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한반도] <12> 세계적? 세기적? 가장 한국적 작가
[0] <백남준 서양인이 내세우는 텃세를 거부하다>
1. 백남준은 세계적인 작가이면서 동시에 매우 한국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세기적인(당대정신과 시사에 매우 밝은) 작가였다. 즉 Information artist였다.
2. 백남준은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한국적으로 행동하는 (혼종 혹은 포스트모던한) 예술가다
3. 백남준은 한국의 전통을 살리는 세계인이 되기를 원했다.
4. 남준은 서구가 만든 '게임의 룰(여기에는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발동)' 거부하고 자신이 스스로 게임의 룰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둔전병(국경 근처에서 땅을 갈고 농사를 지우면서 적을 막는 병사)'의 진면목을 보인다. 백남준은 자신의 게임과 룰의 법칙을 가지고 승자가 될 수 있는 터전을 닦는 둔전병이 되었다.
5. 백남준의 예술철학은 첨단과학과 동양적인 주제의 접목이며 또한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조화가 핵심 주제로 삼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자신의 예술은 그러므로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욱 발전하는 미래로 열린 예술이다 - 서울대 영문과 이정호 교수
[1] 물론 백남준 세계적 작가다 왜(?) 인터넷은 당연히 백남준의 예술적 상상력과 아이디어에서 온 것이다. 그는 6개 국어를 하는 노마드 작가였기에 사고에 있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누구도 추종하기 힘들었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페북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2]"외국어 잘 해야 모국어 잘 한다" -괴테. 이 말은 외국어를 잘 해야 한국어도 잘 하고 한국어를 잘 해야 외국어도 잘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걸 다른 말로 해석하면 "가장 한국을 많이 알아야 가장 세계를 많이 알 수 있고, 가장 세계를 많이 알아야 가장 한국을 많이 알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백남준의 경우가 그랬다. 백남주 <삼국유사>를 꿰뚫고 있었다.
백해영 갤러리 12번째: 백남준 세계적? 세기적? 한국적? 작가 백남준은 누구인가 총정리?
[도울은 왜 백남준을 가장 한국적인 작가로 보았는가?]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태어난 백남준, 다시 말해서 그는 전통적 인간으로서 지니는 모든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헌다.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에 개명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인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하는 고전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말씨와 행동은 1949년에 멈쳐버린(서울 양반 말투와 행동거지) 다시 말해서 백남준이라는 존재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근대적 번용 과정에서 축적된 새로운 문화 측면의 가장 밝은 측면 19세기말 동학으로부터 또한 19세기 여명기중엽 최한기, 이제마로부터 시작해 20세기에 많은 개화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각성된 문화 여명기 폭발적 창조성과 그 맥락, 그 패기, 그 에너지 서구의 가장 아방가르드한 흐름과 일치할 수 있었던 보편사적 사실에서 온 것이다. 이런 도올의 좀 산만한 비평에 대해서 아래에 백남준은 아주 명쾌한 대답을 남긴다. 가장 한국적 가장 세계적 그러니까 가장 한국적 어렵다 모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BTp7Wr2FxzI&t=67s
[1] <백남준의 애독서 중 하나는 '삼국유사'> 그런데 장자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 있어. 그게 바로 일연 스님이 지운 <삼국유사>야. 정말 대단해. 우리민족이 참 판타지가 있는 민족이거든. 노장 영향을 받은 것인지 몰라. 나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 같기는 해. -백남준 문장을 약간 풀어보다 이만익이 그린 '삼국유사' 백남준 반면 '삼국사기(국수주의)' 백남준 이 문서를 엄청 싫어하다. 역사 기록은 승자의 문서라고 본다 그래서 중국 <사기>마저도 싫어한다. /
[2] 백남준, 경기고 다닐 때 동아일보에 계셨던 한문 선생 '천관우'에게 노장을 배웠다고. 노자는 '5천자'도 되어 있어, 아주 짧고 명확해(clear). 그런데 장자는 좀 어려워, 노자를 뻥 튀기면 장자가 돼. 그런데 그냥 튀긴 것이 아니고 장자에는 판타지가 들어가 있어. 장자의 판타지는 무시무시해. 하여간 미우주항공국(NASA)에서 일하는 사람들(항공 공학자, 우주 물리학자) 등보다 스케일 더 크거든. 장자에게서 배울 것은 시공간에 대한 거야. 시간하고 공간이 따로 놀지 않고 같이 놀아. 그리고 그 스케일이 커. 하여간 무시무시하지.
[3] 삼국유사<>[1] 백남준은 왜 그토록 삼국유사에 미쳤는가? 백남준은 장자도 무시무시하지만 삼국유사가 더 무시무시하다고 했다 왜인가?] 김훈: <삼국유사>에 대한 당신의 애착은, 그 역사서 안에 아방가르드적 요소가 있기 때문?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98635&fbclid=IwAR3RureCuRNr03rhA4IROxys3m15hAsDHcXtO4InWpbLQxJto8N0dEYJ2Mg
[4] 백남준 같이 센 발언을 한 사람은 인류사에 없다. 백남준이 툭 던진 말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예컨대 "세계일류가 되면 나라고 뭐고 없다고" 또 이런 말도 했다. "민주주의가 뭐냐고? 말대꾸하는 것(댓글)이다" 그리고 30살에 "내가 문화칭기스칸이 되어 전 세계 미술판을 쓸어버리겠다(황색재앙)" "예술이 뭐냐고?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하는 것, 속고 속이는 (고등)사기다" "서구와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룰을 바꿔라 " 등등등
[5] 백남준 왈, "중국은 서구보다 2000년 전에 이미 '백과사전'을 만들었다". 중국의 백과사전인 <여씨춘추>는 BC 239년에 만들어졌고, 유럽(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디드로, 루소, 케네, 볼테르 등 참가)에서 만든 '백과사전(encyclopædia)'은 18세기(1757년)였다.
<프랑스혁명>One word is 1,000 dollars"는 여씨춘추에 나오는 고사인 '일자천금(一字千金)'을 영어로 바꾼 것. 백남준의 방대한 독서량을 알 수 있다. 《여씨춘추》는 기원전 239년 중국 진나라의 재상인 여불위가 주도하여 편집한 백과사전이다. 총 26권 160편으로, 연감에 해당하는 기(紀) 12권, 보고서에 해당하는 람(覽) 8권, 논문에 해당하는 론(論)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2]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은 이들 중 12기(十二紀), 즉 기(紀) 12권의 요약이라고 한다 다루고 있는 학설 중에는 도가(道家)의 것이 가장 많고 유가(儒家) · 병가(兵家) · 농가(農家) · 법가(法家)의 주장과 이론도 섞여 있다. 여불위는 이 책을 진의 수도 함양 저잣거리에 전시해 놓고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다면 천금을 주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 때문에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6] 백남준 왈 <돈보다 축제>, 백남준 스승인 보들레르 왈 <돈보다 자유> 두 사람의 사상의 기반은 바로 무소유주의. 맑스 사유재산 인정하지 않았다. 역시 무소유주의. 비무장이 가장 무서운사람이듯 무소유주의가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다.
[7] 호랑이는 살아있다 2000년 작품여기에 드문 영상이 등장한다. 어디서 구했나. 한국 호랑이와 서양 사자가 싸우는데 결국 호랑이가 사자를 이기는 장면이 나온다. 백남준이 북한의 영상을 여기에 활용했다. 연출이 아니고 진짜로 느껴진다. 사자는 슬슬 도망간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는 뭔가? 백남준 새 천년을 맞아 1999년 자정 12월 31일부터 2000년 1월 1일 위성 아트로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선보였다. 백남준 왈 "한반도에 아직 호랑이는 살아있다" 이 작품이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남북 대치라니 답답하다. 종전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면 평양에 미국 연락사무소만 생기고 한반도 평화가 더 가까이 올 것인데 갑갑하다. 백남준은 "드디어 호랑이가 제대로 운다"라고 좋아했다. 백남준은 우리가 한반도에 분단국으로 살아가지만 아직 우리는 기죽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다.
호랑이는 살아있다 2000 여기서 호랑이는 백남준 자신을 말한다.
[8] 이 위성 아트는 새 천년 첫날, 전 세계 77개국 방송망 탔다. 호랑이는 만담 속에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도 많지만 백남준은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한반도에 분단국으로 살아가는 남북의 사람들은 아직도 기죽지 않았다>를 1999년 자정 12월 31일 자정부터 2000년 1월 1일 위성 아트로 선보였다. 호랑이는 만담 속에 강자입장을 대변하지만 여기서는 약소국이라는 한국의 강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트로>> [1] 우주 저편에서 내게 오는 태초의 전자 웨이브 WAVE 파동 감지되다
[2] 백남준 작품은 20세기 거장의 모든 작품과 통한다. 이 작품(필름을 위한 젠) 르네 마그리트와 상통하는군요 하나는 그림자 회화방식(dépaysement) 또 하나는 전자(영상)회화방식이다
[3] 백남준 용어: '랜덤 엑세스', 서양의 이분법을 깨는 백남준의 비밀병기(?)-시공간을 초월하는 유비쿼터스-무작위 접속을 뜻하며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우연적 인연(카르마) 무질서의 미학: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난지 예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설명하기 힘들 것으로 백남준 말대로 5차원 사기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서양인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방식인데 이것은 사실 오작동하는 디지털적인 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치명적인 오류에서 언제나 새로운 창조가 나온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일종의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교란이다.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선보인 첫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램던 액세스(아래사진)>라는 개념은 사실 그 해석이 다양한다. 백남준의 해프닝, 사건 터지지 않으면 비예술
[4] [백남준의 일본 출신의 친구들]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이세이 미야케)는 선형보다 비선형 패션이다. 백남준 닮았다. 함수(fonction)는 입력(input)과 출력(output) 중간에 있다. AI는 함수다. 밥이 입력하면 똥이 출력된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몸 안에 오장육부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함수이고 AI다. Data=입력(input)+출력(output), 가장 간단한 함수(곱하기와 더하기=change) y(출력)=ax(입력)+b. 함수란 다시 말해 어떤 함(box)에 뭘 집어넣으면 그 속에서 변화를 준다.
