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963년-2013년 전자아트 50주년 폴란드 WRO 아트센터에서 백남준 전시
백남준의 첫 번째 음악의 박람회 – 전자 텔레비전
관객이 수동적 문화 소비자에 머물지 않게 하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문화 생산자가 되도록 유도하다. 그래서 참여 TV다. 백남준의 이 아이디어는 21세기 매스미디어로서의 인터랙티브와 멀티미디어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예언하다. 백남준은 4대의 피아노, 기계 소리가 나는 오브제 및 몇 대의 레코드와 테이프, 13대 상호 연결된 TV 세트, 갤러리 입구에 걸려 있던 갓 도살된 소의 머리를 사용했다. TV가 기성품과 전자페인팅 도구로 사용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 학자와 비평가들은 백남준 작품이 뉴미디어를 도구, 표현 수단, 원료로 동시에 사용하는 예술작업에 창의적이고 획기적으로 처음 도입했다는 데 이의가 없다./
Paik’s first major exhibition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 took place from March 11–20, 1963 in the Wuppertal private Galerie Parnass (…) the chaotic impression made by the TV ensemble is deceptive, insofar as the whole thing is more like a laboratory situation with various experiments set up in it than a classical exhibition. Paik’s idea of Participation TV which allows viewers to participate actively rather than remain passive consumers, anticipates current discussion about interactivity and multimedia as twenty-first century mass media./Dieter Daniels, Paik’s Participation TV, text in the Widok 2. WRO Media Art Reader: Nam June Paik – Driving Media, WRO Art Center, Wrocław 2009
Paik used four pianos, objects that produced mechanical sounds, a few/several records and tapes, twelve interconnected TV sets and the head of a freshly slaughtered ox, which was hung over the entrance to the gallery. It was the first time TV sets had been used as ready-mades and as instruments for electronic painting. Scholars and critics concurred that Paik’s piece was a breakthrough in the use of new media in art, using them simultaneously as tools, as a means of expression and as raw material.
"백남준은 선의 철학을 괴벽스럽게 때로는 농담 투로 전자아트에 적용하기로 유명하다" -하버드 대학교 시각 예술과 교수,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 [평] 맞는 이야기다. 백남준 첫 전시에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귀로 보고 눈으로 듣다> 개념을 적용했다. 음악을 미술로, 미술을 음악을 표현하다. 즉 음악과 미술을 뒤섞은 비빔밥의 미학이다. 통합적 예술양식(Gesamtkunstwerk)이다.
"<백남준과 친구들> 여러분에게 백남준을 대신해 들려주는 백남준 선물, 그의 이야기보따리 5번째"
앞으로 20강 유튜브 40개 10-11-12월 분 자료집 2020 겨울 호/1-2-3월 자료집 2021 봄 호 자료집 발간 www.youtube.com/watch?v=hWxpSdTlda8
반인치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캠코더의 발명은 비디오아트에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60-70ㅇ년대 시각예술에 중대한 역할을 하다. 1969년 독일 하노버에 비디오아트 전시관이 처음 생겼다 누가? 독일 영화제작자 게리 슘gerry schum 이런 현상을 예리하게 분석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랭크 포퍼(FRank Popper) 비디오아트의 기능을 반문화로보고특히 60년대 초 일부전위예술가 작업 중 발생한 온통 해악적 사업TV 반대하는 경향을 보이다.
그는 비디오아트 6가지 유형을 제시 1.새로운 시각적 이미지 창출을 위해비디오 사용 2. 포퍼먼스를 영구화하기 위해비디오 활용 3.지배계급의 의해 억악받기 쉬운 이미지 정보를 배포하는 것 겔릴라 비디오 4.캠코더와 모니터를 조각예술적으로 활용 5.비디오 현장 포퍼먼스에 활용 6. 비디오를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것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이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두 대를 사서 음이 서로 다르게 조율했다 -백남준 무목적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원한다. **목적적 무목적성 PURPOSEFUL PURPOSELESSNESS
https://www.youtube.com/watch?v=1Fm9amZ0-4s
1. 첫사랑과 첫전시
자 그럼 인트로로 들어갑니다. <인트로 1> 첫 전시와 첫사랑, 그래서 백남준 첫 사랑 소개합니다.
1952년 '백남준의 첫사랑' 백남준은 1952년 동경(도쿄) 대 문과부에 입학했다. 법대 상대 2년 후 미학 및 예술사를 전공을 정하고, 주로 작곡과 음악사를 공부했다. 1953년 백남준은 일본에서 같은 동경대 불문과 학생 시브사와 미치코(步澤道子)와 첫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똑똑하고 인형처럼 예쁜 여학생이었다. 수줍음을 잘 타는 백남준은 그녀 앞에 서면 얼굴을 붉어졌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 끙끙 앓았다. 어느 날 백남준 그녀에게 대학생으로는 살 수 없는 엄청나게 비싼 부다페스트 현악 4중주가 연주하는 바르토크 첼로 연주회 티켓을 건넨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고 너무 비싼 표라 마음에 걸려 돌려주려고 했다. 그녀가 백남준의 주소를 알아내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백남준이 사는 곳은 동경에서도 최고급 주택가가 모여있는 부촌이라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백남준이 나왔고 부잣집 도련님답지 않게 옷차림은 허름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형들과 여기서 살았던 것이다.
그녀가 연주회에 못 간다고 하니까 백남준이 함께 가면 안 되겠냐고 애원하다시피 해 겨우 같이 가게 된다. 차도 같이 마시며 데이트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 애인에게 돌아갔다. 백남준의 애틋한 첫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 초대 백남준 아트센터 이영철 관장이 2008년 일본 출장을 갔다가 그녀를 만났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 스마트한 미인이라고 기자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2. 과격한 문화테러리스트 서양미술판 깨다
<인트로 0-1> 인트로에 들어가기 전에 인트로. 백남준 1994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소위 세계 일류(탈영토제국주의)가 되면 조국이고 뭐고 없다고"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이 멋지다.
<인트로 0-2>"(고급)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 마찬가지로 고급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 그 나라 땅의 크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급 정보와 폭넓은 지식으로 전 세계를 지배한다" 백남준은 '탈영토제국주의'라고 한다.
