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독일책] [백남준&보이스]
백남준이 독일 등 9명 유명예술인과 인터뷰백남준에 관한 대담집(9명)
백해영갤러리에서 제공하는 백남준 강좌 9번째 '백남준&독일책'
https://www.youtube.com/watch?v=RiPd-b7FYI0&t=219s
아직 번역되지 않은 우리가 가능하다면 번역해 보려는 책이다. <백남준 독일어판 발행연도: 2009년 10월 30일 발간 Nam June Paik(German) 30 Oct. 2009. 저자 피크하우스(Peter Moritz Pickhaus) 편집자: 레지나 비볼(Regina Wyrwoll> 쪽수: 152. 가격: 16.80유로. 사진: Manfred Leve.출판사: 발터 쾨니히(쾰른)
ISBN: 978-3-86560-552-8.에너지 시너지 시리즈 7번(Energies-Synergies)
2. 저자 피크하우스(Peter Moritz Pickhaus)가 백남준에게 묻고 그의 부인 시게코에게도 묻는다. 그리고 백남준을 알거나 가까이 지닌 독일의 다른 작가들에게도 백남준과의 관한 일화나 경험 등을 묻는다. 또 따로 미술 집필가 '바바라 빈(B. Wien)'는 백남준에게만 질문은 던진다. 그런 형식의 인터뷰를 정리한 책. 저자 빼고 총 9명이 등장한다.
3. 저자 '피터 모리츠 피크하우스(Peter Moritz Pickshaus)'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보면 <백남준은 실험적 예술가, 세계시민, 미디어 개척자, 사상적 곡예사, 발명가, 한국계 코뿔소(?) 이런 독특한 예술가를 한마디로 특징 짓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백남준과 그 전문가들 혹은 관련자들(동료예술가들)과 나눈 인터뷰 8편을 이 책에 실었다. 아직 본문 번역이 안 되어 아래 본론에서 저자들만 소개한다.
4. 백남준 연구자에게는 유용한 책이다. 사실 이 책 번역 쉽지 않을 것 같다. 독일어인데 중간에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한국어 등> 국가 번역 기금 받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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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Review)> 1 백남준식 중용: 덜도 말고 더도 말고 70% 만족 How to be satisfied with 70%? 그의 유토피아: -1000% 살기. 여기서 -빼기보다 나누기 혹은 공유하기 그래서 백남준은 마음이 가장 부자. 예수왈 -10% 백남준 왈 -30%
2 지난 시간 [백남준&도이치] 그는 왜 독일에서 예술신 혹은 신화가 됐나 -독일은 백남준의 영원한 예술적 고향이다. 백남준, 독일에서 최고의 미술인사로 대우받다. 라인 강이 내려다보이는 1773년에 개교한 독일의 가장 명성 높은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 교수로 47세 때 초빙을 받았다.(과일?)
부인 시케코 말의 의하면 독일에서 주변에서 사람들에게 '마에스트로' 떠 받들며 칭송을 받았고,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했단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창안한 독일의 유명한 미술기획자 '클라우스 부스만Klaus Bußmann(1941년생)'은 백남준을 베니스비엔날레에 독일대표로 출전시키다. 백남준은 명실공이 독일 '명예이주예술가'가 되었고, 독일에서 백남준은 거의 베토벤급이다.
뒤셀도르프 시(의회)는 2007년 1월 29일 백남준 추모 1주년에 그를 애도하면서 추모, 그를 시민들에게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다. 바로 뒤셀도르프 시 전차에 대형 광고판처럼 그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붙이고 다니게 했다. 이곳 시민들 그를 기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래 문구“WHEN TOO PERFECT LIEBER GOTT BÖSE! 너무 완벽하면 신도 화를 낸다) 그러나 신과 너무 맞서지 마라! 이 말은 사실 백남준 신격화. 신과 싸우는 예술가 은유하다.
3 <질문> 백남준은 왜 독일에서 인기가 있었나?
독일작가에게 물었더니 음악과 미술을 섞어 독일인에 독특한 인상을 남긴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음악적 미술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이전까지 프랑스가 세계미술을 주도했지만 독일에서 나치가 등장하면서 유럽의 대부분 지식인이 미국으로 넘어갔고 그래서 미국미술이 급속하게 미국화되고 독일을 아직도 소외
게다가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쟁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으로 굉장한 심적 압박과 정신적 충격을 받아 주체할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1960년대 '보이스'와 동양에서 온 큰 응원군인 백남준이 혜성같이 나타나 경계를 벗어난 비디오아트를 독일에서 창안해 세계적 미술국가 되었다 독일에서 주는 모든 상을 다 받다.
4 백남준 교수취임 첫 공개수업 '파격적 수업 '비디오 비너스(1978)' 그의 제자와 지원해서 참가한 이보 데코빅(Ivo Dekovic) 쌍방적 소통과 참여의 미학을 들어간 공동작업, 진정한 소통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한다는 메시지. 여기에 합류한 이 제자는 나중에 독일 아헨 미술대학교 교수가 되다. 2017년 제 실수로 못 만나다.
한국에서 백남준의 에로티시즘과 맑시즘 금기시한다. 다음 강좌는 에로스에서 성철학으로 제목을 바꾸다. 교체 이런 철학에는 <말 이전의 몸>으로 하는 예술이 모든 게 문자화되면서 그 소통은 단절된다고 본다. 그리고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적 생명이 넘치는 영매 즉 '미디어'의 본령인 연결자를 강조했다.