곱하기와 더하기는 선형(Linear)이고, 빼기(무소유-무음악)와 나누기(공유와 네트워킹와 communication)는 비선형(non-linear)이다. 백남준 함수: 비선형(?). 랜덤엑세스 아래 비선형 이미지 랜덤 액세스는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 백남준의 시간론> 작품 비선형 같은데 사실 나는 거의 모른다.
[5] 백남준의 비디오는 신에 도전하는 한 장치였다. 백남준은 인간이 어떻게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고민하다. "그렇기에 신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기계인 비디오를 통해 시간을 끌어당기고 압축하고 잘게 절단함으로써 시간에 리듬감을 주고 뒤엎어가면서 시간의 법칙을 깨야 한다"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백남준)
[6] <백남준 벤야민 아도르노> 20세기 초 대중문화를 둘러싼 벤야민(W.Benjamin)과 아도르노(T. Adorno)의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과연 대중문화가 가능하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두 사람은 정반대의 전망을 내놓았다. [아도르노] '대중'과 '문화'는 전혀 호환될 수 없는 개념이라면서 대중문화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전망. 문화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의지의 산물인데, 대중들에게 주어지는 문화란 삼키기 좋게 적당한 규격으로, 적당히 달달하고, 고소한 맛으로 가공돼 음식을 입에 넣고 씹을 활동(저작)도 필요 없이 목구멍으로 넘기도록 돼 있는 가공물이라는 것. 결국 대중들 앞에 내놓은 문화라는 것들은 거위의 목 안으로 부어 넣는 사료와 같은 것이라는 비판인 셈이다.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단지 '문화산업'으로만 보다.
[벤야민] 이에 반해 대중의 힘을 긍정적으로 전망하면서 당시의 상황과 달리 대중은 언젠가 문화를 능동적으로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문화도 소수자들의 전유물이던 시대가 있었지만, 예술품이 대규모로 복제되고 공장에서 양산되는 시대에 예술과 문화는 새로운 형태로 본질적인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수 귀족들의 요청으로 그들의 살롱에서 연주되는 형태로나 가능했던 음악이 지금은 무한 복제되면서 누구나,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오늘날 예술이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권력이 과거에는 소수자의 전유물이었지만 다수의 국민이 공유할 수 있었듯이 문화 역시 이러한 대중들의 주체적 공유가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벤야민은 꿰뚫어 봤다.[7] 조선일보 정중헌 기자와 백남준 인터뷰(1984년 6월 25일 백남준 35년만에 귀국) 백남준의 인터뷰 중 꽃이다. 내가 80년대 교사 시절 이 신문을 스크랩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정말 신문이 너덜너덜하다. 여기서 백남준 앞으로는 유전자 예술이 나올 것이라 예언했는데 당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인공지능 예술 같은 것인데 80년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너무나 놀랍다.
[8] 1998년 백남준 쿄토상 수상 연설 제목은 <노버트 위너와 마셜 맥루한-커뮤니케이션 혁명>이었다. <상금 40만 달러(약 5억 원)> 아래 공식에 위너와 맥루한이 나오네요.
[9] 백남준의 별자리는 북두칠성이다. 한국의 작가(예술가)들 행복하다. 그가 우리에게 세계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되고 본보기가 된다. 우리가 기댈 큰 빽(배경)이 있기에 마음이 든든하다. 이제 백남준도 넘어서는 작가가 나와야 한다.
[10] 무엇보다 철학의 종합으로서 시다. 그리고 예술의 종합으로서의 음악이다. 김홍희: 우리의 맥박, 호흡이 다 음악의 소스가 되는 비트음악이죠. 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음악, 그러다보니 신체의 리듬부터 자동소리, 기침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다 음악의 범주에 포함시킨 거죠. 미리 작곡하여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에 도전하다 작곡을 하는 방식, 존 케이지는 주역에 나오는 우연성, 비결정성 요소를 도입해 작곡을 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됐죠. 말하자면 동양정신에 빠진 서구인 철학자에게 서양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이 반대로 큰 영향을 받은 거예요." 침묵도 소음도 포함되는 확장된 음악인가요? "아무리 정적이라도 들리지 않는 소리의 전파가 있고, 아무리 침묵이라도 나의 호흡소리 있는 거잖아요. 침묵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침묵음악이 된 거죠. 이런 음악철학은 결국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거죠.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이른바 행위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11] <백남준 일본으로 건너갈 때 가장 챙긴 것을 바로 불어사전> "서울을 떠나던 날 남준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북한군이 대문을 박차고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 남준은 아버지 명령에 따라 급하게 짐을 꾸렸다. 가방에 무엇을 넣어야 할지 머리가 뒤죽박죽되는 순간 남준은 책꽂이에 꽃혀 있던 불어 사전을 날쌔게 집에 그 안에 넣었다. 당시 불어공부에 재미를 들인 그가 애지중지하던 사전이었다" -<나의 사랑 백남준> 중에서
[12] 1949년과 1959년의 차이백남준 비행기를 처음 탄 것은 17살, 1949년 11월 오리엔트 에어라인 소속의 DC 4. 백남준 그때 처음 빨간 립스틱을 바른 금발의 미녀를 봤다고 말한다. [평] 나는 10년 후 1959년 처음 비행기를 타보다. 마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데 당시 한국의 남해안 지역은 <사라호> 태풍 피해로, 대규모 침수지역이 되어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되었다. 그래서 처음 김해공항에서 아버지와 함께 비행기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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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MARA(뉴미디어아트연구회) 10주년 컨퍼런스 <우리는 열린 회로 안에 있다: 백남준과 뉴미디어> 대표 김경미 서울대 뉴욕대)ZOOM으로 <간단 소개> 한마디로 백남준은 재미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말이 되고 다 통하는 컨퍼런스 놀이터. 왜 백남준인가? 한국의 미디어 작가 이론가들 총동원
[2] 결론: 백남준 이름이 학술대회도 놀이터 재미있다
컨포런스 <50년 전 백남준 탁월한 미디어 이론가로서 미디어 불평등 해소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아래의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디어 상호작용 속 편향 배제 왜곡이너무 쉽게 일어날 수 있음을 꼬집고 있다. 백남준 1970년 공영방송이 오히려 반소통(dis-communication)으로 가는 점에 경고하다. 유럽공동시장처럼 공영방송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 비디오 공동시장이 되어야 한다. 공영방송은 무엇보다 소통의 격차를 줄이고 소통의 원활함을 촉진해야 한다. 비디오 공동시장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세계평화(전쟁반대)와 지구생존(생태보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봤다
[3] 이원곤 Won Kon Yi 이 연구는 음극선관(陰極線管, CRT)와50년 대에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를 이용한 B. 라포스키(B.F.Laposky)의 ‘전자추상‘(Electronic Abstractions. TV수상기를 최초로 화랑에 전시한 백남준의 «음악의 전시»(1963)로 이어지는 흐름과 그 미 학적 관심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지금까지 백남준과 B. 라포스키가 비교되거나 같은 문맥에서 다루어진 연구사례는 없으나, 1963년의 <음악의 전시에 출품된 13대의 TV수상기 중에서 3대를 사용해서 시도
[4] 강수미 Su Mi Kang Freedom in the Nam June Paik’s Art: When He cut off John Cage’s Tie 발표자 | “여성용 카니발이 있었는데 그날은 여자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남성의 넥타이를 자를 수 있었습니다. 여성의 독립성에 대한 상징으로서 말입니다. 백남준은 바로 이것을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백남준은 단순히 넥타이를 자른 것이 아니라 쾰른의 민속적인 풍습도 같이 연계시켜서 넥타이를 자른 것입니다.”-마리 바우어마이스터)
[5] 최근 홍대에서 백남준 논문 박사 1) 김금미 Art&Archive 대표영문학도 답게 시적 해석: ‘인연이 빚어내는 모레의 빛: 백남준의 소통’이란 주제를 제시한다. 2)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 교수는 ‘사이버네틱스와 예술’에 대한 발표를 맡는다. 기계비평가 겸 항해자인 3)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도 발제자로 참석해 ‘백남준의 TV를 위한 선에 대한 해석’을 발표한다. 4) 강미정 서울대학교 강사는 ‘다음 세기 시각예술에서 누가 스콧 조플린이 될까? - 5) 백남준과 코로나대유행 시대의 예술’을 주제로 김경미 대표의 오프닝 발표 이후 첫 발제를 담당한다. 6) 최태만 국민대 교수가 ‘21세기 실크로드는 전자초고속도로로부터’를, 7) 곽영빈 연세대 교수가 ‘인류학도 아니고 엔트로피학도 아닌: 백남준의 기계 생태학을 향하여’를, 8) 맹활약 정연심 홍익대 교수는 ‘백남준의 포스트비디오, 포스트프로덕션’을 주제로 발제한다. http://www.ai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848
[6] 질의자: 이현진 연세대 교수, 김현주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교수, 지하루 OCAD대 교수, 이준 대구가톨릭대 교수, 이예승 서울대 강사, 이상민 광운대 강사, 강은수 CMU 교수, 김영희 홍익대 교수, 손미미 김치앤칩스 미디어 아티스트, 강지영 단국대 교수가 참여한다. 김대표는 “사이버네틱스와 AI의 차이에 대해서도 논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소리 생물체 아트라(?) 백남준 1984년 <유전생물학>를 예견했는데 그런 것과 유사한 개념이네요.
