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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유튜브

[백남준&인터뷰] <04강> 7명 전문가가 본 백남준 예술

1986년 뉴욕에서 <자유의 여신> 워어드를 받다

<Intro 1>내가 백남준 좋아하는 이유? 부친과 백남준의 관계? 천진한 미소, 해맑은 얼굴

<백남준 3번째 이야기> '백남준과 그의 전문가들' 

www.youtube.com/watch?v=o85iyE7SBCE

<Intro 2>백남준과 그 주변여성들 백남준 반해서 비싼 표 초대 거절 집방문 너무 부자집 몇 번 만났지만 이영철 관정 2008년 만남

일본에서 첫 사랑이었던 동경대 불문과 출신의 '시브사와 미치코',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애인이 있었다. 또 4살 아래인 부인 '구보타 시게코'도 있다. 백남준은 그녀를 1964년 5월 일본 아방가르드의 거점인 쇼게츠 홀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7월 뉴욕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백남준 서거 때 사회를 본 '오노 요코' 등도 있다.

인형처럼 예뻤다는 그녀는 자신의 애인에게로 돌아갔다. 스무 살의 첫사랑은 대부분이 그렇듯 풋사랑으로 끝났다. 백남준은 대학 3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면서 상과를 바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미학·미술사학과로 진학했고 1956년 졸업 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미치코는 나중에 콜롬비아대에 다녔고 뉴욕에 살던 백남준은 ‘미치코의 친구의 친구’를 통해 스치듯 그녀가 자신의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백해영 갤러리에서 지난 여름에 열린 백남준 전시(나의 예술적 고향 파르나스)를 계기로 만들어진 백남준 아카이브 연구회인 <백남준과 친구들(NJP and his Friends)>이 제공하는 4번째 백남준 이야기 그에 앞에서 어제 3번째 백남준 이야기 간단히 요약 설명하겠습니다 어제 제목은 제목은 [백남준과 노마드] 부제는 "닫힌 코로나 시대, 열린 노마디즘 (노마드 전신) 혹은 회로를 만들다"

3번째 백남준 이야기<인트로 > 이야기 몇 가지 소개

백남준 에세이 모음집 We are in open circuits

1 <Intro> 하나 :백남준 신간 <우리는 열린 회로(세상) 속에 있다(We are in open circuits)> 작년 11월에 출간 왜 코로나 시대에 대한 대안을 이야기하다. 즉 <백남준, 오래전에 코로나 같은 닫힌 시대를 예언하고 오래전에 이미 열린 회로(인터넷, 유튜브, SNS, 페북과 트윗 그리고 줌)를 만들어 놓았다>

2 <Intro> 둘 : 대량실업시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무엇일까? 직업이 없어도 모든 사람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방법을 창조하는 것이 작품 창작과 함께 필수적 역할이다. <백남준이 한국이 1998년 IMF로 625 한국전쟁 이상의 참혹한 고통당할 때 한 위로의 말> "예술이 상대하는 건 영원이야"

3 <Intro> 셋 : 백남준이 평생 고민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1) 백남준의 답 황홀한 몰입 남을 위해서 헌신할 때 어려움을 살필 때 시간과 시대 선사시대 고인돌, 인류가 만든 최고의 최초의 설치미술 3) <보이스와 백남준의 비교> <보이스와 백남준의 비교 탈혼과 접신의 > 백남준 스승인 샤를 보들레르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법 <취하시오>

4 <Intro> 넷 : 백남준의 거지패션과 왕방울 눈곱: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을 포기한 순간부터 굉장히 자유로웠다"

5 <Intro> 다섯: 소통의 천재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

<1> 박만우 2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의 증언, 백남준은 전 세계의 석학과 과학자와 예술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네트 워킹하는 아티스트> 백남준은 미국 나사의 우주 물리학자나 하버드대 미생물학 교수 같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세계적 예술가 등 2500명(이 숫자는 박만우 관장의 말)의 전문가와 끊임없이 줄기차게 (전화 등으로) 소통을 했기에 세계적인 작가 세기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2> 백남준 소통에 대한 준비완료 10대에 이미 6개국어 터득함. 백남준 처음 독일에 도착해 친구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다 "나는 3개의 서양 언어와 3개의 동양 언어를 배우고 홍콩에서 카이로 그리고 그리스에 있는 레이카 비치를 방랑한 이 소수 대륙 소수 국가에서 온 한국인이다" 박만우 2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의 증언, 백남준은 전 세계의 석학과 과학자와 예술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네트 워킹 <백남준과 홍라희, 2007)>

<본론] 1 [노마드정신(노마디즘)란 뭔가?] -견문 소통 공존 <백남준과 코로나, 유행성 전염병(펜데믹 pendemic) 시대 노마디즘 그중 정주 유목민(Nomad) 시대><자크 아탈리>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매드(Digital nomad)

2. [백남준과 노마디즘] <왜 백남준은 그렇게 칭기즈칸과 마르코 폴로를 좋아했나? 왜 그들을 주목했나?> 왜냐하면 이들을 동서양 소통을 길을 연 선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선사시대, 우랄알타이족의 사냥꾼인 우리는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잉카), 한국, 네팔, 라플란드(핀란드)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 중심의 중국 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몽골처럼 더 멀리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새 지평을 봤다." - 백남준

3.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칭기즈칸을 소환하다. 또 단군왕검을 형상화한 작품 단군 스키타이 소환 그리고 왜 스키 타이가 들어갔나? 백남준은 우리 민족의 원류를 넓게 포함시킨다: 인디언, 핀란드, 훈족, 터키, 헝가리, 우랄 알타이, 말갈, 거란, 몽골, 동이족, 발해 다 우리 민족의 원류로 본다. 그런 소통의 신에는 마르코폴로 단군 칭기즈칸 외 훈족 알랙산더 러시아 여왕 등 포함 Alexander the Great, Attila the Hun, Catherine the Great, Genghis Khan.Marco Polo,

4 칭기즈칸과 그의 유사한 사람과 정신을 찬양한 인류학자 5명을 소개: 1) 웨더포드 2)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3) 브뤼노 라투르 4) Jack Goody 5) 박정진

<1> 웨더포드(Jack Weatherford), 미국 인류학자) 칭기즈칸 찬가 왜 그는 정복자이나 각 나라의 종교의 다양성을 최대로 존중하다. 그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평등, 신앙의 자유, 관용, 다문화주의 같은 보편가치를 가장 먼저 실천한 역사적 인물이다" - <참고> news.joins.com/article/21921472 그는 도 이런 말도 한다 몽골제국 원나라 한국만은 왕조를 유지하고 고려 여성 여왕처럼 대접 왜 미모와 지혜가 뛰어남 그는 칭기즈칸이 주는 교훈 크게 평가

<2> 여기서 <빛은 동양(orient)에서> 이게 괜한 소리 아냐. 20-21세기 유럽의 양심적 지식이 3명이 있다. 하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이고, 백남준 상을 받은 '브뤼노 라투르', 그리고 J영국 인류학자 Jack Goody (1919년-2015년) 95세에 사망. 특히 구디는 서양이 동양의 역사를 훔쳤다고 함

<3> 한국의 인류학자 백남준 연구자 박정진(한양대 의대 수료, 국문학과 문화인류학 전공 시인) 그의 저서 <백남준 굿으로 보는 비디오 아트 읽기> 출간 10년 되었다. 좀 어렵다. 박 교수는 세계적 천재 백남준과 들뢰즈 칸 비교. 백남준 들뢰즈 비교 2명의 동양과 서양 천재의 비교

<결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백남준과 코로나>, 닫힌 세상 열린 회로

백남준 신간 <우리는 열린 회로(세상) 속에 있다(We are in open circuits)> 작년 11월에 출간 왜 코로나 시대에 대한 대안을 미리 이야기함 셈이다 즉 <백남준, 오래전에 코로나 같은 닫힌 시대를 예언하고 오래전에 이미 열린 회로(인터넷, 유튜브, SNS, 페북과 트윗 그리고 줌)를 만들었다 유행성 전염병 시대 백남준의 만든 말 <정주 유목민 시대>이 생각난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노마드 시대, 유행병, 유행성 전염병 시대에 백남준을 소환할 수밖에 없다. 인류의 위기 때마다 인류는 백남준은 찾는다. 백남준, 오래전에 코로나 같은 닫힌 시대를 예언하고 오래전에 이미 열린 회로를 만들어 놓았다>

www.youtube.com/watch?v=Ja06fQ-ZtXE

<백남준 전문가와 지인과 인터뷰 통해 본 백남준 이야기>

<인터뷰 1> 백남준 부인 인터뷰 구보타 시게코 - 백남준 탄생80주년을 맞아 내한한 구보타시케코 여사

6번째 백남준 관련 인터뷰에는 백남준 동료이지 부인인 시케코여사 같은 비디오작가로 10주년을 맞아 내한해 백남준 전시장에 둘러보고 타 매체 기자와 같이 한 인터뷰 다 짧은 문장으로 아주 핵심적인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말할 수 있다 놀랍다. 그리고 그의 인터뷰에는 젊은 작가들에게 용기를 주는 내용이어서 인상적이었다.

- 백남준이 살아온다면 하고 싶은 말은, 그의 80회 생일 소감은?

"남준, 당신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해 아쉽지만 당신도 여기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아요. 백남준 어머니는 점을 잘 보셨는데 백남준은 집 없이 부랑아처럼 세계를 돌아다닐 거라고 무당이 예언했는데 어느 정도 맞췄어요. 백남준은 TV를 가지고 전 세계를 집시처럼 돌아다녔어요. 백남준은 공장 같은 곳에서 살았는데 지금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너무나 좋은 이 집에 모셔져 있느니 여기가 정말 백남준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트센터 관계자분에게도 감사드리고 싶어요"

- 백남준은 어떤 예술가였다고 생각하는지?

"나와 백남준은 우선 플럭서스(fluxus) 멤버이자 같은 예술적 동반자였죠. 나와 백남준은 이미 행위미술에 공감하여 어려운 시절을 같이 동고동락했어요. 플럭서스 운동이 결국은 비디오아트로 발전한 거예요. 일본에 있을 때부터 백남준을 알았지만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뉴욕에서고 거기서 슈아 아베도 만나 '456로봇'도 만들었어요. 비디오아트는 초반에는 그 TV자체가 이동하기 어렵고 무겁고 잘 망가져 정크아트(junk art)로 취급당했기도 했죠.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에 그것을 옮기느라 백남준이 고생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인정을 받지만 당시에는 백남준의 존재 자체를 거의 몰랐어요. 비디오아트가 저급예술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고급예술이에요. 그는 남이 가지 않은 예술을 개척한 선구자로 21세기의 문을 열었죠"

- TV와 로봇에게 생명을 넣은 방식의 예술을 서구에서 어떻게 봤는지?

"백남준은 기술의 인간화를 지향했고 예술의 휴머니즘을 중시했어요. 기술은 단지 도구로 볼 뿐이에요. 그는 낡은 것은 파괴하는 창조자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어요. TV정원이나 TV부처도 다 그런 정신을 발휘한 거죠. 하이테크를 그냥 도구로 이용했어요. 그리고 백남준은 샤머니즘 요소가 강했고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것에도 심취했죠. TV를 부수는 행위가 그에게는 어떻게 보면 수행이나 명상이었을 거예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급진적 사고로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샀죠."

- 백남준이 어디엔가 살아있다면 뭘 할까?

