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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유튜브

[백남준&도이치] <08강+> 그는 왜 독일에서 신화가 되었나

백남준을 공부하는 것이 이제 나에게는 예술과 축제 

백남준 사후 1주년 기념 행사 뒤셀도르프

[1] 백남준은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 받았나 <위사진> 백남준 사후 1주년 기념 때 뒤셀도르프 시 전차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붙이고 다녔다. 백남준에게 독일은 가장 오래된 고향이고, 라인 강은 그의 예술적 영감을 준 젖줄이었다. 백남준은 라인 강 물결에서 TV주사선을 봤고 "눈부신 날, 라인 강의 물결을 세라"고 노래했다. 예술과 TV를 오묘하게 결합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켰다.

www.youtube.com/watch?v=Z4hw_0RrLJw
부인 '시게코' 증언에 의하면 백남준은 독일에서 예술가에 대한 최고 존칭인 '마에스트로' 칭송을 받았고, 웬만한 카페에 가도 '마에스트로' 오셨다며 융숭하게 대접했고 또한 독일인은 백남준을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했단다.

백남준은 독일에서 주는 모든 미술상을 다 받았다.

백남준은 1989년 2회 '쿠르트 슈비터스(K. Schwitters)'상, 1991년 '고슬리 황제반지(Goslar Kaiser Ring)'상,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독일대표) '황금사자상', 1997년 '괴테 상', 1998년 독일 구겐하임개관(1997년) 후 '토머스 크렌스(T. Krens)'상, 2001년 8회 '빌헬름 렘브루크(W. Lehmbruck)'상 등 독일 최고예술상은 다 휩쓸었다. 그외 일본에서 미술계 노벨상 교토상 수상(
Kyoto Prize in Arts and Philosophy) 존 케이지도 이상을 받다. 김대중도 때 큰 상(2000년 금관문화훈장) 받다. 이날 수상 소감에서 "내가 이런 좋은 상을 탈 줄 알았다면, '백'씨 대신 '천'씨 성을 타고나 오래오래 살면서 훌륭한 작품을 더 만들면 좋았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도 보였다.

이는 그가 독일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징표다. 백남준은 명실공이 독일'명예이주예술가'였다. 그래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그가 독일대표미술가로 나갔다. 그런데 그는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을 받았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많지만 최근 취재한 독일작가 '알프레드 하르트' 씨의 대담에도 그 단초가 보인다.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건, 알다시피 2차 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세계미술을,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했다. 독일은 변방이었는데 70년대 '요셉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혜성처럼 나타나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아트'를 창안해 독일미술을 세계적 위상으로 끌어올려 '아트스타'가 되었다.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을 뒤바꾼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다빈치' 같은 예술가였다"

내가 생각할 때 백남준이 독일에게 환영을 받은 건 바로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쟁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으로 굉장한 심적 압박과 정신적 충격을 받아 주체할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천개 손도 모자란다는 '천수관음보살'처럼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해방감과 통렬한 웃음을 선물하며 새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리라.

[백남준&보들레르] 예고편 나의 생애를 보면 유라시아적이다. 미국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과 가장 유럽적인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80년대 이것이 충돌했다. 그래서 구파발(구라파보다는 구파발)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 두 가지를 생각해 보면 클로스오버, 다양한 레이어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충돌할 것도 없다. 바로 멀티미디어와 다른 인터 미디어다.역시 나는 한국에서는 백남준, 서양에서는 보들레르에 가장 관심이 많다. 평생 공부거리다.