[7] 백남준은 1981년에 쓴 「말에서 크리스토까지」에서 ‘전화가 발명되기 전까지 말이 가장 빠른 통신수단 이었기 때문에 비디오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말에 대한 연구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 전 1000년경, 인간이 말을 이동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운송혁명이 일어나고 속도감각 또한 달라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1974년 백남준은 록펠러재단의 예지원 프로그램에 「후기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 21세기는 불과 26년밖에 안 남았다(Media Planning for the Post Industrial Society: The 21st Century is now only 26 years away)」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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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하나 [0] 백남준 인간의 행복 관심 높다 성 문제 예민할 수밖에
그런데 백남준이 1968년 국내 <공간>(8월호) 잡지에 '뉴욕 단상'이란 제목으로 투고를 했는데 거기에 내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 중에 숨바꼭질하다가 내가 이마를 다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그 어린 나이에 여자 친구에게서 '춘(春)'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섹스'를 느꼈다는 말인데 얼마나 성숙한 일입니까. 모차르트가 그랬듯 천재는 일찍 성이 발달한다고 하는데 백남준도 그랬나봅니다."- 백남준은 첫 전시 개념 중에 유치원 시절을 '유토피아'로 봤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유치원은 일종의 유토피아였을 것입니다. 1963년 부퍼탈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전시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의 포스터에 보면 16개 주제가 네모 칸에 적혀있는데 그 첫 주제가 바로 '어른을 위한 유치원(Kindergarten der Alten)'입니다.
[1] <백남준은 남성과 여성을 굳이 구별하지 않고 그 경계를 없애다 그러다 보니 불가능한 성의 아트를 추구하다. 그럼 면에서 매우 선각적 페미니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백남준의 ‘자유’ 그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랐을 때
[2] 정치혁명과 성의 혁명 맞물려 있다. 여성이 성적으로 행복해야 인류가 행복하다. 프랑스 정신분석가 라캉은 “성은 죽었다(Il n'y a pas de rapports sexuels)”라고 선언하다. 인간이 성적으로 행복하지 않다는 소리다. 특히 여성이 그렇다는 소리인가. 백남준과 통한다(?). 여성이 성적으로 행복해야 인류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백남준(?) 백남준이 성 해방을 강조한 건 자본 비판과 관련이 있다. 진정한 성적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임을 선언하다. 자본은 인간의 최고 행복 중 으뜸인 성의 환희를 파괴시켰다는 것, 성이 자본에 의해 소비상품으로 팔려나가고 있음을 꼬집다. 모든 정치혁명 뒤에는 늘 따라오는 것이 성 혁명이다. 정치 억압만큼 성적 억압은 비례했던 것이다.
[3] 자본주의의 문제 중 하나는 성적 행복지수가 높지 않다. 스트레스와 과로와 소외 심하다. 몇 주 전 캐나다 일간지 <라 프레스> 신문에서 본 내용이다. 미국의 동유럽 문화를 연구하는 여성 인류학자가 발표한 최근 논문에 의하면, 동구 여성들이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보다 과거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성적으로 훨씬 더 행복했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평]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주의 남성에게 성적으로 행복하기란 쉽지 않다. 역설적으로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유흥업이 발달할 뿐.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생리의 문제로 행복의 문제다
[4] 이런 비숫한 주제로 시를 멕시코 시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옥타비오 파스'(199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시의 일부는 이렇다. "수천 년 전에 생의 도둑<거대자본>에게 빼앗겼던 우리들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듯이 둘을 옷을 벗고 키스했다. 뒤엉킨 두 알몸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하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다. 둘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성이 자본에 정복당하지 않았던 선사시대로 돌아가자는 소리로 들린다. 성을 주제로 한 에술을
[5] 결론: 정음 정양(음양조화) 여성이 성적으로 더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염원 담겨 있다 철학은 쉬운 것, 우주와 남녀의 음양 조화(원리)를 아는 게 철학이다.'TV정원' 자연(음) 반, 문명(양) 반 조화가 인류 문명이 나아갈 길로 봤다. 백남준 생태주의 철학 반영(?)
[6]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백과 무머먼 액션 뮤지 앙상블 왕성 전성기 1) 지난번에 뺀 것 백남준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 '육체'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신체'를 표현했다 그것의 차이는 뭔가? 육체는 상업적 대상 다른 사람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신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체성이다> 백남준은 1967년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스캔들 이후 큰 홍역을 치르고 그것이 수습된 후에 무어맨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다.
"우리는 삶과 죽음에서 성을 음악에 도입하려 했던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어 존 케이지도 자신의 음악에 도입하지 못한 요소였지. 그는 가능하면 자연스러움을 추구했지. 우리의 이러한 의도는 케이지 개념을 확장시켰다고 생각해. 그래서 우리가 성취한 것에 대해 정통 케이지 파들이 질투를 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지" -1968년 6월 14일 백남준이 무어먼에게 보낸 편지 글 중에서 발췌. 1967년 액션 음악의 표현 영역 확장 미국미술 기여 앤디 워홀도 못하고 존 케이지도 못했다.
위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백남준 포스터
<이경희> 백남준은 아이디어가 많은 천재인데 왜 머리보다 몸을 중시했나요? "왜 몸이냐고요? 백남준은 인간의 본능을 그대로 귀하게 여기며 살아온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머리가 쉴 새 없이 전기스파크 같은 불꽃을 일으켜도 그는 몸을 먼저 주제로 삼은 것 같아요.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런 생각을 몸으로 실현하고 행위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라고 나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나는 백남준의 이런 실험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플럭서스' 운동을 할 때 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부순 건 이 시대 우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표현한 것이잖아요. 기존의 질서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상징을 파괴해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이를 통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백남준이 이런 해프닝을 도발한 건 성적 억압을 일상화하는 기존 사회의 통념을 깨는 예술적 교란-극단적 관념주의(나치즘 엄격 획일적 사회) 근단적 성의 예술 대응하다./심포니/ 이점에 대해서 뒤샹의 차이를 이야기할게요.
[일화] 시게코에서 백남준은 누구냐 후반 본론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녀는 깔깔 대면서 섹스를 잘하는 남자라고 대답하다. [평] 왜 그럴까? 백남준은 열등감 제로 인간이기 때문. 그의 자부심은 전 우주적이다. 그는 가난하고 작업비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어떤 스트레스도 없었다.
[]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리뷰>> II
[1] [[백남준 혁명]] IMAGE(이미지=SIGHT) -> SOUND(사운드) 백남준 첫 전시가 음악의 전시(EXPOSITIO OF MUSIC)다. 예술의 남성적인 예술을 여성적 예술로 바꾸다. 무엇보다 미술마저도 음악으로 바꾸다. 음악을 통해서 물감회화(추상)를 한 사람 칸딘스키 음악을 통해 전자 회화를 비디오아트 바우하우스 유희정신 춤에서 시작 춤으로 끝난다. 시각예술의 위상 차이를 거부하다./양혜규 뉴모마에서 전시 핸들 손잡이 바우하우스의 유희정신의 재해석인가
[2] <리뷰> III [백남준 축제론] 이 세상에 축제 아닌 것 없다. 모든 것이 세계적 사건 일거수일투적 예술행위다 [백남준&색채론(Eros)] 색동과 동양은 색이 색이다. 동양 선을 본다. 동시에 색을 본다. 사람의 얼굴 색채를 보죠. 원문을 보면 (De la couleur dans la video vient de ce que la couleur est une fonction primaire du sexe 컬러는 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함수(기능)이다 비디오 아트에도 해당된다) 또 백남준의 맥루한, 맑스, 존 케이지, 마치우나스, 앤디 워홀, 슈톡하우젠, 스탕달, 발레리, 론 자아(에고)론, 돈에 대한 철학 등이 언급 [결론] 백남준은 소유적 미술을 비소유적 미술로 바뀌려고 했다. 무소유적인 음악적 미술로 바뀌려고 했다. 실제로 불가능할 수 있지만 앞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
[3] 우선 백남준에게 색깔은 시간(역할)을 한다고 봤다. 모든 사물이 봄에는 그린과 푸른색이 되고, 여름에는 빨간색이 되고, 가을에는 그레이나 누런색이 되고 겨울은 흑백이 된다. 이렇듯 백남준은 색채와 시간(계절)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보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에서 색깔은 시간을 의미한다(color=time) 그리고 동양사상을 설명하면서 색을 성으로 보다. 사람을 볼 때 색채가 중요하다. 안색을 보면 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라시아 시대> [유라시아대륙철도] 익산에서 런던까지 10일11일 차비 95만
[1] "21세기 유라시아 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백남준 60년 전 예언이다)" 유라시아 길이 열리는 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일단 북으로 가는 길이 열려야 유라시아 길이 열린다. 백남준 1960년대부터 유라시아 길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다. 우리의 기원은 페루까지 간다. 그리고 핀란드, 우랄 알타이, 헝가리, 시베리아, 훈족, 타타르, 몽골 그리고 한반도까지 하나였음을 강조하다
[2] 몽골제국이 13세기 초, 세계를 지배한 건 가장 빠른 말로 기동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동시에 '칭기즈 칸부터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까지 새로운 정복지가 생겨날 때마다 '역참(驛站制)'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몽골 전국에 역참이 1519곳에 이르렀고, 말(나귀) 5만여 마리, 소 9000마리, 배 6000척 수레 4,000량, 등을 대기해두었다. 이를 토대로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교통네트워크를 창출했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실크로드를 왕래하는 상인의 증가는 물론이고 유럽의 선교사, 여행가들이 속속 동방세계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세계지도가 나오고, 대 여행시대를 열리고, 세계사가 쓰였다.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다. 백남준은 몽골제국이 이렇게 동서 교류의 통해 최초로 '지구촌'을 실현했고, 또한 시베리아에서 네팔, 한국, 라플라드(핀란드), 페루 등을 누비며 '초원고속도로'를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이런 인류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예술을 접근했기에 이렇게 '비저너리' 아티스트로서 내일을 멀리 내다보는 'TV(Tele 멀리, Vision 보다)전자아트'를 발명할 수 있었다.