"백남준은 아직도 마이애미 집 근처 어딘가 해변에 있을 것 같아요. 백남준은 50대가 되어서야 귀향했는데 그때 선친 묘지에 갔어요. 그 주변에 무명무덤이 많았고 너무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백남준은 무명무덤처럼 초야에 묻혀 사는 식이 아니라 내 옆에 카트린 이캄 작가도 같이 지내 알겠지만 파리나 뉴욕파티에 즐겨 참가하는 축제주의자였어요. 여러 곳을 두루 다니는 것이 그의 방식이고 세상을 사는 프레임이자 소통방식이었죠. 그가 지금 살아있어도 역시 그랬을 거예요."

<인터뷰 2> 백남준 친구 장 폴 파르지에 인터뷰 - 백남준 친구이자 30년 이상 백남준 연구해온 장 폴 파르지에

5번째 백남준 연재기사 인터뷰주자로는 백남준 친구이자 30년 이상 백남준 연구해온 장 폴 파르지에, 그는 파리대학에서 영화와 백남준 비디오론 강연해왔고 르몽드 지 시네마수첩 등에 기고해왔다.. 마침 2016년 올 갤러리현대에서 4월 3일까지 열리는 '백남준, 서울에서' 초대받아 서울에 와있었기에 인터뷰를 청했다. 프랑스어인터뷰라 일부는 의역을 했다 가깝고 만나보니 인간미와 지성미에 유머가 넘친다

[인터뷰] 백남준 전문가 장 폴 파르지에 교수

▲ 백남준연구가 '장 폴 파르지에' 백남준사진 앞에서 코믹한 포즈를 취하다

- 백남준은 언제 처음 만났나?"

"1978년 12월 파리 미국문화센터에서 처음 만나고 1979년 4월에 백남준 사진을 표지로 시네마수첩(Cahiers du Cinéma 1951년 창간된 권위 있는 영화·영상잡지) 백남준 글을 기고했다. 그걸 기초로 1989년 아르 프레스(ART PRESS) 출판사에서 <백남준>이라는 책이 나왔다. 올 7월에 그 증보완결판이 나올 예정이다."

- 당신에게 백남준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천재였고 모성이 강한 나의 어머니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 대한 책을 쓸 때 지혜의 여신처럼 자상하게 돌봐주고 이끌어줬다. 백남준은 언제나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하는 방식을 취했다."

- 백남준은 왜 서구에게 유명한가?
"그는 풍부한 상상력과 서구인을 압도하는 지성과 기상천외한 유머로 서구인을 웃겼기 때문이다."

- 당신은 파리8대학에서 '백남준 비디오론'을 강의해 왔다. 지금도 계속하는가?
"이젠 은퇴해 다른 젊은 교수가 나를 대신하고 백남준 비디오론을 강의하고 있다."

- 당신은 영상에서 그의 에로티시즘과 맑시즘도 언급했는데?

"백남준은 그의 작곡에 누드 도입을 좋아했다. 샬럿 무어만은 이 퍼포먼스를 파리와 뉴욕에서 능수능란하게 소화했다. 백남준은 비디오의 컬러(色)를 섹스의 기능으로 봤다(색즉시공). 백남준이 TV코뮌을 중시한 건 모든 사람이 정보와 지식을 공유할 때 소외가 없고 인간해방이 온다고 본 것 같다."

▲ 현대화랑(본관)에는 피터 무어가 찍은 백남준 관련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그 중 샬럿 무어먼이 비닐옷을 입고 연주하는 모습. 뒤로 백남준이 보인다 ⓒ Peter Moore

- 야생적 사유를 강조한 '레비-스트로스"와 백남준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레비-스토로스는 야생적 사고를 이론으로 펼쳤지만 백남준은 그것은 온몸으로 실천했다."

- 백남준 굿이 기존의 굿과 다른 점은 뭔가?

"백남준은 전통적 비주얼 개념을 넘는 상징적 오브제를 통해 현대미술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피아노와 수십 대 TV모니터도 활용했다. 그리고 그는 굿에서 모든 종류의 음악 즉 쇼팽, 모차르트, 쇤베르크, 한국 전통음악 도입했다. 모든 음악을 이미지로 바꾸는 귀재였다. 그런 걸 촉발시키고 재결함해 하나로 융합했다."

- 백남준이나 보들레르, 다 견자(voyant)였다. 백남준도 그의 영향이 있었다?

"보들레르가 상징적 언어로 자연을 소재로 해서 색채와 소리와 향기를 넣었다면 백남준은 문명을 소재로 해서 전자이미지(images électroniques)로 색채와 소리와 향기를 넣었다."

-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와 백남준 또한 어떤 관계인가?

"'자크 아탈리(J. Attali)'의 '디지털 노마드'론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왔다 갔다 했지만 백남준은 일관성 있게(contuinité) 시공간을 뛰어넘어 유비쿼터스한 유목적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했다."

- 백남준은 절칠한 친구인 '보이스 추모굿'을 벌렸다. 두 예술가의 차이는?

"내가 볼 때 백남준과 보이스의 예술가투쟁에서 백남준이 이겼다. 왜냐하면 백남준은 마이너스 셔먼이고, 보이스는 플러스 셔먼인데 백남준이 더 파워풀했다. 백남준은 동서의 문제를 고민했지만 보이스는 서양의 문제만 고민했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한 수 위다."

- 백남준은 "내일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마무리 발언 한 마디 한다면?
"백남준은 미디어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는 미디어역할을 하는 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인터뷰 3> 뇌졸중에도 낙관, 장난기 충만했던 백남준 -백남준 7년 조수였던 미국작가 라파엘레 셜리 인터뷰

2015년 6월 한 달 동안 백남준 리서치를 위해서 뉴욕에 머물렀다 마친 내가 머물던 미국작가 로드니 친구 중 '라파엘레 셜리(Raphaele Shirley)'가 있었는데 그녀는 7년간 백남준 조수였고 또한 TV복원전문가다 그녀와 인터뷰할 좋은 기회라 생각해 승낙을 받냈고 그녀의 개인전 증 일정 바빠 먼저 질문지를 보냈으나 하지 못하고 만나 궁리 끝에 내게 영어부담도 줄이는 메일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성사되었다

▲ 라파엘레 셜리는 나를 그녀 집에 2번 초대했다. 집 방문에 앞서 그녀와 만났던 그린 포인트에 위치한 카페 '밀크 앤 로즈(Milk and Roses)'에서 찍은 사진. 백남준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 자신을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나는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 국립미술대학(보자르)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고 드로잉, 페인팅, 사진, 비디오 등도 같이 공부했다. 조각에도 조예가 깊고 건축가 집안이다. 나는 그 후 뉴욕으로 이주해 멀티미디어 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내 미술 분야는 사운드아트, 라이트 아트(light art), 공공미술, 퍼포먼스, 공동작업미술, 사회참여미술 등 폭이 넓다. 난 또한 백남준의 고장난 전자TV아트작품을 복원하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 백남준을 언제 처음 만났나?

"1993년 내가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처음 와 머문 곳이 백남준이 사는 '소호 머서가(街) 110번지'다. 백남준은 이 아파트 5층에 살았고 나는 4층에 살았다. 내가 거기 살게 된 건 미국 비디오아티스트이면서 여성무용가인 프랜시스 알레니코프(F. Alenikoff, 1920-2012) 작업실에 기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남준을 만나게 되었다. 이 아파트 주변에는 당대 유명한 예술가가 많이 살았고, 나도 그들과 커뮤니티를 이루면서 긴밀한 교류를 했다.

여기 또 누가 살았냐면 '백남준·시게코' 부부는 물론이고 역시 플럭서스 회원인 일본의 사운드 아티스트 '요시 와다(Y. Wada)' 또 멀티아티스트 '이레인 섬머스(E. Summers)' 그리고 이 아파트 건너편 브로드웨이 537번지에는 일본예술가인 '아이오(Ay O)', 미국작가인 '사이먼 포티(Simone Forte)'과 '프랜시스 휘트니(F. Whitney)' 등도 살았다."

[보충설명] 플럭서스의 창시자 '마치우나스'(건축전공)가 잠시 예술가의 길을 접고 낡은 공장지대인 '소호'를 개발하거나 리모델링해 분양하는 부동산사업에 뛰어들었다. 마치우나스는 당연히 그의 동료작가에게도 집을 팔았다. 그래서 이 지역에 예술가가 모여 살게 된 것이다. 백남준도 '머서가(街) 110번지' 꼭대기 층을 싸게 분양받아 평생 살았다. 지금은 이곳이 맨해튼의 대표적 번화가로 변해 주변에 고급 부티크들이 즐비하다.

"백남준은 매우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 라파엘레 셜리 집에 갔을 때 그녀는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사진이라며 백남준과 함께 레이저작품을 할 때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여줬다

- TV수리나 레이저기술은 어디서 배웠나?

"나는 우선 책자를 통해 레이저기술을 독파했다. 그리고 백남준의 레이저작품을 구현하기 위해 라이트아트, 설치기술 등 전문가특수과정도 이수했다. 그런 인연으로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나는 '뉴욕국제프린지페스티벌(NY International Fringe Festival)'과 "퍼페추얼 아트 머신(Perpetual Art Machine) 등 같은 뉴미디어아트단체를 창립하기도 했다."

- 당신은 어떻게 백남준의 조수가 되었나?

"위에서 밝힌 대로 나는 백남준과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나는 멀티미디어 작가인 '프랜시스 휘트니'와도 같이 작업을 했다. 그녀는 또 레이저 아티스트인 '노먼 발라드(Norman Ballard)'와도 협업했는데 그녀를 통해 나는 노먼을 알게 되었고 노먼이 나를 백남준 선생에게 소개해줬다. 나는 이곳 작가들이 다 내 마음에 들었고 나도 그들을 좋아해 잘 어울렸다. 그래서 내가 정착할 곳은 '바로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

- 백남준과 언제 왜 헤어졌나?

"나는 2002년까지 백남준과 작업했는데 그 무렵 그의 레이저 작품은 거의 다 마무리되었다. 백남준의 부인 시게코 여사도 2000년 구겐하임 대형전시가 끝나면서 일감도 줄고 해서 스튜디오를 축소하고자 했다. 백남준 자신도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작업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나도 다른 이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 백남준은 당시 몸이 많이 불편했다. 어떻게 극복했나?

"백남준은 매우 낙관적인 사람이라 자신의 신체조건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는 파스텔 드로잉 및 페인팅을 손으로 그릴 때도 자기만 쓰는 도구나 활용방식을 창의적으로 고안했다. 또 그는 조수들을 한 자리에 다 모아놓고 자신이 작품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고 우리는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 그걸 최대한 구현하려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매우 효율적으로 일하면서 그의 창작활동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족이 되어줬다."

▲ 라파엘레 셜리(Raphaele Shirley) I 'Killing Cloud(from Arctic Lights)' 2009-2010. 순간적 빛의 움직임을 포착한 환경미술, 대지미술로 백남준의 레이저아트 영향이 보인다. 이 작품은 1445년 조바니(Giovanni di Paolo)가 그린 '천지창조와 낙원에서의 추방'이라는 초기르네상스회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이 작가의 특징인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를 전망하는 방식이 느껴진다. ⓒ Raphaele Shirley

- 백남준 조수 중 좋은 작가가 많다. 당신도 영향을 받았나?

"백남준은 일상과 테크놀로지를 결합하는 걸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나도 그런 방식으로 테크놀로지와 일상품을 결함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내가 만약 그의 조수를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면 나는 테크놀로지와 관련하는 작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물과 빛을 결합해 빛으로 쏘는 레이저방식은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나는 건축과 관련된 집안이라 '가옥, 난간, 경기장 같은 공간형태의 원형' 등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백남준 영향으로 레이저나 비디오 같은 테크놀로지와 조합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배웠고 심지어 행위예술 같은 것의 중요성도 인지하게 됐다. 그래서 난 내 작업에 이런 두 가지 요소를 반반씩 섞었다."