<인트로 0-3>[유머]"내가 정치가가 되었으면 벌써 감옥에 갔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되었다" -백남준 내가 유명인(세계적 일류) 되면 그때 정치적 발언하겠다
<인트로 0-4> 시대 문명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넘어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갔다. 유(조) 음악(harmony music)에서 무(조) 음악(a-music)[랜덤 음악]으로 넘어갔다. 이원론(분석 논리)에서 일원론(융복합)으로 넘어갔다. 서양(양)에서 동양)으로 넘어갔다. 뒤샹에서 백남준으로 넘어갔다. 고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기체로 넘어갔다. 여기에는 철학적, 미학적 테러리즘 작동했다.
<인트로 0-4> 당신(장 폴 파르지에)에게 백남준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천재였고 모성이 강한 나의 어머니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 대한 책을 쓸 때 지혜의 여신처럼 자상하게 돌봐주고 이끌어줬다. 백남준은 언제나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하는 방식을 취했다."
<인트로 0-5>1. Barbara Wien, "Jetzt ist: Utopie. Das ist wichtig" -NJPaik 지금이 유토피아다. 그게 중요하다. -백남준 2. 한국의 선(Zen)은 엄격한 일본과 다르게 보다 느슨하다. 여유롭다. Aber koreanische Zen hat keine japanische Scharfe gehabt, sondern der koreanische ist viel lockerer. So beyond oder before Scharfe, ja? -백남준. 백남준은 독일어를 쓰다가 가끔씩 한 두 개 영어를 섞기도 3 Der meiste Koreanische Buddhismus ist Zen. 4.
3 <인공지능>을 처음으로 언급하다.
<인트로 1-1> 백남준은 1960-70년대 여러 가지를 예언 1) 스마트폰 2) 인터넷 3) 전자상거래 4) 앱 애플리케이션 등등 1982년 파리 퐁피두센터 전시에서 "나는 TV 안에 인간의 뇌를 심고 싶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공지능>을 처음으로 언급하다.
<인트로 1-2>예술, 사람을 얼떨떨하게 하는 것(예술 원리)">"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유명한 말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4 예술은 사람을 얼떨떨하게
<인트로 1-3>"관객하고 예술가(아티스트)하고 괴리(거리)를 더 좁히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의 진의(essence)'이고 '인생의 진의'가 아닌가?" -백남준 1995년 광주 비엔날레 인터뷰 중에서 [평] 백남준은 전시의 주인공을 작가가 아니고 관객으로 봤다. 그만큼 작가와 관객의 원활한 (쌍방) 소통을 가장 중요. 그는 문화 민주주의자였다.
<인트로 1-4><[복습] 백남준에게 피아노를 부수는 것은 일종의 수행이자 명상. 그런 행위를 하다가 인터넷 발상했다.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일종의 단[斷]의 철학(깨달음을 통해 기존의 모든 가치를 잘라내는 행위)이다> 시게코 여사와 인터뷰 중 "백남준은 샤머니즘 요소가 강했고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것에도 심취했죠. 피아노를 부수는 행위가 그에게는 어떻게 보면 수행이나 명상이었을 거예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급진적 사고로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샀죠."
5. 뮌헨 대학 거부
<인트로 2 1956년> 백남준 1956년 홍콩과 캘커타와 카이로를 경유해 뮌헨에 도착 1956년 뮌헨대 9월 학기에 입학 허가를 받고 첫해 음악사 등을 공부했으나 제가 이 대학을 작년에 갔어요 <사진> 노벨상 42개 받는 명문대 학교 분위기가 너무 보수적이라 탈출 다음 해 더 자유로운 프라이부르크(자유의 도시) 음대로 옮겼다. 그리고 1957년부터는 독일 다름슈타트(방문)에서 매년 여름에 '젊은 작곡가를 위한 음악제'가 열리다 여기에 참가했다. 그 후 백남준은 쾰른대 철학과에 입학해 니체와 헤겔 등을 공부했다.
6 프라이부르크 지도교수 포르트너를 물리치다 토끼사건
백남준 첫 전시를 7년간 준비 이를 갈면서... 3년간 비밀방, 전자공학 독학 고3처럼, 전자책만 읽다. 베를린 공대
<인트로 3><첫 전시 열리기 전 1957-1960년까지 백남준>
▲1957년 1) 푸라이부르크대학교로 옮김 2) 지도교수 포르트너 교수는 백남준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다. 도끼 일화 그래서 쾰른 방송국에 일하도록 추천 당시 쾰른 첨단의 전위음악이 리드하고 있었다 전자음악을 창시한 슈톡하우젠 만났고 그리고 백남준은 일본 잡지 간행하는 <현대음악> 독일 해외통신원 기자도 했다.
<백남준 잘 요약된 삶의 궤적 찾기 쉽지 않다. 여기는 2000년 백남준 구겐하임 전시 때의 자료. 전반기 정리 잘 했네요. 후반기는 흐지부지!> 독일에 유학한 백남준 처음에는 독일 명문 뮌헨 대학(백남준 지도교수이자 음악학자인 T.게오르기야데스 (Thrasybulos Georgiades) 이름도 나오네요) 다니다가 너무 보수적이라고 생각해 포기하고 프라이부르크 음대(at the International Music College in Freiburg)로 학교를 옮겼다> He was born 1932 Seoul. He received a BA in aesthetics from the University of Tokyo in 1956 where he also studied music and art history. After graduating, he studied for a year with composer Thrasybulus Georgiades at the University of Munich and for two years with composer Woflgang Fortner at the International Music College in Freiburg. He attended the International Summer Courses for New Music in Darmstadt in 1957, when he met Karlheinz Stockhausen, and in 1958, when he met John Cage. Cage, and through him Marcel Duchamp, had a significant influence on Paik as he became a major force in the avant-garde through performances.
In Hommage a John Cage (1959), Paik employed audiotape and performance to attack traditional musical instrumentation and compositional practices, splicing together piano playing, screaming, bits of classical music, and sound effects. Realizing that taped sound was not enough, he decided to move into performance, first by introducing performative actions into his audio works. In 1961 Paik performed Simple, Zen for Head and Etude Platonique No. 3, in which he became a volatile figure, thrashing about in unexpected patterns and sudden movements to his signature soundtracks.