[3]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유라시아 전시] 쿠빌라이-칸(Kublai Khan) 시대의 문화의 예술1215년 9월 23일-1294년 2월 18일은 몽골 제5대 칸이자, 그는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13세기 중국의 원나라 Yuan Dynasty 창립자, 당대 문화예술을 소개하다. Kublai는 상대적으로 현명하고 자애로운 통치권 가졌으며, 그의 룰은 효율적 인프라 개선, 몽골 우편 시스템 및 대운하 확장 포함, 종교적 관용, 과학적 발전(중국 달력 개선, 정확한 지도 및 기관)으로 차별화하다. 금 보유 및 무역 확대를 뒷받침하는 지폐 만들다.많은 중국 체계와 이상을 채택하고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Kublai와 그의 몽골인은 중국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관습을 유지하고 중국 생활에 동화되지 않았다. 1275년 마르코 폴로 (Marco Polo)는 Kublai Khan의 궁정에서 만나다. 젊은 베니스인은 통치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신뢰를 받아 원 나라에서 여러 외교 및 행정직으로 임명되었다. 약 16 년 중국에 머물다 베니스로 돌아갔다.
[4] [백남준과 유라시아 60년 전인 60년대부터 시작, 문화의 통로로 생각하다 1993년 베니스에서 작품으로 발표 그리고 또 30년이 지났다] 1993년 백남준 자르디니 숲에 만든 백남준의 통로는 '아시아로 가는 길'을 뜻한다. -이경희 여사. 프랑스 기자(Alison Sarah Jacques)와 백남준의 인터뷰에서 가져온 글이다. *세기말이라는 작품이 있다.이것은 20세기(산업시대)가 가고 21세기(정보시대) 새로운 세기가 온다는 말이다.
[5] 또 다른 유라시아의 예로 백남준·파스칼, 이들의 통합적 사고 유사하다.[백남준과 비슷한 유럽인 발굴] <17세기 파스칼, 시적이고 영적인 ‘섬세한 정신(esprit de finesse)’과 과학적인 ‘기하학적인 정신(esprit de géométrie)’을 하나로 통합했다. 서양에서는 백남준과 비슷하게 '통합형 사유방식(비빔밥)' 창안자> 그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천재였다. 그의 부친이 회계사 도움 위해 세계 최초로 계산기 발명하다.
[6] 초원 고속도로 고비사막(코끼리)을 지나 동서 문명을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처음 시작했고 유라시아시대가 열렸고 지금은 전 세계 지구촌이 하나로 1초 안에 통할 수 있는 슈퍼 커뮤니케이션 시대가 열렸다. 아래 작품은 또 하나의(제2의) 'TV부처'로 유라시아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킹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동양이 서양을 이끌어가는 모습이다.지금 지방자치도 유라시아 철도 연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미일이 걸림돌이다. 유럽은 대환영이다. 중국은 이에 대비해서 중동과 전국의 초고속기차와 도로를 만들고 있다. 중동에는 중국이 공짜로 고속도로를 만들어주고 있다.
[] 유라시아 강조하다. 유럽과 아시아 연결하려고 했고 보이스/더 나아가서 미주와 아시아를 연결하려고 했다. 샬럿과 존 케이지 와 했다 21세기 실크로드는 전자 초고속도로로부터 The Electronic Superhighway as the 21st century Silk Road 발표자 | 최태만 Tae Man Choi 국민대 교수
[천문] 가장 한국적 나는 항상 별과 함께 태어나다(Ego=별)<한국인은 항상 천문학과 함께 한다>. (시작할 때 시(始)자에 여자 변이 있다 왜 우주생성) 1984년
<인류학> : 세계관점을 가지기 위해 가장 타당성 있는 학문
[1]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치명적으로 허약한(vulnerablity) 취약계층[The vulnerable] 즉 이름 없는 이웃들과의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다. 우리는 그런 거짓 포장을 벗겨냄으로써 서로의 벌거벗은 얼굴 없음(facelessness) 마주하고 각자를 취약한 존재로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서로를 공유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 양혜규의 백남준의 인류학에 대해 쓴 글
[2] [백남준, 인류학으로 접근해야] <내질문> 백남준의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이영철>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이에요. 역사학적 관점이 아니에요.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기존체계와 질서의 교란자로서의 백남준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기가 횡행하기에 그것을 극복하려면 예술가는 그 모든 사기를 사기 치는 교란자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백남준의 예술가론은 교란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백남준의 사기론은 교란자의 미학이에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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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https://www.youtube.com/watch?v=MW09uo1Mq4A&t=108s
[백남준&조국애] 세계적 세기적 한국적 인간적??? - 오늘 주제는 백남준, 세계적 이전에, 가장 한국적 작가 아니 맞물려 있다. 국제적 국수적 구별해야 한다. 한국에서 국수적 목소리 너무 크다 문화적 애국주의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나치즘 세계미술과 동네미술 구별하지 못한다. -1993년 미국미술 한국 집수입하다. 가장 한국적 가장 세계적이다.
[1] 세계적이란 6개국어 했고 전 세계 신문을 읽고 6차원의 세계 그리고 가장 세기적이다 세계 시사에 밝다 시사와 정보(INFORMATION 아티스트)에 밝은 작가다. 정보를 가장 중시한 예술가다. “정보는 공식적으로 대체 에너지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정보는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꾼다. 댄서와 요가수련자는 200칼로리로 엑스타시를 맛본다.
[2] 가장 세계적 보편적 가장 한국적이다. 이 두 개 같이 봐야 한다. 여기서 세기적이란 시사에 밝은 작가라는 의미다. 역사와 서사, 그 이상으로 백남준, 우리는 그가 세계적 작가로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맞다.
[3] 그는 6개국를 하는 노마드 작가였기에 사고에 있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누구도 추종하기 힘들었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페북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4] "궁즉통 극즉반(窮則通 極則反)" 정신이 있다. 다시 말해 백남준에게는 미술이 다 하면 음악이 되고, 음악이 다 하면 미술이 된다. 그럼에도 백남준에게 미술은 무엇보다 음악이다. 백남준의 첫 전시가 음악의 전시인 이유다.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이 칸딘스키와 쇤베르크이다. 그런데 칸딘스키와 쇤베르크는 절친이었다. // "궁즉통 극즉반(窮則通 極則反):궁하면 통하고, 극에 달하면(극한 상황에 처하면) 반전시킨다"이라 -한국에 17년 근무한 영국 기자가 본 한국인의 최고 지혜다.
[5] 백남준 국수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 백남준 인류학 열심히 공부한 흔적을 아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신라왕관(금관)은 북방 스키타이(사슴뿔 모양)에서 온 것이다. 백남준은 사유재산이 없는 시대를 동경하다.
[6] <인류학> <백남준과 신석기와 정보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최고급 정보와 지식을 가장 많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칭기즈칸. 정치인보다는 예술가가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에 대해 호령할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혁명과 정보화 시대 혁명은 어딘지 닮다. "나는 TV로 작업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백남준
[7] 국수적이거나 고립적이지 않기 위해서 1974년 백남준이 록펠러재단에 제안한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초고속도로)' 개념이 여기도 나온다. 1993년 '전자초고속도로(부제,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라는 작품으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다름 아닌 인터넷 개념의 예술화였다.미 제국주의는 지나치게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고만 하기에 지구촌에서 인심을 잃고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 몽골제국이 최고였을 때, 주변 국가에 대해 혜택을 많이 주는 관용 정책을 썼을 때였다> 몽골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말이 가장 빠르기도 했지만 역참제 Networking station가장 발달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이 가장 빨랐다. 역참제도(驛站制度). 몽골 제국을 만든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고쳤다. 몽골, 즉 원나라가 남긴 주요한 업적 가운데 역참제도 <사진> 위 칭기즈칸, 아래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다.
<백남준 누구 어떤 예술가 어떻게 결심>
[1] <나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어쨌든 예술가가 되어야 겠다 -백남준>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한이 많은 사람이다. 여기서 한은 복수나 원한이 아니고 최고로 승화된 가장 수준높은 정서인 것이다. 한을 정을 승화하는 비슷한 그러한 삶에 대한 태도가 아닌가. 백남준의 한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아버지 같이 부자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술가가 된 것이다. 일제시대 부자가 된다는 것은 일본정부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천재성을 마음껏 펼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만난 지식인 중 최고는 맑시스트였지만 결국 백남준은 그런 그마저도 능가하는 최고의 예술가가 된 것이 아닌가. 그가 1996년 지나친 작업 과로로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도 휘파람 불며 한 말이 바로 "I am happy" 이 말은 연발했다고. 즉 인생이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가장 창의적인 인간이 될 수 있고 그때 가장 행복하다는 말이 아닌가.
[2]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두세 가지 일 구멍 내기와 우상 파괴 그리고 잇기 백남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구멍을 내고 다녔다. 그는 무미건조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대혼란이 왔다. 획일적인 것이나 일사불란함 같은 것을 때려부셔 버렸다. 백남준은 예술가 역할 중 하나로 교란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미 서구에서 종교화된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또 하나는 그리고 전쟁과 미움과 갈등으로 끊어진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일을 했다. 백남준은 선시 중 하나인 무봉탑(이음새가 없는 탑)이라는 시를 좋아했다. 이 시는 부처님이 말하는 우주 만물에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인드라망 사상을 담은 것인데 백남준 이에 크게 공감한 것이다. 백남준은 너무나 넓고 크고 깊고 광활한 세상과 그 모든 인간과 우주를 다 담고는 남을 수 있는 무봉탑 같은 세상(해원상생)을 열망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발명하고 상상한 것이다
[3] <예술목적><백남준, 아무도 가지 않은 미개척지> "나는 처음 작곡가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미학자, 산문가였죠. 마치우나스나 나나 정식으로 특정한 예술을 배운 적이 없어요. 행위 예술을 했지만 배우는 아니었다. 한번도 배우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TV를 연구했죠. 누구나 당연한 듯 TV를 보죠. 나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순수한 플럭서스의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플럭서서는 바로 처녀지로 가는 길이잖아요. 거기에 처녀지(아무도 가지 않는 곳) 있었어요. 그러니 갈 수밖에 없었죠. 에베레스트 산과 같아요. 산이 있으니 그냥 올라가야 하잖아요". - 리비어와 인터뷰 1974년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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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민주주의자로서의 백남준 : 문화민주주의'디자인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철학이 세계 곳곳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준 셈이다. 이 메시지는 독일의 개념 미술가 요셉 보이스를 연상케 하는데, 그는 회화나 조각 뿐 아니라 강연, 교육, 정치, 행동, 무엇이든 다 미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확장된 예술 개념이 '사람은 모두가 예술가'라는 예술의 탈신비화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예술가란 날마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2> 축제주의자로서의 백남준: 돈보다 축제가 먼저다 일관되게 삶의 향유를 최우선으로 두는 축제주의자였다.