- 샤머니즘 같은 원시주의와 레이저 같은 하이테크의 결합이 과연 가능한가?

"그는 인류보편적 생각을 가진 예언자로 기술과 문명의 궤적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술가만이 아니라 또한 그 이상을 뛰어넘는 철학자였다. 미국의 유명한 비디오작가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도 '진정한 예술가란 신비의 진실을 열어줘 세계에 도움을 준다'라고 말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면에서 보란 듯이 우리의 일상에 묻어나는 샤머니즘을 수준 높은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 2015년 6월 10일 라파엘레의 안내로 맨해튼 머리가(Murry st.) 45번지(2층)에 위치한 CTL전자회사를 방문해 '치티엔류' 사장과 찍은 사진. 여기서는 TV나 전자아트 등을 고치는데 주변에 낡은 TV모니터와 장비가 빼곡히 쌓여있었고 백남준 작품도 벽에 걸려있었다

- 백남준 작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수리·보존하나?

"나는 위 사무실에서 1960년 뉴욕으로 이민 와 1968년 CTL전자회사를 창업한 엔지니어인 중국계 치티엔류(C.T.Lui) 사장과 함께 요즘도 단종된 '음극선브라운(CRT) TV'의 백업파일을 구해다 낡은 TV 등을 고친다. 브라운 TV가 없을 때는 4×3 LCD로 대체한다. 또 우리는 대형 벽 TV에 프로그램도 작성하고 부품 및 하드웨어를 구입해 옛 TV도 복원한다.

우리는 또 백남준 비디오아트 같은 미디어작품을 소장한 중요미술관이나 개인소장자와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 작품의 보전방법에 대해 상세한 설명과 함께 조언도 한다. 나는 또한 전자기술자와 함께 네온이나 형광등으로 작업하는 미디어작품도 수리하고 보전한다."

- 당신은 이정성씨와도 함께 일한다고 들었는데?

"이정성(1988년부터 2006년까지 백남준 작품 수리전담) 선생과 나는 2000년 구겐하임 백남준 '뉴욕회고전'에서도 그해 여름 호암미술관과 로댕미술관에서 열린 '서울전'에서도 다음 해 열린 스페인 '빌바오전'에서도 같이 작업했다.

그는 백남준에게 가장 중요한 전자기술자로 그의 작품전반을 담당했기에 새로운 작품설치나 수리를 위해 뉴욕에 자주 출장을 왔고, 한국에 계실 때는 우리와 연락을 취해 중개역할을 한다. 요즘은 그와 자주 만나지 못하나 나는 지금도 백남준 작품을 작동시키다 문제가 생기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 분과 연락을 취하며 계속 정보를 교환한다."

"내가 만난 사람 중 마음의 스케일이 가장 커"

▲ 뉴욕 맨해튼중심가 거리표시판이 보인다. 여길 보면 백남준의 '그린(Greene)가' 작업실과 '브룸(Broome)가' 작업실이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백남준 작업실 세 곳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달라.

"그는 '머서(Mercer)가' 자택 겸 작업실 외 뉴욕에 또 다른 3개의 작업실이 있다. 작업실마다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그린(Greene)가' 작업실에서는 레이저 작품을, '브룸(Broome)가' 작업실에서는 로봇작품을 주로 했다. 그리고 '그랜드(Grand)가' 작업실은 내가 별로 일해보지 않아 모르지만 초기 그의 역동적인 평면작업을 한 곳으로 안다."

- 백남준과 주로 어느 작업실에서 뭘 했나?

"내가 백남준과 가장 작업을 많이 한 곳은 '그린(Greene)가' 143번지 작업실이다. 그러니까 난 1997년부터 백남준 구겐하임전을 대비해 레이저조각인 '3원소'를 만들었다.

그것을 필두로 해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고 2000년 구겐하임전의 정점인 '야곱의 사다리'도 같이 만들었다. 처음에는 백남준의 협력자인 '노먼 발라드(Norman Ballard)'와 같이 보조관계로 일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책임을 지게 되었다. 우리는 큰 규모와 작은 규모로 번갈아가며 실험을 시도했고, '서사시(Epic)' 같은 이 작품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제반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수없이 관련 엔지니어나 기술자들과 회의를 가졌다. 나는 또한 2001~2002년 백남준과 같이 설계한 야외 레이저 방식의 작품을 서울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몽촌해자' 물위에 설치했다."

▲ 백남준이 1999년 '소호(머서가 110번지)' 자택 작업실에서 라파엘레와 같이 레이저아트 드로잉을 놓고 어떻게 설치할 건지 논의하고 있는 모습이다 ⓒ Raphaele Shirley

- 백남준은 어떤 인물인가? 에피소드라도 하나 소개한다면?

"백남준은 매우 지적(highly intelligent)이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동양과 서양, 과학과 종교와 예술을 큰 틀 안에서 연관시키는 사유를 했다. 그는 내가 만난 본 사람 중 마음의 스케일이 가장 컸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명상의 형태로 즐겼고, 레이저 빛 아래 어둠 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레이저조각을 몇 시간 동안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른 조수도 그랬겠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특별했다. 그는 거의 완벽한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레이저작품을 응시했다. 그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은 바로 레이저아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이거나 철학적 논제를 꺼낼 때였다.

머서(Mercer)가 옆 프린스(Prince)가에는 '제리'라는 그의 단골집이 있었는데 우리도 매일 거기서 그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는 동물이나 여성에 대해 매우 유쾌한 유머와 조크를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해줬다. 내가 그와 작업하는 동안 내내 그는 정말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친절했고 그의 장난기(playful mind)는 또한 뺄 수 없는 그의 단골메뉴였다."

- 그가 뉴욕에서는 가난했다?

"위대한 인물의 특징은 일상문제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백남준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걱정을 안 하는 건 아니나 그는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할 정도로 이타적이었다. 우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연연해하지 않았다.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도 그랬겠지만 그는 아무리 참담한 일을 당해도 대체적으로 매우 낙관적인 것 같다."

▲ 위에 흐리긴 하지만 '라파엘레 셜리의 아카이브(Raphaele Shirley's Archive)'라는 제목이 보인다. 2012년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탄생 80주년 광선 전에 '워터스크린' 설치를 위해 내한한 라파엘레는 2001년 전시 때 찍은 '워터스크린'사진을 아카이브형식으로 선보였다

- 백남준 전시를 위해선 한국을 몇 번 방문했나?

"나는 백남준 레이저아트 프로젝트 때문에 한국을 약 8번 방문했다. 2000년 삼성재단 로댕미술관과 호암미술관 작업할 때 그리고 2001년 서울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분수에 레이저 빛을 쏘는 '워터스크린' 작업했을 때와 2012년 소마미술관이 재개관할 때도 서울에 왔다. 그때 나는 2001년 기존작업을 업그레이드했고 백남준 아카이브 전도 추가했다."

- 현대미술에서 백남준이 왜 중요한가?

"그는 정말 예술의 범위를 확장했고 거기에 최초로 하이테크와 TV를 도입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그의 작품은 빈티지 분위기가 나는 브라운관, 자기테이프 등 오래된 기술이든 새로운 기술이든 시대의 흐름에 맞았고 또한 시대를 앞선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 같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철학적 물음까지도 풀어보려 했다. 그의 작품은 지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고 역동적이다. 그런 면에서 그 어느 작가도 그를 쉽사리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인터넷시대, 그를 아이폰이나 SNS의 착안자라고 하는데?

"그는 미래학자 '아서 클라크',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한', 미래공상소설가 '조지 오웰'과 같이 예언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면한 빅 이슈를 제대로 직시했기에 또한 미래를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 그만큼 넓은 포용성과 깊은 혜안을 갖춘 작가라고 생각한다."

▲ 백남준 I '블루부처' 네온작품 1992-1995. 백남준아트센터 전시때 찍은 사진

- 백남준 작품 중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난 2010년 12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본 '네온 블루부처'가 가장 마음에 든다. 백남준의 관심인 기술과 예술, 철학과 휴머니즘을 기가 막히게 결합한 걸작으로 그 속에서 현대문명의 놀라운 하이테크를 발휘하면서도 부처와 같은 겸손한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1년 그의 초기비디오 '손과 얼굴'은 초간편 작품이나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효과가 강력하다. 그리고 나 역시 백남준의 대표작인 'TV부처'를 사랑한다. 이 작품은 나에게 아직도 삶에 대해 계속 묻게 한다. 그리고 '촛불'과 '정보초고속도로(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 역시 내가 좋아하는 백남준 작품목록에 포함된다. 그밖에 많은 퍼포먼스와 인터렉티브 아트의 상징인 '랜덤액세스'와 'TV첼로' 등도 좋아한다."

- 백남준은 하이테크와 함께 휴머니즘도 추구했다. 당신 생각은?

"그의 작품은 다양하면서도 풍성하고 또한 깊이가 있다. 그는 언제나 하이테크의 인간화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는 철학과 음악의 배경이 있었기에 현대미디어작가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줄 수 있었다.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계를 쓴다는 역설적인 말은 결국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해학적으로 푼 것이다. 또 백남준의 휠체어를 보면서 백남준이 왜 '기계의 인간화'를 추구했는지 더 이해하게 됐다.

인간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이 같이 잘 엮어내는 재능을 가진 작가는 오늘날 드물다. 또한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적 관점으로 봐도 그렇다. '예술을 위해 예술'이 아니고 복합적 사유라도 최대한 단순하게 변환시키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지식위주의 서양철학에다 시적이고 통합적인 동양철학을 같이 엮는 데 귀재였다."

▲ 백남준 I '즐거운 인디언(Happy Hoppi)' 1995. 백남준의 익살과 장난기가 발동한 작품으로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관전에도 출품됐다. 대림문화재단 소장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 백남준은 TV작품을 장난감처럼 만들기도 했다.

"백남준은 늘 자유롭게 상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사회의 기존 룰을 깨기에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그는 미국에 와서 한국문화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사회 속에 자신의 역할을 해 나갔다. 그는 서양의 청중 앞에서 삼성, LG같은 회사가 개발한 새로운 전자기술을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고, TV가 페인트 브러시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개념도 알려줬고, 레이저로 큰 장난감 같은 '워터스크린' 작품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 끝으로 백남준, 그는 창조를 위한 파괴자였다. 당신도 그런가?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예술정신에 따라 주어진 사회의 룰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TV기술을 사용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려 했고 시대를 앞서갔다. 과거악기인 '첼로-바이올린-피아노'를 'TV 첼로-끌고 다니는 바이올린-조정피아노(prepared piano)' 등으로 용도 변경시키는 실험도 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대전환을 유도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과거의 오브제에 현대적 시대정신을 담아 변형시킨 것이다.

1960년대 모던아트인 미니멀리즘에도 암흑기라고 불렸던 중세시대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나도 현대작가지만 작품을 할 때 그런 점을 응용해 불교의 '통합개념(Notion of Totality)'같은 것도 도입한다. 현대미술이 너무 시장주의에 빠져 관객을 현혹하고 충격주기에 주력하다보니 과거 그리스·이집트·수메르 같은 문명을 잊고 있다. 나는 사회적, 문화적, 철학적 면에서 과거나 현재나 찾을 수 있는 문명의 공통점을 발굴해 그걸 결합하려 한다."

<인터뷰> 4 "백남준 시대가 왔지만 백남준 연구는 없다"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 광주 금남로에 있는 아시아문회개발원 원장실에서 인터뷰하는 이영철 원장. 샤먼패션이 특이했다

2013년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1년간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 기자 말

백남준이 30살 때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는 서구의 한복판에서 세계예술계를 통째로 쓸어버리겠다는 그의 포부와 자신감을 드러낸 말이다. 한국인으로서 백남준만큼 자신의 긍지와 자부심을 보여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백남준은 천재적 예술가이면서 심오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푸코'도 자신을 고래에 비유하며 누구에게도 간섭받거나 조정 당하지 않는 '사유의 잠수자'라고 했지만, 백남준은 바다표면의 잔물고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심해의 철학자다.

