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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유튜브

[백남준&비빔밥] <07강> 제로, 플럭서스, +- 융합미학

[1] 백남준&BTS     [2] 백남준&인터넷 [3] 백남준&노마드
[4] 백남준&인터뷰 [5] 백남준&첫전시 [6] 백남준&미디어  
[7] 백남준&비빔밥 백남준 일곱째 이야기 백남준: 제로아트에서 플러스아트에서 마이너스 아트 <백해영 갤러리, 백남준과 친구들  NJPaik & Friends> 

https://www.youtube.com/watch?v=_fMzyk72c-w&t=33s

<인트로1> 강원(홍천) 키즈 트리엔날레 2020

[국내 최초 어린이 시각예술축제:]10월22일(목)부터 11월 8일(일)까지 홍천 탄약 정비공장, 와동 분교, 홍천미술관 일원에서 열려] 강원 키즈 트리엔날레 2020

<><빼기의 미학> 권대섭한복과 달항아리 은은한 달빛이 연상. 박여숙관장은 권대섭(회화 전공자)의 '달항아리'를 보고 이건 도자가 아니고 현대회화라고 말한다.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미니멀하고, 가장 완벽한 추상이니까!"다른 나라 도자기는 점점 더 장식적이 돼가는데, 우리 것은 장식이 없어지고 더 단순해졌죠

폐교 초등학고 어린이을 위한 ART SCHOOL
파베르 카스텔 협찬 
폐교가 아트학교
이런 행사의 좋은 점은 주민의 적극적 참여다. 언제 이런 역할을 해보겠는가
최정화 작품 Performance 총감독 한젬마

<문화예술의 지방화와 민주화 -플럭서스 정신> 무엇보다 지방자치가 중요. 군민의 자치 경험이 중요. 군별로 적은 국제비엔날레를 군민들 모든 지혜를 합쳐 만들어보는 건 국가 전체 국민 군민 전체의 순위를 높이는데 좋은 기회를 준다.

정보화에서 앞서가는 한국 어디에서도 이런 일은 가능하다. 투박한 정이 넘치는 곳에서 맑은 공기에 깊이 들이기며 마을 공간에 현대화된 시서화 산수화 다시 말해 야외 그림 설치 디지털 아트 타이포 그라프 공공미술 무한대 상상력을 꿈꿔본다는 것은 삶의 비약의 발단이 된다. 무엇보다 강원도 홍천 탄약 정비공장이 국제전 세계작가들의 전시장이 되었다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다. 평화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다.

<인트로2> 옛 사진 나와서 소개 

80년대 초 자율복장 전두환 유화정책 잠시 그래서 좋았다.

저의 경향: 학자 풍과는 거리가 멀다.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과 지적 호기심이 왕성.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장난감처럼 노는 것을 즐긴다. 미술사 충실 아카데미

[한국 이름은 천문학과 관련] 고조선이나 조선(朝鮮)에서 ''자를 잘 보면 해(日)가 1개, 달(月)이 1개, 별(+)이 2개. 두 개의 별 중 하나는 북두칠성.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제 이름 마찬가지죠, '김'(金요일)은 금(gold)이고, '형'(火요일)은 불(fire)이고, '순'(水요일)은 물(water). 내 이름 안에는 금 물 불 우주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다 들어 있다. 천문학 음양 5행(木火土金水)에서 나왔다. 내 이름 속에 천문학이 들어 있다. 즉 금과 불과 물이 합쳐진 것이다.

<인트로3> 부친 유물이 발견되어서 소개, 제가 백남준 좋아하는 것을 부친과 관련

제가 백남준 좋아한 이유 중 하나는 나의 부친과 관련: 부친이 1957년 체류한 스위스 바젤 주소 35 Arnold Böcklin Strasse Basel 구글 지도(구시가지 Alt Stadt)에 나오네요. 근처에 바젤 동물원이 있군요.

아래는 부친(김갑 권 KIM KAP Kwon)이 독일 회사에서 받은 가죽 지갑과 스위스 바젤 시내 전차 쿠폰(5.5 스위스 프랑)이다. 사용할 때마다 전차 표에 구멍이 나는 방식이다. 제가 백남준 좋아하는 것을 부친과 관련

[1] 백남준&BTS     [2] 백남준&인터넷 [3] 백남준&노마드
[4] 백남준&인터뷰 [5] 백남준&첫전시 [6] 백남준&미디어 / 백남준 일곱째 이야기 <백남준&신(무)음악& 비빔밥> 백남준: 무음악(0)에서 비빔밥(+) 거치고, 다시 마이너스 1000%(-)로 

<인트로4> <미디어 이야기> 리뷰

우리는 모두가 미디어다. 뉴미디어-디지털 미디어-1인 미디어-소셜 미디어-매스미디어-멀티미디어–인터 미디어-언론 미디어 등등 너무나 많다. 선사: 고인돌이 미디어 /고대: 샤먼/중세: 영적 매개체(영매)가 미디어/근대: 종이와 인쇄술이 미디어/현대: 중매쟁이, 에이젠트도 미디어. 지금은 인터넷이 미디어/ 모든 사람이 다 미디어죠 제2의 인터넷이 나와야 한다.