<3> 전자공학(물리학)을 프로처럼 구가하는 공학도로서의 백남준: 전자공학을 독학하다 학창시절 물리학을 좋아한 백남준:백남준이 이런 과학이론에 빠질 수 있는 이유는 그와 동거 동락한 부인 '시게코'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학창시절 물리학자가 되고플 정도로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기계 다루는 데도 능했다. 'K-456'도 만들었고, 전시 땐 TV내부회로도 직접 조작했고, '아베'와 함께 비디오합성기를 설계할 만큼 과학적 지식도 풍부했다.
<4> 르네상스인간으로서의 백남준: "과학자에게는 예술이 마법이고, 예술가에게는 과학이 미스터리다"라며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어서려 했다. 그래서 백남준이 '현대판 20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위너는 르네상스 인간 하버드 철학박사 수학자다.
<5> 우상파괴자로의 백남준 우상숭배는 인류의 영원한 질병이다 6) 인류학자로서의 백남준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6> 인류학자로서 백남준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간다고 봐요.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7> 기존체계와 질서의 교란자로서의 백남준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기가 횡행하기에 그것을 극복하려면 예술가는 그 모든 사기를 사기 치는 교란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백남준의 예술가론은 교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의 사기론은 이런 교란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1] 1979년 백남준의 정보아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또한 자신은 '정보예술가(Information Artist)'임을 선언! 이제 정보가 석유를 대신하는 시대라고 말하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2] 세계적인 작가 이전에 가장 한국적인 작가, 백남준,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명은 '엄마(Ommah)' 그냥 한글로 적는다. 백남준은 막내였기에 엄마의 사랑을 유난히 많이 받았다. 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는 전 세계인에게 '엄마'라는 한국어를 퍼트리다. 영어의 맘(Mom)과 비슷하지만, 한국의 엄마는 좀 다르다. 서도호의 한복으로 지운 한옥 작품이 여기서 영감을 받았나. 백남준 I '엄마(Ommah)' 2005
[이경희 여사가 2000년 '백남준 이야기'를 다급하게 쓰게 된 동기] 백남준은 어린애처럼 몇 번이나 조르듯 떼 쓰며 '내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난 그런 글 쓸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갔을 때 보니 백남준이 나를 금방 못 알아보는 거예요. 처음엔 비디오아트전시라 내부가 좀 어두워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백남준이 당뇨로 눈이 잘 안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런 세계적 회고전을 열 수 있다니 생각하니 얼마나 고생을 심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어요. 그가 내게 부탁한 책을 낸다 해도 읽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그해 다급하게 낸 책이 바로 <백남준 이야기>(2000)입니다. **11년 후 그의 탄생 80주년을 맞아 그의 예술세계에도 접근하고자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2011)를 냈다.
[1] <백남준이 애국하는 방식은 세계미술계에서 더 유명해지는 것> 이경희 여사: 나는 백남준의 이런 실험정신이야말로 새로운 걸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플럭서스' 운동할 때 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부순 건 이 시대 우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표현한 것이잖아요. 기존의 질서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상징을 파괴해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이를 통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내 경우에 있어 이 시대 진정한 애국은 투사나 열사가 되는 게 아니라 세계미술계에서 더욱 유명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그러면서 '내 경우에 있어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은 투사나 열사가 되는 게 아니라 세계미술계에서 더욱 유명해지는 것'이라고"
[2] 시게코 작품 '한국 무덤' 남편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 1993년 작 "한국의 산하는 나의 마음을 어머니 품처럼 푸근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시게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게코 작품. 전자 아트로 그린 한국의 어머니 품처럼 푸근한 무덤 이미지. 한국의 무덤 정말 아름답다 황홀하다 가장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여성의 젖가슴 같은 곡선이 완면하고 너무나 부드럽다는 느낌,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같다. 각진 곳이 전혀 없다. 자연과 완전히 동화된 모습 그 자체이다. 고조된 물아일체의 미학, 그 절정을 보여준다.
[3] 무엇보다 자신감 2000년 호랑이는 살아있다. <한국인>[] [그렇다가 아니다. 아니다가 그렇다. 혹은 규정된 세계와 규정되지 않는 세계의 공존을 말한다] <천부경>.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경전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부경에 대해 전혀 모른다. 천부경 1장 1절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하나가 시작하나 시작이 아니다. 천지가 창조되었으나 창조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이중성, 역설,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성서에는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다와 같은 말인데 서로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네요.
[1] 1993년 이경희 여사, 베니스비엔날레 전시된 백남준 작품 참관기 "백남준은 역시 한국인이었다" <참고> 1993년 제 13회 베니스 자르디니공원 숲 속 언덕에 전시된 백남주 단군 스키타이 왕, 이 단군상은 배를 타고 지날 때마다 서치라이트가 된 두 눈으로 푸른빛을 강력하게 발산하여 마치 베니스의 상징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2] 1993년 제 13회 베니스 자르디니공원 숲 속 언덕에 전시된 백남준 단군 스키타이 왕, 이 단군상은 배를 타고 지날 때마다 서치라이트가 된 두 눈으로 푸른빛을 강력하게 발산하여 마치 베니스의 상징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진 이경희 <지금 막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 도 착륙한 우주인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단군은 역사이다. 다만 신화적 언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 부정한다.
[3] 백남준 가장 한국적 작가 [청와대 백남준 작품<비디오산조> 진작 설치해야 했었는데 설치하고도 전기세가 아까워서 전시를 못하나 이 정도 전기소비야 국민이 이해하지 않나][경향신문] 지난달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동된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비디오 산조. 지난달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면에 설치된 12인치 컬러 브라운관 83대 화면이 켜졌다. 전원을 공급하지 않아 꺼진 상태로 있던 평소와 달라 눈길을 끌었다.눈여겨 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치게 되는 이들 브라운관은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작품 ‘비디오 산조(散調)’다. 청와대의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이 1990년에 준공될 때 같이 설치된 이 작품은 브라운관에서 형형색색의 화면이 나오면서 우리의 전통 가락 산조의 흐름을 형상화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3일 “작품이 작동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잠시 전원을 공급했다”고 설명했다.
[1] [1992년 백남준과 김용옥 인터뷰 중 일부내용] "내가 가서 보니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인상파도 독일의 작곡가들도 다 쓰레기야" - 백남준 김용옥 인터뷰 중에서 1992년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거 없는 거야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가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 같았어. 난 여태까지 일본 무서워해본 적 없거든 일본에서 음악공부 좀 하다가 질력이 나서 ...진짜 음악공부 해봐야겠다고 본고장으로 가자해서 경박한 나라는 안 가고 독일 찾아갔거든 그래서 독일에가서 보니깐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그것뿐이 아니야 미술도 그래. 난 예술에 그 유명한 그림들 일본 놈들이 근사하게 인쇄해놓은 것으로만 봤잖아. 그래서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고 동경했지 그런데 직접가보니깐 허름한 캔버스위에 나달나달하는 페인트 형편없더라고 뭐 인상파다 르네상스 예술이다. 루벤스다 하는 것 직접 보니깐 형편이 없었던 비싸다고 하니깐 대단하게 보였던 거야 난 정말 실망했고 이따위 것 가지고 내게 그렇게도 동경했던가 하구 말이야. 박물관에 멍하니 앉아있었어. 작곡가도 말야 그 대단한 독일이라는데 쓸 만한 몸에 4-5명밖에 안 되더라고 4-5명 정도는 탑이었어. 그러나 나머지는 어차피 쓰레기 아냐 그러니깐 난 용기가 나더라고. 우선 4-5명밖에는 안 되는가 내가 낄 자리도 아직 많겠고 생각이 들었고 또 못겨두 어차피 시원찮은 놈들뿐인데 그 시원찮은 놈들 속에 내 시원찮은 이름 하나 더 끼어 넣는 들 죄송할 게 없잖아. 피차 마찬가진데 그래서 난 곧바로 작곡 행세를 해버린 거야 그리고 지금부터 굵게 놀았지 그러니까 내가 독일에서 작곡가가 된 것으로 훌륭한 작곡가 때문이 아니라 나쁜 작곡가들이 하도 많아서 자신감이 생겼던 것 뿐이지.
[2] 동서양의 만남과 소통을 주제로 한 <바이, 바이 키플링>에 나오는 장면 중 남대문시장의 미꾸라지장사·옷 장사 등의 영상이 방영된 적이 있는데 왜 그런 후진국 모습을 담았냐고 비난을 하니까 '궂은 것을 피하면 후진을 벗지 못한다, 남대문시장 풍경은 미국에 없는 퍼포먼스여서 재미있어 찍은 것'이라고 말했어요.“
[1] 백남준의 한국화 <이경희 설명> 왜 '굿의 예술화', '민속학' 등을 중시했는데 생각하시는지요?"백남준의 작품에는 한국에 대한 전통, 민속놀이 같은 것이 많이 소재로 돼 있습니다. 어려서 '큰대문집'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굿을 했는데 그 때 본 무당에 강한 인상이 어른이 돼 비디오 아트에도 많은 소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의 무당이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애꾸무당'이었다며 애꾸무당의 얼굴이 TV프레임 속에 있는 스케치를 그 자리에서 그려 주는 순발력을 보고 함께 있던 분들도 놀랬어요.