가장 깊은 곳을 내려가는 존재이기에 그는 가장 멀리 볼 수 있었다. TV는 '멀리 본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철학을 예술화했다. 비디오아트는 그래서 놀라운 발상이다. 유튜브, 인터넷, 스마트폰, SNS 심지어 노래방까지 그의 아이디어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비디오아트 탄생 50주년을 맞아 이런 예술세계를 펼치는 데 열정을 바쳐온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을 지난 2일 광주에서 만났다. 그는 2015년 개관예정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콘텐츠 구성과 운영에 대한 총괄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를 종일 쫓아다니며 백남준에 대해서 물었다.

▲ 백남준 I '자화상' 혼합재료 61×69×40cm 1989. '혁명'이라는 단어가 인상적이다

- 백남준 선생과 이영철 관장이 좀 닮아 보이는데요?

"아 글쎄요. 박수 무당과 대샤먼의 차이겠지요. 백 선생께서 예술이 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라고 했는데, 전 공감해요. 목적론적인 '무엇으로부터 자유'보다 '자유를 위한 자유'가 더 좋거든요. 전 생각만 도발적인데 백 선생은 생각과 행동에 있어 시차가 없이 특히 예술에서는 완전한 도발 그 자체이지요.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으로 3년간 일하면서 온통 그의 세계에 빠졌어요. 지금도 언제 어디서나 그분에 대해 생각하며 일합니다. 제가 발견한 건 아주 넓고 깊은 그분의 사유와 예술 속에 일정한 코드가 있다는 거예요. 차츰 이야기하죠."

- 백남준은 직접 뵌 적이 있는지 그의 이름은 언제 알게 되었나요?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 학부에서 사회학을 하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했지만, 대학 1학년 때부터 미술에 관심 많아, 당시 북아현동에 공간을 마련해 '무제'라는 미술 비전공자 친구들과 동호인 서클을 만들었어요. 그 무렵 처음 백남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는 비평가의 말에 그게 예술이 되나 싶었어요.

70년대 <독서생활>이라는 월간지가 있었는데 그 기사에서 백남준이 TV에 얼굴 내밀고 있는 흑백사진의 이미지가 낯설었어요. TV로 하는 예술, 그건 조상이 없는 예술이잖아요. 당시엔 '앨런 카프로우'같은 해프닝아트와 '개념, 논리, 현상'을 파악하는 '개념미술'이 확산될 때 백남준의 예술적 사유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어요."

- 미국의 저명 미술사가 중 백남준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면서요?

"몇 년 전 출간된 <20세기 현대미술>(로잘린 크라우스, 할 포스터 외) 책을 보면 다른 현대작가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백남준을 축소 왜곡하고 있어요. 백남준을 '플럭서스'(전위예술단체)의 한 멤버로만 봐요. 백남준의 해프닝아트 파트너인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케이지', '보이스',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등과 비교하면 백남준을 말이 안 될 정도로 다뤄지고 있어요. 시각 예술의 문맥에서만 보자면 백남준이 안 보이는 거죠. 음악계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고요. 제가 보기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예술의 범위 안에 있어요."

▲ 2009년 6월에 이영철관장이 기획한 <신화의 전시-전자 테크놀로지>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입니다.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간다고 봐요.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큰 역할이 했다고요?

"백남준이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태동시키는 데 기여가 컸어요. 이에 앞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도 95%가 그의 공로입니다. 그해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을 열었고요. 그리고 광주비엔날레에서 미디어아트란 개념자체가 없던 시절 '인포아트'라는 제목으로 백남준의 제자나 외국 동료작가를 데려와 선보였어요. 백남준은 이미 오래전에 세계 최초로 미디어아트 정교수가 되었고, 미국 내 미술대학에 미디어아트학과나 그 관련스튜디오가 생길 때마다 자문역을 도맡아 해왔었죠."

▲ 백남준 I '슈톡하우젠의 괴짜[오리기날레]에게 바치는 비디오(Video still from Nam June Paik's contribution to Karl Stockhausen's Original performances)' 제작: Wolfgang Ramsbott 1961. Courtesy Kunsthalle Bremen ⓒ The Estate of Nam June Paik 예술가이면서 사상가다운 면모를 선보인 영상물. ⓒ Nam June Paik

- 당시 진보미술계는 백남준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하던데요?

"백남준에 대해 진보 쪽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기술의 발전이 예술의 발전에 결정적이라는 '기술결정론'은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 타자, 소수자문제에는 별반 관심이 없고 세상의 어둔 면을 개선하려는 면이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진보 쪽에서는 백남준을 '맥루한'(미디어학자)주의자 본 거죠.

당시 유럽에선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적 사고가 지식계의 축을 뒤흔들었고 '노버트 위너(N. Wiener)'의 사이버네틱스이론 등이 한참 영향을 미칠 때죠. 또한 서구문명의 몰락에 절규하며 새 문화를 그리려 한 잔혹극의 창시자 '앙토냉 아르토(A. Artaud)'도 있었고요. 백남준은 이렇듯 당대 가장 선진적 관점에 관심이 많았어요."

- 백남준 연구가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나야 하고, 백남준아트센터도 국립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백남준은 초국적인 장기프로젝트입니다.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생겨 그 위원장 등을 만찬에 초대해 이런 프로젝트가 필요하고도 설득했지만 힘이 없더라고요. 경기도 차원에서 지원하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예산이 들어가는 국립미술관 수준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올해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탄생된 지 50주년인데도 정부는 몰라요.

국내외에 그에 대한 연구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의 이름을 이용한 사람들은 많아도 그를 정작 이해하려고 덤벼드는 사람은 너무 드문 것 같아요. 지구촌의 많은 젊은이들도 그에게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 백남준을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라는데 정부가 어떻게 활용해야죠?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 그건 구호일 뿐입니다. '뒤샹'도 20세기 현대미술의 창시자가 되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어요. 난 한국사회의 지성사에 예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한국미술계에 묻고 싶어요. 예술이 문화의 꽃이라는 걸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 때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거죠.

지금은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1인 기업시대, 1인 미디어방송시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지식근로자'잖아요. 이럴 때 정부가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백남준의 가치도 전국적으로 개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김구가 원했고 백남준이 실현하려 했던 두뇌강국, 문화강국이 되는 거죠."

▲ 백남준 연구자들을 위해 펴낸 <백남준의 귀환> 개관 전 행사 도록과 합본형식으로 출간된 A4 대형판의 658쪽. 이제까지 출간된 백남준 서적 중에 가장 전문적인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절판 ⓒ 백남준아트센터

- 백남준아트센터 관장하실 때 편저로 <백남준의 귀환>을 내셨는데 왜 저서로 만들지를 않았는지요?

"양심상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지요. 백남준이 그렇게 중요한 글을 많이 남겼는데, 그걸 모은 책이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저서를 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내서라도 급한 것은 이해하지만 어설픈 저서는 정말 곤란하다가 봐요.

백남준은 미국에서 40년 살았는데 그 나라에선 백남준에 대한 단일 연구 서적이 단 한 권도 없어요. <피드백>이라는 중요한 책이 있지만, 백남준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나마 가장 앞서 간 연구서입니다. 그 외엔 없어요

뉴욕 구겐하임에서 백남준 회고전을 기획한 '존 핸아르트' 큐레이터가 다른 연구자들 글을 모아 전시하도록을 자신의 책처럼 출간했는데, 솔직히 내용이 엉망이에요. 그리고 프랑스에도 없고요. 독일에선 백남준 주제로 박사논문을 출간한 저서가 한 권 나왔지만, 그 이후 저자가 상당히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연구서는 없고 세계 곳곳에서 전시한 도록만 더러 있어요.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한국에선 잘 모르면서 그에 대한 저서는 여러 권 나와 있어요. 백남준 자신이 남긴 중요한 글, 인터뷰가 많은데 제가 이 책을 내기 전까지는 그분 자신에 관한 책은 한 권도 나온 게 없었어요.

백남준을 가장 존경하는 독일에선 백남준의 글 모음집은 몇 권 나와 있습니다. 비엔나현대미술관에서 63년 첫 개인전을 리바이벌하며 만든 훌륭한 도록이 있고요. '미디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뒤샹'보다 어렵지요. 그러므로 한국에서 지금까지 나온 백남준 서적은 위험천만합니다.

정말 이제 한국이 21세기를 생각한다면 백남준 연구를 위한 국제적인 학술협회 같은 펠로우십 제도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마지막에 그걸 하려고 노력하다가 중도하차했죠. 백남준의 첫 전시를 분석하는 책을 저서로 낼 예정입니다. 일본어와 영어로 낼 겁니다"

- 백남준을 '샤먼아티스트'라고 하는데 왜 그에게 '굿'이 중요한가요?

"죽은 자와 산 자가 소통하는 매체가 굿이잖아요. 중세 때 미디어(media)는 '영매'를 가리켰다고 해요. 백남준은 굿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현대의 샤먼이었어요. 하늘과 지상 세계를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게 예술가의 역할이지요.

고조선 단군의 본뜻은 '하늘'입니다. 몽골어로 '탱그리 칸'(天王)'라고 하구요. 탱그리가 백남준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아야 백남준 코드도 알 수 있어요. 백남준을 '몽골의 대장장이 샤먼'으로 보면 많은 게 쉽게 이해되지요. 주술과 예술은 원래 같은 뿌리고 테크놀로지는 그 매개역할을 한 것이지요."

▲ 백남준 I 'TV 피아노(TV Piano)' 1988. AK 플라자 소장. 백남준의 예술은 음악인지 미술인지 혼돈을 일으킬 때가 있다. 그의 예술은 장르의 경계도 파괴하다

- 왜 백남준은 모든 걸 그렇게 부수고 자르고 파괴한 것일까요?

"왜 백남준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파괴적이냐고요. 새로운 야만인이 오는 거죠. 세상을 다 걸고 싸우는 그 명분을 아무나 스스로 설정하기 어렵죠. 정치가 중에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나요. 영구혁명을 꿈꾸던 인물이 예술가였으니까 용납이 되었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감옥을 들락날락했을 수도 있겠죠.

백남준은 위대한 전사였어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굴었고 집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떠돌았지만, 그 정신은 정말 대단히 위대했어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죠. 유를 부서야 창조가 나와요. 파괴 없이 창조 없어요.

겁쟁이나 좀비들에게 창조는 없어요. 창조자에게 기생하거나 합세하여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그들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죠. 기존의 것을 부숴서 잡석으로 만들어 길을 내는 자, 그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자가 바로 창조적인 야만인이죠.

'1회 백남준예술상'을 수상한 프랑스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B. Latour)'는 백남준은 근대에 대한 강박이 없던 유일한 인물이라고 했어요. 백남준은 탈모던이 아니라 세계 최초의 '비(非)모던' 예술가입니다. 로컬리티의 중요함도 함께 실천한 최초의 글로벌 아티스트이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현대미술사는 다시 써야 합니다."

- 백남준의 '랜덤액세스'를 일상에서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는지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어떨까요. 흔히 '랜덤액세스'는 무작위의 접속을 말하는데 이제 누구나 그것을 하고 사는 인터넷 세상이 왔잖아요. 미리 준비한 게 아니라 우연히 떠오르는 걸 반복하며 사는 거죠. 언제 어디서 어떤 이와 어떤 일로 어떻게 만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예술을 하려면 그런 비상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라 봐요. 선불교의 화두집에 온통 그런 이야기가 가득하고요. 백남준이 남긴 드로잉 가운데 '삼계무법(마음이 곧 부처, 부처가 곧 사람)'이 그런 내용입니다."