In 1962 Paik participated in the Fluxus International Festival of the New Music in Weisbaden. Paik's first exhibition, entitled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 in 1963 at Galerie Parnass at Wuppertal, launched his transition from composer and performance artist to the inventor of a new art form: an engagement with the material site of television as an instrument. In the exhibition, thirteen televisions lay on their backs and sides with their reception altered; for example, Zen for TV (1963) reduced the television picture to a horizontal line and Kuba TV (1963) shrank and expanded the image on the television set according to the changing volume.
In 1964 Paik traveled to the US. He quickly settled in New York and became a leading innovator among an emerging generation of artists seeking new modes of artistic expression and distribution. That same year, Paik collaborated with Shuya Abe to create Robot K-456 (1964), a remote controlled robot that played audiotaped speeches by John F. Kennedy and defecated beans in Paik's Robot Opera (1964).
7. 1958년 중요한 해 존 케이지 만났다 주역 작곡
▲1958년(가장 중요한 해 중 하나) 다름슈타트 열리는 여름 현대음악 강좌 참석 당시 강사였던 존 케이지를 만나다. 그의 생애 결정적 영향을 주다 주역으로 작곡, 소음 침묵도 음악이다.: 음악 범위를 확장
1932년 생인 백남준 전쟁세대다 커다란 솟을대문 집에서 최고 갑부 막내로 태어난 백남준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 그런 좋은 집안 환경에서 6개 국어도 익혔다. 그러나 랭보처럼 꽃 미남인 백남준은 전복적인 음악과 철학을 좋아하는 반항아로 급진적이었고 그렇게 형들과 다르게 내면이 활활 타오르는 예술가를 꿈꾸었다.
▲1959년 <존 케이지를 위한 헌사 1탄> 전시, 그러나 존 케이지를 참석하지 않고 보이스는 멀리서 이걸 지켜봤다.
8. 악명 높은 파괴자 1960 크리스토를 만나다
백남준, 자르기 천재 :
▲1960년 바우어마이스터 아틀리에에서 존 케이지에 보내는 헌사 2편(일면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 열다 그때 존 케이지 참석 백남준 그의 넥타이를 자르다(악명 높은 해프닝) 왜? 존 케이지
여기서 유명한 대지 미술가 얼마 전 작고한 '크리스토'를 만나다. 백남준조차 초기 크리스트를 오해한 면을 보인다.
8. 1961년 29살 본격 활동
<인트로 4> ▲ 1961년 쾰른에 갔다. 거기서 가 전자음악의 창시자 슈톡하우젠 만났다. 죽이 맞아(의기투합) 1961년 10월 26일 <ORIGINALE(괴짜들)> 퍼포먼스를 공동 기획했다. 관객 참여형 음악적 공연이었다
9 백남준은 소위 문화 패거리 <플럭서스> 가입했죠.
<플럭서스 물이 흐른다(fluxus=flow) 뜻 표어는 고체 사회에서 액체사회로>
정신병자들 탈출했다 평가를 받았다 1961년 미국 출신 마치우나스 등이 합류로 미국 작가들 참여
체코 대통령: 하벨/리투아니아의 초대 대통령:란즈베르기스
다국적 그리고 다장르적 모든 예술가 참여
20세기 전반부 바우하우스 20세기 후반부 플럭서스 국제적 문화패 미술만 아니라 문학 등
여기서 대통령이 3명이 나왔다 사실은 정치적이기도
백남준과 보이스의 첫 만남 I, 1961년 여름 뒤셀도르프
가장 중요한 만남은 요제프 보이스와의 만남이다. 백남준은 1961년 여름 뒤
셀도르프에서 보이스를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을 맨프레드 티쉴러가 사진으
로 찍어 제로 그룹 카탈로그에 실었다. 백남준은 훗날 보이스와의 만남을 이
렇게 술회했다.
"1961년 여름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멜라 화랑의 제로 그룹 전시회 오프닝
에 갔다. 눈초리가 사나운 이상한 중년 남자가 '파이크(Paik)' 하고 불렀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부르는 내 이름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첫 경험은
잊을 수 없다. 그는 1년 반 전에 있었던 나의 데뷔 콘서트에서 내가 입었던 옷
목도리가 보라색이었다는 것, 콘서트의 여러 장면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말
하면서 민망스럽게도 나의 연주를 칭찬해주었다. 그는 독일과 네덜란드 국경
근처에 큰 아틀리에가 있으니 와서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날 알아보는 사람
이 매우 드문 때라서 그의 이름을 묻고 싶었지만, 중년이나 된 그가 자신의 이
름을 말했을 때 그 이름을 들어보도 타협을 모르고 고투하고 있는 듯한
그의 진지함과 깊고도 매서운 눈초리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백남준은 1986년 보이스가 타계했을 때 추모제를 지내며 자신이 성공을
거둔 것이 무명 시절 보이스를 만난 덕택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에게 보이스
는 매우 고마운 사람이었다. 보이스는 백남준을 보살펴주었고, 함께 퍼포먼스
를 하면서 우정을 나눴다. 백남준보다 11살이 많은 보이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화랑에서 제대로 된 전시회를 연 적이 없었지만 기인으로 유명했다. 빌헬름은
보이스를 가리켜서 “저런 기인이 대학교수가 될 수 있다니, 독일은 참 좋은
라다" 라고 했다. 보이스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보이스는 1964년 12월 1일 르네 블럭 화랑에서 우드
머리 (The Chief)>를 연기하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자신의 퍼포먼스에 관
해 말했다. "내게 <우두머리는 소리를 내는 중요한 작품이다. 화랑 바닥에 대각선>
10. 백남준과 플럭서스의 관계 서양인들 기 죽이기 금강경
정식 단체가 된 것은 1962년이다
<인트로 4-1> ▲ 1961년 10월 26일부터 11월 6일 2주 정도 금감경을 인용해 서양 친구들 기를 죽이다>
어떻게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모든 가시적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그걸 응시해야 하리(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같은 경구를 낭송하다 ▲ 1961년 독일의 문화대통령 요제프 보이스은 백남준을 멀리서 보고 있었다.
<인트로 6> 1961년 전자음악의 창시작 슈톡하우젠 만났다고 했는데 그의 부인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만나다
<백남준 여성에게 인기가 높았다. 1961년 독일에서 만나 친하게 지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평이다>
백남준은 '플럭서스'와 1961년 '오리기날레' 공연 등에서 메타한 해프닝을 펼쳐 큰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고 싶다"며 전자매체를 활용한 실험예술을 꿈꾼다.