<백남준의 모든 감각을 종합하는 다원 예술 혹은 총체예술(Integral Art)에 영감을 준 보들레르> "보들레르, 그는 머리를 녹색으로 염색하고 목에 보아를 두르고 돌아 다녔다. (세계 최초로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프리랜서 문인이자 미술평론가였다) 그는 지구 상 최초의 펑크."천재이면서 퇴폐적 깡패[불한당] 시인. Quand tout le monde veut être aimé, lui ne craignait pas d'être détesté" 이 남자는 못말리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받고 싶어할 때 그는 미움을 받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l’homme était insupportable. Charles Baudelaire ne respectait rien, ne supportait aucune obligation envers qui que ce soit. 아무도 존중하지 않았고 어떤 의무감도 없었다. 최악의 광기를 주변사람들에게 쏟아부었다. 마약과 환각에 빠져 산 댄디였다.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황폐화시키는 아름다움(악 미학)을 포착해 그걸 시를 쓰는 것 외 아무런 야망도 없었다

[2] 백남준 말기 2004년 10월 6일 뉴욕에서 조선일보 정재연 기자가 백남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백남준 왈 "난 바보야!" 이제 백남준 절대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대답이 짧다. 선문답 같다. 천진(天眞, 하늘의 진실)의 신이 되다. https://www.chosun.com/…/html…/2004/10/06/2004100670339.html

[3] [백남준&조선일보] <백남준 형(백남일)은 1952년 망할 뻔한 조선일보를 살려주다> -아래는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는 백남준 기사를 열심히 써줘야 했나(?)

“1952년 4월…머잖아 누적되는 부채를 감당 못해 신문사가 문을 닫거나 소유권을 남에게 넘겨줘야 할 판이었다.…고민 끝에 방일영은 친구인 백남일을 찾아갔다. 백남일은 방일영의 제일고보(경기중·고) 동창이었는데, 그 당시 태창방직 사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재력도 있고, 신문사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아는 친구였다. 일영의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난 백남일은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고 자금을 돌려주겠노라고 했다. 상세한 이야기나 조건도 없었다. 무이자로 현금 5억환을 빌려주겠으니 조선일보 부흥에 쓰라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유명한 말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4] <백남준 유럽 가보니까 다 쓰레기야> [1992년 백남준과 김용옥 인터뷰 중 일부내용] "내가 가서 보니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인상파도 독일의 작곡가들도 다 쓰레기야" - 백남준 김용옥 인터뷰 중에서 1992년

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거 없는 거야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가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 같았어. 난 여태까지 일본 무서워해본 적 없거든 일본에서 음악공부 좀 하다가 질력이 나서 ...진짜 음악공부 해봐야겠다고 본고장으로 가자해서 경박한 나라는 안 가고 독일 찾아갔거든 그래서 독일에가서 보니깐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그것뿐이 아니야 미술도 그래. 난 예술에 그 유명한 그림들 일본 놈들이 근사하게 인쇄해놓은 것으로만 봤잖아. 그래서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고 동경했지 그런데 직접가보니깐 허름한 캔버스위에 나달나달하는 페인트 형편없더라고 뭐 인상파다 르네상스 예술이다. 루벤스다 하는 것 직접 보니깐 형편이 없었던 비싸다고 하니깐 대단하게 보였던 거야 난 정말 실망했고 이따위 것 가지고 내게 그렇게도 동경했던가 하구 말이야. 박물관에 멍하니 앉아있었어. 작곡가도 말야 그 대단한 독일이라는데 쓸 만한 몸에 4-5명밖에 안 되더라고 4-5명 정도는 탑이었어. 그러나 나머지는 어차피 쓰레기 아냐 그러니깐 난 용기가 나더라고. 우선 4-5명밖에는 안 되는가 내가 낄 자리도 아직 많겠고 생각이 들었고 또 못겨두 어차피 시원찮은 놈들뿐인데 그 시원찮은 놈들 속에 내 시원찮은 이름 하나 더 끼어 넣는 들 죄송할 게 없잖아. 피차 마찬가진데 그래서 난 곧바로 작곡 행세를 해버린 거야 그리고 지금부터 굵게 놀았지 그러니까 내가 독일에서 작곡가가 된 것으로 훌륭한 작곡가 때문이 아니라 나쁜 작곡가들이 하도 많아서 자신감이 생겼던 것 뿐이지

상하이 하우호텔 갤러리 아트숍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미국국기를 볼 수 있다. Jasper Johns라는 이름 보인다. 펄럭이는 듯 국기가 활기차고 경쾌하다. 미국지도가 깔려있다. 백남준 이걸 전자아트, 네온아트로 변형시키다.