5 <백남준과 보이스, 지구상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꽃 피운 유라시아 작가 등장>
보이스는 샤머니즘 관심은 남다른 체험. . 2차 대전 중 독일공군으로 출전했다, 전투 중 타타르족이 사는 부락에 추락. 의식 불명 상태에서 그곳 샤먼의 민간요법(동물의 지방과 비계 그리고 펠트 천으로 감싸는 치료법)으로 기적적으로 살려났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류라시아 작가가 되다 셔먼은 죽은 자마저도 산 자와 소통하게 하는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이후 보이스도 펠트나 기름덩어리 등을 활용하는 '온기조각'을 창출하게 된다. 냉전시대의 무기였죠. ‘사회 조각’ 확장된 예술개념 통해 사회의 치유와 변화 꿈꾸다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사람들하고 우리들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3천 년 전 우리 것을 몽골사람들이 보존하고 있어. 난 공자 노자 이런 사람들 이전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신석기시대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 그리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역사가 엉터리야. 대부분 일고 생각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뿐이지" -백남준 역사적 기록은 가진자의 기록이라보고 부정하다. 중국의 역사사 <사기>도 사기라고 보다
하여간 두 예술가 '선견자(voyant)'였다
6 유라사이 작가 탄생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1961년 제로미술운동에서 처음 만나다] Meeting of Joseph Beuys and Nam June Paik in Düsseldorf in 1961 세계 미술사에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바로 유라시아 작가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앞으로 예술만이 아니라 문명의 징표가 <유라시아 전성시대>를 미리 내다보고 그런 시대를 예언한 셈이다. 21세기 예술은 혼자 할 수 없는 시대 Life Long Collaboration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또한 창시자다. <강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일본인 백남준 연구가 '와타나베'씨 (Searching for EURASIA Joseph Beuys and Nam June Paik' Life Long Collaboration-Shinya Watanabe, Juni 2, 2017) 베를린 대 박사논문 발표
1961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1984년 도쿄 소케츠미술관 공연(Meeting of Joseph Beuys and Nam June Paik in Toyko in 1984)'으로 두 작가의 절정의 꽃을 피우다. 1984년 일본 공동공연에서 둘은 정말 완벽한 하모니로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였다. 1986년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굿을 제안하였고(요셉 보이스 유목민 샤먼식 타타르 민간 치료로 구사일생 살아난 후, 샤먼 신도가 되었고 ) 몽고지방의 무속신앙에 관심을 보인 보이스는 이에 흔케 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해 1986년 갑자기 사망, 둘의 꿈은 이루지 못했고 백남준의 고 보이스 4주기인 1990년 백남준 생일날 그를 위한 위령제 성격의 굿을 벌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서울 현대갤러리 뒤뜰에서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을 벌렸다.1990년 백남준, 죽은 친구 요셉 보이스를 살려내다[生死] (In 1990, Nam June Paik brings his friend Joseph Beuys back from the grave) 이렇게 서로 호형호제하던 백남준이었다
유라시아 이야기 지난번에 말한 대로 나도 유라시아적. 가장 한국적인 것과 가장 유럽적(어려서 독일문화를 많이 접하다)인 것을 추구했다. 미국과는 거리가 두다. 그러나 두 가지를 클로스오버 개인적은 한국에서는 백남준, 서양에서는 보들레르에 가장 관심이 많다. 평생 공부거리가 되었다.
나무만 잘 심어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보이스가 말하다. 그리고 서양샤먼 아티스트로서의 요셉 보이스 늑대나 코요테 소리가 나는 것 같다.
7 두 작가의 60년 유라시아 협업 후 60년만에 지금 거의 유라시아 자유무역 경제 공동체(RCEP)가 뜨다. 아직 러시아, 인도는 빠지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 정치 한중일·아세안 등 15개국, ‘세계최대 FTA’ RCEP 협정 서명
[슈피겔] 중국 외, 아시아 태평양 지역 14 개국 등 세계 최대 자유무역 지대 구축하다. 중국과 다른 지역 나라들 "지역적이고 포괄적 인 파트너십"에 서명. 22억 명의 인구, 세계 경제 생산량 약 1/3을 차지한다. 중국의 유럽과 미국에 대한 도전이다.
https://www.spiegel.de/wirtschaft/soziales/china-schmiedet-weltgroesste-freihandelszone-a-4c58ac56-1342-4947-828b-8e74d7b51566
<요셉 보이스> 백남준처럼 독일의 예술신(문화대통령)으로 군림하다. 그는 20세기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년 5월 21일-1528년 4월 6일)'였다. 두 사람은 외모도 많이 닮았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단축할 정도로 바닥의 삶으로 그의 신체적 헌신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존경을 받는 것 같다.
8 보이스 상징은 2-3가지 토끼와 도끼, 모자, 지방덩어리 오브제 등 보이스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온순한 토끼와 가까운 친구처럼 소통했다 유명한 말을 남기다. "완고한 이성주의로 무장한 인간보다 토끼가 현대미술을 더 잘 이해한다"라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그것을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아메리카는 나를 좋아한다> Performance로 1974. 뉴욕
그리고 백남준처럼 서구성상을 파괴하는 도끼가 또한 그의 상징이죠. 평론가로부터 '신야만인'이라고 불렸다. 보이스는 스스로를 '문화 갱단'이라고 했고, 백남준은 스스로 '문화 깡패'라고 했다. 두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도 확실하게 통한다.
사실 요셉 보이스는 별로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남아있는 작품은 거의 퍼포먼스의 부스러기 흔적뿐이다. 그는 야생 동물처럼 땅바닥을 기어다녔다. 그는 퍼포먼스 중 관중들로부터 야유를 받는 건 흔했고 독일의 기본 질서를 흔드는 행위예술을 많이 했기에 경찰에 신고되기도 했다. 사회적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죠.
10 그러나 프랑스 백남준 전문가 '장 폴 파르지에' 는 백남준/보이스 비교론에서 백남준이 보이스보다 한급 더 높은 예술가로 평가하고 있다. 백남준은 마이너스 셔면 아티스트 보이스는 플러스 셔면 아티스트로 구분하다.
[백남준& 바보야] <장자, 노자, 공자, 예수, 부처, 백남준, 보이스 이들은 다 바보처럼 보인다 하늘의 진리 '천진(天眞)'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1. 천재는 원래 바보야! 참으로 강한 자만이 바보가 될 수 있다. 천재도 때론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인스타인 메롱 사진도 있지요. 역시 천재만이 바보가 된다.
<백남준의 바보타령> 백남준은 누구인가요? "난 바보라고" - 왜요? "바보니까 바보지. 바보야 바보. 미친놈" - 젊어서 미친놈 소리 많이 들으셨죠? "그럼. 미국에선 아직도 미친놈이래" -2004년 조선일보인터뷰 중에서. 백남준은 삶과 예술을 창조하는 광대 바보짓 '난장굿' 병신춤 같은 '하늘의 진리' '천진(天眞)' 의 단계에 도달하다.
<천재급 예술가들이 이런 미친짓(광대짓)?, 결국 NO WAR>
[원할한 소통(참여)이야말로 전쟁예방의 지름길: 백남준의 평화철학]그러면서 그는 여기서 동서양의 소통이 현대문명의 핵심을 강조한다.
위에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만약 동양이 서양을 알고 있는 지식의 10분의 1이라도 서양이 알고 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소통은 바로 전쟁의 예방하는 지름길이라는 그의 평화철학이 엿보인다. <이제 중국시대>(뉴욕 2000년 이후) 이제는 상하이에서 전시 하고 싶다" 유언처럼 남겼다. 중국시대의 예언인가. 그래서 앞으로 미술시장 중심, '뉴욕'에서 '상하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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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 '안심낙관(1999)'이라는 비디오작품이 서울 강남구 학동로 445:<우리들병원(이상화 원장)>에 설치되어있다. 자신이 뇌졸중으로 쓰려져 오래 고생했지만 "병원의 역할을 환자를 안심시켜 낙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렇게 사회적 의사(무당) 몫도 한다.