[2] <12 내 생각에 백남준은 세계적도 아니고 세기적도 아니고 가장 한국적인 작가였다. 삼국유사를 술술 외우고 다니는 그런 작가였던 것이다.>백남준 인맥 세계적 작가-세기적 작가-한국적 작가/백남준과 관련된 사람들 100여명 13 [] 백남준 인맥 세계적 그가 인간적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한국적이기 때문인가! 정보시대 정보수집능력이 탁월했다. 휴먼 네트워킹도 마찬가지다.
[3] 1990년 7월에 보이스를 추모 진혼굿 퍼포먼스를 준비하며 한복 입고 피아노 앞에 앉은 백남준 사진 박영덕 마르셀 뒤샹,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워홀, 바스키아, 사르르트, 샬럿 무어먼, 머스 커닝엄, 라운센버그, 맥루언, 보들레르, 쇤베르크, 오노 요코, 아베, 마치우나스, 슈톡하우젠, 바우어마이스터, 사카모토 류이치, 존 레논, 위노, 긴스버그, 노만 밸러드, 앨런 카프로, 프로이트, 맑스, 아도르노, 비올라, 장자, 노자, 선불교 선사, 레비 스트로스, 괴츠 칼 오토, 니체, 헤겔, 피에르 레스타니, 바르톡, 베르그송, 벨헤름 장 피에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원효, 서경덕, 다산 정약용, 도올 김용옥, 예를링 롤프, 이건우, 이우환, 장 클로드 크리스토, 포르트너, 플럭서스와 그의 사람들, 하긴스 딕, 시게코, 보스텔, 만프레트 레베, 데이빗 보위, 스즈끼 다이세쓰 1870-1966 히데오 우치다. , 요헨 시유어라커 , 폴 게린, 노만 밸러드, 마크 파스팔 신시내티대 교수, 라파엘레 작가,
[4] 토머스 크렌스(Thomas Krens), 존 핸하르트,김홍희, 자니스 거이(Janice Guy) 이유진 큐레이터, 키플링, 1995년 백남준과 미국의 신시아 굿맨(오른쪽) 전 IBM미술관 관장 계속이어서 김승덕 디렉터, 김창실 대표, 장폴 파르지에(파리8대학교수 백남준연구가), 에디트 데커(백남준연구로 독일에서 박사학위), 최재은, 헤어조겐라트(Wulf Herzogenrath백남준 연구가, 브레멘미술관 관장 베를린 국립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바바라 런던(뉴욕 모마 큐레이터), 클라우스 부시만(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창시자), 송미숙(미술평론가), 와타리(개념미술의 대가), 김흥남, 어빙 샌들러(뉴욕주립대학교수), 보니토 올리바(트랜스아방가르드는 평론가 베니스비엔날레 총책임자), 아키야마. 자루, 허누타, 한스 베르너 슈미트, 글룩, 루시 샌들러, 리트, 하트니, 마뇨 이용우 김홍희 이용우는 핸하르트(미국국립미술관 수석큐레이터) 한국 측에서는 이용우·유홍준·서성록·송미숙·윤범모·정영목·김홍남·김홍희 등이 참석했다. 그때 경주에 가서 찍은 기념 사진
[5] [지금은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다니는 1인 기업시대, 1인 미디어방송시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지식근로자'] <내질문> 백남준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라는데 정부가 뭘 해야하나?<이영철>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 그건 구호일 뿐입니다. '뒤샹'도 20세기 현대미술의 창시자가 되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어요. 난 한국사회의 지성사에 예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지 한국미술계에 묻고 싶어요. 예술이 문화의 꽃이라는 걸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 때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거죠. 지금은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다니는 1인 기업시대, 1인 미디어방송시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지식근로자'잖아요. (이걸 누가 만든 겁니까?) 이럴 때 정부가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백남준의 가치도 전국적으로 개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김구가 원했고(문화로 최고가 되는 나라) 백남준이 실현하려 했던 두뇌강국, 문화강국이 되는 거죠.“
한국적 작가(?)
[1] <최 작가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 최울가 작가의 고백 ; 돌아가시기 2년 전에 뉴욕 소호 거리(지금은 번화가)에 비가 내렸는데 애기 유모차에 타시고 반쯤 비를 맞으면서 가시길래 "선생님 건강 괜찮으세요?" 물으니 "어 괜찮아!" 하시면서 도움이가 끌어 주는 유모차를 타고 가시는 모습이 나와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국가가 저렇게 큰 거인 하나를 돌봐주지 못하다니 일본 같았으면 정말 난리가 났을 텐데 싶었다 그때 우리나라에 대한 원망 예술을 모르는 무지함이 저 큰 대가를 저렇게 버리는구나 싶어 그 답답한 심경은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종일 비가 내렸고 난 온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 종일 보내던 기억 난다
<<이경희>>
[1] "어려서 남준네 가면 '색시 왔네' 했어요"[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할 때] 백남준의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 2013.04.03.(내가 60살에 백남준 기사 시작)
[2] 백남준의 유치원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백남준은 창작활동에서 유치원 때 기억이 꽤 많이 아이디어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술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경험한 것에서 영감을 창출되는 것 아닙니까.우리가 어렸을 1930년 후반에는 유치원 다니는 게 흔치 않았습니다. 백남준은 부잣집 아들이었고 나도 무남독녀 외동딸인데다 아버지가 일본 유학생이었고 어머니가 동덕여중을 나온 신여성이라 딸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동대문 밖 창신동에 살면서 을지로 2가 명동성당까지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겠어요.
[3]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를 낼 때 우연이기는 하지만 우리 둘은 많은 면에서 닮아있어 거기에 뭔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꼭두극·사물놀이·남사당 풍물패 유럽공연을 제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셈인데 그런 것이 백남준의 예술적 시도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내가 꼭두극단을 만들고 자문을 얻어 '인형극'이 아니라 꼭두놀음패 '어릿광대'라고 지었는데 백남준은 스스로를 '무당'이나 '어릿광대'라는 비유했잖아요.더군다나 백남준이 한국에 온 첫해인 1984년 내가 제작한 꼭두극 '양주별산대'를 가지고 동독 드레스덴에서 열린 '세계꼭두극페스티벌'에 참석하게 됐는데 당시로는 동구권 참가라 우리나라에도 역사적인 일이었지요. 국가지원 없이 나 혼자서 해나가기가 힘들다니까, 백남준은 '경희가 굉장한 일을 하는데 내가 뭘 도와줄까?' 하더니, 마침 자기가 조금 후에 문공부장관을 만나러 가니 도움을 청하겠다는 거예요.나는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아니, 고국에 돌아와서 문공부장관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런 자기의 유치원 친구를 도와달라고 한다니 그게 말이 안 되지요. 1984년 유럽공연을 잘 마쳤더니 연말에 백남준이 나에게 '구라파 순회공연 축하!'라고 쓴 엽서를 보내줬어요. 우린 이상할 정도로 상통하는 데가 많아 보입니다.“
[4]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다"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밤 35년 만에 귀향했다. 6월 30일 출국하게 된다. 그때 배웅하러 나간 이경희 여사와 유치원친구 박한수(왼쪽)씨 그리고 백남준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각자의 궤도를 돌다 1984년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습니다. '유치원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5] "마지막으로 본 게 그가 죽기 거의 1년 전인 2004년 12월 6일입니다. 백남준이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내가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쿠바여행을 핑계로 백남준에게 전화를 걸고 가겠다고 했더니 만나겠다고 하더군요. 부인 시게코에게도 알렸고요.
[6] 2000년 구겐하임 개인전 제작과정을 지켜보는 백남준, 당뇨가 심해 이때부터 한쪽 눈이 거의 안 보이기 시작하다.
[7] 백남준은 기지 넘치는 말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좋아하시는 게 있다면?"'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가난한 사람,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뿐이다' 등입니다. 백남준은 자신을 '어릿광대'로 비유하며 자기의 예술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그래서 지구촌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84년에 <굿모닝 미스터오웰> 86년에 <바이, 바이 키플링> 88년에 <손에, 손잡고> 같은 위성아트 연작을 남긴 것 같아요. <손에, 손잡고>는 구소련과 중국이 참가해서 아주 큰 이슈. 구소련에서는 사전검열 없이 생방송되어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고요. 세계적으로 히트하려면 사람들이 얼떨떨해 할 정도로 재미있게 대중예술 위주로 편성돼야 한다고 봤습니다."백남준은 '위성아트'로, 난 '꼭두극'으로 한국 알리다- 백남준은 '작곡가'에서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경희 여사는 '약학도'에서 '꼭두극 연출가'로 변신하셨는데 그런 면에서 두 분 비슷한 점이 많네요?"글쎄요. 그리고 보니 그렇네요. 나도
[8] 이경희 여사는 백남준과 명동성당 건너편에 있었던 '애국유치원' 동창이다. 당시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던 시절 백남준 집에 그 차가 한 대 있었는데 이 여사는 그 차를 타고 유치원에 같이 다녔다고 한다. 두 집안의 어른들끼리는 정혼을 맺어 이 여사가 백남준 집에 놀러 가면 "남준이 색시 왔네"라고 말했단다.이경희 여사는 서울대에서 약학을 전공했으나 대학 2학년 때부터 방송과 인연을 맺어 KBS 라디오 '스무고개' '재치문답' 등과 KBS TV '나는 누구일까요' 등 20년 가까이 방송패널로 출연했다. 후에 세계여행을 주제로 한 기행수필가로 변신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국 꼭두극'을 알리는 문화대사 몫도 톡톡히 했다.