백남준은 60년대 초부터 전자음악을 소개한 쾰른 서독 방송(WDR)을 출입하면서 그런 경향을 보인다. 때론 베를린공대에서 강연도 들었고 위험천만한 1만 5천 볼트 전기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TV를 악기처럼 예술의 도구로 상상한 것이다.
11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 독일에서 백남준의 프리마 돈나
그녀는 백남준아트센터에 초대를 받아 몇 번 한국에 왔었다. 그녀는 백남준이 독일 생활에 익숙하지 못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백남준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artisan)이었고 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남정호 이화여대교수(백남준 저서의 저자. 전 중앙일보 뉴욕특파원)가 독일에 가서 백남준과 함께 작업한 마리와의 인터뷰> 백남준 친구들 플럭서스, 지독하게 가난했다고 백남준이 그래도 제일 부자였다고 한다. 이들 동료(디자이너이면서 기자출신) 중 한 사람을 뽑아 한 파티에 초대받은 것처럼 위장 잠입시켜 먹을 것을 슬쩍 해서 같이 나눠 먹었다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남정호: 백남준과 어떻게 만났나?
마리 바이어마이스터: 다름슈타트 국제 신음악 여름 강좌에서 케이지의 강의를 같이 들었다. 그 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공연에 갔었는데 당시 백남준은 타시슴(tachisme, 물감 등의 번지는 특성을 활용한 기법)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날계란을 캔버스 위로 던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일종의 액션페인팅인 셈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계란의 내용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날계란이 아닌 삶은 계란을 던졌라고 한다(웃음).
남정호: 1960년대에 예술가들을 쾰른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마리: 당시 쾰른은 전위예술가들의 메카였다. 서독일라디오 방송국이 전자음악을 비롯한 실험적인 첨단음악을 중시하면서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마치 '금수의 왕' 같았다. 할까. 또 이 도시에서 최초의 첨단음악 축제가 열려 수많은 들이 왔다. 호텔에서 지낼 돈도 없어 내 스튜디오 옆방에서 열 명이 한꺼번에 잔 적도 있었다. 이들은 가난했지만 음악, 미술, 건축 할것 없이 자신들의 분야에서는 최고의 인재들이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고 영감을 주었다. 유럽에는 살롱 문화라는 것이 있는데, 예술가들을 초대해 서로 교류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스튜디오를 '로렐라이 살롱'이라고 불렀다.
- 백남준의 쾰른 생활은 어떠했나?
백남준은 일부러 가난한 척을 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한다고 믿었던 탓이다. 가난뱅이가 아니면 다른 전위예술가들이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초에 독일에서는 방송국이 아니면 누구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있을 만큼 부유했음에도 자신이 가난하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가난하지 않게 보이도록 옷을 입었는데, 남준은 부러 없어 보이도록 입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형이 쾰른에 온다고 해서 우리는 돈을 모아 그에게 양복과 넥타이를 사주었다. 그런데 딱 하루가 지나자 그 양복이 헌 옷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백남준은 일부러 그렇게 보이게끔 하고 다녔다.
- 당시 필른의 제술가들은 모두 가난했나?
그 당시에 이곳 예술기들은 빵과 감자에 마요네즈를 발라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입도 변변치 않았지만 음식에 돈을 쓰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정말 어쩌다 백남준을 비롯한 우모처럼의 파티였던 셈이다.리는 값싼 중국 음식점에서 양껏 먹기도 했다. 그곳에서의 외식이- 경제적 여유가 전혀 없었나?
당시 우리는 너무나 배가 고팠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동료 중에 디자이너 겸 기자가 있었는데, 시내에서 리셉션이 열리면 우리는 2마르크를 모아 그에게 쥐여주면서 그곳에 가도록 했다. 그에게는 아주 품위 있는 검은색 양복이 있어서 그것을 입고 리셉션장에 가
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보였다. 입구에서 초대장을 보여달라고 하면 그는 “아, 택시에 두고 내렸네” 라고 둘러댔다. 연기까지 하며 행사장으로 들어간 뒤에는 호주머니에 넣어둔 비닐봉지에 온갖 음식을 담아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그러면 목이 빠지게 먹을 것을 기다리던 우리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만큼 우리는 가난했다.
- 백남준은 어디에서 살았나?
그는 침대도 없이 테이블과 온갖 잡동사니뿐인 지하 창고에서 살았다. 그 혼돈의 세상 속에서도 희한하리만큼 멋진 예술을 창조해냈다. 미적 조형성의 측면에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의식의 깊숙한곳을 끼르는 (TV 부처와 같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그는 진정한 천개였다.
- 백남준이 쾰른 스튜디오에서 추구한 예술은 무엇 이었나?
아니키스트였던 그답게 아니키즘을 생산해냈다 그당시 독일에서는 부르주아들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자본주의, 즉 돈만 좇는 잘못된 의식의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무분별한 인간의 탐욕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도 다시 관료주의와 군대가 득세하는 모습을 믿을 수 없던 우리는 예술을 통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예술이라는 것은 자유를 위한 갈구였다.
- 백남준의 예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는 피아노로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다가 돌연 자기 멋대로 과격한 소리를 내곤 했다. 그는 어떤 선율이 그다음에 이어질 것이라는 청중들의 예상을 완전히 깨부수고 전혀 다른 음악을 들려주었다. 뒤샹처럼 예술에 대한 관념을 바꾸어버렸다. 백남준은 술로 사람들을 깨어나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 1960년대 초의 독일은 전위예술의 부흥기였나?
전후 독일에는 자본주의가 온 사회를 휩쓸면서 온갖 부작용이 나타났다.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에 빈부 격차의 확대로 사회적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러한 사회적 모순을 격파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었다.
▲ 1962년 6월 16일 1)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Neo-Dada in der Musik)' '머리를 위한 선' 선보이다.
이때 백남준 <머리를 위한 선>을 선보여 예술가 중에서
플럭서스 안에서도 스타(총사령관)가 된다 주변의 예술가들이 규합하다.
심지어 다들 가난해 백남준이 종종 식사비를 내기도 했다. 유학비 받던 시기이기에
11 여성회원으로는 앨리슨 놀즈를 위한 세레나데(Serenade fur Alison)가 있었다.