▲ 뉴욕타운 홀에서 퍼포먼스중인 백남준의 즉흥연주 1968. 백남준은 피아노를 잘 쳤지만 머리와 손등으로도 피아노를 쳤다. 부르주아 교양취미에 대한 반항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영상물 촬영

- 백남준이 증오한 '부르주아 교양취미'가 뭔지 한마디 해주시죠?

"'부르주아 교양취미'가 뭐냐면 항상 좋은 자리에 참석하여 좋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고, 좋은 음식만 먹고, 좋은 소리만 듣고, 좋은 말만 하고 고상한 척, 유식한 척하고 행세를 하는 것이에요. 결국은 가진 사람, 있는 사람에게 기대고 기존의 질서만 유지하려고만 하는 거죠."

- 그러면 백남준이 '몸'을 중시한 것이 여기서 나오나요?

"백남준이 이런 '부르주아 교양취미'를 부수는 데 사용한 무기가 바로 '몸'이죠. 그래서 예술에 몸을 도입해 행위음악, 해프닝아트가 생긴 거고요. 그런데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 건 그가 말하는 몸 예술은 발레나 고전무용과는 전혀 달라요. 그건 이미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방식으로 철학이 없는 그저 우아한 몸짓일 뿐이거든요.

백남준은 몸을 던진 것은 바로 깨달음과 각성을 얻기 위한 행위라고 봐요. 백남준을 관념주의자 '헤겔'로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그에게 '니체'가 중요해요. 독일 유학할 때 교과 과정에서도 있었고 독일친구들과 니체를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백남준이 예술에 몸을 대입하는 방식이 예술이론보다는 우선적으로 몸이 먼저입니다. 예술적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방식이죠. 그러니까 그는 몸으로 춤을 추는 철학을 한 셈이지요."

▲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 [New & Now_서울시립미술관 2012 신소장작품] 2013년 1월18일-3월1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1층에서 백남준-보이스 사진전시 중

- 백남준과 존 케이지,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는 어떤 관계인지요?

"백남준에겐 스승이 없어요. '존 케이지'는 백남준의 스승이 아니에요. 케이지가 가르쳐 준 것도 없고요. 그냥 백남준이 그의 공연에서 어떤 착상을 얻게 되었고, 감동했을 뿐, 백남준이 일본음악전문지의 통신원(기고자)할 때 케이지와 한 인터뷰를 보면 백남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면에 대해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묻곤 했어요.

케이지의 선지식이 나이브했던 것에 백남준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더욱이 케이지 뿐 아니라 서양인에게 크게 알려졌던 일본의 선(禪)지식인 '스즈키(Suzuki)'에 대해 세일즈맨이라며 질타했어요. 일본에서는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미국에서는 평화주의자인 척하는 위선을 백남준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봤죠.

케이지가 선불교로 반문명적 예술행위를 포장했다면, '요셉 보이스'는 2차 대전 전투조정사로 출전했다 추락해 죽을 뻔한 그를 살려줬다는 타타르족 이야기를 지어내 자신의 비합리적 정치예술을 포장했어요. 그런데 보이스 예술탄생의 내막에 백남준이라는 귀재의 상상력과 착상이 작동한 게 아닌가 하는 예감이 들어요.

- 이야기를 바꿔 백남준은 자신이 '황색재앙'이라 했는데, 21세기를 여는 문화칭기즈칸을 꿈꾼 건가요?

"1962년에 그런 말을 했을 때 그는 이미 '칭기즈칸'입니다. 그 해가 바로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이라 몽골에서 성대한 축제가 있었고, 독일에서는 그와 관련된 국제스포츠행사도 많았어요. 시사에 민감하던 백남준이 충분히 그것을 활용한 겁니다. 농담처럼 백남준이 말했지만 그것은 반농담반진담이었죠.

텃세가 판을 치던 인터내셔널리즘 시대의 국경을 넘나들며 글로벌 아트의 세상을 연 백남준은 지금부터 860년 전에 이미 최초의 글로벌 세상을 살았던 그 몽골리언의 세상으로 날아가 정보고속도로의 아이디어를 예술계로 끌어들인 겁니다.

성인 칭기즈칸이 "말에서 내려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라고 한 말을 백남준이 계승해 전자세계를 이용해 대륙을 잇는 위성아트를 한 거죠. 그는 언제나 외부를 향해 떠나는 자였고, 내부로는 가장 먼 곳으로 잠수해 들어간 고래였어요."

▲ '칭기즈칸의 복원(The Rehabilitation of Genghis-Khan)'[뒷면] 1993.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전시된 백남준 작품 중 하나.

- 어느 글에서 백남준의 유토피아를 '해원상생(평화공존)'로 보셨는데요?

합리적이고 직선적인 선형적 시간의 매듭 끝자리에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온통 다 끊어진 것을 이어놓은 회로로서의 유토피아, 그건 올 것이 아니라 지금 오고 있는 평화세상으로서의 유토피아지요. 그래서 2009년 '고르디아스 매듭 다시 묶기'라는 주제와 '백남준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국제세미나를 열었어요.

정주민의 왕 알렉산더가 소아시아 지방을 정벌했을 때 기둥에 묶여 있던 매듭을 무력(칼)으로 잘라내서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는 게 바로 '고르디아스 매듭'이야긴데요, 칼로 베지 않고는 풀지 못하는 정주민의 무력에 맞서 유목민처럼 그걸 치유하고 다시 연결하는 정신이 지금 필요하지 않겠냐는 관점이었지요.

백남준은 처음부터 그걸 알았고 평생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동과 서를 연결시키려 한 게 바로 '바이 바이 키플링', '글로벌 그루브' 등의 작품이죠. 이를 연결하기 위해 우리는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창안해야 합니다.

- 이제 결론적으로 백남준과 그의 예술에 대해 한마디 더 하신다면?

"하늘의 이치(天理)와 마음의 이치(心理)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믿음, 백남준 비밀코드의 열쇠입니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끈이죠. 오늘날엔 '인터페이스'라는 말을 쓰죠. 일방형보단 쌍방형을, 결과보단 과정을, 수직보단 수평을 중시하는 '자유를 위한 자유', 사람 간에 접촉과 대화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백남준 선생이 좋아하는 선시 중에 '무봉탑'이 있어요. 이음새가 없는 탑을 말합니다. 요즘 모바일, 유튜브, SNS 등 바로 그거잖아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의 진리를 담은 단지 조각이 아닌 '스투파(큰 사리탑)'가 되는 거죠. 그것이 너무 크고 넓어 모든 인간을 담고도 남아도는 탑으로서의 예술이죠.

끝으로 이 시대에 백남준은 하나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86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새로운 글로벌 시대의 칭기즈칸, 그가 바로 백남준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지금과 같은 다중 시대에 백남준식의 정치적 감각, 예술적 사유, 창조적 실험정신은 훨씬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신소장작품] 2013년 1월18일-3월17일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본관1층에서 백남준-보이스 사진 전시 중. 백남준, 존 케이지, 황색재앙, 이영철, 비디오아트 50주년

<인터뷰 5> "싸이 말춤에서 백남준의 기마사상 보여"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2013년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1년간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 기자 말

백남준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광란의 해프닝을 벌여왔다. 왜 그랬을까. 그는 소통이 없는 숨 막히는 세상과 가치가 하나밖에 없는 답답한 세상에 구멍을 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구인들이 만든 근대라는 이분법적 위계를 깨고 차별과 소외가 없는 세상을 혁명이 아니라 예술로 구현하려 한 것이다.

그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전후 무후한 위성아트라는 예술품을 발명했다. 인터넷과 SNS의 원조가 되는 전자초고속도로를 구현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경계 없이 축제의 삶을 누리며 소통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을 기원했다.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다소 난해하고 낯선 백남준의 생애와 예술을 보다 쉽게 풀어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지난 1월 30일,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을 만났다.

김 관장은 1980년 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후원회장 바바라 툴 여사의 소개로 백남준을 만난 후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불문학도였던 그가 미술사로 전공을 바꿨고 결국 백남준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지금은 백남준 전문가로 전위미술과 미디어아트전문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 백남준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죠?

"백남준은 전설처럼 신화화 된 상태로 그 기행만 알려져 있지 그 밑에 깔려있는 의미가 어렵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모를 수도 있어요. 백남준을 센세이셔니즘으로만 보기에 그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한국에선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죠."

- 백남준은 10대에 막강한 독서가였고 쇤베르크, 맑스도 섭렵했는데요.

"당대 최고 부잣집(지금으로 치면 삼성가) 막내로 태어난 백 선생은 집안도 좋았지만 워낙 타고난 기인이에요. 일찍이 아방가르드 기질이 있었어요. 10대에 이미 쇤베르크 판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헤맸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죠. 맑스에 대한 열광은 그 당시 지성인과 엘리트들이 다 마르크시스트였으니까, 그런 정서가 어린 그에게도 전파됐고. 그 나이에 그걸 받아들인 게 백남준이죠."

- 동경대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미술가가 됐나요?

"백남준은 쇤베르크 논문으로 동경대를 마치고 독일 뮌헨 음대로 유학을 갔죠. 공부를 하는데 전통음악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어 피아노와 피아노 사이의 존재하는 음이 없을까 하며 피아노를 한 대가 아니라 두 대로 치는 것도 발상하죠. 이렇게 고전음악에 대한 돌파구를 찾다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 사상에 매료되는데, 그가 말하는 음악철학은 음악이 소리의 조직이지 멜로디나 하모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맥박, 호흡이 다 음악의 소스가 되는 비트음악이죠. 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음악, 그러다보니 신체의 리듬부터 자동소리, 기침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다 음악의 범주에 포함시킨 거죠. 미리 작곡하여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에 도전하다 작곡을 하는 방식, 존 케이지는 주역에 나오는 우연성, 비결정성 요소를 도입해 작곡을 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됐죠. 말하자면 동양정신에 빠진 서구인 철학자에게 서양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이 반대로 큰 영향을 받은 거예요."

- 침묵도 소음도 포함되는 확장된 음악인가요?

"아무리 정적이라도 들리지 않는 소리의 전파가 있고, 아무리 침묵이라도 나의 호흡소리 있는 거잖아요. 침묵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침묵음악이 된 거죠. 이런 음악철학은 결국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거죠.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이른바 행위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 백남준의 비디오를 해프닝아트의 연장으로 보시는데.

"음악이라는 것, 미술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 중복되어 만나는 제3의 영역 즉 '인터미디어(융합매체)'의 성격이 있죠. '플럭서스(백남준이 함께한 전위미술운동)'도 그렇지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도 인터미디어에요. 백남준은 해프닝에서 비디오로 넘어갈 때 그 해프닝 자체가 인터미디어죠. 매체만 행위에서 TV나 전자비디오로 바뀐 거지 거기에 깔린 미학은 같아요.

제가 그런 차원에서 백남준의 비디오를 해프닝아트의 연장이라고 본 거예요. 1958년 백남준 편지에 해프닝을 작곡하면서 TV 3대를 포함시키고 오토바이소리, 7살 소녀의 울음소리 이런 생소리를 함께 채집한다고 나와 있어요. 1959년 '존 케이지 바치는 경의'에서 실제로 그가 채집한 녹음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수탉소리와 오토바이소리를 등장시켜 공연하죠. 백남준은 모든 게 다 음악의 소스가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 백남준, 성상 파괴하는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도 있어요.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거죠. 그러니까 피아노는 음악적 권위의 상징뿐만 아니라 엘리트 부르주아문화의 상징인데 그것에 대한 도전을 표현한 것이에요. 그래서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내리쳤죠. 예술적 테러리스트인 백남준은 그런 맥락에서 존 케이지의 넥타이 잘랐고요. 이건 다 새로운 미술을 재창조하기 위한 파괴였죠."