물감페인팅과 전자페인팅의 차이다.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유명한 말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백남준 첫 전시에서 서양미술의 목을 쳐버리다] <이영철 선생의 해석> 도살된 소머리: 1963년 전시장 입구에 백남준은 도살된 소머리를 걸었다.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면서 대기 중이던 구청 직원이 출동하여 한 시간만에 떼어냈지만 기록사진이 널리 유포되어 그에 대한 궁금증이 적지 않다. 몇 가지 의미를 추론하면 다음과 같다. [1] 소머리를 베어 나무에 걸어두거나 땅에 묻어 행위는 몽골 알타이게 샤머니즘에 기원한 것이다 소머리는 굿이나 제사의 제물이다 [2] 소머리는 얼굴이 검고 뿔은 초생달 형태라 흔히 달로 상정되어 왔다 -엘리아데의 종교 형태론 달은 위성아트를 상징하고 달은 또한 불교가 말하는 불성 부처상 즉 달이다 다시 말해 위성아트로 연결된다. [3] 백남준과 평생 우정을 지켜온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피아노는 성스러운 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아노 다리가 자르거나 부수는 사건이 일어날때 나는 소리는 바로 소머리를 벨때 사아에 신화적 상상의 세계와 접속한다 [4] 소머리를 베어버리는 행위 그것은 아나키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단어를 머리를 없애버리는 즉 무권력을 의미한다. 권력을 부정하는 적극적 의미도 담겨 있다 아나키즘은 어떤 틀에도얽매이지 않는 그 어떤 규정도 거부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자유다 그의 자유는 그냥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위한 자유이며 자기를 위한 위반이다 omn.kr/963e

 

독일은 백남준의 영원한 예술적 고향

'나의 예술적 고향, 라인란트의 백남준' 국립현대미술관 9월 30일까지

www.ohmynews.com

www.youtube.com/watch?v=KWMQh_go9rc

17세기말 바니타스 페인팅의 대표작

<인트로>[백남준과 조선일보]
“1952년 4월…머잖아 누적되는 부채를 감당 못해 신문사가 문을 닫거나 소유권을 남에게 넘겨줘야 할 판이었다.…고민 끝에 방일영은 친구인 백남일을 찾아갔다. 백남일은 방일영의 제일고보(경기중·고) 동창이었는데, 그 당시 태창방직 사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재력도 있고, 신문사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아는 친구였다. 일영의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난 백남일은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고 자금을 돌려주겠노라고 했다. 상세한 이야기나 조건도 없었다. 무이자로 현금 5억환을 빌려주겠으니 조선일보 부흥에 쓰라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백남준을 독일대표로 베니스비엔날레 출전시킨 독일 큐레이터 그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라는 세계적 명성이 높은 국제미술행사를 창안한 사람이다.

백남준 독일에서 가장 명성 높은 이 미술대학(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교수를 하다

<인트로>

김순기, 탁월한 비디오 <봉주르, 백남준(뉴욕)> 1982년작. 인터뷰 예술. 김순기 작가는 프랑스철학의 거장인 데리다 등 인터뷰를 비디오아트로 예술화하다.

김순기 재불작가의 탁월한 비디오 작품 <봉주르, 백남준> 1982년 백남준 예술론에 대해 다양하게 묻는다. 백남준의 사상의 광맥은 무궁무진하다. 아니 광활하다. 이 작품 옆에 김순기 작가가 프랑스 사상가이자 해체주의 철학으로 유명한 데리다와 인터뷰 내용을 비디오아트로 만든 것이 같이 있다. 서로 비교해 보면 백남준이나 데리다나 다 대단한 사상가들이다.

백남준에게 묻는다. 중국과 몽골의 차이는 뭔가? 중국은 농경문화 정착민이 산다. 그래서 땅에 집착한다. 그러나 노마드는 땅에 집착하지 않는다. 백남준은 가장 오래된 문서는 바로 '납세기록'이라고 말한다. 글이란 결국 납세기록=사유재산을 말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이런 시대 이전을 동경했다. 그런 면에서 사상적으로 노마드를 계승한다. 그러나 백남준 디지털 노마드다. 정착민은 종이에 글로 기록하고, 노마드는 머릿속에 글 없이 기록하다. 우리나라 <남도 창>은 후자에 속한다.

