고, 매해 몽골에서 몽골 학자들과 위대한 정복자의 발자취를 찾아다녔다. 그 첫 성과물로 2004년에 펴낸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전 세계에서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30만 부 이상 팔렸고, 국내에서도 칭기스 칸 관련 책 중에서 가장 많은 독자가 찾았다. 이어 2010년에는 《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를 펴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웨더포드는 2006년에 몽골 최고의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2010년에 몽골 대통령 훈장 받았다.

[참고] 몽골 헝가리 폴란드까지 정복 오스트리아 쳐들어가려고 할 때 본국의 칸이 사망하다. 그리고 이집트까지 쳐들어가려고 할 때 또 본국의 칸이 사망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못 갔다. 중국 러시아 터키 페르시아 완벽하게 정복하다. 일본은 태풍 때문에 실패했다. 해상에 약하다.[참고] 마르코 폴로, '역참(몽골식)'을 보고 감탄하다. 여기에는 특급호텔이 있고 역참 말(horse)이 300-400대가 대기하고 있고 등등 [...] 백남준의 작품에는 없지만 성직자 마태오 리치도 마르코 폴로보다 300년 후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선구자.

[1] 21세기 디지털 노마드 시대, 세계사를 보면 농경민과 유목민 구분된다 그리고 우리는 유목민을 깔보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사는 그렇지 않다. 역사의 70%를 유목민이 주도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유목민이 거의 사라지는가 했는데 21세기 디지털 유목민이 다시 전 세계를 호령하게 되었다.

[2] 농경민: <시간중시> 사시사철 24절기 천시가 중요 [꾸준한 노력 중요]한 반면 유목:<공간중시> 초원이동 공간를 잘 찾아내야 [유연한 이동 중요]21세기는 디지털 노마드 시대다 능력위주, 창의성 중요. 지금은 실크로드 대신 커피로드라는 말이 생길 정도가 커피가 세계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선사시대 고인돌: 인류가 만든 최고 성지, 인류 최초 설치미술>>

[9]선사시대 고인돌: 인류가 만든 최고의 성지이자 인류 최초의 설치미술이기도 하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서로 다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하네요 전라남도 나주에 가면 고인돌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받는 영감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나 보다.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의 든다. 천지인 기운이 웅장하게 느껴진다 

[[[[[[[[[[[[여기부터 2부]]]]]]]]]]]]]]

<< 백남준비디오, 무엇보다(above all) 음악. 시간=음악 불가분 관계>>
[1] , 무엇보다 음악(사운드)이다. 그리고 그림(이미지)이다.  비디오아트, 무엇보다 음악(사운드)이다 .그리고 그림(이미지)이다. 백남준은 정지용 시에서 비디오아트 같은 사운드 요소와 비주얼한 요소가 많다며 좋아했다. 정지용의 노래 '향수'를 들으면 정말 비디오아트 같은 노래와 풍경이 그려지는가.

<<한예종 초대 총장 지낸 이강숙 명예교수 별세…향년 84세>>
[1] 서울대 음대 교육방식 싫어해 창조적 예술 학교 예종의 창시자 이강숙 선생님 12월22일 돌아가심! 비디오아트에서 무엇보다 음악이라는 백남준 예술 철학과 통하는[...]
[2] 이강숙 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디오아트에서 무엇보다 음악이라는 백남준 예술 철학과 통하는[...] 아래는 그의 저서 <음악선생님을 위하여> 중에서(1990년) 나오는 글이다 이강숙 선생 저서 <음악선생님을 위하여> 중에서(1990년) 이강숙 총장님을 기억하기 위한 글... “나의 이름은 음악입니다. 나를 살려주세요. 음악시간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의 교실에서 선생이라는 사람이 나를 속상하게 만듭니다. 음악시간에 나를 가르친다고 해놓고 나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은 나를 속상하게 만듭니다. 나를 가르친다고 해놓고 ‘나 아닌 나’를 운반하는 그릇을 가르치고 있으니 거짓말하는 꼴이 아니고 무어야? 나는 언제나 나야! 물론 내가 나타나는 방식은 여럿이야. 나타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면 안돼. 나는 어디까지나 나이니까. 나는 언제나 재료라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 장음계라는 재료라든가 단음계라는 재료로 나타나기도 하고 홀톤 스케일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12음열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거야. 평조나 우조를 통해서도 나타난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나타나는 재료가 달라진다고 해서 나를 나로 보지 않으려면 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돼.” <88올림픽 때 전체 기획: 이어령 선생, 음악: 이강숙 선생>