[9] 10여 년 간격으로 백남준 관련 책을 두 권 내셨는데 그의 차이점은 뭔가요?"백남준이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부터 자기와 내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는 이야기를 몇 번 했는데 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한국인의 정서로는 '나와 남준 같은 사적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좀 부끄럽고 유치하다고 생각했거든요.그럼에도 백남준은 어린애처럼 몇 번이나 조르듯 떼를 쓰며 '내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난 그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갔을 때 보니 백남준이 나를 금방 못 알아보는 거예요. 처음엔 비디오아트전시라 내부가 좀 어두워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요.그런데 백남준이 당뇨로 눈이 잘 안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런 세계적 회고전을 열 수 있다니 생각하니 얼마나 고생을 심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어요. 그가 내게 부탁한 책을 낸다 해도 읽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그해 다급하게 낸 책이 바로 <백남준 이야기>(2000)입니다.
[10] 백남준 나를 알아보고 괴성을 질렀어요. 시게코와 인사하는 동안도 계속됐고요. '당신이 와서 너무 흥분돼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의사도 흥분하면 뇌혈관 파열이 될 수 있어 조심하라'고 했는데 나는 왈칵 겁이 나, 그가 절규 못하도록 그의 얼굴을 꽉 껴안았어요. 시게코도 '소리치면 주인이 더 못 오게 한 대요'라며 그를 다그쳤고요. 그런데 백남준은 뜻밖에도 나에게 난생처음 존댓말을 쓰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게 백남준과의 마지막 포옹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남준이 내 얼굴을 똑바로 보더니 '경희, 옛날하고 똑같아'라고 두 번이나 말하잖아요. 유치원 때처럼 날 예쁘게 본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시게코에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 왜 통화가 안 됐나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내가 어딜 가는지 알아야 할 이유가 뭐냐'며 화를 버럭 내더니 백남준의 휠체어를 확 빼 가지고 그대로 가버렸지요. 그 순간 너무 당황했습니다. 이제 백남준을 마지막으로 보는가 싶어 급하게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그의 뒷모습을 찍었지요.
[11] '윤이상 선생' 국내 초청 건으로 잘못 말했다 큰 곤혹을 치렀다고요? "1994년 '윤이상음악제' 때 정부가 윤이상 선생을 초청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날보고 말리라는 사람이 많았고 국내여론도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백남준에게 전화가 왔기에 '윤이상 선생과 퍼포먼스를 안 하는 게 어때요'라고 의견을 말했더니 백남준이 너무나 크게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백남준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음악가다, 선생과 나는 예술장르와 생각은 달라도 한국의 예술가라는 점에서 같다,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페스티벌에서 만난 후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졌다'고 하면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와 상상력이다, 이데올로기·제도·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경희 여사 소개>"수필가이자 한국 꼭두극의 선구자 이경희 여사 유사(唯史) 이경희(李京姬)는 1932년 12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2학년 재학시절부터, KBS 라디오의 '스무고개'와 재치문답' 등의 프로그램에 '박사'로 출연하기 시작하여 KBS TV의 '나는 누구일까요?' '나의 직업은' 등 20년 가까이 방송패널로 출연했다주별산대'로 주목을 받았다. 88년에는 '서울국제꼭두극페스티벌'을 유치했다.
[1] 백남준이 어린 시절 살았던 창신동 자리에서 프랑스 TV '카날 플뤼(CANAL+)'에서 촬영한 영상필름의 스틸 컷. 백남준이 살았던 부잣집을 상징하는 창신동 '큰대문집'이 나온다. 백남준의 흰 도포차림과 갓 그리고 이경희 여사의 한복이 인상적이다. 백남준 집안은 음력시월상달에 굿판을 벌였단다. 부잣집답게 동네사람들 다 모아 한바탕 축제를 벌이고 크게 대접을 했단다. 이런 경험은 그의 '굿 미학'에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백남준과 도올 선생>
[1] <1992년 30년 전 이야기라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인터뷰 도올: 한국에서 제일 좋은 곳은 어딥니까?[] 도올과 남준의 인터뷰(1992년) 바쁜 일정 속 이뤄졌다 도올 자신 양심선언 등으로 교수자리를 떠나게 되었다고 하니 백남준 정말 잘 했다고 격려하다. "나는 남준이를 늘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남준이는 나를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백남준 작은 누님이 동생은 외국에 돌아다니면서 힘든 전위예술인지 뭔지를 한다고 해서 날 기억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외국에서 정말 멋진 여자들도 많이 만났을 것이고요.(웃음)
[2] [도올] 남준을 결론적으로 그의 책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여태까지 그만큼 이론과 실제가 완벽하게 구비된 그러면서도 한치 빈틈 없는 논리를 구사하는 인물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의심할 바 없는 위대한 예술인이었다.
[3] 도올: 서울에서 가장 나쁜데는? 남준: 우리 누나 차가 있어 그 기사에게 가장 못하는 동네를 데려달라고 했는 빈민촌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하고 그런데 아무리 달동네를 뒤집고 다녀도 뉴욕 슬림수준보다 아니었다 아주 처참히게 가슴에 와 닿는 그런 절망적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개선할 점이 있지만 너무 비관할 수준은 아니다.도올: "한강에는 13개 다른 종류의 다리가 만들어져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세요?"남준: 중동에서 오는 바이어를 샘플을 보여주기 위한 것 아닌가. 그러니까 한강다리 상업전시장의 용도가 있다. 참 한국인 아이디어 기발하고 창조적이다 얼마나 실용적인가 요번에 행주산성 무너진 것도 아마 새 샘플만드느리가 별안간 식신시공으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인은 참으로 모험정신이 강하다. 그런대로 그럭저럭 모든 것이 잘 굴러가는게 너무 신기하다.서울의 도시계획도 나는 실패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빨리 세우고 엉성하면도 있지만 그렇게 기증적인 도시를 탄생시킨 유래는 인류역사상 없다.
<김훈> 예술은 도덕적(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인 것 아니다>
[1] <예술은 도덕적(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인 것 아니다> 김훈(소설가): 예술이 인간의 현실을 감당해 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명제를 전제로 하고, 당신은 자신의 예술을 돌아본 적이 있습니까? 백남준: 그것도 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1년, 2년을 겨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술의 지역성·민족성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팔자 좋은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팔자가 좋지 않아서, 더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백남준은 이런 말도 했다. "문화적 애국주의는 가장 나쁜 것이다"
<베니스이야기>
[1] [백남준] 요셉 보이스, 여러 번 비교 이번에는앤디 워홀의 차이왜 백남준이 요셉 보이스보다 한수 위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다 가장 정치적 예술가다. 정치의 예술화(민중미술)가 아니고 예술을 정치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보이스는 독일 녹색당 창시자로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하면서 정치적 예술가였다면, 백남준은 전혀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정치적 예술가였다. 그런 면에서 요셉 보이스보다 한 수 위다. 앤디 워홀은 보이스보다 한 수 낮은 정치 예술가 왜냐하면 낫과 망치를 노골적으로 그렸기에.
[2] 백남준은 타계하기 1년 전에도 뉴욕 자택에서 포퍼먼스를 했다. 그때 적어 놓은 "백남준은 (우둔한) 바보"라는 글귀가 보인다.천재만이 자신을 '바보'라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시대는 머리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손과 발만을 사용하는 바보가 되라는 소리다. 그것이 21세기를 천재로 사는 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 제사 때 사용하는 쨍쨍 소리가 나는 놋그릇을 예술화하고, 지게 위에 지구본을 올려놓고 전 세계를 유목하는 자의 모습을 재현한 퍼포먼스 아트에 활용한 사람은 백남준 밖에 없다. 위는 2019년 백남준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놋그릇이 등장했다.