글의 음악이 아니라, 말의 음악인 것이다. 일종의 구술(암기)문화다. 언제나 가지고 다닐 수 있다. 유목적 예술인 셈이다. 가지고 다니는 데 있어 무게가 전혀 없다. 춤과 노래가 마찬가지다. 역시 백남준 탈영토(나라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제국주의가 나온다. 21세기는 그럼 면에서 한국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백남준 인터뷰> 질문(독일미술가인데 인터뷰 진행자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음악이 당신의 삶보다 항상 높은 경지라고 말하지요?
대답(백남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가정일 뿐이죠. 내가 음악을 느끼고 들을 때 늘 영적인 상태에 들어갑니다. 하모니 혹은 순수함 혹은 카타르시스 등 단 내가 아름다운음악을 들을 때만 그래요. 그리고 명상 훈련자도 그렇지요. 선불교는 예술을 촉진시키죠. 예쁜 예술이 아니고 삶의 방법을 창조하는 시도를 해야 해요. 명상 훈련자도 이 방법을 쓰면서 명상과 관조 연습을 하죠. 아침부터 밤까지 순수함 그리고 하모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지요. 내가 이런 삶의 연습을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작곡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나는 늘 존 케이지에게 묻습니다. 왜 작곡을 하는지? 그도 역시 답을 못하죠. 여러 번 물었죠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그의 스승인 쇤베르크에게 작곡가가 되기로 약속을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가 작곡한 것이 아름답지 않고 의미가 없고 그래도 상관 없이 작곡을 한다는 거예요. 나는 그런 방법이 선불교적인 면에서 의미가 없지만 실존주의 개념에서는 말이 된다고 봐요. 존 케이지는 당시 선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했어요.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책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어요. 하하하! 나는 존 케이지에게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예술을 구별하지 못하면 작곡은 더더욱 할 수 없다고 대답했죠.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자연에서 예술을 이끌어 올리는 확실한 연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게 아닌가요.

요셉 보이스는 스스로를 '문화 깽단'이라고 했고, 백남준은 스스로 '문화 깡패'라고 했다. 두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도 확실하게 통한다. 보이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Performance 로 실현하다.

K20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요셉 보이스의 설치 작품〈The Pack〉

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01/2010110102027.html

 

백남준(예술로 미래를 탐색하다) 對 보이스(예술로 세계를 치유하다)

1962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페스티벌'에서 백남준은 3대의 피아노를 아상블라주(여러 개의 물체를 모아 입체작품으로 제작)로 만들어 연주했고, 마지막에 도끼로 백남준의 피아노

www.chosun.com

<조선> 2010.11.02 일 기사. 백남준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 요세 보이스 <뒤셀도르프 K20미술관>에서 기획·전시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백남준(1932~ 2006)과 요셉 보이스(1921~1986)의 대규모 회고전이독일뒤셀도르프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독일 미술의 중심으로 자부해온 뒤셀도르프가 4년마다 열고 있는 '콰드리에날레(Quadriennale)'의 대표전시로 백남준과 보이스의 회고전을 마련한 것으로, 각각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과 K20미술관에서 기획·전시하고 있다. K(Kunst)20미술관은 주로 1900년부터 1980년대까지 작품을 중심으로,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은 그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작품을 소장·전시한다. 백남준과 보이스는 모두 세계적으로 유명한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는 인연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1962년 처음 만난 이후 친분을 나눠왔고, 예술 분야를 넘나드는 아방가르드 운동인 '플럭서스' 초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백남준 보이스 상하이에서 만나다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08360

 

백남준과 보이스, 2018년 상하이에서 재회하다

'백남준·요셉 보이스전 견자적 서신', 중국 상하이 하우 아트뮤지엄에서 5월 13일까지

www.ohmynews.com

이 두 사람은 '마치우나스'가 창안한 '플럭서스' 회원이었다. 흐른다는 뜻이 있는 플럭서스를 중국어로는 '격류파(激流派)'라고 번역했다. 이들은 기존의 미술을 해체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동서예술가가 같이 참여한 최초의 글로벌 미술운동이다.