<예술은 잘 노는 것 그래서 가장 창조력이 필요하다> "예술은 페스티벌이지요, 쉽게 말하면 잔치다. 왜 우리의 굿 있잖아요. 나는 굿쟁이예요.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도록 부추기는 광대나 다름없다. 나의 예술 철학은 관념을 무너뜨리자는 거지요. 수직이 아닌 귀납(수평)이다. 획일을 막기 위해 자유스런 작업을 한다. 민중이 춤을 추도록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지요" -백남준 <결론>
<백남준, 인류구원: 바로 자연과 문명의 조화. 그래서 'TV정원'이 나온 것인가?>
백남준, 인류구원: 바로 자연과 문명의 조화. 그래서 'TV정원'이 나온 것인가?> 서양역사='이기'중심(투쟁적 인간)=개발=대표상징이 티뷰/전자(첨단테크사회) 동양역사='자연'중심(생태적 인간)=보전=대표상징이 낙원/정원(최고이상사회) 백남준, 이 작품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다. 자연 50%, 문명 50%의 조화가 좋다/
<백남준, 인류구원: 바로 수학과 수신의 융합. 그래서 'TV부처'가 나온 것인가?>서양공부='수학'중심(과학적 인간)=기술=대표적 사물이 티뷰(첨단기술) 동양공부='수신'중심(도덕적 인간)=인품=대표적 사람이 부처(최고인격)
<백남준은 큐레이터를 독립된 작가, 비평가, 지휘자로 봤다>
[1] 질문: 'TV정원' 설치할 때 백남준 선생 어떤 지침이 있나요?
대답: (주로 독일과 유럽 등에서 백남준 작품을 수리하는 독일 출신 전자 테크니션, 요헨 자우어라커 씨, 한국 방문) 백남준 선생 이렇게 말했다. 큐레이터는 지휘자이자 비평가이기에 그 자신이 작가로 모든 것을 그(녀)에게 일임한다. 그러나 동시에 책임을 져야 한다. TV 정원을 그 지역과 그 나라에 따라 다른 재료가 쓰인다. 그 지역의 화초를 주로 사용하고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TV도 가능한다. 다만 작은 사이즈 TV와 큰 사이즈 TV의 적절한 배합은 필요하죠.[2] 질문: TV정원은 너무나 많이 고친다면 백남준 작품이라할 수 있나요?대답: 베토벤 누가 연주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베토벤 작품이다.
[3] 질문: 백남준 TV 고장날 것은 예상했나?
대답: 물론이다. 그것이 가능한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기를 바랬다. 내 개인의 이야기를 하면 다만 예술가적 측면에서 보면 작가는 더 좋아진 하이테크를 원하겠지만 미술관 측에서 볼 때 역사적인 것을 보여줘야 하는 사명이 있기에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잘 보전해서 보여주려고 할 것이다.
<인트로>1 빌 비올라가 본 그의 스승 백남준
[비올라(1951-) 2015년 봄에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기자간담회에서 백남준에 대해 언급한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백남준은 영업비밀도 다 공개하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소리겠죠.
"제가 젊었을 때 그때 당시 막 비디오아트가 태동하던 시기인데 당시에는 저는 운이 좋았어요. 제가 백남준 조수를 했거든요. 제 평생 그런 분은 처음 봤어요. 너무 에너지 넘치고 정말 재미도 있고 지극히 아름다운 분이였어요. 나이 든 분이나 젊은이든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여시고 제가 만난 사람 중에 최고의 분이셨죠.
백남준 선생의 경우 비디오아트를 창시자이시지만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쓰고자 하고 배우고자 하면 그 자료(소스)도 주저없이 열어주었어요. He was grateful!! 여러 번 반복하다. 그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보셨죠" 2015.03.06. 국제갤러리 비올라 인터뷰 중에서
백남준의 수제자 비올라는 성자처럼 영혼이 맑은 사람이었다. 비디오아트로 영상시를 쓰는 시인 같은 사람. 동업자인 아내를 보석처럼 여기는 그런 남성이었다.
비올라 왈 장자가 한 말 "탄생은 시작이 아니고 죽음은 끝이 아니다(Birth is not a beginning, and death is not an end)"를 인용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진리와 허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카오스에 빠져있지만, 그런 장벽을 넘어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저 너머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함을 언급하기도 했죠.
그 역시 동서문명의 결합을 강조하다.
동양이 놓친 철학과 가치관과 정신적 유산을 가져와 서구의 첨단 예술에 접목한다. 서양이 소홀히 하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역경을 이겨내게 힘을 주는 영혼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며 유한 속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무한의 세계로 갈 수 있는지 묻는다. 2015년 3월 6일
3 <한국이 21세기에 세계 1등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아래 우양미술관 소장품.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몽골제국, 한때 노마드 시대 말이 가장 빨랐다. 그래서 세계를 지배했다. 영국, 한때 해상권 시대 배가 가장 빨랐다.
한국은 정보화 시대 인터넷이 가장 빠르다. 아래 백남준 작품은 바로 그런 21세기 정보시대 한국의 모습을 잘 형상화하다. 추신: 정보가 가장 많은 사람이나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
4 <우리는 단일민족 아니다> 한국은 다민족, 이성계도 여진족의 손자, 중국의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 말갈족도 한국 혈통. 몽골의 칭기즈칸도 우리 혈통, 우랄알타이, 훈족(흉노족),스키타이(단군), 시베리아, 핀란드, 헝가리 다 우리와 같은 혈통(지난번 한국에 유학하는 헝가리 여성 만남. 이름쓰는 우리와 순서가 같다).
백남준은 페루까지 우리 혈통으로 본다. 가야국은 인도와 관련이 있다. 가야 지역에 키가 크고 코가 높은 사람도 많다. 우리가 중국과 싸울 필요가 없다. 한국의 백씨는 중국에서 온 것으로 믿고 그러나 백남준은 우리가 몽골에서 왔다고 보죠. 백남준은 놀라운 말을 했다. "선사시대, 우랄 알타이족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한국·네팔·라플란드(핀란드 등 북유럽)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더 먼 곳을 보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 새 지평선을 봤다"며 우리 혈통과 원류를 더 멀게 넓게 포괄적 보다.
5 <유럽과 아시아의 위상변화>
뒤샹과 백남준의 대결구조로 풍자한 중국작가 왕싱웨이(Wang Xingwei) I '늙고 불쌍한(가련한) 해밀턴(Poor Old Hamilton)' 220×280cm 1996/중국 신세대 작가 왕싱웨이의 이 작품은 아시아와 유럽과 위상변화를 풍자한 독창적 작품이다.
'늙고 불쌍한 해밀턴'은 '유럽'을 상징하고 마르셀 뒤샹의 대표작을 깨뜨리고 울고 있는 아이는 '아시아'를 상징한다. 유럽의 해밀턴은 사고뭉치인 아시아의 아이를 야단치지만 그 아이는 딴청을 부린다. 그 아이는 누구인가? 유럽의 최고 작가 마르셀 뒤샹과 아시아 최고 작가 백남준을 대결구조로 끌고 갔다는 점이 흥미롭다.