이강숙 선생

[이강숙] 88올림픽 때 전체 기획은 이어령 선생이 했고 음악은 내가 했습니다. 서울올림픽이 재료였고 실제 요리한 것은 창의성, 상상력, 아이디어 융합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이어령] (88서울올림픽에서) 완벽하게 칭찬받은 게 음악이에요. 중국은 시각적으로 번쩍했지만 귀에 남는 것이 없어요. 이강숙 선생은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올림픽 관계자들과 많이 싸웠어요. 예술 앞에서는 친소관계 등에 의한 타협이 없었죠. 이강숙 선생은 대중의 안목보다는 전세계의 눈높이로 음악을 하려 했어요. 몇 개는 안될 뻔한 것을 이뤄냈고, 해서는 안되는 것은 막았죠. 음악에 관한 한 20년이 지난 것과 비교해봐도 월등히 앞섰어요“
[이강숙] 88올림픽 때 강석희 전자음악곡의 경우 일반인이 듣고 부정적으로 얘기했어요. 어려우니까 그랬는데, (내가)목소리를 내 관철시켰어요. 음악전문가가 강하게 주장하니 물러서더라구요. 음악분야에 전체적인 성격규명은 안했고 전위적인 것, 실험적인 것을 하려고 노력했죠"/말씀을 듣고 보니 전체와 소수, 집단과 개인 간의 괴리가 특히 문화분야에서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괴리가 국가의 품격과도 관련된다고 생각됩니다.
[이어령] 문화예술 분야는 눈높이와 개인의 소양이 다르죠, 강석희 교수가 독일에서도 활약해 실력을 인정받아 올림픽과 같은 큰 대회에서 실험, 전위적인 것을 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정부나 인스티튜션(체제)에서 문화예술은 아는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권력이 예술을 좌지우지 하죠. 예술에 종사하는 아마추어들이 프로페셔널에 대한 식견이 없을 때는 실제 3,4류 국가로 가는 손실을 봅니다. 국가 품격 면에서 관료들이나 소위 아마추어리즘이 힘 있고 안목이 없을 경우 국가 전체가 천격(賤格)에 빠집니다.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관료보다는 문화예술을 하는 이들이 자기의 독창성과 기량을 발휘하고 예술을 모르는 관료들에 휘둘리지 않는 게 국가의 품위를 올릴 수 있는 겁니다"
[이강숙]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들 때 국산 피아노를 끼워 넣으려 해서 고생한 적이 있어요. 중국 올림픽이 정치쇼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렇게(올림픽 개최) 함으로써 나라발전에 역할하려는 것같습니다. 나라의 품격, 문화도 그렇고 개인의 삶에서 뿌리가 내립니다" 국가의 품격에 개인의 자질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앞서 같은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75%가 아직 선진국이 아니라고 답했는데 시민의식과 국격의 상관관계를 말씀하신다면. 요즘 고민되는 것은 보수와 진보, 여야, 빈부, 유무식의 대결, 남과 북, 동과 서 등입니다. 현재 상황보다 품격이 나아지는 상태로 옮겨가려면 피벗 코드 (pivot chord)의 가치를 국민 모두가 인정을 하는 문화적 기후의 창조가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보수 마음속에 진보가 있고, 진보 속에 보수가 있는 것과 같이 피벗 코드가 확산돼 정치, 사회 현상에 중간지점이 넓어지면 개인의 존엄성, 즉 품격이 높아지고 결국 국격도 높아질 것입니다. 개체를 무시하는 전체도 안되고, 전체 없는 개인은 공허합니다. 개체와 전체의 중간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피밋 코드: 개인 봐도 100% 선악 없다>>
[이어령] 인간의 삶은 원래 피벗 코드입니다. 극단화, 양극화가 이원적 대립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개인을 봐도 100% 선악은 없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은 남자 그릴 때 여자의 요소를 넣은 것입니다. 성숙한 사회는 중간지대에서 뛰어넘는 것입니다. 적대적, 상대 배제는 미숙한 것입니다. 국민의 75%가 선진국 대열의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남을 인정하는 것,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포용과 여유 말이죠. 나아가 다양성과 긍정이 선진국으로 가는 힘입니다. 부정의 힘을 창조적인 것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문화입니다. 문화는 창조의 동의어죠"