사진 1
1960년 9월 26일 케네디 닉슨 TV 토론회

<인트로5> 미디어 이야기 연장, 백남준은 1960년 9월 26일 케네디 닉슨 TV 토론회를 보고 TV라는 미디어의 힘을 감지하고 TV 전자 아트를 착안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1963년 첫 전시에도 닉슨 TV이 나온다. 

미 정치 역사상 이날 토론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드디어 비주얼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TV는 시대의 정신이었고 백남준은 여기서 크게 고무되고 자극을 받았다.
시사주간 타임은 50년 전 첫 TV 토론이 없었다면 케네디가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텔레비전 미디어(영향력), 미국 정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무명인  케네디는 유명인사 <케네디 TV토론서 어떻게 닉슨을 이겼나>

백남준은 '맥루언'이 말하는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점을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제 너무 악용이 되어 진짜 같은 가짜(Simulacre) 뉴스도 홍수

뉴스의 왜곡과 굴절을 할 수 있다 TV닉슨은 백남준의 초기 실험 텔레비전 중 하나로, 신호 발생기를 통해 만들어진 신호를 앰프를 통해 증폭 후 모니터 위에 설치된 코일로 전류를 흐르게 한다 자석 TV 마찬가지다.

<인트로6> 백남준은 스스로를  정보 예술가(Information artist) 다시 말해 준비된 시사 미디어 예술가다. 그리고 인류학적으로 접근하는 예술가이다. 역사보다 인류학으로 세상을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시사를 모르면 역사를 모르고 (신화 등) 서사를 이해할 수 없다. 백남준은 시사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10대 때부터 5개 국어를 공부했고 20대 때부터 전 세계 유수의 신문을 읽었다.

[에피소드] 시사에 밝으려면 정보원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

백남준이 1950년 일본으로 불가피하게 피난을 가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물건이 뭘까? 프랑스어 사전이었다. -시게코 여사의 증언. 부자들 허영으로 삼성가. 러시아  백남준이 1950년 백남준은 625 때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먼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래서 백남준이 나중에 부산으로 내려가 가족 함께 일본으로 밀항선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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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7>  백남준의 말: 하나, 그의 툭툭 던진 말이 예술이다. 예술: 사람을 얼떨떨하게 하는 것, 민주주의: 말대꾸(댓글)하는 것 천재의 언어<한국의 '롤랑 바르트'라 할 만한 '문학비평'에서 일가를 이룬 '김현(서울대)', 그는 비디오 아트를 이해 못했지만, 문학평론가로서 백남준의 '말'에 대해서 높이 평가. "말이란 원래 억압적인데 백남준 말은 전혀 억압적이지 않다. 말에서 엄숙주의가 없다." -김현> <원문 생략> "나는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의 말하는 방식만은 높이 평가한다. 그의 말은 솔직하고 억압적이지 않다. "비디오예술은 쇼"에서 역설적 공감"나만 옳다", 풍조에 반성의 자극, 때로 그의 말은 해학적으로 들리기 까지 한다. 억압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높은 평지에 이른 사람들이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백남준은 그의 비디오예술을 스스로 쇼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 쇼는 구경거리라는 뜻이다
<인트로8>   [백남준 아트센터 이야기]: 백남준 아트센터 2008년 개관 초기에

이영철 관장은 독일 출신 토비아스 기획실장 1명 포르투갈 출신 큐레이터를 1명 모두 2명이나 되는 외국 큐레이터를 채용해 획기적이었다. 그렇게 전후무후한 글로벌 마인드가 넘치는 아트센터였다.

관객의 반이 외국인이었고 심포지엄 학술대회 활성화되었고 전시도 이영철 초대 관장의 창의적 발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전시가 열렸다.

그러나 이 관장이 떠난 후 점점 그 기능이 쇠퇴했고 지금은 예산이 거의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져 과거 영예를 얻지 못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한계다. 국가예산을 쓰는 정도의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

이 건물을 위에서 보면 P로 되어있는데 피아노를 상징하는 것 같다. 아트센터 파사드는 TV 화면을 연상시킨다. 하늘의 구름 모양과 날씨 변화에 따라 그 화면이 수시로 변한다. 내가 본 미술관 중 가장 환상적인 곳이다

<인트로9>  [독일 이야기] 하나, 백남준 독일 교수 시절 이야기 / 둘, 메르켈 이야기

아름다운 라인 강이 내려다보이는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는 1773년 처음 학교 문을 열었다. 백남준이 여기서 교수였지만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다. 리히터, 폴케, 워커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47살 양혜규 교수

백남준 이 학교에서 수업하는 모습 백남준 수업의 특징은 수업 후 반드시 고급식당에 가서 저녁을 사주는 일이다. 거기서 자연스러운 수업이 연장된다. 왜냐하면 백남준은 당시 미국에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 비행기로 독일에 왔다 갔다 했기에 학생들과 같이 하는 시간이 부족하자 내놓은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도박하라고 돈을 많이 주다. 그런데 한 학생이 도박하다가 영감을 받아 좋은 작품을 출품에 대상을 받았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인트로10> 백남준 독일 7년 보낸 후 뉴욕으로 이주했다 2년 후 1965년 뉴욕이야기, 아래 드문 사진이라 소개합니다

카페 오 고고 

백남준에게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뉴욕대 근처) <카페 오 고고(세시봉)> 비디오 아트에서 중요하다. 1964년 문을 열고 1969년에 문을 닫았다. 1965년 백남준 마치 뉴욕을 방문한 교황 바오로 6세를 소니 영상기(포타펙)로 찍었는데 이것을 여기서 처음 상영하였다. 비디오 아트 이때부터 실제적으로 시작. 