- 63년 첫 전시에서 백남준은 왜 관객을 중시했나요?

"전시에서 '참여 TV'라고 TV에 자석을 붙여놓은 건데 TV의 내부회로 보여주는 영상을 관객이 좌석으로 전자파 조작과정으로 이미지 바뀌고 그 다음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어 관객이 육성을 집어넣으면 파장이 변해요. 이건 관객이 전시에 참여해서 전시를 완성시킨다는 뜻이 담겨있죠. 비디오아트를 '참여 TV'라고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백남준의 키워드인 '참여와 소통'이 이해가 돼요."

총알처럼 이분법적 위계를 깨는 '랜덤액세스'

- 백남준 미학의 핵심이 되는 '랜덤액세스'가 뭔가요?

"백남준 작품은 기존의 전제주의나 획일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어요. 동서의 이분법, 장르적 이분법, 남녀의 이분법,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 등 모든 이분법을 깨는 게 바로 비선형 다시 말해 비디오가 TV의 일방적인 걸 쌍방적으로 바꾸는 방식이죠. 그렇게 이분법적인 위계를 총알처럼 깨는 데 최고 무기가 된 것이 바로 '랜덤액세스(Random Access 임의접속)'예요.

존 케이지가 말한 우연성 같은 방식이죠. 그래서 무목적적이고 비의도적이고 비결정적이고, 이게 바로 과거예술의 정형, 완성, 정통성, 하나뿐인 걸 깨는 거죠. 백남준만 아니라 플럭서스라든가. 새로운 걸 창안하는 그 이전의 아방가르드인 다다나 초현실주의도 시도한 것으로 기존의 위계를 깬다는 면에서 같죠. 백남준은 특히 자신만의 구체적 예술매체인 비디오아트, 액션뮤직을 통해서 그걸 추구한 거예요."

- 서양인들 비디오를 예술화 꿈도 못 꿨죠?

"이를 잘 설명한 게 이어령 선생의 탁월한 비유인데요, "비디오를 발명한 건 미국이고 이를 소형화(상업화)한 건 일본이고 이걸 예술화시킨 것이 백남준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죠. 테크놀로지의 인간화를 통해 기술에 대해 새롭게 접근한 건데 사람이 기술의 노예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1965년에 '로봇 K-456'을 만들고 사람이 배설을 하듯 길거리를 걷다가 리모콘을 작동하면 콩이 똥처럼 떨어지고 또 오페라도 부르고 정말 환상적인 작품이었죠. 이게 백남준 최초의 로봇이에요. 나중에 구형 카메라, TV, 전축을 가지고 만든 TV로봇조각의 원형이죠."

- 80년대 넘어가서 처음 백 선생을 어떻게 만나셨죠?

"79년 남편이 뉴욕 한국문화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해인 1980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처음 만났어요. 어떻게 인연이 되었냐면 당시 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후원회장 바버라 툴 여사를 내가 외교단을 통해 가깝게 알고 지냈는데 툴 부부가 우리 부부를 아방가르드 명소인 키친아트센터에 초대한 거예요. 거기서 백남준이 바이올린과 전축 판을 깨고 부수고 하는 해프닝을 처음 봤고 조각난 걸 모아 거기에 사인을 해 달라는 것이 인연이 되었어요."

- 백남준을 통찰과 혜안을 갖춘 예술가로 보셨는데.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작품은 서양의 기술과 동양의 선(禪)사상을 합친 것인데 그런 방식이 아방가르드정신이죠. 아방가르드의 핵심어가 바로 통찰과 혜안(선견지명)이에요. 마르셀 뒤샹도 남이 못 본 걸 미리 보는 혜안을 가지고 현대미술을 탄생시켰잖아요. 세상을 바꾸는 아방가르드들은 항상 그 특징이 앞을 미리 내다보는 예술적 비저너리(Visionary)들이잖아요. 백남준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죠."

- 백남준은 전자산업이 미래에 성공할 거로 봤나요?

"전자산업의 성공을 미리 예견하지 않고 누가 비디오가 예술이 된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런 건 하루아침 되는 것이 아니에요. 백 선생이니까 가능했던 거죠.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냐면 백 선생은 항상 정보를 끼고 사는 사람이었어요. 전자산업이 미래에 성공할 거라는 통찰력은 정보의 힘에서 나온 거예요. 온 세계 신문을 다 보고 월가 주식을 다 알고 프랑스 치즈가 몇 가지인 것까지 삶과 관련된 디테일 정보를 꿰차고 있었죠. 건강이 좋은 때는 오전 내내 신문을 보면서 한국 신문까지. 내가 당시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등에 연재기사를 썼는데 그걸 다 읽으시고 그 기사에 직접 드로잉을 해서 저에게 보내줘 깜짝 놀랐죠. 제가 지금도 가보처럼 가지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온 세계 신문을 보면서 풍부한 정보를 소화했기에 선견지명이 나올 수 있었죠. 젊은 작가들도 성공하려면 정보가 많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 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방영됐는데 어떤 평가를 하시나요?

"60년대 백남준 선생은 TV와 비디오시대죠. 1963년 독일 첫 전시에서 TV아트가 등장하고 1965년 최초로 비디오아트가 비디오테이프로 시작됐죠.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처음 나오자 그걸 사서 뉴욕을 방문한 바티칸 교황바오로 6세 찍고 그날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해 세계최초로 비디오테이프를 예술화한 거죠. 70년대가 비디오테이프로 영상작업을 하고 이걸 더 발전시켜 비디오설치, 비디오퍼포먼스, 비디오조각 등 다양하게 실험한 기간이라면, 80년대는 지금까지 해온 TV방송, 비디오, 행위예술까지 총망라하는 만든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60년대TV,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결합된 종결 판이에요. 이게 주는 메시지는 매체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전 세계 사방팔방과 소통을 이루는 도구임을 강조한 거죠. 또한 기술자와 예술가와 대중미학의 의미를 확실히 부각시켰어요."

84년 1월1일 백남준의 '위성오페라' 총진행을 보다

- 김 관장 부부가 그 중계 과정을 파리에서 보셨다고 들었어요.

"남편이 1983년 말 덴마크공보관으로 부임한 후라 우리 부부는 백 선생이 1984년 1월 1일 퐁피두센터 앞마당 중계차본부에서 교통정리 하듯 뉴욕, 파리, 독일에서 송출된 것을 진두지휘하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순식간에 편집해 동시다발적으로 내보내는 거죠. KBS도 돈을 내고 방영권을 따 한국에도 중계했죠. 남편이 이걸 연결하는데 한 사람이었죠. 정말 그런 놀라운 위성오페라를 보면서 감격했어요. 그게 전 세계에 방영됐는데 그야말로 꿈같았어요. 중계가 다 끝나고 남편이 공무원이라 돈은 없었지만 백남준 선생과 한국에서 오신 조수 등에게 저녁을 한턱냈죠."

- 그 해 백 선생 35년 만에 귀국해 '고등사기론'을 펼쳤는데요.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게 어떤 확립된 고정관념이 아니거든요. 진실에 한쪽 다른 면에는 그 진실 우습게 보는 관점이 있어야죠. 답이 하나가 아니잖아요. 사기란 뜻은 고의로 상대방에게 사실을 왜곡시켜 착오하게 하는 것인데 사실 미술은 바로 착각의 예술이에요. 평면에 화면을 깊이를 넣은 원급법이 그렇고, 솔거가 담징의 벽화에 그린 그림이 그렇고 그게 '눈속임'인데 그게 미술의 기본이에요.

비디오는 미술의 속성을 극대화한 영상예술로 한 가지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 다양하고 복합한 걸 다 담잖아요. 하나의 진리만 추구했던 것과 다른 패러다임이죠. 사람에게 예술적 방편을 통해서 어떤 착각과 환상을 심어주고 유희적인 놀이로 보여 사람들은 더 착각에 빠지죠. 예술은 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것, 그래서 고등사기죠. 과학은 명증적인 것만 주장하지만 예술은 명증 이외에 여러 복합적 양면가치를 제시하잖아요."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백남준 '전자초고속도로' 개념을 제시했는데요?

"엘 고어 부대통령이 '정보초고속도로'를 이야기하기 10년 전에 이미 백남준은 '전자초고속도로'를 발상했죠. 그러니까 지구가 통신기술을 가지고 인터넷 같은 것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비전을 가졌던 거죠. 그래서 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될 때 백 선생의 역할이 컸죠. 그때 특별전으로 제가 '인포아트(InfoART)'을 맡게 됐고 그래서 그 제목이 '테크놀로지아트'도 '비디오아트'도 아니고 '인포아트'죠. 이건 결국 (하이)미디어아트를 말하는 것인데 나는 거기서 백남준 덕분에 처음으로 미디어아트가 뭐고, 큐레이터가 뭔지를 알게 된 셈이죠."

- '인포아트(Info ART)'가 미술사에서 어떻게 기록되나요?

"인포아트(Info Art 정보예술)는 지금은 멀티미디어 혹은 하이미디어아트라고 하죠. 전엔 '혼합매체(Mixed Media)'로 페인팅에 다른 것 넣는 것이지만, 지금은 전자기술이 들어간 '전자매체'라 그 차원이 다르죠. 정보, 소통, 컴퓨터기술이 다 합쳐진 그래서 멀티아트죠. 이걸 '인포아트(정보예술)'라고 명명했죠. 그 해 월간미술 주최로 백남준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나온 '비빔밥'이 바로 인터미디어예요. 그의 비디오아트에 춤, 공연, 영상, 사운드 등 별것이 다 들어 있잖아요. 그래서 비빔밥아트죠."

- 90년대 뇌졸중 극복하고 2000년 구겐하임 전에서 '레이저아트'를 선보였죠?

"그런데 백 선생은 레이저아트를 21세기에 한 게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발상을 했어요. 당시는 기술적인 뒷받침이 안 된 거죠. 그걸 집대성해서 작품화한 것이 2천년 뉴욕 구겐하임 전에서 선보인 레이저아트인 '야곱의 사다리'죠. 그래서 60년대를 '프리비디오(TV)시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 '비디오시대', 2000년대를 '포스트 비디오시대'라고 하죠. 레이저아트와 홀로그램아트 등이 후기에 속해요."

- 시립미술관 소장품 '서울랩소디' 설명 좀 부탁해요. 대단한 하이테크라고 하던데.

"작품의 뒷부분 가보면 굉장히 복잡해요. '서울랩소디'는 매년 여기에서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하고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어요. 이 작품의 주제는 백남준 선생이 첨단의 하이테크로 가는 서울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현상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면서 서울의 미디어적 양상과 특징을 잘 반영한 작품이에요."

- 지난해 10월, 영국 '텔레그래프' 지가 '강남스타일 영감의 원천은 백남준'이라고 썼던데요.

"싸이가 생긴 것도 꼭 몽골 사람을 닮았지만 그 말춤이 기마민족의 어떤 상징성 가지고 있어요. 사실 '백남준문화재단'에서 지난 1월 29일 추모행사를 열 때 싸이 공연 연결하려고 했어요. 백남준의 기마사상, 몽골문화코드를 싸이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 끝으로 백남준은 문화가 사회 안전벨트라고 했는데 우울증사회에서 앞서가는 미술관을 지향하는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백남준의 비전에 동의하는 방안이 있는지요?