[이강숙] 음악에서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조(調)를 동시에 표현하는 코드를 피벗 코드라고 합니다. 하나의 조에서 그것과 다른 조로 탈 바꿈 하려면 애매성을 지닌 피벗 코드가 필수적이죠. 하나의 어떤 상태에서 전혀 다른 어떤 상태로 전환하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 사회가 더 발전된 상태로 전환되려면, 진보와 보수를 연결하는 피벗 코드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서로 다른 두 개의 처지, 입장, 이념을 동시에 표명하고 있는 피벗 코드, 선회축의 개입이 필요하죠. 그래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통제를 주장하는 사람과 자율을 주장하는 사람, 개체주의를 주장하는 사람과 전체주의를 주장하는 사람, 등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회전축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라의 품격은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피벗 코드의 역할이 바로 여기 있어요. 멘탈리티의 변형이 회색분자가 아니라 차원 높은 의식이 집단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피봇 코드(Common pivot chord)>> 음악용어인데 일반적으로 정치나 사회용어로도 쓰인다. 인간(개인)이 100 % 선악이 없듯이 좌우가 없다. 인간의 사고에서 좌 속에 우가 있고 우 속에 좌가 있다는 생각을 말한다. 이건 동양정신의 근간이다.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 [평] 이걸 서구의 식민지 통치 이념으로 좌와 우(좌파와 우파, 심리학 박사나 광고쟁이 만든 말), 음과 양을 나눠 비지배인들 힘을 빼기 위한 분열-분단 통치방식으로 악용되다
[이강숙] 요즘 고민되는 것은 보수와 진보, 여야, 빈부, 유무식의 대결, 남과 북, 동과 서 등입니다. 현재 상황보다 품격이 나아지는 상태로 옮겨가려면 피벗 코드 (pivot chord)의 가치를 국민 모두가 인정을 하는 문화적 기후의 창조가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보수 마음속에 진보가 있고, 진보 속에 보수가 있는 것과 같이 피벗 코드가 확산돼 정치, 사회 현상에 중간지점이 넓어지면 개인의 존엄성, 즉 품격이 높아지고 결국 국격도 높아질 것입니다. 개체를 무시하는 전체도 안되고, 전체 없는 개인은 공허합니다. 개체와 전체의 중간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이어령] 인간의 삶은 원래 피벗 코드입니다. 극단화, 양극화가 이원적 대립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개인을 봐도 100% 선악은 없어요..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은 남자 그릴 때 여자의 요소를 넣은 것입니다. 성숙한 사회는 중간지대에서 뛰어넘는 것입니다. 적대적, 상대 배제는 미숙한 것입니다. 국민의 75%가 선진국 대열의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남을 인정하는 것,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포용과 여유 말이죠. 나아가 다양성과 긍정이 선진국으로 가는 힘입니다. 부정의 힘을 창조적인 것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문화입니다. 문화는 창조의 동의어죠"[이강숙] 88올림픽 때 전체 기획은 이어령 선생이 했고 음악은 내가 했습니다. 서울올림픽이 재료였고 실제 요리한 것은 창의성, 상상력, 아이디어로 이를 융합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이어령] (88서울올림픽에서) 완벽하게 칭찬받은 게 음악이에요. 중국은 시각적으로 번쩍했지만 귀에 남는 것이 없어요. 이강숙 선생은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올림픽 관계자들과 많이 싸웠어요. 예술 앞에서는 친소관계 등에 의한 타협이 없었죠. 이강숙 선생은 대중의 안목보다는 전세계의 눈높이로 음악을 하려 했어요. 몇 개는 안될 뻔한 것을 이뤄냈고, 해서는 안되는 것은 막았죠. 음악에 관한 한 20년이 지난 것과 비교해봐도 월등히 앞섰어요"