6 현존하는 최고철학자 'J. 하버마스(독일)'가 인류의 난제인 원활한 소통(과 시민참여)의 대안으로 제창한 '공론장이론(public sphere)'이 있다면, 백남준은 '비디오 공동시장(1970)' 즉 인터넷을 주창하다. 결국 두 사람의 아이디어는 같은 것.
7 하여간 결론적으로 말해 백남준 작품은 치열하고 신랄한 풍자와 야유가 있었기에 우리는 지상의 천국과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백남준의 예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만병통치 만사형통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소통과 참여'를 매개로 생활 속에서 꽃피워 온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이 아닌가싶다.
8 최순우 왈: 한미일 미술의 비교 "중국, 거만 하고 크고 과장하여 권위적이고 일본, 날씬하고 수다스럽다. 그러나 한국, 순리를 거스리지 않고 익살과 해학(한국미의 핵심, 백남준이 잘 보여주다)이 있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한국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멋'의 정신이다. 멋이란 뭔가? 평생 화두. 한국인의 최상의 목적은 '멋지게' 사는 것이다. 삶의 여백화? 혹은 일상의 예술화? 그런데 요즘 이런 정신을 잃어버리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를 걸다.
9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시대 오다 -백남준 1982년(퐁피두전) 때 예언>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매스메틱스(mathematics)의 차이는? 사이버네틱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생물의 자기 제어(自己制御)의 원리를 기계 장치에 적용하여 통신·제어·정보 처리 등의 기술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10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두한 것으로 미국의 수학자 위너(N. Wiener)에 의하여 창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공두뇌의 실현과 오토메이션의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두뇌학이라고 요즘 그런 시대가 온 게 확실하다. 우리는 사이버네틱스라는 말보다는 사이버 세상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백남준은 사이버아트를 맨처음 시도하다. 백남준은 위너를 좋아했고 그의 영향이다.
11 [백남준, 부르주아문화 우상파괴자 - 난장굿: 피아노 때려부수기, 바이올린을 질질 끌고 다니기 소대가리 전시장 앞에 걸기 백남준 독일시기(1959-1963) 소사
1) 초기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1959)
2)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구(1960) 삼퓨 포퍼먼스
3) 스톡하우젠 '오리기날레(Originale)' 〈심플(Simple)〉(1961)
4) 액션뮤직 작품은 유난히음악이 결합된 이른바 ‘액션뮤직’ (1962)
5)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1963)
6) 샬럿 무어먼은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1964)'
: 그 위상을 높이려 두루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존 케이지'와 '슈톡하우젠(독일 전자음악작곡가)'이 백남준을 중요인물로 천거하자 그를 초대키로 한 것이다. 무어먼은 백남준을 초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맞이하기 위해 직접 케네디공항으로 나갔다. 그때가 백남준이 32살, 샬럿은 30살이었다. 그녀는 그를 크게 환영하며 극진하게 대우했다. 하긴 이런 미인의 간청을 어떤 남자가 거절하겠는가.
백남준은 생동감 넘치는 뉴욕에 매료되어 1달간만 머물려다 정착한다. 하긴 시대를 꿰뚫고 있었던 그가 뉴욕이 세계문화의 중심지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게다가 1963년엔 케이지로부터 미국 초청을 받았고, 독일에서 만난 플럭서스 동지인 마치우나스, 카프로, G. 브레히트, B. 패터슨, 라몽트 영, 엘리슨 놀즈 등도 지원했다.
<1965년>'24 Stunden(24 Hours)' *[백남준 퍼포먼스하다 좋은 아이디어 얻다]
https://www.youtube.com/watch?v=ialGfDNijqc&t=3122s
를 얻어다고 하는데 예컨대 인터넷 같은 정말 그런가. 정말이라면 장자의 <무용지용>이 맞다. 가장 무용한 것이 가장 유용한 것이다. <아래사진> 1962년 6월 16일
6) 24시간 공연사건 '24 Stunden'(1965년)> 24시간 <체인점 발명자> 바로 이들 1965년 24시간 공연사건 '24 Stunden(24 Hours)' 이것이 자본주의의 상징인 24시간 <체인점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 무용한(가장 비경제적) 것이 유용한(가장 경제적인) 것이 되었다
Nam June Paik in 24 Stunden 1965. Photo by Dorine van der Klei. 발명가 과학자로서의 백남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발명의 정신을 이어가다
1 브락(Bazon Brock)교수, 24시간에 참가한 사람
통렬한 비판 없이 진정한 낙관주의는 불가능-백남준의 웃음 속에 예리한 비판이 서려있다 "신랄한 비판 없이 진정한 낙관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백남준의 천진한 웃음 속에 언제나 치열한 고민과 예리한 문명비판정신이 서려 있다고. 인간에게 산재한 문제를 풀려면 언제다 다시 처음정신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시작이 반이라고 지금 시작하면 거기서 밝은 미래와 희망이 생기지 않겠냐고 말한다.