"서울시립미술관은 앞서가는 포스트뮤지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골자는 대중과 소통하는 지역별 거점화, 공간별 특성화예요. '남서울미술관' 생활예술(Living art) 공예 디자인 전용관으로 하고 '서울시지정 인간문화재 초대'전을, 7월에 개관하는 '북서울미술관'은 주민참여 형 공공미술(Public Art)로 하게 되죠.

'서소문 본관'은 기획전시와 글로벌한 전시로 '한국대만교류전'이 있고 그리고 '고갱과 그 이후전' 한국일보와 본 미술관 공동기획으로 하고 고갱과 고갱의 주제를 다른 5-7명 현대작가 같이 전시해요. '북유럽공공건축과 디자인전'과 한불비교문화를 주제로 한국전통 '함'과 프랑스19세기 '트렁크' 등을 비교하는 '루이 뷔통전'도 있고요. 내년에는 '아프리카전'도 있어요. 난지창작센터는 로컬에서 글로벌로 바꿔요. 서울시립미술관은 소통과 참여의 정신을 최대로 중시한 백남준의 예술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다.

그래서 지구촌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84년에 <굿모닝 미스터오웰> 86년에 <바이, 바이 키플링> 88년에 <손에, 손잡고>같은 위성아트연작을 남긴 것 같아요. <손에, 손잡고>는 구소련과 중국이 참가해서 아주 큰 이슈가 됐습니다. 구소련에서는 사전검열 없이 생방송되어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고요. 세계적으로 히트 하려면 사람들이 얼떨떨해 할 정도로 재미있게 대중예술 위주로 편성돼야 한다고 봤습니다."

<인터뷰 6> "백남준은 음악전공자라 비디오아트가 가능" 전 백남준아트센터 박만우 관장

2013년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1년간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 기자 말

▲ 관장실에서 인터뷰에 응하는 백남준아트센터 박만우관장

백남준은 첫 전시 제목이 왜 '음악의 전시'이며 첫 전시에서 피아노, TV, 비디오, 소머리가 걸리는지. 왜 욕조에 뮤즈를 훼손시켰고 음악의 가시화, 시각화가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먹통의 상징 같은 TV가 어떻게 소통을 대변하는 예술매체가 됐는지 등을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을 그의 관장실에서 지난 2월 25일 인터뷰했다.

- 백남준 선생은 언제 처음 만나셨는지요?

"제가 무슨 인연으로 백남준아트센터에 와서 일하고 있나 싶죠. 저는 백 선생을 비교적 일찍 뵌 편이지요. 1983년 '굿모닝 미스터오웰' 프로젝트 때문에 30여 년 만에 처음 한국에 오셨잖습니까. 전 당시 대학원을 졸업하고 KBS 교육제작국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거기 로비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죠.

그때는 제가 '전통문화강좌', 'TV미술관' 등을 만들며 구성작가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오웰' 할 때 그걸 생생하게 지켜봤었죠. 그럼에도 내가 저분을 위해서 뭘 하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고 그저 흥분에 휩싸였죠.

제가 1985년 12월 파리에 갔을 때, 눈이 오는 어느 추운 날이었어요. 세미나를 같이 듣는, 전에 영상 원장 하시던 최민 선생이 '아르데코(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백남준 특강이 있다고 하면서 같이 듣자고 해 갔었어요. 영어로 하는데 영어도 영어지만 '분자생물학' 뭐 이런 이야기가 튀어나오니까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근데 당시 동유럽 유고아티스트들도 쫓아왔었어요. 크림치즈, 무스 같은 것을 얼굴에 뿌리고 해프닝 아트하고…. 그때 파리에서 또 뵈었죠. 대학, 대학원 시절 은사인 임명방 교수와 이우환 선생도 그랬지만, 백남준에 대해 많이 언급해 얘기는 많이 들었죠. 당시 저는 아직 젊은 학생이니까 백남준에 대한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 2006년에도 그와 어떤 인연이 있었다고요?

"백남준 선생이 2006년 초 돌아가셨잖아요. 당시 제가 부산비엔날레 총감독할 때였는데 파리 출장을 갔다가 바스티유 '메종 로즈(Maison Rose)'에서 비디오 아트 컬렉터 전을 하고 있더라고요. 오프닝 하는 날, 영국 큐레이터 소개로 페스티벌과 아트페어를 절충하는 방식으로 비디오 아트를 기획하는 '바르셀로나 루프(Loop)' 팀을 만났어요.

이 팀은 바르셀로나 시 주최로 2006년 봄, 비디오 페스티벌 차원에서 최초로 백남준 추모 국제 세미나를 발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날 보고 미디어 아트 관련 글도 쓰고 연구도 많이 했으니 한국인으로서 아시아를 대표해 한 분야를 발표하라고 해 얼떨결에 승낙했지요. 나중에 보니 발표자들의 면면이 대단했어요.

서울로 오면서 뭘 발표해야지 고민이 많았어요. 귀국해보니 마침 백남준 아트센터 기공식이 있었죠. 고궁박물관에선 백남준의 뉴욕스튜디오를 재현한 '메모라빌리아'를 만들어놓고, 미국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도 소개됐어요. 그중 백남준 유작 '엄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백남준 후반기 비디오 작업에 있어 모국 또는 모성이미지의 매트릭스'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했죠."

[01] 기사 관련 사진

▲ 백남준의 '음악전시회_전자텔레비전' 흑백사진 24×30cm 1963. 사진: 만프레드 레베. 국립현대미술관소장.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에 TV를 도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만프레드 레베 박사는 1997년 과천전시 때 한국에도 왔었다

- 올해가 '비디오 아트 50주년'이죠. 독일 첫 전시인 음악, 피아노, TV, 소머리도 들어가는 '음악의 전시', 이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실 백남준 비디오 아트 50주년을 맞아 올 4월 26일 백남준아트센터 주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는데 바로 그 주제로 하게 되지요. 미술사적으로 비디오 아트의 발아를 보여준 태동의 잠재력이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백남준이 참여와 소통을 강조했지만, 각론으로 들어가 보면 1963년이라는 시점이 굉장히 많은 걸 암시해요.

그가 왜 동시대 미술의 획을 긋고, 정말 미술사에 새 장을 연 사람인지, 왜냐하면 백남준은 이미 초기에 동시대 작가와는 또 다른 의제와 핵심적 이슈를 건드렸거든요. 첫 전시회에 TV를 도입한 것은 물론이고요. 백남준 21세기 전개될 새로운 사회구조와 문화의 방향성을 다 예견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정말 그 직관력이 뛰어났죠.

이에 대한 답변으로 4월 26일 국제학술대회 구성과 참여인사의 면모와 세부적 주제들 설명 하는 것이 낫겠네요. 구성 멤버가 잘 짜였어요. '사이먼 밀러' 교수는 누구보다도 음악과 미술 관계에서 전문가고요. 또 미국 워싱턴 대 '루츠 쾨프닉' 교수는 중요한 문화연구가예요. 이 분은 최근 저서인 'TV의 문화사'에 가장 중요한 챕터가 '플럭서스 TV'인데요 TV아트를 이런 문화이론의 큰 틀에서 짝 조명해주실 거예요.

첫 전시 제목이 '음악의 전시'인데요. 독일어 'Ausstellung'가 아닌 영어 'exposition' 쓴 게 의미심장해요. 이 단어는 노출시키거나 가시화한다는 뜻도 담겨 있잖아요. "태양광선의 소통이 와서 닿는다"라고도 해석이 되고요. 그러니까 이건 결국 '음악의 가시화나 시각화'를 함의한다고 볼 수 있어요.

백남준은 아무리 '존 케이지' 류의 실험적 전위 음악을 할지라도 그보다 더 급진적 제스처를 쓰지 않았다면 외국에서 생존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백남준이 고민한 것 중 하나가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건 선불교 말하는 극단적 깨달음과도 통하는 것이지요.

저도 대학 다닐 때 선방 많이 쫓아다니고 한때 '성찰' 스님 계도도 받아봤지만, 그때보면 공안을 주고 기존사유의 범주를 완전히 깨부수잖아요. '동자가 소를 타고 폭포수를 지나가는데 폭포수소리가 보이느냐?' 시각과 청각의 혼용을 넘다드는 그래서 일상적 사유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런 자극을 주는 원리와 같은 것이죠."

'음악의 전시' 시각과 청각의 경계 넘기

- 이런 극단의 선불교적 예술이 서구 미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그의 예술에 액션이 들어가게 된 배경은 본격적으로 2차 대전이후에 미술시장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그걸 넘어서려고 했는데 작가들의 고민은 1963년이 되었지만, 예술의 상품화는 더 심화되고 그래서 시장에서 내다팔 수 없는 작업을 하다 보니 결국 '비물질화'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 대표적 예술이 바로 '액션음악, 퍼포먼스, 해프닝'입니다. 백남준은 바로 그런 요소를 공유한 거죠.

그 다음에 하나가 음악의 미래는 전자음악이라고 봤고 그래서 전자공학도 중요하게 생각했죠. 독학으로 혹은 베를린공대 드나들면서 배웠어요. 바로 그때 음악과 미술을 뒤섞는 아트가 되는데 가장 강력한 시청각매체는 TV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요."

▲ 대형스마트폰에 담은 2010년 3월에 <백남준_랜덤 액세스전> 홍보게시물

- 이런 것이 다 백남준의 '랜덤액세스'와도 관련이 있지요?

"그렇죠. 백남준에게 있어 '랜덤액세스'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1963년 첫 전시에서 나온 건데요. 랜덤액세스 즉 '임의접속' 언제 어디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시공간 넘어서잖아요. 지금 다 어디에서 와이파이가 터지면 다 접속이 되는 '유비쿼터스' 세상이잖아요. 커뮤니케이션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게 가능해진 겁니다.

과학적 측면만 아니라 인문적, 문화사적 차원이나 현대소통이론에서도 그렇고 모든 아트 커뮤니케이션의 분기점이 되는 건 바로 정보에 있어 '제공자'만이 아니라 오늘날 당연히 여기지만 '수용자'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거죠.

수용자의 공간 참여, 신체개입이 현대미술을 전환시키는 축이잖아요. 더 이상 미술이 객관적 관조의 대상 아닌 거예요. 이건 결국 환경미술이나 설치미술과도 연결되는데, 환경미술은 여기서 '감상자의 신체를 에워싼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뜻합니다.

문화사로 보면 비디오아트도 백남준 천재가 그냥 태어나는 것 어디 있어요. 주변 지적토양을 빨리 흡수할 수 있었고, 1963년 당시 <누벨바그> 영화가 나오면서 '장 뤽 고다르'의 '카메라의 만년필화' 그래서 결국 수용자가 'UCC'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와야 영화가 돈과 자본과 권력이 조작되지 않는 진정한 인간 해방적 소통매체가 된다는 것. 이게 다 백남준과 같은 문맥입니다. 결국은 수용자의 참여가 관건이지요."

▲ 광주광역시 북구 비엔날레로 111(용봉동)에 있는 광주비엔날레 주전시장 입구

- 백남준 글로벌 작가로 '정보사회'에 큰 아이디어를 주었지만, 90년대 이후 '광주비엔날레' 등 우리문화예술계에도 큰 선물 보따리를 주셨다고요?

"백남준은 예술가 측면에서 보면 20세기에서 21세까지 걸쳐간 사람으로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한 사람이죠.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 중 한 분이죠.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그의 삶의 족적을 알면 알수록 고국에 대한 사랑 굉장했구나 싶어요. 애국심의 발로만 아니라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뿌리와 기원이 이게 결국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증명해 보인 게 바로 백남준의 저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삼 정권 때 광주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를 모아놓고 5·18 보상을 뭘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할 때 한 분이 "비엔날레요" 그래서 광주에서 아시아 최초로 비엔날레가 생겼죠. 광주비엔날레가 그 아이디어로 그렇고 '인포아트'도 다 백 선생이 직접 섭외하고, 아는 외국작가를 섭외했잖아요. 어떤 파장이 올지 결국 고국의 미래를 다 내다보고 이를 기획하여 구체적 플랜까지 생각하며 실현한 거예요.