<<비디오아트, 뭣보다 음악 즉 오감 총동원 시각, 촉각, 청각 등 다중예술(공감각)>>

[1] [감각의 미술관] 미술사학자 이지은 선생의 탁월한 역작 <감각의 미술관>, 서양미술사 제대로 소화하다. 2012년 나왔다. 그는 현대미술을 음악으로 본다. 이지은 선생 베니스 만난 적이 있는데 나보고 내 책은 왜 이렇게 안 팔리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 놓는다. 그 답은 간단하다.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한국의 관객들 현대미술을 음악이나 촉각적 음파(Wave)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백남준 1960년대 미술을 음악이라고 봤다. 그리고 공간을 시간으로 봤다. 그런 관점을 동시대 미술조류를 통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 상징시인 베를렌이 "무엇보다 음악이다" 이 예언이 맞다. 예술은 여성이지만 그중 음악은 특히 여성의 여성이다. 그래서 시대정신에 맞는다.
[2] 어떤 (현대)미술이든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착음이든 착시든 착란이든 그 어떤 소리가 들려야 한다. 들리는 시각이 되어야 한다.
[3] <감각의 미술관> [chaper마다 소제목] 다 의미심장하다. 1) 눈에서 온몸으로 2) 시간을 타고 움직이는 그림 3) 관객 시각 모독 4) 시각의 와해 5) 드러나는 몸:행위예술 6) 몸을 던져 회화를 파괴. 7) 인간의 몸이 붓이다. 8) 당신의 시선을 거부한다 9) 시선에 대한 역공격 신디 셔먼 10) 음악을 닮고 싶은 현대미술 11) 보이는 소리 12) 부릉거리는 것은 아름답다 소음 아트 13) 그 소리는 미술일까 14) 소리미술의 탄생 사운드 아트 15) 미술이 음반으로 음악이 갤러리로 16) 촉각의 마법 터치가 중요 17) 촉각 시각과 경쟁하다 18) 매체 전면에 나서다. 19) 피부로 말하는 고통과 소통 20) 상처와 구멍을 예술화하다 21) 냄새를 맡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다 22) 후각과 미각은 사회적이다 23) 미술과 음식 혹은 와인 24) 먹는 미술관 25) 비일상적 체험 26) 관계미술인가 유흥인가 27) 미술관의 냄새 테러 이불… 더 보기 //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순간의 시간을 잡아 영원히 낚아 채 차별화된 시각적 세계관을 제시하려 한 것인가! 제가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 본문 (백남준과 시간론)

[백남준&시간론] 어떻게 시간의 주인되고, 시간 가지고 잘 노나?

백남준 시간이 뭔지 고민하다

[1] 백남준은 시간을 음악으로 봤다. 흐르는 선율과 혹은 흐르는 은하수 같은 것을 봤다. 이 개념은 베르그송의 순수지속과 유사한 개념이다. 백남준의 현재를 과거로 혹은 미래로 과거를 현재로 미래로 되돌릴 수 있다고 봤다. 과거 현재 미래를 따로 떼어놓고 보지 않고 하나의 전체적 흐름 속에 본 것이다. 동양의 시간관 억겁이나 윤회나 광음(光陰)을 또 어떻게 볼 것인가.

[2] 시대와 시간을 규정할 수 있어야 미래 시간을 내다볼 수 있다. 동양의 시간을 알아서 서양의 시간을 알 수 있고 남자의 시간을 알아여 여자의 시간을 알 수 있다. 시간 을 알아야 공간을 알 수 있고 시간을 알아야 인간을 알 수있다. 또 그 반대로도 적용 된다 

[3] "외국어 잘해야 모국어 잘 한다" -괴테. 같은 원리다. 이 말은 한국어를 잘 해야 외국어도 잘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을 다르게 적용하면 가장 한국을 많이 알아야 가장 세계를 많이 알 수 있고, 가장 세계를 많이 알아야 가장 한국을 많이 알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백남준이 그랬다. 삼국유사를 꿰뚫고 있었다.
[4] '도덕인예(예절이 아니라 예술)' -공자. 예술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종합하는 것이다. 

[하이데거] 인간실존은 근본적으로 '시간적'

하이데거<존재와 시간> 참된 시간(True Time) 4차원 특성; "미래 또는 과거의 것은 나름대로 현재로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3 차원의 시간성에서 하이데거가 시간은 4차원이다. 백남준의 5차원 사기와 하이데거의 4차원 시간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이후로부터 시간과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도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찾아 쓸데없이 헤맸다고 비판하였다. 그가 보기에 진정 중요한 철학의 주제는, 본질적으로 시간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가? 문제였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시간성'에서 찾는다. 인간은 '시간성' 으로 존재하며, . “시간성이란, 있어 오면서 (과거), 마주하면서 (현재), 다가감(미래)이다.”