1 이 포스터에 나오는 인명 세계 미술사를 주도하는 사람들 다수 포함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 1965년 6월 5일 0시부터 24시까지<5. Beuys and Paik’s 24 Hours Closing Event of Galerie Parnass in Wupperthal On June 5, 1965, the happening 24 Stunden [24 Hours] was held as the closing event of Galerie Parnass in Wupperthal. Founded by an architect Rolf Jähring in 1949, Galerie Parnass
2 «24시간 해프닝(24-hour Happening)»] 1965년. 24시간 편의점이 여기서부터 생겨난 것인가. 샬럿 무어먼과«로봇 K-456»이 백남준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다. 두 사람 모두 백남준의 악곡을 (다소 다른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24시간 해프닝»에 참여하다.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은 그녀의 유명한 투명 플라스틱 드레스를 입고 첼로를 연주하며 때때로 물통에 잠수한 다음 계속해서 물을 흘리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백남준 등을 올라타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3 <24 Stunden(1965년) 참가> [바존 브록(Bazon Brock)1936-] 독일 미술이론가. 부퍼탈 대학 교수. 마르쿠제와 아도르노 제자다. 2008년 백남준 아트센터 백남준 심포지엄에 참가. 강연할 때 직접 만나다 [수상 Award] 1992 : 취리히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2004 : Federal Cross of Merit, 1급 2012 : Karlsruhe University of Design 명예박사 2016 : 폰 데어 헤이트 문화상 2017 : 오스트리아 과학 및 예술 최고 명예의 십자가. 이 분이 흥미로운 이론 발표 "생각(denke)=감사(danke) 그것은 또한 생각을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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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박혜정석사논문> 마침내 '재현의 종말'과 '저자의 죽음'을 선고했다
<여기서 백남준, 노리는 건 뭔가? 바로 <뜻밖의 우연성,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돌발성, 비결정성(indeterminacy)> 이게 바로 예술의 원리>
백남준의 특별한 재능은 그의 에너지를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대중매체인 TV의 詩化로 인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모더니스트 콜라주의 교정된 형태에 전자 매체를 이용한 포스트모던적 형태를 결합시키다. 특히 그의 해프닝과 비디오 아트는 관객과 상호 소통시키려는 참여 예술을 지향하는 동시에 삶과 예술을 통합하려는 아방가르드의 이상을 공유한다. 나아가 '관객 참여'과 저항적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신을 반영했다. '결정성'보다 '우연성'을, 매체의 '순수성'보다 복합 매체적 '잡종성'을, 형식의 '폐쇄성'보다 '개방성'을 '의도성' 보다는 '돌발성'을 '완결' 보다는 '과정' 등을 통해 기존질서의 붕괴시켜 진정한 창조를 일궈냈다. 마침내 '재현의 종말'과 '저자의 죽음'을 선고했다. -박혜정
한국인인 백남준은 음악가로서 시작하여 음악 해체에 따른 그의 표현은 행위였고, 그 행위는 존 케이지라는 거장을 만남으로서 가열되었다. 백남준 퍼포먼스에서 나타난 특성은 그의 공연이 매우 극단적인 일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유머와 익살을 품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이건 요셉 보이스의 심오한 표현주의나 보스텔의 파괴적 허무주의와 다르게 경쾌하다. 일종의 익살극으로, 문명비판의 풍자적 방법으로 더욱 신랄할 수 있었으며, 그런 대중적 전달 방법으로 인해 관객에게 보다 더 쉽게 어필했다. 또한 백남준 퍼포먼스의 또 하나의 성과는 무대의 확장에 있다 [출처]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관한 연구 –박혜정
이를테면 1960년 작품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에서 쇼팽을 연주하고 있던 백남준은 갑자기 연주를 중단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는 그 옆에 준비된 부서진 피아노를 마구 휘젓다가는 악마같은 눈을 부릅뜨고 긴 부젓가락을 든 채 객석으로 뛰어내려가 케이지의 셔츠와 넥타이를 자르고, 머리에 샴푸를 퍼붓는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데이비스 튜더(David Tudore 미국 전위음악 작곡가 피아니스트 1956년부터 1961년까지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강의하다. 그는 존 케이지와 관련이 매우 깊다)에게도 샴푸를 퍼붓자 튜더(Tudore)옆에 앉아 있던 스톡하우젠(Karlheinz Stokhausen)이 위기를 느끼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한 그를 보고 백남준은 '너 따윈 필요 없어'라고 고함을 지르고는 공연장 밖으로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근방 술집에서 전화로 공연이 끝났음을 알렸던 이 악명 높은 사건은 해프닝 공연사상 가장 전설적인 일화로 남아 있다[출처]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관한 연구 -박혜정
16 "백남준은 문자언어가 아니라 시각언어로 철학을 실현한 예술가였다. 글보다 은유(metaphor)로, 말이 아니라 이미지와 설치로 성상파괴(Iconoclash)을 표현했다. 서구 근대화의 영향력이 해체되는 시점에서 그는 기존 담론과 다른 담론을 제시하며 근대화(내가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파시즘적 사고)에 대항했다. 동양 대 서양이 아니었다. 전 세계 예술과 철학과 사회를 연결하는 더 큰 시각이었다" - 백남준국제상 수상자 프랑스 인류학자 '라투르(Bruno Latour)' 말 http://blog.naver.com/sulsong21/221484507614
17<알고리즘과 인공지능시대가 오다> 예언 *<인공지능>예언
백남준이 1983년 퐁피두 전시 때 만든 개념이다. TV세트에 인공지능 즉 칩을 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백남준은 프랑스방송과 인터뷰에서 프랑스어로 이렇게 말했다. "J'ai essayé de <mettre un nouveau cerveau dans la téléviseur" 나는 TV 속에 새로운 두뇌를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백남준은 TV에 시간의 영원을 담아 오케스트라처럼 지휘하는 예술가였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매스메틱스(mathematics)의 차이는 뭔가? 사이버네틱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생물의 자기 제어(自己制御)의 원리를 기계 장치에 적용하여 통신·제어·정보 처리 등의 기술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두한 것으로 미국의 수학자 위너(N. Wiener)에 의하여 창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공두뇌의 실현과 오토메이션의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두뇌학이라고 요즘 그런 시대가 온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사이버네틱스라는 말보다는 사이버 세상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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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백남준&독일책] 독일 8명 유명예술가 묻고, 백남준 답하다
네오 다다 운동과 플럭서스 미술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전후 일본 급진적 실험 미술 단체인 하이 레드 센터(Hi-Red Center)는 1963년에서 1964년 까지. 딱 1년 정도만 유지가 되다. 백남준도 여기에 1960년대 초 잠시 참가한 적이 있다. 일본의 진보 운동 단체는 60대 극에 달하더니 70년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Tate glossary definition for Hi-Red Center: A short-lived radical art collective thatbetween 1963 and 1964
"피부는 현실과의 인터페이스에서 부적절하게 되었다. 이제는 기술이 신체의 새로운 존재의 막이 되었다" Skin has become inadequate interfacing with reality. Technology has become the body's new membrane of existence –NJ 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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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일류대학을 가려고 하나? 서울에 있는 대학이나 지방에 있는 대학이나 학교 차는 없다. 다만 이미지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 장 보들리야르 <보들리야르의 소비사회 비판,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진실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가상) 이미지가 진실을 지배하다>
아래 그림을 보들리야르는 시뮬라크르(가짜진실)라고 말한다. 아래보고 사람들은 흔히 파이프라고 하지만 잘 보면 사실은 파이프가 아니다. 우리가 날마다 뉴스를 보지만 사실 그건 '광고비'가 만든 '가짜뉴스(시뮬라크르)''유사정보'다.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이 파아프가 아니다 이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 작품) 소비사회의 이론가 보드리야르 "사람들은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사는 것이다"
백남준 1973년 대표작 '글로벌 그루브'(전 지구적 축제와 향연을 즐기자. 28분)는 예술가 백남준과 기술자 존 갓프리(J. Godfrey) 합작이다. 이 작품은 프리 인터넷(Pre Internet) 인터넷으로 가는 중간 과정 중 하나이다. *아래 사진 이 작품의 성공을 기뻐하는 백남준과 갓프리. 이 작품에 출연한 샬롯 무어먼도 보인다.