이보다 2002년에 미국 휘트니비엔날레에 참여한 백남준이 미국에서 받은 상금 (요즘 돈으로 약 3억 원 해당)을 휘트니 관장 찾아가서 "한국은 아직도 동시대 미술을 모르고 유화로 꽃, 나비를 그리고 있으니, 내가 그 돈을 다 낼 테니까 한국에 꼭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거잖아요. 그렇게 그 전시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온 거죠.

2003년 처음 보는 낯선 형태의 전시인데도 전 파리에 있었고, 아내가 보고 와서 그러는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젊은 20대, 30대 부부 등 25만 명 참가해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더군요. 백남준은 이렇게 우리나라에 세계현대미술의 흐름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그가 직접 코디네이션 한 것입니다. 그 은공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만큼 보답 못 드리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전시포스터. 백남준이 말한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 "세계 게임에서 이길 수 없으면 우리 스스로 룰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정신적 바탕의 배경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런 방식의 말은 백남준의 자신감과 자긍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정말 백남준 사유가 독특한 하나는 어떤 방식이든 이분법이나 대립적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현실까지도 끌어들이면서 그게 문화예술이지만 제3의 영역을 만들어 내었죠.

서구의 테크놀로지가 엄청난 진화와 진보를 보였지만 사실 동양사회는 전통적으로 자연과 문화의 공존과 친화적 가능성이 있었잖아요. 바로 이런 걸 동시에 결합시켜 서구인에게는 충격을 준 거죠. 백남준 세계관 자체가 조명돼야 할 것이 많은데요. 이런 면에서 동서양 미학과 철학이 접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 백남준 연구와 그에게 접근하는데 유의할 점이 있다면요?

"조금은 필요한 게 아직까지는 잘 알다시피 서구에서도 소수의 사람이 아니면 백남준의 예술적 정신적 유산을 깊이 있게 해석해낼 만큼 전문연구인력 형성과 이에 대한 관심촉발이 아직 덜 되어 있고요. 또 하나는 특히 국내환경에 적용돼야 하는데 백남준의 '신화화'에서 탈피해야 하고 전설적인 인물로만 접근하는 걸 경계해야 합니다. 감정 섞인 개인적 숭배에서 벗어나 연구중심을 일단 미술사에 근거해야지요.

서양의 '발터 벤야민'의 경우도 그의 전기적 삶과 그의 철학적 사상을 혼돈한 나머지 그가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어떻게 21세기 예술과 미학적 사유를 위해서 어떤 긍정적인 요소를 배태했는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잖아요. 그렇게 되려면 다 '비판적 이해(critical understanding)'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서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적 견해를 취해는 거죠. 여기가 인간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 돼야지 그를 추모하는 사당이 되어서는 안 되죠."

백남준 편집기술에 대한 연구소 없다

▲ 백남준 I 'TV침대' 1972. 백남준아트센터 2013년 전반기 상설전 <부드러운 교란_백남준을 말하다(6월 30일까지)>에서 소개된 'TV침대'. 모니터에 담긴 내용과 그 독특한 리듬감, 템포감 등에 대해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 백남준 선생도 내 작업은 '음악기반의 예술'이라 하셨지요?

"중요한 부분을 지적하셨어요. 백남준 예술은 흔히 '시간예술(time based art)'라고 하죠. 해프닝, 기존미술에서 탈피한 퍼포먼스 심지어 내러티브가 포함된 영상예술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추상적 시간철학이 아니라 백남준의 시간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접근이 필요하죠. 그런데 아쉬운 건 백남준의 시간예술에서 몽타주 편집기술이 핵심인데 이에 관심을 둔 연구소가 한 군데도 없어요.

잘 아시다시피 엄청나게 많은 '기존영상(footage)'이나 방송필름 재활용하면서 본인이 다 편집을 했잖아요. 1930-1940년대 '레비-스트로스'가 16mm로 찍은 아마존에 원시부족의 춤추는 모습 등 인류학자의 아카이브도 활용하고, 일본 닛산 차, 펩시광고 때로 험프리 보가드가 나오는 영화 등을 샘플링, 재조합, 재편집했지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편집이 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작업을 미술사적으로 디테일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50대 미디어작가들이 요즘 하는 걸 백남준은 이미 오래 전에 시도했으니 놀랍죠.

백남준의 예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의 텍스트에만 너무 의존하지는 말고 콘텍스트 분석이 꼭 필요하다고 봐요. 칸딘스키 '점선면' 이론도 그 사람의 저술일 뿐 작품과는 분리해 봐야하듯 백남준의 미술사도 내재적 분석이 훨씬 많이 필요합니다.

'글로벌 그루브'에서 부채춤이 왜 나오고 비디오아트에서 탭댄스, 왜 중요하고 그게 무슨 의도인지 알아야하죠. 그게 단순히 문화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백남준은 설치 비디오아트에서 '공간과 신체와 관계'를 다루고 있는 거죠.

백남준에 보기에 인간의 만든 가장 중요한 문명의 이기가운데 인간의 삶을 스스로 황폐하게 하지 않는데 기여한 악기라고 본 거죠. 첨단공학이 들어간 과학적 산물인 악기, '샬럿 무어먼(백남준 예술파트너)'의 첼로 같은 것을 신체의 영장으로 TV나 비디오와 같은 맥락으로 봤어요. 이를 이해 못하면 비디오아트를 알 수 없습니다.

악기의 연장으로 소리를 시각화한 백남준의 TV아트, 이것은 결국 영상, 리듬감, 소리의 시각화하면서 사운드와 비주얼 통합하는 것인데 기존의 영화방식이나 영상과는 전혀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제3의 탁월한 리듬감과 템포감을 발굴한 거죠. 그런 면에서 비디오아트는 음악전공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장르입니다."

디아스포라 예술가로서의 백남준

▲ 나디아 카비-린케 I '아니오' 2012. 위 작품은 지금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2013년 6월 16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끈질긴 후렴>에 소개되는 튀니지 작가 '나디아 카비-린케'의 영상작품 중 한 장면. 그는 백남준의 후예답게 약자의 힘이 세계를 구원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 백남준은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 크게 성공할 것이며 다만 유태인처럼 한국인도 이제 인류 문화사에 기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인간 백남준, 한국인 백남준이 바로 근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갈등을 다 겪고 그것을 처절하게 실천한 롤 모델이 아닌가요. 그걸 보면서 제가 깨닫는 건 바로 '약한 자의 힘(La force des faibles)'이에요.

백남준도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서구에서 많은 설움을 받으면서 백남준이 봤을 때 한국인을 유태인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하죠. 뿌리 뽑힌 삶이 역으로 21세기에 엄청난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분열될 정도의 슬픔과 고통에도 그걸 신명으로 승화시켰잖아요. 한국인만이 가진 유전인자로 본 거죠.

인도인, 유태인, 우리나라 안산 외국이주민 등 이런 떠돌이들, 그들은 집을 언제라도 떠나 아프리카에 가서도 말뚝을 박고 살 수 있는 자세, 이런 것이 바로 21세기에 소프트파워가 됩니다. 유태인들은 이런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세계문화사에 크게 기여한 거죠. 백남준이야말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 백남준아트센터가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끝으로 한마디 더 하신다면?

"무엇보다도 아트센터이면서 미술관이기 때문에 가장 큰 얼이자 정체성이 되는 게 바로 컬렉션인데요.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멈췄기 때문에 인간에 비유하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로 넘어가는데 부양이 잘 안 되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여건만 탓할 수 없고 좀 더 장기적 안목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국내외 개인소장자로부터 주요작품을 가져와서 수준 높은 연구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고 그런 네트워크도 넓히고 신뢰도도 높여야죠. 경쟁력 있는 학예연구를 통해 진전된 재해석과 훌륭한 전시도 내놓아야 합니다.

국제학술대회와 NJP 학술서적을 지속 간행하여 전문역량을 키우고 이와 동시에 멀티미디어 환경 등을 통해 대중화에도 힘을 써야죠. 백남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범국가적 프로젝트를 개발해야 하고 후원받기 위해서 다양한 접촉도 필요합니다."

<인터뷰 7> 철학자 김용옥과 백남준

1992년  8월  16일 올림퍼스 호텔에서 백남준을 만난 도올 김용옥 ⓒ  김용옥

철학자 김용옥, 백남준을 찾아가다

<관련 블로그> seulsong.tistory.com/1025

 

[백남준] 92년 '도올'과 인터뷰, 폭소 터지다

<백남준 유럽 가보니까 다 쓰레기야> [1992년 백남준과 김용옥 인터뷰 중 일부내용] "내가 가서 보니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인상파도 독일의 작곡가들도 다 쓰레기야" - 백남준 김용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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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백남준 회고전이 있다는 걸 알았던 도올 김용옥은 1992년 백남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 그와의 인터뷰를 시도했고 그 내용이 그의 저서 <석도화론>에 남아있다. 그 중 유명한 백남준의 말은 "예술은 텃세다, 보편성이 아니다"이다. 이는 한국이 앞으로 풀어야 할 서구주의의 극복을 강하게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용옥 선생은 그와의 인터뷰에서 백남준을 의심할 바 없이 위대한 예술가로 봤고 또한 독창적 상상가로 받아들였다. 복잡해 보이는 작품 속에 담긴 구체성, 그 깊은 속에 담긴 스토리텔링을 발견했다.

당시 전시에는 <작가와 대화>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대강당에서 있었다. 백남준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관객이 많았단다. 이 장면을 보고 도올 선생은 질문 방식이 정연한 것이 무작위한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 보니 그런 선입견이 다 깨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날 관객의 기지 넘치고 수준 높고 질문에 탄복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적고 있다.

그중 몇 가지 소개하려 한다. 누가 "우리 미술학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백남준은 "한국 민족은 <삼국유사>에서 보듯 판타지가 대단한 민족이나 미국에서 '한국 미술 5천년전'이라고 해서 가 보니 한국의 판타지는 다 죽여 버리고 맨 중국적인 것만 진열해 놓아 매우 서운했다"며 "한국 민화의 컬렉션이나 해석에서 아직도 일본이 한국을 앞지르고 있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더 흥미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누가 "당신에게 예술은 뭔가?"라고 물으니 백남준은 "지금 내게 예술은 돈을 벌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자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또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앞 질문들 너무 어렵고요, 전 미술시간에 생각 없이 그림을 그리는데 선생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느냐"고 질문했다. 백남준은 "그래 아무생각 없이 그리는 게 최고의 그림이야, 아무쪼록 생각 없이 그려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절대 선생님 말씀을 듣지 마라"고 대답해 또 다시 관중의 마음을 잡았다.

[05] 기사 관련 사진▲ 1992년 8월 16일 아침 호텔에서 백남준을 만난 도올 김용옥 선생이 그를 인터뷰하는 모습ⓒ 김용옥

도올 선생도 질문했다. "당신은 나처럼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공부벌레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박식한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백남준은 "난 당신처럼 그렇게 심각한 공부나 독서를 하지 않는다"며 "내 지식원은 대강 '신문'이다"고 답한 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데 신문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반영한다. <뉴욕타임스>만 잘 읽어도 한국 학자들 서재에 쌓인 책 정보보다 더 명료한 세계사적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3대 정보탱크는 '슈피겔(독일신문)-미정보국(CIA)-미쓰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