베르그송

[베르그송] 지속으로서의 시간, 의식으로서의 시간
[베르그송] 제논의 역설에 대해 강의하던 중, 서양 철학이 이 때까지 시간의 본성을 망각한 채 시간을 공간화해서 이해하지 않았나, 라는 물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베르그송은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치환해서 측정하는 과학적, 물리적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식의 시간, 삶을 경험하는 방식으로서의 시간이 진정한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의식의 시간을 지속이라고 명명했다. '지속'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 이 흐름에 따라 생명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으로서의 시간, 의식으로서의 시간은 내가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진짜' 시간이지만, 체험이 배제된 기계적 시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하다.

[1]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 백남준에게 영향을 미치다.비디오 아트는 현재를 지속시키거나 분열된 시점의 현재 그리고 사건 없는 시간자체를 보여줌으로써 영화와 달리 내러티브에 종속되지 않는 순수한 시간 그 자체를 드러내려 시도한다. 시간을 기록하고 변형하는 비디오 아트에서 현재와 시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은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비디오 초창기에는 기록과 동시에 투사되는 실시간성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면 오늘날 비디오에서는 분열되고 해체되며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짐을 반복하는 비결정적인 불특정한 시간성을 보여주는 이미지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특성이 강화된 비디오 아트에서는 시간이 추상적인 리듬을 만들어 내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2] 베르그송에 의하면 시간은 지속되는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현재는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또한 지속은 한 지점으로 분리되지 않는 과거, 현재 미래의 공존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지나가버린 과거를 이루는 기억들이 현재와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과 시간에 관한 개념을 프랑스 비디오 아티스트인 로버트 카엔(Robert Cahen)과 미국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인 제레미 블레이크(Jeremy Blake)

[3]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 백남준에게 영향을 미치다. 비디오 아트는 현재를 지속시키거나 분열된 시점의 현재 그리고 사건 없는 시간자체를 보여줌으로써 영화와 달리 내러티브에 종속되지 않는 순수한 시간 그 자체를 드러내려 시도한다. 시간을 기록하고 변형하는 비디오 아트에서 현재와 시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은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비디오 초창기에는 기록과 동시에 투사되는 실시간성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면 오늘날 비디오에서는 분열되고 해체되며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짐을 반복하는 비결정적인 불특정한 시간성을 보여주는 이미지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특성이 강화된 비디오 아트에서는 시간이 추상적인 리듬을 만들어 내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본 연구는 비디오 아트에서 변형되는 시간개념을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지속을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시간은 지속되는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한다. [...]

[백남준&시간론] 시간 가지고 놀기, 시간 주인으로 살기

[1] 백남준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La nostalgie est un feedfack au carré)' I 혼합 매체 빈티지 TV 캐비닛, 네온, 섀시, 튜브, 레이저 프린트 캔버스, 러그, 프린트, 램프, 골동품 사진 앨범, 4.5 인치 KTV 모니터 3대, 소니 워치맨 1대, 소니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 1개, 백남준 레이저 디스크 1개 165.0 x 78.7 x 34.0 (cm) 이 작품 제목에는 백남준의 시간예술을 이해하는 핵심어 '노스탤지어와 피드백'가 들어있다. 난해하다.
[2]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전은 이처럼 인간, 기계,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통을 탐구했던 백남준의 열린 사고를 조명하는 데 집중하다. 백남준은 "백색소음은 최대치의 정보를 담고 있다"라는 사이버네틱스 이론의 창시자 노버트 위너의 주장을 여러 글에서 인용한다. -「노버트 위너와 마셜 매클루언」에서
[3] 백남준의 시간론에서 노스탤지어라는 단어는 핵심어. 그리고 루트(뿌리기호)의 시간이 중요하다. 백남준은 어려서 숨바꼭질하다가 유치원 친구인 이경희를 보고 갑자기 '춘'을 느꼈다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예술가로서 오감 등 성의 감각이 예민했음을 보여준 셈이다. 성의 시간이 인간이 그 무엇보다 제한된 사회적 간섭을 벗어날 수 있는 영원한 시간의 노스탤지어가 아닌가 싶다.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

백남준은 시간의 주인으로 살면서 시간을 잘 가지고 놀려고 했다.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데 가장 유용한 도구로 비디오아트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비디오 아트는 색이라고 했다. 즉 색은 성을 말한다. 동양의 전통이다. 순간적 성의 환희 그 순간이 영원하다는 소리인가. 아니 비디오아트에서 가장 짜릿하게 가장 격정적으로 맛볼 수 있다는 순간의 시간을 말하나. 순간이 영원이 되는 순간을 맛보는 것은 무엇보다 비디오아트에서 가능하다는 주장(?) 성=시간=색체> 긴밀성