* 백남준은 소니 휴대용 영상기(포타펙) 출시되기도 전에 미리 예약하여 이걸 구입했다 최초의 early adapter 이런 면에서 최초다. 이 영상을 돌릴 때 사용한 팸플릿에 백남준의 예술의 핵심 내용 담겼죠."콜라주가 유화를 대체했듯이 브라운 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물감 붓으로 그리는 시대는 가고 전자 붓으로 그리는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다] 이건 혁명이다.

<인트로12>   메르켈과 푸틴. 푸틴은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 (우리 언론?)

그는 KGB 출신(외국어 능통). 동독 근무했으니 독일어 더욱 능통, 메르켈은 개신교 목사의 딸로 동독 출신.

그러니 러시아어에 능통, 고교시절 러시아어 경연대회 1등, 받고 러시아 여행을 많이 했다. 그러니 둘이 만나면 메르켈은 러시아어로, 푸틴은 독일어로 대화.

여기서 주인공은 메르켈 "모든 이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의로움(정의)'이다" 다시 말해 소수에게만 '이로움'을 주는 게 바로 '불의', "인격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메르켈(정치는 인격의 수준에 달렸다) 유럽은 미국에서 조금 멀리/아시아도 미국에서 좀 멀리 그러다 보니 지금 유라시아 시대가 되었다.

<인트로13>  독일 개신교의 창시자인 루터 500주년 교황이 참석하다>

루터 500주년

유럽의 희망은 이 두 사람(개신교와 천주교)에 달렸다. 루터 500주년(신구교의 화해) 2017년 나도 독일에 있었는데 그때 루터 500주년 자료가 교회마다 많았다.

[인류학자 이야기] 엉뚱한 소리 하는 인류학 재미있다
<인트로14>
  [주술=학술, 기술, 예술의 기원이다] 주술이란 미신이 아니고, "주문(인문, 학문, 기록[data])+기술(과학)이 통섭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깨달음은 now and here [date] 온다. -백남준 정통한 인류학자 박정진 / 박정진 교수의 이곳에서 자신이 있다. 백남준은 유물론 철학자와는 달리, 운 좋게 유물론 예술가가 됨으로써 매체 자체가 예술이라는 사실을 전자 TV 기술로 보여준 기린아 –인류학자 박정진

<시베리아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시베리아 진주), 한번 가 봐야 하는데...

샤먼과 몽골 원주민 부랴트족(?)에게 이곳을 지구 상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 중 하나로 본다>이었다. 1666년,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대 야영지가 들어서기도 했다. 현재 대다수가 부랴트 공화국에 살고 있다. <백남준은 이들도 거의 한국인 보다> 

 <인트로15> 들뢰즈 이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이자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백남준 국제상 수상자 한국에 온 적이 있다. 그때 저도 참석 이런 말을 남기다 "자연에 이겨도 지는 것이고, 져도 지는 것이다" 생태적 발언. 그의 유명한 책 <유럽(우리)은 한 번도 근대인 적이 없다>

 <인트로16> 이영철 초대 관장 백남준 거의 인류학자, 탈영토 제국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백남준은 서양 근대주의가 만들어놓은 국경 구분을 철저하게 거부한 사람이다. 영국과 프랑스 아프리카의 국가들 경계선이 보면 직선이 경우가 많다. 두부 자르듯이 그렇게 나라를 구분. 이런 면에서 유럽은 한 번도 근대인 적이 없는 것이다

 <인트로17> 어제 뉴스 [캐나다 프레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인류학 교수이자 러시아와 동유럽 전문가 크리스턴 고드시 'Kristen Ghodsee'는 이런 책을 발표했다. <여성이 사회주의 하에서 더 나은 성생활을 한 이유)> [평] 자본주의 남성들 치열한 경쟁 속에 살다 보면 밤에 여성을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없다(?). 라캉의 유명한 말 "(자본주의에서는) 성관계는 없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인트로18> 백남준은 요약한 자신의 예술 골자> 아래 같다. 그는 축제 주의자 감각적 쾌락주의자다. "카타르시스, 순간의 환희, 모든 감각의 만족, 전인격 총체적 개입, 극도의 전자적 충동, 두뇌의 전기자기 진동, 직접 접촉 예술, 전자와 생리학의 시뮬레이션,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 정신의 사이버네틱스, 인공 신진대사, 다매체 다방향 상응(Correspondence) 등등."

백남준 장난기 평생 유지되다

 <인트로19> 철학은 논리고 소설은 이야기고 시는 노래다. 그러면 백남준에게 예술은  뭔가? 예술은 무엇보다 유희이고 축제이다. 어떻게 잘 노느냐가 문제다. 그런 가운데 가장 위대한 창조가 잉태하기 때문이다. 잘 놀아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 예를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백남준이다. 그는 예술을 Fun Fun Fun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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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백남준 1963년 첫 전시가 열린 부퍼털 미술관 개인주택

<본론> 1부====>

독일 제로미술운동과 백남준의 무음악 <백남준 첫 전시 이전 독일 시절>

<본문01>1957년 독일 죽어가는 동물들 소리 인간이 동물보다 못하다.