생리혈 소재로 한 생명의 잉태자 찬가
플럭서스 안은미(백남준 상 수상)라고 할까요 여성의 팬티를 10개 입고 그것을 하나씩 벗기 여성의 생리혈, 멘스(menses) 피가 묻은 것 여성의 위대한 멘스(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피)가 없으면 인류는 멸망 여성 찬가죠
‘플럭서스(Fluxus)’ 반예술 반사회 무정부주의자와에 가깝다. 미술의 민주화에 기여하다 그리고 예술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다 병자에 이 세상에 출몰했다는 등 미치광이 단체로 인정받았다.
12 ▲ 1962년 <백남준 폭탄선언>
첫 전시가 열리기 1년 전 그가 만 30살인 1962년 백남준은 세계 미술판을 엎어버리겠다고 폭탄선언을 하다. 내가 문화 칭기즈칸이 되어 서양미술판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장담하다. 문화제왕으로서 포부를 밝히며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선언한다. 루이 14세가 한 '짐이 곧 국가다'를 패러디한 것이다. 자신의 출현을 13세기 초 몽골제국이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에 비유하며 유럽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 1963년 2월 2일-3일 다국적 다 장르적 국제 플럭서스 4번째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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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선의 철학을 괴벽스럽게 때로는 농담투로 전자아트에 적용하기로 유명하다" -David Joselit 조슬릿 [평] 맞는 이야기다.백남준 첫 전시에서 선불교를 적용했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다> 음악을 미술로, 미술을 음악을 표현하다. 즉 음악과 미술을 뒤섞은 비빔밥의 미학이다. 통합적 예술양식이다.
**<본론>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 소리 소문 없이 떨어뜨린 원자폭탄, 60년 전 이야기인데 지금도 놀랍죠
백남준은 1963년에 그의 첫 전시에서 서양미술을 바닥부터 무너뜨리려고 그들의 성상을 파괴하고 그들이 믿는 서구적 우월주의나 과학주의라는 우상에 테러를 가한 (바이러스) '해커'였다. 백남준은 서양 예술가의 혼을 빼놓고 대혼란에 빠지게 하려고 '피드백'과 '랜덤 액세스'라는 기괴한 노이즈 방식을 도입했다. 동시에 백남준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미술로 음악을 하고 음악으로 미술을 하는)" 융합적 회통 사상을 첨단의 TV 전자 아트로 실현함으로써 세계 미술 혁명의 기린아가 되다. 백남준은 서양에 직접 가서 원자폭탄 떨어뜨리고 서양미술판을 제로 그라운드로 만들었다. 그 터전 위에 '비디오 아트'라는 서양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혀 새로운 예술의 신기원을 세웠다. 백남준 TV를 결국 30년(1963-1993)만에 인터넷으로 바꿔버렸다. 일방형 불통(먹통)의 상징인 'TV'를, 쌍방형 '소통'의 상징인 'INTERNET'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런 시공간을 초월해 경계가 없는 인터렉티브 한 방식의 소통을 통해 인류가 다 같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아름다운 세상(코뮌 공동체)에 대한 백남준식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0gvgLEe0I8E&t=59s
1. 원자폭탄, 족보 없는 예술, 7년간 이를 악물고 준비, 추방?
유명한 말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
<이를 갈면서 7년간 준비> "난 당시 입시생처럼 전자공학과 물리학, TV 관련 책자만 봤다"라고 적혀 있다.
죽을 수도 있는 족보 없는 예술에 도전, 세계를 주도하는 서양미술판 떨어뜨릴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면서 TV아트를 시작하다. 멀리 보다 백남준. 깊이 사유하다-푸코 전자 아트를 하기 위해서 비밀스럽게 공부방을 만들어 3년간 전자공학을 공부하다. 그리고 후에 유학비가 안 와 백남준의 독일 생활은 빈궁해졌다. 동경에서 가족과 함께 1년을 보냈기도 했다. 그런데 운 좋게 그때 미국인보다 트랜지스터 원리를 2년 앞서 발견한 전자공학자 '우치다 히데오'와 백남준과 함께 비디오 합성기를 발명한 '슈야 아베'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
이 괴상한 전시를 서구백인중심의 헤게모니를 흔드는 '빅뱅'이나 세계 미술계에 소리 소문 없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적이다. 백남준의 이런저런 의도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범죄' 같다. 백남준도 "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 아트는5차원 사기다"라는 하지 않았던가.
이 괴상한 전시를 서구백인중심의 헤게모니를 흔드는 '빅뱅'이나 세계 미술계에 소리 소문 없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적이다. 백남준의 이런저런 의도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범죄' 같다. 백남준도 "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 아트는 5차원 사기다"라는 하지 않았던가.
2. 왜 추방? 총체예술 EXPEL 서양미술 '추방'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내건 건, 백남준이 셔먼 아티스트로서 한국의 터줏대감을 이곳에 모셔와 텃세 부리는 서양인의 기를 꺾고 같이 놀자고 한 것인가. 백남준은 대감놀이를 이쪽 신을 저쪽 신으로 보내 의견을 나누고 저쪽 신을 이쪽으로 초대해 융숭히 대접한 후 돌려보내는 소통의 장본인으로 봤다.
1963년 세계 예술계에 투하한 원자폭탄(?) 서구에 대해서 정말 큰 사기를 치다
제로 포인트 전혀 새로운 미술 탄생
1963년은 서양미술판에 원자폭탄이 투여되다 첫 번째 전시다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 백남준은 그가 31살이 되는 1963년 7년간 준비한 첫 개인전을 엥겔스의 고향인 소도시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3월 11일부터 20일까지 열었다. 이 갤러리는 원래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을 대표하는 건축가 예를링의 비상업적 사무실이었다.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전시 포스터 1963. 에릭 안테르시 컬렉션.