기술과 예술의 협업작업 백남준 평생에 이어졌다] Video Lab의 감독 엔지니어인 John Godfrey(뉴욕대 음악학 작곡 공부)는 백남준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1973년부터 백남준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Global Groove을 공동작업했다. Global Groove는 팝 음악(Mitch Ryder 및 Detroit Wheels), 아방가르드(John Cage) 및 최면 추상 이미지를 포괄하는 "내일의 비디오 풍경"을 통해 짜릿한 28분의 영상 투어이다. 일본 펩시 광고 등이 들어가는 Global Groove뮤직 비디오 장르와 채널 서핑 등 지금은 당연시 되는 다른 21세기 영상기술에서 명백한 선구자였다. Nam June Paik's collaborator on the "Global Groove" video looks back on his time as head engineer at WNET's TV Lab in the 1970s, a high-water mark for experimentation and innovation in the medium.
"사람들은 내게 왜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하느냐고 많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그들에게 생중계 위성방송은 나의 무모함에 와닿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험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생방송은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현실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생중계는 베타멕스(Betamax 소니녹음기)처럼 리와인드(rewind)가 안 된다. 우리들의 인생처럼"
“위너(미국의 천재적 수학자)가 인간화된 기술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인간화된 예술을 이야기 할 것이다” "나는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 기계를 사용한다(1980)" -백남준. 백남준은 기술의 예술화를 추구하다. 기술이라는 것이 아무리 첨단의 이기를 준다고 해도 인간에게 괴로움를 줄 수도 있고 즐거움을 줄 수도 있다. 칼을 잘 쓰면 사람을 살리지만 칼을 잘 못 쓰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기술과 발달과 예술의 정신은 항상 긴장된 관계 속에서 상화 보완적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백남준은 이런 말도 했다.
<백남준 '메카트론(1995)' 작품에서 하이테크의 장단점( the helpful and harmful aspects of technology)을 논하다. 그러나 전자매체의 발전이 미디어가 어떻게 상업적으로 오용될 수 있는지도 경고하다. 미디어 작가로서 가짜 뉴스의 출현에 대한 경계심도 놓치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 메가트론/매트릭스(Megatron / Matrix, 1995년작 아래)도 소개된다. (giant-screen, super-jumbo, mega-multiple screen) 광고판 크기의 대형사이즈8 채널 비디오 설치다. 이런 작품은 미디어의 광범위한 범위와 색상과 소리의 파동으로 나선형으로 흐르는 이미지에 대한 끊임없는 변화를 보여준다.
*백남준 메가트론/매트릭스에 애착이 많았지만 건강과 자금 등 여러가지의 불충분한 여건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백남준 한강변에 이 시리즈 작품 설치를 착안했지만 미완의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정성 선생의 말
"텔레비전은 평생 우리를 공격했다" -백남준 [평] 우리는 지금도 백남준에 이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가짜 정보와 혹은 일-방향적인 뉴스와 싸우고 있다. 그래서 백남준에게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었을 때 민주주의는 '말대꾸(댓글)하는 것이다'라고 답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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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오늘 백해영갤러리에서 제공하는 백남준 강좌 9번째 [백남준&독일책]. <백남준
독일어판 2009년 10월 30일 발간 Nam June Paik(German) 30 Oct. 2009. 저자 피크하우스(Peter Moritz Pickhaus) 편집자: 레자나 비어볼(Regina Wyrwoll> 저자 피크하우스(Peter Moritz Pickhaus)와 백남준에 시게코에게도 묻지만 미술집필가 바바라 빈(B. Wien) 백남준에게만 묻는다. 그리고 백남준을 알거나 가까이 지닌 독일의 다른 작가들에게도 백남준과의 관한 일화나 경험 등을 묻는다. 총 등장인물이 저자 빼고 9명이다.
[1] <백남준은 실험적 예술가, 세계시민, 미디어 개척자, 사상적 곡예사, 발명가, 한국계 코뿔소(?) 이런 독특한 예술가를 한마디로 특징 짓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독일 저자 '피터 모리츠 피크하우스(Peter Moritz Pickshaus)'가 백남준과 그 전문가들 혹은 관련자들과 나눈 인터뷰 8편을 이 책에 실었다. 아직 번역이 안 되어 저자들만 간다 소개할게요(Nam June Paik: experimental artist, citizen of the world, media pioneer, thought acrobat, inventor of that which is "Paikist", Rheinlander of Korean background; it is still impossible to characterise this unique artist in one word. Peter Moritz Pickshaus attempts to capture the elusive Nam June Paik in eight conversations. Particular focuses of interest are the early years in a Fluxus dominated Cologne and his professorship at the Kunstakademie in Düsseldorf. <Nam June Paik Peter Moritz Pickhaus (German) Paperback: 30 Oct. 2009 by Moritz Pickshaus (Author), Regina Wyrwoll (Editor)>)
[2] <백남준 연구자에게는 꼭 필요한 책. 사실 이 책 번역 쉽지 않을 것 같다. 독일어인데 중간에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한국어 등도 들어가 있다> [3] <책 제목; 백남준. 편집(저자): 피터 모리츠 피크하우스(Pickshaus). 사진: Manfred Leve. 에너지-시너지(Energies-Synergies) 시리즈 7번. 출판사: 발터 쾨니히(쾰른) 발행연도: 2009. 쪽수: 152. 가격: 16.80유로. ISBN: 978-3-86560-552-8
[3]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 Peter Moritz Pickshaus, Mary Bauermeister, Wolf Vostell, Manfred Montwé, Ursula Wevers, Ingo Günther, Barbara Wien, Wulf Herzogenrath, Shigeko Kubota 백남준 초기 플럭서스 시절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의 교수 시절에 초점>[5] 1791년에 창업한 독일 연필 기업 파버 카스텔(Faber-Castell) 이봉기 사장, 국가 번역 기금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
<1>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백남준 이곳 독일에서 새로운 뮤즈을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다. 백남준은 1959년에 갤러리22에서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 전시에서 생애 첫 피아노 부수기 퍼포먼스를 한 후 본격적인 행위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바우어마이스터도 백남준 같은 ‘전위적인 예술가’였다. 독일 생활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백남준을 극진하게 도와주며 둘은 ‘예술적 파트너’가 됐다. 1960년 10월에 쾰른에서 벌인 백남준의 대표적 퍼포먼스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가 바로 바우어마이스터의 작업실에서 선보였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artisan)이었고 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그녀는 백남준아트센터에 초대를 받아 몇 번 한국에 왔었다. 그녀는 백남준이 독일생활에 익숙하지 못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
<2> 백남준(인터뷰집) 저자 <구보타 시게코>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구보타는 1963년 도쿄 쇼게츠 회관에서 백남준이 하는 머리카락으로 그림 그리기 괴상한 퍼포먼스롤 보고 반해 그에 대한 연심을 품었다. 그러다가 구보타는 1964년 예술가의 꿈을 품고 단단한 결심을 하고 뉴욕으로 갔는데 거기서 같은 플럭서스회원으로 백남준과 재회한다.