여러 요셉 보이스 초상화 사진(Portrait of Joseph Beuys) 중 하나. 이 사진에 적힌 문장 '그는 은행털이 갱 중의 갱이다(He was the gangsters' gangster DILLINGER)'라는 글귀가 흥미롭다

2층에 올라가면 '보이스는 플럭서스의 영혼(soul),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마음(heart)'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두 사람이 이 운동에서 큰 몫을 했다는 소리다. 이 선언문에는 "부르주아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시 말해 고급과 저급 따지는 문화 엘리트주의와 그런 속물근성을 없애려 한 것이다.

하여간 백남준과 보이스는 서로 다르면서 같았다. 우선 별명이 닮았다. 독일에서 백남준의 별명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였다면, 보이스는 '서구 미술판을 깨는 문화깡패'였다. 백남준은 서구인이 성상 같은 바이올린을 개처럼 질질 끌고 다녔다. 또한 서구인이 고급문화의 상징으로 여기는 피아노를 불태우거나 때려 부쉈다.

보이스도 마찬가지다. 백남준과 상통했던 그는 백남준 첫 전시장에 와서 피아노를 도끼로 부셔버렸다. 백남준은 그 전시에서 서양미술의 상징인 뮤즈를 욕조에 처박아 살해했다. 이들은 서구문명을 살해하려고 결심한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보이스의 상징은 '도끼'다. 서구인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이곳 평론가로부터 '신야만인'이라고 불렸다.

보이스의 또 다른 상징은 도끼와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토끼다. 그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온순한 토끼와 가까운 친구처럼 소통했다. 보이스는 "완고한 이성주의로 무장한 인간보다 토끼가 현대미술을 더 잘 이해한다"라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하지만 우리는 토끼 하면 달이 떠오른다.

2층 요셉 보이스 전시장 여러 요셉 보이스 초상화 사진(무제) 중 하나. 20세기 서구문명의 파괴자로 자처한 그가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2층 요셉 보이스 전시장 여러 요셉 보이스 초상화 사진(무제) 중 하나. 20세기 서구문명의 파괴자로 자처한 그가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백남준은 독일에서 앞뒤가 꽉 막힌 합리주의에 구멍을 내고 다녔다. 그는 서양인이 떨치기 힘든 최고 가치인 이성주의를 가치 없이 파괴했다. 그런 행위가 독일인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신선한 해방감도 주었다. 왜냐하면 독일인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여러 모로 그들의 문화에 대해 성찰하게 했다.

그는 이렇게 엄청난 파괴자였지만 왜 위대한 작가가 되었을까? 파괴 없이 창조 없다고 그가 그냥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을 부수기만 한 게 아니다.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가 그렇게 많은 걸 파괴한 건 결국 비디오아트의 확장인 인터넷을 고안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류는 모두가 백남준의 은하계(Galaxy) 속에 살고 있다.

백남준과 보이스가 이렇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만행을 봤기 때문이다. 보이스는 이런 서구문명의 과오에 대해 처절하게 고해성사했다. 윤재갑 관장은 개막식 전에 열린 세미나에서 요셉 보이스는 서구예술가 중에서 가장 양심적인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보이스가 진지한 편이었다면 백남준은 유머의 귀재였다. 그는 주변 독일인을 잘 웃겼다. 그의 천진한 미소는 그들을 사로잡았다. 백남준의 예술동료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그에 대해 "우린 젊어서 만났다. 그는 대단한 철학자, 음악가, 사상가, 예술가, 행위예술가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1960년대 '장 피에르 빌헬름'은 독일의 전위미술계에서 존경 받는 멘토였다. 그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백남준의 첫 전시에 대해 글을 썼다. 그 서문에서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라는 인상적 문구를 남겼다. 그는 백남준을 음악과 미술마저도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융합시키는 총체예술가로 본 것이다.