그가 만든 포스터는 영어, 독어, 프랑스어로 쓰여 있는데 16개 주제가 나온다. 지상천국을 연상케 하는 '성인을 위한 유치원'(1), 관념주의를 경고한 '이데아의 물신 세계'(2), 사물의 음향까지도 언급한 '소리 나는 오브제'(3), 선불교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선 수행을 위한 도구'(4), 토론 주제 같은 '비인과성과 원리로서 동시성'(15), 일상 속 축제를 강조하는 것 같은 '독일 바보학에 대한 연구'(16) 등이 그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포스터에서 대문자로 강조한 알파벳만 따오면 '추방(EXPEL)'이 되는데 그 뜻은 불분명하다. 냉전과 이념대결을 추방하자는 건지 아니면 서양미술을 추방한다는 뜻인지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건 백남준의 첫 전시 전단지를 1960년 4월에 발행된 <경향신문> 위에 인쇄했다는 점이다. 1962년 10월 독일에선 나중에 무죄로 석방됐지만 <슈피겔지> 편집국장이 체포되는 언론탄압이 있었다. 이런저런 사건과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이 부분 아직 미개척>
백남준 첫 전시 포스터에 16가지 중요한 주제가 나온다. 그중 하나인 <아이디어에 대한 물신주의> 백남준의 평생 과제였다 즉 관념(주의)을 깨부수는 작업을 한 것이다. 지배담론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인간성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경고다 이밖에는 이 포스터에는 16가지 테제다 나온다. ***이 밖에도 <소리 나는 오브제(Objets Sonores)>라는 테마도 있다. 이것은 물건에서 나는 소리도 음악으로 보는 것이다 즉 사운드 아트를 뜻한다. 혹은 무계 음악 기존의 음악의 위계를 해체시키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잉태하고 있음을 암시한 말이다.
백남준이 29살인 1961년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 공연에 참가했을 때 모습.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백남준 이론가 헤르조겐라트 박사 강연 때 찍은 사진 백남준 첫 전시 포스터에 백남준 예술의 중요한 16가지 테마(핵심 개념)가 나온다. 아직 전혀 연구되고 있지 않다. 그런데 김남수 선생(백남준 연구가) 지난번 백남준 전시(세종문화회관) 때 해설을 붙였다. 대단한 일이다.***
3. 왜 음악의 전시? -소리(sound)=시각(sight) 통합
1963년 백남준의 첫 전시(독일 부퍼탈) <음악의 전시>란 뭔가? 음악으로 미술을 보여주는 전시
아주 쉽게 말하면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음악
그의 첫 전시 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 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현대 서양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오브제 아트를 백남준은 피아노 등에까지 확대하고 그 범위를 넓혀나간다. 또한 침묵이나 제거할 수 없는 잡음인 '화이트 노이즈'까지도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할 때'라는 타이틀로, 백남준 전문가들 인터뷰에 이어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시대별로 소개한다. - 기자 말
그의 전시개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데서 왔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리(sound)가 시각(sight)이 되는 '사운드 아트'다. 기존의 시각 중심을 넘어 오감이 총동원된 즐거운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실험예술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이런 개념은 다원예술과도 통한다.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쿠바 TV를 보고 있는 백남준과 칼 오토 괴츠. 미국의 백남준 전문가 존 핸하르트 큐레이터는 비디오 아트를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사진술의 발견과 버금가는 미술사의 혁명"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백남준은 그가 31살이 되는 1963년 7년간 준비한 첫 개인전을 엥겔스의 고향인 소도시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3월 11일부터 20일까지 열었다. 이 갤러리는 원래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을 대표하는 건축가 예를링의 비상업적 사무실이었/그의 첫 전시 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의 첫 전시에는 각기 다른 4대의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 뿔, 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피아노도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본 모양이다.
4. TV(멀리 보다) 피아노, 대신 악기로 도입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텔레비전 방 바리타지(젤라틴 액에 바리타를 혼합해 코팅한 종이) 인화 흑백사진 1963.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텔레비전 방 바리타지(젤라틴 액에 바리타를 혼합해 코팅한 종이)인화흑백사진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 강연 때 찍은 사진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TV 전시가 어떻게 비디오 아트의 기원이 되냐는 사람도 있지만 모니터로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1963년을 비디오아트의 시발점이라 해도 좋으리라. 비디오 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이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동안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 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품으로 계속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첨단 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 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관객의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더 중요해진다.
5. <구석기->신석기> 대변화 빅뱅
산업화 시대 -> 정보화시대 패러다임 변화
그의 첫 전시 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 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선불교적 음악. 또한 백남준 말대로 물리학적 음악이다. 전자공학이 들어간 첨단의 과학 예술이다. 화면에 영상적 장면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그림이 보인다. 다시 말해 추상적으로 흘러가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눈으로 보게 한다. 비주얼 아트다. 결론으로 그의 첫 전시는 동양의 선불교와 서양의 첨단과학이 결합된 것이다.
그의 첫 전시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인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 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미래 인터넷((tele-vision, visionary, voyant) TV 등장
그의 전시개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데서 왔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리(sound)=시각(sight)이 되는 '사운드아트'사운드 아트'다.기존의 시각 중심을 넘어 오감이 총동원된 즐거운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실험예술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이런 개념은 다원예술과도 통한다.
6. 소대가리, 대감놀이, 추방&환대, 굿 형식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 아트의 시대가 열리다
백남준의 기개 어디서 나왔나/ 6개 국어백남준은 남다른 명석함과 해박한 지식과 동서철학을 섭렵한 인물인 동시에 칭기즈칸의 기개와 몽골 셔먼의 기질도 농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몽골 유전자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몽골은 우리와 3천 년 전 헤어졌는데 그들은 아직도 우리 걸 보존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런 배경을 알았기에
1963년 예술사에서의 빅뱅, 1863년 마네의 '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칭기즈칸의 기개로 도전한 전자 아트: 대감놀이의 또 다른 해석 기발한 전시 정말 알다가도 모른 전시였다. 이 전시에 대한 평가,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입구 소머리와 함께 백남준과 페터 브뢰츠만 등등 1963. 사진: 울프 예를링.
백남준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하여간 소머리에서 냄새가 진동하자 전시가 시작되기 3일 전 독일 경찰이 출동해 이를 제거하게 된다. 독일엔 두개골 동물은 지하 1m에 묻어야 하는 법이 있단다.
백남준의 첫 전시서문은 그가 존경하는 피에르 빌헬름이 썼다. 첫 구절은 "이번 전시가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는 시적 언어로 시작한다. 이는 서로 불협화음과 충동을 일으킬 것 같은 미술과 음악과 TV 등을 융합해 시공간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매체예술이 탄생된 것으로 본 것 같다.
7. 서구 성상파괴 왜?
그의 첫 전시에는 각기 다른 4대의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뿔암소 뿔,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피아노도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본 모양이다.