<<가장 먼 과거 선사시대 알아야, 가장 먼 미래(30세기) 알 수 있다>>
[1] 백남준의 시간론에서 노스탤지어라는 단어는 핵심어다. 그리고 루트(뿌리기호)의 시간이 중요하다. 과거 철학자들은 '성찰하는 사유'라는 말을 썼지만 백남준은 성찰이라는 말보다 컴퓨터 용어인 '피드백'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다. 사이버네틱스의 세계관을 말하고 있다.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 이것은 백남준이 만든 상직성이 강한 전자학적 시(Electronic poem)로서 여기서 그의 시간철학 중 선사시대부터 21세기까지 역사의 역할이 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한다. 선사시대의 역사를 알아야 30세기(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과 강익중 2인전 할 때 백남준이 강익중에게 언급한 말)를 내다볼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가장 먼 과거를 알아야 가장 먼 미래를 볼 수 있다"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2] 여기서 백남준이 '피드백'을 사용한 것은 '인쇄매체' 시대와 '전자매체(사이버네틱스)'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서다 // 선사+역사+시사+후사, 통시적으로 봐야 30세기가 보인다 -백남준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1992년 그가 60이 되었을 때 한 말)"이라는 시적이고 상징적인 말을 통해 백남준은 30세기를 내다봤다 https://neolook.com/archives/20120720g?fbclid=IwAR3mCaJfAdSJo8jBAXY1i9WFh86JHya7uNPGKJhYVq0_pgINBeUFpm5j050

[3] 백남준 시간개념: <과거 현재 미래를 비빔밥으로 만들다> 그의 첨단 하이테크 예술은 샤머니즘과 통한다. 오래된 과거와 최신 미디어를 결합. 과거와 미래가 하나로 통한다. 선사시대와 30세기가 통한다] 백남준은 시간을 표시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지난 시대의 유물로 간주되는 예술-사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글도 여러 편 썼다. 오래된 과거와 최신 미디어를 결합시키는 것은 백남준의 특이한 시간개념이다. 백남준은 ‘오래된 과거’를 ‘미래적 방식’으로 불러내 ‘오래된 미래’로 만든다. 가령, 최신 미디어인 TV와 신석기시대를 연결하는 방식에서나, 또한 통신의 과거-현재-미래를 설명하는 맥락에서나. 통신의 미래가 도달하는 지점은 고대의 영적 소통방식인 샤먼(심령학)이다. 전신 Tele-Graphs, 전화 Tele-Phone, 텔레비전 Tele-vision, 텔레파시 Tele-Pathy. “나는 TV로 작업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4] 백남준의 줌(zoom) 영상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같이 초대 되어 서로 사이 좋게 놀고 있는 셈이다. 시대의 비빔밥인 셈이다. 서구의 시간론과 다르다. 백남준은 비교적 서구 철학자 중에는 베르그송의 시간론(지속)과 통하는 것 같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도 잘 모른다.

<<백남준 어떻게 시간의 주인으로 살까?>> 

<아래> 스위스 시계

[1] 무신론자인 백남준이 시간의 주인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유물론자이고 무신론자인 백남준 항상 시간을 가지고 놀고 싶어 했다. 뭔가에 갇히는 걸 무지 싫어한 백남준 그는 시간에 예외 아니다. 시간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갇히는 것보다 시간과 인간이 상호 존중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쌍방적 소통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어떻게 시간의 주인으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다. 바로 그런 백남준의 시간에 대한 고민을 이런 시각적인 언어로 보여주고 있다. 그 작품이 바로 스위스 세계다.