거의 이 시기 유명한 스캔들이 바로 파격적 <버자이너 페인팅>펼쳤다. 사실 내 사랑 백남준에 구보타 여사는 이것은 순전히 백남준의 숨은 연출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여간 서양미술사에 이것을 영원힌 기록될 대사건이었다.
백남준을 연모한 지 14년 만에 구보타 여사는 백남준과 1977년 결혼하게 되는 그 사연이 기막히다. 당시 구보타 시게코여사는 아이가 갖고 싶어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갔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과 자궁암 진단받는다. 구보타여사는 당시 의료보험이 없이 도무지 수술을 할 상황이 안 되자 일본으로 갈 계획까지 세웠는데 그 사연을 듣고 백남준 그러면 내가 재단 측에서 들어준 보험이 있으니 결혼하지고 청혼한 것이다. 자녀가 생기면 예술 활동하기 힘들다고 완강하게 결혼을 반대하던 백남준도 결국 이를 포기하고 만다.
구보타여사는 조형예술교육을 받지 않는 백남준의 조형적 측면을 도와 그녀는 역시 백남준 비디오아트기술을 배우면서 서로 도움을 받는다 구보타도 백남준 못지 않게 유명작가로 한때 미국 유명잡지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 백남준 보다 먼저 실릴 정도였다.
그녀의 대표작은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비디오 아트로 재해석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는 뒤샹의 고향 루앙에 가서 작업한 <뒤샹의 무덤> 등이 있다. 1996년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구보타는 10년간 간호에만 작품활동을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며 "남편과 함께한 시간자체가 예술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 백남준이 아프니까 이제 내가 아내인 것 같고, 이제서야 우리는 허니문을 온 것 같다" 고백했다.
이에 답이라도 하듯 백남준은 부부애를 과시하며 "시게코, 우리가 젊었을 때 당신은 내게 최고의 연인이었어. 이제 내가 늙으니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 그리고 부처가 되었어"라고 화답했다.끝으로 한 가지 에피스드를 소개하면 김찬동 현재 경기도박물관 본부장이 전해주는 이야기다 "예전에 뉴욕작업실로 백 선생님을 방문하러 갔었을 때 시게코 여사가 한국정부가 남편을 위해 해준 게 뭐있냐고 호되게 야단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3> 바바라 빈(Barbara Wien) 백남준(인터뷰집) 독일어판 9명 저자 중 한 사람 바바라 빈(Barbara Wien 1953-)
그녀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베를린에서 미술평론가 겸 편집자로 일했다. 그녀는 Bernhard Joh. Blume, Günter Brus, Ludwig Gosewitz, Dorothy Iannone, Shigeko Kubota, Hermann Nitsch, Nam June Paik, Dieter Roth, Rainer Ruthenbeck, André Thomkins 및 Arthur Lehning에 대한 글과 인터뷰 발표
<4> 볼프 보스텔Wolf Vostell 1932-199 백남준 동시대
백남준(인터뷰집) 독일어판 9명 저자 중 한 사람 볼프 보스텔Wolf Vostell 1932-1998은 독일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비디오 아트 및 설치 아트의 얼리 어답터 중 1명이자 Happenings and Fluxus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블러링(bluring) 과 데콜라주(Décollage)같은 기법은 그의 작품의 특징이며, 콘크리트에 물체를 삽입하고 그의 작품에 텔레비전 세트를 사용하다.
<5>Manfred Leve(1936-2012)박사
백남준(인터뷰집) 독일어판 9명 저자 중 한 사람 Manfred Leve(1936-2012) 박사. 오른쪽 그의 사진작품 "나는 사진을 만들지 않는다. 나는 사진을 찍는다(계산하지 않는 사진 찍기)"라는 말을 남겼다. 2007년 과천 미술관 백남준 사진전에서 뵙다 / Manfred Leve는 1936년 독일 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사진은 다큐멘터리 기록 그 이상이다. 그의 목표는 예술적 행동과 청중 반응의 상호 작용을 행동 과정의 침투성의 증거로 포착하는 것도 아니고, 행동의 순간을 고정된 지점으로 강조하고 발표함으로써 사건의 순간적인 성격을 특징 짓는 것도 아니다. 거친 종이에 이미지가 흐려지는 방식으로 찍는다.
<6>만프레드 몬트베(Manfred Montwe, 1940-)
백남준(인터뷰집) 독일어판 9명 저자 중 한 사람 만프레드 몬트베(Manfred Montwe, 1940-) 오른쪽 사진 <걷기를 위한 선> 그의 작품이다. 서구에서 신성시 하는 성상인 바이올린을 질질 끌고 다니다.
<7> 가장 중요한 인물 Herzogenrath 헤르조겐라트
백남준(인터뷰) 독일어판 9명 저자 중 한 사람 Wulf Herzogenrath 미술사 박사/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만나다. 항상 웃는 모습. 백남준 전문가. 1977년 카셀 도쿠멘타 비디오 아트분야 책임자.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미술 부문 회원. 백남준 아카이브가 가장 많은 브레멘 미술관 관장. 예술과 과학을위한 브레멘 메달수상(2011)
프랑크푸르트 Information Center 백남준 작품(오른쪽 1번째 디지털 노마드를 상징하는 중요작품) 프리 벨맨(Pre Bell Man 1991년작) 독일의 벡남준 전공 5명 박사와 함께 7년 만에 복원하다. 거기 총 책임자였다. [백남준] 'Pre Bell Man(프리 벨 맨)' 재복원 7년 걸리다<독일의 백남준 전문가 미디어아트 전문가 박사 5명과 비박사 1명, 총 6명이 백남준의 Pre Bell Man에 대해서 2019년 3월 4일 학술발표를 하다> 4. März 2019 Pre Bell Man이 재정비되어 6월부터 전시할 예정이다 https://seulsong.tistory.com/466
백남준 프리 맨 벨 복원작업에 참가한 독일 미디어 아트 전문가 6명 1명 빼고 다 가 박사다 작품 하나 복원하는데 이렇게 공을 들인다. [1] Prof. Dr. Wulf Herzogenrath, Experte [2] Prof. Dr. Bernhard Serexhe, Experte [3] Dr. Franziska Stöhr, Expertin [4] Dr. Hanna B. Hölling, Expertin [5] Dr. Kia Vahland, Süddeutsche Zeitung [6] Mario von Kelterborn, Sammler Moderation: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 커뮤니케이션 박물관에서 백남준 한 작품 복원을 두고 논쟁이 치열했다 마침내 복원을 시작하다 백남준의 기마상 하나 복원하는데 5년이 걸리고, 백남준 관련 독일 박사 5명 학술적 토론을 하고 역시 독일답다> 김형순 https://seulsong.tistory.com/466
<8번> 잉고 귄터(Ingo Günther)
백남준(인터뷰집) 독일어판 9명 저자 중 한사람 잉고 귄터(Ingo Günther) 독일에서 태어난 뉴욕에 기반을 둔 뉴 미디어 아티스트로, 예술과 저널리즘 모두에서 매핑 및 데이터 시각화 사용을 개척 한 공로를 인정 받았다. 수상 경력에 빛나는 그의 작품은 20 개국 이상에서 상영, 여러 글로벌 기관 및 박물관의 영구 컬렉션.