백남준의 친구인 요셉 보이스는 전시 개막 1시간 뒤 나타나 그 피아노 중 한 대를 마치 어떤 표적물을 정확하게 강타하듯 그렇게 박살을 냈다. 보이스는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지만 피아노를 부수면 행위예술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리라
<피아노 4대와 TV 13대> TV 뉴 피아노 혹은 새로운 악기로 도입하다: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비디오 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적 사고다.
그의 첫 전시에는 각기 다른 4대의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 뿔, 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피아노도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본 모양이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 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로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피아노와 함께 바이올린 서양 예술의 상징을 질질 끌고 다니다
8. 위의 연장선으로 서양 뮤즈 살해?
[전시된 사이코 욕조] 살해장면과 완전범죄 서구의 뮤즈 욕조에서 살해하다. <잔혹성> 얼떨떨의 진수
1) 유럽의 성상 파괴 피아노 등등 2) 유럽 뮤즈 살해 -문화 깡패 문화 테러리스트 별명
빈부차 경제적 차이 문화적 차이를 없애려고 했다. 서구의 문화 운동장을 제로로 만들다 60년 지난 지금 동서가 차이가 없다. 아니 동양이 앞서고 있다 뭐든지 한국에게 묻는다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욕조의 마네킹 바리 타지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히치콕의 소름 끼치는 공포영화 '사이코'나 아르토의 '잔혹극' 혹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연상된다.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백남준의 친구인 요셉 보이스는 전시 개막 1시간 뒤 나타나 그 피아노 중 한 대를 마치 어떤 표적물을 정확하게 강타하듯 그렇게 박살을 냈다. 보이스는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지만 피아노를 부수면 행위예술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리라.
9. 문화 독재자 TV 파괴: 참여와 소통
당시 첨단 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 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의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키워드다.
<정말 심미적인 사람은 쇤베르크나 백남준이나 존 케이지처럼 잡음도 불협화음도 너무나 아름답게 들릴 수밖에 없다. 샬럿 무어먼도 마찬가지다. 전위예술가들>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백남준.
당시 첨단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더 중요해진다.
<정말 심미적인 사람은 쇤베르크나 백남준이나 존 케이지처럼 잡음도 불협화음도 너무나 아름답게 들릴 수밖에 없다. 샬럿 무어먼도 마찬가지다. 전위예술가들>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백남준.
3 백남준 혁명 전자 아트 전자 붓 개념이다. 물감 붓과 전자 붓의 차이
10. 전시 주인공=관객, 모든 사람=예술가, 예술의 민주화
백남준의 첫 전시에서 가장 백남준다운 작품 중 하나는 '랜덤 액세스(음악)'다. 막대 꼬치에 꽂혀 있는 레코드를 관객이 즉석에서 마음대로 골라 변형해 작곡할 수 있는 방식이다. 관객이 전시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으로 이 말은 롤랑 바르트가 1968년 <저자의 죽음>에서 한 "독자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피아노 4대와 TV 13대> TV 뉴 피아노 혹은 새로운 악기로 도입하다: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비디오 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적 사고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 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로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작가 중심의 수직적 전시에서 관객 중심의 수평적 전시로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꿨다. 그래서 마침내 '대중예술가'시대, '문화민주주의'시대를 연 셈이다. '랜덤 액세스'란 이처럼 작가가 정한 어떤 규칙이나 각본을 정하는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과 비위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 된다.
백남준은 이렇듯 작가지만 관객에 초점을 두고 그들과 함께 '상호작용(interactive)'하는 예술을 추구했고, 이게 결국 60년대엔 <참여 TV>로, 70년대엔 신시사이저로 편집한 <비디오 아트>로, 80년대엔 생중계한 <위성 아트>로 진화된다.
11. 다시 재현하기 힘든 전후 무후 한 전시. 동서와 시공간 넘다. 음악=미술, 전시=해프닝, 숨 막히는 세상 속 구멍 내다. 그는 서구에서 못 말리는 문화 깽판
최고의 기획자 큐레이터로서의 백남준 재평가
백남준의 첫 전시는 이처럼 뒤샹의 반미술과 쇤베르크의 반음악을 합친 것 같다. 당시로는 유례가 없고 상상하기 힘든 전시였다. 특히 흥미로운 건 갤러리 입구의 정원과 현관, 화장실 욕조와 지하실까지도 복합적 전시공간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작가만 아니라 포스터도 직접 제작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전시장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큐레이터로,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전시를 총괄하는 기획자로 또한 개념미술가로 그 몫도 다 했다.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큐레이터로서 백남준'에 대한 재평가 붐이 일어나고 있단다.
▲ 경향신문 4월 27일 자 4면에는 '사월혁명'을 기리는 '문화계 여러분이 보내온 글'과 조지훈, 정비석 등의 독재 종식 촉구와 희생 학생 애도의 글과 안의섭(두꺼비) 화백은 복간 만화가 실려 있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에서 소개된 영상자료 중 찍은 사진
하여간 1980년 이후 백남준과 지인이 된 전 문화행정가 천호선 씨의 말에 의하면 첫 전시회를 기획할 때 한국에서 일어난 '사월혁명'으로 <경향신문> 폐간·복간 소식을 알게 되면서, 일본에 있던 형에게 복간호를 비롯한 경향신문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보내달라고 해서 거기에 일일이 낱장으로 인쇄해서 만들었단다.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30일 이승만 정권을 비판해 폐간됐다가 4월 19일을 계기로 4월 27일 다시 복간된다. 백남준은 <경향신문> 1960년 4월 27일과 29일, 1961년 3월 13일 자 위에 전단지를 만든다. 백남준은 세계 미술계의 일대 혁명이 될 비디오 아트와 고국의 민주화운동을 동일시하는 관점도 엿보인다.
이렇게 전단지 하나 만드는 방식도 기존의 방식을 교란시키고 당황하게 하는 것으로, 그 아이디어가 자신의 정치성이 들통나지 않게 하고 그가 염두에 두었던 정치적 메타포와 의도가 뭔지를 후대에야 깨닫게 되는 고단수였다.
12. 인류 영원한 질병=우상숭배
백남준은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이라고 했는데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를 부순 것도 그렇고, 위에서 보듯 서양 뮤즈가 욕조 속에서 양 팔다리가 잘린 채 있는 장면도 그렇고, 이런 이미지는 서양미술 숭배에 대한 파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긴 이 세상에 버려야 할 편견과 우상숭배가 얼마나 많은가.