[2] 백남준이 평생 고민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이란 무엇인가?우리가 어떻게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1 1988년 폐쇄회로 카메라가 벽걸이 괘종시계 추의 움직임을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놓인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동일한 시계추의 움직임이 다른 각도로 비치게 된다. 폐쇄회로와 텔레비전이라는 장치 안에서 이미지와 실체의 순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시계의 동작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시간의 흐름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3] ‘비선형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백남준의 관심이 표현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폐쇄회로 카메라가 벽걸이 괘종시계 추의 움직임을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놓인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동일한 시계추의 움직임이 다른 각도로 비치게 된다. 폐쇄회로와 텔레비전이라는 장치 안에서 이미지와 실체의 순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시계의 동작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시간의 흐름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선형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백남준의 관심이 표현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4][1930~1960년 비교] [1] 1960년대에 서서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면, 1930년대는 심연처럼 멀어 보인다. 30년대 히틀러의 등장 30년이 지나 60년대 케네디대통령(흑인 민권 루터킹 목사)의 선거운동으로 마무리되었다. '1930~1960년' 그 사이를 스탈린, 집단농장,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한국, 베를린, 아이젠하워의 자주노선이 차지하고 있다. [2] 인쇄매체(1930~1960년)와 전자매체(1960~1990년)의 간격. 인쇄매체는 실제 일어난 일과 거의 정확한 이미지를 전달하지만, 전자매체는 그레타 가르보나 진저 로저스와 같은 할리우드식 버전에 국한되어 있다. 그런데 전자매체는 실제 헐리우드식 버전을 넘어 비디오아트에 대한 자유로운 실험들을 시도하였다. <35쪽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에서 >

[1] <시대에 따라 달라진 시간개념 -백남준>
'인도의 시간, 그리스의 시간, 성서의 시간, 뉴턴의 시간, 베르그송의 시간, 깁스의 시간, 후설의 시간, 하이데거의 시간, 사르트르의 시간, 케이지의 시간, 위너의 시간, 슈톡하우젠의 시간' 순, 정리했다
[정리] 비디오는 시간의 경계선을 탐구하는 예술? 시공간의 심포니 시간 예술과 공간 예술의 융합

시간을 소유하려고 하면 시간의 주인으로 살 수 없다. 시간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 도취해야 한다. 이를 시로 노래한 사람이 바로 '보들레르'다. 그의 시 "취하라! 취하라! 취하라!" 바로 그것이 시공간을 초월해 자신이 하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는 절대 고독과 절대 침묵의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양혜규의 시간 사용법이다. -> seulsong.tistory.com/480

[2] 시와 시간과 시대정신 백남준 <고대기마인물상 시리즈(1991-1992년 제작)>  현대 인공지능 디지털 첨단 과학기술이 정말 선사시대 보다 앞서있다. 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정말 공부를 많이 하고 아마존 경험을 한 후에 서양의 지식인으로 양심고백을 하다. 그리고 나서 야만과 문명의 구분을 없애 버리다.

왜? 이런 작품을, 21세기 전형적 인간상이다. 전자 초원 고속도로 혹은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를 달리는 디지털로 무장한 노마드 시대 전 세계 돌아다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결합된 모습이다. [1] 고대기마인물상 시리즈(1991-1992년 제막) 왜 이런 작품은 21세기 전형적 인간상이다. 디지털로 무장한 노마드 시대 전자 초원 고속도로 혹은 전자 초고속도로 통해 전 세계 돌아다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결합된 모습이다.

[백남준&시간론] 어떻게 시간의 주인으로 사나? 혹은 어떻게 시간을 가지고 잘 노나? "비디오는 일직선으로 나가는 시간의 화살을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있고, 방향을 뒤바꾸고 뒤집을 수 있으며, 그 흐름을 휘게 하거나 비틀 수도 있다." -백남준 <<시간의 주인>>[1] [백남준세미나_백남준의 시간예술(time based art)] <발제: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이다. 말에서 크리스토까지>(1930년–1960년–1990년) [2] 어떻게 시간의 주인으로 살 수 있을까?유물론자이고 무신론자인 백남준 항상 시간을 가지고 놀고 싶어 했다. 뭔가에 갇히는 것을 무지 싫어한 백남준 그는 시간에 예외가 아니다. 시간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갇히는 것보다 시간과 인간이 상호 존중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쌍방적 소통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백남준의 시간론은 한마디로 과거 현재 미래 뒤죽박죽 섞여있다. 인간의 시간에 구속되는 것을 싫어했다 시간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싶어 했다. 무신론적 사고방식이다. 쉽게 말해서 가장 먼 과거 즉 선사시대를 알아야 가장 먼 미래 혹은 30세기를 내다볼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3] 백남준 시간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싶어 했다. 백남준의 천재성은 미술을 음악으로 그리려 했다는 점이고 공간예술을 시간철학으로 해석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영원을 손에 쥐고,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평생 고민이었고 화두였다. 그러면서 비디오는 한번 찍히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간을 가지고 잘 논다는 것은 뭔가? 순간의 시간을 낚아 채 영원의 시간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반인과 예술인의 같은 시간이라도 시간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 다르다. 연령에 따라 같은 시간이라도 시간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 다르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과 여행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은 같은 시간이라도 시간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 다르다. [5]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순간의 시간을 잡아 영원히 낚아 채 차별화된 시각적 세계관을 제시하다! [6] 백남준의 5차원 예술 5차원 사기는 사람이 삶의 되감기하기를 가능하게 하는 사기다. 백남준은 시간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것이 바로 시각예술가의 권능으로 본 것이 아닌가 그게 바로 루트 3.5다 즉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거기에 0.5가 들어간 시간이다