이때 백남준은 1956년 1963년까지 백남준 거의 무명 작곡가 연주자 

뮌헨 대 예술사학과  때러 치우고, 프라이부르크 교수가 손을 들다. 쾰른 대에서 철학 이때 독일에서 제로 미술운동이 일어났다.
제로-> 플러스-> 마이너스 음악으로 예술로 발전.

<본문02> 1957년부터 독일 제로미술운동이 시작

서구 미술은 플러스 미술이었고, 독일에서 제로 미술(아래 사진 뒤셀도르프에서 기존의 미술을 제로로 보고 영(0)에서 다시 시작한 예술운동. 1957년 두 명(하인츠 마크, 피네)의 독일 미술가 창안, 61년에 한 작가(못 그림으로 유명한 워커 작가)가 합류, 1966년 거의 10년 만에 해체되다)

여기 후반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백남준은 이것도 만족 못해 마이너스 미술을 창안했다 "-1000%로 만족하고 살아라" 무소유가 유소유다. 무용지물이 유용지물이다. -장자(무용지용). 내가 무(우선 내가 틀리다고 생각)가 되고, 네가 유(우선 네가 맞다고 생각)가 될 때 진정한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다 –원효 화쟁사상.

백남준 제로 미술운동 등 독일 전위 운동에 참여

<본문03>  백남준이 1961년 독일 쾰른에서 '괴짜들'이라는 대중 참여 포퍼먼스를 벌렸다. 칼 하인츠 슈톡하우젠이 작곡하고 아방가르드 음악가들이 참여한 해프닝 오르기날레의 1961년 공연. <정말 이렇게 잘 놀 수 있다면 이들은 천재들>

1961년 독일 제로 미술운동에 참여 1961년 백남준, 독일 제로 그룹과 제로 공연을 할 무렵 사진 동시에 백남준은 뉴 음악(무음악)을 실험하고 있었다

<본문04> 하여간 두 운동은 맥이 통하는 
왜 왜 왜? 서양미술 무력화 / 새로운 예술의 출현을 위해
1963년 첫 전시를 위해서 다지기 일종의 준비운동 warming-up

1962년(백남준 30살) 뒤셀도르프 네오 다다운동인 극장 병렬 공연 (Parallele Aufführungen)기획:  공연 한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은 백남준과 마치우나스가 공동 감독했고, 개막 연설은 장 피에르 빌헬름이 전했다. 이곳에서 백남준은 처음으로 바이올린 솔로와 소나타를 위해 곡을 연주했다

<본문05> 백남준과 보스텔(Parallele Aufführungen), NEO-DADA in der Musik, Kammerspiele, Düsseldorf / Neo-Dada in der Music 은 Carlheinz Caspari, George Maciunas, 백남준, Benjamin Patterson, Thomas Schmid, Wolf Vostell이 Kammerspiele (Dusseldorf)라는 극장에서

**백남준 10대에 철학적으로는 기존 사회의 전복자 맑스와 예술적으로는 기존 서양 음계의 전복자쇤베르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본문06> 그는 모두가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백남준은 자신의 이런 기질을 몽골 유전자 때문이라고 믿었다.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를 보면 백남준은 반란자, 반항자로 살았다. 평생 그렇게 살기는 힘든데 백남준은 죽을 때까지 그랬다 그래서 성공했다.

<본문07> 왜 1960년 대초 독일에서 이런 미술운동(플럭서스)이 자리를 잡게 되었나. 바로 나치라는 악몽을 경험했기에.

서구의 합리주의, 과학주의의 허구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서구의 성상파괴행위이다. 피아노는 유럽인 중산층 고급문화의 상징 코드다. 이 역할에서 두 명의 빅 스타는 바로 백남준과 보이스. 역설적으로 독일 잘 산다. 이것을 깨달아서

<본문07> [백남준&플럭서스]

1961년 플럭서스

플럭서스 정신은 철저하게 반자본주의 그림이나 조각을 고급 물건처럼 비싸게 팔 수가 있지만 팔 수 없는 예술을 위해서 의기투합하여 결성된 예술 단체가 바로 플럭서스, 결론으로 "돈을 안 벌기 위해서 하는 예술운동" 다시 말해 반예술 반자본 반권위를 내세운 것이다.

하긴 인간이 소유 없이 살 수 없지만 그래도 예술가들이기에 이런 불가능에 무소유(비물질) 운동에 도전한 것이다. 플럭서스가 포퍼먼스(온몸으로 그리는 그림)를 중시한 것은 그것으로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파괴하는 등 오히려 손해만 볼뿐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런 고정된 사고를 파괴하는 와중에 창조가 나온 것이다. 그런 파괴행위의 반복 중에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것이 바로 인터넷이었다.

<본문08> 한편 백남준은  신음악/구음악 비교하기 시작하다

이것은 일종의 무음악 / 신체 음악 / 전자음악 상통한다> 아래 두 사진을 보면 신음악과 구 음악이 구분이 된다.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의 차이다

<본문09> 여기서 끼여들기 <컬렉터> 여기서부터는 백남준 마이너스 이야기

하나, 백남준은 법정스님과 다른, 그보다 차원이 더 높은 무소유 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무소유 주의자는 재산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옆사람에 나눠주는 사람이 무소유주의자다. 