프랑크푸르트와 1983년부터 백남준의 강의를 들었던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잉고 귄터(1957년생)는 ‘글로브, 글로벌: 사회 변혁과 미디어 아트’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그는 1985년에서 1994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브라운슈바이크 미술대학과 쾰른 미디어 예술대학에서 가르친 바 있다. 귄터는 언론, 예술과 정치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을 통해 최신 정치 논쟁에 참여한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정치적 주제에 관한 심층적인 조사와 분석의 결과인 것이다. 그의 연구가 시각적 자료로 표현됨으로써 넓은 층이 관람할 수 있는 동시에 그의 작품은 세계적 투명성에 대한 요구이자 실현이기도 하다. 미디어를 다루는 귄터의 방식은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나타난 관점, 즉, 미디어가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발전과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의견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는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미디어가 전체주의 독재의 통제수단으로 전락한 미래의 디스토피아와는 상반된다.
<9> 우르술라 위 버스Ursula Wevers 1943-1972
백남준(인터뷰집) 독일어판 9명 저자 중 한 사람 Ursula Wevers 1943-1972 뒤셀도르프 미대 공부하다. 부퍼탈 미대 교수다.
<10> Peter Moritz Pickhaus 저자 LeseMusik
1955년생 독일 현대미술사가다. 백남준(2009)외에도 많은 저서를 냈다.
<추가>[백남준: 글로벌 비저너리(NPaik: Global Visionary)’]전.
워싱턴 스미소니언 아메리카 국립미술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에서 2012년 12월 13일 개막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우상)이 지원에 나섰다.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로 알려진 백남준(1932-2006)은 전위음악과 행위예술 등에 기반한 혁신적인 미디어 작품 활동으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으며, 20세기 후반 미술계와 후배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는 스미소니언 미술관이 2009년 구입한 백남준 아카이브에서 선별한 자료와 그를 세계적 아티스트 반열에 올려놓은 주요 작품들을 소개하는 회고전으로 동미술관이 백남준 아카이브 소장 이후 선보이는 첫 전시이다[...]
Curator Michael Mansfield working in the Paik Archive 백남준이 돌아가셨을 때 그의 3곳 작업실에 나온 7트럭 분의 쓰레기들(백남준이 새로운 작품을 하기 위해서 모아둔 골동품들)은 다 스미소니언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아카이브로 옮겨졌고 지금도 큐레이터 미술전문가들이 분류작업을 한다. 한국 같았으면 정말 다 쓰레기통이 들어갔을지 모른다. 백남준 아카이브 분류작업을 하는 미국국립미술관 큐레이터 마이클 맨스필드 그리고 1년 반 후 그 작업을 일부 공개하는 전시회(Global Visonary)가 스미소니언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열렸다
백남준 아트센터 <2003년 국제공모>에서 독일의 젊은 건축가 <크리스텐 쉐멜(Kirsten Schemel)>이 대상을 차지했으나 그가 제시한 공사비가 <720억>을 준비위원회가 <360억>밖에 확보 못해 무산되는가 했는데 쉐멜 스탄코빅 건축사무소에 같이 일하는 <마리나 스탄코빅(Marina Stankovic)>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스탄코빅의 말에 의하면 미술관 건물을 위에서 보면 'P(Paik)'자 그랜드피아노의 모습을 하고 있고 주변 자연과도 어울리게 설계하여 주변의 산자락이나 아트센터가 어울린다. 백남준 혹은 내 기념관 생긴다면 <백남준이 사는 집> 명칭을 붙여라.
<다음 강좌 예고 백남준과 축제>
<백남준의 드로잉 편지>, 죽음의 문턱에서 유치원 친구에게 구원의 신호 보내다. 이경희 여사와 인터뷰할 때 이 작품에 대해서 들었다. 73장의 콜라주로 되어 있는 유치원 때 이경희 여사에게 '춘'을 느꼈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백남준 어려서부터 성적 감각에 매우 예민했다. 그러니 전자파동과 색채에는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죽음의 직전에서 몸을 일으킨 작가는 자신의 가장 순수했던 유년기의 기억과 무의식을 가진 친구에게 이 루크 기억이라는 작품을 보내왔다" -김남수 * 여기서 루트기억을 순수기억인가 일종의 노스탤지어일 것이다 다음 강좌 예고편 ===>
10나는 맑스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읽기에 너무 어렵다. 그래서 집에 맑스의 자본론 프랑스어판을 가지고 있다. 가끔 가다가 아무 페이지나 펴고 한 두 줄 읽는다. 오늘 이 책 딱 중간쯤 한 페이지를 펴니까 이런 문장이 나온다. 맑스사상의 키워드를 두 단어로 요약하면 '(경제) 착취와 (인간) 소외'이다. 그런데 여기 내용은 소외에 대한 것이다. "인간을 단지 하나의 작동하는 단순한 기계부속품처럼 고립된 도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소리다. 자본주의의 분업은 효율적이지만 인간에게 극심한 소외와 심각한 고립감을 낳는다는 메시지다. La machine-outil isolée, telle que nous l'avons étudiée jusqu'ici, tombe par cela même au rang d'un simple organe du mécanisme d'opération./
<프랑스 '리베라시옹(Liberation)' 신문과 인터뷰>
"TV는 미술시장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술만큼 훌륭한 미디어가 없어요. 그러나 TV는 예술을 이용할 줄 모릅니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고급 예술과 록 음악 같은 대중 예술 사이에 간극이 있는데 여러 연애물을 소개하는 버라이어티쇼 방송조차 이 둘은 적절하게 혼합하지 못하지요. 제가 그걸 하렵니다" -1983.12.31 백남준, 프랑스 리베라시옹 신문과 인터뷰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세계 최초의 쌍방향 방송이다. 나는 이것을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자랑할 수 있다. TV문화는 레이더로 시작되었으며, 레이더는 쌍방향이다. 즉 TV는 쌍방향에서 시작된 것이다",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 시작되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백남준&BTS] 추가하기 백남준 예술관에서는 대중예술을 고급예술에서 전혀 배척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급 예술에 대중 예술을 포함시켜려고 한 것이다. 예를 들면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에서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을 차례로 보여주고 그 비중도 반반씩으로 배정했다. 그것은 백남준이 대중 예술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 즉 고급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도 백남준 매우 앞선 사고를 한 것이다. 요즘 케이팝의 영웅이 된 방탄소년단(BTS)을 백남준은 이미 예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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