<[노스탤지어] 극적 성공, 그 환희 순간을 상징(?)>

1963년 사진

[문준용 작가] 문준용 작가 서울시 문화재단 기금(1400만 원)을 받았다. 그래서 비판을 받고 있다. 이 기금을 받은 사람은 46명 문준용 작가는 그중 하나다. 이번 전시에 대한 외신 기사다 그런데 실제 작품의 수준은 어떤가 하고 묻고 있네요 [평] 그의 아버지가 검찰총장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사안인데 그의 아버지는 인권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라 결국 욕을 먹게 된 것이다. 아들은 사려 깊게 이 점을 생각해야 했었다. 작품은 상당한 수준이네요. 역으로 문준용 작가가 더 알려질 수 도 있다.  www.newsbreak.com/news/2131783114188/the-artist-son-of-south-koreas-president-was-criticized-for-funding-his-latest-show-with-corona-relief-hows-the-actual-art?s=ws_fb&fbclid=IwAR2b5WRKYd5dyHAC2Qs6PZLLANEbgedtUmDNRrA61Eu3OFCXwaa796v6VBA

 

The Artist-Son of South Korea’s President Was Criticized for Funding His Latest Show with Corona Relief. How’s the Actual Ar

The Artist-Son of South Korea’s President Was Criticized for Funding His Latest Show with Corona Relief. How’s the Actual Art?

www.newsbreak.com

[참고] 헨리 겔트잘러(1935∼1994)** 비디오아트에 대한 태도 변화 1968년 헨리 켈트잘러는 기술을 가치절하했다. “예술가는 여러 가지 기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 자체는 어떤 미적 감각도 없어요. 기술이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그러나 1970년대 그는 오늘날 비디오아트의 기초를 다졌다. - 미국 국립예술기금의 책임자로 있을 당시 비디오아트 분야에 장학금을 지급하는 미래지향적인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가 록펠러재단과 뉴욕예술협회와 연합해서 오늘날의 비디오아트 기초를 다졌다 // 지금의 호크니는 평생 동반자였던 큐레이터 헨리 겔트잘러(1935∼1994)**가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크니가 6개월마다 그림을 골라 달라고 하면 그는 가차 없이 그림을 찢거나 휴지통에 버리기도 했다. “그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호크니는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다.

피카소를 좋아한 데이비드 호크니 II 아래 작품 퓌르스탕베르 광장(Place Furstenberg), 1985 '포토콜라주' 시리즈. 사진으로 작업 하는 이 콜라주다. 호크니는 이 영역을 독자적으로 확대 적용했다. 20세기 초 피카소가 시도한 '파피에 콜레'와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피카소는 '종이'를 사용했고 호크니는 '사진종이(콜라주)'를 사용한 점이 다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호크니의 학창시절은 유복하지 않았다. 작품을 팔아 350달러를 마련해 196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이내 명성을 얻는다. 베벌리힐스의 풍경 등을 찍은 사진을 토대로 작업했다. 사진에 없는 생생함, 공간이 주는 환상을 캔버스에 담았다. 상상력의 원천이 된 영화도 그에겐 사진의 일종이다. 그는 영화를 ‘픽처(picture)’로 칭한다. 또 한 작품에 캔버스를 여러 개 이어붙이는 넓은 원근법을 사용한다. “인간은 카메라와 달리 공간을 본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작품에서 공간은 축소되는 게 아니라 확장된다. 구상 화가인 그는 추상미술의 영향도 받았다. 파블로 피카소를 특히 좋아한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등장은 작업방식을 넓혔다. 2009년에만 아이폰으로 드로잉 200점을 그렸다.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볼 수 있게 된 건 획기적 사건이었다. 지금의 호크니는 평생 동반자였던 큐레이터 *** 헨리 겔트잘러(1935∼1994)가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크니가 6개월마다 그림을 골라 달라고 하면 그는 가차 없이 그림을 찢거나 휴지통에 버리기도 했다. “그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호크니는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