백남준의 최고 재산은 정보와 지식이다. 이것을 인류에게 공짜로 나눠주기 위해 인터넷을 만들고 아낌없이 그의 재산을 인류에게 선물하려고 했다. 그런 면에서 무소유 주의자이다. 그가 무소유주 의자가 된 것은 바로 동서남북 온 인류가 전쟁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백남준이 1970년에 발표한 <비디오 코뮌>이 바로 그런 주제가 담긴 작품이다. 코뮌이란 공존하는 인류의 평화공동체를 말한다.

둘, [무소유란 뭔가?] 인간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기게 전혀 무소유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무소유의 개념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좁은 의미보다는 많은 재산을 가져도 무소유로 살 수 있는 넓은 의미도 있다. 즉 자신의 재산을 주변에 없는 사람에 조금이라도 나눠주는 사람은 무소유로 사는 것이다. 소유라는 것이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면 진정한 무소유주의다 소유가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소유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인간은 원래 완벽할 수 없다. 부족하다. 인간은 연악한 갈대와 같아 소유를 많이 하면 더 소유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여간 인간이라는 존재가 소유의 노예살이(종노릇) 하면 진정한 인간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소유를 지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다스릴 수 있어야 진정 인간이 된다. 우주 속에 위대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본문10> 백남준은 왜 카라얀을 경멸했나?

일방적 권위적 예술의 독재 혹은 카리스마와
쌍방적 예술의 민주화 인간화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백남준이 원하는 새로운 음악 노이네 뮤직의 참모습이었다 모든 관객이 완벽한 몰입과 참여와 그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철저하게 인터랙티브 하지 않은가 

백남준은 카라얀처럼 틀에 박힌 폼 잡는 음악을 정말 싫어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부셔버릴까 하다가 '노이에 뮤직(Neue Musik: 신음악) 즉 '신체 음악(body music)'을 발명한 것이다. 백남준도 음악 전공자로 프로급이다.

<본문11> <신음악과 구음악의 차이> [The difference of the old music and new music] 구 음악과 신음악 차이는 조성 음악(유음악)과 무조음악(무음악 a-music)의 차이다. -카라얀은 너무 지겹고 마리아 칼라스 너무 시끄러워 -백남준 

신음악은 무 음악이다. 무음악은 기존 음악을 무(력)화시키다 악기가 아니라 몸으로 연주하다 수탉 소리 등 포함한 소리와 소음(noise -> image)을 시각화하다. 

<본문12> 백남준이 심취했던 '무음악' 혹은 신음악에도 그 족보 혹은 계보가 있다.

1 쇤베르크의 <무조성(Atonal)>, 2 존 케이지의 <무 작곡(A-composition)>, 3 백남준의 <무음악(A-music)>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런데 주역의 음표를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 백남준은 그 대신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업그레이드시켜 기존의 음악을 무화시키는 무음악(a-music)을 시도하다 무음악은 또한 악기 대신 몸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일종의 신음악이다. 이런던 '무음악'에도 그 계보가 있다. 음가의 민주화를 시도하며 '12음 법'을 만든 쇤베르크의 '무조성'과 때로는 연주를 아예 하지 않지 않고 관객의 소음을 중시하는(첫 전시 참여TV) 존 케이지의 '무 작곡'이 그것이다==================

<본문13> 새로운 예술의 출현을 위해서 1963년 첫 전시를 다지기 위해서

뉴욕 1964년 이후 

백남준의 '무음악'은 악기 대신 몸으로 연주하는 형식이다. '해프닝 아트'의 성격이 강한 이 음악은 '액션 음악'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런 음악은 매사 심각한 독일인에게 충격과 웃음을 동시에 줬다.

 백남준이 그들을 매료시켰던 건, 자신이 동양인임에도 서구인보다 더욱 서구 예술과 철학의 본질을 꿰뚫어 봤고 폭넓은 인문학적 지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리라.

광기 어린 그의 '액션 아트'는 '비디오 아트'로 연장된다.

<본문14> <무음악(A-Music) 총정리>

<무음악 1> 백남준이 말하는 무음악(A-Music) 그것을 통신에 비유하면 바로 무선통신과 같다. 이 세계는 선불교의 세계다 무아의 세계다 원효가 말하는 화쟁 즉 나는 무고 너는 유라는 생각(나는 틀리고 너는 맞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쌍방형 소통이 가능해진다 거기에서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보들레르 시인이 말한 "죽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은 무이다(Everything is nothing except the death)" 바로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무념무상도 마찬가지다

<무음악 2> 백남준의 '무음악', 악기 없는 음악 악기 대신 몸으로 연주하는 형식.

물론 성악이 그렇지만 그것과도 다른 점은 역시 전자 TV가 들어간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그에게 TV가 악기이기 때문이다 백남준에게 음악은 샬럿 무어먼이 거의 옷을 다 벗고 물통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할 때 나오는 소리가 음악이다. 존 케이지의 영향이다.

<무음악 3> 예술이란 장자의 말처럼 쓸모없는 것의 쓸모이다. 백남준의 무음악(A-Music) 혹은 무예술도 마찬가지다.

장자의 시를 보자 " (쓸모 때문에) 산의 나무는 스스로를 해치고, 등불의 기름은/세상 사람들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쓸모'만 알고 '쓸모없는 것의 쓸모'는 모른다"
 그래서<쓸모없는 것의 쓸모(장자의 무용지용)>라고 말하지 않았나.