여기서 화제를 좀 바꿔보자. 이들을 더 유명하게 한 건 동서를 넘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꽃 피웠기 때문이다. 우연이었지만 그 자체가 예술이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휴먼네트워크'였다. 백남준은 보이스 사후에도 그런 우정을 살려내기 위해 1990년 서울 현대갤러리 뒤뜰에서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을 벌렸다. 이번에 그 사진들도 소개된다.

현대문명의 구원을 샤머니즘에서 찾다

보이스의 퍼포먼스 "나는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절연시켜 코요테 외에는 미국에 관한 어떤 것도 보지 않기를 원했다(1974)"를 재구성한 사진이다▲ 보이스의 퍼포먼스 "나는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절연시켜 코요테 외에는 미국에 관한 어떤 것도 보지 않기를 원했다(1974)"를 재구성한 사진이다

하여간 서구 속 비서구였던 보이스는 서구의 야만문명을 치유하려고 스스로 야생늑대가 된다. 그는 인간이 야생동물과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선견자(voyant)'였다. 이런 점에서 "무릇 늑대의 세계에서 더 진보한 게 별로 없다"고 한 백남준 말이 납득이 된다.

이런 주제로 퍼포먼스를 선보인 사람이 바로 보이스다. 그는 1974년 뉴욕에 있는 '르네 블록' 갤러리에서 3일간 늑대와 먹고 싸고 자면서 한판 굿판을 벌린다. 이것은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한 '야생적 사고'를 말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낸 것이다.

이들은 이렇듯 현대문명의 구원을 샤머니즘에서 찾았다. 좀 어리석게 보이나 그 놀라운 생명력이 합리성에 미쳐버린 서구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철학자 'J. 하버마스'가 제창한 '공론장이론(public sphere)'도 결국 소통이 인류의 난제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셔먼은 죽은 자마저도 산 자와 소통하게 하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보이스가 샤머니즘에 빠진 건 남다른 체험 때문이다. 2차 대전 중 독일공군으로 출전했다 전투 중 타타르족이 사는 부락에 추락했다. 이 사람들은 샤먼의 전통치료법으로 그를 기적적으로 살려냈다. 이후 보이스도 펠트나 기름덩어리 등을 활용하는 '온기조각'을 창출하게 된다. 그는 샤머니즘을 죽어가는 것도 살려내는 살림과 부활의 예술로 본 것이다.

샤머니즘의 꽃은 '굿'이다. 백남준의 굿에서는 '칼·방울·청동거울' 대신에' TV·피아노'가 들어간다. 전통굿과 다른 '전자굿'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같다. 마을의 공동악인 귀신을 쫓아내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불러오는 제례다. 마을을 확대하면 지구촌이 되고, 굿은 현대화하면 지구촌 축제가 된다. 그런 면에서 굿은 올림픽정신의 기조와 너무 닮았다.

 

지금 세계 미술의 중심이 뉴욕에서 서서히 상하이로 이동하고 있다. 백남준 말년에 "이제는 상하이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고 유언처럼 남겼다는데 중국의 시대를 미리 읽고 예견한 것인가!!

<기마민족에게 '등자(말을 자유자재로 조정)' 발명은 혁명이었다> '스키타이 단군' 스카타이가 스키타이 족이라는 말도 있지만 말을 쏘는 자 궁수라는 말도 있다. 말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등자>는 흉노가 발명한 것이다. 흉노시기부터 신격화된 하늘을 텡글리라고 하는데 텡글리는 단군의 어원. 그러니까 단군은 '천자'가 되는 것이다. 백남준의 스키타이 단군. 스쿠터는 스키타이에서 왔다./