[3] 1992년 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갑 회고전이 준비되고 있었고 이 전시 부대행사로 '현대미술 세기의 전환 20~21세기 국제 심포지엄'이 1992년 7월 30에서 8월 1일까지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백남준 연구가인 장 폴 파르지에 교수 외 한국 측에서는 이용우·유홍준·서성록·송미숙·윤범모·정영목·김홍남·김홍희 등이 참석했다. 그때 경주에 가서 찍은 기념 사진 1992년 한참 한국이 세계화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당대 최고의 미술관계자들 다 경주로 모이게 했다. 이 사진은 이용우 선생이 가지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은 가볍게 볼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김홍희 이용우는 물론이고 핸하르트(미국국립미술관 시니어큐레이터) 등 저명인사가 수두록. 김승덕 디렉터, 김창실 대표, 장폴 파르지에(파리8대학교수 백남준연구가), 에디트 데커(백남준연구로 독일 박사학위), 최재은, 헤어조겐라트(백남준 연구가, 브레멘미술관 관장 베를린 국립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바바라 런던(뉴욕 모마 큐레이터), 클라우스 부시만(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창시자), 송미숙(미술평론가), 와타리(개념미술의 대가), 김흥남, 어빙 샌들러(뉴욕주립대학교수), 보니토 올리바(트랜스아방가르드는 평론가 베니스비엔날레 총책임자), 아키야마. 자루, 허누타, 한스 베르너 슈미트, 글룩, 루시 샌들러, 리트, 하트니, 마뇨 등등등
[4]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그리고 20세기 전체를 뒤샹의 시대라 부른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백남준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진중권]
[5] <프랑스 '리베라시옹'지> 백남준 추모기사(2006년) 백남준과 멜빵은 동의어다. 이런 식의 표현은 재치와 에스프리가 넘친다] 백남준이 작고했을 때 프랑스 리베라시옹 신문 백남준의 영혼에 바치는 기사를 남겼네요. 기사 아주 길지는 않지만 웬만한 것은 빠지지 않고 모두 다 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6개 국어를 했고 그의 언어 사용에는 상징성이 깊이 녹아있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정치가가 되었다면 감옥을 갔을 것이고 내가 사업가가 되었다면 세속적인데 물들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싫어서 난 예술가가 되었다. 나는 늦잠을 잘 수 있는 예술가의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기사 중 a real dandy of the image라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다. 아래 이 기사의 제일 마지막 부분이다
<백남준과 멜빵은 동의어다. 이런 식의 표현은 재치와 에스프리가 넘친다] 백남준이 작고했을 때 프랑스 리베라시옹 신문 백남준의 영혼에 바치는 기사를 남겼네요. 기사 아주 길지는 않지만 웬만한 것은 빠지지 않고 모두 다 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6개 국어를 했고 그의 언어 사용에는 상징성이 깊이 녹아있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정치가가 되었다면 감옥을 갔을 것이고 내가 사업가가 되었다면 세속적인데 물들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싫어서 난 예술가가 되었다. 나는 늦잠을 잘 수 있는 예술가의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기사 중 a real dandy of the image라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다. 아래 이 기사의 제일 마지막 부분이다>
[6] 백남준의 또다른 스승은 보들레르 발터 벤야민이 그랬듯 말이다. 시대를 꿰뚫는 '견자(見者 visionary)': 보들레르와 백남준 "어둠인지 빛인지/광막한 어스름의 깊은 합일 속에/긴 메아리 멀리서 잦아들듯/색채와 소리와 향기가 서로 상응하네" -보들레르의 대표시 <상응> 중에서 백남준의 글 비디오암호코드 중 위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하며 그가 보여준 비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P185>백남준은 그의 전자아트에서 유럽성당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와 '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중세건축에서 스며드는 빛이 연출하는 짜릿한 전자 황홀경과 '색깔·소리·향기'의 언어에 '시각·청각·촉각'을 결합한 보들레르 시에서 융합의 미를 발견한 것인가. 다만 백남준은 그런 요소를 전자방식으로 바꿨다.백남준과 보들레르의 같은 점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관점(비전)'에 있다. 보들레르의 제자 랭보는 이런 예술가를 '견자(見者 visionary)'라 했다. 반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보들레르가 반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상징적 '시적 비전'을 썼다면, 백남준은 경계를 허무는 반위계적이고 비선형적인 사이버화된 '전자 비전(Television)'을 썼다는 점이다."[] '()"'()[백남준의 낙관론_내일 아름다울 것이다]
[7] <구석기의 불의 발명과 20세기 비디오아트의 발명은 등가가치가 같다> 백남준 TV 촛불 이 작품에서 촛불은 인류를 구원하는 빛의 잉태를 상징하는 매개체이다. 여기서 구석기 시대의 불의 발견과 같은 혁명인 것이다 그런데 백남준의 촛불은 그냥 촛불이 아니고 전자 촛불 즉 전자빛인 것이다
<백남준과 뒤샹 비료>
[1] 그의 마지막 작품 에탕 도네는 학생들에게는 19금이다 <이 미스테리한 미완성 작품 에탕 도네를 완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관객들이다>뒤샹은 서양미술의 끝판을 가다. 이를 넘어설 예술가가 필요했다
[2] 뒤샹은 남자이지만 여자라 되려고 할 정도로 여장을 하면서까지 여성적인 것을 동경하고 있었지만 그의 유작인 에탕돈네를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남성적이다/ 뒤샹, 백남준 다 여자 되려 했는데 그 차이는 뭔가? 백남준과 샬럿 무어만 퍼포먼스 장면 그런 면에서 뒤샹이 제3의 성을 이야기했다면 백남준은 제 4의 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뒤샹은 남성으로 여성이 되려고 했고 백남준은 아예 처음부터 여성으로서의 남성이라는 전제 하에 여성이 되려고 한 것이다.
<추신> 뒤샹은 이렇게 자신을 여성적 페르소나로 변장시키는 것을 즐겼다. 동시에 그는 모나리자를 '남성적 페르소나'로 바꿔 그리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성 역할을 넘어서는 '제3의 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근 독일헌법재판소에서는 이런 제3의 성을 합법화
<뒤샹과 백남준 다 여자 되려고 해, 그 차이는?>
[1] <결론> [보충설명] 뒤샹과 백남준 두 작가는 여성적인 것에 관심이 높다는 면에서는 둘은 같다. 뒤샹은 여장으로 여성적인 것을 동경했지만 그럼에도 '에탕돈네'를 보면 여전히 남성적 시선이다. 그러나 여성성의 상징인 달 작품을 많이 했던 백남준은 유작마저도 '엄마(2005)'이다. 백남준은 처음부터 '여성주의'다. 가설이기는 하지만 뒤샹이 '제3의 성'을 창안했다면 백남준은 '제4의 성'을 상상했다/
[2] 그러나 백남준은 유작이 엄마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아기가 되어 엄마와 대화를 하는 드로잉을 그리고 있다 달의 예술가인 백남준은 처음부터 여성주의적이다.
[3] [부처 백남준]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백남준, '수월관음보살' '수'는 물이다 여성이다. '월'은 달이다 여성이다. '관음'은 역시 여성이다' 이런 여성적 요소가 다 합쳐진 '수월관음보살'은 제4의 성이다. 백남준은 제4의 성이고, 뒤샹은 제3의 성이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이다. 수월관음보살도' 비단에 색, 103.5×53cm, 호암미술관(오른쪽) '수월관음보살도' 고려 14세기 비단에 색 114.5×55.6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프랑스 리베라시옹 신문 백남준 추모 기사] 그만의 영혼을 가진 백남준 그는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기존의 가치를 해커 처럼 교란시키는 예술가(bidouilleur iconoclaste)인 그는 74세로 사망하다 // (약간 의역) 나는 굶어주는 한이 있어도 사업가 정치가가 되지 않고 예술가가 되겠다. 예술가는 늦잠을 잘 수 있어 좋다. «D'abord j'étais un mauvais peintre. (...) Ensuite, je ne voulais être ni politicien ni homme d'affaires. Avec la politique, on risque la prison et les affaires sont souvent sales. Je préférais être artiste, vivre une vie d'artiste. Dans mon esprit, cela permettait de me coucher tard et d'avoir la belle vie.https://next.liberation.fr/culture/2006/01/31/paik-a-son-ame_28352?fbclid=IwAR3TGMP7qquPmR9OBz8d-pC5DpnUux7CwTqnSheRCEEHIhBeAJ4YrI1abDs
백남준 장자크루소(프랑스혁명 200주년 프랑스정부가 의뢰한 본 작품은 아니고 그걸 판화로 바꾼 작품)를 어떻게 봤는지 알 수 있다 백남준은 루소를 노자와 연결시키고 있군요 그리고 자연모태(Mother Nature)로 돌아가자는 생태주의적 관점도 엿볼 수 있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본성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죠. 그리고 보니 오늘이 프랑스혁명기념일이군요. 루소는 맑스에 비교되죠 프랑스혁명의 정신적 철학적 배경을 제공한 사람이죠. 루소의 특징은 혁명가임에도 혁명가같이 보이지 않는 점이 장점이다.
그는 인터넷이 없는 시대에도 뉴욕 타임스 슈피겔 등 당대 유명 신문을 여러 개를 읽었다. 정보 아티스트의 면모를 제대로 보인 셈이다. 그가 세기적 작가라고 하는 것은 시대 정신을 확실하게 꿰뚫어봤다는 소리인데 말이다.
남준: 강남 아파트촌 같다. 참 널찍하고 어마어마하다. 뉴욕에서 이 정도의 다운타운 아파트 살려면 여우둔갑 여러번 해야 한다. 우리나라 경제수준이 일본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데 한국사람이 사는 평균점수는 10배나 된다. 그러니 우리민족이 얼마나 우수한가? 10분1 돈가지고 십배는 잘 산다. 일본 가보면 답답하고 숨학히고 정말 처량하다. 일본에서 오래살면 조그맣게 되고 불쌍하게 된다. 인색하게 되고 삶의질이 아주 떨어진다. 좀 못살아도 삶을 즐길 줄 아는 우리민족이 더 슬기롭다. 그대신 일본은 우리보다 공중시설이 더 잘 되었다. 일본은 집이 너무 형편이 없어서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밖에서 노는 습관이 있다.그래서 신주쿠같은 유흥가시설이 잘 발달되어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은 집에서 시간을 더 보낸다. 하여간 강남 아파트촌은 토지이용도가 높지 않은가.
남준: 정말 잘 한 짓이야. 대학에 있는 사람은 정직한 인생을 살수가 없어. 대학에 들어있는 INformation 전부 왜곡이 되거든. 어떻게 그 속에서 창조가 나올 수 있겠어. 대학을 때려쳐보지 않는 사람치고 인류의 역사를 움직인 사람은 없다고. 우리는 학문을 하면 안돼 살아있는 진실을 찾아내야지
디드로는 지금으로 말하면 인터넷이었다.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백과사전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가능했다. 요즘 말하는 집단지성을 유발시킨 것이다. 백남준은 로봇이 원작이고 이것은 판화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백남준은 아시아에 이미 백과사전이 있었다는 것을 서양인들에 보여준다. 그게 바로 <여씨춘추(呂氏春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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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시가 끝난 후 직접 쓴 글에서도 '지금이 곧 유토피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의 '지금'이라는 건 아이처럼 깨어 있는 순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돼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걸 유치원 시절의 특권으로 본 것이죠."
기사 앞부분 내용: 비디오 아트 발명가는 지난 일요일(2006년 1월 30일) 마이애미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사망했다. 새로운 예술 형식인 비디오아트의 발명가, 텔레비전을 기반으로 한 전자 그림, 이미지와 사운드를 해킹하고 조롱하면서 다소 무질서해 보이는 다다(Dada)로부터 강하게 영감을 받은 1990 년대 빌 클린턴으로부터 초대받고 정식 만찬에서 바지를 내린 유일한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였다 <4> 백남준과 팽소(Pinseau)와 인터뷰 백남준 예리한 질문 웃겨가며 잘 넘어간다. 그는 뒤샹을 우연히 3번 만났다는 이야기와 함께 나는 TV를 좋아하지만 거의 보지 않는다. 그것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농담으로 채워지면서 흥미진진해진다. 사람들은 나를 광인이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좋아한다 나는 문화 칭기즈칸이 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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