예술은 무목적(for nothing)인 것이다. 칸트의 말에 의하면 '무목적적인 합목적성'인 것이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쓸모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남준 실리가 있는 예술가 였다 백남준은 평생 쓸모없는 퍼포먼스를 시도 때도 없이 즐겼다 그러나 그런 행위 음악을 통해서 그는 인터넷이라는 대단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장자는 이미 오래전에 그 진실을 알았다.

<무음악 4> 자연은 노자 말대로 무위자연이 좋고, 음악은 무음악(a-music)이 좋고, 행위는 무상행(無相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좋고, 소유는 무소유가 좋고, 지성은 무지 성이 좋다. 무지 성이란 지성의 無化로 이 단계가 되어야 예술이 된다. 그런데 백남준은 예술마저 무예술(zero-art)이다. 

백남준은 장 폴 파르지에(프랑스 백남준 전문가) 말대로 마이너스 예술(-art)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말대로 마이너스 1000 예술(-1000 art)이다.

<무음악 5> 음악의 확장 백남준은 1958년 존 케이지가 음악의 범위를 확장해서 침묵과 소음을 현대음악의 범주에 집어넣은 것도 그렇지만 그가 주역을 보고 작곡을 하는 것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는다.

<본문15> 김형순: " 침묵도 소음도 포함되는 확장된 음악인 가요?

김홍희(인터뷰): 우리의 맥박, 호흡이 다 음악의 소스가 되는 비트 음악이죠. 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음악, 그러다 보니 신체의 리듬부터 자동 소리, 기침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다 음악의 범주에 포함시킨 거죠. 미리 작곡하여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에 도전하다 작곡을 하는 방식, 존 케이지는 주역에 나오는 우연성, 비결정성 요소를 도입해 작곡을 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됐죠. 말하자면 동양정신에 빠진 서구인 철학자에게 서양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이 반대로 큰 영향을 받은 거예요.

"아무리 정적이라도 들리지 않는 소리의 전파가 있고, 아무리 침묵이라도 나의 호흡소리 있는 거잖아요. 침묵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침묵 음악이 된 거죠. 이런 음악 철학은 결국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죠.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이른바 행위 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 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 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 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

<본문16> [1964년 뉴욕 건너가  좋은 파트너를 만나다. 샬럿 무어먼] 줄리아드

<백남준 무음악 파트너 3가지 조건> 31살에 만남 29살 파트너

그래서 줄리아드 출신 샬럿과 행위 음악을 했는데 당시에 그의 파트너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했다. 첫째 고전음악의 달인 최고의 음악가 둘째 최고의 미인 셋째는 완벽하게 누드가 되어 연주할 수 있다는 조건인데 샬럿이 이 3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고 마침내 그 조건을 수락했다 아래와 같은 연주는 음악의 독재다 인터랙티브가 전혀 없는 것이다.

<본문17> 1964년 뉴욕으로 건너가면서 샬럿 무어먼과 함께 이 공연을 다시 재현. 1964년 뉴욕 전위 아트 축제(New York Avant-Garde Festival in 1964)에 선보이다. 독일 칼 하인츠 슈톡하우젠이 작곡하고 아방가르드 음악가들이 참여한 해프닝 오르기날레의 1964년 공연 Charlotte Moorman at New York Avant-garde Festival in 1964 
www.youtube.com/watch?v=WuTGMata9Lc&fbclid=IwAR0qRMJIrgb54Vh91DO4sZbq5MpuOpLUnVnP6jGFk0HP_EYCQspxIPxWYbg

<이 공연 뉴욕타임스기사화> 1964년 뉴욕에서 샬럿 무어먼과 백남준이 주도해 연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대한 뉴욕 타임스 기사(New York Avant-Garde Festival in 1964) Avant‐Garde Music. Festival Opens Aug. 31, 1964 [Credit] The New York

<본문18>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 1964-1974 10년 후 모습

1974년 백남준 샬럿 무어먼 TV 첼로 쾰른

https://www.youtube.com/watch?v=SZrplvA4fPE&t=39s 

본문 2부 비빔밤에 대해서( 총체적 일원론) 서양의 이원론 답이 없다. 동양의 일원론 태극기 음은 양이고 양은 음이다. 좌는 우고 우는 좌다. 예화 몸

<본문II 01> 백남준 비빔밥 아트 영어(?) 시너지 아트. 

그래서 서양에서는 백남준을 비빔밥이라는 말보다 '시너지(Synergy) 예술가라고 표현한다. 두 개의 요소를 다 살리면서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백남준 비빔밥 시너지 아트.

<본문II 01> 비빔밥과 비슷한 말: 1) 예술과 기술의 융합(융복합), 2. 통섭(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서로 도와주는 것) 3. 총체적(integral) 멀티미디어 인터미디어 다 비빔밥
4 원융 합일(원효) 시너지(둘이 합쳐 더 큰 힘) 비빔밥은 비빔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이 나눠먹는 것 즉 고유(share)의 철학이 중요하다. 공생(co-existence)

<본문II 01> 1993년 대전 엑스포 출품작. 백남준 4년 후 1997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이를 완성품으로 만들다.