요셉 보이스는 스스로를 '문화 깽단'이라고 했고, 백남준은 스스로 '문화 깡패'라고 했다. 두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도 확실하게 통한다. 보이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Performance 로 실현하다.1960년대 백남준 ''TV부처'를 90년대 네온아트 형식의 'TV 부처'로 더 업그레이드시키다. 제목은 'BLUE TV'(부처) 2018년 상하이 전시. 기술제작: 이정성/남정호 기사 백남준의 레이저 아트에 대해 잘 요약. 백남준, 세계미술의 중심지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천지인' 사상을 바탕으로, 현대화된 <전자 산수화>를 21세기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구성. 그래서 초록색 전자폭포도 등장한다./"백남준은 그 인간 자체가 예술품이다" - 만프레드 레베 박사(Manfred Leve 1936-2012) 1959년부터 플럭서스 운동을 하면서 백남준 전시를 촬영하다. 그는 독일미술의 대가들인 '보이스, 폴케, 리히터' 등 도록을 출간하다. 2007년 백남준 과천 국현 사진전에 참가했다. 그때 만난 적이 있다./백남준에게 굿은 예술의 원천(시원지). GOOD이다. 이것은 가장 미니멀한 총체예술(Integral ART)이다. 여기에 음악 미술 춤 시 노래 퍼포먼스 오페라 콘서트 미사곡 등 들어 있다. 거기에 백남준은 구리 거울 대신 TV 거울을 집어넣고 징 대신 피아노를 끌어들이다. 여기는 백남준의 중요 개념인 Objets Sonores(소리나는 오브제 아트), 즉 동서양의 소리가 나는 모든 오브제(악기)가 총집결되다/서양과 동양은 운동을 해도 대하는 태도와 목적이 다르다. 서양은 운동을 통해 강함(hardware)을 원하지만 동양은 부드러움(software)을 원한다. 지금은 소프트웨어시대다/백남준의 유토피아: 첨단과학 50% 순수자연 50% 생태주의를 미리 내다보다. 일종의 TV 정원이다. 백남준은 개념미술가이다./백남준 말기 2004년 10월 6일 뉴욕에서 조선일보 정재연 기자가 백남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백남준 왈 "난 바보야!" 이제 절대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대답이 짧아 좋다. 선문답 같다. 천진(天眞, 하늘의 진실)의 신이 된 것이다. 이제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연애" 많이 하셨잖아요 "아직 부족해!" https://www.chosun.com/…/html…/2004/10/06/2004100670339.html

 

백남준 “여러분, 일 많이 하고 잘 노세요”

백남준(白南準·72)은 정정했다. 6일 미국 뉴욕 소호의 스튜디오에서 퍼포먼스를 가진 그는 안색이 맑고 쾌활했다. 한국·미국 취재진 4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감 칠을 한 피아노를 밀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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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상하이 백남준&보이스 전시/지금 세계 미술의 중심이 뉴욕에서 서서히 상하이로 이동하고 있다. 백남준 말년에 "이제는 상하이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고 유언처럼 남겼다는데 중국의 시대를 미리 읽고 예견한 것인가!!/[백남준과 김구림] 두 분이 뉴욕에서 만났을 때 백남준 왈 "김구림 선생님, 오래 사셔야 합니다. 실험예술은 인정을 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요" 김구림 선생님의 초기 영상작품 <24분의 1초>는 세계적 수준이다. 테이트모던에 소장되었다. 한국사회가 야만인 것은 이런 분이 학력이 없다고 지금도 왕따를 시킨다. 그 어떤 갤러리도 에이전트도 없어 개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학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사실 서울대가 대학인가!> 국제철학자대회가 일본보다 먼저 서울에서 열렸는데 한국철학을 발표한 인물이 없는 것이다. 서울대가 서울대 역할을 하려면 이런 한국철학자 한 명은 나와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도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이라고 정말 한심한 일이다. 그러면서 학력이 없다고 첨단의 실험 예술을 추구한 전위작가를 사회적으로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대중지성시대에 일류대학이라는 것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 차리리 연구소를 많이 만드는 것이 낫다. 우리나라는 21세기 학문의 학문인 인류학 사전 조차 없다./

1974년 백남준 어떻게 인터넷을 예언했나 / 그는 이 보고서(1974년)에서 백남준은 노동시간 단축, 인종차별 몰락, 환경오염 대안을 위한 미래의 '광역 통신 네트워크'를 언급하다.www.dazeddigital.com/art-photography/article/46438/1/how-korean-artist-nam-june-paik-predicted-meme-culture-in-1974-tate-modern?fbclid=IwAR1HpHzMfB4Kw10Ws40XOtKMDW9AN5ESZ7Sff93yqJ5ALPnTmIv8I5CJhAY