19세기 과학혁명으로 유럽이 산업화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원 확보와 인력이 필요해지자 식민 개척과 제국주의로 박차를 가한다. 거기서 얻은 이득으로 호사와 권력을 누릴 때 랭보는 그들을 향해 야만의 문화라고 선포하며 아프리카로 떠났다. 백남준의 포스터에 적힌 '추방'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는 바로 그렇다.
동서를 넘어 랭보와 백남준은 시대의 우상 파괴자라는 면에서 같다. 서구 문명을 비판하는데 서구인이 아닌 동양인이 시도한 건 드문 일이지만 백남준은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 등을 부수고, 서구적 가치를 뒤흔들고 서구문명을 희화시키면서 'TV아트'라는 새로운 예술로 이원론에 갇힌 그들의 난제를 풀어보려고 했는지 모른다.
13. 예술: 매체 확장, 지평 넓히기, 오늘 이야기 주제 미디어 관련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입으로 듣는 음악 퍼포먼스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위 작품은 모조 페니스를 입에 물고 바늘을 레코드에 얹고 고막의 진동을 속귀로 전달받는 관객 참여형 작품으로 성(性)을 소재한 점도 흥미롭다.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백남준은 드디어 "음극선관이 캔버스를 대체한다"라고" 선언했다. 백남준이 발명한 TV회화는 그 어떤 기존 회화과 비교가 안 되게 표현력이 풍부하다. "다빈치만큼 정확하게,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라고 한 백남준 말이 이를 반증한다.
** 뒤샹을 가볍게 넘어서다
백남준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백남준 자료집)>을 낸 저자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비디오 아트가 앞으로 큰 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뒤샹은 비디오 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걸 다 이루었다. 그는 입구는 크게 만들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었다. 그 작은 출구가 바로 비디오 아트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이라며 자신이 창안한 예술의 독자성을 명쾌하게 풀다.
14. 평생 백남준 비평 -홍가이. 허나 백남준 왈, 날 보면 날 죽여라!
문화 테레리스트-전복자-우상 파괴자(영원한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 평생 비판하는 작가 홍 카이 https://seulsong.tistory.com/438
그러나 백남준은 이런 말을 남겼다. "백남준을 보면 백남준을 죽여라". 누구든지 나를 밟고 지나가라. 겸손한 말씀 오히려 그런 백남준의 대가적 모습이 그를 더욱 훌륭한 작가로 우뚝서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당분간은 아직 백남준을 능가하는 작가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평생 백남준을 미학적으로 혹독하게 비판한 전 MIT 홍가이 교수.
전 MIT교수였던 철학자 홍가이, 백남준 홍가이 70년대(?) 뉴욕에 같이 있을 때도 두 사람은 격렬한 토론이 있었고 홍가이 교수(1948-)가 항상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 백남준은 이에 개의 치 않았다. 그는 이번 세미나에서도 백남준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계속 공격하고 줄기차게 비판했다. 과거에도 홍가이 교수는 1984년 백남준이 한 말 "예술은 사기다"에 대해 예술철학과 언어철학의 입장에서 비판해왔다 그러나 내 생각에 백남준 언어는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다. 그래서 비언어이다. 그런 언어는 독자들이 상상력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주기 때문에 그래서 소통의 여백을 생성하는 수사학이 된다. 자신의 말만 독재자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거기에 들어와 자신의 말을 덧붙이고 펼치면서 신나게 놀 수 있게 하는 언어이다.
<결론> 그러나 백남준은 말했다, "날 보면 날 죽여라!" 부처님 말씀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여라"의 벤치마킹인가). [殺佛殺祖(살불살조)] 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날 죽여라
In the interactive work Magnet TV (1965), Paik invited viewers to modify the television's output into swerving abstract lines through the movement of a magnet over the TV. In 1967 Paik and frequent collaborator Charlotte Moorman were arrested when Moorman performed Paik's Opera Sextronique (1967), a striptease as she played the cello at the Filmmakers' Cinematheque in New York. Paik's TV Bra for Living Sculpture (1969), which Moorman wore in performances, featured two television tubes inside Plexiglas cases taped to her breasts. 9/23/69 Experiment with David Atwood (1969), one of the most important videotape productions of the first decade of video art, contained eighty fluid minutes of image manipulations in the constant process of revelation and transformation.
TV Buddha (1974) comprises a statue of Buddha placed in front of a television monitor with a closed-circuit video camera directed from the top of the monitor onto Buddha; Buddha silently observes himself on the screen in an infinite temporal loop. In TV Garden (1974), plants of varying sizes grow out of and amid monitors playing Paik's videotape Global Groove (1973). Video Fish (1975) presents a row of twenty monitors each with a fish tank placed in front of them, playing footage ranging from flying planes and fish to Merce Cunningham dancing.
The fulfillment of Paik's ambitions for a live global satellite broadcast was first realized in Good Morning, Mr. Orwell (1984) and Bye Bye Kipling (1986), featuring a frenetically mixed extravaganza of veterans of the avant-garde and new pop performers. Family of Robot (1986) was the first of Paik's robot sculptures fabricated from vintage televisions and radios, and was soon followed by similar figurative works like Merce (1987) and Catherine the Great (1993). Paik also developed large altars and architectural-scale installations of television monitors in the 1980s and 1990s. In 1996 Paik suffered a stroke, which had a dramatic impact on the pace to which he had become accustomed as a constantly traveling global artist. Nevertheless, in 2000, he created a millennium satellite broadcast entitled Tiger is Alive and in 2004 designed the installation of monitors and video projections Global Groove 2004 for the Deutsche Guggenheim in Berlin.
Major retrospectives of Paik's work have been organized by Kolnischer Kunstverien (1976),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1978),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in New York (1982),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1989), Kunsthalle Basel (1991),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in Seoul (1992), and Solomon R. Guggenheim Museum in New York (2000). His work also appeared in important group exhibitions such as Sao Paulo Biennale (1975), Whitney Biennial (1977, 1981, 1983, 1987, and 1989), Documenta 6 and 8 (1977 and 1987), and Venice Biennale (1984 and 1993). From 1979 to 1995 Paik served as department chair at Staatliche Kunstakademie in Dusseldorf. Paik died in Miami i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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