가마와 트럭 비빔밥 그리고

그리고 서양 비너스(뮤즈)에 한복 입히고 색동으로 분위기 연출하다. 거기에 TV(전자로봇)가 빠질 수 없다. 

<본문II 01> TV 부처: 동양과 서양의 비빔밥(원활한 소통), 살가운 새로운 세상/

TV 정원: 자연과 문명의 비빔밥(원활한 소통), 살가운 새로운 환경/

TV 침대: 남자와 여자의 비빔밥(원활한 소통), 살가운 새로운 사랑

백남준 비빔밥이라는 플러스 미학을 살가운 마이너스 무소유 미학으로 나누다/비빔밥과 유사어 : 융(복) 합, 통섭, 원융 합일, 유무론, 인터미디어, 인터넷, 조응(Correspondence), 오감의 총체적 미학,

<본문II 01>  서양의 '유무 대립'과 동양의 '음양 상보' 일본은 동양이지만 동양이 아니다
<본문II 01> , 비빔밥 남녀가 사랑하려면 서로의 삶과 살과 비벼야 하잖아요. (사르트르 몸과 살 이야기)동서가 공존하려면 서로의 문화를 비벼야 한다. 이원론의 극복을 말하기도 하죠. 3차 세계대전을 막아야 한다는 메시지죠. 20세기는 미국과 러시아의 냉전시대와 21세기는 중국과 미국의 동서대립 시대=한반도 남북평화협정을 맺어야 

<본문II 01> 프랑스 미술평론가 백남준 오마주 글. 백남준은 문화의 좋은 날씨와 나쁜 날씨에 개의치 않고 맛있는 비빔밥을 만드는 예술가다.

<본문II 01> 시에서 악의 미학(evil art)을 창시한 보들레르와 미술에서 언짢은 날 것의 반예술(bad art)을 창시한 뒤샹은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 백남준은 보들레르의 상징시와 뒤샹의 오브제 아트를 비빔밥을 만들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백남준을 비빔밥이라는 말보다 '시너지(Synergy) 예술가라고 표현한다. 두 개의 요소를 다 살리면서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아래 서울관 뒤샹 전 사진

<본문II 01> 시에서 악의 미학(evil art)을 창시한 보들레르와 미술에서 언짢은 날 것의 반예술(bad art)을 창시한 뒤샹은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 백남준은 보들레르의 상징시와 뒤샹의 오브제아트를 비빔밥을 만들었다.

<본문II 01> <비빔밥 인터뷰>

하나 <백남준 플러스 미학에서 제로 미학으로 결국 마이너스 미학으로 이민>

http://egloos.zum.com/seulsong/v/3731829?fbclid=IwAR2ud5GnHqyiEUC0ejJD6Z5fgpZOYOgI9NxOaxv00NPNZagHKPZKySe7iZA

=============<본문 백남준 컬렉터 01> [백남준&플럭서스] 마이너스 미학

플럭서스 정신은 철저하게 반자본주의 그림이나 조각을 고급 물건처럼 비싸게 팔 수가 있지만 팔 수 없는 예술을 위해서 의기투합하여 결성된 예술 단체가 바로 플럭서스, 결론으로 "돈을 안 벌기 위해서 하는 예술운동" 반예술 반자본 반권 위를 내세운 것이다.

하긴 인간이 소유 없이 살 수 없지만 그래도 예술가들이기에 이런 불가능에 무소유(비물질) 운동에 도전한 것이다. 플럭서스가 포퍼먼스(온몸으로 그리는 그림)를 중시한 것은 그것으로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파괴하는 등 오히려 손해만 볼뿐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런 고정된 사고를 파괴하는 와중에 창조가 나온 것이다. 그런 파괴행위의 반복 중에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것이 바로 인터넷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으로 가장 돈을 안 벌려고 하는데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분야가 바로 또한 예술이다. 예술의 위대한 역설을 바로 비실용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결론으로는 가장 실용적인 것이 된다는 점이다.

장자가 말하는 "무용한 것이 유용한 것이다" '무용지용'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칸트가 말하는 무목적적 합 목적성이다. 모든 것을 목적 없이 하는 게 결국 그것이 목적을 성취한 것이 되는 것이다.

<본문 백남준 컬렉터 02> 이어령 전문화부 장관의 백남준 증언,  "뭘 남기려고 해" (이어령 교수의 증언) 그는 세속을 초월한 도통한 사람. "내 작품 다 없어져도 상관없어. 내 정신만 잘 기리면 되는 거야". 무소유적 발상인가. 그러나 관객이나 애호가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죠 백남준은 모든 면에서 특별하다

"내 작품 다 없어져도 상관없어. 내 정신만 잘 기리면 되는 거야" 
www.youtube.com/watch?v=iDP2ClhUdFk

백남준 컬렉션이 어려운 점은 그의 작품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고, 사르트르의 '무의 실존'과 장자의 '무용지용' 때문] [백남준 기념관 발대식 헬로 백남준 2016.7.20 Hello Nam June Paik Nam June Paik Memorial House


"-1000%로 만족하고 살아라" -백남준.
백남준과 이어령 전문화부 장관이 밤새 이야기 중 백남준 말 중 핵심은 "뭘 남기려고 해".
" "몽골에는 아무것도 없어 문명을 남긴다는 게 오히려 부끄럽지" 

백남준 작품 소장자는 그의 작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으로 느끼면 된다. 그걸 팔아서 이득을 얻겠다고 생각하면 그는 백남준 작품 소장자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백남준 작품은 천년 이상 소장자에게 좋은 아이디어와 착상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자부심을 선물로 줄 것이다. 30년 100년 지나면 정말 최고가가 될 수도 있다. 