 

How Korean artist Nam June Paik predicted meme culture in 1974

In 1995, 63-year-old Korean artist Nam June Paik created a sculpture that would become one of his most celebrated and recognisable pieces.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 Alaska, Hawaii” arranged 336 televisions and 575 feet of neon tub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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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유머] 한국은 서울대 때문에 망하다!/남정호 기사 백남준의 레이저 아트에 대해 잘 요약. 백남준, 세계미술의 중심지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천지인' 사상을 바탕으로, 현대화된 <전자 산수화>를 21세기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구성. 그래서 초록색 전자폭포도 등장한다./"백남준은 그 인간 자체가 예술품이다" - 만프레드 레베 박사(Manfred Leve 1936-2012) 1959년부터 플럭서스 운동을 하면서 백남준 전시를 촬영하다. 그는 독일미술의 대가들인 '보이스, 폴케, 리히터' 등 도록을 출간하다. 2007년 백남준 과천 국현 사진전에 참가했다. 그때 만난 적이 있다./백남준에게 굿은 예술의 원천(시원지). GOOD이다. 이것은 가장 미니멀한 총체예술(Integral ART)이다. 여기에 음악 미술 춤 시 노래 퍼포먼스 오페라 콘서트 미사곡 등 들어 있다. 거기에 백남준은 구리 거울 대신 TV 거울을 집어넣고 징 대신 피아노를 끌어들이다. 여기는 백남준의 중요 개념인 Objets Sonores(소리나는 오브제 아트), 즉 동서양의 소리가 나는 모든 오브제(악기)가 총집결되다./서양과 동양은 운동을 해도 대하는 태도와 목적이 다르다. 서양은 운동을 통해 강함(hardware)을 원하지만 동양은 부드러움(software)을 원한다. 지금은 소프트웨어시대다-제만전시/백남준의 유토피아: 첨단과학 50% 순수자연 50% 생태주의를 미리 내다보다. 일종의 TV 정원이다. 백남준은 개념미술가이다./[미술시장] '뉴욕'에서 '상하이'로 세계의 중심축이 바뀌나 두고 볼 일이다./백남준 말기 2004년 10월 6일 뉴욕에서 조선일보 정재연 기자가 백남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백남준 왈 "난 바보야!" 이제 절대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대답이 짧아 좋다. 선문답 같다. 천진(天眞, 하늘의 진실)의 신이 된 것이다. 이제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연애" 많이 하셨잖아요 "아직 부족해!" https://www.chosun.com/…/html…/2004/10/06/2004100670339.html/지금 세계 미술의 중심이 뉴욕에서 서서히 상하이로 이동하고 있다. 백남준 말년에 "이제는 상하이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고 유언처럼 남겼다는데 중국의 시대를 미리 읽고 예견한 것인가!!/60년대 말, 한국이 초기 산업화에 들어서면서 속도에 치여 인간의 <소외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경고한 문명비평적 비디오아트(김구림 24분의1초)가 나왔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다. 게다가 보들레르적 권태의 문제도 이슈로 삼았다는 점은 역시 모던한 일이었다./[백남준과 김구림] 두 분이 뉴욕에서 만났을 때 백남준 왈 "김구림 선생님, 오래 사셔야 합니다. 실험예술은 인정을 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요" 김구림 선생님의 초기 영상작품 <24분의 1초>는 세계적 수준이다. 테이트모던에 소장되었다. 한국사회가 야만인 것은 이런 분이 학력이 없다고 지금도 왕따를 시킨다. 그 어떤 갤러리도 에이전트도 없어 개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학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사실 서울대가 대학인가!> 국제철학자대회가 일본보다 먼저 서울에서 열렸는데 한국철학을 발표한 인물이 없는 것이다. 서울대가 서울대 역할을 하려면 이런 한국철학자 한 명은 나와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도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이라고 정말 한심한 일이다. 그러면서 학력이 없다고 첨단의 실험 예술을 추구한 전위작가를 사회적으로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칭기즈칸 앞 그의 패션은 헐렁이 단추를 잠그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