이어령 선생은 말하기를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야릇한 것이라고 했는데 인간 백남준을 마무리하는 짧은 글을 쓰는 일이 너무나 힘들다 도무지 그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나는 2 달간 유령처럼 헤매고 있다

백남준은 이어령에게 몽골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백남준 왈 몽골은 아무것도 없잖아. 에펠탑도 없고 피라미드도 없고 다만 1000년 전 바람이 지금도 지금도 몽골에 불고 있잖아. 그러면서 백남준이 이어령에게 뭔가를 그려주었는데 그 사인펜 그림을 금방 지워지는 것이었다고. 왜 이런 사인펜으로 그린 것을 주냐고 반문하자. 백남준 이어령에게 내가 그려준 이 그림을 팔려고, 그거 지워져도 상관없어.'

“예술은 사유재산이 아니다” -백남준. 백남준 뉴욕 마지막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백남준 작품 소장자는 이 말을.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이우환이나 김환기하고는 다르다.

<본문 백남전 컬렉터 01> 여러분이 백남준 작품을 소장할 때, 그것을 회화나 조각처럼 재산(돈)이나 물질로 보면 곤란하다. 백남준 작품을 소유한다는 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백남준의 독창적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다.

사업가에게는 사업 아이템을 얻는 것이고, 작가에게는 독창적 발상을 얻는 것이다. 백남준 왈 "예술을 짧고 인생은 길다". 백남준은 자신의 작품이 잘 보전되는 것보다 작품 속에 숨겨진 철학과 개념과 아이디어가 오래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백남준 소장자가 되려면 최고 수준의 미술애호(수집) 가가 되어야 한다.

<아래> 백남준 뉴욕 거의 마지막 포퍼먼스. 그는 포퍼먼스를 해야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새로 얻는 특징이 있다. 말년에도 포퍼먼스를 하는 이유.

결론 세계 평화 인류 공존 70년 '비디오 코뮌(Commune)'

<결론 01> 원융 합일(원효) 시너지(둘이 합쳐 더 큰 힘) 비빔밥은 비빔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이 나눠먹는 것 즉 고유(share)의 철학이 중요하다. 공생(co-existence)

<결론 02> 한 발자국 물러나기 // 한국인의 활약과 활력을 기대한다" - 1999년 2월 18일 백남준. 어쨌든 백남준은 1999년 말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에게 과제를 주다."그러면 왜 우리 단군은 이스라엘의 모세처럼 세계적 거물이 못되었느냐? 삼국사기가 구약성서에 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민족의 유리 표방을 거치지 않고 그래도 안정된 중견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개개인으로 볼 때, 우리는 유대인만큼 문화나 과학에서 세계사에 기여하지 못했다. 21~30세기 한국인의 과제는 여기에 있다" <세계평화>

<결론 03> 동남아시아 포함) 남북 함께 하는 K-문명 : K-팝, K-드라마, K-방역, K-푸드 [K-문명] 바닥을 치고 쇠퇴하는 구미 문명의 대안. "코리아는 동방의 등불". -타고르.  한국은 일본처럼 다른 나라를 쳐들어간 적이 거의 없다.

<결론 04> 전쟁은 왜 발생하나? 안 통할 때. 소통은 그런 면에서 평화다. 반전주의자 백남준이 소통을 중시하는 이유다. 전쟁은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디지털 시대에 전쟁이 나면 인류 종말이 올 수도 있다. 인터넷이 그나마 전쟁을 막아주고 있다....

<결론 05> 남녀가 결혼을 할 때 서로 알아야(살아온 환경 그의 취향과 가치관 등등)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정보와 지식을 통해 동서가 서로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결론 06> 이제는 서양에게 문명을 맡기지 말고 동양이 세계 평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데 기여해야 한다. 서양에게 문명을 맡겼더니 20세기 2번이나 끔찍한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세계 문명을 어마어마한 폭력으로 이끌어 실패하다.

<결론 07> 서양의 '유무 대립'과 동양의 '음양 상보' 일본은 동양이나 동양 아니다.

<결론 08> 일곱, 파시즘=폭력화, (국가) 공산사회주의=폭력화, 독일은 예외지만 신자유주의(금융자본)=폭력화, 여기서 대안은 뭔가? 우리도 IMF 때 우리 경제는 그렇게 취약하지 않았지만 한국이 너무 나대니 서구 금융자본주의 세력이 한국경제를 비웃듯 경제적 폭력과 강간을 가했다. 우리는 당시 세계 경제의 속성과 정세를 제대로 몰라 무방비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결국 우리나라 전체 재산의 반이 날아갔다. -인류학자 박정진

<결론 09> 사람이 정말 사람이 되려면 사랑이 되어야 한다. ㅁ네모(hardware)가 아니라 동구라미(software) 원형이 들어가야. 그래야 사랑이 된다. 모진 것 <사각형(불통)>을 없애고 관대하게 둥글게 <동구라미 원형(소통)> 포용<소통과 불통>